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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 세상에서 <키라리편>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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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3, 2016 02:16에 작성됨.

네가 없는 세상에서 <키라리편> 上 보러가기

코부쿠로 - 여기서밖에 피지 않는 꽃 (아이바 유미ver)

※ 어디까지나 작가가 글을 쓰면서 들은 작업용BGM입니다. On / Off 는 자유롭게 선택해주세요..

 

 

 

 

 

 

 

 

 

 

 

 

 

 

 

 

 

 

 

 

 새하얀 철제 침대, 새하얀 이불, 투명한 비닐에 담긴 담긴 하얀 액체. 소독약 냄새로 가득한 병실의 시계바늘은 6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창 밖의 하늘에선 일몰하는 주황빛의 태양이 보였다.

 키라리의 옆에서 흐느끼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제멋대로에, 어리광쟁이에, 그래도 가끔은 어른스러운 그 금발의 아이.

 “후에……?”

 눈물 범벅이 된 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리카는 주삿바늘이 꽂혀있는 키라리의 왼손을 꼭 잡고 있었다.

 꽤 따뜻했다.

 옆에는 미리아와 프로듀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즈와 눈이 마주쳤다.

 “키라리 정신이 들었어?”

 “제가 의사선생님을 모셔오겠습니다.”

 다급한 듯 프로듀서가 뛰어갔다.

 “키라리 다행이야……!!”

 리카는 그제서야 키라리에게 머리를 대고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주삿바늘이 조금 아팠지만, 키라리는 꾹 참고 리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아픈 데는 없어?”

 안즈가 키라리의 이마를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키라리는 건강★건강 하다규우?”

 사실은 여전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잠시 후 프로듀서가 의사선생님을 모셔왔다. 그는 키라리의 상태를 확인 한 후, 그다지 밝다고는 하지 못할 얼굴로 프로듀서, 안즈와 함께 복도 밖을 나갔다. 대강 짐작은 갔지만 키라리는 모르는 척, 리카와 미리아를 안심시켰다.

 그날 저녁 두통이 멎고 증세가 호전된 키라리는 의사로부터 병명에 대해 듣게 되었다.

 뇌하수체 선종.

 키라리는 어릴 때부터 과학을 무척 어려워했고 고등학교에 올라와선 문과에만 전념했기에 뇌하수체가 정확히 뭔진 몰랐지만, 어찌됐든 뇌에 뭔가 종양덩어리 같은 게 생겼다는 것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드라마나 소설에선 이럴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고 표현했던가, 하지만 키라리는 어째서인지 무덤덤했다. 아니 오히려 속이 시원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겨우 17세 여자아이의 키가 그토록 커다랬다. 몸에 문제가 없는 쪽이 이상했지. 결국 키라리가 가장 힘들었던 건 병 그 자체가 아닌, 이런 사실이 언제쯤 닥쳐올까 라는 은연 중의 불안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그 일이 닥쳐도 마음 자체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할 수 있었나 보다. 어찌됐든, 그 병은 키라리의 머릿속에 들어있었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다면 수술로 종양을 제거 한 후 약물치료를 계속하면 어떻게든 회복하여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이후 계속된 투병생활 도중 키라리의 키는 결국 190cm를 넘기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어차피 1cm 늘어났을 뿐이었다. 189cm나 190cm나 사람들에겐 똑같이 커다랗고, 똑같이 이상하게 보이겠지. 수술에 대한 공포와 두통, 독한 약으로 인한 고생에 비하면 그런 사소한 변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키라리를 정말 힘들게 하는 더 커다란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키라리 멜론 사왔어.”

 병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안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라리는 그대로 돌아 누운 채로 말했다.

 “안즈쨩. 일은 다 끝내고 온 거야?”

 “응.”

 “……”

 ”아니.”

 한숨을 쉬었다. 수술이 끝난 후 한 주가 지나도록 안즈는 자신의 일도 뒷전으로 해두고 거의 매일매일 병실에 찾아오고 있었으니까.

 키라리는 어째서인지 심술이 났다.

 “안즈쨩.”

