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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후미카 생일 단편 [평온한 날의 선물]

댓글: 4 / 조회: 580 / 추천: 4



본문 - 10-27, 2016 21:26에 작성됨.

사기사와 후미카

 

 

큰 파티나 축하는 없었다. 평소처럼, 그리고 일상처럼 이어지는 사무소의 하루는 평온하게 흘러만 갔다.

 

모두가 성대한 축하파티를 열어주자며 들떠있었지만, 그녀는 바라지 않았다. 정중하게 거절하는 후미카의 요청을 듣고 모두가 의아해 하긴 했지만, 그녀의 뜻이 그렇다면 그저 그런 것이라 쉽게 이해해주었다. 그렇게 축하는 생일 전날 간략하게 치러졌다. 후미카는 축하해주는 아이들에게 일일이 감사를 표했고, 각자 준비한 선물을 받으며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쭈뼛대며 다가와 손 편지를 건네는 아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조용한 축하 파티는 끝이 났다.

 

후미카는 며칠 전, 프로듀서에게 조용히 찾아와 휴가를 냈다. 프로듀서는 요즘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기도 했고 일주일 정도 휴식을 가지는 건 어떠냐 제안했지만, 후미카는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하루면 괜찮다며 대답했다. 선물을 들고 끙끙대며 퇴근하는 후미카를 보며 프로듀서는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10월 27일. 후미카는 부스스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늦은 아침. 항상 프로듀서가 밴을 몰고 찾아와 사무실로 데려가는 시간은 한참이나 지나있었다. 몽롱한 눈으로 시계를 본 후미카는 살짝 놀랐지만, 곧 오늘이 휴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스스한 머리로 그녀는 벗어두었던 머리띠를 찾았다. 침대 맡에 놓아 쌓아 두었던 책 위에 놓인 탄력 좋은 천 머리띠를 잡아 능숙하게 머리에 멘다. 잔잔한 햇살이 그녀의 하얀 피부 위를 적신다. 아직도 삐친 머리칼들이 후미카의 헐렁한 푸른 잠옷에 달라붙는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아침의 노곤함을 맛보다가 옆에 있던 핸드북을 집어 들었다.

 

새벽까지 읽다가 잠든 부분을 찾는다. 프로듀서와 가을길을 걷다가 만들었던 단풍 책갈피. 후미카는 부서진 곳 없이 예쁜 단풍의 모양을 멍하니 보다가 책 뒤에 꽂아놓았다.

 

몽롱했던 정신이 활자를 받아들인다. 활자는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고, 의미가 되어 후미카를 환기 시킨다. 익숙하고도 일상적이지만 질리지 않는 독서. 누군가가 생각해내고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즐거운 일들. 후미카는 방금 흐릿한 눈을 비벼내고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책장은 빠르게 넘어간다. 느긋하게 읽는 편이었지만, 요즘 따라 일에 치이다보니 읽는 속도가 빨라져버렸다. 집중은 깊어져가고 손을 빠르게 움직인다. 긴 문장이지만 이해가 빠르다. 작가의 실력을 실감하게 해주는 멋진 문장들이 흐릿한 마음을 해치고 많은 생각들을 품게 해준다. 초승달을 그리던 눈동자는 점점 뜨여 총명한 형태를 그린다. 이마를 가리는 긴 앞머리의 틈으로 드러나는 눈동자는 깜빡이는 주기도 줄어들며 점점 책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

 

허나, 집중은 오래가지 않았다. 얌전히 죽어있던 청각을 깨우는 소리. 거실에 있던 전화벨은 요란하게 후미카의 귀청을 때렸다. 허둥지둥 책갈피를 끼워 넣고 그녀는 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직 잠기운이 스며있던 무릎이 휘청하지만, 후미카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방문을 열었다.

 

시끄러운 전화벨. 그녀는 고풍스러운 구리 테가 둘러진 전화기를 들었다.

 

“네... 사기사와입니다... 네, 아... 네. 알았어요... 네... 네, 감사합니다.”

 

짧게 이어진 통화를 끊고 그녀는 갑자기 하품했다. 손으로 가릴 새도 없이 입술이 크게 벌어지고, 크게 하암, 하품하고 말았다. 집에는 누구도 없을 텐데, 살짝 붉어진 볼로 후미카는 흐느적흐느적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고 긴 흑발을 정성껏 말린다. 늦잠의 노곤함은 아직 전부 날아가지 않았지만, 후미카는 욕실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했다.

