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타치바나 아리스 [어른스러운 아이]

댓글: 8 / 조회: 646 / 추천: 3


관련링크


본문 - 11-17, 2016 21:50에 작성됨.

“프로듀서, 프로듀서... 프로듀서!”

노곤한 머리 틈으로 스며드는 작은 어린아이의 외침. 금이 가는 유리벽을 깨듯, 소녀의 가는 목소리가 뇌리를 일깨운다. 조금씩 깨어나는 감각. 어둠이 가득하던 동굴 안에 빛이 든다. 오감은 서서히 정신을 차린다. 흔들리는 진동, 작지만 골조가 좋은 감촉이 내 팔을 잡아 흔든다. 거세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감각이 전해진다.

풀어져 있던 안면 근육에 힘을 주고,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밝은 형광등이 쉬고 있던 안구를 찔러 따갑다. 칠흑이던 시야에는 색색의 빛들이 반사되고, 면전에 보이는 앙증맞은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 입술을 열어 멍하니 각인된 소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아리스...”

“타치바나입니다, 일어나세요.”

또렷한 목소리에 서린 냉랭한 음색. 의심할 것도 없이 방금까지 나를 부르던 소녀의 목소리였다. 아리스는 작은 핀잔을 던지고 붙잡던 옷을 놔주었다. 엉덩이가 아프다. 값싼 쿠션에 오랫동안 앉아 있었더니 꽤나 저려온다.

손을 떼고 몇 걸음 떨어진 소녀는 양손을 허리에 짚었다.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선 새침함이 돋보인다. 난...

“잠들었었나...”

“그래요. 라이브가 끝날 때까지도 잠들어 계셨어요. 제대로 정신을 차리시는 편이 좋지 않아요?”

냉정하다. 무대에서 보여주던 미소와 사랑스럽게 생긴 외견과는 달리 소녀가 내게 보여주는 어조는 차가웠다. 딱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익숙하기도 했고, 이해하기도 했다. 소녀의 성숙함은 성숙하지 못한 아이와 일하면서 벌어지는 걱정을 덜게 해주었다.

새침하게 핀잔을 준 아리스가 입고 있던 것은 화려한 붉은 색의 옷. 딸기 같은 밝은 홍조가 여기저기 물든 아리따운 드레스. 프릴이 달린 케이프와 그 위를 수놓은 빨간 다이아들, 마치 붉은 나라의 귀족 아가씨처럼, 소녀의 의상은 눈이 부시다.

아리스가 흥미를 잃고 대기실의 구석으로 향한다. 난 잠을 깰 겸 잠시 손으로 눈가를 눌렀다. 아직도 감겨버릴 것 같은 눈이 무겁다. 몸의 비명과는 달리 이성은 각성의 마음가짐을 굳혔다. 크게 나오려는 하품을 최대한 억누르며 눈가에 굳어진 눈곱을 떼어내고 가볍게 허공에 털어냈다.

한창 라이브를 하느라 시끄럽던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리스의 말대로 이미 라이브는 전부 끝난 걸까. 그럼...

“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차고 일어난 내 소리에 놀랐는지 느긋하게 빨간 케이프를 벗던 아리스가 흠칫 놀라 내 쪽을 바라본다. 동그랗게 놀란 눈동자는 곧 지긋이 감기고, 노려보는 기색을 품는다. 소녀의 눈가에도 작은 눈곱이 보인다. 떼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뭔가요.”

“그, 뒤, 뒷정리...!”

“이미 끝냈습니다. 저희는 저희의 정리만 하고 돌아가면 되요.”

“... 그런...”

“치히로씨가 도와주셨어요. 오늘은 딱히 대관이 없으니 나가고 싶을 때 나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명료하고도 깔끔한 설명이었다. 아리스는 똑 부러지게 설명을 마치고 금세 내게서 고개를 돌린다. 허탈함이 몰아쳐서 다시금 소파위에 털썩 소리가 나게 주저앉고 말았다. 주변을 휘감는 감정은 자책. 라이브 중의 피드백이나 보고를 위한 체크리스트를 하나도 적지 못했다.

한숨이 나온다.

고개를 떨어뜨리자 양복바지의 허벅지 쪽이 우겨져 있었다. 옷차림도 엉망이고... 참 거칠게도 잔 모양이었다. 양복을 펴기 위해 손을 내밀자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놓여 있었다.

대기실 한 편에 마련된 탈의실. 그냥 적당히 커튼으로 가려둔 탈의실 안에서 사르륵, 천이 살과 맞닿아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옷을 갈아입는 걸까. 시계를 보니 예정된 종료 시간과 동떨어진 때였다. 여태까지 앉아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잠들어 있었다.