 “일은 끝냈고 빼먹은 건 레슨 정도니까 괜찮잖아. 키라리의 상태도 걱정되고.”

 “안즈쨩.”

 “응? 왜?”

 더 이상 안즈의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보고 싶었다. 보고 싶었지만 정면에서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동안 쌓인 짜증과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그 폭발은 이성에 부딪혀 대부분 삭혀지고 깎여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된, 예리한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 딱 한마디의 차가운 말은, 키라리와 안즈 모두의 마음을 잔혹하게 꿰뚫어버렸다.

 “이제 그만 왔으면 좋겠어.”

 “……”

 안즈가 말을 잇지 못했다. 키라리 스스로도 그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뒤늦게 자신의 말을 후회하고 몸을 일으켜 뒤돌아 보았을 땐, 안즈는 이미 키라리를 등지고 있었다.

 “잘 지내. 몸 잘 챙기고.”

 키라리는 손을 뻗었지만 단 한마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안즈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몰라 정말로 두려웠으니까. 그렇게 안즈는 병의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그 순간 키라리는 깨달았다.

 사람들의 멸시보다도, 수술실의 날카로운 메스보다도, 심지어 친구를 잃게 되는 것보다도, 더욱 무서운 것이 키라리의 내면에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그날 저녁.

 바쁜 일 와중에도 틈틈이 문병을 온 프로듀서가 옆에 앉아 안즈가 가져왔던 멜론을 깎고 있었다. 키라리는 창 밖의 별 빛을 보며 부드러우면서도 차디찬 그런 겨울바람을 쐬며 입을 열었다.

 “키라리, 당분간 쉬고 싶어.”

 그가 손을 멈추었다. 잠깐의 정적 후,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제가 당신을 힘들게 해버렸나 보군요.”

 “아니야. 프로듀서는 아무런 잘못 없으니까.”

 “병 때문에 지치고 힘드신 겁니까? 그렇다면 제가 회사에 잘 말해 병가를 어떻게든 연기해보겠습니다.”

 “으응.”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다면 이유를……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키라리는 고개를 저었다.

 안즈를 시기하고 질투했었다고.

 그런 이야길 프로듀서에게라도 할 수 있을 리 없잖아? 작고 귀여운 안즈를 보면 껴안고 싶을 정도지만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슬퍼져. 행복해지지만 동시에 스스로도 몰랐던 무서운 감정이 솟아오르려고 해. 그런 이야길 해버리면 키라리를 분명 나쁘고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할게 분명한걸.

 그래서 안즈를 바라보는 자신의 속마음이 무서워서, 더 이상 같이 일을 할 수가 없다고

 이 사람에게 그렇게 말해버릴 수는 없잖아……

 “…….정말 잠깐이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기가 풀릴 때까지 당분간 푹 쉬어주십시오.”

 그는 더 묻지 않고 요청을 들어주었다. 키라리는 탁자에 놓여있던 쪽지 세 개를 집어 들어 프로듀서에게 건네주었다.

 

 ‘안즈쨩! 키라리는 너무너무 힘들어서 이제 좀 쉴려고 해. 그러니까 당분간 키라리가 돌아올 때 까지 키라리의 몫까지 열심히 힘내줘~☆’

 

 “내일 모래 퇴원하고 나면 이 쪽지, 안즈쨩 리카쨩 미리아쨩에게 전해주지 않을래?”

 “전 상관없지만 되도록이면 직접 말로……”

 그는 키라리의 손등을 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축축한 물방울의 감촉이 뒤늦게 느껴졌다. 키라리는 감정을 강하게 억누르고는 그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어떤 하얀 종이조각을 건네며 키라리에게 말했다.

 “저도 기다리겠습니다. 언제라도 좋으니 여기로 연락해주십시오.”

 그의 명함. 그가 처음 만났을 때 건네준 마법의 지팡이였다. 키라리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언젠가는 다시 발돋움 할 수 있다는 증표, 그것이 키라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이었다.

