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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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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0, 2012 18:07에 작성됨.

리츠코를 골려준 것으로 잔뜩 분위기가 살아버린 나와 야요이는 ‘방긋방긋 동화’에서 웃긴 영상들을 찾아보며 다시 배를 잡고 굴렀다. 야요이는 웃다가 힘이 빠져버렸는지 내 침대에 살짝 걸터앉고는,

“아. 침대는 역시 푹신푹신하네요.”

라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물론이지. 자. 이런 것도 된다고.”

의자 위에 올라가 프로레슬링 선수처럼 폼을 잡고는 그대로 점프해 침대 위로 떨어졌다. 그랬더니 침대 위에 살짝 걸터앉아있던 야요이는 그 반동으로 침대 밑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우왓. 야요이. 괜찮냐?”

깜짝 놀라서 후다닥 달려갔다. 그러자 야요이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게 또 귀여워 보인 탓에 나도 모르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더니, 그게 또 전염이 되어 둘은 마주보며 신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야 뭐 원래 분위기를 잘 타는 성격이고, 야요이 역시 항상 웃음을 머금고 있는 아이지만, 오늘은 정말 둘 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웃게 되는구나.
웃다가 눈물까지 맺혀버린 야요이는 웃음을 그친 후 심호흡을 하며 눈물을 닦고는, 입가에는 아직도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야구선수 씨 정말 재미있는 분이셨군요. 물론 그 전에도 느끼고 있었지만!”

“아니. 원래 이렇게까지 웃지는 않는데 오늘은 그냥 분위기가 산다고 해야 하나. 이런 시간에 집에 손님이 찾아온 것도 정말 오랜만이니까.”

“에헤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저… 근데 오늘 울었던 건 이오리쨩에게 말하면 안돼요? 도, 동생들한테도!”

“알겠다. 이오리에겐 말 안할게. 그리고 난 네 동생들 만나본 적도 없어. 아까 너희집에서 사진으로는 봤다만.”

“제 동생들. 귀엽죠?”

“그래. 다들 귀엽더라. 안 그래도 이오리랑 가족사진 보면서 그랬어. 다들 야요이 널 닮아서 귀엽다고.”

“절 닮아서요? 에헷. 저. 야구선수 씨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들어서 진짜 기쁠지도!”

정말로 기쁘다는 듯 웃는 야요이가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외동아들인데다,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누나는 있었지만 동생은 없었기에, 어린애들한테는 진짜 약한데 말이다.

“…오빠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요.”

“난 잘 모르겠는데. 누나가 있긴 하지만 친누나는 아니라서.”

“저. 어릴 때부터 계속 맏이였으니까요. 동생들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누나가 되자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계속 힘내왔어요.”

힘들었겠구나. 집안 사정도 그다지 좋지 않은데 말이다. 얼핏 듣기로는 부모님이 모두 늦게 들어오신다고 했으니, 거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한 셈이나 다름없다. 그것도 다섯 명의 동생을 둔.
14살이라면 아직 어리광부려 될 나이인데 말이지. 한 살 어린 아미와 마미라는 케이스도 있고.

“야요이는 참 대단한 것 같네. 나라면 너처럼 못했을지도 몰라.”

그러고 보면 야요이를 처음 만난 날에도 나보다 더 어른이구나. 라고 생각했었지.
내 말에 야요이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요즘 야구선수 씨가 항상 차도 태워주시고, 오늘처럼 친절하게 대해주시니까,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야구선수 씨 같은 오빠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할 때도 있어요.”

“그거 영광이네. 현역 아이돌에게 이상적인 오빠상이 되다니. 사실 나도 야요이 같은 여동생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만.”

“저희 두 사람. 비슷하네요.”

“그렇네. 뭐. 야요이만 좋다면 날 오빠같이 생각해도 좋아.”

“정말인가요?”

“물론. 나쁠 건 없지. 오히려 좋지.”

야요이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서 깡충 뛰더니,

“그럼, 가끔은 야구선수 씨를 오빠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

두근.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볼래. 그 호칭을.”

“오빠.”

야요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질 정도의 충격이었다. 이게 오빠라고 불리는 기분인가! 내가 꿈꿔오던 여동생의 환상이 드디어!

“그래. 야요이… 이 오빠는 참 기쁘단다.”

