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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ckholm Syndrome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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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3, 2016 02:37에 작성됨.

주간 케이드 # 002
 
 
 
 
 
 
 
 
 
 
 
 
 
 
"네.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당신의 매니저를 하게 된 P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치하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앉아 있었다. 몸의 흔들림이 감정의 동요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건지 밤하늘처럼 검푸른 머리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아주 차분하게 녹음실 소파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으며 갈색 눈동자는 똑바로 P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기, 매니저가 붙은 이유는 알고 계신가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래서 당신이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던 차였습니다."
 
P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전해 들은 수많은 말들이 있었지만 지금 말하는 것은 들고 있는 카드를 쓸데 없이 사용하는 꼴이 되었다. 하지만 반드시 치하야에게는 매니저가 필요했고, 그런 이상 필요 없다고 밀려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설령 밀려난다고 해도 그것을 그대로 둘 회사 관계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죠, 저는 키사라기 씨의 매니저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들었습니다만."
 
원론적인 이야기. 의무가 있고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부탁이었다. 치하야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이다. 몇 바퀴 돌아서 치하야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해도 지금 표면에 나타난 말은 치하야를 전혀 배려하지 않고 있다. 일방적인 통보나 다름없는 행위인 것이다.
 
"저는 매니저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제는 카드를 내밀 때였다.
 
"하지만 키사라기 씨.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난 번의 콘서트 이야기인가요?"
"결정적인 계기였지만 그것만은 아닙니다."
 
수용인원 2만 여명. 그리고 한 자리도 빠짐없이 채워진 그 숫자. 거대한 공연장 한복판에서 첫 곡을 다 부르지도 못한 채 홀연히 사라져버린 한 가수. 30분이나 지체된 연락 구조 탓에 겨우겨우 연락되었을 때에는 이미 전원이 꺼진 상태. 일 주일 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녹음실에 나온 그녀에게 쏟아진 것은 온갖 잡소문들이 담긴 엄청난 양의 일간지 기사였다.
 
"저는 제가 완전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몇 번이고 말했습니다만."
 
정말 터무니없게도 이기적인 판단. 그렇게 P는 생각했다. 알량한 완벽주의가 회사에 되돌릴 수 없는 손해를 끼쳐버렸다. 당장 계약이 해지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회사가 내린 판단은 상당히 시혜적인 처사였다. 자사의 아이돌 그룹 담당 매니저이던 P를, 키사라기 치하야에게 단독 매니저로서 발령한다. 재앙과도 같았던 그 공연 이후 열흘만에 내려진 이례적으로 빠른 판단이었다.
 
"네. 그래서 키사라기 씨가 완전한 상태가 될 수 있도록, 제가 전심전력으로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판단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말하죠."
 
P는 자세를 고쳐잡아서 똑바로 앉았다. 여전히 치하야는 미동도 없었다.
 
"당신이 판단하는 게 아닙니다."
"저를 처음 보시는데도 지나치게 솔직하시군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 때와 같은 일이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회사 방침이 있었거든요."
 
잘못될 수밖에 없는 공연이었다. 공연 전 연습에도 한 곡을 채 부르지 못하고 연습을 무단으로 끝내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어떤 날에는 목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면서 아예 연습을 나오지 않는 일도 있었다. 콘서트 당일에는 치하야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공연 스탭도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연출은 대혼란이었고, 그런 어수선함 속에서 리허설은 진행되었다.
 
하지만 리허설은 놀랍도록 성공적이었고 공연은 그대로 강행되었고... 결과적으로 P가 치하야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제 손을 잡고 억지로 연습실에 불러내시기라도 할 건가요?"
"유감스럽게도 맞습니다."
"네?"
 
P는 마침내 결정적인 카드를 꺼내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서류 가방 안에 있는 노란 색의 파일을 꺼내들었다. 파일을 본 치하야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쓸데 없는 사내 징계 통보는 저리로 내보내고요,"
 
P는 정말로 쓸모없다는 듯이 앞에 있는 종이 한 장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넘겼다.
 
"이게 우리가 작성해야 할 새로운 매니지먼트 계약서입니다."
 
치하야가 본 적이 있는 계약서였다. 단 그 계약서를 오 년 전에 봤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오 년 전의 계약서와 달리 뒤쪽에 수많은 조건 조항들이 있었다.
 
"징계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으신 건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제가 회사원 노릇 오래 했지만 이렇게 긴 회의는 보지 못했거든요."
 
P는 그러면서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계약서의 낱장을 넘기고 있었다. 볼펜 머리를 공연히 책상에 톡톡 두들기는 건 그의 버릇이었다.
 
"키사라기 씨 상당히 위험했어요. 마침 계약기간도 끝나가는지라 그대로 거리에 나앉으실 수도 있었거든요. 결국 재계약 조건을 수정하는 걸로 회의가 가닥이 잡혔는데 조건 가지고 또 무슨 회의를 그렇게나 길게 하던지..."
 
