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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통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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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8, 2016 14:13에 작성됨.

 살다 보면 항상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좋든 나쁘든 부딪혀야 할 운명 같은 것이다. 프로듀서와 치하야도 그런 전환점을 맞이했다. 불행히도 나쁜 전환점이었다.

 그날은 늦게까지 스케줄이 있어 모든 일을 끝내고 나오니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요즘 따라 부쩍 쌀쌀해진 밤 공기에 두 사람은 빨리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치하야가 좋아할 법한 음악을 틀고 히터를 켰다. 한적한 도로를 시동 소리를 울리며 나아갔다. 그리고 사거리에서 신호에 걸려 잠시 멈췄다.

 "이제 올해도 몇 달 안 남았구나."

 프로듀서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빨리 가는 것 같아요."
 치하야가 맞장구 쳤다.
 "우리 모두 일에 치여 살다 보니까 시간 관념도 없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그게 좋잖아요. 현실에 충실하다는 느낌이니까."
 "하긴 그런가."
 프로듀서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러니 라이브 많이 따오셔야 해요, 프로듀서.”
 치하야는 프로듀서를 보며 살짝 웃었다. 그는 겸연쩍은 듯이 긁적이다가 알았다고 했다. 치하야가 라이브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에게 있어 그것만이 삶의 이유이자 원동력이기에, 라이브에서만큼은 숨김 없이 모든 실력을 내는 그였기에, 프로듀서도 그에 화답하고 싶었다.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라이브도, 연말에 있을 홍백가합전도 따내자고 다짐했다.
 이윽고 붉은 신호가 푸른 신호로 바뀌었다.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사거리 중간쯤에 갔을 때, 그는 왼쪽에서 눈부신 빛이 비추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어떤 행동을 할 여유도 없이 심한 충격을 받았다. 자동차 왼편이 종잇장처럼 찌부러졌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치하야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차체는 빙글 돌아 가드레일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터진 에어백에 부딪힌 프로듀서는 조수석을 흐릿한 눈으로 쳐다봤다.
 "치……하……."
 이름을 끝까지 부르지 못 하고 그는 기절했다.
 얼마 뒤 사이렌 소리에 프로듀서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는 들것에 실려 있었다. 그의 눈으로 본 사고현장은 지옥도였다. 폴리스 라인 뒤에 있는 트럭 한 대는 앞부분이 조금 찌그러진 상태였고, 회사 차량은 반파되어 널브러졌다. 파편들이 도로에 나뒹굴었다. 회사 차량 밑으로는 기름과 붉은 피가 섞여 떨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타고 있던 그 차였다.
 "치하야……? 치하야……!"
 프로듀서는 조수석에 앉았던 치하야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충돌이 왼쪽에서 왔기에 생사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는 구급대원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조수석에 탄…… 그 애는…… 괜찮습니까……?"
 "현재 소방대원들이 최선을 다해 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구급대원은 그를 안심시키려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듀서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가느다란 실이라도 좋았다. 중간이 썩어버린 동아줄이라도 좋았다. 그가 제발 온전히 구출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사이렌을 울리며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프로듀서는 눈을 떴다. 주위가 새하얬다. 욱씬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팔에 링거가 꽂혀 있었다. 그는 주위에 다른 환자들이 같이 있는 걸 보고서 응급실일 것이라 생각했다. 온 몸에 두른 붕대가 살짝 압박을 주긴 했지만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다. 그저 삭신이 쑤실 뿐이었다.