 

 몇 일 후 무사히 퇴원한 키라리는 모두와 연락을 끊고 옛 번호와 휴대폰을 그대로 봉인해버렸다. 그렇게 전부 잊다 보면 언젠가 마음이 회복되어 다시 그들과 함께 설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기대에 키라리는 1년 동안 재대로 다니지 못한 학교를 다니면서 아이돌의 일들을 점차 잊어갔다.

 하지만 그런 부질없는 희망은 센터시험을 준비하던 겨울의 12월 31일 밤 송두리째 깨져버렸지.

 가족과 함께 집에서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를 먹으며 보던 방송국의 연예계 수상식에서, 예능 신인상을 수상한 안즈를 보고서 키라리는 놀라고 말았다. TV속의 안즈는 공주님처럼 기다랗게 머리를 풀고 우아하게 웃으며, 다른 연예인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공을 동료들과 프로듀서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키라리가 알던 안즈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이름과 모습이 같을 뿐인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키라리가 멈춰선 사이 그렇게 안즈와 옛 동료들은 머나먼 곳으로 앞서가버린 걸까. 동료들의 성공에 대한 막연한 기쁨에 이어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뒤엉켜, 키라리의 마음은 또다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장소 따윈 없는 걸까? 그런 생각에 키라리는 급히 옛 핸드폰과 프로듀서에게 받은 명함을 서랍에서 꺼내 들었다. 하지만 1년이나 연락을 끊었는데, 저렇게 변해버린 안즈와 프로듀서가 키라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덜컥 겁이 나 핸드폰과 명함을 서랍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키라리는 자신으로부터 또 다시 도망쳤다.

 시간이 흘러 도쿄도 내 적당한 대학교의 패션디자인학과에 입학한 키라리는 그럭저럭 평범한 캠퍼스 생활에 만족하며 자신의 생활에 안주하기 시작했다.

 그냥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돌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젠 키라리의 나름대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중고등학교 때와 달리 대학의 학생들과 교수들은 모두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건강에 있어서도 약도 한 두 가지를 제외하면 거의 끊어도 될 정도로 완치가 되었고 예전처럼 대부분의 야외활동이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키라리를 기억해주는 옛 동료 죠가사키 미카와도 재회해 또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었기에, 마음도 안정감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런 키라리의 눈에는 모든 일이 잘 풀어지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처럼 보였다. 이젠 추억을 아름다웠던 한 때로써 가슴 한 켠에 묻고, 새로운 삶을 시작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7월이 오기 전까지는.

 “─이에 사측에선 후타바 안즈씨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며 문제를 일축했지만 346프로덕션의 미성년자에 대한 과도한 스케줄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

 아침 등교 중 대로변 전자상가의 상점 TV에서 흘러나온 그 앵커의 말에 키라리의 발걸음이 멎었다. 키라리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안즈가 과로로 입원했다니?

 무언가 잘못됐음을 떠올린 키라리는 그대로 발을 되돌려 집으로 향했다. 학교로 나섰다가 갑작스럽게 돌아온 딸에 당황하는 엄마의 말은 들리지 않았고, 키라리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오래 전 봉인했던 핸드폰을 꺼내 들어 전원을 켰다.

 그리고 라인의 대화방을 보고선 키라리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다려달라 했다고 정말로 기다려버리면 어떻게 해……”

 하얗고 동그란 말 풍선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죄인의 가슴을 꿰뚫는다. 키라리는 핸드폰을 쥐어 잡고서 무릎을 끌어 안고 종일을 그렇게 흐느껴 울었었다.

 지금의 키라리처럼.

 어둑어둑한 콘서트의 홀 앞의 광장. 시릴 정도로 새파란 가로등의 불빛을 등지고, 키라리는 그렇게 화단에 홀로 앉아 생각했다. 가장 소중했던 친구에게 질투했고, 그 친구의 기다림을 재대로 믿어주지도 못했으며, 마지막으론 자기가 한 약속마저 잊어버리고, 또 저버렸다.

 결국 키라리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안즈를 버린 것이었다.

