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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6, 2016 23:08에 작성됨.

 

 모두가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밤. 길거리의 가로등과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몇 대만이 빛을 낸다. 그 고요한 밤에 프로듀서는 불 꺼진 사무소에 스탠드만 켜놓은 채로 일에 몰두했다. 시간이 멈춘 듯, 적막만이 가득해질 즈음, 프로듀서는 잠시 기지개를 켰다. 졸린 눈을 비비고 손목 시계를 들여다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서 쉽사리 퇴근하기 힘든 상황인지라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쏟아지는 잠을 쫓을 겸 가볍게 바람이라도 쐬려 일어섰다. 그 순간 사무소 문이 열렸다.

 “고생 많으시네요, 프로듀서.”

 하얀 드레스 셔츠를 입은 소녀, 키사라기 치하야. 그의 담당 아이돌이었다. 그는 놀란 눈치였다.

 “치하야? 이 밤에 어쩐 일이야?”

 오늘은 비번이라 분명 집에서 쉬고 있을 그가 사무소에, 그것도 한밤중에 찾아 온 것에 당황했다.

 “요즘 잔업이 많으시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야식 좀 드시라고 가져왔어요.”

 그는 가방에서 조심스레 물건을 꺼냈다. 보자기에 싸인 도시락이었다.

 “와. 이게 웬 거야?”

 프로듀서가 기쁜 마음에 보자기를 풀고 도시락 뚜껑을 열자 정갈한 모습의 도시락이 나타났다. 음식을 입에 넣고 맛을 보니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요리를 잘 하지 못 하는 치하야가 이 정도까지 발전했을 줄은 프로듀서도 몰랐을 것이다.

 “이거 정말 치하야가 만든 거야?”

 “프로듀서, 설마 못 믿는 거예요?”

 프로듀서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치하야의 뾰로통한 얼굴을 보고 사실대로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차가웠던 네가 이렇게 발전할 줄은 몰랐으니까. 요리도 서투르고, 대화도 서먹했는데.”

 프로듀서의 말을 조용히 듣던 치하야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뀌니까 안심이다. 나도 마음이 놓여.”

 프로듀서는 젓가락을 놓고 치하야의 손을 잡았다. 살짝 거칠지만 보드라운 손이었다. 손가락에 감긴 많은 반창고가 치하야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보여줬다. 치하야는 말없이 프로듀서의 손을 맞잡았다.

 “고맙다, 치하야. 노력해줘서.”

 “저야말로. 여기까지 이끌어줘서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서로에게 고마움을 나타내던 둘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뺐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치하야가 식기 전에 먹으라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정말 맛있네.”

 “그야 제 마음이 듬뿍 담겨있으니까 그렇지요.

 프로듀서의 말에 치하야가 수줍게 얘기했다.

 “마음? 음……. 아, 그렇구나. ‘고마움’ 같은 거 말이지?”

 치하야는 그 말을 듣고 아까까지 띠던 웃음을 거두고 정색했다.

 “’고마움’이라뇨, 프로듀서. 당연히 ‘사랑’이죠.”

 “어? 치하야, 그래도 ‘사랑’은 좀 그렇지 않을까?”

 “어째서죠?”

 치하야의 말은 전보다 더욱 싸늘해졌다. 말투는 칼처럼 날카로웠다.

 “어째서냐니. 우린 같은 사무소 식구에다가 너랑 나는 프로듀서와 담당 아이돌이고, 아이돌이 열애설이 터지면 또 복잡해지잖아.”

 “그것뿐인가요?”

 “그것뿐이라니?”

 “프로듀서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셨는데요?”

 치하야가 강압적으로 나오자 프로듀서도 당황했다. 예전에도 가끔씩 차가운 인상을 주곤 했지만, 오늘처럼 이렇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담당 아이돌이야.”

 “어째서…….”

 “치하야?”

 “어째서!”

 치하야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프로듀서는 움찔했다. 맹수의 소리처럼 들렸다. 치하야의 눈이 살기를 띤 채 프로듀서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나에게 그랬잖아! ‘착하다’고, ‘잘한다’고, ‘최고’라고 그랬으면서!”

 “치하야, 진정하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치하야가 몸을 기울여 프로듀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어떻게! ……큭!”

 그러다 신음소리를 내고서 어딘가 아픈 듯이 팔을 움켜쥐었다. 드레스 셔츠 소매에서 붉은 물이 들었다. 프로듀서가 놀라 살펴보니 소매 끝자락에 하얀 무언가가 팔을 감싸고 있었다. 붕대였다.

 “치하야, 이건 대체?”

 “놀라셨나요?”

 치하야가 미소를 띠며 소매를 걷었다. 하얀 붕대가 팔을 칭칭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군데군데 붉은 것이 묻었다. 피다. 프로듀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놀란 프로듀서의 얼굴을 본 치하야는 붕대를 천천히 풀었다. 드러낸 팔은 성한 곳이 없었다. 손목 주위는 온통 칼로 그은 흔적들이 가득했다. 다른 부위 역시 그랬다.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에선 진물과 피가 흘러나왔다. 할 말은 잃은 프로듀서는 이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왜 그런 거야.”

 프로듀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프로듀서를 사랑하니까.”

 “사랑하는데 왜 그런 거냐고.”

 “프로듀서가 이렇게 절 상처 입혔잖아요.”

 “뭐?”

 그 말을 들은 그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

 “프로듀서의 행동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이 다정해서 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대신 그 아픔을 저한테 새긴 거예요. 후후.”

