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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Idol) [후미카x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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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9, 2016 17:55에 작성됨.

이 글은 미카미 엔 작가의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별 스포일러는 없지만, 기본적인 인물 관계를 더 아시고 보면 감상에 도움이 될 듯합니다.

물론 모르시고 봐도 내용에 크게 지장은 없으니, 긴 글이지만 부디 끝까지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늘에는 뜨거운 태양이 작열한다. 참으로 성가신 태양이다.

 

그다지 이른 아침은 아니었지만, 도쿄의 한적한 골목에 있는 이 서점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였다. 이따금 냉방과 제습을 위한 에어컨이 웅웅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카운터에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긴 흑발의 여성이, 쭈욱 기지개를 편다.

수십 년 전의 어둠에 싸인 미제사건(未濟事件)의 늪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에 약간은 현기증을 느끼며.

 

그녀의 이름은 사기사와 후미카, 19세, 대학생이다.

 

사실 이 단편적인 말들로 그녀를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 아이돌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에게 스카우트를 받아 아이돌로 데뷔하였으며, 신인임에도 꽤나 인기를 얻었다.

지금은 간만의 휴가를 받아서, 예전처럼 삼촌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만, 평소에는 여러 가지 일거리가 들어와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사실 그런 것보다는, 그녀를 설명하기에 가장 알맞은 키워드는 ‘책’이었다.

 

책을 읽을 때만큼은, 현실의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괴리(乖離)되어 책 속의 세상에 푸욱 빠지는 경험이 그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했다.

그렇기에 나가노에서 상경하여 도쿄 유수의 대학의 문학과에 진학한 것이리라.

 

휴가라 하면, 보통 사람들이라면 휴양지나 관광지, 아니면 적어도 자신의 방구석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당연한 듯이 데뷔 전부터 종종 아르바이트를 하던 가게로 돌아왔다. 그 이유는 그저 이곳이 책으로 둘러싸인 공간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지식의 성전(聖傳)이자, 지식의 상아탑(象牙塔)-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녀와 생각과는 다른지, 휴가 첫날인 오늘, 아침부터 손님은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월말에 나오는 월간 잡지를 사러온 노인 한 분과, 곧 있을 센터시험을 대비하여 수험서를 몇 권 사간 수험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정도가 다였다.

 

그렇다. 사기사와 후미카는 오늘 거의 방해 없이, 책으로 둘러싸인 그녀만의 천국에서, 누구보다 농밀한 독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한참 책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가게 문이 열리며, 부착된 방울 소리가 딸랑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인사를 하려는 그녀에게, 사십대 중반의 살짝 머리가 벗겨진 남성이 말을 건넸다.

 

“다녀왔다. 휴가 첫날부터 고생이 많구나.”

 

근처 지역에 고서를 매입하러 간 그녀의 삼촌이었다.

 

그가 주인으로 있는 이 ‘사기사와 서점(鷺沢書店)’은 규모에 비하여 꽤나 많은 양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최신 서적은 물론, 약간의 고서(古書)도 취급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간단하게 고서의 매입이나 매매도 진행하였다.

 

보통 고서 매입은 매입하려는 사람이 와서 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에는 직접 찾아가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번 같은 경우가 그러하였다. 고서를 팔려는 사람이, 거동이 불편한 노인 분이셨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삼촌. 제가 좋아서 하겠다고 한 일인걸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하는 그녀.

 

“근데 한참 인기가도인 네가, 이런 알바를 해도 되는 거냐?”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조카에게 장난을 건다.

 

“아... 아니에요! 아직 저는 신인이고... 헤어 스타일이나 메이크업도 무대에 설 때랑은 다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오...”

화들짝 놀란 듯 고개를 붕붕 저으며 대답하는 그녀.

 

“하하, 농담이다. 오히려 난 정말로 고맙지. 계산대의 미인을 보고 지나가던 손님들까지 다 들어와서 매출 200% 상승. 이렇게 되는거 아니냐? 하하!”

 

“......”

오히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다.

 

“......”

그런 반응에 그도 머쓱해진다.

농담을 던졌지만, 평소의 조카다운 반응이다. 아이돌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좀 더 밝아졌다고 생각했는데.

가만있기 뭣했는지 한마디 덧붙인다.

 

“그래서... 오전에 손님은 많이 오셨니?”

 

“... 딱히요. 잡지를 사러 오신 분이 한분, 그리고 수험서를 사러 오신 분이 한분. 이렇게 다 였어요.”

평소와 같은 말투로 돌아온 그녀.

 

“...”

“......”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후미카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괴로워했다.

방금도 적당한 말을 찾으려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원래도 자신이 말주변이 없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돌 데뷔 이후로 그것을 더욱 크게 실감하고 있는 차였다.

활달하고 밝은 성격의 동료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논리정연하고 조리 있게 말을 잘하는 동료들도 많다.

자신도 예전보다는 꽤 나아졌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녀들과 비교하면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재치 있게 삼촌의 농담을 받아쳤다면, 이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미카는 그것이 가장 괴로웠다.

 

예전 같았으면 이러다가 다시 책으로 눈을 돌렸겠지. 도망치는 것이다. 책속으로.

 

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아이돌 생활에서도 배운 것이 있다면, 문제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조카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려는 삼촌.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가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내딛었다.