톡, 톡, 톡. 치하야의 눈앞에 계약서의 내용들이 스쳐지나갔다. 대충 '정기적으로 사옥에 출근할 것,' '일 주일에 한 번 보고를 할 것,' '앞으로 기획하는 공연에 차질을 일으키지 않을 것' 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네. 그래서 앞으로 키사라기 씨는 모든 스케쥴에 저와 함께하셔야 하고요, 아주 멋진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 주일에 한 번 활동 보고를 하셔야 하는데 이건 다행히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부분이에요. 보고 같은 거 부담 하나도 갖지 마시고 그대로 있으시면 되고... 모든 스케쥴은 제가 관리해 드리고 아까 말씀드린 그 멋진 차로 자택까지 직접 모시러 가 드립니다. 물론 바래다 드리는 것까지요.
조금 시간이 일찍인 것 같으면 전날이랑 아침에 전화로 미리 말씀드릴 테니까 준비에 차질 없게 도와드릴 거고요, 스케쥴은 전부 회사에서 내려오는 대로만 할 거니까 작업할 시간 충분히 드리도록 할게요. 음... 아 그리고 보고 겸 해서 일 주일에 꼭 한 번은 저희 회사 사옥에 출근하셔야 하는데 언제가 좋은지도 나중에 의논해 봐야 해요. 지금 의논할 것까진 없구요.
아,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치하야는 입을 다물고 한동안 계약서를 집어든 채 멍하니 있었다. 말이 좋지 완전히 감금 생활이었다. 회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최후통첩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도 꽤나 말이 유창한 인간을 매니저라고 붙여 오면서까지 말이다.
 
"질문 없으시면 여기 사인하면 됩니다."
 
며칠 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가는 회사 사람들한테 아무런 중요함도 주지 않았다. 이러했는데도 저러했는데도 치하야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작품활동을 해 온 고고한 가희였다. 오히려 그러한 일을 겪었기 때문에 지금의 작품세계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치하야는 굳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오랫동안 묻어 두었던 감정을 다시 꺼낼 생각 또한 없었다. 그저 그녀는 혼자였고, 다행히도 서로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만을 요구할 뿐이었고 그렇기에 다른 것들이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은 아주 바람직한 관계일 뿐이었다.
 
 
 
 
* * *
 
 
 
 
-가수 키사라기 치하야 씨가 충격적이었던 그 콘서트 이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소속사인 케이지의 입구에서 포착되었는데요, 키사라기 씨는 입구에서 마주친 수많은 기자들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사적으로 친했던 아마미 하루카 씨의 사고사 이후 오 년 간 키사라기 씨는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는 행보를 보여 왔는데 그런 만큼 이번 신보는 마음을 다잡는다는 의미에서 대규모 콘서트 투어까지 준비된 대형 기획이었어요. 하지만 계속해서 마음 쪽으로 힘이 드니까 결국은 이런 결과가 나온 게 아닌가 싶네요.
 
-첫 콘서트가 대형 사고로 끝나면서 다음의 공연도 줄줄이 취소되고 환불 행렬에 케이지 사가 골치를 썩고 있다네요.
 
-화제의 키사라기 치하야, 그녀는 누구인가? 오늘은 키사라기 치하야 특집을 가지고 와 봤습니다. 10년 전인 2005년에 아이돌로 데뷔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키사라기 치하야 씨. 특유의 음색과 분위기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고 아이돌 은퇴 이후에 싱어송라이터로 화려하게 데뷔! 첫 음반부터 무려 25만 장을 팔아치우며 데뷔 앨범이 플래티넘이라는 무시무시한 성적을 내게 됩니다. 이어 내놓은 2집도 차트를 올킬하면서 음악방송 1위 석권! 판매량 20만 장을 내며 상승세를 이어갔습니다. 그 해 사이타마 슈퍼 아레나에서 열린 단독 콘서트에는 응모 당첨발표날에 티케팅 사이트가 다운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며 전량 매진이 되었고 당시의 열기는 어마어마했죠. 자료화면 보이시죠? ...
 
-아이돌 때부터 팬이었는데 빨리 돌아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노래 듣고 싶어요!
 
-콘서트 갔었는데 착잡하죠. 얼마나 힘들면 저럴까...
 
-한켠에서는 태도 논란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엄연히 연예인이고 프로인데 어떻게 그 큰 콘서트를 망칠 수 있느냐는 거죠. 특히 소속사 대표 Q씨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기대했던 팬들에게 사과 말씀을 드리며, 사태의 책임을 엄중히 물을 것'이라고 하였는데요. 아무리 완벽주의자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한테 민폐를 끼치는 건 조금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키사라기 치하야 씨의 복귀를 저희도 기원합니다.
 
