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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즈 담당 프로듀서는 죽을 만큼 후회했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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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7, 2016 02:42에 작성됨.

원작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 - 반다이 남코 엔터테인먼트/ A-1 Pictures

11월 25일.

프로듀서는 시장 거리를 걸으면서 상점을 훑어보았다. 건어물 가게, 생선 가게, 통조림 전문 가게, 가끔 음식점……. 건물 라인 하나에 여러 점포가 나란히 늘어서 손님을 맞는다. 평일이건만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프로듀서는 장바구니를 들고 인파를 이리저리 피하면서 쇼핑을 하고 있었다.

지금 프로듀서가 걷고 있는 시장 거리는 프로듀서가 사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프로듀서는 차를 챙겨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도 프로듀서는 마치 집 앞 골목길을 지나는 것처럼 익숙한 발걸음으로 인파를 요리조리 해쳤다. 초행에선 나올 수 없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선. 전에도 이곳에 몇 번 왔다.

이곳은 프로듀서가 먼 길을 올 만한 매리트가 있다. 보통 쇼핑은 집 근처 마트나 슈퍼마켓을 이용해도 되고, 아니면 온라인 샵을 이용하면 된다. 요즘 시대에 웬만한 물건은 멀리 나가지 않아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마트나 슈퍼마켓, 그리고 온라인 샵에서 구할 수 없는 것도 세상에는 존재한다. 이를테면 공식적인 판매가 종료되고 시장에도 풀린 수량이 많지 않은 초 레어 상품, 이를테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수제 물품, 또 이를테면……. 신선함.

프로듀서는 신선한 음식 재료를 찾아 이곳에 왔다. 물론 웬만한 신선한 재료는 마트와 슈퍼마켓에서 간단히 구할 수 있고, 온라인 샵도 수고를 들이면 신선한 물품을 판매하는 좋은 업자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프로듀서가 찾는 건 마트에도 없고 슈퍼마켓에도 없고 온라인 샵에도 없다.

그러므로 발품을 팔아 사오는 수밖에 없다.

프로듀서는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에 채소 가게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플라스틱 소쿠리에 담겨 진열된 상품이 프로듀서의 눈을 사로잡았다.

토마토가 선명하게 익은 빨간 피부를 뽐내며 프로듀서를 유혹한다. 프로듀서는 토마토를 사서 장바구니에 담았다.

토마토야 요즘 세상엔 제철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구할 수 있지만,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토마토를 눈앞에서 놓치는 건 아까웠기에.

그 밖에도 상점가를 지나면서 파스타 건면, 버섯, 마늘 등도 구매. 토마토도 샀겠다, 이왕 사는 김에 같이 사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챙기려던 장바구니가 예상보다 더 무거워졌다.

프로듀서의 다음 행선지는 향신 채소 가게. 오늘 쇼핑의 주요 목적지다. 프로듀서가 방문하자 가게 주인이 프로듀서를 반갑게 맞이한다.

“전에 부탁드린 거 들어왔나요?”
가게 주인이 박스 하나를 보여준다. 그 안에 프로듀서가 찾던 물건들이 있었다.

바로 일본에선 구하기 힘든 외국 향신 채소들. 그것들이 신선한 상태로 보존되어 들어있었다. 다른 곳에선 건조 상태나 분말 상태로만 구할 수 있는 마이너 향신 채소다.

프로듀서는 감사 인사와 함께 금액을 치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가게를 나왔다.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진 김에 주변 쇼핑을 더 할까? 프로듀서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따로 할 일도 없고, 가야 할 곳도 없다. 쉬는 날이니까.

누가 프로듀서에게 후타바 가의 압력과 346 사내의 알력 다툼이 걱정되지도 않느냐고 물어본다면, 프로듀서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연히 걱정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일 거다.

그런데,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는걸요.

프로듀서가 후타바 가의 안즈 부모와 만나기로 한 날은 아직 멀었고, 후타바 가에 관한 일을 처리해야 346 사내의 알력을 걷어찰 여유를 얻을 수 있으므로,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경우엔 초조함에 시달리기보다 마음에 여유를 갖는 게 훨씬 낫다. 초조해하면 초조해할수록 정신력이 소모되니까.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하면서 한쪽은 마이너스고 다른 한쪽은 플러스면 플러스를 고르는 게 당연하다.