 

“저... 그 고서 매입 건은 어떻게 되었나요?”

말을 고르며 겨우 대화를 재개했다.

 

“아... 그거라면 여기 있단다. 너도 와서 좀 볼래?”

예상치 못한 후미카의 질문이었는지 약간은 당황한 그였지만, 이내 예의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럽게 책을 꺼낸다.

 

파라핀지로 싸인 한권의 책이었다.

 

파라핀지를 조심스럽게 벗기니, 붉은 색 바탕에, 무언가 식물 같은 것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손글씨같은 필체로 ‘인간실격(人間失格)’이라고 적혀있었고, 구석에는 다자이 오사무(太宰 治) 라고 적혀 있었다.

 

“...!”

후미카는 놀란듯이 눈을 크게 뜬다.

인간 실격이라면 일본의 대문호(大文豪)였던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쓰던 그의 유서와도 같은 작품이 아닌가.

“어떤 책인지 알겠어?”

 

“그럼요, 이건 다자이 오사무가 1948년에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나온 장편소설인 ‘인간실격’이에요. 원래는 잡지 〈전망〉을 통해 3회 동안 연재했었고, 이후 지쿠마쇼보를 통해서 문고본으로 발매되었죠.”

그녀는 척추를 곧게 펴고, 고개를 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그녀도 스스로 자각 하지 못한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책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도 달라지고, 누구보다도 달변가가 되었다.

평소에 사람 눈도 잘 못 맞추고, 말도 더듬거리는 그녀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역시 잘 아는구나. 그래, 이게 바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초판본이다. 더 놀라운걸 보여줄까? 책 끝부분의 면지(面紙)를 보렴.”

 

의문스러운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는 책을 뒤집어 마지막 페이지의 면지를 펼치자, 거기에 적혀있는 것은 놀랍게도.

 

太宰 治(다자이 오사무)라고 적힌 약간은 거친 필적이었다.

 

요컨대 이 책은, 작가의 친필 싸인 초판본이라는 말이다.

 

“이...이거 진품인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는 후미카. 다자이 오사무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일본 문학사에 남긴 족적 만큼은 인정하는 그녀였다.

그렇기에, 이게 진품이라면 엄청난 가치를 지니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저기... 그게 말이지, 거기서도 한참동안 확인했고, 오면서도 계속 봤지만 확답은 못 내리겠다.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말이지.”

 

그녀가 아는 한, 삼촌은 고서에도 꽤나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이렇게 자신 없어 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희귀한 고서를 다루게 된 것은 처음이라 그럴지도 모르리라.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이 말을 고르며, 그는 말을 잇는다.

“그래서 말인데... 나보다 고서를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얻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내 지인 중에 고서당을 운영하는 분이 계신데... 아니 계셨었지. 얼마 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때부터 그분의 딸이 고서당을 물려받아서 운영하고 있는데, 다자이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그분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도와 줄 수 있겠니?”

 

“...네?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가 어떻게...?”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후미카.

 

“내일 카마쿠라 쪽으로 다녀 와줘야겠다. 이 책을 들고. 괜찮겠니?”

 

“...네??”

 

“그 고서당은 ‘비블리아 고서당’이라고 하는 곳인데, 키타카마쿠라 역 쪽에 있지. 내가 직접 갈까도 했는데, 오늘 오후부터 내일까지 계속해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이런 말을 해서 좀 그렇기는 하지만, 모처럼의 휴가인데, 간만의 여행도 겸해서, 어떻겠니?“

 

즉, 지금 삼촌은 그녀에게 가까운 지역으로의 전철 여행을 권유하는 것이다.

 

워낙 급작스러운 제안이라 당황스러웠지만, 겨우 생각을 정리해서 대답한다.

 

“...저기,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전 다른 사람하고도 잘 대화도 못 나누고, 특히 처음보는 사람과는... 게다가 고서에 관한 지식도 부족하고...”

 

“허허, 그래서 고서를 잘 아는 사람에게 보내는 게 아니겠나. 우리는 지금 고서를 팔러 가는 게 아니야. 감정을 부탁하려는 거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게다가, 이건 내 느낌일 뿐이지만, 너와 그 사장 아가씨랑은 잘 맞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마지막에는 예의 미소를 빙긋 지으며 말하는 그.

 

마지막 말은 무슨 뜻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상경하여 항상 신세지고 있는 삼촌의 부탁이기도 하고, 책에 관한 일이었기에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감정을 부탁할 것은 그 한 권뿐 인가요?”

 

“아, 이거 말고도, 빌린 책이 한권 더 있어서, 그것도 함께 가져다 줄 수 있겠니? 그리 두껍지는 않단다. 지금 연락을 취해놓으마.”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삼촌은 컴퓨터를 켜서 어딘가로 메일을 보내는 것이었다.

 

책도 서로 빌릴 사이라는 것인가. 살며시 삼촌의 그 지인과, 그분의 딸에 대해 흥미가 동하기 시작하였다.

 

자신과 잘 맞을 것이라고 하였다. 나 같이 사교성 없는 사람과도?

 

하지만 어릴 적부터 자신을 오랫동안 보아온 삼촌의 말이었으니, 크게 틀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복잡한 생각은 미루어두고, 후미카는 대답한 후에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후미카는 시부야 역에서 토큐 토요코선을 탑승하였다.

