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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 세상에서 <키라리편>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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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3, 2016 02:16에 작성됨.

※ 이 이야기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안즈편> 에서 이어집니다.

 

 ​

코부쿠로 - 여기서밖에 피지 않는 꽃 (오르골ver)

※ 어디까지나 작가가 글을 쓰면서 들은 작업용BGM입니다. On / Off 는 자유롭게 선택해주세요..

 

 

 

 

 

 

 

 

 

 

그 따뜻했던 장소는 지금도 변함없이 저를 기다려주고 있나요?”

코부쿠로 여기서밖에 피지 않는 꽃에서

 

 

 

 

 벨소리 『안즈의 노래』

 깔끔하게 정리된 작은 방. 그 창가에 놓여진 짙은 갈색의 조그마한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가 커튼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다. 키라리는 방 전체로 퍼져오는 로즈마리의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그대로 눈을 감고 누운 채 그 노래를 청취했다. 사실 잠이라면 아까 전에 깼었지, 그저 그 아이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뿐이니까.

 1분정도가 지났을까, 알람이 끝나자 키라리는 침대 옆의 탁자에 놓여진 핸드폰을 잡아들어 LINE을 확인했다. 키라리가 잘못된 쪽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음을 깨닫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가슴이 무언가에 찔린 듯이 저려온 키라리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었다. 그러고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끌어 안고서 작게 속삭이며, 그렇게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통학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뒤, 천으로 된 보라색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현관문을 열자, 누군가가 등을 두드렸다. 키라리는 약봉지와 물컵을 들고 있던 엄마를 내려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얘, 약 먹는 거 잊었잖니?”

 “에헤헤, 깜빡 했어 엄마.”

 의사 선생님 말로는 성장 호르몬 억제제……라고 했었던가. 키라리는 그렇게 몇 알이나 되는 그 고형의 알약들을 입 속에 털어 넣고 물로 삼켰다. 그리고 “잘 다녀와 차 조심하고” 라는 엄마의 목소리와 함께 현관을 나섰다.

 더위가 한 풀 꺾인 9월 말의 새파란 가을하늘. 옹기종기 모여있는 전원주택들의 담벼락을 따라 활짝 핀 쑥부쟁이 꽃들이 포근한 가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해마다 보아온, 그런 어디에나 있을법한 동네의 풍경이었지만 왠지 모를 적적함 마저 느껴진다.

 잠시 후 시끄러운 경적소리와 함께 정차된 자동차들로 가득 찬 대로가 나타났다. 메스꺼운 매연냄새를 참고 이대로 가로변을 따라 주욱 걷다 보면 대학교의 통학버스가 운행하는 역사가 보일 것이다.

 “그럼 이 노란 건 뭐꼬?”

 “췌장이잖아. 소화효소뿐만 아니라 뇌하수체의 성장호르몬의 분비를 촉진시킨다던가 글루카곤과 인슐린으로 혈당을 조절한다던가“

 발걸음이 멎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전자상가의 TV속에서 그 아이가 나와, MC가 지시봉으로 가리킨 인체모형의 한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남바 에미의 아침 버라이어티 방송이었던가, 아무래도 저번 주 예고편에 나온 의문의 천재 게스트는 그 아이, 안즈였나보다.

 “그럼 이건 뭐꼬”

 그러자 에미가 지시봉으로 인체모형의 다리 사이를 가리킨다. 안즈가 에미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시선을 피하고는 볼멘소리로 말한다.

 “……헤에, 안즈는 아직 그런 거 잘 모르겠는데.”

 “아까까지 달달 외던 아가 이제 와서 뭐라카놐ㅋㅋㅋㅋ!”

 “아야”

 안즈가 에미에게 쥘부채로 머리를 얻어맞자 방청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키라리도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여자애한테 그런 거 묻지 말라구.

 “아차, 이러면 안 되는데!”

 멍하니 보고 있다가 하마터면 빠져들 뻔 했다. 도착이 5분이라도 늦으면 대기 줄이 너무 길어져서 지각해버리니까 위험했다.

 역사는 통근이나 통학을 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생각보다 늦지 않아 운 좋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키라리는 다음 버스를 기다려서라도 반드시 앉아서 가는 습관이 있었다. 19살 여자의 키가 190cm니 아무래도 사람들 사이에 서있으면 너무 눈에 띄니까 어쩔 수가 없는걸.

