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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치하] 잠들어버린 당신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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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1, 2012 23:10에 작성됨.

잠들어버린 당신 곁에서

    “우…….”
    어둑한 조명 아래, 신음을 흘린 여성이 비틀거린다. 푸른빛이 감도는 여성의 생머리는 흐트러져 가닥가닥 축 처졌다. 여성은 손으로 복도의 벽을 부여잡아 겨우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했다. 그 곁으로 걱정 띤 얼굴을 한 여성이 다가갔다.
    “치하야, 괜찮아?”
    “으……. 괘, 괜찮아…….”
    치하야는 똑바로 일어서기 위해 다시 몸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벽에서 손을 떼자마자 치하야는 다시 휘청거리며 이번엔 반대쪽으로 넘어지려했다.
    불안한 표정을 짓던 여성이 재빨리 손을 뻗는다. 치하야는 여성의 품에 푹 쓰러지듯 안겼다. 흐릿한 조명이 비추는 치하야의 볼은 붉다.
    밤바람이 불어와 치하야의 뜨거운 얼굴을 식히고, 여성의 머리에 달린 붉은 리본을 흔들고 지나간다.
    “어휴, 이렇게 계속 휘청거리면서 괜찮다니. 내 몸 꽉 잡아, 치하야. 집까지 바래다줄게.”
    “괜찮다니까…하루카한테 폐 끼치긴 싫어….”
    텁텁한 숨을 내쉬며 치하야는 하루카로부터 떨어지려했다. 그러나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다리는 휘청거리고 시야는 흔들린다.
    치하야는 볼에 짙게 띤 홍조만큼이나 몸이 뜨거웠다.
    하루카는 에휴, 다시 한숨을 내쉬곤 치하야의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어깨 위로 휙 둘렀다. 하루카보다 약간 큰 치하야는 몸이 스륵 기울은 채로, 하루카의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그냥 내게 맡겨. 어차피 치하야의 집은 바로 앞이잖아.”
    “응…….”
    체념한 건지, 힘든 건지 치하야는 웅얼웅얼 대답했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치하야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루카는 피식 웃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마른 몸을 지탱하며 조심스레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치하야가 이렇게 된 건 방금 전에 있었던 회식 탓이었다. 무대 끝나고 뒤풀이 가자는 사람들의 요구에 휘말려 엉겁결에 술자리까지 따라온 둘은, 술은 미리 배워두는 게 좋다며 짓궂게 술 한 잔을 권하는 스태프의 화술에 말려 결국 적당히 몇 잔 얻어 마셔버렸다.
    물론 겉치레정도의 술이라, 둘이 마신 건 그것뿐이었다. 처음엔 둘 다 완전히 멀쩡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서서히 치하야 쪽에서 이상이 나타났다.
    뒤풀이가 끝나고 귀갓길에 올라 찬 공기를 마시자 치하야의 볼이 급격히 붉어졌다. 이윽고 휘청거리기까지 하는 치하야를 차마 내버려두지 못하고, 하루카는 치하야의 집 앞까지 따라와 버렸다.
    ‘그나저나 치하야가 이렇게 술 약한지는 몰랐네. 의외랄까, 치하야는 술이 강해보였는데.’
    “하루카아…….”
    생각을 읽은 건지 치하야는 아이처럼 이름을 부르며 하루카에게 매달려왔다. 늘어지는 치하야의 말엔 알싸한 알콜 향이 섞였다.
    “응, 나 여기 있으니까 걱정 마.”
    하루카는 치하야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줬다. 하루카의 눈에 치하야의 주정은 색다른데다가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하루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루카는 치하야를 부축한 채 복도를 주춤주춤 걸었다. 다행히도 치하야의 집은 이 복도에 있었다.
    “읏차.”
    이윽고 치하야의 집 대문에 도착하자, 하루카는 자세를 다시 바로잡았다.
    “치하야, 열쇠는 어디에 있어?”
    “으응…주머니, 소게…….”
    술기운에 밀려오는 졸린 건지 눈을 깜뿍깜뿍 떨어뜨리는 치하야는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취한데다 졸린 치하야는 주머니에 제대로 손을 넣지 못하고 이리저리 애꿎은 손만 쿡쿡 청바지 위에서 흐느적거렸다.
    이에 보다 못한 하루카가 나섰다.
    “청바지 주머니야? 잠깐만, 내가 꺼낼게.”