이걸로 요코하마까지 빠르게 간다. 거기서 도카이도 본선으로 갈아타서, 오후나역까지 간다.

그리고 거기서 요코스카 선으로 환승해서 목적지인 키타카마쿠라역에 도착한다는 조금은 복잡한 계획이었다.

 

열차 안에서도 그녀는 독서 삼매경이었다. 귀중한 책들이 들어있는 그녀의 숄더 백을 이따금 확인하면서.

 

가끔은 기지개를 펴면서, 창밖의 높아져가는 태양과, 바깥의 풍광을 감상하기도 한다.

 

벌써 7월 중순이다.

 

그녀가 아이돌 업계에 데뷔한지도 어연 3개월이 다 되어간다.

3개월 동안 그녀는 많이 달라졌을까? 스스로 자문해본다.

 

솔직히 그녀는 자신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전의 소심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프로듀서에게 스카우트되어 아이돌 업계에 발을 내딛은 그녀.

그동안 그녀는 여러 점에서 달라진 것이 사실이었다.

 

우선 이제, 낯선 사람과의 대화도 그럭저럭 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눈을 못 마주치는 것은 기본이요, 말을 더듬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자신만의 좁은 세상이 아닌, 더 넓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독서는 여전히 좋아하지만, 무대에 서서 관객들의 환호에 보답하는 것 또한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두근두근한 경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많은 동년배 친구와, 선후배가 생겼다. 즉 인간 관계가 넓어진 것이다.

힘들 때 격려가 되고, 기쁨을 함께 해주는 소중한 동료들. 그들은 그녀에게 있어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지금의 자신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자신만의 껍질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알고, 거기로 나아갈수록, 그녀 자신이 얼마나 초라했는가를 여실히 깨닫기 때문이리라.

 

어제의 삼촌과의 커뮤니케이션 건도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재치 있는 언변과 센스를 가진 동료들이 부러워지는 것이었다. 만능 엔터테이너라 불리는, 그녀의 동료인 혼다 미오라면 그 상황에서 잘 받아쳤겠지? 라고 저절로 생각하였다.

 

단순한 언변 외에도, 자신이 가진 매력을 무대에서 한껏 발산하는 동료들, 무대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빛나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예전보다 나아지면 뭐한가? 이 정도는, 동료들, 아니 아이돌에게 있어서는 기본 중에 기본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아이돌이 되기에 적합 했던걸까?’와 같은 무거운 생각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이었다.

자신이 정말 누군가의 우상(Idol)으로써, 팬들 앞에 서도 되는걸까?

이것이 그녀가 줄곧 가졌던 고민이자 의문이었다.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에 환승역인 오후나역(大船駅)에 도착하였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허둥지둥하며, 쿠리하마 방면으로 가는 요코스카 선으로 가까스로 환승한다.

 

여기서 한 정거장만 가면 목적지인 키타카마쿠라역이다.

 

키타카마쿠라역의 주변은 한적한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고느적한 분위기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 하늘 가운데에 걸린 태양은 여전히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중이었지만.

 

목적지에 내려서 주위를 둘러본다.

삼촌의 말에 따르면 그 ‘비블리아 고서당’은 키타가마쿠라 역 근처라고 하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까라는 생각도 잠시, 하행선 플랫폼에서 내려서 뒤를 돌아본 후미카의 눈에, 어떤 건물이 눈에 띄었다.

유리문으로 된 입구. 그리고 그 앞에 서있는 입간판.

거기에는 ‘비블리아 고서당’ ‘고서 매입, 성실히 감정해드립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계세요...?”

더위때문에 열어놓은 유리문 안을 기웃거리며 말한다.

 

“어서오세요! 비블리아 고서당입니다.”

안쪽에서 왠 남성의 소리가 들린다.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 아마도 직원인 모양이다.

 

“...!”

 

안쪽으로 들어선 순간, 후미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딜 봐도 책, 저길 봐도 책 천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고서들이었지만.

 

책장에 다 꽂지 못한 책들은 복도에 층층이 쌓여있었다. 덕분에 복도는 성인이 한명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았다.

 

이렇게 많은 책들, 특히 고서들은 처음 보았다.

 

사기사와 서점의 장서량도 결코 작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복도까지 책을 그득히 쌓을 만큼은 아니었다.

 

눈앞의 풍경에, 자신의 코를 간지럽히는 오래된 종이 특유의 습한 냄새에 황홀감을 느끼며 찬찬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는 잠시나마 원래의 목적을 잊고, 정신없이 좌우의 책무더기들을 살펴본다.

메이지 시대의 근대 문학부터, 비교적 최근에 발매된 소설까지,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하였다.

 

고개를 돌리다가 정면의 카운터의 직원과 눈이 마주쳤다.

 

“...!...”

생각보다 덩치가 큰 남성이었다. 유도 선수를 연상케 하는 다부진 체격은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그가 보이는 반응도 이상하였다.

무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차 싶었다. 장거리 여행이라서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변장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어설펐을까?

사실 변장이라고는 해도, 모자와 도수 없는 안경 정도였지만.

 

이윽고 그는 자신의 결례를 깨달았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고서를 판매하러 오신건가요?”

