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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 P 시리즈] 센카와 치히로 < 함께 걷는 길 >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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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8, 2016 03:42에 작성됨.

 

 

-------------함께 걷는 길(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사실은, 어느 정도는 직감하고 있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린 날 이후, 프로듀서가 유난히 인사팀을 자주 찾아간 것도.

프로젝트에 관한 일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음에도, 계속해서 혼자서 일을 처리하고 있던 것도.

어쩌면 이번 달이, 정든 이 장소에서 나의 자리가 남아있는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도.

 

비록 정식 직원은 아니지만 우리 회사에는 나를 비롯한 많은 계약직 직원들이 있다. 사람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커뮤니티라는 것이 생겨나는 법.

아무리 기밀을 유지한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사람의 손을 거치는 것이고, 사람의 손을 타다 보면 자연스럽게 정보는 새어나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새어나간 한 톨의 정보는 서서히 살이 붙어 어느새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

 

 

 

1차 재계약자 명단이 나온 바로 다음 날.

 

 

“프로듀서 씨, 인사팀에서 전화 왔는데요?”

“아, 제가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들고 있던 수화기에서 딸깍, 하고 덮개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듀서가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가능한 조용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프로듀서는 평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주위에서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지만, 지금처럼 업무에 관한 이야기, 혹은 그에 준하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는 크게 줄어든다.

 

“……네, 그럼 지금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네.”

 

이야기를 마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센카와 씨, 저 잠시 인사팀 좀 다녀오겠습니다.”

“네, 전화는 맡겨주세요.”

“하하, 고마워요.”

 

싱긋 웃으면서 그는 서류가 들어간 봉투를 챙겨 곧바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5분 정도 지났을 무렵, 내 책상 위에 설치된 전화기가 울기 시작했다.

 

“네, 아이돌 부서의 센카와 치히로입니다.”

[센카와 씨? 저 P입니다.]

“프로듀서 씨?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아, 별 다른 건 아니고요, 혹시 제 책상 위에 하얀색 서류봉투 있는지 좀 봐 주시겠어요? 우리 회사 로고가 찍힌 커다란 봉투입니다.]

“잠시만요……아아, 네, 있네요.”

[역시 거기에 놓고 왔구나……혹시 가능하시면 인사팀으로 좀 가져다 주실 수 있으세요?]

“네, 금방 갈게요.”

[고맙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곧장 그의 자리로 다가가 아까 확인한 봉투를 집어 들었다. CG프로덕션의 로고가 그려진 커다란 흰색 봉투.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리라.

늦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메모를 사무실의 문에 붙여놓은 뒤 곧바로 인사팀의 사무실이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합니다.”

 

인사팀의 사무실로 연결되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려고 하던 바로 그 때, 저 앞에서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목소리가 다름아닌 프로듀서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모퉁이에 딱 붙어 서서, 나는 고개만을 살짝 내밀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는 갈색 서류봉투를 한쪽 팔에 끼운 채, 자신보다 머리 두 개 정도 작은 중년의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텅 빈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목소리를 적당히 줄여서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단어 한두 개를 조합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바꾸려고……자네의……인사특권……”

“네……힘들어서……가능하면……예전…….”

 

‘바꿔……? 뭘……?’

 

“재계약……만료……신입……?”

“하하, 덕분에……귀찮은……처리…….”

“감사합니다…….”

 

재계약, 그리고 해지, 신입.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단어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철렁,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뛰쳐나가듯 모퉁이를 박차고 나갔다.

 

“프로듀서 씨!”

“센카와 씨?”

 

언제나처럼 미소로 나를 맞이한 그는 호흡이 불안정한 나를 바라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뛰어 오셨어요? 숨이 굉장히 가빠 보이시는데.”

“아……네! 급하신 것 같아서요. 봉투, 이거 맞죠?”

“……아아! 맞습니다. 이거 맞아요. 고맙습니다.”

“아뇨, 뭘 이런 걸 가지고요. 그럼 전 다시 사무실에 가 볼게요!”

 

금방이라도 터져나올 듯한 눈물을 꾹꾹 눌러 담고, 그 위를 억지미소로 덮으며 나는 그 사람의 앞을 도망치듯 벗어났다.

 

 

 

*************

 

 

 

인사팀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인사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찾으셨습니까?”

