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무능한 프로듀서와 사치코의 이야기

댓글: 11 / 조회: 730 / 추천: 4


관련링크


본문 - 10-24, 2016 17:18에 작성됨.

 

꽤나 오래 된 이야기다. 난 초짜였고, 사치코도 무명일 시절의 일.

 

오랜 수습시절을 보내던 나는 드디어 아이돌을 프로듀스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처음엔 연습실의 아이들을 많이도 소개 받았다. 모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에 쏙 드는 아이는 없었다.

 

당연히 초짜인 내가 까다롭게 굴기는 곤란한 입장이었다. 무슨 고집을 그리 세우냐며 프로덕션에서 압박도 많이 왔고, 협박성 멘트도 받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끌어내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은 망연히 길거리를 나돌아다녔다.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아이를 스카웃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코시미즈 사치코. 지나치게 자신감이 뛰어난 아이였다.

 

무턱대고 데려온 것 치곤 소녀는 꽤 힘내주었다. 노래실력은 손색이 없었고, 춤도 좋았고, 스타성도 흡족했다. 간간히 칭찬을 해주면 귀여운 저라면 당연한 거죠! 당당히 외치는 것이 약간은 안쓰럽긴 했지만.

 

그렇게 몇 개월의 연습 후, 첫 라이브는 불안하긴 했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이었다. 수없이 그녀의 자질을 어필한 덕분에 아예 끊길 것 같던 회사의 지원이 들어왔고, 건방지긴 해도 귀여운 아이라고 소문도 났다. 여전히 메이크업이나 여러 가지 일들은 내가 도맡아야 했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웠다.

 

노력의 결실일까, 방송국에서도 출연제의가 들어오게 되었다. 당연히 인지도를 쌓을 기회였기에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

 

물론 사치코는 자신의 귀여움을 알아채는 것이 너무 느리다며 새침한 반응을 보였지만, 몰래 연습실에서 방방 뛰는 모습을 우연히 본 후엔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구나, 뿌듯했다.

 

그렇게 순탄히 지나가는 줄만 알았다.

내가 간과한 사실들이 몇가지 있었다.

 

우선, 프로덕션에서는 무얼 하는 방송인지조차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나가라. 그 뿐이었다. 바보처럼 들떠서 그렇게만 알았고, 사치코가 무슨 내용이냐 물어볼 때도 괜찮을 거라며 어중간하게 넘겨버렸다.

 

다음으론 사치코의 소문이 나긴 했지만, 좋은 쪽과 나쁜 쪽이 꽤나 극명했다. 정말로 귀여운 애, 공주병이지만 사랑스러운 아이, 혹은 재수 없는 년, 프로덕션의 푸시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망했을 녀석 정도로 차이가 심했다.

 

방송국에 몇 번 드나들긴 했어도 사치코는 꽤나 긴장해서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마치 시골에서 상경한 남매처럼,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소개를 받았고 방송 3시간 전에서야 각본을 받아 볼 수 있었다.

 

내용은 터무니없었다. 순전 사치코가 당하는 내용뿐이었다. 얼굴에 케이크를 맞아도 바보 같게 어필, 밀가루를 흠씬 맞아도 멍청이 같이 어필, 머리를 한대 맞아도 어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속은 기분, 이게 대체 뭐냐며 PD에게 따지려 했다.

그러나 사치코가 일어나 선수를 쳤다.

 

이정도야 간단하다고, 작은 가슴을 펴고 외쳤다. 당연히 허세였다. 사치코는 참으로 여린 아이였다. 조금만 몰아붙여도 겁을 먹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데도 허세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싫은 게 뻔한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자신의 귀여움은 바래지 않는다며 떵떵댔다.

 

사치코는 넙죽 PD에게 인사를 하고 내 팔을 이끌었다. 결국 우리는 얌전히 대기실로 갔다.

 

허름하고 좁은 대기실로 와서 각본을 재확인 했다. 꽤나 유명한 기성 아이돌의 이름도 많았다. 그 녀석들은 전부 예쁜 모습이나 보여주고, 갑자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참 노골적으로 밀어주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반면 사치코가 하는 일은 전부 바보 같은 것 뿐.

 

불찰을 느꼈다. 멍청했다. 이런 건 당연히 검토해보고 사치코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어야 했는데. 완전히 희생양이 된 꼴이었다. 어떻게 같이 일을 했는데. 인기를 얻으려, 팬을 얻으려 얼마나 노력했는데.

 

지금이라도 역시 안 된다며 돌아갈까, 최악의 수까지 생각했다.

 

한편 사치코는 침착했고, 얌전히 앉아서 각본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단순하지만 꽤 긴 각본을 다 외울 수 있을까. 사치코도 그런 생각이었는지 유난히 집중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는 주기가 길어질 정도로 그녀는 몰입해 있었다. 멍하니 그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사치코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중요한 일이 있다고 나갔는데, 화장실이 뻔했다.

 

한숨을 쉬며 가만히 기다렸으나 그녀는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핸드폰도 놓고 갔고, 길을 잃었나 싶어 찾아나서기로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를 한참, 사치코의 모습을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사치코가 서 있던 곳은 방송에 같이 출현하기로 했던 타사 아이돌의 대기실 옆이었다.

 

여기서 뭐하냐며 말하려고 했으나, 사치코는 바로 내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작게 열린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잡담소리를 듣고 말았다..

 

내용은 참으로 뻔했다. 뒷담화. 사소한 것부터 큰 것까지 전부 제멋대로 나불거리는 무례한 의미들. 프로듀서라는 인간이 참 무능하다, 각본을 세 시간 전에 받았댄다, 애 이미지 관리를 안 한다. 등등... 분하긴 했지만 사실인 것도 있었기에 입술을 깨물고 가만히 인내했다.