물론 이러는 순간에도 프로듀서의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려 조금씩 움직인다. 불안의 씨앗이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면 마음의 양분을 앗아가기 마련이다.

프로듀서는 그걸 피하고자 휴일을 최대한 만끽하기로 정했다.
그러려고 했는데…….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진동한다. 전화가 왔다.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숨이 흐트러진 다급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프로듀서……. 도와줘……!

안즈의 목소리였다.

시간을 조금 당겨보자. 초점은 안즈에게 맞추고.

9월 이후로 안즈의 학교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아이돌 안즈와 일반인 반 아이들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져, 이제 누구든 장벽 너머로 힐끔힐끔 볼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초기엔 시끌시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즈를 배려하자는 움직임이 아이들 사이에 퍼져 안즈도 자연스럽게 반에 녹아들었다.

오늘도 모든 수업이 끝나 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둘씩 자리를 뜨는 와중에, 안즈는 아직 자리에 앉아 자연스럽게 아카네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아, 또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이번이…….”
“3번째입니다! 괜찮아요! 붙을 때까지 도전하면! 아이돌이 될 확률은 100%니까요!”
“태클 걸까 했지만, 네가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됐지.”
“긍정적인 마인드는 좋아요! 언제든 힘이 솟죠! 우오오! 지금도! 이렇게!”
아카네가 과장스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을 거칠게 긁어 듣기 거북한 소리가 흘렀다.

“으아, 죄송합니다!”
아카네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숙였다.
안즈는 그걸 보고 피식거렸다.

“오, 마침 둘이 같이 있네.”
가방을 든 아이들 몇 명이 안즈와 아카네에게 다가왔다. 무리 중 맨 앞에 있는 아이가 말한다.

“저기 있잖아. 둘 다 12월 초에 시간 있어?”
모임에 권유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12월 초라……. 크리스마스는 멀었는데 다른 기념일이 있나? 안즈가 품은 의문을, 맨 앞에 있는 아이가 뒤에 있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해소했다.

“얼마 안 있으면 이 녀석 생일이거든. 그래서 모여서 놀까 하는데.”
생일 파티. 그런 거라면 어느 날이든 이상할 거 없지.
“좋네요! 참가할게요!”
아카네가 흔쾌히 승낙. 안즈는 그걸 지켜보면서 머리를 굴렸다.

이걸 어떻게 한다……. 반 아이들과 거리감이 줄어들었지만 어울려 다닐 생각은 아직 없다. 기본적으로 안즈는 니트고, 아웃사이더고, 또 언제 일이 들어올지 모르는 아이돌이니까.

안즈는 아카네의 얼굴을 관찰했다. 아카네의 눈이 햇살을 가득 담기라도 했는지 빛나 보인다. 아카네가 친구 생일 파티를 기대하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하겠지.

“알았어, 나도 갈게. 근데 스케줄이 들어오면 못 갈지도 모르니까 너무 기대는 하지 마.”
그러자 뒤에 있는 아이의 얼굴이 활짝 핀다.

약속을 잡는 걸 끝으로 무리는 해산했다. 안즈는 아카네와 인사를 나누고 귀갓길에 올랐다.
바깥을 돌아다닐 때는 안경과 모자가 필수. 아이돌이 된 이후 바뀐 일상 중 하나.

안즈도 이젠 유명 아이돌이라서 어딜 나가거나 집으로 돌아갈 땐 꽤 번거롭다. 그래도 변장이 통했는지 체격이 작은 안즈가 교복을 입은 걸 신기하게 보는 사람은 있어도, 안즈를 알아본 사람은 여태까지 없었다.

아이돌이 되고 바뀐 점 하나를 더 뽑자면, 지금 걷는 길이 익숙해졌다는 것. 안즈는 아이돌이 되기 전에는 학교를 출석 일수만 맞춰 아슬아슬하게 다니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의무적으로 설렁설렁 다니는 거라서 등하교 풍경을 머리에 담은 적은 그다지 없었다.

길을 눈으로 훑지만, 눈으로 읽어 들인 정보를 딱히 의식해서 기억하진 않았다. 그래서 예전엔 등하굣길이 익숙하지 않았다.

