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Stockholm Syndrome - 2

댓글: 4 / 조회: 838 / 추천: 6



본문 - 10-19, 2016 20:20에 작성됨.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검은색의 밴이 치하야의 앞에 서 있었다. 으레 연예인이란 사람들이 타고 다닌다는 그런 밴이었는데 P가 열쇠의 버튼을 꾹 누르면 자동으로 잠금까지 해제되었다.
 
"멋진 차죠? 포르셰만큼은 아니지만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치하야는 또 아무 말도 없이 밴의 문을 당겨서 열려 했다. 계속해서 문손잡이를 쥐고 당겼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치하야는 이어 문손잡이를 뜯어낼 기세로 몸을 심하게 들썩이면서 문을 당겼다. P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쪽 아니에요. 밀어서 여는 겁니다."
 
밀어서 열어 보았다. 문이 스르륵 하고 옆으로 열렸다. 치하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밴으로 올라가서 앉았다.
 
"자리는 편하신가요?"
"......"
"뭐 좋아요. 제가 앉았을 때 편하니까 대개 편하겠죠. 이거 창문도 엄청 진해서 기자분들 플래시가 아무리 밝아도 끄떡없을 겁니다. 편하게 앉아서 쉬세요."
"......"
"쓸데없는 말은 제 쪽에서 하는 기분이네요. 그럼 가면서 오늘 스케쥴 같은 거 간단하게 브리핑할게요."
 
P는 왼쪽 문으로 가서 운전석에 올라탔다. 치하야는 앉자마자 DAP를 켜고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고 하고 있었다. P는 시동 스위치를 누르려다 곧바로 보조석에 팔을 걸치고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아니아니아니, 브리핑한다니까요."
"네?"
"음악 들으시는 것도 좋지만 오늘 무슨 일 하는지 정도는 아셔야죠. 또 펑크 내시려고."
"알겠습니다."
 
치하야는 순순히 이어폰을 들고 있는 두 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긴 속눈썹이 많은 눈꺼풀을 깜빡이고 있었다.
 
"내려놓으셨죠? 그럼 운전하면서 말씀드릴게요. 저희가 쬐금 늦어서요."
 
조금 늦은 정도가 아니라 시속 200킬로미터로 도로를 달려도 출근시간에 못 맞추는 정도였지만 첫날이었으니까. 그렇게 노발대발하던 회사 사람들도 그래도 키사라기 치하야가 출근을 했는데 조금 늦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P는 꽤나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시동 스위치를 눌렀다. 그리고 거치대에 놔둔 휴대전화 화면을 힐끔힐끔 보며 말을 시작했다.
 
"오늘이 정기적으로 출근하기로 한 날이었죠. 키사라기 씨, 혹시 작업해 놓은 거 있나요? 아마 없으실 거 같아요. 없다고 친다면 출근해서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회사 사람들한테 정식으로 사과를 하러 다녀야죠."
"네?"
"계약서 제대로 보셨죠? '앞으로 기획하는 공연에 차질을 일으키지 않을 것.' 약간 소급적용한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예의라는 거죠. 회사가 하는 공연에 차질을 끼쳤으니까 사과한다. 이 정도는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아니면 조금 다르게 이야기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요?"
"이해는 저희가 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치하야 씨가 하셔야, 일이 깨끗해집니다."
"저는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걸 회사 사람들한테 말하려고요?"
 
차는 맨션의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 도로로 통하는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P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고 그 표정은 고스란히 백미러를 통해서 치하야한테 비추어졌다. 신호를 받아 큰길로 나설 때까지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P는 다시 평소의 옅은 미소로 돌아왔다.
 
"말할 수 없죠. 당신은 프로고 이 바닥에서 십 년을 버틴 사람이니까요."
 
P는 이 쯤에서 말을 마치기로 했다. 조금 더 말하는 건 패를 완전히 내보이는 것이다. 어느 정도 선에서 말을 해야 치하야가 설득되는지를 알아내는 건 이후에 업무를 수행할 때 상당히 중요한 지표였다.
 
"저는..."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확실한 건 어떤 말도 그 사람들한테는 안 들릴 거라는 거죠."
 