“아, 왔군. 일단 이거 받고,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세. 여기는 듣는 귀가 많으니.”

 

나를 향해 날아오는 차가운 캔커피를 받은 나는 인사팀장의 뒤를 따라 들어온 길을 그대로 돌아 사무실을 나갔다.

 

“센카와 치히로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나?”

“네. 그녀 말고는 안 되겠어요.”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캔커피를 열어 내용물을 한 모금 마셨다.

 

“뭐, 지금이라도 바꾸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이번엔 자네의 인사특권을 쓰는 거니까.”

“알고는 있습니다만……그래도 새 사람이랑 또 적응하려면 힘들어서요. 가능하면 예전부터 호흡을 맞춘 동료와 함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 것도 있고요.”

“하핫, 물러터졌구만.”

 

”그래서 난 자네가 마음에 들어.” 라고 덧붙인 뒤,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내 등을 탁탁 두드렸다.

 

”자네 요청대로 재계약자 명단에서는 빼 놓았으니까, 계약 만료되면 곧바로 신입 사무원으로 넣어도 될 거야. 서류만 가져오면 바로 통과되도록 이쪽에서도 조정해두지.”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얼, 자네가 열심히 뛰어 준 덕분에 우리도 귀찮은 일이 꽤 줄었거든. 나야말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별 말씀을요.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씨!”

 

그 때,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새하얀 봉투를 품에 안고 있는 치히로의 모습이 보였다.

 

“아, 센카와 씨? 뛰어오셨어요? 숨이 굉장히 가빠 보이시는데.”

“아……네! 급하신 것 같아서요. 봉투, 이거 맞죠?”

“……아아! 맞습니다. 이거 맞아요. 고맙습니다.”

“아뇨, 뭘 이런 걸 가지고요. 그럼 전 다시 사무실에 가 볼게요!”

“네, 수, 수고하세요.”

 

곧바로 종종걸음으로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그런 나와는 반대로, 인사팀장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더니 씨익 웃으면서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뭐, 귀엽구만. 자네 정도면 아담한 게 딱 좋겠네.”

“……사심은 없습니다.”

“뭐, 우리 회사는 사내연애에는 관대한 편이니까 말이야. 관리대상한테만 손 안 대면 땡이야.”

“아니, 사심 없다고요.”

“그래도 결혼까지는 신중하게 생각하게. 인생 선배의 조언이야.”

“아니라고요.”

“으핫핫핫!”

 

 

 

************

 

 

 

사무실에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났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있었고, 그리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조금 전에 들었던 프로듀서 씨와 인사팀장님 사이의 대화 내용이었다.

그 이외에도, 조금이지만, 정말로 아주 조금이지만, 그 사람에 대한 원망도 조금은 섞여 있었다. 끝까지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이렇게 나를 버릴 줄이야. 동료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 혼자만의 망상이었을까?

 

“……치……씨?”

 

의식 저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낯이 익은 목소리였다.

 

“치히로 씨?”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의식을 제자리로 되돌렸다. 그러자 제대로 초점이 돌아온 내 시선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 사무실에 소속된 아이돌 중 한 명인 카미야 나오였다.

 

“괜찮아? 아까부터 계속 멍하게 있던데.”

“미, 미안해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무슨 일이에요?”

“으응, 곧 출발해야 하는데 애들이 안 보여서 말이야. 혹시 못 봤어? 프로듀서도 어디 갔는지 안 보이고.”

 

‘애들’이라는 것은 아마도 늘 함께 다니는 삼총사의 나머지 둘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응, 프로듀서 씨라면 지금쯤 인사팀에 계실 텐데……나머지 두 사람은 저는 못 봤어요. 혹시 휴게실에는 가 봤어요?”

“아, 거기를 안 가봤네. 고마워, 치히로 씨.”

“후훗, 별 말씀을요.”

 

사무실을 나서는 나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나 자신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저 아이들을 보는 것도 TV에서나 볼 수 있겠구나.

 

‘……아니야. 아직 끝이라고 볼 수는 없어. 두 번째 명단도 있고, 최종 명단도 있어.’

 

애써 희망적인 생각을 품어 보았지만, 내가 생각하더라도 그다지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나는 듯,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욱신, 가슴 한 켠이 묵직하게 아려왔다.

