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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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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0, 2016 02:55에 작성됨.

밤이라는 시간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에게 평소라면 잘 하지 않을 행동을 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알루미늄 캔 위에 밀감(アルミ缶の上にあるミカン. 캔과 밀감의 발음이 유사함을 이용함.)... 큭큭.."

 

고오급 유우머를 치게 된다거나. 실은 딱히 밤이라 그런거라기 보단 보통 이런건 남이 있으면 자제하는데 아무래도 정신줄을 놓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프로듀서 씨, 괜찮으신가요?"

 

옆에서 녹색 옷의 아가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본다. 남을 걱정해주는건 좋지만 막상 본인 얼굴에도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역력하다.

수 일에 걸친 라이브 퍼레이드는 준비기간부터 엄청난 양의 서류와 일거리를 가져왔고 그 결과가 바로 저 얼굴이다.

 

"자, 서비스로 스테드리 드릴테니까 힘내주세요."

 

나는 감사를 표하며 스테드리를 받았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있자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시계를 보니 이미 10시가 넘어가 있다. 착한 어린이라면 이미 꿈나라로 갔겠지만 애석하게도 난 착하지도 않고 어린이도 아니다. 그리고 어른에게는 어른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원래라면 업무의 달인인 치히로 씨가 왠만한 일들은 다 처리해놨겠지만 나와 우리의 사무원을 이 시간까지 이 곳에 묶어놓은 라이브 퍼레이드 라는 녀석은 이번에 처음 시도하는 이벤트다. 즉, 상당한 시행착오와 변경을 거치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스케일도 일본 전체를 망라하는 초대형 이벤트인 덕분에 일의 양은 평소의 제곱의 제곱을 넘어가버렸고 결국 오늘 오후에 출장을 갔다온 나까지 남아서 서류를 붙잡아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고약한 노릇이다.

 

"쁘띠슈를 먹어도~ 서류가 줄지 않아~"

 

나도 모르게 노래가 나왔다. 뒤늦게 자각하고 옆을 슬쩍 보니 녹색 사무원이 고개를 푹 숙이고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들으셨죠?"

 

"...네."

 

생각보다 반응이 너무 격렬하다. 왠지 장난기가 돌은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있는 사무원에게 속삭였다.

 

"오~네가이 신~데렐라~"

 

"풋! 그만.. 그만해주세요..!"

 

아무래도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음치라는건 자각하고 있지만 저렇게 대놓고 웃어버리면 이 쪽도 계속 해주고 싶어진단 말이지. 하지만 배를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계속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이상 했다간 쓰러질지도 모르겠다.

내 손으로 일손을 줄이는 짓을 하고 싶진 않으니 장난은 그만 치기로 하고 나는 서류에 눈을 돌렸다. 이따가 거의 눈도 못붙이고 출장을 가야 하는만큼 지금 주어진 이 시간에 최대한 해놔야 한다.

 

"프로듀서 씨.. 노래 진짜 못하시네요."

 

십여 분 후, 드디어 진정이 된 치히로 씨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옆에서 웃느라 정신이 없던걸 생각하니 왠지모르게 심통이 났다. 이유가 나 때문인건 알지만 왠지 모르게랄까. 뭐, 실은 그냥 핑계지만.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꿈처럼 아름다워서 눈물이 나~"

 

"푸흡..!!"

 

제대로 들어갔다. 이젠 거의 운다고 봐도 될 정도로 격하게 웃고 있다. 왠지 모를 보람이 느껴지지만 저대로 놔뒀다간 아무래도 웃다가 진이 다 빠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나는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엔 아이들이 선물해준 빵이나 케익, 그리고 꾸준히 모아둔 스테드리가 잔뜩 들어있었다. 그 중 하나를 꺼내서 배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녹색 사무원의 책상 위에 슬그머니 내려놓고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자자, 그만 웃고 일합시다. 저 이따가 다시 출장가야 되요."

 

"프로듀서 씨 때문이잖아요!"

 

치히로 씨가 억울한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다음 퍼레이드 때 공연할 노래를 고르던 내 귀에 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프로듀서 씨. 이거 프로듀서 씨가 놓고 간건가요?"

 

"그거 드시고 빨리 일해주세요."

 

"하지만 이거, 프로듀서 씨가 이벤트를 위해 매일매일 모으셨잖아요. 제가 마시면 안되요."