 

 이젠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마법사의 마법도 하룻밤의 꿈을 보여줬을 뿐 그것이 키라리의 현실이 되는 일은 없었는걸. 결국 어떻게든 자신을 변화시켜줄 줄 알았던 그런 아이돌이 되어서조차 지금까지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조롱 받고 이용당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겨우 찾아낸 줄 알았던 진짜 안식처도,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지래 겁을 먹고 도망쳐버렸다. 이제 와서 돌이키기엔 너무나도 늦어버렸지. 그녀들은 키라리가 멈춰선 사이에 너무나도 멀리 떠나가버렸으니까.

 어쩌면 이게 키라리에게 맞는 분수일지도 몰라. 키라리는 그렇게 양손에 얼굴을 맞대고, 그렇게 마음속을 가다듬었다.

 미련 따위 버리고

 가짜 미소를 지으면서

 귀여운 척을 하면서

 바보취급 당해주면서

 빤히 보이면서도 이용당해주면서

 둥글게 둥글게

 예전부터 늘 그래왔던 그대로 살아가면 되는 거야.

 키라리는 그렇게 쓸쓸히 콘서트 홀을 떠났다.

 

 

***

 

 

 다음날 아침.

 모처럼의 공강일이었지만 키라리는 그저 침대 위에 누워 미카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어젠 갑자기 떠나서 미안했다고. 미카는 별말 없이 넘어가 주었다. 역시 민폐였던 걸까 모처럼 키라리를 신경 써줬는데 미안한 마음이 든다.

 키라리는 그대로 옆으로 뒤돌아 누웠다. 햇살이 비치는 창가의 커튼 사이에서 얼마 전에 구입한 로즈마리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추억’, 그리고 ‘나를 생각해요’

 

 분명 그런 꽃말이었지.

 딱히 의식한 건 아니었다. 그저 맡아본 향이 취향이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 은은한 향기마저 부담스럽다. 가슴이 저릴 정도로 아련한 그 추억들도 지금의 키라리에겐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뿐이다. 결국 키라리는 방에 있을 수가 없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작고 예쁜 꽃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그대로 집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아무래도 안즈처럼 할 일없이 빈둥대는 성미는 키라리에게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서관에서 과제라도 하다 보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키라리는 그렇게 생각하곤 도서관의 2층 창가에서 몇 시간 정도를 책을 읽으며 보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소란에 창 밖을 내려다봤다.

 1층의 현관 앞에서 빵모자와 때 이른 겨울 목도리를 쓴 왠 작은 여자아이가 키라리와 같은 학과의 여학생 두 명에게 둘러 쌓여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이가 길을 잃은 것 같았다.

 “같이 온 부모님은?”

 “혹시 교수님 찾아온 거니? 어느 학과 어느 교수님인지, 성함 이라던지 말해줄 수 있어?”

 그 아이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이나 학생들 양쪽 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은 분위기. 키라리는 안되겠다 싶어 1층으로 내려가 자초지종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얘가 혼자 학교를 서성거리고 있길래 미아인가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무래도 곧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었으니 그 여학생들도 곤란해할 만도 했지. 키라리는 허리를 숙인 뒤 그 아이의 모자를 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니? 언니가 맛있는 거 사줄까?”

 그 아이가 고개를 끄떡였다. 딱 안즈만한 키의 여자아이. 키라리는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머리를 만졌지만 그 익숙한 감각에 오히려 자신의 마음만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일이 해결됐다 생각했는지 두 여학생들이 고맙다 인사하며 제 갈 길을 떠나갔고 키라리는 약속대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 근처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카페는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키라리는 가을의 이른 노을이 비치는 창가 쪽 자리를 찾아가 그 아이와 마주앉았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웨이트리스가 친절하게 인사하며 메뉴판을 건네주고 갔다.

 시계를 확인했다. 5시 12분, 곧 있으면 저녁이니 슬슬 이 아이의 부모님도 걱정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 키라리는 아이에게 물었다.

 “어디서 왔니?”

 하지만 그 아이는 입을 여는 대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조급해진 키라리가 되물었다.

 “정마알~ 대답 안 해줄 거야?”

 어째서인지 아이가 한숨을 쉬었다.

 “언니 슬슬 화낼꼬야

 “─푸하아!”