나도 모르게 야요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야요이는 웃는 얼굴 그대로 눈을 감고 내 손에 머리를 맡겼다. 그러더니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귀엽게 하품을 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1시가 넘었군. 야요이라면 이제 잘 시간이고, 나 역시 내일 경기를 위해 슬슬 잠이 들어야할 시간이다.

“자. 그럼 불러볼까.”

“에? 부르다니 누구를요?”

“알게 될 거다.”

곧바로 번호를 눌렀다. 이 녀석. 자고 있지는 않을까. 만약 자고 있는 거라면 조금 실례를 저지르게 되는 일인데.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린 다음 드디어 타겟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구선수 씨? 이 시간에 갑자기…]

목소리를 들어보니 자다 일어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좋지. 나는 일부러 한손으로 코를 막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타카츠키 야요이가 우리 집에 있다. 그녀를 구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오도록. 시간은 그리 많지 않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후후후.”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호오. 아직 감이 안 잡히나? 그렇다면 좋다.”

나는 누구와 통화하는 건지 묻고 싶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야요이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작은 목소리로 최대한 불쌍한 어조로 도와달라고 말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자 야요이는 내 주문을 정확히 소화해냈다.

“도, 도와주세요옷-!”

그리고 바로 그녀에게서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자. 들었지?”

[타, 타카츠키 양에게 대체 무슨!]

“그러니까 빨리 오라고.”

전화가 끊긴 다음, 옆집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과 우리 집 문이 두들겨지는 그 타이밍이 정말 빨라서 놀랐다. 내가 놀랐으니 야요이는 오죽하겠는가. 집에 혼자 있었을 때의 무서운 기분이 불쑥 고개를 내밀었는지, 야요이는 후다닥 내 등뒤로 숨었다.

“뭐하니.”

“아, 아니. 저. 놀라서. 누, 누군가요?”

“너도 잘 아는 사람.”

“에에?”

낄낄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더니, 흰 반팔 티와 푸른색 반바지 차림의 치하야가 그야말로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서있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만나고 가장 극적인 감정변화가 아닌가 싶다.

“어, 어떻게 된 건가요?”

“납치.”

“에, 에에엣???”

“뻥이야.”

“앗. 치하야 씨였네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내 등 뒤에서 머리만 빼꼼히 내민 야요이는 치하야를 보고 반갑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 타카츠키 양. 괜찮아?”

“네. 방금은 야구선수 씨가 장난친 거에요.”

야요이의 말을 들은 치하야는 힘이 빠진다는 듯 어깨를 힘없이 늘어뜨리더니 곧 나를 보며 화를 버럭 냈다.

“놀랐잖아요! 정말.”

“미안.”

“그런데 타카츠키 양은 이 시간에 어째서?”

“설명하자면 긴데… 일단 안으로 들어와. 문 계속 열어놓고 있다간 모기 들어온다고.”

“…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처음엔 약간 망설이는 것 같던 치하야는, 완전히 마음을 놓은 모습으로 집 안에 들어와 있는 야요이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이후로는 저번 하루카와 유키호가 왔을 때처럼 방석을 하나 주고 앉게 한 다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고 보니 네 번째로 우리 집에 온 아이돌이 되는군. 내 정신건강상 네 번째가 마지막이 되었으면 하는데.
내 모든 설명을 들은 치하야는 어쩐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타카츠키 양. 혼자 자는 것이 무서웠던 거야?”

치하야의 질문에 야요이는 자기가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그녀답지 않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쿠훗!”

“노, 놀리지 말아주세요!”

“아니. 그런 의미로 웃은 게 아니야. 타카츠키 양. 왠지 귀여워서…”

하긴. 항상 밝은 분위기의 야요이가 그런 걸 무서워하는 건 귀엽지. 놀림거리라기보다는.

“야요이는 씩씩하니까 그런 건 혼자 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이미지니까. 치하야가 웃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사실 겉으로 보기에 씩씩한 아이일수록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소리도 있지만.
야요이는 내 말에 양 볼에 바람을 집어넣고는,

“사, 사실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다구요!”

“오호. 그랬구나. 그럼 밤중에 전화 걸어서 엉엉 울었던 건 어디의 타카츠키 야요이이려나.”

“그, 그건 얘기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리고 엉엉 울지도 않았어요!”

“푸훗! 우후훗… 저, 정말 전화로 그랬단 말이에요?”

