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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리] P「5년 후의 이오리.」 이오리「뭐? 혼자 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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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9, 2012 20:43에 작성됨.




붕 뜨듯 의식이 각성한다.
반쯤 깨어난 채로 몸을 뒤틀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온 몸을 꽁꽁 감싼 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들이 내쉬었다. 달착지근한 냄새가 났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난 자연스럽게 다시금 잠의 세계로 깊게 빠져들기 위해 준비를 갖추었다.

“......음? 몇 시지?”

그렇지만 이미 한 번 깬 잠은 저 멀리 도망간 상태였다. 피로는 말끔히 풀린 상태였다. 충분한 수면을 취한 뇌는 몸에게 각성을 촉구했다. 야, 나 다 쉬었어. 이제 일어나지?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 말이야. 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져서, 하는 수 없이 이불에서 얼굴을 빼꼼 내민 뒤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10시...... 열...... 10시!? 왜 안 깨워 준거야!?”

시계를 보고 흐릿한 정신으로 멍하니 되뇐 다음, 흡사 찬물을 끼얹은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이불을 박차고 벌떡 앉았다. 이미 출근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나간 상태였다. 명백한 지각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이렇게 되기 전에 아내가 잠을 깨워줬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 옆을 보자 그 자리가 비어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나간 것 같았다. 날 깨우지도 않고,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우다니 대체......

“아.”

약 1분간 가량이나 우왕좌왕 거리다가 오늘 휴가를 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알람을 미리 맞춰두지 않았던 것이며, 휴가니까 당연히 아내도 잠을 깨우지 않고 푹 자게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겨우 냉정해진 난 혼자 멋쩍게 쓴웃음 지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나참...... 쉬는 날도 착각을 하다니...... 이래서야 워커홀릭이라고 놀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오늘은 금요일. 주말까지 3일간 아내랑 느긋하게 보내기 위해 월차를 냈다는 사실도 까먹고 일 생각만을 한 것이다. 최근 마치게 된 행사 때문인지 내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아내도 걱정하길래 다시 원래 페이스로 돌아가기 위해 일부러 휴가까지 신청했건만 결국 아침에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여 버렸다. 아내보다 자신이 늦게 일어난 게 오히려 감사 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고 있는데 문득 코를 킁킁거려보니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특히 강하게 나는 이 향은......

“오, 된장국이네.”

그와 동시에 급격하게 밀려오는 허기. 이미 완전히 깨어난 위는 음식물을 넣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시계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이미 아침시간은 한참 넘긴 시간. 난 배고픔을 느끼며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과 연결된 부엌에는 한 여성이 서 있었다. 길고 찰랑찰랑한 머릿결을 하나로 묶고 앞머리는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희고 넓은 이마가 인상적인 얼굴에다 이목구비는 작지만 뚜렷하여 마치 가련한 소녀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보다 월등히 커진 키와 성숙해진 몸매는 앞치마에 의해 도드라져 귀여운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살짝 미소를 머금고 프라이팬에 무엇인가를 볶는 모습은 절로 훈훈한 미소를 짓게 했다.그녀의 이름은 미나세 이오리. 내 아내였다.

“어머, 일어났네. 조금 있다 깨울 생각이었는데.”

방문을 열고 나온 날 알아채고, 이오리가 인사했다. 나는 장난스럽게 씩 웃으며 가볍게 한쪽 손을 들고 말했다.

"좋은 아침이야, 슈퍼~ 아이돌 이오리."
"뭐어? 그만해! 이제 와서 그게 무슨 말이야?”
"미안, 미안."

역시 이오리는 반응이 좋아서 장난치는 보람이 있다. 매일같이 똑같은 장난을 치는데도 예상되는 반응을 보여준다. 끓는점이 낮은 이오리를 놀리는 것이 오래전부터 이어온 내 취미였다. 
옛날에야 눈치가 없어 화를 냈다고 하지만, 사귄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적절한 수위의 장난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사자인 이오리는 그게 마땅찮은 것 같았지만 장난은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되고 있었다. 이게 다 네 탓이라고, 이오리. 귀여우니까 어쩔 수 없잖아.