안즈가 이 길을 익숙하게 여기게 된 건 아이돌이 되고 나서. 아이러니하게도 예전보다 여유가 줄어든 지금은 오히려 이 길을 의식해서 기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식은 곧 관심에서 나타나고, 관심은 곧 의욕에 이끌려온다.

아이돌이 되고, 학교생활을 의식하고, 친구에게 관심을 가진다. 지금 안즈의 학교생활은 이러하다.

물론 예전보다 성가시고 귀찮지만, 굳이 버리고 싶지 않은……. 그런 일상.

만약 누가 안즈의 일상을 빼앗아가려 하면…….
안즈는 그 사람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다.

슬슬 안즈네 맨션이 보인다. 그와 함께 맨션 앞에 주차된 트레일러 경트럭이 눈에 띈다. 처음엔 택배라도 왔나 싶었지만 트레일러에 코팅된 로고를 보니 그건 아니었다. 트레일러에는 이삿짐센터의 로고와 전화번호가 쓰여 있었다.

맨션에 누가 이사라도 오나? 안즈는 이 맨션의 주인이지만, 자기가 사는 방 말고 다른 곳은 신경 쓰지 않는다. 건물 관리를 맡은 사람은 따로 있으므로. 자기 말고 이 건물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몰라도 여기서 사는 데엔 지장이 없으니까.

평소처럼 입주민 카드를 긁고 정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는 층에 도착. 안즈는 그대로 자기 방으로 향하려고 했지만……. 순간 방 번호를 잘못 봤는지 자기 눈을 의심했다. 아니면 내릴 층을 착각했는지. 두어 번 다시 보니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문이 열려 있는 방은 안즈가 거주하는 방이 맞다.

안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식간에 발을 굴렀다. 복도에서 뛰는 건 금지지만, 그딴 거 알 바 아니다. 이 맨션은 안즈 것이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니까.

안 좋은 예감이 안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등에서 소름이 안개처럼 피어올라 온몸을 감싼다. 안즈는 문을 세게 젖히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집안은 평소보다 깨끗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살풍경해 보였다. 평소라면 (청소부를 부르지 않았을 경우)안즈가 벗은 옷과 과자 봉지 같은 게 굴러다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은 일절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 모를 종이 박스와 검은 비닐 봉투 몇 개가 거실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방 안에서 박스를 들고나와 거실에 쌓는다. 다른 몇 명은 쌓인 박스를 들고 거실을 나설 준비를 한다.

유니폼엔 맨션 앞 경트럭 트레일러에 코팅된 것과 같은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당신들 뭐야!”
안즈가 소리 지른다.

“어? 반장님, 여기 사람이 왔는데요?”
박스를 들고 거실에서 나오려던 인물이 박스를 포장하던 사람에게 물었다.
“무시해. 물건이나 그냥 나르라고. 작업 전에 이야기 들었잖아. 여기 혼자 산다고.”
그들은 자기들이 하던 작업에 다시 눈을 고정했다.

안즈는 나오려던 사람에게서 박스를 뺏었다. 다행히 안에 무거운 물건은 없었는지 안즈가 충분히 들 만했다.

“나가! 나가라고! 경찰 부른다?!”
안즈는 박스를 난폭하게 팽개친 후 주변에 굴러다니는 자재를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에게 던졌다.

“아야! 반장님! 얘 좀 봐요!”
“아 진짜, 난감하게…….”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술렁인다.

“그거 건들지 마! P.T가 들어있는 PS4란 말이야! 이젠 스토어에서 내려가서 다시 못 받는 거야!”
안즈가 난리를 피우자 마지못했는지 반장이라고 불린 사람이 안즈에게 다가왔다.

“이봐요, 아가씨. 우린 부탁 받고 온 사람들이에요.”
“부탁은 무슨! 여긴 내 집인데!”
“아가씨 부모님 말이에요! 아 진짜 답답하네. 자 봐요. 여기 의뢰서.”
반장이 핸드폰을 꺼내 안즈에게 보여준다. 사진 파일 몇 장. 서류 몇 장에 안즈가 잘 아는 필체와 도장이 찍혀있다.

안즈 부모의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을 안즈 부모가 일으킨 증거. 안즈의 이마에 핏줄이 드러났다. 머리에 피가 몰리고 압력이 상승한다. 온도가 상승. 열이 상승. 안즈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았다.

