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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후미카의 갑작스럽고 독특한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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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6, 2016 22:50에 작성됨.

다 헤진 양장본 속에서 세월이 배여나왔다. 너덜거리는 가죽 커버의 표면이 말라 비틀어 갈라지며 낡은 서점의 바닥에 정지한 시간의 파편을 떨어트렸다. 사람 없는 한가한 날, 소심하고 내성적인 대학생이 홀로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듯 한 낡은 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음악소리도 없는 서점에서 유일한 소리가 되어주고 있었다.

 

"........이상한, 날이네요."

 

오전.

평소라면 그런대로 손님들이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손님이 보이지 않는다. 만화책 코너를 기웃거리는 학생들도 없고, 성인 잡지 코너를 들춰보는 아저씨도 없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침묵 속, 사기사와 후미카가 홀로 입을 열었다. 상인정신으로 충만한 그녀의 삼촌이 울상을 지을 만한 상황이지만, 그녀는 장사보다는 독서에 더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그녀를 보러 오겠다는 남자 한둘은 있을 법한 시간이건만.

 

그래서 그녀는 혼잣말을 했다. 이젠 침묵보단 소란이 익숙하니까. 아이돌 사기사와 후미카가 된 이후, 독서를 방해할 만한 소란스러움은 그녀의 일상이 되었다. 프로젝트 크로네의 소란스러운 구성원들 사이에 끼어살고 있으니, 약간의 소음도 없는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진 것이다.

'뭐, 나쁘진 않네' 그녀는 위화감의 이유를 깨닫곤, 다시 독서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역사가 다시 한 페이지 넘어간다. 대학 생활과 아이돌 일로 바쁜 와중에 얻은 귀중한 독서시간을 두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뭔가가 부족하네요."

 

또 혼잣말이다. 이전 그녀가 읽었던 심리학 서적에선 혼잣말은 정서 불안의 징조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녀가 대중심리학 서적 같은 것에 적힌 내용을 진지하게 믿는 것은 아니나, 어두운 징조와 불안감이란 사람의 논리와 사고를 흔들어버리기엔 충분하다. 진짜 정서불안인 그녀의 동료들의 모습을 곰곰히 떠올리던 그녀는, 평소에 비해 부족한 것이 수다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랬다. 화과자가 없다.

 

"어디 보자....."

 

손을 뻗어 카운터 아래를 뒤적거린다. 잠시 후, 그녀는 멋들어진 글씨체로 '시오미야'라고 쓰여진 고풍스런 종이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앏은 화지(和紙)로 낱개포장된 야츠하시가 나왔다. 부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포장을 풀어 화과자를 입에 담았다. 바삭, 질척. 바삭거리는 계피맛 반죽 속에서 익숙한 달콤함이 번져나왔다. 딸기 맛이다. 아리스가 좋아해서 슈코가 잔뜩 갖다놓은 그 맛이다. 후미카 또한 이 맛을 좋아했다. 코와 입의 점막을 자극하는 계피향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든 것이다.

 

'아아, 이 애증의 과자여. 내 너에게서 도망쳤건만 너를 내칠 수가 없구나.....'

 

문득, 시오미 슈코의 말이 떠올랐다. 연극을 하는 것 처럼 쓸데없이 장엄해 보이는 목소리로 읇은 애드립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던 걸 떠올렸다. 후미카는 그 때를 떠올리며 작게 풉, 하곤 살포시 웃었다. 야츠하시 하나가 입에 또 들어갔다. 이번엔 촉촉한 피에 평범한 팥소였다. 시오미 슈코가 좋아하던, 가장 정통적인 맛이다.

 

카운터에 과자를 올려놓은 채, 그녀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꽃보다 경단, 그리고 경단보다 책. 가끔씩 과자 부스러기를 깨작거릴 뿐. 그녀의 정신은 다시 책 속의 세계로 빠져들 뻔 했다.

빠져들 뻔한 건, 아직도 무언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혹시 음료일까 싶어 드립커피를 한 잔 내렸지만 카페의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음.... 역시 이상하네요."

 

책이 재미없는 건 아니다. 매우 좋은 내용인 데다가, 수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세월 사이에 끼인 감촉, 헌책 특유의 바랜 종이 냄새, 무엇보다 귀여운 아리스가 추천해준 책이다. 그녀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일 수 밖에 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책에 순수하게 집중할 수 없다. 기껏 건진 자유로운 독서 시간이 이런 식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턱을 괴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슴과 팔꿈치를 카운터에 걸치고 턱을 손바닥 위에 올리고.