“헛소리 하지 말고, 빨리 앉아. 밥 다 됐어.”
“네이, 네이.”
“대답은 한 번만.”

한심스럽다는 듯 눈으로 날 흘겨본 이오리도 맞은편에 앉았다. 작게 식전인사를 마친 우리는 조용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었다. 오물오물 음식을 먹는 이오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예쁜 사람이 내 아내라는 게 가끔 실감이 되지 않아서 난 가끔 이렇게 이오리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게 되었다. 이미 결혼생활은 1년이 넘었음에도, 가끔 그런 감각을 받는 것이다.

‘하긴, 톱 아이돌이 아내라니 실감이 안 날만은 하나. 아직도 은퇴취소하면 바로 복귀할 수 있고.’

이오리는 일 년 전, 18세의 나이로 아이돌에서 은퇴했다. 당시 그녀는 톱 아이돌이었고, 인기의 최절정에 있었다. 그걸 전부 버리고 이오리는 나와 결혼하기 위해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이었다. 일본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던 톱 아이돌 미나세 이오리의 은퇴선언 & 결혼발표에 일본 연예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야말로 온갖 소문이 다 나서 말도 안 되는 루머까지 퍼질 지경이었다. 그걸 진정시키느라 765프로의 동료들이 고생했었지... 정작 이오리 본인은 소문 따위 신경 쓸 것 없다며 시원스럽게 있었지만.

“잠깐, 여보 뭘 그렇게 보는 거야? 밥도 안 먹고.”
“응?”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오리는 젓가락을 멈춘 채 날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오리에 말에 난 대답을 못하고 몇 초간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말했다.

"아, 아...... 오늘 된장국 맛있다 그런 생각을 했어. 내 취향의 맛이네."
"니히히, 그치? 평소보다 노력해서 끓였으니까."
"응. 고마워, 이오리."

아이돌을 은퇴한 이오리는 곧바로 나와 결혼했다. 지금 되새겨 생각해보니, 엄청 서두른 결혼이었다. 주변인이나, 가족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오리는 속전속결로 밀어붙였다. 아니, ‘이오리는’이 아니라 이오리만 그랬다. 난 중간에 껴서 이오리를 달래고 중재해주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어른답게 원만하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자 했던 일이지만, 이제와서 되돌아보니 난 그저 표류자가 아니었을까. 이오리라는 폭풍에 휘말려 흔들흔들 떠내려가다 결혼이라는 구명줄을 잡게 된 표류자.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웃음이 났다. 휘몰아치는 듯한 이오리의 태도를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이마를 번쩍이며 당당하게 휘몰아치는 이오리.... 프흡.

“......여보 역시 이상해. 아까부터 왜 실실 웃어?”
“아니, 딴 생각을 조금......”
“식사할 땐 식사에만 집중해.”
“......네.”

혼났다. 이오리는 식사 예절에는 엄격하다. 조금만 예의 없는 행동을 해도 바로 지적이 들어온다. 언제나 반항하지 못하는 난 그냥 조용히 식사를 계속하기로 했다.
그 뒤 우리는 음식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내가 설거지를 맡았다. 싱크대에 서서 그릇을 씻는 동안 이오리는 둘이서 마실 커피를 준비하고 있었다. 입맛이 고급인 이오리가 바득바득 우겨서 산 커피포트에서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마지막 그릇을 개수대에 올려두고 나는 손을 앞치마에 슥슥 문지른 뒤 그걸 벗고 벽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이오리가 탄 커피를 마시러 식탁으로 향했다. 이미 호로록 조그만 입을 모아 커피를 마시던 이오리는 컵을 입에 댄 채 눈으로 날 흘겨보았다. 또 지적할 사항이 있는 건가. 난 몸을 움츠리며 의자에 앉았다. 이오리가 잔소리할 땐 고개를 숙이는 게 훨씬 편해지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이오리는 컵을 내려놓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내게 말했다.