“여긴 내 명의로…….”
“저희가 계약했을 땐 그쪽 부모님 명의로 되어있었거든요?”
“윽……. 그럼…….”
안즈가 모르는 새에 안즈 부모가 명의를 바꿨나?!

“이 맨션도 팔아버릴 거라고 그래서 이사하는 중입니다. 목적지는 그쪽 본가고요! 아니, 무슨 놈의 집안이 이래? 진짜로 자기 딸한테 아무 말도 안 했나?”
반장이 씩씩거리며 신경질을 낸다.

안즈는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 맨션은 원래 안즈 명의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명의만 안즈 이름으로 되어있었지 안즈 부모가 안즈에게 사준 것이다. 집안일을 제외한 실질적인 관리(주민 입주 등)는 후타바 가에서 고용한 사람이 하고 있었고. 게다가 안즈는 미성년자. 명의를 자기들 쪽으로 돌리는 것 정도야 안즈 부모에겐 식은 죽 먹기겠지.

지금 상황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왜 일어났는지는 잘 이해된다. 여기까진 그물망처럼 사고 논리가 촘촘하게 짜였다. 문제는 그다음 가닥……. 다음 가닥이 볼품없이 흐트러져서 엮이질 않는다.

원인은 알겠다. 원인이 있으면 이제 결과가 있을 차례. 이 사태의 결과. 안즈네 집.

안즈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안즈는 머리가 새하얗게 물든 채로,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어떻게든 이삿짐센터 직원들을 밖으로 쫓아냈다. 어떻게 쫓아냈는지, 어떤 논리를 세워서 행동했는지 머리에 남아있지 않다. 단지 집안 이곳저곳에 찢어진 박스 조각이 안즈가 어떤 행동을 저질렀는지 간접적으로만 알려줄 뿐.

안즈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현관문에 기대어 미끄러졌다. 잠금장치란 잠금장치는 모조리 잠근 철제 문 너머로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린다.

-반장님, 그냥 나와도 됩니까?
-어쩔 수 없잖냐. 우리가 깡패도 아닌데 억지로 작업할 수도 없고. 일단 센터에 연락해보자.

안즈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핸드폰을 겨우 잡고 꺼낸다. 최대한 심호흡을 하면서 손가락이 떨리는 걸 억누른다. 핸드폰 화면에 주소록을 띄우고 전화 버튼을 터치.

착신음 몇 구절이 지나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안즈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지금 사정없이 요동치는 심장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말했다.

“프로듀서……. 도와줘……!”
전화 상대에게서 대답이 돌아온 건 약 3초 후.

-어디야?
“집…….”
-기다려, 당장 갈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가 끊겼다.

안즈는 숨을 골랐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릇대로 신발을 벗을 뻔했지만 거실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신발에 발을 깊게 밀어 넣었다. 안즈는 거실로 들어와 집안을 살폈다.

생활감이 전혀 없는 박스 더미와 비닐봉지 더미. 안즈가 도중에 쫓아내서 그런지 정리하다 만 풍경이 안즈의 신경을 거스른다. 난잡하든지 깔끔하든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머리가 덜 어지러울 텐데…….

안즈는 자기 방으로 향했다. 방 풍경도 별다를 건 없어 보였다. 침대는 이불보가 다 걷히고 매트리스만 남았다. 안즈는 침대에 앉았다. 그리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안즈의 손 틈으로 무겁고 긴 숨이 새어나갔다. 안즈는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문득 손가락 사이로 콘센트를 보았다. 멀티탭에 비타 충전기가 그대로 꽂혀있다. 비타는 아직 무사했는지 콘센트 근처에 방치되어있었다. 안즈는 그걸 확인만 하고 침대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흙 묻은 신발이 침대 매트리스를 더럽혔지만 안즈는 개의치 않았다.

안즈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콘센트만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인종 벨 소리가 들렸다. 안즈는 흐느적거리며 인터폰까지 간신히 당도했다. 버튼을 누르자 안즈가 지금 가장 듣고 싶은 목소리가 안즈를 맞이했다.

-안즈. 나 왔어.
“응…….”
-들어가도 될까?
“지금 문 열어줄게. 아…….”
-괜찮아. 혼자 들어갈 거니까.
안즈는 프로듀서를 안으로 들이고, 프로듀서가 들어오자마자 잠금장치를 전부 다시 걸었다.