 “환자분 일어나셨습니다.”
 간호사가 그를 보고 의사를 호출했다. 조금 있자 의사와 사무소 사람들이 같이 찾아왔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그를 껴안고 울었다 아마 주위 사람이 다쳤다는 걸 실감하자 초조했다가 무사한 것을 보니 안도의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성숙한 아이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치기도 했고,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꺼냈다.
 “그 정도 사고에서 찰과상과 팔뼈에 살짝 금간 것만 빼면 크게 이상은 없습니다. 기적이라고 봐야겠네요.”
 의사가 놀랐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며칠 정도만 푹 쉬시면 나으실 겁니다. 물론 뼈가 다시 붙을 때까진 깁스를 하셔야 하지만요.”
 “네…….”
 그러다 프로듀서는 치하야 생각이 났다.
 “그것보다 저랑 같이 실려온 아이는 괜찮습니까?”
 의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 했다. 사무소 사람들도 어두운 낯빛이었다.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왜 그러시는데요? 상황이 어떻습니까?”
 “그게…….”
 의사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상당히 위급한 상황입니다. 두 다리 모두 차체가 찌그러졌을 때 거기에 끼인 것 같습니다. 뼈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부서져버렸습니다. 또 왼쪽 팔과 갈비뼈도 부분적으로 금이 간 상태고요.”
 “설마…….”
 “현재 상황으로는 다리를 절단하는 게 낫다고 판단됩니다.”
 그는 당혹스러웠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 한 사람의 몸을,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는 것이 무서웠다.
 “꼭 절단해야만 하나요? 절단이 아닌 방법도 있는 거겠죠?”
 “저희도 최선을 다 하겠지만, 아까 말씀 드린 대로 뼈가 온전하지 못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
 프로듀서는 할 말을 잃었다. 조용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 했다.
 “……왜 나만 멀쩡한 겁니까?”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나만 멀쩡한 겁니까, 왜!”
 “자네…….”
 “그 애가 멀쩡했어야 했는데. 왜 제가 멀쩡한 거냐고요…….”
 흐느끼는 그의 어깨를 타카기 사장은 아무 말 없이 토닥였다. 그도 안경 뒤로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것을 본 아직 어린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무력함이 너무도 싫었다.
 “수술은 언제입니까?”
 “아직 보호자분과 연락이 안 되어서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지 못 했습니다.”
 치하야의 부모는 이혼한 뒤로 치하야와 연락이 끊겼다. 프로듀서는 여태까지 프로듀싱을 하면서 치하야가 부모와 전화하는 것을 전혀 보지 못 했다. 그가 나중에 따로 알아본 바로는 치하야가 부모의 전화번호를 지운 지 오래였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타카기 사장이든 프로듀서든 이 상황이 난감하기만 했다. 아무리 소속 아이돌이라 해도 수술 동의서처럼 중요한 것을 함부로 작성할 수 없었다. 특히나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야 하는 큰 수술 같은 경우는 더더욱 그랬다. 모두가 침묵했다. 쉽게 나설 수 없었다. 그 때였다.
 “제가 쓰겠습니다.”
 프로듀서가 말했다. 모두의 눈이 그에게 몰렸다.
 “환자분,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네. 신중하게 생각한 겁니다.”
 그의 눈은 진지했다. 의사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그에게 수술동의서를 건네주고, 수술 진행 방식과 만일에 있을 부작용에 대해 조목조목 말했다. 그리고 그는 되돌릴 수 없는 사인을 적었다.