그렇게 고민하길 몇 분. 이윽고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책이 넘어가지 않으면, 잠시 다른 걸 하면 될 뿐이다. 스스로 놀랄 정도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고지식함의 껍질이 한 겹 벗겨지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져나간 듯 한 느낌까지 들었다. 사기사와 후미카는 주저하지 않고 리모콘으로 손을 옮겼다. 서점 한 구석에 놓인 TV의 전원이 들어갔다.

 

[더러운 인간들이여, 너희가 어찌 이 몸의 아픔과 원한을 알겠느냐?]

 

마침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원령공주. 사기사와 후미카 역시 알고 있는 작품이었다.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별로 본 적이 없다고, 하야미 카나데와 카미야 나오에게 말한 날, 둘이 열성적으로 추천해 준 작품이었다. 이름은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간 보러 가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작품이다. 마침 TV에서 초반 부분을 틀어주고 있었다.

프로젝트 크로네의 사진이 찍힌 책갈피를 낡은 책 사이에 끼우고, 그녀는 TV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건 명작이었지~ 크으~ 어릴 때 봤는데 말이야~ 이시타카랑 산이.....'

 

'나도 감동했어. 애니메이션 같은 건 아이들이나 나오 같은 사람들만 보는 건 줄 알았는데, 평가를 바꿀 수 밖에 없었지.'

 

'......잠깐, 나 같은 사람들이라니?! 그건 무슨 뜻이야?!'

 

'어머, 별 뜻은 없었는데...... 혹시 자기 취미를 부끄럽게 여기는 거야?'

 

'그, 그런 게 아니라..... 으으으......'

 

'아무튼 원령공주 최고다! 이킷떼이떼 요캈따!'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카미야 나오는 격침당했었다. 원령공주에 얽힌 재미있는 뒷 이야기가, 그녀를 한층 더 영화에 몰입시키고 있었다. 카미야 나오의 찬사가 절벽을 거슬러오르는 멧돼지의 물결처럼 몰아닥치고 있었다. 어딘가의 책에서 본 듯한 짐승 요괴들과 인간의 이야기. 개발과 환경의 이야기가, 아는 것이 많은 그녀의 머리속에서 자연스레 여러 이야기를 끌어내었다. 영화가 끝나갈 때 즈음엔, 명작을 읽은 것 만 같은 여운이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흥분한 채로 몰두해, 영화가 끝난 순간 내뱉은 숨의 뜨거움에 놀라버릴 정도로. 전반적으로 올라간 체온이 갑갑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으음......"

 

옷을 한 겹 벗었다. 노출이 하나도 없는 건 바뀌지 않았지만, 껍질을 하나 덜어낸 것 만으로도 몸의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영화, 끝나버렸네요....."

 

그녀가 약간 아쉬운 듯 아직 식지 않은 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로 이렇게 몸이 뜨거워진 적은 오랬만이었다. 라이브를 하고 온 것도 아닌데. 카미야 나오의 말대로, 때론 만화책에 손을 대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지금까지, 정리만 했지 열어본 적은 없는 책들, 서점에서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책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까짓거, 한 번 도전해보는 거지' 카레 가게에 첫 발을 들이밀었을 때와 같은 각오로, 그녀가 카운터를 벗어나 만화책 코너에 손을 뻗은 바로 그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사기사와 서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람을 대하는 건 아직 서투른 그녀지만, 전화 응대의 첫 멘트처럼 정해진 대사는 질질 끌지 않고 말할 정도는 되었다. 어쩌면 연기 레슨의 성과일지도 모른다.

 

[아, 후미카냐? 삼촌이다. 지금 사람 없지?]

 

"네...."

 

[역시..... 오늘 다른 곳에 이벤트가 있어서 다 그쪽으로 갔을 거야. 오늘은 이만 문 닫아라. 상품만 좀 정리해 두고. 알겠지?]

 

호의가 담긴, 갑작스런 축객령이었다. 아무래도 만화책은 그녀에게 조금 이른 듯 싶었다.

 

 

 

----

 

 

 

'시간이 빌 때? 하나코 산책시키지. 목줄을 가져오면 말이야, 하나코가 좋아서 빨리 가자고 목줄을 물고 날 끌어당기려 한다니까. 그게 또 귀여운 게....'