 

 

 

*********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9월의 세 번째 수요일. 그러니까 계약직 직원을 대상으로 한 세 번째. 아니, 최종 재계약자 명단이 발표되었을 무렵이었다.

 

“요즘 치히로 씨의 상태가 이상해.”

 

나는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카렌을 바라보았다.

 

“센카와 씨가? 어떻게?”

“으응, 말하자면 복잡한데……정신이 다른 데 가 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혼이 빠져있다고 해야 하나……?”

 

그녀의 양 옆에 앉아 있던 린과 나오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오른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다시 자라나기 시작하는 수염들이 까실까실하게 자신들의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랬어?”

“우리가 본 걸로는 3일 전쯤이야.”

“3일 전이라…….”

 

손끝으로 수염의 까슬까슬한 감촉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짐작 가는 바는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납득한 척을 해야 저 아이들이 자신들의 일에 집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음……알았다. 내가 한번 알아보마.”

“아, 그거 말고도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봐.”

 

나는 카렌을 바라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금 이상한 소문을 들었거든. 혹시 P씨도 엮여 있는건가 싶어서.”

“어떤 소문?”

“그러니까……그게…….”

 

대답을 망설이는 카렌 대신,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린이 대뜸 끼어들었다.

 

“치히로 씨 대신 다른 사무원을 뽑는다는 이야기.”

“린!”

“뭐 어때? 정말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아무리 그렇지만, 말이 씨가 된다는 말도 있다구?”

“괜찮아, 괜찮아. 그래서, 프로듀서의 생각은 어때?”

 

나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지금은 딱히 정해진 건 없는데. 어디서 그런 얘길 들었어?”

 

물론 ‘내정’된 사람은 있지만 괜스레 떠들어서 좋을 일은 아니다. 낮에는 새가, 밤에는 쥐가 들을 수도 있으니까.

 

“어, 응……실은 로비를 지나가다가 들은 거거든.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렇군. 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결정되는 대로 내가 가르쳐주마.”

“프로듀서, 혹시 안 좋은 생각 하고 있는 건 아니지?”

“물론. 너희들이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여차하면 내가 옷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야.”

 

나는 키보드 위로 손을 가져가면서 곁눈질로 왼팔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내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던 세 명의 소녀들 또한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자, 휴식은 여기까지. 너희들도 이제 자기의 일을 하러 가야지?”

“알았어. 요새는 순 레슨밖에 없지만 말이야.”

“곧 너희 후배들이 들어올 거야. 그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모습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도록 해.”

“네에, 알았어요~!”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사무실을 나서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눈 앞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휴우…….”

 

터진 시기가 다소 빠르긴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거쳐가야 할 길이다. 차라리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는 지금 터진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인사팀이나 총무팀 모두 우리 부서와 프로젝트를 호의적으로 보고, 또 응원도 보내주기도 하는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그래. 여차하면 내가 옷을 벗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되뇌면서 나는 키보드를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다. 모쪼록, 지금의 이 선택을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

 

 

 

9월의 세 번째 금요일이 되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하던가. 2차 명단에도, 최종 명단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주일. 9월이 지나면 이 회사와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될 것이다.

 

 

프로듀서의 부탁으로 잠시 인쇄실에 인쇄물을 맡기러 갔다 온 사이에 누군가가 돌아온 모양인 듯, 불을 꺼 두었던 사무실에는 다시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레슨이라도 끝난 걸까? 라고 생각하며 사무실의 문고리를 잡은 그 순간, 사무실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네. 요전에 연락드렸던 P입니다.]

 

그것은 프로듀서의 목소리였다. 오늘 결산회의는 별 거 없다고 하더니, 인쇄실에 다녀온 그 사이에 회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문에 달려 있는 자그마한 창문으로 바라본 사무실 내부에는 프로듀서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얼핏 듣기로는 중요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작게 노크를 한 뒤, 문고리를 돌려 가능한 살짝 문을 열었다.

 

“네. 송별회 자리를 예약하고 싶은데요.”

 

때마침 들려온 그의 한 마디에. 마치 비수처럼 내 가슴을 파고드는 그 한 마디에, 나는 제자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한 박자 늦게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챈 프로듀서는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한 뒤 곧바로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무언가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인원수는……아홉 명이요. 네. 방으로 부탁드립니다. 네.”