“부디 잘 부탁 드립니다.”

 의사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과 함께 동의서를 들고 바삐 돌아갔다. 멀어지는 의사의 뒷모습을 그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늦어지자 다른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몇 시간이 넘게 걸리는 수술을 밤새 기다릴 수도 없거니와 다음 날 스케줄도 있어서였다. 같이 있을 수 없음에 아쉬워하면서 한두 명씩 떠나자 남은 사람은 프로듀서와 타카기 사장뿐이었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던 둘이 할 수 있는 건 기도였다. 그러던 중 프로듀서가 입을 열었다.
 “사고가 어떻게 일어난 겁니까?”
 “가해자가 만취 상태로 운전을 했다는군.”
 “음주운전자였습니까?”
 프로듀서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모든 사태가 음주운전으로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니 허망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타카기 사장의 것이었다. 그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받더니 이내 끊었다.
 “무슨 전화입니까?”
 “오토나시 양이 지금 경찰서에서 자네 대신 있다네. 자네가 깼다는 얘기를 듣고 경찰 몇 명과 이쪽으로 올 모양이군.”
 “그렇군요. 후우…….”
 “긴장 풀게. 자네 잘못은 없잖나.”
 “그렇긴 합니다만…….”
 타카기 사장은 그의 기운을 북돋아주려 등을 몇 번 두드렸다. 프로듀서도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내심 기뻤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 두 명과 오토나시 코토리가 병원에 찾아왔다. 프로듀서를 보자마자 오토나시는 울면서 그를 껴안았다. 그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오토나시에게 괜찮다면서 달랬다. 어느 정도 잦아들자 경찰은 그에게 피해자 진술서 작성을 부탁했다. 그들은 그의 진술서를 토대로 사건 정황을 녹취했다. 세세한 질문에 답을 하고 난 뒤, 협조에 감사하다면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가해자는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프로듀서가 물었다.
 “외견상 큰 문제는 없어 보입니다. 단 사고를 일으켰으니 일단 유치장에 있습니다.”
 “어떻게 될까요?”