 

시부야 린의 강아지 산책론이 떠오르는 오후다. 1시를 갓 넘어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칭칭 감긴 그녀의 몸 사이로 파고들어오는것만 같다. 가을이라고 하는, 독서의 계절이 그녀의 몸을 휘감는다. 그녀의 동료, 시부야 린처럼 산책시킬 만한 애완동물은 소유하고 있지 않다. 아리스를 데리고 나오면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녀는 이곳에 없으며 또한 엄연한 사람이다. 자기가 내키는 대로 끌고오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부르면 기쁘게 달려올 건 확실하지만.

 

"......정말, 한가하네요."

 

책을 가지고 나오는 쪽이 정답이었다고, 그녀는 약간 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책에 집중이 안 돼, 바깥에 나가도 집중은 안 될 것 같았기에 두고 왔지만 정작 바깥에서 할 게 없었다. 외출을 기피하고, 책 안에 박혀서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바깥이란 취급설명서가 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미지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반 이상 기세와 충동만으로 뛰쳐나왔다는 걸, 그녀는 바깥에 나와서 한가함을 주체하지 못한 다음에야 깨달아 버렸다. 아이돌이 되기 전의 그녀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몸가짐 단정하고 고지식하기로 이름높은 닛타 미나미도, 사기사와 후미카의 고지식함과 고정관념 앞에선 고개를 저을 정도일 터인데. 그런 그녀가 반 이상 충동과 기세만으로.

곰곰히 생각하고 나서야, 사기사와 후미카는 자기 자신의 선택과 사고, 그리고 행동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놀라버렸다.

 

"아......"

 

뒤를 돌아보았다. 삼촌이 운영하는 서점은 가깝다. 처음 보는 세상에 충동적으로 나가고 나서야, 서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당히 느긋한 걸음으로 왔건만, 어느 새 모르는 곳 까지 도착해버렸다. 근처에 보이는 지하철역의 이름이, 이곳이 서점에서 두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지갑과 스마트폰도 챙기고 나왔다. 돌아가자면 지금이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지하철역을 보았다. 두 곳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이곳은 너무 멀다. 두 정거장. 자신이 어쩌다 이 먼 곳까지 걸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잡한 역의 인파가 그녀를 내버려두고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 곳에서,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는 그녀는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었다. 앉아서 쉴 만한 마땅한 벤치도 없었다. 이곳에 앉기 위해선, 역 근처에 늘어선 가게들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 수 밖에 없었다. 아니면 역 안의 의자를 이용하거나.

 

"여긴......"

 

주위를 둘러본다. 이름도 모르는 상호가, 어딘지 모를 상가에 잔뜩 걸려있다.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고, 새로운 가게가 단장을 준비하고, 정지한 시간의 파편 따윈 끝없는 걸음과 자동차 바퀴에 걸려 찢어지고 가루가 되어 날린다. 미야모토 프레데리카가 가져온 패션 잡지에 실린 의상을 입고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끊임없는 소음을 만들어내며 소란스럽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타케우치 프로듀서 같은 정장을 입은 아저씨들이 구둣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어딘가와 전화를 하며 오고간다. 새 가게에 새단장을 해주는 인부들이 배를 채우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공구와 장비를 나른다. 낡은 가죽 파편이 머물 자리는 없었다. 그것은 서점 바닥에도 오래 머물지 못한다.

 

"......까짓거, 한 번 도전해보는 거죠."

 

그녀는 어느 한 가게에 눈길을 주었다.

괜찮아. 카레 가게를 가는 것과 같은 거야. 다를 건 없어.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발을 천천히 떼었다. 주변과는 다르게 느긋하게, 하지만 한 걸음 확실히. 팬의 응원도 없지만 그녀는 가게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여기 한 명이요!"

 

고깃집. 푸른 가을 하늘과, 청명한 그녀의 눈동자가 홀로 발자국을 남긴다.

 

 

 

---

 

 

 

"어머, 고기 드시고 오셨나 봐요? 손톱이 맨질맨질하네. 그리고, 평소에 관리를 꼼꼼히 하시나 봐요."