 

전화의 내용은 간단했다. 숙부의 전화. 생일 축하하고, 휴일이라니 푹 쉬라는 내용. 바라던 평온이었건만 어딘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후미카는 방으로 돌아가 아까 보던 작은 책을 챙겨 나왔다.

 

식탁에는 정갈한 차림이 펼쳐져 있었다. 평소 같지만 생일을 맞아 유난히 신경 쓴 흔적들이 엿보였다. 냄비에 있던 된장국을 끓여 덜어 담고, 밥솥에서 밥을 담아 식탁에 앉는다.

 

“잘 먹겠습니다...”

 

조그마한 목소리를 흘리고, 후미카는 식사했다. 밥을 먹는 와중에도 책은 떨어지지 않고, 집중은 흐려지지 않는다. 숙부 앞에서라면 꾸지람을 들을만한 식사예절이었지만, 소심한 일탈처럼 그녀는 홀로 식사를 하며 책을 읽었다.

 

느릿느릿한 식사가 끝난 것은 책 한권을 전부 읽은 뒤였다. 그제야 하루를 시작한 기분이 난 후미카는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무얼 할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서재에 있자. 휴가를 낼 때부터 다짐했던 혼자만의 생일 파티였다.

 

아이돌을 시작하면서부터 충분히 독서를 할 시간이 나지 않았다. 땀을 흘리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것도 기뻤지만, 역시 그녀를 치유하는 것은 책이었다. 여유가 날 때면 짬짬이 읽던 것을 오늘은 하루 내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그녀는 옷을 갈아입었다.

 

 

 

검은 브이넥 긴팔에 푸른 가디건을 걸치고, 푸른색의 롱스커트를 입는다. 편한 차림, 오래 앉아 있으면서도 체온이 식지 않을 옷을 입고, 그녀는 위층에 있던 개인 서재로 올라갔다.

 

잔잔한 낮의 햇살이 서재를 비춘다. 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의자에 앉자, 간만에 무게를 느낀 나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런데 배도 나른하지 않게 적당히 채웠고, 개운하게 씻어 정신이 들기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책을 펼치기가 힘들었다. 일어나서 막 보았던 책은 그토록 잘 봤는데, 마음을 먹고 올라온 서재에서는 책을 읽을 기분이 잘 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후미카는 무릎 위에 책을 올려두고 잠시 눈을 감았다. 혼자 책을 보는 일은 익숙했다. 지금까지, 여태까지 느껴왔던 감정들과 책과 소통한 대화들은 모두 진실이었다. 아까부터 느끼던 허전함은 무엇일까. 후미카는 찬찬히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했다.

 

책을 읽어 온 시간보다 훨씬 짧지만 일상처럼 자리 잡은 사람. 쉬는 시간에 앉아 독서를 할 때 옆에 있어주었던 사람. 후미카는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리는 인영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의 생각을 가로막았다.

 

어김없이 소음이 후미카의 상념을 끊어낸다. 아까와는 다른 소리. 좀 더 청아하고 맑은 기계음이었다. 손님일까. 후미카는 책을 들고 일어나 서재에서 내려왔다. 찾아 올만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현관 앞에서 인터폰을 들었다.

 

“누구 ...세요?”

 

일상적인 대화는 힘들다. 마음을 먹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면 제대로 입술이 열리지 않았다. 제대로 들리지 않았던 걸까. 인터폰을 통해 보이는 흐릿한 넥타이의 모습은 움직이지 않았다. 벨을 누른 사람은 누구일까. 후미카는 유심히 푸른 화면을 바라보지만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 채는 것은 빨랐다. 익숙한 넥타이의 무늬. 반듯한 줄무늬가 촘촘히 나있는 실크자수의 넥타이는 후미카의 기억속에서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것이었다.

 

후미카는 급히 인터폰을 놓고, 현관으로 뛰어나갔다. 어째서 마음이 급해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머리는 어서 문을 열어주고, 반가이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만 품어버렸다. 슬리퍼를 신고, 작은 마당을 지나, 쇠창살로 된 문의 잠금을 급히 연다.