-... 하지만 5년 전 아마미 하루카 씨가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키사라기 치하야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영혼의 동료라고 할 수 있었던 사람이고 생전에도 무척 친한 모습을 자주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슬픔 속에서 나온 3집은 평단의 엄청난 찬사를 들으며 1집의 기록을 훨씬 뛰어넘은 40만 장의 판매량을 보입니다. 그대로 화려하게 컴백! 이어 내놓는 OST나 콜라보 신곡마다 차트를 선곡하며 왕성한 작업량을 보이다가 최근 4집을 발표하고 그 활동을 이어나가려고 하고 있죠.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지만 최고의 젊은 싱어송라이터라는 자리는 당분간 이어갈 수 있겠죠? 이상 연예 리포트였습니다.
 
-늦은 가을비가 주륵주륵 내리는 아침입니다. 오늘 바깥에 나오시는 분들 반팔 옷은 조금 고민을 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낮 최고 기온이 17도로 예년보다 많이 낮은데요, 아침에는 8도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단단히 대비를 해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한동안 이런 가을 날씨가 이어질 전망인데요...
 
 
 
 
* * *
 
 
 
 
헤드폰을 벗자 치하야는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았다. 흡음재를 붙여 놓지 못한 작업실 한켠의 조그마한 창문이었다. 바람이 부는 건지 창문에 빗방울이 날아와서 툭 툭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녹음실로 들어가 본다. 문을 닫으니 다행히 소리는 들어오지 않는다. 녹음에는 문제가 없겠지만 불규칙한 소리가 작업실에 들어오는 건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마스터 키보드 위에 있는 쿠션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창문틀에 살짝 끼워넣었다. 여전히 소리는 났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작아진 소리였다. 이 정도면 헤드폰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치하야는 다시 헤드폰을 썼다.
 
작곡을 배우면서 하나씩 사모은 장비들은 어느새 그녀의 집에서 가장 큰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되었다. 녹음실 안의 그랜드 피아노도 함께였다. 최근에 교체한 흡음재에서는 그 흔한 접착제 냄새도 나지 않았고 알루미늄으로 만든 아날로그 믹서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앰프의 방열판에서 나는 희미한 단내가 작업실 안에 퍼져나갔다.
 
치하야는 다시 소리들을 정렬하기 시작했다. 악상과 함께 굽이치는 멜로디들이 치하야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한 마디를, 어떨 때는 한 음을 추가할 때마다 치하야는 계속해서 음악을 다시 듣기를 반복했다. 조금씩 형태들이 구체화되고 음악은 하나의 단단한 덩어리로 뭉쳐졌다. 빗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초인종을 계속해서 눌러도 치하야는 대답도 없었다. 휴대폰의 전원은 켜져 있는 것 같았지만 스무 번 넘게 전화를 해도 받는 일이 없었다. 자신이 치하야의 매니저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어먹지 않는 경비원을 겨우 설득시켰더니 이제는 이 문이 열리지 않는다. 재계약 후 첫날이니만큼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당하는 것은 귀찮은 일인 것이다.
 
"좀 받아요 키사라기 씨..."
 
P는 초조한 듯이 초인종을 누르면서 휴대폰을 잡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는 데에도 보안 카드를 찍어야 할 만큼 고급 맨션이라면 사람이 이렇게 틀어박혀 있을 때 바깥 사람한테 뭔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혼자 살던 노인이 죽었는데 이웃들이 몇 달이 지나서야 알아챘다는 섬뜩한 일화는 이런 맨션이라면 더더욱 실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집 주인 말고는 정당하게 들어갈 방법이 없으니까 말이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던 그 순간에도 치하야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움직이고 있는 사람에게 움직임이 없다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P의 인상은 완전히 그러했다. 그녀는 방송에서 보던 것 이상으로 딱딱했고 감정이 없었으며, 오로지 동요를 보였던 건 계약서의 내용을 볼 때만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행보는 완전히 로봇 그 자체였다. 사인에 있는 음표조차 각져 보였으며 사인을 마치곤 어떤 질문도 없이 계약서가 들어 있는 노란 봉투를 가지고 아주 각진 움직임으로 자리를 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받아요 받아..."
 
이내 P는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래도 나오지 않는다면 아마 P가 생각하는 몇 개의 나쁜 시나리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죽은 듯이 자고 있거나, 아니면 정말로 죽었거나. 그런 생각에 다다르자 P는 문을 어떻게든 열 만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 사이는 매우 견고했고 도어락은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경보음을 낼 것 같이 보였다. 사람들을 정말로 많이 만났지만 이렇게나 세상이랑 단절된 채로 두문불출하는 인간을 P는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작곡가들이 이런다는데 치하야는 그냥 가수이지 않은가.
 