 “형이 얼마나 나올지 저희도 모릅니다. 판사님이 결정하시는 거니까요.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니 그렇게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배웅했다. 경찰을 보내고 난 뒤의 병원은 조용했다. 심야. 수술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세 사람은 앉아서 전전긍긍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은 풀어지고, 초조함은 나른함으로 바뀌고 만다. 밖은 아침 해가 어둠을 걷었다. 그리고 수술중이라는 불이 꺼지고, 문이 열렸다.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자던 세 사람은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의사는 피곤에 지친 얼굴이었다.
 “수술은 어떻게 됐습니까?”
 프로듀서가 물었다.
 “최대한 절단까진 가지 않고 뼛조각을 맞춰 철봉을 삽입해 지지하려 했습니다만, 상태가 너무 심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환자분 다리를 절단하고 봉합했습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사는 허리 숙여 사과했다. 오토나시는 믿기 힘들었는지 고개를 돌려 흐느꼈다. 타카기 사장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실낱 같은 희망을 가졌지만, 그것이 너무 가늘었는지도 모른다. 프로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의자에 주저앉은 그는 죄책감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신이 치하야 대신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눈물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새어 나왔다.
 뒤이어 나온 간호사가 회복실에서 잠시 안정을 취하게 하다가 개인 병실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보호자께서도 잠시 쉬고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데스크로 오시면 환자분이 어느 병실에 있는지 알려드릴 테니 다녀오세요.”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럼 우리도 아침이라도 먹지.”

 “그래요. 그래야 힘을 내죠.”
 타카기 사장의 제안에 오토나시는 소매로 눈물을 감추고 말했다. 세 사람은 병원 내 식당으로 들어가 조촐하게 아침을 먹었다. 그러나 걱정 때문인지 세 사람 모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식사를 마치고 타카기 사장과 오토나시는 사무소로 돌아갔다. 타카기 사장은 프로듀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혼자 남겨진 프로듀서는 병원 밖 흡연실에서 담배 한 대를 태웠다. 평소라면 들어가는 담배 연기에 온 몸이 나른해졌을 텐데, 지금은 가시를 삼키는 것처럼 따가웠다. 내뿜은 연기조차 아른거려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끝부분만 약간 탄 담배를 비벼 껐다. 흡연실을 나와 병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잘 결정한 걸까.”
 여러 감정이 담긴 작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시간이 지나고, 몸에서 담배 냄새가 다 빠져나갈 즘, 그는 데스크에 치하야의 병실을 물어 찾아갔다. 치하야는 링거를 차고 조용하게 누워있었다. 간호사는 프로듀서를 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그도 화답했다. 차분히 살폈다. 상처투성이 얼굴과 가녀린 몸 전체를 감싼 붕대, 그리고.
 “…….”
 보고 싶지 않았던, 푹 꺼진 다리부분의 이불. 얼핏 보니 허벅지의 반 정도를 자른 듯 했다. 그는 보기 괴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고 참담했다. 간호사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면서, 깨어나는데 며칠 정도 걸릴 거라 말하고 병실을 나섰다. 그는 치하야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얘기했다.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그날 프로듀서는 바로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 휴식했다. 그리고 다음날 업무에 복귀했다. 사무소 사람들은 너무 빠른 게 아니냐며 걱정했지만, 그는 어차피 경미한 부상이고 바쁠 때 빠지는 게 오히려 민폐라고 했다. 하루 동안의 공백이 아까워 그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업무가 끝난 뒤에는 틈틈이 치하야의 병실에 찾아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늘이면 깨어날까 싶어서였다. 가끔은 면회 시간이 끝나서 볼 수 없던 적도 있었다. 그 때는 병원 밖에서 한참을 서있다 가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날은 업무가 별로 없어 꽤 이른 시각에 퇴근을 했다. 병원을 가기 전에 과일 바구니 하나를 샀다. 왠지 모르게 오늘은 깰 것이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병실엔 치하야 홀로 누워있었다. 프로듀서는 바구니를 서랍장에 올려놓고 간이 의자에 앉았다. 외부 상처는 아물었는지 붕대가 풀려있었다. 그래도 살짝 남은 흉터가 있었다.
 “아이돌은 얼굴이 생명인데.”
 그는 치하야의 얼굴에 남은 흉터를 살며시 만졌다. 순간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깜짝 놀라 손가락을 떼었다. 미약하지만 확실한 떨림이었다. 그 떨림이 몇 번 있고 나서야 굳게 감긴 눈꺼풀이 조금씩 열렸다. 그것을 보고 그는 바로 너스콜을 눌렀다.
 “치하야가 눈을 떴습니다! 눈을 떴어요!”
 그는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간호사에게 말했다. 간호사도 반가운 목소리로 의사와 함께 가겠다고 대답했다.
 “다행이야, 정말로…….”
 그는 치하야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기쁨과 안도의 눈물이었다.
 “프로, 듀서…….”
 치하야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우세요……. 바보 같이…….”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뒤이어 의사와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몸은 어떠냐는 의사의 말에 치하야는 통증이 조금 있지만 괜찮다고 했다.
 “좀 일어나고 싶은데. 저 좀 일으켜 주실래요?”
 치하야가 프로듀서에게 부탁했다. 그는 우물쭈물했다. 치하야는 그 반응이 이상했다.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키려다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어딘가 부족한, 아니,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른팔에 힘을 줘 겨우 몸을 일으켰다. 이불의 꺼진 곳이 이상했다. 분명 있어야 할 곳에 그것이 없는 듯 보였다. 당황하면서 이불을 걷었다. 눈동자가 떨렸다.
 “다리가…… 없어…….”
 “치하야. 그게…….”
 “프로듀서. 제 다리 어디로 간 거죠?”
 “환자분, 진정하시고요.”
 치하야는 머리를 감싸며 괴로움에 비명을 질렀다. 발버둥쳤다. 의사와 간호사는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의사는 프로듀서에게 잠시만 나가있으라 했다. 병실을 나선 그는 벽 뒤에서 나오는 비명소리를 듣는 것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력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기절할 것만 같았다. 잘 결정했다고 믿고 싶었다.

