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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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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4, 2016 00:41에 작성됨.

 “여어, 여기야.”
 프로듀서가 한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에고, 숨차. 휴……. 그나저나 웬일이래. 프로듀서가 저보다 빨리 오실 줄이야.”
 여자는 달려오느라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그리고 비뚤어진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평소에는 잘 입지 않던 원피스 드레스와 가디건을 입고, 또각 소리를 내는 하이힐, 변함없이 어른스럽게 올려 묶은 머리였다.
 “오. 오늘 좀 꾸미고 왔는데?”
 프로듀서가 익살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놀리지 말아요, 프로듀서. 저도 꾸밀 땐 확실하다구요.”
 “아냐, 정말 예뻐서 그래.”
 “엇……. 그렇게 직설적으로 나오시면 곤란한데요.”
 리츠코는 프로듀서의 예상치 못한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평소에도 스스럼없이 그런 말을 하는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당황한 리츠코는 놀려줄 겸 그에게 질문했다.
 “그, 그럼 어디가 평소랑 다른데요?”
 “오호? 시험이야?”
 “그렇다고 해두죠.”
 당당한 리츠코의 태도에 프로듀서는 빙긋 웃으면서 곤란한 듯 턱을 괴었다. 항상 봐왔던 여자였다. 같은 사무소에서 한솥밥을 먹고, 웃고, 울고, 화내고, 사과하면서 지냈던 사람인데 어디가 다른지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그는 고민하는 척 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화장이 좀 더 진하고, 머리도 살짝 다듬었고. 안경도 평소랑 다른 걸 썼네?”
 “윽…….”
 “여기저기 바뀐 부분은 많지만 대체적으로 보이는 건 이 정도? 뭣하면 더 세세하게 파고들까?”
 “돼, 됐네요!”
 리츠코는 당황하며 그의 말을 끊었다. 괜히 말을 꺼내서 본전도 못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 빨리 들어가요! 여기서 말싸움하다 타고 싶은 것도 못 타겠네!
 그러더니 프로듀서의 손을 꽉 잡은 채 테마파크 안으로 들어갔다. 이 날은 오랜만에 두 사람의 휴일이 겹치는 날이기에 며칠 전부터 약속을 잡은 것이다. 둘은 어디로 갈지 얘기를 나눴다. 후보는 카페나 레스토랑, 수족관, 뮤지컬 관람 등이 있었지만, 고심 끝에 처음 사귀고 갔던 테마파크를 선택했다.
 “확실히 사람이 없긴 없네요.”
 리츠코가 말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테마파크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있어봐야 가족이나 연인 몇 그룹 정도였고, 얼핏 보면 두 사람이 전세를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도 줄 서는데 시간 안 걸리고 좋잖아?”
 “하긴 그렇네요. 모처럼 휴일인데 줄 서는데 시간 보내면 손해 보는 느낌이니까.”
 “자, 그럼 뭐부터 타볼까?”
 프로듀서가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멀리서 열차 소리와 동시에 비명소리가 들렸다.
 “역시 첫 번째로는 롤러코스터지?”
 “윽. 또 그렇게 나오시깁니까.”
 빙긋 웃는 그의 얼굴을 보고 리츠코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리츠코의 손을 잡고 뛰듯이 롤러코스터 대기 줄에 섰다. 아무리 사람이 없어도 인기 있는 탑승기구는 달랐다. 여기서부터 40분이라는 푯말을 보고 둘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이왕 줄을 섰으니, 기다려서 타기로 했다 순간 프로듀서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짧게 통화하고 끊었다..
 “무슨 일 있어요?
 리츠코가 물었다.
 “아니, 별 거 없어. 그냥 며칠 뒤에 있는 일 때문에.”
 “아, 사무소였구나.”
 그의 대답에 리츠코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많이 바쁘시겠죠?”
 “아마도. 우리 업계가 다 그러니까.”
 “마주칠 시간도 이제 없겠네요.”
 “마음만 먹는다면 못 마주칠 일도 없겠지만.”
 “그렇긴 하겠네요.”
 그리고 둘은 말이 없어졌다. 한참을 기다리고, 푯말이 대기시간 10분을 알려줄 때쯤 리츠코가 입을 열었다.
 “가끔씩 생각해요.”
 “뭘?”
 “프로듀서 업무를 전부터 하고 싶어서 들어왔는데 요즘 점점 지쳐간다는 걸요.”
 “그것도 일이니까 지치는 건 당연한 거 아닐까?”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업무가 쉽든 어렵든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즐거웠어요. 애들한테 줄 업무를 따오거나, 유닛을 짜거나, 신곡을 받아오거나. 내 손으로 뭔가를 한다는 게 좋았어요.”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살다가 저를 놓치게 되더라고요. 나에게 쓸 시간을 점점 더 남한테 주게 되고, 손을 펴보면 텅 비어있고…….”
 목소리가 울먹였다. 건드리면 눈물이 쏟아질 듯 했다. 프로듀서는 조용히 손수건을 건네며 어깨를 토닥였다.
 “화장 지워지겠다. 눈물 닦아.”
 리츠코는 손수건으로 살짝 나온 눈물을 찍어 닦았다.
 “이런 데서만 섬세하다니까…….”
 “모처럼 테마파크 에 왔는데 울면 이상하잖아. 좋은 기억만 남겨야지.”
 그 순간 대기 줄이 움직이면서 둘의 탑승 차례가 되었다. 그는 리츠코의 손을 살며시 잡고 열차에 탔다. 열차가 오르막길이 끝나고 아래로 떨어지면서 사람들이 무서움에 비명을 질렀다. 두 사람 역시 소리를 질렀다. 다만 리츠코는 비명이 아닌 무언가를 말했다. 속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가 들을까 하는 마음도 들었으나, 매서운 바람소리에 목소리는 지워졌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둘의 데이트는 계속 됐다.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뒤에 짜릿한 기분을 느낀 사람도 있는가 하면, 휘청이는 사람도 있었다. 휘청거리는 사람을 위해 벤치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카페에 들르기도 했다. 얌전하게 회전목마를 타기도 했고, 다시 짜릿한 맛을 즐기려 후룸라이드나 자이로 드롭에 도전도 했다. 둘이 웃으며 즐길 때 해는 어느새 산을 넘어갔고 어둠이 찾아왔다. 테마파크 곳곳에 화려한 조명이 켜졌다. 아직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는 듯 나이트 퍼레이드도 시작했다. 두 사람은 그것을 보는 대신 관람차를 탔다. 기구가 천천히 꼭대기를 향하고 있을 때 리츠코가 얘기를 꺼냈다.
 “아까 롤러코스터 타기 전에 말인데요.”
 “응?”
 “제 손이 텅 비어있다고 했던 거요.”
 “뭐야,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어?”
 리츠코는 피식 웃었다.
 “아뇨. 그 뒤의 이야기를 하려고요.”
 “그 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누군가가 제 손을 채워주더라고요.”
 그는 살며시 프로듀서의 눈을 바라봤다. 한없이 깨끗한 눈동자가 보였다.
 “제 눈앞에 있는 어떤 사람이.”
 “…….”
 “그 사람과 만나서 내게도 행복이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어요. 예전보다 능률도 좋아졌고, 일하는 게 즐거웠어요. 아니, 하루하루가 즐거웠어요.”
 그의 말이 점점 상기됐다.
 “모처럼 다시 그런 감정을 느꼈는데…….”
 눈에서 그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맺혀 떨어졌다. 안경에 김이 서릴 정도였다.
 “그 사람이 제 곁을 떠난대요. 멀리 가버린대요.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면서…….”
 “리츠코…….”
 “그게 왜 그 사람이어야 했죠? 왜…….”
 마음속에 담아뒀던 서운한 감정을 토해냈다.
 “왜 프로듀서야 했냐고요! 왜!”
 넘치는 눈물을 닦아낼 수 없었다. 손바닥으로 닦으면 닦을수록 흘러나와서 감당할 수 없었다. 이 눈물이 그를 잡아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그도 알고 있다. 알고 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프로듀서는 그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울음이 멈출 때까지 그저 천천히. 아무런 위로의 말도 없었고, 아무런 격려의 말도 없었다. 어깨가 눈물로 얼룩이 져도 괜찮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치유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울음 소리도 잦아들었다. 리츠코는 남은 눈물을 닦았다. 프로듀서는 다정하게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리츠코. 내가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들었구나.”
 “…….”
 “서운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말할게. 이건 내게 온 중요한 기회야. 놓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
 “그렇다고 네가 중요하지 않단 건 아니야. 둘 다 소중해. 하지만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어.”
 “……그래서요?”
 “그래서 이번 기회에 내 능력을 좀 더 올려보고 싶어. 그렇게 되면…….”
 덜컹 소리가 들렸다. 관람차가 지상에 내려오는 소리였다.
 “어이쿠, 내려야겠다. 리츠코, 일어설 수 있지?”
 리츠코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문이 열렸다. 안전 요원의 안내에 따라 땅에 발을 딛고 출구로 나갔다. 아직 퍼레이드는 계속 됐다. 흥겨운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 화려함과 흥겨움에 두 사람은 시선을 뺏겼다.
 “프로듀서.”
 리츠코가 말했다.
 “아까 하려던 얘기가 뭐였나요?”