"키사라기 씨! 키사라기 씨!"
 
이 쯤 되면 누구신데 여기 찾아왔냐고, 옆집의 문이 빼꼼 열릴 만도 한데 그런 일조차 없었다. 무려 1시간 째 P는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방의 전원을 내리자 살짝 나던 앰프 방열판의 단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미묘한 단내와 작업실 안에 깔아 놓은 카페트에서 나는 희미한 먼지 냄새와 금속들이 내는 미약한 비린내들. 모두가 치하야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그 말은 곧 장비를 교체할 때가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작곡 프로그램도 테마를 바꿔야 할 것 같았고 말이다.
 
작업실 문을 열자 불규칙한 쿵쿵 소리가 계속해서 집 밖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치하야는 잠깐 동안 집 밖으로 통하는 문이 어딘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쿵쿵 소리가 그 문에서 들린다는 것도 알아챘다. 아, 그러고 보니...
 
"누구세요?"
 
반갑고도 미운 얼굴을 보자 P는 버럭 화부터 냈다.
 
"누구긴 누굽니까 저지!"
"...죄송합니다. 잠시 나갈 채비를 할 테니 기다려 주시겠어요?"
 
치하야는 그 짧은 말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러니까 콘서트를 완벽하게 망쳐 버린 한 여가수가 회사의 징계 차원에서 철저한 일정 관리를 받게 되었다는 상황 같은 것이었다. 얼핏 쳐다본 휴대폰에서 부재중 전화 38건이라는 숫자를 본 듯도 하였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얼마나 걸립니까?"
"20분이면 됩니다."
 
그리고 치하야는 다시 문을 닫았다. 20분 만에 나갈 준비를 마치는 여자 연예인도 참 드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P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피워물려고 했다. 아차. 금연 건물이지. 라이터도 없이 생 담배만 입에 물고 P는 복도 창문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P는 언제나 자신을 회사원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돌 부문에 있을 때도 그랬고 아이돌들이 하나둘 자신의 손을 떠나갈 때도 그랬고 치하야를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 그 순간까지 P는 회사원이었다. 당연한 것이지만 가장 실천이 힘든 것이라고 P는 생각했다. 회사원은 회사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하고 그것 외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P는 그런 상황을 꿈꿔 왔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상사이고 부하 직원한테 일을 시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방금 면전에서 화를 낸 것은 자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사정을 배려해 달라는 무리한 요구이다. 어디까지나 회사의 일일 뿐이라고 설득하는 것이 치하야한테도 P한테도 나았다.
 
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맨션과는 다르게 이곳은 바깥으로 통한 창문은 전부 반대쪽에 있으니까 방음 하나는 철저할 것이다. 그러니 누가 문을 두드려도 안 들릴 수밖에는 없겠지. 다음에 또 이런다면 도어락 비밀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이윽고 맨션의 문이 열렸다. 치하야는 20분 만에 갈아입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꽤 말쑥한 차림이었다. 전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긴 속눈썹은 우아하게 솟아 있었고 새하얀 피부에는 아무런 잡티 하나 없었다. P는 키사라기 치하야가 아이돌 시절에는 패션 모델로 일하기도 했고 꽤 잘 나갔음을 떠올렸다. 이젠 저화질의 잡지 스캔으로만 남아 있지만 말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시죠."
 
꽤나 상쾌한 말투. 하지만 여전히 감정은 없었다. 그냥 그녀의 목소리가 상쾌한 것처럼 들리는 것이다. 큰 바다에서 짙푸른 색의 파도가 치는 듯한 목소리라고 누군가가 평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분명히 매력적인 목소리였고 화장을 안 했는데도 나오는 엄청난 미모는... 연예인다운 것이었다. P와는 상관이 없었다.
 
"네. 그러면 차로 모셔 가겠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말인데요."
"네."
"그냥 제 차를 타면 안 되는 것이었나요?"
"혹시 그 포르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저희 회사 주차장에서 등록 해제되었습니다. 못 들어갈 거예요."
 
그러자 치하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나 일일 뿐이라고 설득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치하야는 보안 카드를 들어서 엘리베이터에 찍었다. 그러자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오늘 스케쥴이 무엇인지는 전부 치하야와 P에게 공유된 상태였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전부 메일로 전달받은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이게 P가 받은 답장의 전부였다. 하지만 치하야는 아침부터 그것을 완전히 까먹었고 그 말인즉슨 앞으로 P가 치하야의 집 문을 두드릴 일이 꽤나 잦아질 거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것 또한 고려 대상에 넣으면 되는 일이다.
 
"키사라기 씨, 다음부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알겠습니다."
 
완전히 메일과 같은 말투였다.
 
 
 
 
 
 
 
 
 
 
 
 
 
 
 
 
 
조금 길게 써 보고자 합니다. 일단은 처음 8천 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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