    하루카는 치하야의 허리에 손을 감아 확실히 붙잡아 지탱하고, 다른 손을 천천히 치하야의 청바지에 가져갔다.
    딱 붙는 핏의 청바지는 치하야의 슬림한 다리 선을 있는 그대로 매력적으로 드러냈다. 하루카는 조심히 치하야의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햐얏!”
    치하야는 갑자기 바지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이물감에 신음을 내뱉었다. 굳게 닫혀있던 주머니를 하루카의 손이 비집고 들어온다.
    얇은 주머니 천 너머로 치하야의 체온은 그대로 하루카의 손을 감싼다. 부드러우면서도 탄탄한 허벅지의 탄력. 물론 하루카는 그런 감촉을 즐기기 보다는 열쇠를 찾는 데 집중했다.
    “어라, 여기가 아닌가.”
    꼼지락꼼지락 깊숙이 치하야의 주머니를 헤집고 다니다가, 결국 손에 잡히는 게 없자 하루카는 손을 뺐다. 그리곤 반대편 주머니에 쑥 손을 넣었다.
    “흐야…….”
    불편한지, 이상한지 치하야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그때 하루카의 손    끝에 딱딱한 열쇠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루카는 바로 손가락을 움직여 열쇠를 주머니에서 빼냈다.
    하루카는 여전히 치하야의 허리에 손을 감아 부축한 채, 다른 손으로 열쇠를 집어 잠긴 치하야의 집 문 열쇠구멍에 넣었다. 돌리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치하야의 집은 불이 꺼져 깜깜하고 황량했다. 하루카가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 등이 팟 켜졌다.
    현관 등에 보이는 집안 풍경은 쓸쓸했다. 혼자 자취하는 데다 가구도 적은 탓에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카는 치하야를 조심스레 바닥 위로 내려놓았다. 치하야는 입을 우물거리더니, 몸을 꼼지락 움직이며 옆의 벽에 머리를 폭 기댔다.
    “휴우, 어떻게 도착은 했네.”
    현관에 서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루카는 치하야의 상태를 살폈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치하야. 새근새근 내쉬는 숨소리를 들어보면 아무래도 자는 모양이다. 하루카는 치하야를 보며 고민했다.
    ‘일단 치하야를 깨워야 할 텐데. 찬물이라도 떠서 먹여야하나.’
    이대로 현관 앞에 내버려두고 가는 건 친구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잠든 치하야를 하루카 혼자서 전부 챙기기도 어려우니, 일단 치하야를 깨우는 게 우선이다.
    하루카는 치하야를 넘어 살금살금 치하야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전에 와본 적이 있었기에, 하루카는 헤매지 않고 바로 주방 쪽으로 가서 컵을 들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따랐다.
    차가운 컵을 한 손에 들고 하루카는 종종걸음으로 현관에서 잠든 치하야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옆에 쪼그려 앉아 물 컵을 치하야의 입 가까이로 가져갔다.
    “치하야, 찬물 좀 마셔봐.”
    “으응…….”
    하루카가 컵을 치하야의 입술에 조심스레 가져다 대자, 닫혀있던 치하야의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하루카는 컵을 천천히 기울여 치하야에게 물을 먹이려했다.
    그때 치하야의 입술이 다시 닫혔다.
    “꺅!”
    닫힌 입술 위로 주륵 흐르는 물은 아래로 떨어진다. 하루카가 황급히 컵을 내려놓고 손으로 막으려했지만 이미 물은 흘러 치하야의 셔츠를 축축이 적셨다.
    “우으, 차가워….”
    비몽사몽간에도 축축함은 느껴졌는지, 치하야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은 치하야의 가슴팍에 떨어져 셔츠에 짙은 물 자국을 만들어버렸다.
    “어떡하지. 치하야 이대로 있으면 감기 걸릴 텐데.”
    하루카는 어쩌지 못하고 손을 허둥지둥 댔다. 방 안이라도 추운 날씨다. 쌀쌀한 날씨에 옷에 찬물을 적신 채 있다간 내일 어찌될지 모른다.
    “하루카아….”
    옷이 젖었는데도 치하야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술기운 탓인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치하야는 이제 벽에 등도 제대로 기대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음…….”
    “앗, 자, 잠깐!”
    아예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치하야를 하루카가 재빨리 받아냈다. 치하야의 머리가 하루카의 가슴팍에 떨어진다. 축축이 젖은 셔츠 때문인지 하루카의 품에 안긴 치하야에게선 한기마저 느껴졌다.