 

그녀는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내서 찾아온 목적을 말한다.

 

“...도쿄의 사기사와 서점에서 왔습니다. 고서 감정을 의뢰하려고...”

 

직원도 이미 언질을 받은 모양이다.

 

“아, 다자이의 ‘인간실격’ 이로군요! 멀리서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앞장서서 성큼성큼 걷는 그를 따라 계산대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간다.

 

계산대 너머의 공간은 생각보다 넓었다.

그 넓은 곳에는 책으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아니 책으로 된 ‘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 요새의 사이로, 여성이 한 명 보였다.

 

자신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이는 이 여성은 독서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머리는 자신과도 같은 긴 흑발. 하얀 민소매 블라우스에, 검은색 롱 스커트. 그리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여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눈이 번쩍 뜨이는 미인이었다.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마치 자신이 책 읽고 있는 것을 누군가 보기라도 할까봐.

 

“시오리코 씨, 영업 중에는 책 읽으면 안 되신다니까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말하는 이 남성.

 

“앗, 죄... 죄송해요. 다이스케 군. 감정을 위해 들어온 책인데, 읽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이 남성의 얼굴도 빨개진다. 마치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듯이.

 

둘 사이에 한동안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핫... 여... 여기 가격표랑 붙여놓았어요. 미스터리 쪽에 꽂아주세요.”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그제서야 업무를 지시한다. 아무래도 이 분이 사장인듯 하다.

 

멍하게 책을 건네받으며, 정신을 차린 그도, 그제서야 손님을 소개한다.

“이쪽은 어제 연락이 온, 도쿄의 사기사와 서점의 관계자 분이십니다. 예의 그 건으로.”

 

“...사기사와 후미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시선을 어디에 둘 줄 모르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녀.

 

“...시... 시노카와 시오리코라고 합니다.”

그녀 역시 후미카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말을 더듬으며,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이... 이쪽은 저희 직원인 다이스... 아얏”

방금은 왠지 실수로 이름으로 부르려다 정정하는 와중에 혀를 씹은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그가 자기 소개를 한다.

“고우라 다이스케 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소개가 끝났다.

이대로라면,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것이 뻔히 보였기에 때문에,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용건을 꺼낸다.

 

“다자이의 ‘인간실격’ 초판본을 매입하였는데, 책 후면지의 친필 싸인의 진위 여부가 궁금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삼촌이 바쁘셔서, 제가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책을 건네며 떠듬떠듬 말한다.

 

책을 건네받자 시오리코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파라핀지를 벗겨서 책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본다.

 

첫 장부터 빠르게 훑어보는 그녀. 구석구석도 꼼꼼히 살펴본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휘...휘...’ 소리를 낸다. 휘파람으로 무언가를 연주하려는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무슨 곡인지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와아... 굉장해요! 지쿠마쇼보 판으로, 이렇게까지 보존이 잘 된 책은 처음 봐요!

보통 책장에 오래 꽂아둔 책은 책등을 비롯하여 공기에 노출된 부분의 색깔이 바뀌기 마련이죠.“

 

후미카도 자신의 사례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많은 책을 한꺼번에 샀을 때, 한 권정도는 꽂아놓고 그 존재를 잊어버린 경우도 아주 가끔이지만 있었다.

몇 개월뒤, 문득 생각이 그 책에 미쳐서 찾아보면, 예외 없이 책등의 색깔이 바래서 속상했던 기억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소중하게 보관한 것인지, 책등을 비롯하여, 거의 변색이 되지 않았어요. 초판본인데 이 정도의 보존 상태라면, 이 책은 높은 가치를 지녔다고 할 수 있어요.”

그녀가 책과 후미카를 번갈아가며 말한다.

사실, 바로 지각은 하지 못하였지만, 책 이야기를 하는 시오리코는, 방금까지의 소심한 그녀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유창히, 그리고 자신감에 가득 찬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둘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말이 겹쳐진다. 그리고 동시에 흠칫한다.

 

흠흠. 헛기침을 한뒤, 시오리코가 설명을 재개한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는건, 책의 후면지에 있는 ‘다자이 오사무’의 친필 싸인의 진위여부에요. 이 싸인의 진위 여부에 따라서 단순한 초판본인지, 아니면 작가의 친필 싸인 초판본인지가 갈리니까요. 가격도 최소 몇 배는 차이가 날 거에요.”

 

고개를 끄덕거리는 후미카.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이 책은 분명 초판본이 맞지만, 싸인 만큼은 조작된 것이라고 생각이 되요.”

 

“어째서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조용히 묻는 후미카. 바로 저렇게 단언할 수가 있는 것일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요. 인간실격의 원고가 탈고된 것은 5월 12일이죠. 이 때 다자이 오사무는 마지막 원고를 탈고해서 연재하던 잡지였던 <전망>에 넘겼죠. 그리고 6월 14일자 잡지에 글이 수록되는 것을 알았기에, 6월 13일, 그는 애인과 함께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의 생에 있어서 5번째 자살 시도였죠.”

담담하게 말을 잇는 시오리코.

 

“이때나 그때나 잡지에 연재된 이후에 문고본으로 발매되죠. 따라서 지쿠마쇼보에서 문고본으로 발매되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6월 14일 이후입니다. 따라서 이 싸인은 다자이 오사무의 친필이 아닙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판단이 되요.”