 도내의 평범한 동네,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난 키라리의 키가 그토록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입학 이후의 일이었다. 물론 어렸던 키라리는 당시 TV에 나왔던 키가 크고 날씬한 아이돌 언니들처럼, 그런 멋진 여성이 될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지.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키라리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다양한 아이들이 어울려 지내는 학교인 만큼, 질 나쁜 아이들의 놀림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시선.

 불편함이 가득 담긴 사람들의 그런 올려다보는 시선이, 키라리는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문득 키라리는 어떤 생물학 다큐멘터리에서의 설명을 기억해냈다. 자기보다 큰 것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라고. 결국 사람들이 키라리를 두려워했던 것은 키가 그들보다 컸기 때문에 그랬던 걸까, 키라리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어릴 때부터 좋아해온 어떤 아이돌의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키가 크더라도 귀엽고 깜찍하게 보이면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은 누그러지겠지, 그렇게 생각한 키라리의 말투와 행동은 점점 그 TV속의 아이돌과 닮아갔다. 물론 그것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어서 사람들은 키라리를 바보나 어린아이 취급을 하면서 좀 더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후회는 없었다. 두려움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놀림감이 되는 게 더 안심되니까.

 하지만 어차피 만들어진 가면, 머지않아 키라리는 깨달았다. 본심을 숨겨야만 했기에 그 속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생길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키라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속의 미소를 소모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작고 하얀 종이조각을 건네 받기 전까지는

 남들이 보기엔 하찮은 종이조각일 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마법사의 지팡이였을지도 모른다. 그가 건넨 그 명함 한 장 덕분에 키라리는 가면이 아닌 진짜 아이돌이 되어버렸고, 키라리가 머무를 수 있는 그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장소를 알게 되었으니까. 키라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주는 팬들과 동료 아이돌 같이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아이들과 만날 수 있었으니까─

 

 ─순간 도심지 빌딩의 커다란 전광판에 비친 데코레이션과 캔디아일랜드의 콜라보 콘서트 홍보 영상이 지나간다. 키라리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차창에 손바닥을 대었다가,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역시 이제 와서 돌아갈 장소 같은 거, 허락되지 않겠지. 물론 지나간 추억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키라리는 시간이 지나 마법이 풀려버린 평범한 여자아이일 뿐이니까.

 

 

 

 

네가 없는 세상에서 <키라리편> ─ Prologue ─

 

 

 

 

 가을학기의 첫 오전 강의가 끝난 캠퍼스의 광장은 점심을 위해 이리저리 이동하는 학생들로 북적거렸다. 식당에 들어선 키라리는 언제나처럼 자동판매기에서 티켓을 끊고 식판을 받은 뒤 잔디로 뒤덮인 언덕의 풍경이 보이는 길쭉한 테이블에 혼자 앉아 식사를 했다. 오늘의 메뉴는 미트 토마토 스파게티, 그럭저럭 싼 가격에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학교식당의 인기메뉴였다.

 입학후의 얼마간과는 다르게 이젠 이렇게 혼자 식사를 하고 있어도 아무도 키라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10대와는 다르게 성인이 되면 적응력이 뛰어나기 때문일까. 그래도 가끔은 TV에서 봤다며 병은 나았는지 등의 안부를 물어오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키라리는 늘 그래왔듯이 그저 바보 같은 미소를 보여주며 해맑게 응답해줄 뿐이었다. 물론 키라리를 기억해준 사람들에겐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의 키라리는 그저 조용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니까.

 식사를 마친 후 키라리는 곧바로 일어서 시끄러운 식당을 뒤로하고 오후의 수업이 진행되는 본관의 2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의 문을 연 키라리는 그곳에서 홀로 않아 창 밖을 바라보았다. 끼리끼리 벤치에 앉아 즐겁게 도시락을 먹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키라리도 미리아랑 리카랑 회사의 옥상 정원에서 자주 도시락을 가져와 먹었었지.

 잘 지내고 있을까.

 “으꺄아아!!”

 “요~★ 키라리 안녕! 그 동안 잘 지냈어?”

 키라리는 왼쪽 뺨에서 느껴진 갑작스런 한기에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멍하니 창 밖을 보면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느 샌가 키라리에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아 얼음이 담긴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건네고 있었다.