    “어떻게든 옷을 해결해야겠는데. 우우, 하지만 치하야가 놔주질 않으니.”
    한번 하루카에 안긴 치하야는 그 품이 편한지 손으로 하루카의 옷깃을 잡고 편히 자리잡아버렸다.
    “푹신해…….”
    “꺅, 잠깐 치하야 간지러워!”
    치하야가 꼼지락 머리를 움직이자 하루카의 가슴이 짓눌러졌다. 같은 여자아이끼리라서 이상한 기분이 든다든가, 그런 건 없었지만 남의 머리가 가슴을 누른다는 감촉은 몸을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큿…….”
    왠지 모를 소리를 내며, 치하야의 몸이 흘러내린다. 치하야는 하루카의 가슴에서 떨어져 배를 지나 웅크려 앉은 하루카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가슴에 달라붙는 것보단 차라리 이렇게 허벅지를 내주는 편이 나았기에 하루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스……. 스으…….”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치하야는 하루카의 허벅지를 베개 삼고 몸을 엎드린 채 쭉 뻗었다. 셔츠가 젖은 것 빼곤 완벽히 숙면을 취하는 자세였다.
    하루카도 치하야가 안정에 취하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정말 잘 자네…치하야, 많이 피곤했었어?”
    입가에 미소를 띠며 하루카는 잠에 빠진 치하야의 얼굴을 내려 봤다.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카는 손을 들어 바닥에 흐트러진 치하야의 푸른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머릿결은 부드러웠다. 정수리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결을 따라 손을 움직인다. 처음 하루카의 손이 닿았을 때 치하야는 움찔했지만 그 움직임이 마음에 들었는지 몸을 완전히 맡겼다.
    스륵, 새근새근. 고요한 치하야의 방안에선 잠든 치하야의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어린아이를 쓰다듬듯 치하야의 머리를 매만지던 하루카는 손을 떼고 벽에 붙어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이런 시간이구나. 열차는 못 타겠네.’
    막차 시간은 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역까지 가는 시간을 합치면 막차는 힘들었다. 택시를 탈거리는 아니니 결국 오늘 집에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그럼 치하야 집에서 자야 할 텐데, 정작 집주인인 치하야는.’
    기분 좋게 평온한 표정으로 하루카의 허벅지를 베고 자는 중이었다.
    ‘옷 많이 축축할 텐데 정말 잘 자네. 끙, 이대로 계속 있을 순 없는데.’
    지금 편안하다고 해도 치하야는 옷을 갈아입어야했다. 하루카도 마찬가지. 외출복인 상태로 잠을 잘 순 없다. 또 씻기도 해야 했고.
    ‘치하야를 깨워야하나. 으으, 하지만 너무 잘 자고 있어서 깨우기 미안한데. 어쩌지.’
    치하야를 내려 보며 하루카는 심각히 고민했다. 하루카는 입을 살며시 열었다.
    “치하야.”
    대답은 없다. 새액새액, 얌전한 숨소리만 돌아온다.
    이번엔 좀 대담하게 하루카는 잠든 치하야의 어깨에 손을 얹어 살짝 흔들었다.
    “치하야, 치하야.”
    하루카는 차마 손에 힘을 주지는 못해서 치하야의 가냘픈 몸을 슬쩍슬쩍 움직였다.
    “으응…….”
    그제야 반응이 나왔다. 치하야의 입이 은근히 열렸다. 하루카는 치하야가 눈을 뜨길 기대했다.
    굳게 닫혀만 있던 치하야의 눈꺼풀이 스르르 떠졌다. 초점이 흐릿한 연갈색 눈동자가 파르르 움직이더니 하루카를 바라본다.
    “하루카아……?”
    힘 빠진 치하야의 목소리는 비몽사몽에 젖어있었다. 하루카의 얼굴이 밝아졌다.
    “치하야 일어났어?”
    “응…….”
    “정신 좀 들어?”
    “응…….”
    똑같은 대답. 어째 눈동자에도 초점이 돌아오지 않는다. 깜빡깜빡 감기는 치하야의 눈꺼풀도 불안했다.
    설마 아직도 꿈속인건.
    “치하야……?”
    “츄워어…우으…….”
    치하야는 하루카의 허벅지를 벤 채 몸을 웅크렸다.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하루카는 여전히 치하야가 잠에 빠져있다는 걸 실감했다.