 

“아아...”

그제서야 무언가 깨달은 듯한 후미카.

분명 다자이 오사무의 생애에 관해서는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세세한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니, 삼촌의 말마따나, 이 여성분은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고서에 꽤나 일가견이 있는 삼촌이 이런 기초적인 연대(年代)를 착각했다니. 그 점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그녀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오리코는 저 멀리 무언가를 바라보는 표정으로 말하였다.

 

“저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해요. 39년의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다이나믹하고, 열정적으로 산 게 아닌가하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감정과 영욕(榮辱)을 다 겪으면서요.”

 

후미카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시도했지만, 부유한 자신의 집안 때문에 계급이 문제라고 절망한 나머지 신경 안정제를 과다 복용했던 첫 번째 자살 시도.

 

수없는 대학 제적과 유급 이후에 한 여성과 가마쿠라의 코유루기곶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했지만, 자신만 살아남았던, 그의 소설 ‘인간실격’의 배경이 된 두 번째 자살 시도.

 

자신의 역작인 ‘어릿광대의 꽃’으로 제 1회 아쿠타가와상(芥川賞) 후보에 까지 올랐으나, 불합리하게 낙선당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道) 신문사에도 입사하지 못한 충격으로 시도한 세 번째 자살 시도.

 

두 번째 아쿠타가와상 후보에서도 또 낙선하고, 친척이 자신의 내연녀와 간통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듣고 시도한 네 번째 자살 시도.

 

그리고 그의 유작과도 같은 ‘인간실격’의 발표 직전에 이루어진, 그의 마지막 자살 시도이자, 마침내 성공하여 영원한 안식을 가져다 준 다섯 번째 자살 시도.

 

그녀가 보기에, 그는 네 번의 자살 미수를 펼친 끝에 자살에 이를 정도로, 그의 작품 세계는 무겁고 우울함이 지배적인 정서였다. 달리 다른 감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

 

“저는 그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 실격’과 주인공 이름이 같아 그 모태 격으로 평가되는 ‘광대의 꽃’부터 시작하여, ‘만년’, ‘사양’ 그리고 ‘인간 실격’으로 이어지는 그의 작품 세계의 만연한 정서는 우울과 무력감, 소외감 입니다. 그 외의 다른 감정은 잘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은...”

말꼬리를 흐린다. 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살짝 흥분하였다.

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바라본다. 자신의 무례에 혹시나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시오리코의 표정은 기쁨에 차 있었다. 마치 이 논쟁을 반기기라도 하는 듯이.

“저 또한 그의 작품세계의 중심이 되는 감정이 부정적이고 무거운 감정들인 것에는 동의해요. 그러나, ‘달려라 메로스’로 대표되는 그의 우정과 인간간의 신뢰를 보여준 작품이나, 절대자에 대한 기다림과 구원을 소재로 한 ‘직소’,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리는 ‘쓰가루’ 등, 그의 작품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작품은 무수히 많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청산유수와 같이 그녀의 의견을 피력하는 시오리코.

 

“글쎄요, ‘달려라 메로스’에서도, 디오니스 임금이 그토록 타락한 이유는, ‘인간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어찌어찌 좋게 끝났지만, 그 기저(基底)에 깔린 사상은 변하지 않지요. ‘직소’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유다가 예수에게 가진 감정은 애증의 감정으로.., 특히 ‘상인이기에 천대받았다’ 라는 분노와 피해망상입니다. 참으로 그 다운 감정선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쓰가루도...”

 

거기까지 말하다가 멈칫하는 후미카.

 

스스로가 알고 있다. 자신은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평소의 논리 정연한 자신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코.

하지만 왠지 모르지만, 지고 싶지 않았다. 이 눈앞의 연상의 여인에게만은.

 

 

후미카가 아무 말 없이 조용해지자, 오히려 시오리코가 더 당황한다.

 

자신 때문에 이 눈앞에 보이는 약간은 연하인 것 같은 여성의 기분이 상한 것일까?

평소의 자신답지 않게, 약간 더 텐션이 업 되었다.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이 꽤나 수다스러워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왜인지 모르게 더 흥분한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고 싶지 않다는 감정’ 정도 일까.

 

“저기...” “저...”

 

또 다시 둘의 말이 겹쳐진다. 그리도 또 한 번 흠칫한다.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번에는 후미카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말한다.

 

“저기... 방금은 제가 억지를 부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후미카.

 

당황하여 시오리코가 고개를 붕붕 저으며 황급히 말한다.

 

“아...아니에요! 제가 평소보다 텐션이 업 되어서 오버한 것도 있고! 사기사와 씨의 지적이 타당한 점도 있고... 에... 또...”

 

방금 전까지의 유창한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인지, 거기에 있는 건 평소처럼 사람 대하기 어려워하는 소심한 시오리코 씨였다.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 지속된다.

 

서로 무언가 말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옆에서 지켜보던 다이스케가 보다 못해 한마디 한다.

 

“이야... 이거 정말 놀랐습니다. 사장님이랑 이렇게 비슷한 사람이 또 있었을 줄이야.”

 

“무슨 말인가요 다이스케 군?” “???”

 

동시에 의아해하는 두 사람.

 

“자자, 차근차근 설명드릴게요.