 

 그 순간

 그 아이가 모자와 목도리를 허물처럼 벗어 던졌다.

 촉촉한 땀방울과 함께 긴 금발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키라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는 안즈였다.

 

 “하아, 큰일날 뻔 했네. 들키면 여로모로 귀찮아 지니까.”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몸은 차가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키라리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사이 안즈가 먼저 말을 꺼내왔다.

 “오랜만이야 키라리.”

 “아, 안즈쨩. 여길 어떻게……”

 “어제 공연 중에 키라리가 미카랑 같이 있는걸 봤으니까 혹시나 했지. 둘이 같은 학교라도 다니는 거 아닐까 하고 말이야.”

 “그랬구나…….”

 서로의 시선이 엇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어떤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없었던 키라리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혼란스러웠고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제 와서 뭐라고 말하면 되는 거지? 멋대로 몰래 키라리를 찾아와 함정에 빠뜨린 것에 대해 화를 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 동안 어긴 약속에 대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이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양손의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안즈쨩, 키라리는─”

 “─있잖아 있잖아, 뭐라도 먹지 않을래? 사실 안즈 아직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안즈가 키라리의 말을 끊었다.

 “그, 그래? 그럼 뭐라도 시킬까?”

 ……그래도 조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키라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안즈는 키라리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커다랗게 메뉴판을 펼치곤, 그렇게 몇 분 고민하며 음식을 정했다. 키라리는 벨을 눌러 웨이트리스를 부른 뒤 같은 것을 주문했다. 몇 분 후 햄버그 세트 두 개가 오자 우린 한동안 아무런 대화도 없이 식사를 했다.

 시간이 흘렀다. 세차게 뛰던 가슴도 제법 누그러들었고 혼란도 진정되었다. 안즈는 여전히 키라리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지만 키라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안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배가 많이 고팠는지 아니면 이젠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지, 예전엔 그렇게 싫어하던 야채와 함께 햄버그를 남김없이 맛있게 먹고 있었다.

 2년만 인가

 그 동안 키라리는 TV속의 안즈를 보며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적당한 카페의 냉동 햄버그를 어린아이처럼 맛있게 먹는 지금의 안즈에게선, 그런 호화로운 성의 공주님의 모습도, 아름다운 요정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키라리가 가볍게 생각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안즈는 2년동안이나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었지.

 결국 키라리가 어떻게 생각했든 간에,

 안즈는 그냥 안즈였다.

 식사가 끝나자 키라리가 먼저 일어섰다. 아직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지금은 일단 헤어지고 싶어 말을 꺼냈다.

 “안즈쨩, 그게……오늘은 이제 그만─”

 “─키라리, 키라리, 오늘 한가해? 오랜만에 만났는데 어디 놀러 가자구.”

 안즈가 또 말을 끊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경직되어있다. 키라리는 하는 수 없이 안즈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 그래? 어디 가고 싶니?”

 “영화라던가 어때? 요전번에 나온 신작을 공연 준비로 바빠서 못 봤거든.”

 키라리는 고개를 끄떡였고 가게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와 영화관이 있는 시내를 향해 걸었다. 짙은 남색의 하늘이 꽤 어둑어둑해졌기에 가로등이 켜지고 기온도 쌀쌀해졌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는 차들로 가득해 시끄러웠다.

 그 와중에 안즈는 키라리의 앞에 서서 약간의 거리를 두며 걷고 있었다.

 아까부터 무언가 이상했다.

 키라리의 말을 계속 가로막고 그러면서도 묘하게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쳤지. 동시에 키라리가 안즈에게 그랬던 것처럼, 키라리를 재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키라리가 안즈를 두려워했던 것처럼.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월요일의 한산한 영화관에선 무리 없이 표를 바로 구해 상영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신작이라고는 해도 상영기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기에 관의 내부는 몇 명의 커플이나 가족들을 제외하면 텅 비어있었다. 몇 분 후 지루한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자 키라리는 옆에 앉은 안즈를 쳐다봤다.

 그냥 자고 있었다.