오 년 전에 아마미 하루카가 죽었다. 슬픔을 딛고 화려하게 컴백했다.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었다. 그 깊고 깊은 사정이 중요한들 회사가 입은 수 억의 손해가 훨씬 더 중요한 게 프로라는 거였다. 치하야는 프로였고 당연히 손해를 끼친 데에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서 첫 대가를 치르러 가는 것이고, 분명히 계약된 사항임에도 치하야는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P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치하야가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아무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혼자는 참으로 익숙했다. 예전에는 업무용과 사생활용 휴대전화를 따로 쓴 것 같기도 했다. 타카츠키 야요이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이 온 뒤 일 주일 동안 잠금 상태이던 사생활용 폰이 배터리가 다 되어 저절로 꺼지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는 업무용 휴대전화만 썼지만. 그래서 치하야의 사생활이라고 하면 온전히 작업실에서 기계들을 마주치는 일뿐이었다.
 
마이크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스피커는 온전히 그 말들을 되돌려 줄 수 있다. 마스터 키보드는 그녀가 원하는 소리를 대답해 주었다. LP판의 속삭임도 FLAC 음원의 재잘거림도 전부 그녀의 것이었다. 하지만 치하야는 그게 혼자가 아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이기에 가능했던 생각이었다.
 
혼자가 된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럼 말 계속할게요. 그렇게 사과 마치고 나서는 담당자 분이랑 앨범 프로모션 관해서 의논할 겁니다. 저희가 뭐 앨범 홍보한다고 방송 혹사시키는 그런 악한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그런 식으로 홍보하는 거 싸 보이기도 하고. 예전에 하던 것처럼 화보촬영 겸한 잡지 인터뷰라던가 라디오 게스트라던가 참가할 거예요. 그러면 나머지 일은 제가 할 테니까 저녁식사 하기 전에는 집에 모셔다드릴 수 있겠네요. 괜찮죠? 저희 그렇게 빡세게 일 시키는 사람들 아닙니다."
 
키사라기 씨가 잘못한 거죠.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서로를 탓하기보다는 앞으로 무엇을 잘 할지가 훨씬 더 건설적이다.
 
"아,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치하야에게 질문이 있을 리가 없었다. 변명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건 그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은 P가 말하는 소위 프로로서의 마음가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변명을 털어놓아야 했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변명을. 있는 힘껏 변명하듯이 소리를 채워야 했다. 이렇기에 나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내지는, 이렇기에 나는 이럴 수밖에 없어 같은. 외로움을 가장 잘 표현하는 아티스트라는 평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럼 치하야는 프로기에 계속해서 외로워야 하는가.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없으시면... 음. 혹시 전화도 못 받고 벨소리도 못 들으실 때는 어떻게 연락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역시나 무례하시군요."
 
무례하신 건 그 쪽이고요. 하지만 말하지 않는다.
 
"하하...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도 아예 파악을 못 하게 되면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까 싶어서..."
"불미스러운 일이라면, 그 때와 같은 일을 말하는 건가요?"
"콕 찝어서 그거라고 말할 수는 없죠."
"저는 언제나 말했듯이 매니저가 필요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필요는 키사라기 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도 말씀드렸었죠. 솔직히 말해서 정말 죄송하지만, 몇 번 말씀드렸다시피 키사라기 씨한테는 선택권이 없어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데 이건 재계약 조건이고 재계약이 파기된다면 키사라기 씨가 어떤 어려움을 겪으실지 저희도 잘 아니까 최소한으로 배려를 해 드리는 겁니다."
"제가 완전히 퇴사를 해서 혼자 활동을 하게 된다면요?"
 
P는 백미러로 치하야의 표정을 힐끗 보았다. 여전히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아니, 움직임이 없었다. 점점 P의 말이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되겠죠. 그럼 공연기획도 혼자 배우셔야 하고, 연출도 혼자 배우셔야 하고, 다른 사람한테 시킬 수 있는 많은 일들을 그냥 내버리시는 겁니다. 저희는 키사라기 씨가 그렇게 되기를 절대로 원치 않거든요."
"그걸 지금 제 매니저로서 하실 말씀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키사라기 씨와 말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키사라기 씨를 자극하는 언행을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계약 기간 동안 키사라기 씨가 무탈하게 활동을 마쳤으면 하는 바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키사라기 씨의 매니저기도 하지만, 회사에서 보낸 상사기도 해요."
"감시 역할이겠죠."
"어떻게 부르시든 좋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 의미가 없음은 키사라기 씨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음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돕는 사람들입니다. 단지 지금은 조금 저희한테... 약간의 부채가 있는 거죠."
 
이윽고 치하야는 입을 다시 다물었다. P는 떼 쓰는 어린애를 달랜 사람처럼 한숨을 작게 쉬고는 좌회전을 했다. 곧바로 회사 사옥의 지하 주차장으로 통하는 입구가 보였다. 내리막으로 향하자 치하야가 이어폰을 두 귀에 꽂았다.
 