“그렇다니까. 야구선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

오늘은 참 많은 것을 보게 되는구만. 야요이가 우는 거라던가, 치하야의 놀란 표정이라던가, 치하야가 웃는 것이라던가.
야요이가 내 팔을 두들기는 것을 멈추고, 치하야의 웃음소리도 잦아들자, 이제 내가 치하야를 부른 이유를 설명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시간도 너무 오래 지났고.

“어쨌든, 치하야 널 부른 이유는 다른 게 아냐. 아무리 야요이라도 여기서 재우긴 조금 그러니까. 치하야 네가 야요이를 너희 집에서 하룻밤 재워줬으면 하는데.”

애초에 이걸 염두에 두고 야요이에게 하루 묵을 짐을 챙겨오라고 했었다. 치하야는 내 집 바로 옆 호니까. 흘끗 보기에 그 무뚝뚝한 치하야가 야요이 얘기만 나오면 꽤 관심있어 하는 것 같이 보였으니 하룻밤 정도는 재워 주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가 틀리게 본 것이라고 해도 같은 사무소 아이돌인데 설마 거부할까.

“네. 문제없어요. 괜찮을까. 타카츠키 양.”

“치하야 씨와 같이 자게 된다니. 왠지 두근거리네요!”

“그럼 이걸로 됐구만. 빨리 돌아가서 자둬. 벌써 많이 늦은 시간이니까.”

“네에-!”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응. 이야. 아깐 정말 놀랐다고. 치하야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은. 놀라는 표정 귀엽던데?”

“귀, 귀엽다니 무슨 말씀을! 장난은 여기서 끝내주세요.”

“네이. 그렇게 하죠. 그럼 잘 자라고.”

고개를 꾸벅 숙이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준 다음, 문을 닫고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빠라… 그것 참 좋은 단어로구나.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가 아닐까.
물론 실제로 여동생을 둔 남자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음… 그래.
나 지금 뭔가 생각났어.



8강전 첫 경기. 오늘 부터는 하루에 일정이 끝나게 된다. 오늘 이기면 바로 내일 4강전, 또 이기면 그 다음날 바로 결승이니까. 조금 더 긴장감을 가지게 된다고 할까.

우리 팀과 맞붙을 상대는 현에서 꽤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팀이다. 그래봤자 사회인 야구팀이지만, 그래도 팬의 수라는 건 은근히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뭐. 그래봤자 나에겐 그 숫자를 간단히 압도할 수 있는 아이돌들이 있지만.

“야구선수 씨. 비록 소리 높여 응원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라도 야구선수 씨의 선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상대 팀의 배트걸을 맡게 된 타카네가 시선이 없는 틈을 타 내게 다가와 살며시 말했다.

“아. 고마워. 꼭 이길 테니까. 눈총 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티는 내지 말고.”

“후후훗. 알고 있습니다.”

“다들 이렇게 응원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내가 그렇게 너희들에게 힘이 되어준 것도 아닌데.”

“충분히 힘이 되어주신답니다. 이번 일을 맡게 된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야구선수 씨 덕분이고, 귀찮으실 텐데도 저희의 다리가 되기를 서슴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아니. 너희들 태워다 주는 건 정말 별거 아닌 일이야. 그까짓 것 가지고 힘이 된다니.”

“후훗. 친절하신 분. 야구선수 씨께서 생각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 저희들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이 더운 여름날, 땀을 흘리며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고, 시간도 훨씬 단축시킬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뭐…”

“저뿐만 아니라 765프로의 모두가 야구선수 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사실이라면 그거 영광인데.”

“사실이랍니다. 그럼. 시작시간이 가까워졌으니 저는 이만.”

“아. 수고해.”

타카네가 돌아가고, 나는 들고 있던 배트로 스윙 연습을 몇 번 해보았다.

“꺄앗-!”

“응? 우왓! 하루카?”

아마도 내 뒤에 있었던 건지 하루카가 깜짝 놀라는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나 역시 혼비백산해서 하루카에게 달려갔지만,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미안. 하루카. 뒤에 있는지 모르고.”

“아, 아니에요. 제가 부주의해서…”

“자. 잘잘못은 나중에 따지고 일단 일어나. 너 지금 치마 입고 있잖아.”

“읏!”

하루카는 깜짝 놀라며 살짝 말려 올라간 치마를 정돈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는 다시금 한손으로 합장하는 자세를 취했다.