 심술이 났다. 자기가 먼저 오자고 해놓구선.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자면 요즘 안즈의 방송 출연분량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날을 잡고 나오는 것도 상당히 무리가 있었겠지. 당장 어제만 해도 큰 라이브가 있었으니까 그 동안의 준비과정을 생각한다면 정말 피로가 쌓여있었을지도 모른다.

 키라리는 그렇게 안즈의 자는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영화가 끝나면서 안즈를 깨워 상영관을 나섰다. 잠시 후 자판기에서 주스 두 캔을 뽑아 벤치에 앉아있던 안즈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영화 재밌었지?”

 “시작하자마자 끝날 때까지 자놓구선.”

 “에, 에에? 안즈 그랬었나?”

 안즈가 옆으로 눈을 돌린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둥 은근슬쩍 넘어갔다.

 “이제 어디 갈까? 아직 시간 그렇게 많이 안 지났지?”

 안즈가 매표소 위쪽의 전자 시계를 쳐다본다. 저녁 8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직감.

 자의식 과잉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키라리에겐 왠지 모를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움직이기 싫어하던 아이가, 있을지 없을지 확실치도 않으면서 키라리가 있는 곳을 알아내 혼자서 찾아왔다. 그리고 어제까지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키라리와 함께 이곳 저곳을 다니려고 한다. 마치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아끼려는 듯이.

 키라리는 안즈의 이름을 불렀다.

 안즈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렀던 그때처럼.

 “안즈쨩─”

 “─게임센터는 어때? 한동안 뽑기 실력이 녹슬긴 했어도 갖고 싶은 녀석이 있어서 말이야.”

 “안즈쨩─”

 “─아니면 근처에 쇼핑몰이라도 갈까? 이번에 신작 게임이 나왔는데 말이야. 옷도 좀 사야겠고.”

 

 “안즈쨩!!”

 

 안즈가 움찔했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키라리는 다시 목소리를 낮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집에 가서 쉴까?”

 

 그 한마디에, 안즈의 얼굴에선 더 이상 그 어색한 활기도, 경직된 미소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키라리의 앞엔 성의 공주님도 국민요정도 아닌, 늘 그래왔듯 무심하고 만사가 귀찮은 듯한 표정의, 평소대로의 안즈가 앉아있었지.

 “응”

 안즈가 짧게 대답했다. 역시 무리하고 있었구나.

 

 ‘이제 그만 왔으면 좋겠어.’

 

 키라리가 안즈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 그 이후 2년이나 걸려 겨우 다시 만났다. 안즈는 그렇게 또다시 거절 당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 그래서 키라리의 말을 계속해서 자르면서, TV에서처럼 착하고 활기찬 아이를 연기했던 것이 아닐까.

 키라리가 안즈를 마주하길 두려워했듯이.

 

 똑같구나.

 

 무책임한 생각이었지만 덕분에 조금은 안심이 들었다.

 키라리와 안즈는 영화관에서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비가 걱정됐지만 전철을 타는 게 귀찮아 본인이 택시비를 내겠다고 하니 별수없이 안즈를 따라 초록색 택시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익숙한 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도 그 멘션에서 사니?”

 “응. 소속사랑 가깝기도 하고 이사하기도 귀찮구.”

 안즈의 말에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주황빛 가로등들 사이에서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은 신데렐라들의 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즈가 말한 소속사, 346프로의 건물이었다. 이 부근을 지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걸.

 아직도 변함없이 키라리를 기다려주고 있을까.

 자신을 재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도망만을 선택한 나약하고 한심한 키라리를, 이렇게 찾아온 안즈처럼. 그 아이들도 기다려주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잿빛으로 시들어가던 키라리의 마음이 단비를 맞은 듯,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안즈, 다 왔어.”

 잠시 후 택시는 눈에 익은 어떤 고층 맨션의 입구 앞에 섰다. 키라리가 차창에 기대어 자고 있던 안즈를 흔들어 깨우자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했다.

 “흐아아아……벌써 도착 한 거야?”