사기사와 씨라고 하셨죠?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 그렇군요. 그럼 그렇지.

7년 전에, 이 고서당 앞을 우연히 지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시오리코 씨를 봤었죠. 파릇파릇한 대학교 1학년 시절의 시오리코씨를요.”

 

괜스레 또 얼굴이 상기되는 시오리코.

 

“흠흠, 여튼 아까, 사기사와 씨가 처음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6년 전의 시오리코 씨와 거의 판박이였거든요.

물론 안경을 끼고 안 끼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음, 뭐랄까, 네, 그 아우라(Aura)라고 하나요? 그런 것이 매우 비슷했습니다.

딱 봐도 책을 좋아할 것 같고 그런 것 말입니다. 평소에는 조용한 이미지인 것도.”

 

서로를 마주보는 후미카와 시오리코.

 

“그리고 방금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확신이 들었죠.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두 분 다 태도가 달라졌다구요?

 

그리고, 또... 흠흠 이런 말을 하는 건 좀 이상할지는 모르겠지만, 두 분 다 눈이 번쩍 뜨이는 흑발 미인이고...아아. 죄송합니다. 이상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두 여성이 당황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더 놀라서 황급히 수습하려는 다이스케.

 

결과적으로 분위기만 더 어색해졌다.

하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전해진 것 같았다.

 

요컨대, 두 사람은 서로 닮은 것이다.

 

그제서야, 후미카는 왜 처음 보는 이 여성에게 경쟁심과 동시에 친밀감을 느꼈는지 깨닫는다.

 

즉, 이 낯선 여성에게서, 익숙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감이 부족한 그녀에게는, 눈앞에 있는 자신과 닮은 상대에게만큼은 결코 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 진다는 것은, 곧 자신에게 진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시오리코를 돌아다보니, 그녀 역시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후미카는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가 다이스케에게 건낸 책을 본다.

 

그 책은 놀랍게도, 후미카가 얼마 전까지도 읽고 있었던 ‘일본의 검은 안개(日本の黒い霧)’ 였던 것이다!

 

후미카가 놀란 반응을 보이자, 시오리코는 흥미를 보인다.

 

“혹시 이 책에 대해 아세요?”

몰라서 물어보는 것은 결코 아니리라, 역으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네, 일본 문학의 거인이자, 사회파 추리소설의 아버지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저작이 아닌가요? 그의 다른 저작과는 달리, 이건 특이하게 미 군정(GHQ)의 점령기간 동안 벌어졌던 미해결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지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지는 후미카였다.

 

후미카의 대답에 감탄하는 시오리코.

“정확해요! 이 책은 월간 문예춘추에 1960년 1월부터 12월까지 연재한 논 픽션물로, 1945년 8월부터 1951년 9월까지의 미해결 사건 12가지를 다루고 있지요. 사실과 배경을 나열하고 그 뒤에 자신의 추리와 견해를 덧붙이는 역사적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게 특징인데, 그 이유를 아세요?”

역시나 유창한 어투. 마지막에는 장난스럽게 질문을 덧붙인다.

 

“소설로 쓰게 되면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지 못하기에 이런 방식을 채택했다고 후기에서 말하죠, 아마?”

자신 있게 말하는 후미카. 속으로 사실 ‘엣헴’ 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였다.

 

“맞아요! 보통 마쓰모토 세이초 하면, ‘잠복’이나 ‘점과 선’, ‘눈의 벽’ 정도가 유명하죠. 하지만, 이 책은 그가 쓴 소설 중에서도, 논픽션이라는 점이 매우 특이한 점이죠. 특히 저는 그의 소설가적인 면모가 아니라, 역사학자적인 면모가 드러나서 좋아한답니다.”

 

“저도 최근에 읽고 있는데, 아주 흥미로워요. 픽션과는 구분되는, 논픽션이라 더 흥미로운 점도 많구요. 하지만, 여러 일련의 사건을 거쳐, 그가 ‘검은 안개의 종착점’이라고 부르는,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부분은 조금 억지스러웠어요.”

솔직한 감상을 말하는 후미카. 이번에도 의견이 다르려나?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하며.

 

“네, 그 점에는 저도 동의해요. 그 부분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꽤나 우스울 정도의 왜곡이 있죠.”

즐거운 듯이 말하는 시오리코. 이번만큼은 그녀와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두명 사이에서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그 이후에는 이야기가 일사천리였다.

최근에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부터, 자신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서로에게 추천하는 책 등 책에 대한 향연이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자타가 공인하는 책벌레였기 때문에, 대화는 막힘없이 이어졌고, 두 사람의 얼굴에서는 웃음꽃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이스케는 카운터로 물러나서 두 여성의 이야기에 이따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동시에 그는 직감하였다. 둘은 서로에게 있어 좋은 친구가 될 것이리라고. 또한 이 이야기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자신만큼 책에 대한 내공을 가진 또래를 만나서 기뻐하는 시오리코를 위해서라도, 그는 재치 있게 쪽지를 적어 안채 쪽으로 건네준다. 마침 휴가철이라 손님이 별로 없기도 했으니까.

 

사장님도 휴가는 필요하니까요. 가게는 저한테 맡겨주시고, 다녀오세요.’

