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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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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1, 2016 00:43에 작성됨.

그녀를 보기가 안쓰러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요즘 들어 억지로 반짝이는 그 눈 때문이다. 엄청나게 호기심에 빛나고 아이 같던 눈은 영업용 미소와 억지 눈웃음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바보들이 아니었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그러니까 처음 길거리에서 레이카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당시에 도심 벤치에 앉아서 풍선을 불고 있던 그녀는 풍선을 다 묶자마자 내가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 알아채었다.

 

키타카미 레이카 - 20세 어린이, 등산을 좋아하는 4차원 아이돌

 

나는 길거리에서 풍선을 부는 스무 살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고 나를 보자마자 풍선을 내밀면서 같이 놀자고 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더더욱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풍선을 슥 밀어 그녀 쪽으로 가게 했다.

그녀는 풍선을 받더니 이내 내 쪽으로 강 스파이크를 날렸다. 풍선은 만만치 않은 속도로 내 얼굴에 퍽 부딪혔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스파이크를 날리던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었다.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미소였다.

그 길로 나는 그녀를 765 사무소에 데리고 갔다. 특기가 등산이고 늘씬한 몸매에 녹청빛이 도는 머리를 두 갈래로 묶고 있는 그녀는 사장님의 앞에서도 나한테 풍선을 날리던 미소 그대로 있었다. 팅 하고 왔다는 것이 이런 거겠지.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한 셈이 되었다. 미라이나 코토하를 스카우트할 때와는 다른 종류의 떨림. 하지만 그 때는 그냥 팅 하고 왔으려니 싶었다. 그냥 엄청난 재목을 데려왔을 거라는 느낌.

이내 그녀는 극장 사람들과 삽시간에 친해졌다. 주로 풍선을 불거나 풍선껌을 불거나 아니면 대화의 산을 오르거나 하면서 이상한 방법이지만 어떻게든 그녀는 친해졌다. 정말로 이상했지만 난 그런 대로 기분이 좋았다.

이상하다는 건 그러니까 보통 스무 살의 인간이 가질 법한 행동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일곱 살 아이가 몸만 스무 살로 되어 버린 듯도 했지만 가끔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걸 보면 스무 살처럼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처음으로 작은 공연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어느샌가 레이카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뛰놀면서 즐겁게 살다 보면 삶도 아이돌도 잘 되지 않을까. 늘씬한 몸으로 슥슥 추는 댄스는 완벽했고 노랫소리는 누가 들어도 즐거웠으니까.

그 때 내가 어땠는지 들어 보면 모든 세상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었다 증언한다. 지금에야 생각하면 그것이 사랑에 빠진 상태라고 할 수 있었지만 그 때 나는 레이카의 어느 부분을 봐도 좋았다.

말하자면 콩깍지가 씌인 채로 프로듀스를 한 것이다. 그러니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 리가 없었고 처음으로 나간 라이브의 결과는 당연히 참혹한 실패였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레이카는 이토록 아름다운데.

축 처져 있던 나한테 레이카는 괜찮다면서 언제나처럼 꼭 안아주었다. 역시나 이 때도 몰랐었다. 미친 듯이 가슴이 뛰는 것은 죄책감 때문인 것 같았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또한 말이다. 어찌어찌 안심은 되었던 것 같다.

실패 이후에 레이카의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 아침마다 달려와서 안는다던가 동료들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던가 하는 행동들이 적어졌다. 연습실의 분위기도 진지해지고 요컨대, 레이카는 드디어 의젓해졌다.

살짝 느슨하던 댄스는 조금씩 절도가 생겼고 다소 힘이 빠진 듯한 노랫소리에도 자신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절치부심하여 다시 나간 라이브는 당연히 대성공이었고 그녀는 날개가 돋은 듯이 위로 위로 올라갔다. 떨어질 줄 모르고.

이맘때쯤 그녀에 대한 마음을 포기한 것 같았다. 사랑한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 상태에서 마음을 포기한다니 웃기는 소리지만 말하자면 그녀가 다른 극장 친구들처럼 '보통 아이돌'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더 이상 그녀의 미소는 후광이라도 있는 듯이 반짝이지 않았다. 하나하나 사랑스럽던 행동들도 가끔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들도 그저 키타카미 레이카라는 한 사람의 캐릭터가 될 뿐이었다. 보통 아이돌에게 보통의 프로듀스를 할 뿐.

레이카는 다른 극장 아이돌들보다 훨씬 먼저 성공했다. 넓은 무대에서 그녀는 자유롭게 노닐었다. 4차원 토크로 잘 알려진 그녀는 예능계에서도 매일 러브콜을 받았다. 잘 짜여진 캐릭터와 그를 뒷받침하는 실력. 완전히 톱 아이돌이다.

그렇게 되기까지가 약 육 개월. 그 때까지 레이카는 나한테 안겨들지도, 예전처럼 풍선을 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레이카는 극장 애들한테는 언제나 장난스러웠는데, 특히 같은 유닛 멤버였던 시호한테는 좀 곤란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시호는 나한테 일종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네나 카나의 장난에는 엄격하면서도 레이카한테만은 무언가 약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논박했을 장난을 얼버무린다던가, 어느샌가 몸을 맡긴다던가.