 TV나 스테이지에서와는 다르게 묶지 앉고 길게 늘어뜨린 핑크 빛 머리. 키라리의 옛 동료이자 현역 아이돌인 죠가사키 미카였다. 다소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을 갈색 빵모자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너머에서 키라리를 향한 부드러운 미소가 느껴졌다. 키라리는 양손으로 그 커피를 받아 들고 말했다.

 “미카쨩! 오랜만이네. 커피 잘 마실게.”

 “응, 옆에 앉아도 괜찮지?”

 “물론이야.”

 키라리가 이 학교에서 미카를 처음 본 것은 체육관에서 열린 신입생 환영파티 때였다. 사람들의 눈이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파인애플 주스를 마시고 있던 키라리는, 갑작스럽게 몰리는 인파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 주목의 주인공이 누군지 깨달은 순간 키라리는 스스로의 호기심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미카와 키라리의 눈이 마주쳐 버렸으니까.

 물론 미카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미카는 리카의 언니이기도 하고, 키라리는 미카 본인과도 자주 놀러 다니기도 했으니까 오히려 솔직한 심정으론 굉장히 기뻤지. 하지만 리카에게 키라리가 있는 장소가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사정사정 해서 미카와 키라리가 같은 학교라는 것을 비밀로 하기로 했었다.

 그렇게 미카를 학교에서 자주 보게 되었을 땐 이런 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사실 키라리도 미카도 같은 패션 관련 학과 진학을 생각하고 있었으니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요즘 같은 시대는 아이돌이라고 해도 취학에 소홀히 하지 않는 편이 장려되기도 하고 미카도 키라리처럼 아이돌 활동으로 바빠서 그렇게 경쟁률이 높은 대학에 진학하긴 힘들었을 테기도 하고.

 “요즘 좀 어때?”

 “키라리는 괜찮아~ 약도 늘 챙겨먹고 건강★건강 하다규?”

 양손을 올려 불끈 쥐고 활기찬 척 되도록 밝게 말했다. 하지만 미카는 고개를 흔들며 재차 물어왔다.

 “정말?”

 “아……응. 괜찮아.”

 힘이 빠진 키라리는 손을 내려놓았다. 역시 미카의 눈에는 키라리의 얄팍한 가면 너머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걸까. 미카는 한숨을 쉬면서 빈 플라스틱 컵의 얼음을 빨대로 빙글빙글 돌려가며 말했다.

 “이해해. 사실 나도 가끔은 관두고 싶다거나 쉬고 싶다거나 생각할 정도로 힘든 적도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몸까지 크게 아프고 나면 더 그렇겠지?”

 키라리가 양손으로 잡고 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컵이 살짝 구겨졌다. 미카의 위로는 정말 고마웠지만, 사실 키라리가 복귀하지 않고 있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말이야, 가끔은 기분전환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겠어?”

 “에……?”

 미카가 키라리에 손등 위에 작은 종이조각을 건냈다. 리카, 미리아, 치에리, 카나코, 그리고……안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아침 대형 전광판에서 본 데코레이션과 캔디아일랜드의 콜라보 콘서트 티켓이었다.

 “키라리……한테 주는 거야?”

 “물론이지. 대신 꼭, 아니, 무조건 와야 해? 내가 티켓 두 장으로 달라고 했다가 남친 생긴 거 아니냐고 리카가 끝까지 캐묻는 거 따돌린다고 꽤 고생했다구”

 키라리는 마지못해 그 티켓을 받아 들고 미카를 쳐다보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미카의 얼굴에서, 무심결에 리카가 겹쳐 보였다.

 아니, 자매니까 당연한 걸까.

 

 

***

 

 

 콘서트의 시작은 일요일의 오후 5시였다. 아직 4시도 안됐지만 붐비는 공연장 주변의 행렬은 데코레이션과 캔디아일랜드의 인기를 가늠하게 해줬다.

 “혹시 키라리? 아하하하하! 그렇게까지 안 차려 입어도 된다니까!”

 역 앞에서 기다리던 미카가 키라리를 보곤 배를 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키라리가 생각해봐도 과할 정도의 변장이긴 했지. 아빠한테 빌린 커다란 선글라스에 흰색 감기마스크. 거기다 때이른 검은색의 가을 스카프까지 완전무장 하고 왔으니까.