“안즈 너 괜찮아? 많이 놀라지 않았어?”
“응, 지금은 진정했어.”
프로듀서한테서 묘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안즈는 프로듀서가 들고 온 짐을 보았다. 속이 가득 찬 장바구니. 프로듀서가 장바구니를 보란 듯이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까 시장에서 장 보고 있었거든. 차에 두기도 그래서 가지고 왔어.”
안즈는 프로듀서가 신발을 벗으려던 걸 제지. 안즈가 신발을 신고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자 프로듀서도 안즈의 뒤를 따랐다. 프로듀서가 들고 온 짐을 놓아야 하므로 둘은 부엌으로 향했다.

프로듀서와 안즈는 장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리고 마주 앉았다.

안즈가 먼저 말문을 틀었다.
“저기……. 무슨 일인지 안 물어봐?”
“실은, 여기 도착한 건 15분 정도 전이었어. 도착해서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자초지종을 듣고, 그걸 또 따로 확인하느라 조금 늦었지.”
“그렇구나. 그럼 따로 설명할 수고는 줄겠네.”
후타바 가의 압박. 이걸 자기 입으로 털어낼 수고를 덜었다.

후타바 가의 의도대로 안즈는 오늘 일어난 일에 속을 상당히 긁혔다. 이걸 말로 빚으면 분명 안즈의 비참한 감정이 배로 불어날 테지.

안즈는 의자 등받이에 무게를 실었다. 의자 뒷다리 두 개를 축으로 의자가 흔들린다. 축으로 바닥을 파내서 땅에 묻히고 싶은 기분이다.

“지금 우선으로 할 일이 있어.”
프로듀서는 핸드폰을 두드려 대기화면을 띄웠다. 배경 화면은 저번 달에 찍은 안즈의 사진집 표지. 프로듀서는 대기화면을 풀지 않고 핸드폰이 다시 꺼지길 기다렸다.

“지금 시간 봤지?”
“응? 어.”
“자아, 저녁 먹을 시간이다.”
프로듀서는 장바구니에서 이것저것 여러 가지 물건을 꺼냈다. 토마토, 마늘, 파스타 건면, 버섯, 양파 그리고 안즈에겐 생소한 향신 식물 등…….

“우선 배부터 채우자. 학교 끝나고 아직 아무것도 안 먹었지?”
안즈는 프로듀서의 행동이 기가 찼지만, 배가 고픈 건 사실이므로 프로듀서를 말리지 않았다.

“어디 보자, 수도는 아직 살아있고, 가스레인지는……. 어? 전기레인지네. 써본 적 없는데 잘 될까……. 그리고 쓸 만한 게 뭐가 더…….”
프로듀서가 부엌을 뒤진다. 프로듀서는 프라이팬과 냄비를 꺼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것들을 살폈다. 조리도구에 먼지가 쌓인 걸 확인.

“안즈 너 말이야. 이제 새삼스럽지만, 집에서 밥 안 해 먹지?”
“전에 말했잖아. 안즈는 요리하는 쪽이 아니라 먹는 쪽이라고.”
조금 뜨끔했지만, 안즈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하하, 괜찮아. 영양만 챙기면 되지. 오히려 이렇게 조리도구를 갖추어 둔 게 기특…….”
프로듀서는 찬장에서 소금을 발견했다. 조그마한 유리병에 포장된 기성품. 프로듀서도 몇 번 써본 제품인데, 작년에 포장 디자인이 바뀐 제품이다. 그게 바뀌기 전 디자인으로, 밀봉으로 있었다.

“응, 괜찮아. 니트니까! 그게 네 개성이니까!”
프로듀서가 애써 수습한다.

“우, 우와! 프로듀서! 뭐 만들 거야? 토마토도 있고! 버섯도 있네!”
안즈는 일부러 과장된 말씨로 화제를 돌렸다.

“파스타 만들 거야! 기대되지?”
“와아~ 만세~ 안즈, 지금 뱃가죽이 꼬여서 뫼비우스의 띠가 될 것 같아! 너무 배고파!”
“좋았어! 솜씨를 발휘해볼까!”
프로듀서도 안즈와 장단을 맞췄다. 참고로, 재료를 늘어놓은 시점에서 프로듀서가 뭘 만들지 안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걸 예상 못 하는 건 파스타를 먹어본 적 없는 사람 정도겠지.