“여보.”
“넵.”
“장난은 그만 두라고...... 휴, 어쨌든, 내가 젖은 손 앞치마에 닦지 말라고 했잖아?”
“에이, 그 정도야......”
“문제라구! 나중에 빨래할 때 냄새난단 말야! 위생도 안 좋고! 손은 깨끗이 닦은 다음 수건으로 닦아!”

므키잇! 거리며 잔소리를 퍼붓는 이오리를 보며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꺼냈다.

“네이, 네이. 이오링 화내지마. 예쁜 얼굴이 찌그러졌잖아.”
“이오링이라고 하지 마! 거기다 뭐?! 찌그러져?! 그게 지금 아내한테 할 소리야?!”
“미안 미안 슈퍼 미소녀 아이돌 이오링~”
“하지 말랬지!”

해소되지 않는 짜증에 식탁을 톡톡톡톡 두드리는 이오리. 얼굴을 찡그려도, 역시 이 녀석은 귀엽다.

“알았어, 알았어. 고칠게. 그보다 오늘 어디 가지 않을래? 모처럼 맘 편한 휴일이니.”
“은근슬쩍 넘기긴...... 뭐, 좋아. 당일여행이라면 난 좋으니까.”
“오케이, 우리 예쁜 마눌님은 말이 잘 통해서 좋다니깐.”
“......예쁜 마눌님은 또 뭐람.”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돌려 눈을 피하고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이오리는 정말 귀엽다고 생각한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그렇구나...... 그럼, 바다가 좋아. 바다 가보고 싶어.”

이오리는 미리 생각해둔 곳이라도 있는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조금 의아했다.

“바다? 겨울이 다 됐는데 바다라니? 헤엄도 못 치는데.”
“그런 건 알고 있어 바보! 그냥 겨울바다를 보고 싶은 것 뿐이라구!”

알았으니까 일일이 소리치지 좀 마. 나는 살짝 귀를 막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커피를 다 마신 우리는 느긋하게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오늘은 평일, 거기다 낮이니 외곽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을 것이다. 자가용을 끌고 나갈 생각이므로 준비는 천천히 해도 좋았다. 간단하게 몸단장을 하고 캐주얼한 옷을 껴입고 난 먼저 밖으로 나갔다. 초겨울이지만 아직 따뜻했기에 가을 옷을 그대로 입어도 좋았다. 차고에서 차를 꺼내고 난 이오리를 기다렸다. 이윽고 현관이 열리고 이오리가 나왔다. 안에는 면티를 덧입고 따뜻해 보이는 긴 롱니트티에다 까만 레깅스라는 움직이기 편한 복장이었다. 흰색 파란색이 섞인 니트를 제외한 나머지는 검은색 일색이라 수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 했던가, 이오리가 입으니 화보 촬영을 나온 패션모델같았다. 남편 입장에서는 매력을 좀 더 숨겼으면 좋겠지만 그래도 역시 귀여우니 별다른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이오리에게 말했다.

“오늘은 가볍게 입었네.”
“응. 딱히 사람 많은 곳을 가려는 건 아니니깐.”
“그래도 이뻐.”
“......변태.”

그렇게 말하며 고갤 돌리고 꼬물꼬물 움직이는 건 반칙이란 생각이 듭니다만, 이오리 씨. 나는 차에 타고 시동을 거는 내내 이오리의 옷에 대해 칭찬했다. 하지만 이미 아내력이 충만했던 이오리는 이윽고 칭찬에 질려버린 듯하다. 심드렁하게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시끄러, 변태. 출발이나 하라구.”
“......아, 예.”

