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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질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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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4, 2016 02:57에 작성됨.

'마지막 기억'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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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기계와 유사한 특성을 가진다. 한 부품에 이상이 생기면 모든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뿐. 새로운 부품이 채워지고 조직은 다시 돌아간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나는 그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정말 그만둘 셈인가?"


"예."


부장님은 잠시 내 얼굴을 보더니 원하는 데로 하라고 하셨다. 자네마저 떠나는구만. 이라고 하시며 산처럼 쌓인 서류를 정리하는 부장님의 어깨는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축 처져있었다. 사람은 상실을 뒤에 두고 걸어나가는 존재라는 그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그 사람을 두고 떠나기엔 난 너무 약하니까. 그렇기에 나는 정든 이 곳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자네,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갈건가?"


조용히 나가려던 나의 등에 질문이 날아들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부장님은 서류를 정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지만 방금 그 질문은 분명 부장님이 한 것이리라. 어디로? 나는 이 곳을 떠나 어디로 가야 하는걸까? 그 사람이 없는 이 세상에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걸까?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건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는 것 뿐이었다. 말없이 나가는 내 귀에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부장님의 무거운 한숨소리였다.

 

주인 아주머니께 부탁드려 열쇠를 받아왔다. 문의 잠금을 풀고 문을 여니 삐그덕 소리와 함께 수 일 째 청소하지 않은 방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대한 전형적인 인상에 그럭저럭 맞는 방이다. 나는 적당히 먼지를 쓸어내려다 그냥 바닥에 누워버렸다. 가만히 누워있으니 왠지 그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기억 속의 그는 언제나 피곤해보였다. 그는 스스로를 모든 일에 서툴다고 했었고 그 말대로 매일이 야근인 일상이었다. 그가 급하게 허둥지둥 뛰어나가는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고 매번 직설적으로 말해서 아이돌들이 토라지는 것도 상당히 자주 있는 일이었다. 정말로 미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다시 보게 된게 언제였을까. 이래뵈도 길은 잘 찾는다며 웃으며 말하던게 떠오른다. 그가 들어온지 얼마 안되었을 때의 일이었을거다. 당시 텅빈 눈의 그는 신입 프로듀서로써 제대로 된 일을 따오지도 못하는 무능한 사람이었다. 애초에 원래 프로듀서로써 입사한 것도 아니었던걸 생각하면 그게 정상이었다. 파벌싸움에 밀려서 갓 만들어졌지만 제대로 된 투자가 되지 않는 한직인 아이돌 부서로 좌천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처음 잡은 직장인 이 곳을 잃고 싶지 않았고 그는 그런 내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했었다. 그래서 난 내가 가진 조그마한 연줄을 총동원해서 프로듀서와 별도로 일을 따왔었다. 아마 복지차원에서 들어온 스테드리를 그에게 유료로 판 것도 그때쯤이었을거다. 접대에는 돈이 필요했으니까. 변명할 여지가 없는 횡령이지만 그 때의 나는 무능한 그를 대신해 일하는 만큼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의 나는 자의식 과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원과 프로듀서의 일을 양립시키며 마치 내가 프로듀서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를 못믿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현장보조라는 명목으로 그가 가는 일을 따라갔고 때론 그의 결정에 개입하기까지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월권이지만 당시 나는 내 직장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것이 화근이었다.

 

깊은 산 속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하는 축제의 일을 갔을 때였다. 일이 끝났을 무렵은 이미 해가 진 후였다. 그는 밤의 산길은 위험하니 여기서 자고 새벽에 출발하자고 했지만 실적에 목말랐던 그 때의 나는 상당히 타이트하게 스케쥴을 잡아놨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예정을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는 내가 운전대를 잡을테니 출발할 것을 종용했다. 혹여 사고가 난다고 할지라도 그건 운전대를 잡은 내 책임이니 문제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엄청난 오만이었다. 밤의 산길은 내 생각보다 훨씬 어두웠고 설상가상으로 차까지 고장나버린 것이다. 최후의 수단으로 사람을 부르려했지만 때마침 쏟아지기 시작한 장대비와 함께 떨어진 번개가 기지국에 영향을 미친건지 전파마저 끊겨버렸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 나 때문에 모두가 산 속에서 갇혀버린 것이다. 모두를 볼 낯이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주위를 둘러싼 어둠에 대한 공포는 나의 자기비하를 한층 더 극대화시켰다. 그 때 무언가 따뜻한게 내 손에 닿았다. 그가 내 손을 잡아준 것이다. 깜짝 놀라 쳐다본 그의 눈은 번개 때문인지 평소와 다르게 형언할 수 없는 빛이 감도는듯 했다.

 

"괜찮아요. 아무 일 없을겁니다."

 

뭐가 괜찮냐고 이미 충분히 최악인데 지금 놀리는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그의 눈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합시다. 센카와 씨. 당신은 여기서 아이들을 돌봐주세요. 지금은 자고 있지만 깨어나면 아마 많이 당황할겁니다. 전 달래는건 못하니 여기서 적임은 당신입니다."