 

더 이상은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사람의 앞에서 송별회의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인쇄실에서 받은 영수증을 그의 책상 위에 올려둔 뒤, 곧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가슴이 무거웠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저렇게나 잔인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걸까? 그것도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

 

‘아, 안 돼. 부정적이 되어서는 안 돼. 긍정적으로, 어떻게든 된다고 생각하자.’

 

생각과는 정 반대로, 그런 생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가슴은 점점 더 먹먹해졌다.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혹시나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문을 잠그고,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열어놓은 채 한동안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는 소리 없는 오열을 흘렸다.

그 때, 며칠 전 우연히 화장실에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기, 그 이야기 들었어?”

“무슨 이야기?”

“아이돌 부서의 어시스턴트 있지?”

“아아, 요전에 부서장한테 징계 먹였다던 그 사람?”

“그 부서장이, 이번에 재계약자 명단에서 그 사람 빼달라고 했대. 뒤끝 쩔지않아?”

“와, 거기 부서장, 젊은 사람이라더니 속이 뭐 그렇게 꼬여 있대?”

“요즘 좀 잘 나간다고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야.”

 

그 때는 그저 근거 없는 헛소문이라고 웃어넘겼지만, 여기까지 와서 돌이켜보니 도저히 헛소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아닐 거야. 프로듀서 씨가 그럴 리가 없어……분명히,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나 자신에게 타이르듯 그렇게 중얼거려 보았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함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무거워졌다. 얼굴을 뒤덮은 손을 떼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나, 그렇게나 큰 잘못을 저지른 걸까?’

 

거울 속에 서 있는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은, 정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후미카와 미즈키 씨의 CD발매일이 결정되고, 두 사람 모두 라디오 프로그램의 퍼스널리티를 맡게 되었고, 11월에 있을 가을 라이브 계획이 완성되었다. ‘아이돌 부서’로써 진행하는 마지막 행사인 만큼, 이번에는 후미카와 미즈키 씨까지 포함하여 사무소의 모든 인원들이 총출동하는 호화로운 구성이 될 예정이라고 한다.

……나랑은 이제 더 이상 관계 없는 일이지만.

 

“휴우…….”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마지막 일이 끝났다.

이 결재버튼을 누르면, 이제 나는 두 번 다시 이 곳으로는 돌아오지 못하겠지.

천근만근 무거운 손가락을 어떻게든 움직여, ‘결재’버튼을 클릭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모니터의 화면이 전환되었다. 개인 물품은 이미 다 빼 놓았으니, 나머지는 남은 사람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가방을 챙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될 작별 인사. 프로듀서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대답을 내게 해 줄까? 수고했다고? 아니면, 언젠가 반드시 다시 만나자고? 그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이 정든 장소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프로듀서 씨. 잠깐이라도 좋으니, 나에게 말을 걸어주세요. 조금만 더, 내가 이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제발,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말을 늘려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프로듀서로부터 짤막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죠.”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죠.

그걸로 끝이었다. 하다못해 작별인사다운 작별인사조차 받지 못한 것이다. ‘나란 사람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수고, 하셨습니다…….”

 

‘내일 뵙죠’라니. 내일은 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누구 때문에 내가 지금 이 꼴이 됐는데, 정작 당사자는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전혀 모르는 걸까?

너무해.

나는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넘쳐흐르려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여기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

 

 

 

 

“아, 센카와 씨한테 서류 도장 받는 거 깜박했네……내일 따로 찾아가야겠군.”

 

 

 

***********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돌 부서의 부서장을 맡게 된 프로듀서, P입니다.”

“반가워요. 저는 사무 어시스턴트, 센카와 치히로입니다.”

 

그 사람의 첫 인상은, ‘까다롭다’는 인상이었다. 뿔테 안경도 그렇고, 날카로워 보일 정도로 날을 세운 정장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그렇게 보였다.

 

“여기는 이렇게 해서, 이 한자를 쓰는 게 좋아요. 프로듀서 씨가 사용하신 단어는 요새는 안 쓰는 말이거든요.”

“그렇구나……역시, 1년만에 벼락치기로 해 놓으니까 잘 안 되네요, 하핫.”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오판이었다. 단 일주일. 그와 함께 보낸 일주일 만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첫인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괜찮은 아이는 찾으셨나요?”

“아이고, 오늘도 꽝입니다. 이따가 퇴근하고 저녁밥이나 먹죠. 제가 살게요.”