또 달리 자괴감을 일으키는 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피로였다. 나름 몸을 풀기위해 어깨를 움직여본다. 삐걱거리는 느낌, 이게 사람의 몸이 맞기는 한 걸까 의심되는 뻐근함이 느껴진다.

몸을 풀어도 쑤신다. 이 짧은 시간이 개운해질 리도 없으니, 흐트러진 양복을 펴기로 마음먹었다.

허벅지 위에 놓인 기다란 머리칼. 의문이 들어 들어보니 검은 갈색의 윤기 도는 실. 나도 모르게 들어 살피다가, 옷을 갈아입고 있는 아리스의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아무리 봐도 아리스의 머리칼인데, 어째서 내 허벅지 위에 올라가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별일 아니겠지. 적당히 털어 던지고 매무새를 다듬었다.

 

곧 탈의실에서 나온 아리스는 평소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겨울에 대비해 목에 두른 체크무늬의 목도리. 소파에 놓여있던 사이드 백을 든 소녀는 대기실을 뒤적이던 나를 불러 세운다.

“어서 가죠. 시간이 늦었어요.”

몇 번을 둘러봤지만, 확실히 더는 할 것이 없었다. 소녀의 말대로 그냥 가방을 싸서 나가면 그만이었다. 아리스의 가방 지퍼가 조금 열려 있었지만, 무어라 말하면 혼이라도 날 것 같았다.

한껏 뿜어지는 경멸의 시선. 무어라 더 말할까. 고개만 끄덕이고 뚜벅뚜벅 나서는 아리스의 뒤를 따랐다.

 

쌀쌀한 날씨에 맞춰 날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아리스는 말없이 걸음을 옮긴다. 역시 화가 난 걸까. 평소보다 쌀쌀맞은 기색이 심하다. 역시 실망한 걸까. 라이브조차 보지 않고 잠들어버린 프로듀서라니, 확실히 한심하긴 하다. 무어라 해야 할까 단어를 골라보지만,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저, 타치바나...”

“자신의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도 프로듀서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내 부름을 끊고, 소녀는 대뜸 이야기한다.

“최근 프로듀서의 일, 너무 과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자신이 잠든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이어진 말을 듣고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아주 희미하지만 걱정이 담긴 목소리와 말뜻이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 점점 사라져간다. 차들이 지나드는 길목으로 접어든다.

갑작스레 소녀는 몸을 돌렸다. 목도리 안으로 집어넣은 턱 위로 눈동자는 내 얼굴을 향한다. 묘한 눈빛, 달빛과 건물의 네온사인에 반사된 광채가 흐릿한 빛을 담아 나를 올려다본다.

작은 손이 열려있던 사이드 백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적어도 자신의 생일 정도는 잊지 말아주세요.”

하트 모양의 상자. 대뜸 내밀어진 귀여운 상자에 놀라 아리스와 눈을 마주친다.

내가 생일이었나, 생각해보니 길게 생각 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잠시 잊고 있었다. 어제 밤만 해도 생일을 기념하며 일을 했던 기억. 축하를 받기에도 모자란 시간 때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건만.

“받아주세요. 성의니까요.”

내미는 두 손. 차가운 말투와는 달리, 양손으로 잡은 예의바른 자세로 내게 선물을 건넨다. 받을 수밖에 없겠지.

“고마워, 아리스.”

“...”

상자를 받자마자, 소녀는 고개를 돌린다. 무심한 듯, 그저 사무적인 느낌으로 시선을 외면한다.

“전 부모님이 오신다고 하셔서, 먼저 가볼게요.”

“아, 응.”

멋지게 돈 아리스가 꾸벅 인사를 하고, 천천히 달려 사라진다.

이번 생일도 그냥 지나칠 줄 알았건만, 썩 특별한 일이 생겼다. 실수한 건 부끄럽지만... 그렇게 나쁜 아이는 아니라는 걸까. 작은 상자를 흔들어보니 가벼운 천따위가 부딪히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집에 가서 열어볼까...

 

 

 

 

 

...............

 

[어른스럽고 귀여운 아이]

 

아리스는 기뻤다.

요 근래 했던 라이브 중에 가장 화려하고, 자신이 낼 수 있는 능력의 최선을 다한 무대였다. 소녀의 마음속에 희열이 가득 찼다. 비록 앞에 서면 솔직하지 못하게 매일 차가운 말이 나왔지만, 프로듀서가 무대에 대해 칭찬해줄 때면 기분이 벅차올랐다.