 

얼핏 보기에 자매로 보이는 두 여성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그는 언제까지고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달빛이 은은하게 비친다.

 

다이스케와 시오리코가 봉고차로 오후나역에 데려다준 덕분에 어찌어찌 늦지 않게 마지막 차를 탈 수 있었다.

 

기분 좋은 피로를 느끼며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회상한다.

 

오늘 가게를 땡땡이 치면서까지, 그녀를 위해서 시오리코는 카마쿠라 명소를 속속들이 안내해주었다.

유명한 맛집을 찾아가서 점심도 먹고, 주변 고서점들도 순회하였다.

서점 순회가 취미였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없는 기쁨이었다.

 

해질녘, 가게가 마칠 즈음에 돌아와서 인사를 하고 떠나려했지만, 갑자기 가게 카운터 안쪽 안채에서 또 다른 인물이 나타났던 것이다.

 

거의 자신 또래 즈음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시노카와 시오리코의 여동생, 시노카와 아야카였다.

 

언니처럼 안경을 끼고 있지는 않았지만, 언니와 닮은 구석이 꽤나 있었다.

그말은 즉, 자신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똑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자신과, 특히 자신의 언니와 많이 닮은 이 낯선 손님에게 전혀 경계하는 구석을 보이지도 않는 아야카.

 

오히려 아야카는 그녀를 보고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TV에서 봤다’. ‘남자 급우들 중에 팬이 엄청 많다’, ‘실물이 더 낫다’ 등등.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고서. 약간은 수다스러운 성격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만들고 있던 저녁 식사에 바로 초대한 것이었다. 원래는 자매와 다이스케를 포함해서 셋이서 자주 먹지만, 오늘은 좀 더 많이 만들었다나 뭐라나.

 

식탁에 둘러 앉아, 여고생이 만든 것으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훌륭한 치킨 카레를 먹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갑자기 다이스케가 새로운 주제를 꺼낸다.

 

“저기, 아까 오전에 제가 사기사와 씨를 보고 놀란 것에 의아하지는 않으셨나요?”

 

“음, 약간이요. 아이돌 생활을 하다 보니, 그런 반응에는 조금씩이지만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으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거라기보다는...”

 

“네?”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 몸을 뒤로 쑤욱 빼는 다이스케. 마치 멀리서 그녀들을 한 눈에 보려고 하는 듯이.

 

“고3인 아야카, 대학생 1학년인 사기사와 씨, 그리고 재작년에 대학을 졸업한 시오리코 씨까지. 누가 보면 세 자매라고 해도 믿겠어요.”

 

그러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꽃이 핀다.

 

 

그 이후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곧 열차 막차 시간이 다가오기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일어설 수 밖에 없었다.

 

사람 좋은 시노카와 자매는 자고 내일 천천히 가라고 권유했지만, 더 이상 고서점 영업에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아야카는 수험생이기도 하니.

 

그러자 아야카는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메일 주소와 핸드폰 번호를 건네주고는, 문 앞까지 나와서 배웅하였다.

 

돌아가는 작은 봉고 안에서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러나 후미카의 마음만은 무거웠다.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후미카는 시오리코의 책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막힘없는 언변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솔직히 부럽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감정은 곧, 그녀에 대한 동경으로 이어졌다. ‘나도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감정.

짧은 하루였지만, 그녀가 후미카 안의 진정한 우상(Idol)으로 자리 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눈앞의 동경의 대상을 두고, 다시 짧지 않는 길을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곁으로 시오리코 쪽을 돌아보니 시오리코도, 진심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고민하다가 겨우겨우 입을 연다.

“시오리코 씨, 저도 언젠가는 당신처럼 될 수 있을까요?”

 

느닷없는 질문에 시오리코는 살짝 당황한다.

 

“에? 저...저처럼이요?”

다시 말을 되묻는 그녀였지만, 그새 후미카의 언행에서 맥락간의 의미를 파악한 눈치이다.

 

“음, 후미카 쨩은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으신가요?”

 

“...네”

생각보다 순순히 인정하는 그녀.

 

“구체적으로 어떤 점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네? 그... 그게... 저는 성격도 어두침침하고, 말주변도 없고, 또...”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마구 쏟아놓는 후미카.

이대로라면 끝이 날 것 같지 않아서, 시오리코는 부득이하게 그녀의 말을 끊는다.

 

“으음, 어째서 후미카 양은 그렇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약간 정색을 하고 묻는다.

 

그제서야 자신이 속에 담고 있던 것을 모두 털어놓는 후미카.

 

아이돌 업계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가졌던 고민과, 그 이후 활동하면서 느끼는 고충들을 털어놓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소극적인 자신을 바꾸고 싶어서 나아간 아이돌의 길이었지만, 그 길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라고.

항상 반짝 반짝 빛나는 그녀의 동료들을 볼 때마다, 그녀들과 자신의 벽을 절감하였다.

외모 같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성격이나 기질(器質)의 내적인 것의 문제였노라고.

아이돌이 자신을 많이 바꿔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과연 앞으로 계속 이 길을 쭉 따라 가도 될지 모르겠다 라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성이 높아지며, 다름 아닌 자신에 대한 질타와 매도를 쏟아놓는 후미카.

 

그걸 들은 다이스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고, 시오리코는 굳은 얼굴로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와 가장 닮았다고 느끼는 사람이기에, 후미카가 가진 고민의 깊이를 헤아리는 중이리라.