 

네일아트샵의 직원이 그녀의 손톱을 보며 감탄했다. 후미카는 자신의 손톱을 보고 고깃집에 갔다왔다는 걸 파악한 점원의 눈썰미에 감탄했다. 피부 관리는 손끝부터 발끝까지 프로덕션의 전문가에게 맡겨놓고 있지만, 네일아트 같은 걸 해본 적은 없다. 사기사와 후미카가 가지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다는 미시로 전무의 판단이 첫째 이유였고, 그녀 자신이 네일아트 같은 것에 흥미가 없다는 것이 둘째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치장한 적이 없는 거에요? 아유, 너무 아깝다~ 언니, 이런 고운 손은 좀 꾸며야 한다니까."

 

'아깝지 않아? 이런 손을 놀려둔다는 게. 내가 자주 가는 네일아트샵 있는데 소개해줄까? 병원 신세지던 시절부터 다니던 곳이야.'

 

직원의 찬사는 입에 발린 말이겠지만, 호죠 카렌의 말은 입에 발린 찬사만은 아닐 것이다. 손이 이쁘니까 네일아트 좀 하라고 조금 귀찮을 정도로 엉겨붙던 호죠 카렌보다 더 열성적인 직원이 손등에 침을 튀겨가며 예술적인 감성을 후미카의 작고 귀여운 손톱 위에 유감도 아쉬움도 없이 마음껏 그려내었다. 푸른 색 매니큐어를 베이스로, 마치 유화를 그리듯 몇 번인가 다른 색을 칠해가며, 더 미세한 붓으로 경계선을 칠하고 세세한 그림을 그린다.

 

"다 됐어요. 어유, 이쁜 것좀 봐."

 

".....밤하늘에, 별?"

 

"예. 이런 고운 손은 이 이상 장식하면 오히려 보기 안 좋아져요. 훌륭한 소재 그대로의 맛을 살려야죠. 일식처럼."

 

열 손톱에 칠해진, 검푸르스름한 밤하늘. 손톱 속 자그마한 밤하늘에 점점히 박힌 별. 마치 한밤중의 라이브를 떠올리게 한다. 수 많은 스포트라이트의 빛이 그녀의 푸른 눈 속에서 플래시백을 일으켰다. 매번 새로운 세계가 손가락 위에 들어왔다. 눈을 멀게 만들고 숨을 가쁘게 만드는 무대 뒤, 호죠 카렌이 반쯤 쓰러져선 말했다.

 

'살아있다고, 확인하러 무대에 오르는 거야. 너는?'

 

병상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세상과 마주하며.

 

".....손님? 저기요?"

 

"아... 죄송합니다.... 너무 예뻐서 그만....."

 

"어머~ 언니 안목있다~ 이쁜 언니가 안목도 이쁘..... 언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혹시....."

 

약간의 이야기 후에, 계산을 하고 가게를 뒤로했다. '날 알아보는 사람이, 서점 바깥에도 있을 줄이야 다른 동료들은 이런 경험을 매일같이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서점이 바깥보다 아늑하게만 느껴진다. 사람 대하는 게 서툰 그녀에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해오는 것은 기쁘긴 해도 곤란한 상황에 속할 것이다. 어쩌면 나갈 때 마다 옷을 바꿔야 할 지도 모른다. 그녀가 평상시에 입고 다니는 옷은 몇 종류 되지 않아, 금방 정체를 들켜버릴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그녀는 또 생각했고 주위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역 주변에는 여러 가게가 있었다. 지갑에는 돈이 넉넉하게 남아있다. 그녀는 방금 나온 네일샵보다 더 화려해 보이는 간판을 향해 들어갔다. 옷가게였다. 단화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었다. 프레데리카가 가져온 패션 잡지를 읽은 것은 어디까지나 읽을 거리가 없어서였지만, 역시 읽어둬서 손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음.... 손님 사이즈라면....."

 

고민하는 듯 한 점원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직물(織物)들의 숲을 즐겁게 거닌다. 마치 책이 잔뜩 있는 도서관을 걷는 것만 같아, 그녀도 모르게 흥겨운 스텝을 밟으며 콧소리를 내었다. 옷가게 안에 그녀가 부른 노래가 배경음 삼아 흐르고 있었다. 무표정하고 어두운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한 자락 걸렸다. 그녀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

 

 

 

"감사합니다!"

 

점원의 인사와 함께 노래방을 뒤로했다. 두세 시간 정도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노래 뿐만이 아니라, 동료들의 노래까지.

 

'노래방? 즐겁잖아. 사무소에서 지루하게 레슨하는 것 보단, 좋아하는 거 하면서 실컷 부르고 오는 게 더 즐겁잖아? 억지로 하는 것보다 효율도 좋을 거라고 전무도 말했다고."