    ‘에휴, 이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네.’
    하루카는 굳게 마음을 먹었다. 치하야는 도저히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우선 하루카는 치하야의 머리가 자신의 허벅지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몸을 기울이고 팔을 길게 뻗어 테이블 옆에 놓인 방석을 집었다. 이제 한 손으론 치하야의 머리를 조심히 든 다음 재빨리 방석을 그 아래에 밀어 넣었다. 치하야의 머리는 무사히 방석 위에 안착했다.
    “휴우.”
    일단 치하야한테서 자유로워진 하루카는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하야는 여전히 쿨쿨 자는 중이었다. 하루카는 그런 치하야를 놔두고 벽 한 편의 옷장을 열었다.
    ‘우선 옷부터 갈아입히자. 역시 저대로 있으면 치하야 감기 걸릴 거야.’
    옷장 안은 보기보다 넓지 않았다. 옷장은 몇 칸으로 구분되어있다. 상의가 걸려있는 공간, 하의가 있는 공간, 그리고 아래쪽엔 서랍이 있다. 여자애치고는 그리 많지 않은 옷가지는 크지 않은 옷장을 넓어 보이게 만들었다.
    눈에 익은 옷들을 훑으며 하루카는 편하게 입을 만한 옷들을 찾았다. 치하야가 입을 것과 자신이 입을 것 모두를 고른 뒤 하루카는 문득 손을 멈췄다.
    ‘속옷도 필요하려나. 아래는……괜찮겠고, 일단 위는 물에 젖었을 테니 갈아입혀야겠어.’
    하루카는 서랍을 열었다. 서랍은 위에서부터 네 칸으로 되어있는데, 하루카는 맨 위부터 차근차근 열어나갔다.
    맨 위 칸은 모자나 손수건 등이 들어있었다. 하루카는 아래 칸으로 향했다.
    “우와아, 정리 잘 되어있네….”
    칸을 차곡차곡 메운 속옷들은 전부 정성스레 개켜있다. 꼼꼼한 치하야의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광경에 하루카는 감탄했다.
    “치하야 이런 속옷도 입는구나…….”
    하루카는 형형색색의 속옷으로 가득한 공간을 계속 바라봤다. 아래 속옷은 괜찮으니 다음 칸으로 향해야했는데도, 하루카는 요지부동이었다.
    “와와와, 이렇게 대담한 걸…! 치하야 대단해…!”
    어느새 하루카는 치하야의 속옷을 하나 꺼내들어 펼쳐봤다. 검정색에 뇌쇄적인 디자인의 속옷. 친구의 숨겨진 비밀에 직면한 하루카는 깜짝 놀라했다.
    “웅…….”
    때마침 들려오는 치하야의 잠꼬대에 하루카는 몸을 크게 움찔했다. 그 소리에 하루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루카는 속옷을 다시 제자리에 넣고 칸을 닫았다. 하루카가 다음 칸을 열자 그곳엔 하루카가 찾던 물건들이 있었다.
    “어라……?”
    안의 ‘물건들’을 보자, 하루카의 몸이 굳었다.
    가슴을 모아준다거나 키워준다는 보정속옷이 한가득, 정말 모든 회사별로 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일반 브래지어 몇 개(자세히 보니 거의 다 패드가 붙어있었다), 스포츠브라 몇 개 등등. 칸이 꽉 차도록 가득한 온갖 속옷의 향연에 그만 하루카는 말을 잃어버렸다.
    “…….”
    하루카는 처연한 눈으로 바닥에서 누워 자는 치하야를 바라봤다.
    많이 힘들었지, 친구니까 좀 더 신경 썼어야했는데. 죄책감이 파도처럼 몰려와 하루카의 마음을 덮쳤다.
    하루카는 눈물을 머금는 심정으로 파랑색 브래지어 하나를 골랐다. 치하야가 깨어있었다면 보정속옷을 입으려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편안한 잠자리를 보장하기 위해 하루카는 일반 속옷을 택했다.
    이제 목적을 이룬 하루카는 서랍을 닫고 옷가지와 수건을 챙긴 다음 잠든 치하야의 곁에 다가갔다.
    “치하야, 옷 갈아입어야지.”
    “흐우…….”
    여전히 계속되는 잠꼬대. 치하야 스스로 갈아입는다는 건 역시 무리였다. 결국 하루카는 양손을 들어 치하야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치하야, 옷 갈아입힐 테니 불편해도 좀 참아줘.”
