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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그녀가 없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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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25, 2017 23:34에 작성됨.

마치 아무것도 없는 한겨울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듯한 차디찬 알람이 울린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손가락을 초속 1밀리미터로 움직여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폰의 알람을 끈다. 손가락이 움직인 속도보다 더 느린 속도로 이불에서 일어나, 아직도 꿈 속이면 좋겠다는 아이같은 꿈을 꾸며 휴대폰에 약하게 비치는 시각을 쳐다본다. 여섯시 반. 길게 한숨을 쉬고는 뇌에서 내려온 강제적인 명령을 거부하는 몸의 호르몬 수용체를 늘려 조금이라도 움직이게 해본다. 천천히 움직이는 몸.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몸에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출근 전 샤워와 정장 착용을 마무리하고 호모 카이샤피엔스*의 소양인 이른 출근을 위해 평소와 같이 스파 드링크를 마시고는 잠이 깨지 않은, 혹은 잠에서 깨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볼을 몇 번 때린다. 자신의 감각, 감성, 이성, 그리고 호흡마저 빼앗겨버린 기분. 영영 사라져버린 그녀처럼 그것들은 아예 돌아오지 않는걸까.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지는 핸드백을 끌다시피 들고 방을 나와 언제나처럼 호모 카이샤피엔스들이 꽉꽉 들어찬 노면 전차에 몸을 싣는다. 삶은 이렇게 자신의 몸뚱아리를 이끌고 계속된 불행을 맛보다 죽는 것. 그렇기에 가끔의 행운은 마치 아름다운 여신에게 선물받은 넥타르처럼 너무나 달아 삶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 마치 그녀가 소리없는 행복처럼 천천히 다가왔던 그 날 처럼.
 
 
공항에는 언제나처럼 사람이 많았다. 아니, 그것은 여느 때보다 사람이 많았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것도 그럴게, 이치노세 박사라고 불리는, 천재성에서는 일본 최고라던 열어덟의 미소녀가 갑자기 모든 흥미를 잃고 귀국을 결정했으니 기자가 모여들 만 했다.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름 이치노세 박사라고 한 인물에 조금 흥미가 있어 기자들이 잔뜩 몰려있는 입국장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기다리자 입국장의 문이 열리고, 고양이 상을 한 미소녀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국장으로 나서고, 특종 기삿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기자들이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유명인의 삶이라는 것도 꽤나 귀찮은 거로군. 이 상황에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듯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입국장보다는 다소 한산한 출국장으로 향한다. 비행기는 한 시간 후에 이륙. 여유로운 상황을 만끽하며 출국장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카라멜 마키아토를 한 잔 사 빨대를 입으로 옮긴다. 달달한 맛이 천천히 몸 속으로 퍼지려는 찰나, 바로 옆에서 발랄한 소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화들짝 놀라며 눈을 뜬다. 이건 꿈인가. 아니, 아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 다만 지금보다는 조금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이었을 뿐. 천천히 눈을 들어 주변을 살핀다. 사람이 빠져나갔는지 조금은 한산한, 하지만 그래도 꽤나 사람이 낑겨있는 노면 전차 안의 모습이 보인다. 눈을 돌려 역 이름을 쳐다본다. 꽤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는데 그런 지도 않은지, 출발한 집 앞의 역에서 세 정거장 거리에 있는 작은 역이다. 남은 역은 일곱 개. 중간에 한 번 환승을 해야하긴 했지만, 환승해야 하는 역도 다섯 개 뒤라 아직은 회상할 시간이 있다. 안도감을 느낀 그 순간, 인간의 극에 달한 부조리함을 느끼며 씁쓸한 표정을 짓는다. 분명히 잊겠다고, 분명히 잊어버려야 한다고 다짐한 기억이건만. 핸드백을 잡은 손을 꽉 잡고 짧게 한숨을 내쉰다. 어차피 이 정도의 한숨은 출근하는 사람들의 한숨 소리에 섞여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이 정도는 괜찮아, 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발랄한 소녀는 특이한 웃음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들고 있다. 저거 독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너무나도 순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표정에 달리 취할 방도는 없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알 수 없는 혼합물, 아니 화합물이었던가, 어쨌든 그녀같은 미지의 유체의 맛을 음미한다. 그녀의 합성물을 때려부은 목구멍이 따끔거리다가 이내 가라앉는다. 생각했던 약효가 나오지 않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조금 설교를 해 본다. 그녀가 난감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몇 마디 말을 건넨다. 그녀가 활짝 웃으며 달라붙는다. 행복한 나날, 이란 것이 되겠지.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은 종류의 것.
 
 
천천히 눈을 뜨고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사람이 조금 더 줄어 있다. 현재의 상황을 천천히 눈대중으로 확인해본다. 환승해야 할 역이 반 정거장 정도 남아있는 철길의 위. 전차가 역에 도착하길 잠시 기다려 행선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외로이 발걸음을 옮겨 회사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이제 남은 역은 두 정거장. 뭔가를 회상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지하철은 너무나 빨라 사람에게 회상할 시간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 조금 무리를 해볼까, 어느 입에서 나온 소리가 몸과 뇌를 옥죄듯이 감싸고 돈다. 그래, 조금은 무리를 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늦지 않을테고.
 
 
어느 날에 소녀는 실종을 당했다. 항상 있는 일인 것처럼 보이는 주례행사(週例行事)였다. 차이점은, 이번에는 그녀의 의지로 실종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 나중에 알아본 결과로는 그녀의 천재적인 재능을 썩히는 것이 안타까웠던 부모가 조금 난폭한 짓을 한 것이었...던 것 같다. 어디까지나 사장님께로부터 들은 말이라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당사자들과 얘기할 수 없던 상황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포기의 댓가로 약간의 퇴직금과 다른 회사로의 추천서가 손에 들어왔다. 그리고 누구에게서 왔는지 알아볼 수 없는 편지가 한 장. 일반인의 뇌로는 전혀 풀 수 없는, 나스카의 평야 위에 새겨진 그림들처럼 중구난방으로 여러가지 문자가 쓰여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이것을 쓰고 보낸 것은 그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행복한 시간의 막을 닫았다.
 
 
귓가에 잔잔히 들리는 역의 이름에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내릴 준비를 한다. 역의 이름은 츠이게키역.(終戟驛). 넥타르를 마시던 행복한 시간들은 지나갔다는 느낌의 역이다. 아무리 노력해봐야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처럼, 항상 싸고도는 불행을 아직도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으로 끌어안는다. 불행을 껴안다보면 행복이 올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일단은 껴안는다. 일단은 잊지 않아본다. 일단은 새로운 하루를 맞이해본다.
 
 
-그녀가 없는 거리에서.
 
 
 
 
후기
 
소설을 쓰느라 진이 다 빠져버려서 추가적인 느낌의 후기는 쓰지 않겠습니다.
이치노세 시키 창작글입니다. 부디 즐겨주시길.
 
*호모 카이샤피엔스 -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에 회사(会社)를 합성한 신조어.
회사에 살다시피 사는 일본인을 지칭하며 미국 등지에서 만들어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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