 치하야는 마치 아이를 다루듯이 자신의 팔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이러면 프로듀서가 함께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으니까.”

 “미쳤어…….”

 프로듀서가 짧게 탄식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치하야는 예전부터 주로 소매가 긴 옷을 입었다. 한여름에도 그런 옷을 입고 다녀서 덥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프로듀서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치하야는 천천히 프로듀서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프로듀서의 얼굴을 꼭 안아 자신의 품에 묻었다.

 “사랑해요, 프로듀서. 사랑해. 죽을 만큼 사랑해.”

 프로듀서는 멍하니 안겼다. 하지만 치하야의 행동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는지 그를 밀치며 떼어냈다.

 “프로듀서?”

 치하야는 어리둥절했다.

 “치하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당장 병원에 가자.”

 “병원? 어째서요? 저 멀쩡해요, 프로듀서.”

 “지금 네 상태를 보고 멀쩡하다고 할 수 있어?!”

 프로듀서가 큰소리를 냈다. 치하야가 살짝 움찔했다. 이윽고 치하야의 얼굴은 점점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바뀌었다.

 “프로듀서…….”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휴식을 갖자. 너 이 상태로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게 기적적이다.”

 “프로듀서.”

 “지금 당장 짐 싸서 병원에…….”

 “프로듀서!”

 치하야가 소리쳤다.

 “프로듀서는 절 사랑하지 않으시나요?”

 “뭐?”

 “절 사랑하시죠? 그렇죠?”

 프로듀서는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제발 그만 좀 해! 세상에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거야! 네가 날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럴 순 없어!”

 “…….”

 치하야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동자가 갈 곳 없이 흔들렸다.

 “괜찮아, 치하야?”

 프로듀서가 치하야를 부축했다.

 “프로듀서가 날 싫어해. 싫어해. 어째서? 싫어해?”

 치하야는 충격에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자신의 몸을 긁어댔다. 일반적으로 긁는 게 아닌, 옷감이 찢어질 정도였다. 그것은 팔만이 아니라 목이며 다리까지 이어졌다. 프로듀서는 놀라서 치하야의 손목을 잡았다. 얼굴까지 긁으려던 손이 멈췄다.

 “아파. 아파. 아파! 어째서! 프로듀서! 어째서!”

 치하야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치하야, 정신차려! 너 왜 이러는 거야!”

 그가 소리쳤지만, 치하야는 듣지 않았다. 계속 프로듀서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얘기를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을 뿌리치고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유틸리티 나이프(커터칼)였다. 그리고 자신의 목에 갖다 대었다.

 “날 버리지 말아줘요. 제발.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치하야가 애원했다.

 “치하야, 진정해. 허튼 생각하지 말고 그거 내려놔.”

 “내가 더 잘 할게요. 그러니 날 사랑해줘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 사랑해서 죽어버릴 만큼.”

 울먹이는 목소리에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프로듀서는 망설였다. 사랑한다고 말해봐야 저 행동을 멈출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치하야가 그 한마디로 다시 정신을 찾을 수 있다면야 어려운 일도 아니라 생각했다. 그는 새하얀 거짓말을 시작했다.

 “치하야. 난 너의 미래를 위해서 망설였어. 하지만 네 마음이 진심이라면……, 그래, 나도 널 사랑할 거야.”

 “정말……이신가요?”

 “그야 물론이지. 그러니까 그거 어서 내려놔.”

 “프로듀서가, 날, 사랑한대……. 사랑해. 사랑해.”

 치하야는 눈물 범벅이 될 정도로 울었다. 프로듀서도 그의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고 생각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려고 했다.

 -스윽

 날카로운 것이 공기를 가르면서 소리를 내었다. 목 부분이 뜨끈했다. 왠지 호흡이 안 되는 느낌이 들었다. 목에서 뭔가가 흐르는 것 같았다. 질퍽한 느낌이 들어 손을 갖다 대었다. 붉은 액체였다.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졌다. 말을 꺼내려 했으나 입에선 쇳소리만 나왔다.

 “프로듀서는 그런 말 할 사람이 아니잖아요. 날 얼마나 사랑하는데.”

 치하야가 손에 든 나이프의 날에서 붉은 액체가 방울 져 떨어졌다.

 “그런 말을 한 목이 잘못한 거니까 벌을 줬어요. 저 잘했죠?”

 목을 부여잡은 프로듀서가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치하야는 프로듀서의 손을 잡더니 그대로 손목을 그었다.

 “이 손도 항상 날 응원해줬잖아요. 라이브 때마다, 영업 때마다 날 만져주고, 쓰다듬어줬는데. 그런데 손목에 나쁜 게 들어있어서 절 밀친 거죠? 그렇죠?”

 프로듀서의 겁에 질린 눈도, 입도, 귀도 그는 이유를 들먹이며 하나씩 그어갔다. 그리고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치하야는 프로듀서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조금씩 희미해지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소리가 멎었다. 그것을 확인한 치하야는 쓰러진 프로듀서의 상반신을 일으켜 안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프로듀서. 저도 이제 그만 잘게요.”

 그리고 칼날을 자신의 목에 대고…….

 

 

 다음 날, 먼저 출근한 다른 사람들에게 사무소의 잔혹한 현장이 드러났다. 충격을 숨길 수 없었던 사람들은 쓰러지거나, 속을 게우기도 했다. 경찰도 조사를 위해 사무소 안으로 들어왔다. 범행 현장을 보고 누구라도 그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쓰러진 사람을 안고 있는 여인.

 ‘피에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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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선 성격장애를 소재로 써보고 싶었습니다만, 잘 안 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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