변함없이 마님과 머슴 포지션이군. 난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한가로운 도로를 지나고 있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차 안에는 라디오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리는 그걸 들으며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오리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이오리가 툭 말을 꺼냈다.

“최근에 갑자기 칭찬이 많아지지 않았어?”
“어? 뭐?”

라디오 사연을 듣느라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나는 이오리의 말을 놓쳤다. 이오리는 고개를 돌려 앞을 보고 의자에 누워 몸을 묻었다. 그리고 니트 속으로 목을 집어넣은 다음 눈만을 빼꼼 내밀었다. 사이드 미러를 보는 척 하며 난 그런 이오리를 바라보았다. 이젠 제법 어른스러워진 이오리였지만, 그런 깜찍한 행동을 할 때마다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아 귀여웠다. 이오리는 니트 속에서 입을 웅얼거리며 말했다.

“요새, 나보고 이쁘다느니 칭찬하고 있잖아.”
“아, 그래? 난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는데.”
“확실하게 많아졌어. 매일 보는 나는 알 수 있다구.”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무서운데. 매일 열심히 관찰하고 있다는 거려나.”
“당연하지, 아내니까.”

이오리는 그렇게 말하며 흥 콧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이오리님은 심기가 불편하신가보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최고다.
내가 말을 멈추고 운전에 집중하자 이오리는 말할 타이밍을 놓친 듯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하고 이오리는 팔걸이에 팔을 대고 턱을 괸 뒤 다시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또 다시 시작된 침묵. 하지만 1분도 못가 다시 이오리가 말했다.

“......뭔가 켕기는 거라도 있는 걸까나.”
“......뭐어.”
“잠깐, 거기서 우물쭈물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나중에 말해줄게.”

켕기는 거라. 뭐 굳이 말한다면 그럴 것이다. 아직 이오리에게 말해주고 싶진 않았다. 내 자신도 마음이 정리가 안 되었으므로. 이오리는 불만족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안하고 아까 자세 그대로 돌아가 바깥 풍경에만 열중했다. 중요한 부분에선 믿어주는 게 이오리의 장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더욱더 싱숭생숭하다. 바보 같지만 감정은 그런 것이다.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이리저리 떠도는 것이다. 중심점도 잡지 못한 우유부단한 마음을 이오리에게 부딪힐 수는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운전에 집중했다.
한동안 우리는 히터바람을 쐬며 조용히 목적지를 향하고 있었다. 도쿄 근처는 이미 오래전에 개발되어 쓸 만한 해안가는 없었지만, 대신 해양공원이 많이 있었다. 우리의 목적은 겨울바다의 경치였으므로 꼭 해안가가 아니라도 좋았다. 지도상에 표시된 여러 해양공원 중 하나를 택한 우리는 곧 목적지에 거의 다 오게 되었다. 차는 조그만 상점가를 지나쳐가고 있었다.
그 때 이오리가 갑자기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보, 저기 좀 봐.”
“응?”

이오리가 가리키는 손끝에는 조그마한 빵가게가 보였다. 브랜드가 붙어있는 가게는 아니고 그냥 개인이 운영하는 빵집인 것 같았다. 정감 있는 인테리어였지만 딱히 특기할만한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이오리에게 질문했다.

“저기? 저 빵가게가 뭔데?”
“얼마 전에 TV에서 봤어.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빵을 팔고 있다나 뭐라나.”
“헤에~”

그런 이유였구나. 나는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오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저기 한 번 들러보자. 그 빵 구경해보고 싶어.”
“오케이~ 그럼 저기서 점심을 사볼까.”
“응.”

이오리님이 하신 말씀에 나는 곧바로 차를 가게 앞 갓길에 대었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이오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곧 따라 들어가자 가게 안에서 따뜻하고 구수한 빵냄새가 났다. 갓 구운 빵냄새에 식욕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오븐에서 막 빵들을 내오던 부드러운 인상의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고 인사했다. 이 가게의 주인이신 것 같았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저기, 여기 특제 고로케 파는 곳 맞죠? TV에서 봤어요.”