 

역시나 앞에는 너무도 낯익은 사람이 서있었다.

 

“아, 안녕, 후미카.”

 

갑자기 뛰쳐나온 후미카를 본 프로듀서는 머쓱하게 인사했다. 언제나 대충 빗은 까치머리에 창백한 인상, 슬쩍 튀어나온 광대뼈가 잘생긴 인상은 아니었지만, 후미카에게는 무척이나 안심되는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급히 뛰어나오느라 상기된 얼굴. 살짝 달아오른 볼가. 프로듀서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묘한 기분을 느껴버렸다. 할딱이는 숨결, 그세 흘러내린 땀방울이 햇빛에 비친다. 이렇게나 적극적인 후미카의 표정은 무대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일상에서 보는 그녀의 밝은 얼굴은 가만히 보고 있기엔 너무도 아름다웠다.

 

슬쩍 고개를 돌린 프로듀서와, 해맑은 얼굴로 바라보는 후미카. 그녀는 흐르는 침묵의 어색함을 느끼고 자신의 감정이 고조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 작은 수치가 몰려온다. 대담하고 크게 인사했던 것과 상반되게 그녀의 볼가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색한 기류. 그토록 얼굴을 봐오고 같이 일했던 사이인데 기묘한 어색함이 흘렀다. 후미카는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프로듀서를 멀뚱히 서서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인데, 어찌 해야 하는지 생각을 진전시키지 못한다.

 

“... 들어가도 될까.”

 

침묵을 깬 것은 프로듀서였다. 머뭇거리는 그녀를 두고보기 안타까워 먼저 말을 건넨다. 평소엔 그녀의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조심스런 말투였다. 후미카는 물음을 듣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마음속의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날뛴다. 정체를 알 순 없지만, 나쁘지 않았다.

 

“네, 들어오세요...!”

 

들떴던 목소리는 아직 전부 사라지지 않고 단편적이나마 그녀의 어조에 섞여 있었다. 프로듀서는 꽤나 특이한 경험을 했다는 생각을 하며 후미카의 뒤를 따랐다.

 

 

 

둘은 작은 정원을 지난다. 후미카는 문득 프로듀서가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대뜸 왜 왔냐며 물을 순 없었기에 잠시 깊이 생각한 끝에 의문을 던졌다.

 

“이 시간엔... 어쩐 일이세요?”

 

현관문을 열고, 프로듀서는 들어가 신발을 벗어 한 쪽에 잘 놓아둔다.

 

“일찍 업무 끝내고, 반차 썼어.”

 

문을 닫고 따라 들어간 후미카는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정리한다.

 

“반차요...?”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반차를 쓴 이유도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반차를 쓰고 여기로 찾아왔다는 것이 제일 큰 의문. 프로듀서는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한다.

 

“제대로 축하를 못해준 것 같아서. 그리고... 나도 좀 쉴까 해서, 민폐려나?”

 

“아니요, 아니, 아니에요...”

 

후미카는 재빨리 양손을 휘저었다. 머리칼에 가려진 눈빛에선 당혹이 물든다. 언제 와도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불시에 찾아와도 부담 없이, 언제라도 맞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안, 역시 너무 갑자기 온 건가...”

 

후미카의 당황을 오해한 프로듀서는 뒷목을 긁었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오면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겠지. 후미카는 그의 기색을 느끼고 재빨리 화제를 바꾼다.

 

“서재... 가실 거죠... 잠시만요...!”

 

빠른 발걸음으로 부엌으로 간 후미카는 급히 찬장에 있던 차통을 꺼내들었다. 인스턴트 녹차긴 해도 없는 것 보단 나을 터. 커피포트에 물을 넣고, 스위치를 올린다. 프로듀서는 천천히근처의 식탁에 앉았다.

 

 

 

처음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여러 책이 있다는 후미카의 말을 듣고 무심코 물어봤던 것이 발단이었다. 그럼 언제 찾아가서 책 좀 봐도 괜찮을까. 프로듀서는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사과하려 했지만, 그녀는 흔쾌히 괜찮다 대답해주었고,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여유가 날 때는 찾아가 조용히 책을 읽고 나오곤 했다.