 

그러나 곧 사치코의 험담이 이어졌다. 안무가 구리다, 목소리의 음정이 불안하다, 옷이 촌스럽다, 컨셉이 머저리같다. 치기라 해도 좋았다. 순간 화가 차올라 문을 발로 걷어 차려 했다. 허나, 그러지 못했다.

 

발이 올라간 사이, 사치코가 허벅지를 붙잡았고, 우리는 보기 좋게 넘어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자 잡담이 멎었고, 사치코는 들리란 듯이 크게 외쳤다.

 

“왜 멀쩡한 곳에서 넘어지나요? 바보 같은 프로듀서! 할 게 많으니 어서 가요!”

 

우리는 도망치듯 대기실로 돌아왔고,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앉아서 각본을 살폈다. 참으려 했던 생각은 사라졌다. 당장 짐 싸서 나가자고 사치코를 설득했다.

 

그러나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난 그녀에게 큰소리를 냈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건만, 너무도 부당한 대우에 흥분해 있었다. 내 끈질긴 설득에 이어진 사치코의 대답은 힘껏 던진 종이 뭉치였다. 얼굴에 나풀거리는 종이가 맞아 떨어지자, 사치코는 내 앞까지 당도해 있었고

 

그녀는 울고 있었다.

 

"어떻게 따낸 방송 출연인데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나요?!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제 평판은 어떻게 하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그런 소리 들어도 제가 귀여운 건 변하지 않으니까 상관없어요! 당신이 이렇게나 무능해도, 전 최고로 귀여우니까 이까짓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고요! 톱이 되자고 해놓고! 처음부터 이렇게 애처럼 굴기인가요!!"

 

대답할 수 없었다. 울먹거리면서 눈물을 닦아내는 사치코의 얼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많이 힘들구나.

 

귀엽다고 자부하면서 포즈를 잡던 때도, 언제나 당당하게 자신이 귀엽다며 수시로 말할 때도, 사치코에겐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이 처음이 아니었을 게 분명했다. 험담을 들을 때도 얌전히 듣고만 있던 그녀의 표정과, 태연하게 넘기는 반응들은, 절대로 처음이 아니었다.

 

결국 끅끅거리며 우는 사치코는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물밀어오는 죄책감을 안고, 난 소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가슴으로 눈물을 받아주었다. 미안하다며, 무능해서 미안하다며 등을 토닥여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사치코가 진정되기만 기다리니 어느새 시간이 다 되어갔다. 겨우 화장을 다시 해주고, 힘내라며응원도 해주고 우리는 대기실에서 나왔다.

눈에 충혈기는 사라졌으나, 불안이 앞섰다. 아까 보여준 의지대로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불안했다. 그리고 불안은 맞아 들어갔다.

녹화가 들어가는 데도, 사치코의 행동은 각본과 완전 달랐다. 소녀는 벌칙으로 날아오는 케이크를 멋지게 피하더니, 바로 손가락으로 브이를 편다. 대놓고 귀여움의 포즈였다.

 

당연히 NG. 그리고 수십 차례 이어지는 NG.

 

PD는 결국 화가 나서 나를 따로 불러 추궁했다. 물러설 곳은 없었다. 배째란 식으로 원래 사치코가 저렇게 귀엽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얼척없어 보이는 얼굴을 보니 가슴속에서 묘한 통쾌함이 솟아올랐다. 완전 프로 실격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쫓겨났다. 녹화는 중지, 다음 방영분은 비축본을 사용해서. 이 일은 프로덕션에 단단히 얘기해두겠다는 으름도 받았다만, 뭐 사치코가 그러겠다니 별수 있을까. 우리는 해맑게 웃으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사실 의문도 있었다. 어떻게 잡은 방송인데, 라며 운운하던 사치코가 이렇게 망쳐놓을 줄이야. 슬그머니 왜 그랬냐며 첫걸음이 어쩌구 하지 않았냐며 장난을 걸었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사치코는 흥, 고개를 돌리더니 들릴 듯 말듯 중얼거렸다.

그 조용한 목소리는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그야 프로듀서가 나쁜 소리 듣는 건 별개니까요."

 

사랑스러운 아이구나.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우린 돌아갔고, 물론 난 사장님에게 소환 당했다.

자초지정은 전부 설명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며 전부 털어놓았다. 사장님은 넉살좋게 웃으시며 알았다고, 돌아가라 하셨다.

무슨 조치를 취한 건지 몰라도, 이후에도 사치코의 이름엔 별 타격이 없었다.

 

물론 내 봉급은 10개월간 삭감이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프닝을 겪고 나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

 

제멋대로 같던 사치코가 날 의지한 다는 것도 알았고, 꽤나 생각해주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고... 마음가짐이 새로워졌다고 해도 좋았다.

 

 

 

지금은 뭐.

 

 

“라이브 시작 10분 전입니다!”

 

문밖에 있던 진행 스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려한 보랏빛의 미니 드레스를 입은 사치코는 양 옆에서 메이크업을 고쳐주는 두 직원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인다.

 

"사치코, 슬슬 나가야 해."

"흐흥, 모두 제 귀여운 모습을 보려고 모여 있겠죠? 으겍, 콜럭 콜럭!“

“입 벌리시면 안 돼요.”

 

메이크업 담당의 작은 핀잔을 듣고 그녀는 입을 다문다. 곧 볼터치를 두드리던 두 손이 사라지고 난 느긋하게 사치코에게 이야기했다.

 

"텅 비어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살짝 놀란 눈이 되는 사치코, 작은 불안이 엿보인다. 소심하긴.

 

"... 정말로요?"

"당연히 꽉 차있지."

"귀여운 것도 고생이네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치코.

 

아 지금은?

지금은 뭐, 여전히 귀엽지.

 

4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