프로듀서는 조리도구를 씻고, 이어서 재료를 씻고 다듬었다.
안즈는 그동안 방에서 비타를 들고 왔다.

“오, 이거 여기에 뒀구나.”
프로듀서가 싱크대 옆 공간에 비치된 유리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안즈의 생일에 프로듀서가 안즈에게 선물한 물건이다. 병 안에 골든 캔디 포장지가 수북이 쌓여있다. 포장지를 따로 학 같은 모양으로 접은 건 아니라서 묘해 보였지만, 병 무늬가 워낙 멋들어져서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원래 포장지를 부엌 서랍에 뒀는데, 병에 옮겨 담은 김에 그냥 여기에 뒀어. 따로 옮기는 것도 귀찮고.”
안즈는 비타의 전원을 켜고 디지몬 스토리 사이버 슬루스를 기동시켰다. 웅장한 테마곡이 비타에서 흘러나온다. 프로듀서는 칼질하면서 말했다.

“사이버 슬루스 해? 클리어했어?”
“아니, 아직. 지금은 재능 수치나 조금 올려볼까 해서. 최종보스가 남았지만 클리어는 좀 더 나중에 하려고.”
“왜?”
“프로듀서 기다리려고.”
“으윽…….”
프로듀서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칼질을 멈췄다. 칼날이 프로듀서의 손가락 바로 앞에 멈췄다. 각도가 조금이라도 틀어졌으면 베었을지도.

“아아, 위험하다. 위험해.”
“다쳤어?”
“아니, 괜찮아. 아아, 그건 그렇고 미안하네……. 사이버 슬루스 말이지. 실은 지금 챕터 18이거든.”
“후반부네. 근데 챕터 18에서 멈췄다고? 스토리 흡입력 때문에 멈추기 힘들었을 텐데?”
“뭐, 그렇지. 그래도 할 일이 잔뜩 쌓여있어서 말이야. 그래도 넥스트 오더 나오기 전까진 클리어해야지.”
“빨리 최종보스까지 와. 클리어하고 같이 대전하자.”
“그래그래, 알았어.”
프로듀서는 재료를 삶고 자르고 볶았다. 안즈는 디지몬의 레벨을 올리고 퇴화시키고 다시 진화시켰다. 부엌에 토마토소스의 새콤달콤한 향이 가득 차자, 프로듀서의 요리가 끝났다.

안즈는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 걸 뒤늦게 알고 침을 꿀꺽 삼켰다. 게임에 집중했지만 후각이 열심히 기능한 모양이다.

안즈가 비타를 끄자 프로듀서가 테이블에 접시를 올리고 접시 위에 파스타를 올렸다.

윤기가 흐르는 선명한 붉은 소스와, 소스의 붉은 기를 머금은 주황색 면. 토마토의 새콤한 냄새를 튀지 않게 확 휘어잡은 향신료 냄새. 시각과 후각이 뒤늦게 뛰어오는 안즈의 미각에게 귀띔한다. 이건 진짜 맛있을 거라고.

안즈는 포크로 면을 감았다. 두어 번 돌리니 면이 탄력 있게 포크에 감긴다. 한입에 딱 넣기 좋은 양이다. 안즈는 그걸 입으로 가져갔다. 혀가 소스에 닿는다. 안즈의 혀에 매콤함과, 이미 후각으로 맡은 새콤함이 달려든다. 새콤함이 안즈의 혀를 지나치게 찌르지 않게, 식물 기름이 새콤함을 감싸 안았다. 가볍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밸런스.

안즈는 면을 씹었다. 면이 안즈의 이에 아주 살짝만 저항하다 잘린다. 씹는 맛이 그렇게 안즈의 잇몸을 자극하는 동시에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맛있어! 뭐야 이거 장난 아니잖아!”
안즈는 정신없이 파스타를 빨아들였다.

“워워, 급하게 먹지 마. 여기 물 있으니까. 니트답게 천천히 먹어.”
프로듀서의 말에 안즈는 먹는 속도를 조금 늦췄지만 그래도 여전히 빠르다.