 “잘못 결정한 건가.”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시간이 지나자 비명소리가 잦아들었다. 병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프로듀서를 불렀다. 다시 들어가니 진정이 된 듯 치하야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만 체념한 듯한 얼굴이었다. 의사는 일시적 쇼크 상태였다면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호출하라는 말을 남기고 간호사와 병실을 나갔다. 프로듀서는 조심스레 치하야 곁으로 다가갔다. 치하야는 무표정으로 그럴 쳐다봤다. 생기 없는 눈동자에 상념, 상실, 좌절, 포기, 세상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갖다 붙여도 모자라지 않을 거라고, 어쩌면 그것들을 뛰어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웠어요.”
 “…….”
 “있던 게 갑자기 사라졌는데 놀랄 수밖에요.”
 “그래. 그렇지…….”
 “프로듀서를 원망하는 건 아니에요. 분명 큰 사고였고, 수술을 안 하면 괴사했을 거라더군요.”
 “그래도 책임은 나한테…….”
 치하야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의 책임이냐를 따질 때가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응.……”
 “무엇을 탓해도, 누구를 욕하고 원망해도 시간은 거스를 수 없어요. 지금은 변하지 않아요.”
 “…….”
 “지금이 있어야 다음도 있는 건데, 제겐 ‘지금’이 없어요. 부서졌죠. 한 순간에.”
 “치하야.”
 “프로듀서에겐 지금이 있잖아요. 다음으로 향할 수 있는 지금이. 그러니까.”
 치하야는 힘겹게 웃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러니까 프로듀서는…… 다음으로 향해 가세요. 저 같은 ‘이전’은 잊고.”
 “…….”
 그 말에 프로듀서는 가슴이 너무도 아렸다.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단념한 듯한 말투가 칼날처럼 그의 마음을 베었다. 그가 치하야에게 무슨 말을 했어야 했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키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와 함께 일어섰다.
 “안녕히 가세요, 프로듀서.”
 치하야의 한 마디와 함께 그는 병실을 나섰다. 그날은 일기예보에도 없던 비가 내렸다.