 “응”

 안즈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만엔짜리 한 장을 꺼내 앞자리의 택시기사에게 건냈다. 통도 크구나. 안즈의 최근 인기를 생각하자면 그렇게 큰 부담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의 코너를 돌자 도심의 풍경이 펼쳐졌다. 칠흑 같은 밤하늘의 별을 전부 따놓은 듯 반짝거리는 그 야경을 보며 조금 걷자 복도의 끝 쪽에서 익숙한 번호의 현관문이 보였다. 그 후 앞서간 안즈가 번호를 입력해 현관문을 열었고 키라리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 집에 들어섰다.

 “실례합니다아......아아……”

 예상대로라고 할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들과 시들다 못해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진 꽃다발들. 바닥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뒹구는 방송국의 예능 신인상. 그리고 얼마나 되었는진 몰라도 얇은 비닐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방치된 게임들과, 쇼핑백에 그대로 들어가있는 옷들, 바닥에 널브러진 수많은 옷가지들과 잡동사니들이 키라리와 안즈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거실에 앉아있어. 차라도 끓여올 테니까.”

 “으, 응.”

 안즈가 태연히 그 잡동사니를 사뿐사뿐 밟으며 주방으로 떠나자, 키라리는 옷이나 물건을 밟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동해 동그랗게 물건이 치워져 있는 거실의 중앙 바닥에 앉았다. 아무래도 안즈가 늘 앉아있던 곳이었나 보다.

 무릎을 끌어 앉고 그런대로 편해진 키라리는 거실 주변을 돌아보았다. TV옆엔 죽어서 말라비틀어진 초롱꽃 화분. 그자리 그대로 꽂힌 채 먼지 속에 파묻힌 책들. 심지어 빨래 건조대에 널려 색이 바랠 대로 바래진 옷들마저 2년전 키라리가 마지막으로 안즈의 방을 청소해줬을 때의 상태 그대로였다.

 정말로 바뀐 게 하나도 없었구나.

 바보 같은 키라리.

 겁먹지 말고, 도망치지 않고, 자신과 그대로 마주했었더라면 이렇게 멀리 돌아올 필요도 없었을 텐데. 병이 있을까 두려워해 병원에도 가지 않고 더 큰 병을 키워 힘겨운 수술을 받아야 했던 것처럼, 이렇게 마음을 삭혀가며 무의미한 자책을 반복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가슴이 사무칠정도의 후회와 서러움이 둑이 터지듯 밀려들어온다.

 동시에 작고 따뜻한 것이 등에 닿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안즈가 키라리의 등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키라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고 있던 것들을 깨달았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더 이상 가짜 미소 같은 건 짓고 싶지 않아.

 무리해서 귀여운 척 하고 싶지 않아.

 바보취급 당하고 싶지 않아.

 이용당하고 싶지도 않아.

 그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고 싶어

 안즈와, 모두와

 함께

 

 “울지마.”

 언제나처럼 키라리를 꿰뚫어보는 안즈였다. 하지만 키라리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땠다.

 “키라리 안 울었다구.”

 “그래?”

 안즈가 말했다.

 “우리들 엉망진창이네.”

 키라리는 그 말에 안즈와 함께 그대로 털썩, 옆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안즈.”

 “응……?”

 

 예전 같았으면 쑥스러움에 그저 웃어넘기고 말았을 테지.

 하지만 그저 바보 같은 미소만으론 전해지지 않는 것도 있으니까.

 키라리는 그런 한마디를 용기 내어 말했다.

 

 “고마워.”

 

 반응이 없었다.

 잠이 든 건지 쑥스러운 건지.

 

 

 

 

 

네가 없는 세상에서 <키라리편> ─ Epilogue ─

 

 

 

 

 

 “어디로 가는 거야?”

 “가 보면 알 거야. 예전에 키라리도 촬영한적 있었던 장소니까.”

 한적한 도로의 정면을 쳐다보며 운전하던 미카가 말했다.