 “심지어 더 수상해 보이잖아 벌써부터 주목 받고 있는걸? 킥킥킥”

 “뇨와왓!?”

 과연 주변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미카까지 평소의 외출용 분장이었으니 영락없는 ‘수상한 용의자 2인조’. 하지만 어쩔 수가 없는걸,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정이 안된다구……

 “뭐 일단, 가볼까?”

 “응.”

 미카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키라리의 손을 잡고 이끌어주었다. 그러고 보니 2년 만일까, 이렇게 누군가에게 이끌려본 적이. 그땐 리카와 미리아에게 이끌려 시내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었고 프로듀서를 잃어버린 적도 있었지.

 역사에서 나와 5분쯤을 걸으니 커다란 콘서트 홀과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기다란 대기 줄이 보였다. 미카는 새파란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기지개를 쭉 펴더니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이네, 이렇게 줄 서서 들어가는 것도.”

 “미안해 미카쨩, 괜히 키라리 때문에 기다리게 해서.”

 사실 미카는 리카의 가족이면서 같은 회사의 동료 아이돌이었으니 기다리지 않고도 관계자입장이 가능했을 테였다. 그래서 키라리는 키라리 때문에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할 미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미카의 개의치 않는듯한 그 즐거운 얼굴을 보고 있다 보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괜찮아 키라리. 그냥 옛날생각이 조금 나는 거 같아서”

 “옛날이라면 미카쨩이 아이돌이 되기 전에?”

 “응. 어릴 적에 리카랑 같이 자주 보러 다녔었거든. ‘아이돌’ 말이야.”

 미카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마치 기대와 동경에 두근두근 거리며 기나긴 대기 줄을 참아내는 어린 미카가 지금이라도 키라리의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이 생생했다.

 “리카를 데리고 처음 간 공연이었나, 그땐 리카가 너무 어렸었는지 기다리다 지쳐서 아이돌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불평만 했었거든”

 “리카쨩이? 상상이 잘 안 되는 걸?”

 언니 따라서 아이돌이 되겠다고 단신으로 프로듀서에게 쳐들어와 프로젝트에 발탁이 되었다는 리카를 생각하면 정말 상상이 되지 않는 헤프닝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다 지친 애가 정작 콘서트를 보고나선 태도가 180도 변해서는, ‘리카도 아이돌 할래!!’라고 방방 뛰면서 몇 일을 엄마한테 졸라댔었지 뭐야.”

 “정말? 리카쨩 답구나.”

 “그렇다니까? 요즘도 하나도 안 변했다구. 아, 그래서 말인데 요전번엔─”

 그러면서 미카는 리카의 비밀을 하나 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리카에겐 안됐지만 키라리도 미카의 누설에 솔깃하게 귀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나마 그리운 추억을 회상할 수 있다면 키라리는 그걸로라도 만족 할 수 있었으니까.

 ”아 그래도 한가지 변한 건 있더라.”

 “그게 뭐니?”

 한참을 웃고 떠들던 미카는 어느새 다다른 대기 줄의 끝에서, 스텝에게 표 2장을 건네주고 키라리를 되돌아봤다. 입가의 미소는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듯한 모습이었다.

 “많이 어른스러워졌더라고. 널 만나고부터.”

 “…….”

 키라리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물론 미카도 그런 키라리의 마음을 아는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홀 내부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공연장의 내부는 부도칸보단 작았지만 어엿한 대형 콘서트 홀이었다. 키라리도 346프로의 무도회 당시 무대에 서본 적이 있어 기억에는 있었지만, 이렇게 관객석에서 앉아서 바라보는 스테이지는 생각보다 낯선 풍경이었다.

 공연시간이 거의 다다르자, 홀 내부는 사람들로 만석이 되었다. 신데렐라 프로젝트 전체가 아닌 두 유닛의 콜라보 공연만으로도 이렇게 사람들이 홀을 꽉 채우는 것을 보니 키라리는 기쁜 마음과 왠지 모를 쓸쓸함이 복잡하게 교차했다. 안 그래도 얼마 전 무도회는 부도칸에서 열렸었지.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고 다섯 명의 아이돌이 무대에 등장했다. 순서대로 리카, 미리아, 안즈, 치에리, 카나코, 모두들 건강해 보여 다행이었다.