이오리는 거침없이 카운터로 달려가 사장님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씨익이라는 의태어가 어울리는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그럼, 우리 가게가 그걸로 유명하지. 아가씨 안목이 높구만.”
“니히힛, 그렇죠? 밖에서 바로 보고 찾아왔어요.”
“하하하. 이거 영광인걸. 이렇게 인기 많은 아가씨가 내 빵을 알아봐주다니 말이야.”

빵을 내려놓고 시원스레 웃는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 우리는 살짝 당황했다. 하긴 톱 아이돌이었던 미나세 이오리를 못 알아보는 사람이 더 드물었다. 은퇴한지 1년이 넘긴 했지만, 아직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힐 단계는 아닌 것이다.

“어, 할아버지. 제가 누군지 아세요?”
“알지 알지~ 이름은 잊어먹었지만 손주놈이 좋아해서 얼굴이 익었지. 유명한 아이? 돌? 이라나 뭐라나. 아무튼 손님은 환영이야. 그래, 어느 빵으로 할텐가?”

할아버지의 자연스런 권유에 정신을 차린 우리는 허겁지겁 빵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와 이오리는 특제 고로케 두 개와 기타 여러 가지 빵을 바구니에 담고 카운터에 올려두었다. 할아버지는 계산을 하면서 갓 구운 고로케 두 개를 비닐봉지에 더 담아주었다.

“자, 특별서비스. 옆의 애인이랑 맛있게 먹어.”
“저기, 이러실 필요는......”
“괜찮아~ 유명인이 친히 내 가게까지 와줬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빵은 많으니깐. 이 늙은이의 성의니까 많이 먹어.”
“아, 네, 감사합니다.”

포장을 마친 비닐봉지를 들고 우리는 멋쩍게 웃었다. 이미 은퇴한 이오리에게 싸인을 요청하거나 동네사람들이 몰릴까 걱정을 했지만, 주인할아버지는 별다른 언급 없이 그저 웃으며 빵을 나눠주기만 한 것이다.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동시에 할아버지에게 괜한 신경을 쓰게 만든 게 아닌가 괜시리 죄송스러워졌다. 팬에게 데인 게 많지만, 과민한 반응을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와 이오리는 값을 치르고 인사를 했다. 막 가게를 나서려 할 때, 뒤에서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그 총각이랑 결혼하려고 은퇴한겐가?”
“......네?”
“다정해보여서 부럽구만. 허허허.”

할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었다. 이오리는 부끄러워졌는지 “......정말.”하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오리를 대신해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웃으면서 한 쪽 눈을 찡긋거리고 내게 말했다.

“젊은이, 저런 여자는 세상 천지에 드물어. 꽉 붙잡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혼한걸요.”
“허허, 그 정도면 됐어. 앞으로도 좋게좋게 살아가.”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려그려. 조심히 가.”

나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차로 돌아가니 이오리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 뭐라고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다. 내가 운전석에 들어가 앉자, 이오리는 바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할아버지도 날 알고 있었으면 빨리빨리 말해달란말야. 안 들킨 줄 알고 괜히 좋아했잖아.”
“하하, 뭐 어때. 모른 척 해주셨으니 됐잖아.”
“그렇게 속 편한 소리가 아니라구. 거기다 뭐야, 다정하다느니 어쩌니...... 뭔 할아버지가 저러냐고. 노망난 거 아냐? 짜증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툴툴거리는 이오리는 귀여웠다. 살짝 놀려주기로 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근데 저 분, 신도우 씨랑 비슷하다. 그치.”
“......뭐.”
“신도우 씨도 저렇게 웃어주곤 했지~”
“......”