 

이상한데서 고지식한 사무원이다. 스테드리가 이벤트를 위한거고 사무원이 이벤트를 뛰는 프로듀서를 돕는 역할이라면 사무원이 이벤트를 뛰는 프로듀서를 돕기 위해 스테드리를 마시는 것은 양 쪽의 목적에 맞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굳이 잘난척 떠드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는지라 나는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줬다.

 

"Li~ving in a dream. I'm feeling the light of fantasy~"

 

"아, 알았어요! 마실게요! 마실테니까 그만해주세요!"

 

떨떠름한 표정으로 스테드리를 다 마신 사무원은 조금은 피로가 풀린듯한 얼굴로 다시 책상에 앉았다. 그녀가 일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도 다시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슬슬 배가 출출해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정각은 애저녁에 넘어갔다. 이따금 걸려오던 전화도 이젠 오지 않는걸 보니 왠만한 사람들은 다 퇴근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녹색 사무원을 찾았다. 그녀는 고장나기 직전의 프린터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이 놈의 회사는 돈도 많이 버는 주제에 저런 비품 지출엔 정말 인색하다.

 

"치히로 씨. 그건 이따가 제가 할테니 일단 뭣 좀 먹읍시다."

 

"예? 아, 벌써 시간이.."

 

치히로 씨는 시계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인 야식 시간을 꽤 넘겼으니 놀랄만도 하겠지. 게다가 이 시간이면 사내식당이 문을 닫는다. 아무래도 편의점이나 야간에 여는 식당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머, 사내식당이 문을 닫았겠네요. 곤란하네.. 프로듀서 씨. 혹시 생각해두신 곳이라도 있나요?"

 

말은 곤란하다고 하는데 표정이 전혀 곤란해보이지 않는다. 뭔가 생각해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검색을 위해 띄워놓은 인터넷 창을 내려놓고 대답했다.

 

"아니오. 아무래도 찾아봐야 하나 했습니다만."

 

"그러면 제가 싸온 도시락이라도 드실래요? 실수로 양을 좀 많이 만들어서 같이 먹어줄 사람이 필요했거든요."

 

왠지 엊그제 미오가 후미카에게 빌려보던 책에서 나왔던 것 같은 말을 하며 치히로 씨는 사물함에서 상당히 큰 크기의 도시락통을 꺼내왔다. 조금 많이 만든게 저 정도면 평소엔 얼마나 먹는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애써 만든걸 나눠주신다니 고마워서라도 먹어주는게 예의겠지.

 

"그럼 나중에 제가 밥 한 끼 대접하는 것으로 하고 감사히 먹겠습니다."

 

"프로듀서 씨도 참.. 그렇게 딱딱하게 안하셔도 되요. 어쩌다 많이 한 것 뿐이라니까요."

 

"친할 수록 이런건 확실히 해둬야 하니까요. 라이브 퍼레이드가 끝나는 날, 일정 어떠십니까?"

 

"후훗. 저야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 좋아요."

 

치히로 씨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보였다. 공짜밥은 나라도 좋긴 하다. 웃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왕 하는 김에 모두 다같이 밥을 먹는 것도 괜찮은 생각 같았다.

 

"그럼 그 날 밤으로 하지요. 축하도 겸해서 회식을 하면 되겠군요."

 

"예? 아.. 예. 그게 좋겠네요."

 

치히로 씨는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텐션이 내려갔다. 뭔가 잘못한건가 고민하고 있는데 어느새 도시락을 휴게실 책상에 차려놓은 치히로 씨가 나를 불렀다.

 

"프로듀서 씨. 와서 식사하세요."

 

"예. 지금 갑니다."

 

나는 PC를 절전모드로 놓고 바로 휴게실로 향했다. 간단히 배만 채우고 다시 일을 해야 할테니 그 외의 정리는 필요 없다. 하지만 휴게실에 도착한 내가 본 것은 간단한 도시락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어.. 아까 도시락이라고 하셨죠?"

 

"에이~ 신경쓰지 마세요. 자, 식기 전에 어서 드세요."

 

약간 과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정말 보통이 아니었다. 한지 얼마 안된 듯 윤기가 흐르는 쌀밥에 요즘 도시락통은 보온도 되는지 맑은 된장국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오른쪽에 있는 고등어 구이는 불조절이 필요한 음식임에도 깔끔하게 구워져서 담백해보였고 가운데에는 양배추, 오이, 청차조기 등의 야채에 드레싱을 한 샐러드가, 왼쪽에는 닭고기에 토란, 당근, 우엉, 죽순 등 다양한 야채를 넣고 조린 치쿠젠니가 있었다. 영양 밸런스를 신경쓴 티가 나는데다 재료로 쓰인 말린 표고버섯과 다시마는 장시간 물에 불리는 시간이 필요한 재료들이다. 아무리 봐도 간단히 만들 수 없는 구성에 벙쪄있는 나를 보더니 치히로 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혹시 못드시는 음식이라도 있나요?"