 공연은 콜라보답게 기존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바리에이션으로 이루어졌다. 리카가 『Happyx2 Days』에서 게으름 부리는 역할을 맡는다던가, 안즈가 『LET’S GO HAPPY!!』에서 센터를 맡아 보코레이션(凹レーション)을 만든다던가, 팬들에게서도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물론 안즈가 주도하는 다섯 명의 MC도 키라리의 배꼽이 빠질 정도로 재미있었지. 결국 키라리는 참지 못하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고,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는 미카와 함께 열심히 응원봉을 휘두르며 열광했다.

 그런 즐거움도 마지막으로, 단체곡인『M@GIC』이 끝나고 조명이 꺼졌다. 키라리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미카에게 말했다.

 “휘유우~ 키라리 저엉~말 재밌었유.”

 어느새 키라리의 텐션이 2년전의 그 시절로 돌아가버렸다. 한동안은 귀여운 말투를 의도적으로 그만두고 있었지만 역시 습관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쉬움에 다리에 좀처럼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키라리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미카가 고개를 저으며 키라리의 소매를 잡았다.

 “이 정도로 끝나면 섭섭하지, 아직 더 남아있다구?”

 “으꺄~! 또 신곡이야? 정말 기대 된다규!”

 이윽고 두 팬클럽의 자리에서 앵콜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외침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 홀을 가득 메우고서 어느새 키라리도 앵콜을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라이트가 켜지며 시작된 음악의 인트로.

 가사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키라리의 몸이 얼어붙었다.

 동시에, 키라리의 눈이 안즈와 마주쳤다.

 

 언젠가 안즈에게 이런 말을 한적이 있었지.

 

 “안즈는 꿈이 뭐니?”

 

 안즈가 거기에 즉답했다.

 “물론 인세생활이지.”

 각자의 꿈과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던 아이들. 그 활기찬 무대의 어두운 뒤편에서, 앞 선 라이브로 지친 몸을 추스리며 키라리의 무릎을 베개 삼고 누워있었던 안즈는, 먼저 질문을 던진 키라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는

 피식, 그렇게 웃으며 되물어 왔다.

 “그럼 키라리는?”

 “키라리~? 키라리는 음~”

 키라리는 활짝 웃었다.

 “꿈이라면 이미 이뤘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키라리는 안즈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키라리와 안즈의 땀이 섞여 축축했었지만 무척이나 따뜻했지.

 “그렇게 말해도 다음은 절대로 없으니까?”

 “체에~엣 키라리 아직 아무 말도 안했다규?”

 물론 키라리도 안즈의 고충은 알고 있었다. 안무도 정말 어려웠고 준비 기간도 짧았지, 139cm와 186cm라는 키 차이로 키라리가 한걸음 한걸음 디딜 때마다 안즈는 펄쩍펄쩍 뛰어야 할 정도였는걸.

 하지만, 그럼에도 안즈는 키라리에게 말해줬다.

 “응, 또 하자”

 그러자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런 표정을 지으며 안즈가 허둥지둥 둘러댔다.

 “그, 그러니까 팬들의 반응도 좋았으니 이 기회에 인세를 왕창 뽑아버려서 어서 아이돌 졸업하고 놀고 먹자는 말이니까!”

 하지만, 키라리는 무심결에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안즈쨩. 약속……해줄래?”

 그렇게, 마지못해하면서도 안즈는 키라리에게 손가락을 걸어주었다.

 “키라리의 꿈 이루자마자 또 생겨버렸네─”

 

 “─키라리, 키라리! 괜찮아?”

 키라리의 어깨가 미카의 손에 흔들린다. 안즈는 안무를 추면서도 키라리를 향해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키라리는 떨려오는 손으로 입을 가릴 수 밖에 없었다.

 “약속……지키지 못했어……”

 “에…….?”

 “미안해 미카쨩. 키라리 이만 가볼께.”

 “잠깐 키라리!”

 키라리는 소매로 얼굴을 닦고는 그대로 내달려 홀을 빠져나갔다. 역시 오지 않을걸 그랬다. 이런 즐거운 장소에 있을 자격 같은 거, 키라리에겐 이제 없으니까.

 키라리같은 나쁜 아이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

 

 

 “네, 네에엣!? 키라리가 무대 뒤로 가라구요?”