 

처음 세 달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스카우트를 나가서는 스토커라고 신고를 당하질 않나, 고등학교 주위를 얼쩡거리다 경비한테 쫓겨 다니질 않나. 보통 사람이라면 짜증을 내도 될 정도로 일이 안 풀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프로듀서는 그 반대였다. 어지간한 일로는 미소를 잃지 않는 그였기에, 오히려 내가 그로부터 격려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비록 어느 정도 거리는 있었지만, 적어도 사무실 안에서만큼은 우리는 서로에게 있어 단 하나뿐인 파트너였다.

 

“정말, 센카와 씨 없었으면 제가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네요. 매번 신세만 졌던 것 같아요.”

“에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뭐, 그냥……지금까지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리려고요.”

“네……?”

“알고 계시겠지만, 내일부터는 안 나오셔도 됩니다. 다른 사무원 분들 구했으니까요.”

“잠깐만요! 그게 무슨……?”

“수고하셨습니다, 센카와 씨.”

 

내게 손을 흔들며, 점점 멀어지는 그를 불러 세우려던 바로 그 때, 나는 귀청을 뒤흔드는 휴대전화의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을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이불 속으로 들어와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를 밀어냈다. 알람이 꺼진 휴대전화를 살펴보던 중, 지금 시각이 평소에 일어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늦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나 짤렸지. 참.”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의 감촉과, 체온으로 알맞게 데워진 이불의 따뜻함이 마치 늪처럼 나를 깊숙히 잡아당겼다. 그 따뜻함과 푹신함을 만끽하는 것도 잠시. 곧바로 꼬르륵, 하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밥이라도 먹자…….”

 

 

설거지를 마치고, 침대로 돌아가는 대신 나는 TV를 켜고 소파에 멍하게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의 뉴스 채널에서 오전 아홉 시를 알리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지금쯤 그 사람은 무얼 하고 있을까?

새로 들어온 사무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아니면 술이 덜 깨서 출근한 미즈키 씨를 나무라고 있을까?

야근을 너무 많이 해서, 수면실에서 못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커피는 모자라지 않을까?

전기포트가 고장 난 것은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제 밤, 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나 펑펑 울었는데도 여전히 눈물은 마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끝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그 사람들이 빛나는 모습을 함께 보고 싶었다.

궁상맞게 혼자서 눈물 콧물을 쥐어짜내고 있던 바로 그 때, 띵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네, 나갑니다!”

 

나는 황급히 코를 풀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현관으로 향하면서, 신발장 옆에 설치된 거울을 확인했다. 코 끝이 약간 빨갛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감기 걸린 거라고 둘러댈 수 있을 거야. 마지막으로 크게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진정시킨 나는 조심스레 현관문의 자물쇠를 열었다. 자물쇠를 모두 풀고, 문고리를 돌리자 현관문이 스르르 열렸다. 평소 같았으면 순식간에 지나갔을 그 순간이, 어찌된 일인지 무척이나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구세……?”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감색 정장 재킷이었다.

고개를 조금 더 들면, 베일 듯 날카롭게 줄이 서 있는 새하얀 드레스 셔츠가 눈에 들어온다. 거기서 조금 더, 자세를 바로 하고 시선을 조금만 더 들어올리면, 뿔테 안경을 쓴 서글서글한 인상의 한 남자가 보인다.

차광커튼을 내린 실내에 오랫동안 있었기 때문일까?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아침햇살을 등지고 있는 눈 앞의 사람의 모습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야 당연히, 내가 그 누구보다도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만나기를 바라 마지않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평소처럼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내게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센카와 씨.”

“프, 프로듀서……씨?”

“평일에 늦잠 참 오랜만에 자 보죠? 식사는 하셨어요?”

“네? 네……이, 일단은요…….”

 

“좋습니다”라며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바로 내게 자신의 목적을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듣는 순간, 나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내 귀를 의심했다.

 

“……저기, 한 번만 다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눈을 깜박거리면서 그에게 되물었다.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러니까, 정규직 사무원으로 들어오실 생각 없으시냐구요.”

“정규직……이요?”

“네.”

“그치만, 저 해고됐는데요?”

“해고됐으니까 들어오시라는 거죠.”

 

이건 또 무슨 질 나쁜 농담일까?