 

한참을 그렇게 열변을 토했을까, 후미카는 돌연 얼굴이 새빨개지며 입을 다문다.

 

“죄...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그만... 어린 애 같은 모습을 보이고 말았네요.”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젓는 시오리코.

 

“아니에요. 후미카쨩이 가진 고민은 모든 사람이 평생 가질법한 고민인걸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하더니, 말을 잇는다.

 

“당장 저만 해도, 학창시절에 그런 고민을 정말 많이 했었는걸요.

평소에는 말 없이 책만 읽다가, 입만 열면 책 이야기만 하는 여자애는 확실히 ‘평범’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그래서 저는 한 명 빼고는 가까운 친구도 없었고요. 돌이켜 보건데 저도 제 성격이 정말 싫었어요. 그래서 대학에 와서, 변해보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보았지만, 결과는 대부분 신통치 않았어요. 뭐, 지금의 제 모습을 보면 아시겠지만요.”

자신의 이야기라 그런가, 약간 쓴 웃음을 띄며 말한다.

 

시오리코 씨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는 후미카.

 

“그때 제가 가장 위안을 얻었던 말이 바로 이 말이었어요. ‘자신을 가지고 살아가자. 살아있는 이들은 모두 죄인이니.’”

나지막히, 그러나 또박또박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하는 시오리코.

 

“그 말은...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에 나오는 말이 아니던가요?”

 

“맞아요. 제가 가장 아끼는 책이기도 하지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시오리코.

 

“어린 시절에는, 그저 기독교적인 원죄(原罪) 관념을 말하는 건줄 알았어요. 다자이 오사무는 ‘직소’ 등과 같이, 기독교적인 소재를 토대로 많은 작품을 썼으니까요.”

 

“‘만년’은 저도 읽었고, 비슷하게 생각했습니다. 달리 다른 의미가 있나요?”

후미카가 고개를 기우뚱하며 묻는다.

 

“저는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든 업보를 짊어졌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어요. 즉, 우리는 살면서 가볍게 죄를 짓고 살기 마련이니 오늘을 자신 있게 살자는 것이지요.”

 

그렇구나... 라는 표정을 짓는 후미카. 그러나 다시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게 달리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그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시오리코는 나지막히 말을 잇는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업보나 죄 같이 무거운 의미가 아니라, 그저 사소한 단점 등으로 생각하는 거죠.”

 

“네?”

의외의 해석에 살짝 당황하는 후미카.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사소한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 정도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요?”

 

“아아...”

이제야 그 의미를 이해하는 후미카.

 

“이런 말 하기는 좀 부끄럽지만... 저와 가장 닮은 당신이잖아요. 자신을 가져요. 후미카쨩.”

살짝 얼굴을 붉히며, 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짓는 그녀.

 

“시오리코 씨...”

벅차오르는 감정에, 뒷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후미카.

 

이대로 계속 여기 있으면서 이 사람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우상(idol)이었기에-.

 

그러나, 여기에 멈추어 서서는 안된다.

 

소중한 동료들, 프로듀서, 그리고 항상 응원해주는 팬들을 위해서, 그리고 더 나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누군가에게 우상(Idol)로서 기쁨과 희망을 전해주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녀가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 가야한다.

그렇기에, 급히 인사를 나누며, 역의 개찰구로 뛰어간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오리코는 언제까지고 따뜻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달빛이 은은하게 비친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출발지였던 시부야 역에 도착한다.

 

오늘 시오리코 씨를 만나서, 비블리아 고서당에 가서 정말로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운명론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것은 필연이 아닐까 하는...

 

그러다가 갑자기 풋 하고 작은 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이 환상적인 만남도 혹시 우연을 가장한 누군가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자신감이 없어서 걱정하는 조카를 걱정하는 삼촌의 계획 이라던지.

 

“삼촌도 참...”

작게 웃음 지으며, 후미카는 생각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아니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꼭 비블리아 고서당에 다시 찾아가자고. 다시 시오리코 씨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자 라고.

“다음은 시부야, 시부야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도착 방송과 함께, 마중 나온다고 연락한 삼촌을 만나기 위해 후미카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종종 걸음으로 출구로 나가는 그녀가 있다.

 

자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녀가 있다.

 

사소한 단점은 뒤로하고,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가 있다.

 

달빛이 앞으로의 그녀가 나아갈 길을 비추는 듯 환히 빛나고 있었다.

 

 

FIN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에야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를 접해서 읽게되었는데, 왜 이걸 이제 봤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몰입해서 보았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시오리코 씨와 후미카가 계속 겹쳐보이더군요.

그래서 어디 둘이 엮는 SS가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찾아봤는데, 그림 말고 글은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없으면 만들자!' 라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네요.

물론, 일본 문학에 대해서는 그닥 아는 바가 없었기에, 열심히 자료를 찾고, 때로는 직접 읽어가며 글을 쓰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덕분에 많은 좋은 작가들과 작품을 알게 되어 인생이 많이 풍요로워진 기분입니다. ㅎㅎ

 

그럼 저는 남은 해부학 실습 시험을 위해서 다시 떠나겠습니다.

 

다음 글에서 찾아 뵙겠습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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