 키라리가 타고 있던 그 작고 빨간 경차는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한산하고 시원한 숲길이 이어졌다. 10월의 날씨답게 맑고 새파란 하늘의 빛이 숲의 단풍잎들 사이사이로 반짝거렸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나들이의 경위는 얼마 전 면허를 딴 미카가 원인이었다. 차를 구하자마자 의욕이 충만해진 미카는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자며 키라리를 불렀었지. 미안하게도 그리 안심되는 안전운전은 아니었지만 뭐어……운전이야 하면 할수록 느는 거니까.

 어느새 차는 어떤 산길 속의 주차장에 도착했다. 미카가 핸들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몇 분을 낑낑대더니 겨우 주차했지만, 훌륭할 정도로 어긋나버렸다. 키라리는 무안해하는 미카가 다시 주차하겠다는 걸 겨우 말리고는 그대로 산길로 향했다. 어차피 주변에 주차된 차라고는 검고 커다란 벤 하나뿐이었으니까.

 키라리와 미카는 삐딱하게 대충 주차된 차를 뒤로하고 붉거나 노란 낙엽으로 뒤덮인 산책로를 푸석푸석 걸었다. 그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키라리는 알 수 없는 익숙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미카의 말대로 키라리는 이곳에 와 본적이 있었나 보다.

 그렇게 10분정도를 걸었을까. 키라리는 그 언덕의 마지막 계단을 딛고 서, 포근한 산들바람을 맞으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기억이 난다.

 온갖 야생화가 만개한 초원.

 이곳에서 키라리와 안즈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화보를 찍은 적이 있었지.

 봄이었던 그 때와는 다르게 가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나 사뭇 다른 분위기의 색을 내고 있었지만 그 들판의 형태와 모습만큼은 똑똑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키라리는 그런 들판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그 뿐만이 아니었지. 들판의 중앙에서 어떤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으니까.

 키라리는 고개를 돌려 미카를 쳐다보았다.

 “미안! 안즈쨩이 부탁했었거든!”

 그렇게 악의 없는 미소로 손뼉을 치며 사과하는 미카였다.

 키라리는 망설임 속에서도 미카와 함께 그 아이들을 향해 걸어갔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약속을 저버린 키라리를 경멸할거야.

 어쩌면 기억조차 못하고 있을지도 몰라.

 

 프로듀서에게 공을 던지던 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그런 무의미한 불안과 의심이 한 순간에 씻겨져 날아가버렸다.

 

 “키라리……?”

 

 마치 키라리가 안즈를 만났을 때처럼, 갑작스러운 그 만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리카.

 하지만 그 맑은 눈망울만큼은 초롱초롱 글썽이고 있었다.

 리카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프로듀서와 안즈, 미리아가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을 미리 짜기라도 했는지. 미카가 키라리의 팔을 툭툭 치며 고개를 끄떡였다.

 키라리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다녀왔어. 리카.”

 

 리카가 말했다.

 

 “어서와! 키라리!”

 

 

 

END

 

 

 

 

 

 

<작가 후기>

 억만년만의 3개월만의 연재네요. 혹시 기다린 분들이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ㅇ<-<

 역시 키라리의 1인칭이라는 무모한 도전은 생각 이상으로 힘들었네요. 물론 배경이 배경인 만큼 평소의 그런 합삐합삐한 상태의 키라리는 아니었기에 진지하게 풀어나갈 수는 있었지만, 평소에 즐겨 쓰던 표현들을 상당 수 제한해야 해서 상당히 시간이 오래걸렸습니다. 그럼에도 중간중간 이게 키라리 다운가? 싶을 정도로 과격한 재해석이 있었던 것 같아 꽤 걱정이 되긴 하네요. 마음 편하게 자기식대로 쓴 <안즈 편>에 비하면 여러모로 자신의 표현력에 많은 부족함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편 이상의 퀄리티를 기대하신 분들에겐 죄송할 따름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유미가 부른 커버곡의 가사는 올릴 스페이스가 애매해서 올리지 못했습니다. 불친절한 것 같아 죄송하지만 검색포털에 여기서밖에 피지 않는 꽃 등으로 검색하시면 가사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몇 주간 이 노래에 푹 빠져서 미카 대신 유미를 등장시킬까도 고민했는데, 역시 전개상 미카쪽이 자연스러웠네요.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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