신도우 씨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아까 했던 말과 연결 지으면 신도우 씨도 같이 욕하게 되는 상황이 된 이오리는 그냥 침묵했다. 꽤나 정신이 없는지 자길 놀리는 지도 모르는 듯 했다. 모순에 빠져 안절부절 못하는 이오리가 참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

차는 잠깐을 더 달렸고, 이윽고 해양공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차를 주차장에 대고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약간 부는 것만 빼면 날씨는 변함없이 따뜻했다. 겨울하늘답게 얇은 구름이 가득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겨울에만 볼 수 있는 정취일 것이다. 여유가 생겨 느긋해진 나는 그런 생각을 품으며 천천히 걸었다. 이오리도 마음에 들었는지 웃는 얼굴을 하며 내 옆에 붙어 있었다.

“바람이 조금 부네.”
“니히힛, 시원한 바람이야. 그치만 조금 춥긴 하네.”
“그러게 바다를 왜 오자 그랬냐. 내가 말했었잖아.”
“뭐 상관없잖아. 봐봐, 저기 앉자.”

이오리가 바다가 정면으로 보이는 허름한 벤치를 가리켰다. 우리는 그 벤치를 향해 걸어갔다. 벤치에는 모래가 살짝 앉아 있었다. 나는 이오리가 앉기 전에 그 모래를 살짝 털어주었다.

“고마워.”
“뭘.”

이오리는 팔짱을 풀고 대신 내 손을 잡았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바다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너무 심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세기의 바닷바람이 비린내를 몰고 흘러오고 있었다. 머나먼 수평선을 보자 벅차오르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시야에는 짙은 푸른색이 가득했다. 쏴아쏴아 울리는 파도소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주었다. 

“경치 예쁘다.”
“응.”

이오리도 마찬가지로 바다구경에 여념 없었는지 짧게 대답했다. 나는 시선을 바다에서 떼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면 우리 바다 본지도 꽤 오래됐구나.”
“응.”
“2년 전이 마지막이었나?”
“발리 갔다 온 거?”
“응.”
“니히히, 그러고보니 그렇네. 역시 이 이오리님의 선택이 정확했다는 걸까.”
“겨울이란 점은 좀 그렇지만.”
“뭐야~”
“농담이야 농담.”

우리는 손을 꼭 붙잡은 채 잡담을 즐겼다.
그런 잡담도 몇 분이 지나자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우리는 다시 아무 말 없이 겨울바다를 구경했다. 손에서 이오리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작고 부드러운 손의 감촉을 느껴온지도 어느 새 1년이 넘었다니, 새삼 감개무량했다. 처음 만났을 땐 그저 드셀 뿐인 여자애였는데, 어느새 이렇게 커져버린 걸까.

(당신이 오늘부터 프로듀서라고? 뭐, 잘 부탁해-)

나는 고개를 돌려 이오리의 옆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이오리의 여러 얼굴을 봐 왔었지만 최근엔 놀랄 정도로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가 많았다. 평소에는 천진난만한 옛날의 이오리 그대로 였지만, 역시 지금 보니 이오리는 훌쩍 커버렸다. 건방진 태도를 달래며, 레슨을 같이하고, 어느 새 이렇게 결혼도 하고......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근 5년 동안 이오리를 계속 지켜봐 온 결과였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이오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 시선을 느낀 이오리도 나를 마주 봤다. 약간 아래에 있는 이오리의 시선이 치켜 올라왔다. 눈으로 조용히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거짓말.”

작고 가냘픈 말투였다. 이오리는 다시 바다를 바라 보았다. 약간 힘이 빠진 듯, 처연한 표정이었다.

“최근에,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

그것이 사실이라, 대답할 순 없었다.

“역시, 아니라고 말 안하네? 뭐, 알고 있었지만.”
“그냥. 대답할 타이밍이 아니었을 뿐이야.”
“무슨 타이밍?”
“그건......”