 

오오츠키 유이는 노래방을 좋아한다. 혼자 가서 부를 정도로. 사기사와 후미카는 반복적인 레슨도 싫어하진 않았지만, 즐거운 쪽이 더 효율이 높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씌인 듯 고깃집에 네일샵에 옷가게에, 끝에 가선 혼자 노래방까지. 갑작스런 휴일, 책은 읽지 못했지만 하루를 무언가 충실하게 썻다는 기분이 그녀의 온 몸에 남았다. 다리를 아프게 잡아끄는 피로가, 이전에 느낀 적 없는 달성감과 고양감을 귀가열차 위에 흘려보내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물론 두 정거장 정도론 피로를 씻어낼 수 없어, 그녀는 집(정확히는 삼촌의 집)에 돌아가서 푹 쉬기로 했다. 무언가에 씌여선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저지른 것의 의미를 곰곰히 곱씹어 볼 생각이었다. 다리를 쉬게 두면서, 한 결 상쾌해진 정신으로 책을 읽는다면, 지금이라면 아까 넘어가지 않던 부분도 잘 넘어갈 것 같았다.

 

"아, 후미카. 어서오세요."

 

".......아나스타샤? 어째서?"

 

하지만, 갑작스런 방문자들의 등장은 그녀의 예정을 또 한 번 어그러트려놓았다.

 

"후미카 언니, 갑작스레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전 말리려고 했지만......" "프레데리카!" "보시다시피......"

 

"놀랐어?"

 

"예."

 

후미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나데가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후미카네 서점이 쉰다고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깜짝 파티를 준비한 거야."

 

"물론 계획 같은 건 없는 초☆즉흥적 파티!"

 

"아, 발안자는 항상 그랬듯이 프레데리카니까. 피해자는 항상 그랬듯이 아리스쨩이랑 나오고. 이 슈코님은 아무것도 안했다고?"

 

"와오~ 진범은 이 프레데리카가 범인이었습니다!"

 

"뭘 자랑스럽게 문법파괴하고 있는 거야.... 아, 서점에 새 만화책 들어왔던데 이따가 사가도 돼? 모으고 있던 거야"

 

"지금 린이 안쪽에서 요리 준비하고 있어. 아, 네일 이쁘네~ 어디서 했어?"

 

"카렌, 놀 시간 있으면 도와주지? 나랑 아냐랑 슈코만 지금 요리중이거든?" "꺄앙~ 린 너무 엄격해에~"

 

연락도 없이, 남에 집에 들어와서 깜짝 파티. 깜짝 파티니까 미리 알고 있으면 깜짝 파티의 정의가 설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 후미카가 갑작스럽게 닥쳐온 두번째 예정 변경을 맞이하곤 그저 입구에 서 있자, 아리스와 아냐가 후미카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혹시, 우리들... препя́тствие, 방해물입니까?"

 

"저, 전 무례하고 민폐니까 말리려 했는데...... 제가 끝까지 말렸어야 했는데....."

 

마치,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 같은 눈빛이었다. 후미카는, 이번에도 충동적으로, 그리고 즉흥적으로 둘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둘이 눈을 찔끔 감았다. 후미카의 손이 둘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천천히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둘의 눈동자에 후미카의 미소가 비쳤다. 푸른 두 눈동자가 두 쌍의 눈동자에 담겼다.

 

"아나의 취미는... 홈 파티였죠?"

 

"Да."

 

"그릇은, 선반 위에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곧 꺼내올테니. 아리스, 도와줄래요?"

 

"......네!"

 

그리고, 홈 파티가 시작되었다.

파티가 한창인 와중, 후미카는 소란스러운 곳에선 항상 그렇게 했던 것 처럼 책을 한 권 꺼냈다. 프로젝트 크로네의 사진이 박힌 책갈피가, 미처 읽지 못했던 이야기의 재개를 알렸다. 내일부턴 다시 소란스러워질 것이리라. 후미카의 눈 속에 예쁜 별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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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입니다. 한 번 후미카의 일상을 적어봤습니다. @갤에서 대회 한다길래 입상도 노려볼 겸..... 안되면 어쩔 수 없고요 데헤페로.

일상물이라는 건 어렵군요. 사실 일상물이 아닌 듯 한 느낌이지만...... 지루한 이야기가 아닐까 걱정이 앞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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