    치하야가 알아들을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그렇게 선고하고, 하루카는 치하야의 상의에 손을 가져갔다.
    상의는 셔츠여서 벗기기 편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끌렀다. 물에 젖은 축축한 셔츠의 단추를 전부 풀자, 치하야의 새하얀 피부와 가슴을 수줍게 가린 속옷이 겉에 드러났다.
    치하야의 허리는 가늘었다. 여자인 하루카가 보기에도 무나. 양손을 쫙 펼쳐 감싸면 허리가 다 가려지지 않을까하는 착시마저 들게 했다.
    하루카는 손을 옆으로 펴 치하야의 허리둘레를 대강 재어보곤 비교해보기 위해 손을 자신의 허리에 가져가려다가 바로 그만두었다. 슬픈 현실은 확인하지 않아도 슬픈 법이다.
    ‘그런데 치하야 이렇게 보니까 왠지….’
    하루카의 아래 치하야는 누워있다. 부채처럼 바닥에 펼쳐진 긴 파란색 머리카락. 물기를 머금은 채 풀려 늘어진 셔츠. 무척이나 흰 속살. 앙증맞은 배꼽엔 아까 흘린 물 한 방울이 고였고, 그 위로 시선을 올리면 가슴을 감싼 속옷이 보인다.
    “으응…….”
    추운지 치하야의 닫힌 입술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하루카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빨리 옷을 갈아입혀야하는데, 계속, 계속 시선이 가버린다. 치하야는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스타일도 정말 좋고. 부러울지도. 치하야…….
    ‘으으, 안 돼 안 돼.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하루카는 고개를 홱홱 저었다. 이상한 쪽에 생각이 빠지면 안 된다. 지금은 옷 갈아입히는 게 최우선이니까.
    결심한 하루카는 치하야의 속옷에 손을 가져갔다. 치하야의 속옷 역시 물에 젖어있다. 하루카는 속옷을 벗기기 위해 천천히 살폈다. 속옷을 끄르기 위한 후크는 앞쪽엔 없었다.
    “치하야, 잠시만 실례할게.”
    하루카는 손으로 치하야의 몸을 조심스레 움직여 후크가 보이도록 했다. 하루카는 능숙히 후크를 끌렀다. 치하야의 가슴을 고정하든 속옷이 스르륵 헐렁해진다. 하루카는 천천히 치하야가 불편하지 않도록 속옷을 벗겨냈다.
    치하야가 움찔 몸을 들썩이자, 치하야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속옷 한 장 걸치지 않은 치하야의 상체가 하루카의 눈 가득 들어왔다. 멍울 두 덩이와 봉긋이 솟은 분홍빛 돌기. 하루카는 얼굴을 붉히며 치하야로부터 눈을 돌렸다.
    ‘으으, 왜 이렇게 떨리지. 전에 몇 번이나 봤었는데.’
    하루카는 같이 목욕했을 때, 의상 갈아입을 때 몇 번 치하야의 알몸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왠지 다른 기분이 뭉게뭉게 들었다. 열이 스윽 올라와 얼굴을 데운다. 뜨겁다. 쑥스러웠다.
    하루카는 치하야를 보지 않은 채 수건을 쥐었다. 빨리 닦고 끝내야지. 빨리. 이러다간 이상해질 거야.
    하루카는 수건을 들어 조심조심 치하야의 몸에 가져다댔다. 우선은 배에.
    “하읏!”
    움찔하며 터지는 탄성. 맨살에 닦는 수건의 감촉에 놀란 걸까. 하루카는 당황해 치하야의 기색을 살폈다. 다행히 깨어난 거 같지는 않다.
    하루카는 더욱더 조심히 수건으로 치하야의 배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치하야는 몸을 몇 번 움찔할 뿐 큰 저항은 없었다. 배를 다 닦자 하루카의 손이 위로 올라갔다.
    이제 가슴이 남았다. 수건을 든 하루카의 손이 멈췄다.
    ‘무념, 무념, 아무 생각하지 말고…….’
    같은 여자의 가슴을 닦아줄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긴장되는 건지. 가장 친한 친구일 뿐인데.
    ‘치하야가 너무 예뻐서 그런 거야 분명.’
    자신의 긴장된 마음을 치하야 탓으로 돌리며 하루카는 수건을 치하야의 가슴에 댔다.
    “음…….”