나는 말문을 흐렸다. 이오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계속해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부부지, 여보?”
“응.”
“그렇다면 고민 같은 건, 전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난 그게 부부라고 배웠어.”
“......”
“아니면, 내게 말하지 못할 고민이야?”
“그건 아냐.”
“그럼 뭔데?”
“......말하기 조금 창피한데.”
“뭐야, 변태. 이제와서 창피하고 말고가 어디있어? 자, 이 슈퍼- 미소녀 이오리에게 상담해보라구.”

이오리는 평소와 같이 떠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눈은 쳐져 있어 지금 이오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슬퍼하고 있는 이오리를 보자 난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고 생각했다. 뭐 하고 있는 건지.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아내를 저버리고 혼자 고민하는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난 그동안 내가 생각해온 고민을 천천히, 두서없이 이오리에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말하기 창피한 내용이지만, 난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었어.”
“......뭐?”
“찬란하게 빛나는 이오리를 동경했고, 내 손 안에 넣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를 낼 수 없었지. 1년 약간 더 전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스스로의 노력으로, 동료의 힘을 빌어 당당하게 정상에 선 탑 아이돌. 그것이 미나세 이오리였다.

“하지만 넌 내게 와 주었어. 언제나처럼 당당하게, 날 사랑한다고 말해줬지.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접어버리고 결혼까지 해버렸고.”
“......”

하지만 그런 이오리가 내 곁으로 왔다. 남몰래 동경하던 내겐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처음엔 기뻐했고, 나중엔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오리랑 어울리는 남자인가, 그렇게 생각했어. 난 돈도 없고, 특별히 뛰어난 점도 없고, 뭐, 프로듀서 일은 꽤 잘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말이지. 이오리가 사랑하는만큼 나는 보답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의 나날이었어.”

요 1년 동안 일에 매진하고, 집에 돌아오면 이오리가 맞이해주는 생활을 겪으며 그 생각은 더 강해져갔다. 이대로 10년 뒤, 20년 뒤까지 이오리와 같이 있을 수 있을까? 둘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정말 이뤄낼 수 있을까? 이오리가 헤어지자고 말하진 않을까? 내가 돈이 없어서 실망하지는 않을까? 이오리와 결혼한 지 1년, 난 그런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혼자 자격지심을 느끼고, 괜히 이오리한테 잘 해주고. 내가 생각해도 바보같다고 생각했어. 말도 못 꺼내고 끙끙 앓고 있었지. 하하, 이렇게 정리해보니 엄청 바보네.”
“그래, 바보야.”
“어?”

이오리는 내 손을 놓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빙글 돌아 검지를 쭉 펴고 내 코끝에 닿을 듯 찔렀다.

“이 바보! 바보 남편! 평소부터 변태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바보인 줄 생각도 못했어! 이 바보야! 바보멍청이말미잘!!!”
“이, 이오리?!”
“뭐가 ‘어울릴 수 있는 남자’인거야! 내가 그런 한심한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웃기지 마!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언제나 헤실헤실 웃고만 있고, 행동은 바지런하지 못하고! 가난뱅이고! 옷도 지저분한 것만 입고! 더럽고! 집도 좁고 차도 좁다고! 그런 거 따윈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구!”
“어이.”

그렇게까지 말하냐. 하지만 격앙된 이오리의 표정을 보고 나는 몸을 움츠렸다. 이오리는 양 손을 허리에 얹고 계속해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네가 부자인지 아닌지 상관없어! 좁은 집도! 좁은 차도 신경쓰지 않아! 언제나 나를 위해 웃고! 나를 위해 위험을 무릅써주고! 무심한 듯 전부 챙겨주고! 성실하게 돈을 모으는 그런 네가 좋아서 결혼한 거야! 내가 그런 것 따윌 생각해서 널 사랑했는줄 알아?! 웃기지 말라고!”

그렇게 쏟아내 듯 외치고 이오리는 숨을 골랐다.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는 게 무서웠다.