 

오늘도 그럴 생각으로 찾아왔지만, 그에겐 다른 목적도 있었다. 두꺼운 양복 안에 품고 있는 것. 그녀가 좋아해 주지 않을까, 준비했던 선물이 들어 있었다.

 

물이 끓기까지 기다리는 후미카는 몸도 돌리지 않았다. 언제 끓으려나 안절부절못하고 프로듀서가 기다리는 것을 불안해했다.

 

그녀는 급히 찻잔에 물을 따르고 차를 털어 넣는다. 괴상하게 손이 떨려 양을 조절하지 못하고 차 덩어리가 뭉텅이로 물에 떨어졌다. 허둥지둥하는 후미카의 모습도 꽤나 각별해서 프로듀서는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후미카...? 괜찮으니까 그냥 올라가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후미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마음이 급하다. 갑자기 찾아온 프로듀서에게 대접을 해야 한다는 작은 압박감이 가득했다. 앉아 있던 그는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대로 끓지도 않아 희미한 김이 나는 찻잔을 흘낏 보고, 뚜벅뚜벅 서재가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아, 아... 네...”

 

앞서나가는 프로듀서를 보고 그녀는 치마 앞자락을 살짝 들어 빠르게 발을 놀렸다. 그를 지나친 후미카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간다.

 

서재의 문을 열고 그녀는 구석에 있던 의자를 꺼내온다. 먼지가 내려앉은 의자 위를 재빨리 털어내고 자신의 의자가 있던 앞에 놓는다.

 

아까완 달리 꽤나 일사천리인 그녀의 행동을 보고 프로듀서는 지긋이 미소 지었다. 후미카는 자신의 의자에 앉고, 손을 뻗어 그에게 권한다.

 

“앉으, 세요...”

 

미소를 띤 표정. 평소의 가라앉은 얼굴과는 다른 들뜬 어린아이 같은 기색. 프로듀서는 유난히 색다른 그녀의 모습을 뇌리에 새기며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 네.”

 

그녀는 짧게 대답하고 지긋이 프로듀서의 눈빛을 살핀다. 예전의 독서회같았다면 바로 책을 펼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졌는데. 프로듀서는 후미카를 향해 작은 농을 던진다.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네.”

 

후미카는 볼을 감싼다. 그제야 미열로 달아오르는 볼가를 알아챘다.

 

“그, 그런가요...”

 

“역시 생일이라... 그런 건가? 후미카, 생일 축하해.”

 

생일. 분명히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었다. 자각하곤 있었지만, 꽤나 다른 의미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전날에 축하를 들었을 때도 기뻤다. 팬들의 축하와 사무소의 아이들이 해준 진심어린 선물과 축하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당일이기 때문일까. 묘하게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기 힘들었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입꼬리가 늘어진다. 하루 종일 책을 보겠다는 다짐이 바래진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아리스도 데려올 걸 그랬나봐.”

 

“아니에요...!”

 

“어?”

 

급히 터져 나온 대답. 평소 둘의 사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프로듀서는 의아했다. 후미카도 이상한 점을 깨닫고 입술을 매만진다.

 

“아, 그, 제 뜻은... 싫다는 건... 아니에요...”

 

“아리스가 울겠는데.”

 

어째서 이렇게 기쁜 걸까. 이상하게도 좋은 기분이 멈추지 않는다. 평온한 하루를 독서로 보내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이 아니었던 걸까? 후미카는 은근히 스며드는 혼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흥미로운 반응들. 프로듀서는 옆에 놓여 있던 책 한권을 집어 들었다. 그저 그녀의 분위기와 맞춰 독서를 하고, 준비했던 선물을 건네고 돌아가려 했던 마음에 작은 장난이 생겨났다.

 

“아니면, 내가 온 게 기쁜 거야?”

 

아. 후미카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찾아낸 대답.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녀는 드디어 알아냈다는 생각에 대뜸 입술을 벌렸다.

 

“네, 맞아요... 프로듀서씨가 와서... 아.”

 

양손이 입술을 가린다. 늦게나마 깨달은 의미에 부끄러움이 차오른다.

 

프로듀서도 멀쩡하진 않았다. 너무도 대범하게 내뱉어버린 후미카의 대응에 장난으로 그치려던 말이 요상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그도 붉어지는 얼굴을 느끼고 급히 얼굴을 돌린다.