 

"아.. 아니오. 딱히 걸리는건 없네요. 하나같이 맛있어보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빨리 먹어요."

 

아무래도 이 것에 대한 보답을 하려면 지갑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른 생각을 하기엔 눈 앞의 음식의 유혹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

 

 

 

 

 

창문 밖이 약간 밝아진 느낌이 드는 시각. 에베레스트를 연상케하던 서류의 산도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으~ 끝났다~ 치히로 씨. 괜찮으십니까?"

 

나는 기지개를 켜며 녹색의 사무원에게 말을 걸었다. 이 쪽을 돌아보는 얼굴은 말그대로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실은 치히로 씨는 오늘 오프다. 며칠간 그녀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을 걱정한 사장님이 치히로 씨에게 강제로 쉴 것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가 고생하고 있는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어제 일찍 퇴근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을거다.

 

"예. 전 괜찮아요. 이따 집에서 자면 되니까요. 그나저나 프로듀서 씨는 운전도 하셔야 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피곤하기야 하지만 누구처럼 며칠 밤 센 것도 아니고 이거 가지고 힘들다 그러면 안되지요."

 

"제가 좀 더 도와드리면 좋을텐데.."

 

"거울 보여드릴까요? 제가 애들한테 늘 하던 말을 당신한테까지 하고 싶진 않은데요."

 

"하지만.."

 

"노래 부릅니다?"

 

"..프로듀서 씨, 그거 정말 치사한거 아세요?"

 

"제가 치사해져서 무리 안하신다면 100곡이라도 불러드리죠."

 

자기는 더 무리하면서.. 라고 중얼거리는 치히로 씨의 말을 한귀로 흘리며 나는 시계를 봤다. 조금 이르지만 좀 일찍 가는게 좋으리라.

 

"서류들 이 쪽에다 정리해놓고 갈테니까 그거 끝나시면 바로 가세요."

 

"벌써 가시게요?"

 

"벌써라니요? 좀 있으면 해가 뜰 참인데. 저 신경쓰지 마시고 치히로 씨나 빨리 끝내고 가서 주무세요."

 

내 말을 들은 치히로 씨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오늘의 로그인 보너스는 이 것입니다. 라는 농담은 재미없으니까 하지 마세요."

 

"아니거든요! 뭔가요, 그건? 이상한 말씀 하시는거 보니 역시 피곤하신거죠?"

 

역시 되지도 않는 개드립은 치는게 아닌 모양이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다간 레벨 5짜리 잔소리포를 맞을거 같으니 작전상 후퇴를 해야겠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전 먼저 갑니다~"

 

"프로듀서 씨, 잠시만요!"

 

잽싸게 도망치려는 나를 치히로 씨가 불러세웠다. 혹시 혼나는가 싶어 조심스럽게 돌아보니 그녀는 어느새 내 뒤에 와서 뭔가를 내밀고 있었다.

 

"이거 가져가세요."

 

진짜 로그인 보너스는 아니겠지? 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치히로 씨의 손에 있는 물건을 봤다.

 

"부적.. 인가요?"

 

"예. 프로듀서 씨가 평소에 고생하시니까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는 의미로 하나 사봤어요."

 

"호오. 감사합니다. 기왕 받은거 저도 하나 그럴싸한 부적으로 사오지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저도 하나 있으니까요."

 

그녀가 내민 반대쪽 손에는 내가 받은 것과 똑같이 생긴 부적이 있었다.

 

"...그러시다면야. 그럼 갔다 오는 길에 기념품이라도 하나 사가지요. 뭐 원하시는거라도 있으십니까?"

 

"괜찮아요. 그냥 무사히 돌아오시기만 하면 되요."

 

"음.. 누가 들으면 전쟁터에 나가는 줄 알겠군요. 일단 슬슬 아슬아슬할 것 같으니 가보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꼭 일찍 들어가세요."

 

"예. 조심히 다녀오세요."

 

나는 스마트폰의 시계를 확인하며 사무실 문을 열었다. 나가면서 문을 닫는 내 눈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문이 닫힐 때까지 서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녹색의 사무원이었다.

 

 

 

 

 

그리고, 대관처로 이동하던 나는 신호를 무시하고 튀어나온 트럭과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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