 “아니 꼭 그런 의미로 말한 건 아닌데……센터인건 지금 그대로가 좋고, 대신 조금만 위치를 옮기자는 거지.”

 언젠가 데코레이션의 미팅 전에 키라리가 디렉터에게 따로 불려간 적이 있었다. 회의실에 혼자 앉아있었던 그는 잔뜩 미안한 표정으로 키라리에게 유닛 포지션에 대한 수정을 주문해왔다. 미심쩍은 부탁이었지만 프로듀서가 총 마케팅과 기획, 매니지먼트를 담당하는 역할이라면 디렉터는 공연의 총 감독자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클라이언트의 주문대로 안무나 연기를 해내는 것은 프로로써 마땅히 해내야 할 일이었고, 결국 키라리는 군말 없이 그의 요청에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할게요. 혹시 무슨 이유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 키라리양은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무대의 비쥬얼 밸런스를 위한 거니까.”

 “네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그 디렉터는 식은땀을 뻘뻘 흘려가며 키라리의 시선으로부터 열심히 회피하고 있었다. 뭐어 옛날부터 그래왔으니까 이런 식으로 키라리를 바보 취급하는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디렉터의 행동이 딱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키가 방해되니까 뒤로 가라고 어떻게 직설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고개를 끄떡이는, ‘이제 나가도 된다’는 그의 사인이 떨어지자 공손하게 인사하고 회의실을 나섰다. 키라리는 머리가 아파 가방에서 두통약을 꺼냈다.

 “또 그 소리 들은 거야?”

 키라리는 안즈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약을 가방에 도로 집어넣었다. 복도 의자에 누워있는 안즈는 분홍색 토끼인형을 안고 무지개 롤리팝을 핥아먹고 있었다.

 “으응. 딱히 아무것도 아니었어.”

 키라리는 고개를 저으며 활짝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안즈는 키라리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먹고 살기 참 힘드네. 누구는 크다고, 누구는 또 작다고 옮기라 하니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안즈 또 레슨 땡땡이 치고 온 거니?“

 “으겍.”

 정곡이었나 보다.

 아니 정곡을 찔린 건 키라리도 마찬가지였을까.

 신기하게도 안즈는 언제나 키라리를 정면으로 꿰뚫어보고 있었다. 키가 크기에 겪는 불편함을 자신이 키가 작기에 겪는 불편함에 빗대어 키라리를 이해해왔던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고만 보기엔 안즈는 키라리의 내면에서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있었다.

 키라리의 만들어진 미소 속의 진짜 미소를, 안즈는 알아채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못쓴다규~ 열심히 레슨 해야지~”

 “에에?? 좀 봐줘~ 오늘은 아침부터 버라이어티로 중노동이었단 말이야.”

 키라리는 안즈를 그대로 안아 올려 레슨실로 향했다.

 그러고 보면 왜 그랬을까? 농땡이를 부리건, 동료들과 떨어져서 혼자서 자고 있건, 아이돌 일이 힘들어서 그만두건, 그건 안즈의 책임이었고 안즈의 마음이었다. 오히려 키가 작고 귀엽다며 키라리의 멋대로 안아 들고, 함께 아이돌로서 있기 위해 억지로 레슨을 시키고……결국 안즈를 마음대로 하고 싶은 키라리의 나쁜 욕심일 뿐이 아니었던 걸까.

 타인의 비위를 맞추고, 끝없이 자신을 숨기고, 바보를 자처하고. 그런 삶 속에서 처음으로 이해 받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겼어. 가능한 한 함께 하고 싶은 마음 정도는, 그 정도의 응석은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안즈도…….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좀 진정하세요.”

 안즈를 레슨실에 내려놓고 돌아가던 길. 아까 전의 그 회의실에서 프로듀서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라리는 신경이 쓰여 살짝 열린 문 사이를 엿보았다. 프로듀서의 뒷모습, 그리고 그의 앞에는 아까 전의 그 디렉터가 앉아있었다. 아무래도 회의중이었나 보다.

 “모로보시씨를 병풍으로 세우는 것도 모자라서 MV의 단독 등장 분량을 편집한다니요! 그녀는 엄연히 유닛의 리더가 아닙니까!”