 

“죄, 죄송해요...”

 

독서를 할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서로 햇살이 들어오는 좁은 서재에서 후미카와 프로듀서는 서로 끙끙거릴 뿐이었다.

 

어서 선물을 주자. 프로듀서는 어색함을 물리치기 위해 양복 틈으로 손을 넣었다.

 

“줄 게 있어.”

 

“네...?”

 

하얀 진주색으로 포장된 두꺼운 선물. 척보기만 해도 책이 담겨있지 않을까 싶은 형태였다. 후미카는 예쁘게 포장한 선물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아, 선물은... 어제...”

 

“그건 그냥 선물, 이건 개인적인 선물이야.”

 

어제 건네주었던 것은 푸른색의 목도리였다. 슬슬 추워지는 날씨에도 목덜미를 드러내는 후미카를 보고 안쓰러워 사주었던 선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꺼낸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스스로도 선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었던 사소한 것이었다.

 

후미카는 조용히 선물을 받아든다. 힐끗 그의 얼굴을 보다가, 포장된 선물을 보다가 넌지시 묻는다.

 

“풀어 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포장지가 뜯어지지 않게 신경 쓰는 꼼꼼한 손놀림. 접힌 포장을 벗겨내자 갈색의 양장본 표지가 그녀를 반겼다. 제목은 없다. 서점에서 흔히 파는 책 같진 않았다.

 

후미카는 눈치를 본다. 그리고 슬쩍 책을 펼쳐본다.

 

중간 즈음을 펼치자 그곳에는 연도와 월, 일이 적혀있다. 자필로 쓴 글씨. 후미카가 가끔씩 보아왔던 거친 필체는 프로듀서의 것과 똑같았다.

 

“이건...”

 

잠시 글씨를 읽던 후미카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를 바라본다. 그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으며 책에 대해 설명했다.

 

“후미카를 프로듀스 하고서부터... 쓴 일지야. 재밌는 건 없고... 그냥 무얼 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정도랄까.”

 

푸른색의 동공이 커진다.

 

예상치 못한 선물, 상상도 하지 못했던 책에 후미카의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간다. 곧 비어있던 가슴에 감정들이 차오른다. 기쁨, 희열, 마음이 벅차오르는 감정들이 후미카에게 느껴진다.

 

“... 역시, 이런 건 좀 그런가? 그, 전에 그랬잖아...? 후미카의 새로운 페이지... 나도 한번 따라 해보고 싶었 달까.”

 

후미카의 커졌던 동공이 차차 가라앉는다. 금세 갈무리된 감정은 잔잔하고, 은은하게 후미카의 가슴속을 흐른다.

 

“... 기뻐요.”

 

또렷한 음색이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미카의 목소리엔 어떠한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네.”

 

“정말... 기쁘네요.”

 

가슴에 끌어안는 양장본. 촉촉해지는 눈동자가 넘쳐흐르는 기쁨을 대신한다.

 

읽어보고 싶어. 갑자기 생겨난 독서욕이 그녀를 자극한다.

 

“지금, 읽어봐도 될까요?”

 

“좀 민망한데.”

 

후미카는 말없이 일어나 프로듀서의 옆에 의자를 놓는다.

 

가까워진 얼굴은 미소를 짓고, 침묵으로 청한다. 프로듀서는 재차 멋쩍게 웃는다. 이렇게나 들뜬 후미카를 말릴 자신은 없었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 조금만이야. 나 쑥스럽다.”

 

“... 네!”

 

넘어가는 첫 장, 후미카와 프로듀서의 허벅지 사이에 놓인 책. 위에 적힌 날짜는 후미카를 스카웃한 첫날부터였다.

 

‘느낌이 오는 여성을 스카웃했다. 그녀의 이름은 사기사와 후미카.... 그녀의 숙부가 강력히 추천한... ’

 

쌀쌀한 가을의 햇빛은 아직 저물지 않고, 둘의 모습을 비춘다.

 

 

 

 

 

.....................

 

 

너무 급하게 쓰느라 퀄리티가 좋지 않습니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양념무 님의 그림에 모티브를 얻어 썼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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