 
 
케이지의 사옥은 근방 건물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는 사장인 후쿠자와의 욕심이 듬뿍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필요한 것들은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건물이었고 여기 소속된 가수들의 명수를 따진다면 다른 건물이 더 있어도 모자랄 정도였지만 어쨌든 불필요하게 높고 큰 건물이었다. 그리고 치하야와 P가 소위, 사과를 하러 다녀야 하는 곳은 이 건물의 32층이었다.
 
"알겠죠? 절대로 불필요한 말은 하지 마시고, 이어폰은 빼시고, 제가 가르쳐 드린 대로만 말씀하시면 돼요. 아시겠죠?"
"'지난번의 콘서트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다음부터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며...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군요."
"빠르게 끝내고 좀 더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자고요."
"알겠습니다."
 
무미건조하게 답을 한 치하야는 이내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P는 기분 좋은 이야기라고 말했지만 P 자신도 홍보 같은 이야기로 치하야가 다시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는 단 하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기분이 좋은 이야기라고 하면 기분이 아주 약간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아주 작은 사회인으로서의 배려였고 P는 언제나 치하야한테 그런 최소한의 배려선은 지키고 있었다. 설령 치하야가 계약에 묶여서 움직이지 못하게 생겼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그것은 편하다고 설득하는 것이 치하야를 위해서도 회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치하야가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도 말이다.
 
32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더니 무서운 속도로 닫혔다. 뛰쳐나오듯이 엘리베이터를 벗어난 둘의 뒤에서 엘리베이터는 27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거 참 성질 급한 엘리베이터네요. 가죠."
 
P가 앞장서자 치하야는 세 걸음 정도 뒤에서 천천히 복도를 걸어왔다.
 
사장실로 통하는 복도는 의미 없는 방문들이 줄줄이 늘어서서는 단색을 띄고 있었다. 치하야는 단색이 어떤 느낌인지 생각해 보았지만 색맹에 걸린 듯이 그것은 회색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회색의 소리는 깔끔하기 그지 없지만 그렇지 않은 채로 단색인 소리 역시 아름다웠다. 단지 치하야는 그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P는 사장실의 문을 톡톡 두드렸다. 들어오게, 하는 소리가 들리자 P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후쿠자와는 책상에 두 발을 올려놓고는 책을 읽는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P인가. 그 쪽은 키사라기 씨고."
 
후쿠자와가 치하야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치하야는 가볍게 목례를 할 뿐이었다.
 
"어... 키사라기 씨가 이번 일에 대해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는데요."
 
P는 뒤통수를 긁는 척 하면서 가볍게 운을 떼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후쿠자와는 치하야가 무슨 말을 할지, P가 무엇을 하러 여기에 왔는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확인이라는 작업이 필요한 법이었다.
 
"무슨 말을?"
"자, 키사라기 씨."
 
P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약 오 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치하야와 후쿠자와가 서로 마주보는 형세가 되었다.
 
후쿠자와는 상당히 치하야가 괘씸했다. 하지만 괘씸하다고 해서 노발대발하는 것은 어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완전하지 못했다니, 모두가 완전했던 가운데 자신 혼자가 완전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오만이었다. 오만방자했고 유치했으며 배려심도 없는 행동이었다. 물론 그런 오만방자함이 지금의 키사라기 치하야를 만든 것이겠지만 그 오만방자함이 수 억의 재산손실을 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후쿠자와가 유치한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지금 방아쇠를 쥐고 있는 쪽은 그였다.
 
"...지난번의 콘서트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그래. 그것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지."
"앞으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만들어진 대사가 분명한 말. 진심이 하나도 없는 말. 하지만 충분했다. P는 일을 잘 하고 있었다. 역시나 유능한 매니저를 붙여 놓은 보람이 있었다. 그 콧대 높은 치하야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다니.
 
"긴 말은 않겠네. 앞으로 주의하면 되는 것이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조치는 취했다고 생각하니까."
"네."
"P는 유능한 사람이니 잘 따라 주게나."
"그것에 대해서 말인데요."
 
또 떼를 쓰려는 건가. P는 마음속으로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매었다. 끝까지 저럴 셈이라면 작전을 변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배려의 선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은 그 선에 맞추어서 치하야가 갑작스러운 말을 했을 때의 대응 대책을 세웠다.
 
"혹시 P가 필요 없다고 말할 생각이라면..."
"아뇨. 그저..."
"그저?"
 
치하야는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무슨 말을 정리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야단맞는 어린아이가 말대꾸를 떠올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치하야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언제나 예상할 수 없는 말을 꺼내었다.
 
"아닙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좋아."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블로그에는 하루 먼저 연재됩니다.
6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