 

"그럼 당신은요?"

 

"차가 대충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는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긴 산 아래 읍내와 가까운 곳일겁니다. 그러니 그 곳에서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올테니 이 곳을 부탁드립니다."

 

"이 어둠 속에서 이 날씨에 산길이라니. 당신 지금 제정신인가요?"

 

"내일 9시에 스케쥴 있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드시 스케줄에 맞춰야 한다는 생각으로 출발을 강행해서 이 상황을 만든게 나이기 때문이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이래뵈도 길은 잘 찾으니까요. 금방 다녀오지요."

 

바보같은 사람이다. 나는 그저 내 실수를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자길 걱정한줄 안 모양이다. 하지만 오해를 해명할 겨를도 없이 그는 차를 나섰다. 아마 그 때가 내 생애 가장 긴 밤이었을거다. 뒤늦게 깨어난 아이돌들을 달래고 다시 재우고를 반복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정신이 들고 보니 견인차가 차를 끌고가고 있었고 조수석에는 진흙투성이의 프로듀서가 잠들어있었다. 후일 알고보니 차는 읍내에 상당히 가까운 지점에서 멈춰있었지만 프로듀서에겐 야맹증이 있어서 오로지 방향감각에만 의지해서 산길을 내려갔던 모양이다. 밤인데다 비까지 거세게 내려서 앞이 전혀 안보였었다고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을 때 나는 엄청난 죄책감을 느꼈다. 그 때부터였을거다. 그를 당신이 아니라 프로듀서 씨라고 부르게 된게. 그와 동시에 나는 프로듀서에게 이름으로 부르도록 요청했다. 금방 되지는 않았지만 최근 들어선 의식해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 같아서 나름 기뻤었다. 하지만..

 

 

 

 

"아가씨. 손님이 왔는데."

 

"예? 아, 예. 잠시만요."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나는 벌떡 일어나서 손거울을 꺼내 옷매무새와 얼굴을 점검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톡톡 두드려 눈물을 지우고 살짝 번진 화장을 고쳤다. 이럴 땐 얕은 화장만 해도 되는 피부가 참 좋다.

 

"흐응~ 선객이 있다 했더니 사무원 씨였네?"

 

"시키 쨩?"

 

"저희도 왔어요."

 

"안녕하세요. 치히로 씨."

 

"강녕하셨나요?"

 

"여러분! 귀여운 저를 놓고가시면 안되죠! 어라? 왜 다들 절 쳐다보고 계신거죠? 흐응~ 다들 저의 귀여움 때문에 눈을 때질 못하시는거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시죠? 안즈 씨?!"

 

시키의 뒤를 이어 우즈키, 쿄코, 요시노, 사치코, 안즈까지 들어왔다.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뭐야? 자기 집인 것처럼 말하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안즈 쨩. 너무 놀리지 말아요. 치히로 씨. 저흰 물건을 찾으러 왔어요."

 

"물건이요?"

 

"예. 치에리 쨩이 예전에 프로듀서 씨에게 선물로 준 네잎 클로버를 찾으러 왔어요."

 

뜬금없는 쿄코의 말에 무슨 말인지 설명을 요구하려 했지만 다른 아이들은 이미 흩어져서 방을 뒤지고 있었다.

 

"프로듀서의 방이라.. 역시 자극적인 냄새가.."

 

"시키 씨! 이상한 소리 내지 마시고 빨리 찾으세요! 귀여운 저도 찾고 있잖아요!"

 

"프로듀서 씨는 청소를 좀 게을리 하시는구나."

 

"그럼 아이돌 제군. 열심히 찾도록."

 

다들 소란스레 무언가를 찾는 가운데 안즈가 책장과 상자 사이로 슬그머니 몸을 숨겼다. 그 때 주변을 둘러보던 쿄코가 말했다.

 

"안즈 쨩! 그 옆의 상자 혹시 그거 아니예요?"

 

"아, 그러네. '보물들' 이라고 적혀있어. 찾았으니 안즈는 이만 잘게."

 

"그러지 말고 어서 열어보세요!"

 

분명 프로듀서에게 중요해보이는 이름의 상자를 마음대로 열려고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급하게 외쳤다.

 

"잠깐만요! 허락도 안받고 프로듀서의 물건을 함부로 보면 안되요!"

 

그 때, 귀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이 상자에서 떨어지지 않는건 왜일까나?"

 

"꺄앗?!"

 

"흐흥~ 나쁘진 않은 냄새지만.."

 

"그.. 그만! 다들 잠깐만요! 대체 무슨 상황인가요? 왜 프로듀서 씨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는거죠? 설명해주세요!"

 

결국 큰 소리를 낸 나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다들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고 난감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그 때 우즈키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겠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녀에게 대답을 재촉하려는데 옆에서 시키가 말했다.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거야."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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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의 전적 1킬 0데스

 

0킬도 올리지 않아도 되는 밤이 하루빨리 오면 좋겠군요. 더러운 해충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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