 

“지금 저한테 장난치는 거죠?”

“아뇨.”

“그럼 저 놀리러 오신 거죠?”

“……싫으세요?”

“싫다고 하면요?”

“제가 곤란해집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씨익 웃었다.

 

“혹시 다른 일자리 구하셨어요?”

“아니요.”

“그럼 왜요? 우리 회사 싫어요?”

“저 말고 다른 사람 뽑으면 되잖아요. 유능한 사람으로.”

 

그 웃음조차도 가식적으로 느껴졌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그를 쏘아붙였다. 잔뜩 가시가 돋은 그 말을, 눈 앞의 남자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부정한다.

 

“안 됩니다.”

“왜요?”

”저 센카와 씨 말고는 아무도 생각 안 해놨단 말이에요.”

“……네?”

 

또 다시 나는 귀를 의심했다. 쫓아낼 때는 언제고, 뭐가 어쩌고 어째?

 

“새 사람 뽑아준다는 것도 이미 내정자 있으니까 필요 없다고 다 걷어차고 오는 길인데……진짜 싫으세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곧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거짓말이나 농담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장난치는 거 아니죠?”

“아닙니다.”

“정말로요?”

“정말이에요.”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그럼, 한번 변명해보세요.”

“뭘요?”

“인사팀장님하고 단 둘이 얘기하던거요. 재계약 명단에서 저를 뺐니 뭐니 하던 거.”

“아아, 그거 말인가요?”

 

무슨 당연한 이야기를 하냐는 듯이 그는 가볍게 웃었다. 보는 사람이 열 받을 정도로 가소롭다는 웃음이었다.

 

“그야 당연히, 계약직에 묶여 있으면 정직원으로 못 넣잖아요. 그러니까 뺐죠.”

“하아……? 그, 그럼 송별회는요?”

“송별회요……?”

 

그는 처음 듣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번주에, 결산회의 마치고 송별회 자리 예약한다고…….”

“아아, 그거 말인가요? 센카와 씨, 그새 잊어버렸어요?”

“……네?”

“아니, 8월달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아이돌 부서도 올해로 끝이니까 부서 차원에서 송별회 한번 하자고.”

 

그제서야 내 머릿속에 퍼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11월부터는 ‘신데렐라 걸스’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 만큼, ‘아이돌 부서’라는 이름과는 작별을 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송별회를 갖자고 했던 적이 있었다. 분명히, 자신도 좋은 일이라고 찬성했던 기억이 났다.

 

‘그럼, 전부 다 내 착각이었어……?’

 

별안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작 이렇게 물어봤으면 될 걸, 쓸데없이 혼자서 끌어안고 끙끙 앓고 있었던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내게 있어 가장 든든한 아군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료를 의심하던 어제까지의 내가 너무나도 한심했다.

한동안 혼자서 쿡쿡거리던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프로듀서에게 나는 손을 내밀었다.

 

“주세요.”

“……?”

“서류 있을 거 아니에요. 빨리 주세요. 도장 찍게.”

“네!”

 

그러자 프로듀서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면서 가방 속에서 커다란 봉투를 꺼냈다

 

“……여기에 도장 찍으시고.”

“네.”

“여기에도……좋습니다.”

 

매 년마다 작성하던 ‘계약서’가 아닌, ‘입사 지원서’라고 적힌 서류를 앞에 두고 신중하게 도장을 찍는 나를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훗, 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세요? 혹시 실수했나요?”

“아, 아니요.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요.”

“옛날 생각이요?”

“기억나세요? 2년 전, 제가 처음으로 회사에 온 날.”

“아아, 네. 기억나요.”

 

그때는 지금과는 정 반대의 상황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또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센카와 씨도 웃으시네요.”

“후훗, 그러게요. 너무 똑같은 상황이라 그만……이러면 되나요?”

“음……네. 이 정도면 됐습니다.”

 

프로듀서는 내가 내민 서류를 봉투에 넣어 가방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걸로 끝이에요?”

“네. 이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출근은 내일부터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 사원증은 정문에 맡겨둘 테니까 신분증이랑 증명사진 꼭 챙겨서 오시고요.”

“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현관으로 향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어떻게 발산해야 할 지, 나로써는 전혀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것의 정체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신발을 신은 그가 몸을 돌리려는 바로 그 때를 노려 그를 향해 몸을 던졌다. 재킷을 입고 있었다면 재킷의 단추에 코를 부딪혔을 테지만, 다행히도 지금 그의 재킷은 그의 팔에 얌전히 걸려 있었다.