 “음…….”

 프로듀서의 눈은 여전히 퍼레이드를 향했다.
 “그것보다 리츠코, 이거 알고 있어?”
 “뭐요?”
 그는 고개를 돌려 리츠코를 바라봤다.
 “3년 전.”
 “네?”
 “3년 전에 우리가 처음 사귀고 테마파크에 왔을 때.”
 “음?”
 “롤러코스터며 카페며 회전목마며 관람차며 이 퍼레이드까지, 우리가 탔던 그 순서대로였단 거 알고 있었어?”
 “아.”
 리츠코가 놀라며 탄식했다. 3년 전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 것에 놀랐고, 자신도 미처 몰랐던 걸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에 더 놀랐다. 느긋한 성격인 그여서 더 그랬다.
 “와, 그런 걸 다 기억하시네요.”
 “너랑 있었던 일은 다 기억하지.”
 프로듀서는 빙긋 웃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 능력이 더 올라가면.”
 그는 리츠코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리고 입술을 빼앗았다. 리츠코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에 저항할 수 없어 그의 리드에 몸을 맡겼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둘의 입술이 떼어졌다.
 “그 때 다시 네 앞에 나타날게.”
 그는 리츠코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때는 이 손이 비어있지 않게 해줄게.”
 “프로듀서…….”
 리츠코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때는 울리지 마세요.”
 “약속할게.”
 그렇게 테마파크가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은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마지막 키스와 함께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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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코 애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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