“그렇게 맛있어?”
“웅!”
안즈는 파스타를 입안 가득히 담고 말했다. 입 주변이 토마토소스로 붉게 물들었다. 프로듀서는 티슈로 안즈의 입가를 닦았다. 토마토소스가 묻지 않았는데도 안즈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안즈는 물로 입 안을 헹구고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다른 사람이랑 같이 식사한 건 처음이야.”
“그래?”
전에 아카네가 프린트를 전해주러 오긴 했지만, 그땐 간식만 먹었으니까. 안즈는 아카네 이야기를 간추려서 프로듀서에게 이야기했다.

“전에 공 빌려준 그 친구야? 좋은 친구를 사귀었네.”
“좀 귀찮게 굴지만, 심성은 착해.”
안즈는 말이 나온 김에 아카네에 관한 이야기를 이번에는 간추림 없이 프로듀서에게 말했다. 첫 만남, 학교에서 어떻게 말을 걸었는지, 점심시간에 어떤 수다를 떨었는지 등등……. 안즈는 처음엔 곤란한 투로 운을 뗐지만 이야기가 한창 달아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섞으며 이야기했다.

“호오, 오디션이라……. 기특하네. 될 것 같아?”
“음……. 붙임성 좋은 아이고, 활력이 엄청나니까 붙지 않을까?”
“그래? 기대된다. 언젠가 너랑 같은 무대에 서면 재밌겠네.”
둘은 그릇을 싹싹 비웠다. 프로듀서는 그대로 설거지. 안즈는 여전히 테이블에 앉은 채로.

프로듀서가 그릇을 달그락거린다. 수도꼭지 물소리가 마치 시냇물 소리처럼,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마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처럼 들린다. 그냥 설거지하는 소리일 뿐인데 신기하게도 안즈의 심신을 안정시킨다. 안즈의 마음이 치유된다.

“프로듀서.”
“왜?”
“이거……. 좀 좋은 것 같아.”
“뭐가?”
“집에서 이렇게 같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밥 먹고 이야기하고 같이 웃고 그런 거 말이야.”
“후후, 나도 재밌었어.”
“그거 생각나. 보통……. 있잖아. 흔히들 말하는 그거. 이렇게 있으니까 그거 같아.”
“그거라니?”
안즈는 프로듀서의 물음에 조금 머뭇거리면서, 쑥스러움과 부끄러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면서 단어 하나를 겨우 말했다.

“가족.”

한동안 물소리만이 안즈와 프로듀서 사이에 흘렀다. 프로듀서가 설거지를 끝마치고 수도꼭지를 잠근다. 수건에 손을 닦고, 프로듀서가 안즈를 향해 뒤를 돌았다.

“가족……인가.”
프로듀서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었고 입가가 살짝 풀려있었다. 그걸 본 안즈는 가슴 한가운데에서 무언가 뜨거운 게 피어오른 걸 느꼈다. 그 뜨거운 기운이 안즈가 프로듀서와 같은 표정을 짓게 안즈의 얼굴을 주물렀다.

프로듀서가 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

“안즈, 있잖아…….”
프로듀서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속에 품은 열기를 내보내려는 것처럼. 프로듀서의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야.”
“또 그런 말을…….”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이번이 세 번째.

“네가 바라는 걸 전부 해주지 못할지도 몰라. 미안해.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알아줘.”
프로듀서는 테이블 위에서 꼼지락거리던,
“나는 네가 날 필요로 하면, 언제든지 네 손을 잡을 거야.”
안즈의 손을 잡았다.

프로듀서의 손은 무척 따뜻하고 포근해서, 안즈는 프로듀서의 손을 꼭 쥔 채로 몇 번이고 더듬었다. 11월 25일. 한파가 활개 치는 겨울의 한순간. 안즈는 맨션을 떠나 346 프로덕션의 여자 기숙사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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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포인트 집계 부분에 총합 포인트를 빼먹은 걸 뒤늦게 발견해서 부랴부랴 수정했습니다.


그리고 전에 후기에 쓴다는 걸 까먹고 안 썼는데, 프로듀서가 안즈에게 선물한 물병은 전에 리얼 346 프로덕션 기획으로 신데마스와 콜라보한 브랜드 제품입니다. 이 브랜드는 애니메이션에도 등장했죠. 참고로 이 병의 원래 용도는 꽃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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