 

 한 달이 지났다. 치하야는 퇴원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사고 당일에 입었던 옷이 전부였다. 허나 찢어지고 피로 범벅이 된지라 그냥 입을 수 없었다. 미안한 부탁이란 건 알지만 하루카와 통화해 옷 한 벌을 빌리기로 했다. 쇼핑백을 들고 찾아온 하루카가 병원이 떠나갈 정도로 울었지만 말이다. 그 생각에 엷은 웃음을 지으며 환자복을 개었다. 익숙지 않았던 휠체어도 어느새 능숙하게 올라탔다. 데스크에서 퇴원 수속을 밟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춥다.”
 밖은 벌써 겨울 날씨가 되었다. 입에서 입김이 나왔다. 하루카에게 받은 옷은 두꺼운 겨울용 옷이었지만 날카롭게 파고드는 바람은 옷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차가워진 바퀴 손잡이를 잡는 것도 꺼림칙했다. 그렇게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12월이니까.”
 그러면서 누군가 휠체어를 밀어주었다. 치하야는 당황해 뒤를 돌아봤다.
 “퇴원 축하해, 치하야.”
 “프로듀서.”
 꽤나 오래 기다렸는지 귀며 코끝이며 볼이 찬 바람에 발개져 있었다. 치하야는 그가 나타난 것에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덤덤했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저 같은 건 잊어버리라고요.”
 “그래, 그랬지.”
 “프로듀서도 바보는 아니잖아요. 그런 말 하면 그냥 단념하는 게 낫지 않아요?”
 “그래, 그게 나을 수도 있지.”
 치하야는 화가 났다. 손잡이를 잡은 프로듀서의 손을 뿌리쳤다. 차갑게 식은 바퀴 손잡이를 굴렸다. 그는 프로듀서의 행동이 불편했다. 불쾌했다. 이런 취급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도 않는 멍청이 같았다. 그와 멀어지고 싶었다. 하지만 바퀴를 아무리 굴려도 그는 뒤에서 조용히 뒤따랐다. 팔에서 힘이 점점 빠졌다. 바퀴가 굴러가는 속도가 눈에 띌 정도로 느려졌다. 덜컥 소리가 났다. 미처 보지 못한 돌부리에 휠체어 바퀴가 부딪혔다. 중심을 잡을 새도 없이 휠체어는 옆으로 쓰러졌다. 치하야는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모습을 본 프로듀서는 단걸음에 달려와 치하야를 일으켰다.
 “다친 데 없어?”
 다정하게 묻는 그가 싫었다.
 “저리 가요.”
 차오르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았다.
 “치하야.”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저리 가라니까!”
 치하야는 오열했다.
 “그딴 동정심으로 날 대하지 마!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여? 내가 그렇게 보잘것없이 보이냐고!”
 마음 속에 담아뒀던 감정이 폭발했다.”
 “그런 얄팍한 마음으로 날 연민하지 마. 제발…….”
 프로듀서는 그런 치하야를 조용히 껴안았다. 코트가 눈물로 축축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안아주고, 다독여주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진정이 된 치하야를 다시 휠체어에 태우고 근처 공원에 들렀다. 그를 벤치에 앉히고 코트를 벗어 몸 전체를 덮어주었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 커피를 뽑았다. 그 중 하나를 그에게 건넸다.
 “블랙. 맞지?”
 치하야는 말없이 받았다. 프로듀서도 그의 곁에 앉았다.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려다가 아차 싶어 다시 챙겨 넣었다. 그가 속으로 눈치도 없는 놈이라 생각했을 때, 치하야는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그가 담배를 피운다는 건 치하야도 알고 있었다. 다만 흡연할 때는 자기와 가까이에서 피우지 말 것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담배 연기 때문에 목과 폐에 이상이 생겨선 안 됐으니 말이다. 프로듀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듀서의 실수에 괜찮다면서 담배를 피우게 하는 건 큰 다짐이라 생각했다. 프로듀서는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는 듯 담뱃갑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라이브 잡혔어.”
 프로듀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단체 라이브. 연초에 열릴 거야.”
 “그래서요?”
 “알려주고 싶었어.”
 “……그런 말 듣고 제가 좋아할 거라 생각하셨나요?”
 “아니.”
 “아닌 걸 알면서 왜 꺼내신 건데요?”
 “하자. 라이브.”
 프로듀서는 치하야를 바라봤다. 표정은 진지했다.
 “이 꼴로 라이브를 하라고요? 제정신이세요?”
 “하자. 치하야, 할 수 있잖아?”
 “농담으로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프로듀서. 경멸할 것 같으니까.”
 치하야는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프로듀서는 치하야의 손을 살짝 쥐었다. 그는 뿌리치고 싶었지만 프로듀서가 힘있게 꽉 쥐고 있었기에 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내 욕심 같지만 치하야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치하야는 입을 굳게 닫았다.
 “저번에 네가 얘기했잖아. 자기 같은 이전은 버리고 다음을 향해 가라고.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더라. 우리가 이전에 쌓아뒀던 추억이 너무 많아서. 재미있던 기억들, 슬픈 기억들, 때로는 웃고, 울고, 싸우고, 다투고, 화해하고. 이 모든 걸 버린다는 게 힘이 들더라고. 그래서.”
 “…….”
 “그래서 난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거야.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내 이기심일지도 몰라. 너만 힘들게 할지도 모르고. 그런데 이전 없인 지금도 없고, 다음도 없다고 생각해. 네가 이전에 머물러있는 건 아쉬워. 아까워. 안타깝고. 그러니까 난 너와 같이 지금을 다시 만들고 싶어.”
 프로듀서는 두 손으로 치하야의 손을 잡았다.
 “난 네 프로듀서니까.”
 치하야의 어깨가 떨렸다.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어요……. 이런 꼴로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프로듀서를 바라보는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었다. 터져버린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디 있어요…….”
 치하야는 프로듀서를 안았다. 우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싫었던 게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이 동요하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프로듀서는 그것이 무엇이었든 치하야를 안아주었다. 작고 가녀린 몸이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누군가의 온정이 닿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그들은 깨달았다. 치하야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얘기했다.
 “노래…… 부르고 싶어요…….”