    치하야의 작게 벌린 입에서 새어나오는 숨이 짙게 섞인 소리. 하루카는 수건을 움직인다. 수건 너머 느껴지는 살덩이의 탄력. 위 아래로 스윽 훑는 동안에 살짝 걸리는 돌기.
    심장이 뛴다. 하루카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손 안 수건에선 치하야의 심장 박동이 느껴진다. 두근, 두근. 두근두근.
    온몸이 심장이 된 듯한 경험 끝에 드디어 하루카는 치하야의 몸에서 손을 뗐다.
    “휴우.”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치하야의 몸을 닦는 순간은 찰나처럼 영원처럼 지나가버렸다.
    상체를 닦으면서 경험한 날선 긴장이 빠지자, 하체는 한결 편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청바지를 벗기고 옷장에서 꺼낸 바지를 입혔다. 다음은 상체. 하루카는 치하야에게 속옷을 입히고, 후크를 채웠다. 바로 남은 상의를 마저 입혔다.
    벗긴 옷가지를 한군데에 모아두는 걸로 옷 갈아입히기가 끝났다. 하루카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잠든 치하야를 보며 한시름 덜었다.
    “치하야, 이제 침대로 가자.”
    하루카는 치하야의 몸을 조심히 일으켜 침대 위로 올려놨다. 말을 알아들은 건지 치하야도 잠결에 따라 움직여주어 훨씬 수월했다.
    하루카는 치하야가 춥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줬다. 새액새액 숨소리를 내며 치하야는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루카는 빙그레 웃었다.
    “이걸로 끝! 에고고, 나도 쉬어야지.”
    하루카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치하야를 챙기느라 신경을 하도 써선지 몸이 빳빳했다. 쭉쭉 팔을 뻗어 스트레칭을 하며, 하루카는 이제 자신을 챙겼다.
    치하야가 침대 위에서 곤히 자는 동안, 하루카는 욕실을 빌려 씻고 치하야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루카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툭툭 닦으며 밖으로 나와 침대 위를 보자, 치하야는 몸을 오른쪽으로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치하야의 표정이 하루카의 눈에 바로 들어왔다. 아기천사처럼 평온한 표정.
    하루카는 피식 웃으며 수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렇게 쿨쿨 잘만 자니 괘씸해. 치하야.”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읊조리는 하루카의 말에 대답은 없었다. 하루카는 이불을 들춰 치하야 맞은편으로 꼼지락 기어들어가 누웠다.
    하루카는 왼쪽으로 몸을 웅크렸다. 치하야의 얼굴이 눈앞에서 바라보였다. 고운 호선을 그리며 닫힌 눈가엔 긴 속눈썹이 있다. 스으, 스으. 치하야의 숨이 하루카의 볼에 닿는다.
    코앞에서 바라보는 치하야는 예뻤다. 모든 근심을 잊은 듯한 치하야의 잠든 얼굴을 독점하는 기분에, 하루카는 왠지 뿌듯했다.
    하루카는 검지를 뻗어 치하야의 볼을 쿡쿡 찔러봤다. 간지러운지 치하야의 표정이 조금씩 변한다. 그게 귀여워 하루카는 피식피식 웃었다.
    이번엔 하루카는 치하야의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조심스레 훑어봤다. 물기가 없어져 보드라운 머릿결의 감촉. 하루카는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뗐다.
    침대에선 치하야의 체온이 느껴졌다. 하루카의 마음과 표정은 온기에 감싸여 누그려졌다.
    이제 쉴 시간이 찾아왔다. 바로 옆에 누운 치하야의 존재가 확실히 느껴졌다. 소중한 친구.
    항상 똑 부러지고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치하야. 하지만 오늘처럼 연약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홀로 놔두지 못한다.
    툭, 하루카의 손에 치하야의 손이 닿았다. 잠결에 움직인 걸까. 하루카는 치하야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슬금슬금 올라오는 잠기운에 하루카는 서서히 젖어갔다. 천천히 감기는 눈꺼풀. 치하야의 잠든 표정이 점점 흐릿해진다.
    맞닿은 손에선 두 사람의 체온이 계속 이어진다. 잠이 서로의 정신을 앗아갈지라도 손은 줄곧 이어진다. 마음도 함께.
    완전히 잠들기 직전에 하루카의 입이 작게 열렸다.
    “…좋은 꿈꿔, 치하야.”




하루치하 글입니다. 즉흥적으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이렇게나 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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