 “그래서 잘 들어보라고 했잖아요. 대신 리카양, 미리아양과의 분량을 늘려 존재감을 끌어올리자는 뜻입니다. 키라리양의 키가 크니까 아무래도 작고 귀여운 두 분의 비쥬얼이 상대적으로 어필 될 테죠.”

 “그건 똑같은 말이 아닙니까!”

 프로듀서가 정색하자, 디렉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거 소리 좀 낮추세요 누가 다 듣겠구만. 그쪽은 업무 능력도 좋으면서 왜 그렇게 업계 흐름을 못 봅니까? 당장에 제 1회 신데렐라 걸 총선만 봐도 리카양과 많은 차이가 나는데 이런 때일수록 좀 더 확실한 쪽을 확 밀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랭킹은 랭킹일 뿐이고 모로보시씨의 랭킹도 결코 낮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유닛은 그런 차이와 조화가 컨셉인 유닛이고 팬을 끌어들이는 충분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장에 실적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봐요. 막 출발해서 잘나가는 아이돌 유닛도 언제 인기가 곤두박질 쳐서 해체될지 모르는 일이에요. 더군다나 까놓고 말해서 키라리양의 인기는 누가 봐도 안즈양의 덤으로……”

 디렉터가 프로듀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선 그의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디렉터의 식은땀을 보면 그의 표정이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갔다.

 덤

 팬들은 당연히 커다란 키라리보다 작고 귀여운 안즈나 리카와 미리아를 더 좋아할게 분명했고, 물론 키라리 자신도 나름 납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굉장히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고 손이 떨려왔다. 키라리는 방금 안즈가 있어 두통약을 먹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의자에 앉아 진통제를 두 알 꺼내먹었다. 약을 먹는 모습을 보이면 안즈에게도 걱정을 끼칠 테니까.

 손의 떨림은 다음날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키라리는 아직 자고있을 안즈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진통제를 먹고 토도키라 학원의 촬영을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날이었지.

 

 

 그렇게 대기실에 앉아 문자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분장을 끝낸 아이리가 먼저 감독에게 불려가고는 토도키라학원의 여성작가가 들어와 키라리를 불러 조용히 말했다.

 “실례합니다만, 키라리씨 최근 키가 몇 센티였죠?”

 “에, 작가님? 그러니까 그……”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악의 없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그 질문을 계속해왔다.

 “최근 키라리씨의 리엑션이 조금 아쉬운 거 거 같다고 감독님이......아, 물론 오해하지 마세요. 키라리씨는 지금도 무척이나 잘 해내고 있는 편이에요.”

 “189cm에요.”

 영혼에도 없는 칭찬. 그녀는 키라리가 마지못해 꺼낸 대답에 퍽 감탄하며 말했다.

 “곧 있으면 190cm도 넘기시겠네요. 좋아요, 이 네타 한번 써먹어 보죠 아마 잘 먹힐 겁니다. 대본 한번 줘보세요. 제가 표시해 드릴께요.”

 “…….네.”

 오전 분의 촬영이 무사히 끝난 휴식시간. 키라리는 수정된 대본을 멍하니 쳐다보며 홀로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뒤에서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사실, 아침에 다 들었었어. 그런 건 그냥 거절하지 그랬어?”

 “안즈쨩……”

 하늘색 유치원 복을 입고 있는 안즈가 의자를 거꾸로 해 남자아이처럼 앉고는 두 팔을 등받이에 받쳐 턱을 괴며 키라리를 말똥이 쳐다보고 있었다.

 “키라리는 괜찮아. 그걸로 방청객들이 즐겁게 웃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

 안즈가 의자에서 일어서더니, 키라리의 손을 쳐다봤다. 키라리는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는지도 몰랐기에 황급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안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키라리의 어깨를 툭툭 치며 뒤돌았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마.”

 키라리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안즈는 이미 그 한마디만 남기고 대기실 밖으로 나간 뒤였다.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모두의 병풍

 안즈의 덤

 잘 먹히는 네타

 이 모든 단어들이 귓속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 키라리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앉은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대기실 문을 향해 손을 뻗은 채로, 마음속으로 안즈의 이름을 외치면서.

 ‘도와달라’고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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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간의 키라리의 스크린샷은 신데애니 1기 10화에서 캡쳐한 이미지입니다. 사실 저 상황에선 버스를 타고있었기 때문에 설정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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