 

 그 다음날 사무소에 치하야와 프로듀서가 함께 들어왔다. 휠체어를 탄 치하야가 낯설게 보이기도 했지만, 사무소 식구들은 울며 반겼다. 치하야는 오랫동안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 말했다. 프로듀서는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을 아이들을 위해, 치하야와 함께 휴게실에 데려다 주고 나왔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프로듀서의 어깨를 누군가 툭툭 쳤다.
 “수고했네.”
 타카기 사장은 대견하다는 얼굴이었다.
 “제가 한 것도 없는데요, 뭘. 전부 치하야의 의지죠.”
 “자네가 있었기에 치하야도 힘내지 않았겠는가? 정말 수고했어.”
 프로듀서는 쑥스러우면서도 누군가가 알아줬단 게 고마웠다. 그리고 프로듀서의 업무도 조금 바뀌었다. 타카기 사장의 지시로 치하야 전속 프로듀서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의 일감을 약간이나마 덜어주고, 몸이 불편한 치하야를 옆에서 보살피라는 것이었다. 타카기 사장의 배려에 그는 고맙다는 것밖에 할 말이 없었다. 수첩을 펼치고 스케줄 정리를 했다. 한 달 뒤면 있을 연초 라이브를 위해 한동안은 보컬 레슨을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휴게소에선 이야기꽃이 피었다. 가만히 두고 싶었으나 스케줄은 소화해야 하니 치하야에게 사정을 이야기한 후 연습실로 이동했다.
 치하야에겐 퇴원 후 처음 받는 보컬 레슨이었다. 프로듀서는 긴장했다. 아무래도 공백이 있었기에 목소리가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은 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싹 씻어버릴 만큼 청아한 목소리가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음정 연습과 노래 몇 곡을 연습 삼아 불러본 뒤 보컬 트레이너는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면서 감탄했다. 프로듀서는 안심했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지 치하야는 얼굴을 조금씩 찡그렸다. 그것을 본 트레이너는 잠시 휴식을 갖기로 했다. 치하야는 가방에서 어떤 약을 꺼내 먹었다.
 “치하야. 어디 안 좋아?”
 프로듀서가 물었다.
 “별 거 아니에요. 발이 좀 아파서요.”
 “어? 발?”
 “이상하죠? 없는데 가끔씩 아파요.”
 치하야의 시선은 있지 않은 발끝을 향했다.
 “환상통증이래요.”
 “환상통증?”
 “신체 부위가 없는데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거래요. 이상하죠? 분명히 없는데 있다고 느낀다니까.”
 “치하야.”
 “병원에 있을 때도 가끔씩 아팠어요. 그 때마다 진통제를 처방해주고 지금도 먹고는 있지만요.”
 “치료 방법은 없는 거야?”
 “없어요. 거울 치료라는 게 있다고는 하지만 저한테는 안 되나 봐요.”
 “…….
 그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또 다시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서였다.
 “프로듀서. 앉아보세요.”
 그 말을 들은 그는 쭈그려 앉았다. 치하야는 그의 어깨를 잡았다.
 “프로듀서. 이건 프로듀서의 탓이 아니에요. 그러니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프로듀서가 저한테 희망을 줬는데 정작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면 전 어떻게 하죠? 프로듀서의 말을 믿고 다시 시작하는데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전 어떻게 견뎌야 하나요?”
 “치하야…….”
 “그러니 제 앞에서만큼은 죄책감 느끼지 말아요. 전 괜찮으니까. 알았죠?”
 단호했다. 하지만 프로듀서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 말이었다.
 “……응. 알았어. 고마워, 치하야.”
 치하야는 빙긋 웃고 다시 레슨을 받으러 갔다. 프로듀서는 치하야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시는 치하야에게 어두운 표정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자고 다짐했다.
 보컬 연습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연말 홍백가합전은 나가지 못 했지만 사무소 식구들과 함께 시청했다. 아이들은 나도 나가고 싶다면서 부러워했다. 프로듀서는 내년엔 사무소에서 누구든 꼭 나갈 수 있었으면 했다. 물론 치하야가 나가기를 더 바랐다. 퇴근 뒤에는 치하야의 집에서 단 둘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를 축하하기도 했다. 후리소데를 입은 치하야와 함께—프로듀서로선 여성에게 처음 입혀주는 거라 쩔쩔 맸다.—새해 첫 참배에 가기도 했다. 그는 치하야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물어보았지만 비밀이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서로가 어떤 걸 빌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입을 맞췄다. 추운 바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치하야가 행복하기를.’
 ‘프로듀서가 행복하기를.’
 둘의 모습은 이미 소원을 이룬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새해 첫 라이브가 다가왔다. 가득 찬 관객을 보고 치하야는 의욕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관객들에게 이 모습이 어떻게 비춰질지 두려웠다. 프로듀서는 살며시 다가와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프로듀서의 손을 잡았다. 고맙다는 뜻이었다. 조명이 꺼졌다. 라이브가 시작되었다. 관객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다른 아이들이 하나씩 무대 위로 올라섰다. 하지만 치하야는 나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터라 안무를 소화할 수 없었기에 2인 이상 단체곡에는 나갈 수 없었다. 첫 시작은 언제나 단체곡이었기에 치하야는 아쉬움이 컸다. 곡 리스트가 점점 진행되고 어느덧 치하야 솔로 무대가 되었다. 아이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무대에 올랐다. 조명이 그를 비췄다.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뉴스가 사실이었다는 것부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관객도 있었다. MR이 나오고 치하야는 노래를 시작했다.