 

“센카와 씨……?”

“……잠시만, 이렇게 있게 해 주세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굉장히 많았지만, 정작 이렇게 때가 되고 나니까 아무것도 꺼낼 수가 없었다. 거꾸로 뒤집은 라무네처럼 단단히 목이 메어서, 나는 그의 품 속에서 턱 밑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켰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툭, 하고 바닥에 단단한 것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몸이 조금 흔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내 머리 위에서 뻗어 나온 커다랗고 따뜻한 무언가가 덥석, 하고 나를 감싸 안았다. 그것이 그의 길고 커다란, 그리고 무척이나 따뜻한 손이었다는 것을 눈치 채는데 까지는 약간 시간이 필요했다.

 

“……읏.”

“미안합니다. 제가 쓸데없이 너무 많은 것을 숨겨서 당신을 불안하게 해버렸어요. 정말로, 미안합니다.”

 

고작 포옹일 뿐인데 그것이 뭐라도 되는 것인지. 단단히 막혀 있던 것들이 봇물이 터지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말……그걸……왜, 지금 말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내, 내가, 흑, 얼마나 힘들었는데……내가, 얼마나, 훌쩍, 고생했는데……!”

 

대답 대신, 그는 울먹이는 내 등을 조용히 토닥여주었다.

 

“P씨……정말, 너무해……으아아앙!”

 

나보다 훨씬 크고, 나보다 훨씬 넓은 가슴팍에 안겨서 나는 지난 한 달간 쌓여 있던 것들을 모두 털어내려는 것처럼 펑펑 울었다. 아니, 울부짖었다. 프로듀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조용히 내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진정된 나는 다시 프로듀서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왔다.

 

“……내일 보자고 한 건 이 뜻이었군요.”

“그렇지요. 그럼, 무슨 뜻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프로듀서 씨는 일 말고는 무감각하니까, 틀림없이 내가 잘린 것도 모르고 막 던진 인사라고 생각했어요.”

“으음, 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닌데요.”

 

이제는 거의 말라붙은 눈가의 눈물을 파자마 소맷자락으로 훔쳐냈다. 자세를 곧게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보다 머리 3개 정도 위에 있는 그의 얼굴은, 어제까지만 해도 얄밉기 짝이 없는 낯짝이었지만 오늘은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푹 쉬시고, 내일 건강한 모습으로 뵙죠.”

“그렇게 말하니까 꼭 병문안 온 것 같아요.”

“하핫, 그런가요.”

 

원룸의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이게 꿈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며 볼을 살짝 꼬집어 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펄쩍 뛸 정도로 짜릿한 아픔만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현관의 선반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카드 한 장이 내게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내 사진과 이름이 들어가 있는 임시 출입증이었다. 발급하는데만 최소 3일은 걸리는 물건으로, 이것이 하루 만에 나왔다는 것은 이것을 훨씬 전부터 준비해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정말로 나 말고는 다른 사람은 생각도 안 했구나.’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한참 동안 현관에 서서 출입증을 만지작거리면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 그런데 내일부터는 같은 정사원인데 뭐라고 불러야 되지? P씨? 선배?”

 

 

---- <함께 걷는 길> END -----

 

 

 

오랜만에 뵙습니다. 거의 한 달 정도 되었네요.

예전부터 한번 착각계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습니다.

다만 얼마나 매듭을 꼬아놓을지, 그리고 어느 타이밍에 매듭을 풀어야 할지 완급조절에 대한 인내심이 매우 부족한 저였기에 언제나 생각만 하고 시도를 못 하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드디어 한 번 시도를 해 보네요. 물론 인내심이 부족한 건 어디 안 가는지라 이렇게 졸작이 튀어나왔습니다만.......

부디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곧 조그마한 '아이돌 부서'의 이야기도 끝을 향해 다가갑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끝나면 '신데렐라 걸즈'의 이야기가 펼쳐지겠죠.

많아지는 등장인물만큼이나 프로듀서도 빡세게 굴릴 예정이니 앞으로도 부디 잊지 말고 관심(과 덧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뵙겠습니다.

 

 

그나저나 울리니까 좋다...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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