‘오늘은... 칭찬을 듣겠지.’

설렜다. 팬들의 환호성도 좋았지만, 소녀에게 가장 기대되는 것은 그의 반응이었다. 오늘 입은 의상이 꽤나 마음에 들기도 했고, 자신의 귀여운 모습을 그의 앞에 직접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대기실로 뛰어 들어온 아리스는 의외의 상황과 맞닥뜨렸다.

곤히 잠든 프로듀서의 모습, 불편해보이는 자세. 책임감 없게 잠든 그의 모습이 한심할 법도 했지만, 아리스의 마음에서 먼저 떠오른 것은 걱정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이 무대를 위해 뛰어다녔는지는 아리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가끔씩 차에서 졸던 때도 있었고, 사무실에서도 키보드에 머리를 박고 자서 워드프로세서에 의미 없는 글자로 100페이지를 채운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리스는 그에게 야박한 소리를 해댔다. 진심이 아니었기에 스스로를 바늘로 찌르는 아픔을 느꼈고, 조금은 솔직해지자며 매일같이 다짐하기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그의 생일. 치히로에게 집요하게 물어보며 알아낸 생일을 아리스는 똑똑히 기억했다. 오늘은 정말로... 정말로 조금은 솔직해지자. 솔직하게 고맙다는 한마디라도 하자. 그렇게 다짐, 했건만.

“...”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잠든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연민이 일었다. 소녀는 급한 심장을 진정시키고 그가 앉아 있는 소파로 조심조심 걸었다.

깨울까 생각도 했지만, 곧 접었다. 이 잠시간의 시간이나마 그를 쉬게 해주고 싶었다. 생일이니까, 이정도의 사치는 괜찮을 거야. 아무리 어른이라고 해도... 힘들테니까. 소녀는 하늘거리는 옷을 잘 접고 그의 옆에 앉았다. 잠든 탓에 알진 못하겠지만, 아리스의 심장은 빠르게 떨려 왔다. 희미한 아저씨같은 냄새. 거칠지만 요근래 친숙해져, 오히려 마음이 안정되는 신기한 냄새.

소녀는 더욱 고개를 가까이 대본다. 짙어지는 그의 체취. 양복 너머로 느껴지는 희미한 냄새를 맡다가, 소녀는 그의 탄탄한 허벅지를 목격했다.

... 조금은 괜찮겠지. 곤히 숙면중인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몇 번 손을 휘저어본다. 깨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아리스는 굳게 마음을 먹고 조심조심, 그의 허벅지에 안착한다.

꽤 괜찮은 느낌. 단단하지만 기분 좋게 눌리는 허벅지의 감촉이 썩 괜찮았다.

땀을 흘린 무대 의상을 갈아입을까 생각도 했지만, 아리스는 곧 지워냈다. 보여주고 싶었다. 제대로 의상을 입은 모습. 지쳐 잠든 사람이 기획해주고, 만들어주고, 입게해준 의상을 똑바로 보여주고 싶었다. 언제 일어날까. 아리스는 고민하면서도 스르르 감기는 눈을 막아내기 힘들었다.

 

물론 중간에 난입한 스태프 덕분에 아리스는 통, 튀어올라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그리고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해달라 하고, 스태프를 끌고 나가 사정을 들었다. 뒷정리와 처리. 깨우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이라도 일을 덜어주고 싶었다. 아리스는 끄응,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치히로에게 전화했다.

부끄럽지만 전부 털어놓았다. 있는 그대로 그를 쉬게 해주고 싶다는 것까지. 이정도가 최선이라는 것을 아리스도 알았기에 그정도로 양보했고, 치히로도 쿡쿡거리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그가 잠든 사이에 일들은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

아리스는 미리 집에 전화를 해 부모님께 이야기도 해두었다.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말. 기다려주면 안되겠냐는 부탁. 잠시 오늘 생일인 프로듀서와 시간을 보내겠다 했고, 부모님도 부드럽게 허락해주었다.

프로듀서가 할 일은 이제 없었다. 작은 뿌듯함을 안고, 아리스는 다시금 그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그의 꾸벅대는 얼굴을 감상했다.

“... 선물은 어떤 게 좋아요?”

들릴 듯 말 듯, 조용한 속삭임. 당연히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생일이 다가오기 일주일 전부터 생각했던 것들을 간추린다. 상자는 준비했고... 소녀는 역시 하나 밖에 없다는 결심을 품었다.

쑥스럽긴 하지만... 좋아해주겠지.

잠시 이 시간이 길어지길 바라며, 소녀는 그와 함께 꾸벅꾸벅 졸았다. 

3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