그 날도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고 일을 나갔었다. 시호와의 듀엣 무대는 완벽했고 레이카는 늘 그렇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MC가 무대 뒤편에서 언제나처럼 둘을 칭찬하면서 슥 던진 말이다.

 

"근데 레이카 쨩, 미소가 예전 같지 않아."

 

"예전이라 하면 어떤 때인가요~? 음, 어릴 때려나?"
"나, 사실 이 P라는 양반이 초대해서 레이카 쨩의 첫 라이브에 갔었거든."
"...첫 라이브라면?"
"대실패였던 그 라이브 말야. 레이카 쨩,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거든."

그러자 레이카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한 번도. 하지만 한 번은 보았어야 할지도 몰랐을 모습을 말이다.
...그녀는 웃는 표정 그대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시호는 그 모습을 몇 번 본 적 있는 건지 손수건을 꺼내 주저앉아 우는 레이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MC는 연신 미안하다면서 나랑 레이카한테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때 레이카와 같이 집에 가겠다면서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던 시호의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혼자 집에 돌아가면서 나는 레이카를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인지 계속해서 곱씹으면서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자 시호한테 메일이 와 있었다. 나는 그 길로 미친 듯이 차를 달려서(과속 벌금도 5만 엔이나 물었었다) 병원으로 달려갔다. 진단명은 과로. 그리고 우울증. 그리고... 너무나도 수척한 레이카의 얼굴.

멍하니 병실에 서 있는 나에게 레이카는 싱긋 웃어주었다. 그러니까... 분명 내가 제일 처음에 봤던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는 아니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레이카는 너무나도 연약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스무 살 어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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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해요, 프로듀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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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 이제야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좋아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프로듀서 씨가 저한테 풍선을 날려 주셨을 때부터요."
"....."
".....죄송해요. 역시나 너무 어린애 같았죠..."

시호가 병실 문을 닫고 나갔고 그 뒤로 레이카는 내가 믿지도 못할 이야기를 쉬지도 않고 했다. 라이브가 실패하고 내가 축 처져 있었던 이야기,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
역시나 아이돌 같은 건 무리 같았다는 이야기.

"프로듀서 씨가 좋아해 주신다면, 그걸로 기뻤어요. 캐릭터를 만들고 레슨을 하고 놀고 싶은 마음도 억눌렀어요. 하지만 저는 너무 어린애였나 봐요. 프로듀서 씨가 봐 주지 않으시니까, 프로듀서 씨가 저를 보통 아이돌로 봐 주시니까. 언제쯤 봐 주실까, 아이돌로서 노력해도 괜찮은 건가, 처음 765에 왔을 때는 생각도 못 했던 거였어요. 노래하고 춤추는 게 좋았지만 결국은, 인정받고 싶은 어린애였나봐요. 죄송해요."
죽고 싶을 정도로 미안한 건 이 쪽이었다.

그 때서야 나는 레이카가 안아 주었을 때 느꼈던 두근거림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처음에 그 미소를 보았을 때 느낀 떨림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을 해도 아름다워 보였던 것은 무슨 이유였는지 알게 되었다. 정말로 간단한 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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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안해."

"...그리고 나도 좋아해, 레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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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신호라도 된 듯이 레이카는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처음으로 두근거렸던 그 때의 무대 뒤처럼 레이카를 꼭 안아 주었다. 그 때 레이카는 이런 말을 한 것 같았다.
"괜찮아, 괜찮아, 행복한 생각, 행복한 생각!"

펑펑 울고 난 뒤 레이카의 몸 상태는 거짓말처럼 좋아졌다. 등산을 하던 몸이다 보니 체력이 빨리 회복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울증은 잘 낫지 않는 모양인지 무대가 끝나면 항상 안아 주어야 안심했다.

그렇게 안아 주던 어느 날에는 레이카의 몸이 조금 위로 향한다 싶더니 그대로 입술에 부드러운 흔적이 남아버렸다.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웃는다. 아마도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눈부신 미소 같기도 하다.

일이 해결되고 나자 시호가 말한 바로는, 레이카가 쓰러지기 전에 이미 자신은 레이카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빨리 눈치채길 바랐던 거라고. 그런 걸 말하는 게 부끄럽기도 했던 거겠지만.

그렇게 다 잘 된 일이다. 20살짜리 어린애였지만 착실하기도 하고, 하지만 어린애. 내 손이 많이 필요한 어린애. 또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내 연인. 처음의 그 미소를 되찾은 최고의 아이돌.

"프로듀서 씨!"
"왜 그래 레이... 으와악!"
풍선이 내 얼굴에 적중했다. 잠시 희미해진 시야 너머로 장난꾸러기처럼 웃는 레이카가 보인다.
"명중♪ 역시 프로듀서 씨는 좋은 과녁이네요♬"
"지지 않는다!"
"꺄아☆"

 

 

 

트위터에 스레드 형식으로 올린 글을 엮어서 올려 보았습니다. 소재는 시호가 나왔을 때 짐작하셨겠지만 piece of cake! 키타카미 레이카는 여신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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