“그러니까 지나친 생각은 말란 말야. 난 널 사랑하고 있고, 너도 날 사랑하고 있다고. 그거면 충분하잖아, 이 바보 남편. 바보변태멍청아!”
“......”

그렇게 말하고 이오리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을 참고 있었다. 나는 생각할 틈 따위 없이 일어나, 이오리를 껴안았다.

“미안해. 난 바보멍청이야.”
“......정말 그래.”

울음을 참느라 훌쩍대는 이오리. 나는 이오리를 꽉 껴안은 채 다시 말했다.

“이오리.”
“......응.”
“나랑 쭉 함께 있어 줄래?”
“......그러니까 물어볼 필요 없다니까.”

이오리는 울음을 멈추고, 툴툴대듯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이오리에게서 몸을 떼고 눈을 맞추었다. 눈물이 고여 빨개진 얼굴과 우울한 표정. 나는 눈을 맞추고 이오리에게 말했다.

“사랑해, 이오리.”
“......나도, 사랑하고 있어.”

그러니까 쭉 함께 있어줘, 라고 이오리는 말했다.
나는 그저 웃으며 다시 이오리를 껴안을 뿐이었다.

-

“으아, 꽤 추워졌네.”
“정말이야, 이제 슬슬 돌아가자, 바보.”
“아직도 그렇게 부르냐.”
“시끄러.”

당분간 꼭 껴안고 있던 우리들은 밤이 되어 찾아온 한기에 몸을 떨며 차 안으로 돌아왔다. 로맨스를 즐기기에 초겨울 날씨는 어울리지 않았나보다. 이오리는 아직도 불만이라는 듯이 예전처럼 나를 바보라고 부르고 있었다. 나의 허무한 저항은, 뿔난 이오리님 상태에는 먹히지 않았다.

“정말, 궁상맞은 것도 정도가 있지, 돈이 없다고 마누라에게 상냥하게 대하는 남편이 어디있담.”
“......미안해. 미안하니깐 그만해 좀.”
“흥이다. 한 1년을 계속 놀릴거라구. 궁상바보변태.”
“늘었어?!”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저녁시간이라 다소 막혔지만, 그래도 올 때랑 거의 차이가 없는 시간으로 도착했다.

“잘못했어~ 내 고로케도 줄 테니까 용서해주라. 슈퍼 미소녀 이오리님~”
“......살 찌는데.”
“괜찮아! 난 조금은 더 쪄도 좋다고 생각해!”
“나보고 살이 찌라는 거야? 이 변태가!”
“왜 결론이 그렇게 되는 건데?!”

티격태격 다투며 우리는 우리의 조그마한 맨션으로 돌아왔다. 작은 집이지만, 이오리는 신나서 팔랑팔랑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뒤따라갔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해줄게.” 
“됐고 쉬어. 당신, 모처럼의 휴일이니까.”
“그럼 같이 하자. 그럼 괜찮지?”
“정말, 어쩔 수가 없네.”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두고 마루로 올라서는 이오리. 나는 현관에 서서 웃으며 말했다.

“이오리.”
“응?”
“다녀왔어.”
“......어서와.”

그렇게 말하고 웃는 이오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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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이오리가 참 귀엽습니다. 으헝헝 이오링 최고!

이 팬픽은 모 SS 창고에 있는 ㅇ년 후의 이오리 시리즈를 보고 쓴 겁니다. 이오리와 결혼생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게 뭐야! 왜 이렇게 못 썼어! 이렇게 된 바에는 내가 직접 쓴다! 그래야 이오리P답지! 라는 생각으로 쓴겁니다(?) 뭐래. 아무튼 잘 봐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나저나 요새 슬럼프가 와서 고민입니다... 다른 것도 써야하는데 지지부진 ㅠㅠ 이거 겨우 써서 올립니다. 즐겁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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