 관객석의 형광봉은 움직이지 않았다. 프로듀서는 그 모습을 보고 관객들이 아직 치하야를 받아들이지 못한 게 아닌가 싶었다. 노래는 끝났다. 치하야는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호응이 없을 거라 예상했다. 각오도 했다. 휠체어 바퀴를 돌려 무대를 내려갔다. 무대 뒤편으로 돌아온 치하야를 보며 프로듀서는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조용한 관객석이 모두를 당황하게 했지만 치하야는 내색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조용했던 관객석에서 조금씩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응원의 목소리부터 애정 어린 표현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그 소리를 듣고 치하야에게 몰려들어 기뻐해줬다 그는 고맙다고 말하고 조용하게 대기실로 돌아갔다. 담담한 행동에 아이들은 걱정이 되었는지 조마조마했지만 섣불리 쫓아갈 수 없었다. 프로듀서는 다음 무대를 준비하라 이르고 치하야의 뒤를 쫓았다. 그가 대기실 문 앞에 섰을 때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치하야의 것이었다. 팬들의 응원은 그간 마음고생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했다.
 ‘잘 버텨줘서 고맙다.’
 프로듀서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전했다. 그리고 다시 무대 뒤로 돌아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치하야는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마지막 피날레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힘껏 노래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치하야는 조그만 라이브나 음악 방송에 조금씩 얼굴을 비췄다. 방송 관계자들도 다시 돌아온 치하야를 보며 대견하다, 응원한다며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방송이나 라이브가 싫었던 것이 아니다. 원인은 내부, 혹은 외부에 있었다. 프로듀서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아무 일도 없다는 말뿐이었다. 그리고 사무소에 들르기 보다는 혼자 레슨을 하고 업무 장소로 곧장 가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사무소 식구들과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었다. 서로가 먼저 다가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프로듀서가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런 일이 1년 정도 계속됐다.
 어느 날이었다. 그 전날이 치하야의 휴일 마지막 날이었기에 프로듀서는 오늘 업무를 하기 위해 치하야의 집에 들렀다. 초인종을 눌렀다. 반응이 없었다. 문을 여러 번 두드려도 마찬가지였다. 전화를 걸어도 신호만 갈뿐 받지를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맨션 경비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아침인데도 커튼이 쳐져 있었다. 프로듀서가 치하야의 이름을 부르면서 들어갔다. 욕실 앞에 휠체어가 쓰러져있었다. 문을 열자 비릿한 냄새가 났다. 불을 켰다.
 “치하야……?”
 그가 본 것은 욕조 안에 들어있는 알몸의 치하야였다.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두 손목을 그은 치하야였다. 물은 피와 섞여 새빨간 색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 진통제와 수면제가 주변에 떨어져 있었다. 그는 치하야를 안고서 이름을 불렀다. 몸을 흔들어 깨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멈춘 심장은 다시 뛰지 않았다. 멈춘 폐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을 맞이한 그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경찰과 구급대원이 도착하고 현장을 조사했다. 사인은 자살이었다. 사무소 식구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치하야와 친했던 아이들은 주저앉아 울기도 했다. 프로듀서는 참담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다. 한 경찰이 다가와 프로듀서에게 편지 봉투를 건넸다. ‘프로듀서에게’라 적힌 봉투였다. 그는 열고 편지를 읽었다.
 ‘프로듀서. 이걸 읽을 때쯤이면 전 이미 죽어있겠지요. 프로듀서에게 그렇게 희망을 얻었는데, 이렇게 가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요. 내색은 안 했지만 힘들었어요. 프로듀서가 그렇다는 게 아니에요. 사고 이후로 모든 게 달라졌죠. 다리가 없으니 안무 연습도 못 하고, 그러다 보니 다른 애들하고 마주치는 게 힘들었어요. 다른 애들은 힘들게 안무 연습을 하는데, 저는 가만히 앉아 그걸 지켜보기만 하고. 같이 할 수 없다는 게 괴로웠어요. 주위의 눈들도 저를 탓하는 것만 같고. 저번에 얘기했던 환상통증이란 게 제 다리에서만 느껴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분명 다른 애들이 내 눈앞에 있는데, 전 그게 없는 것처럼 느꼈나 봐요. 애들만 보면 가슴이 아팠어요. 같이 웃고, 울고, 땀 흘린 날들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그래서 멀어졌어요. 저 정말 이기적이죠? 다른 애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저만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는데. 이렇게 도망쳐서 죄송해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프로듀서, 다음이 있다면 다시 만나길 바라요. 치하야가.’

 

 치하야의 장례식과 화장이 끝나고 납골당에 안치가 모두 끝나고 난 뒤 며칠이 흘렀다. 그날 프로듀서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한껏 멋을 부리고, 검은색 정장에 검은 넥타이까지 완벽하게 꾸몄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었다. 오랫동안 못 봤던 사람과 만나는 날이었다.
 “너무 멋부렸다고 한 마디 들을 것 같은데.”
 그는 피식 웃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의자에 올라섰다.
 “치하야가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화내겠지.”
 그리고는 발 밑의 의자를 치웠다.
 어쩌면 이것이 두 사람만의 ‘다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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