“미안해.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다.”

“에헤헤… 미안해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저 원래 잘 넘어지고.”

“다 큰 애가 그렇게 잘 넘어지면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가해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조심해. 다른 때도.”

“저도 노력은 하고 있는데…”

“노력하고 있다면야. 언젠간 성과가 있지 않을까.”

“그렇겠죠?”

“오늘은 네가 우리 팀 배트걸인가보구나. 배트걸. 은근히 힘들지?”

“의외로 힘드네요. 계속 왔다갔다 해야 하니까요.”

“내 타석에서는 될 수 있으면 내가 챙기고 싶지만, 경기 진행에 방해가 되니까 말이야. 사람들 보는 눈도 있고.”

“걱정해주셔서 고맙지만, 괜찮아요. 계속 왔다갔다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운동도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면 나쁘지 않아요.”

“긍정적이라서 좋겠구나. 그렇다고 또 넘어지진 말고.”

“윽. 안 그래도 사실 저번에 하다가 몇 번 넘어져버려서… 배트에 걸려버린다던가 해서 말이죠…”

“그것 참 고생이구만. 조심하라고. 아. 슬슬 진짜 시작하겠다.”

“힘내세요! 저. 응원할 테니까요!”

상호간 인사를 위해 그라운드로 올라가려다가, 생각난 것이 있어서 하루카에게 다시 돌아왔다.

“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그… 음. 뭐라고 할까. 내 입으로 말하긴 그런데. 나. 너희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어?”

내 질문에 하루카는 물어볼 것도 없다는 기세로 단번에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래… 대답해줘서 고마워.”

흐음… 그렇다면 정말 한 번 말해볼까? 경기 끝나고 말이다.
일단은 지금 있을 경기에 신경 쓰자. 여기서 떨어졌다간 끝장이니까.



경기는 의외로 난타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사실 진짜 아마추어 야구라면 난타전이 정상이긴 하지만, 저쪽도, 이쪽도 1선발 카드를 들고 나왔는데 너무나도 쉽게 공략되어 두 팀 모두 불펜을 탈탈 털어서 내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6회에 벌써 9대8. 이렇게 되면 이겨도 이긴 게 아닌데. 바로 내일 있을 다음 경기가 문제다.

“어이구… 이눔들아! 오늘 지면 내일은 다 같이 우리 쌀집이나 도와줄 생각혀!”

난타를 얻어맞고 일찌감치 쉬고 계신 우리 팀의 1선발 쌀집 아저씨가 다 죽는 소리를 하며 소리쳤다. 오늘 4타수 3안타 3타점을 기록하고 있는 나는 슬그머니 아저씨에게 다가가 나는 빼달라고 농을 쳤다가 ‘벌써부터 질 생각이냐, 자슥아!’라는 소리만 듣고 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분위기를 확 띄울 수 있는 플레이가 필요한데. 뭐. 다들 인정하고 있는 일이지만 이 팀에서 그런 플레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적어도 타자들 중에서는. 다음 타석에서 내가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 관중석에 미우라 씨도 있고 말이다. 덤으로 아미와 마미도.

여기선 홈런보다 상대의 사기를 확 꺾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물론 홈런도 충분히 사기를 꺾지만. 과연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중에 어느새 내 다섯 번째 타석이 다가왔다. 공교롭게도 투아웃 만루상황이었다. 스코어는 그대로 9대8. 아슬아슬한 리드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점수를 확 벌리면 좋긴 하겠는데. 그렇다고 만루 홈런을 노리기에는 조금 상황이 좋지 않다. 괜히 퍼올렸다가 플라이라도 당하면, 덕아웃에 돌아오는 즉시 엉덩이를 걷어차이겠지. 그렇다면 뭐가 좋을까…

그러던 내 눈에 나를 의식한 건지 내야와 외야수비가 살짝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걸 본 내 머릿속에 바로 답이 나왔다.
초구를 그냥 보내고 타임을 요청한 다음, 팔꿈치 보호대를 다시 착용하는 척하면서 3루에 있는 코치에게 슬쩍 사인을 보냈다. 제발 내 의도를 이해하길 바라면서.
그리고 다시 타석에 섰다.

2구에 곧바로 기습번트.
2아웃 만루에서, 그것도 번트 하나 제대로 못 대는 사람이 수두룩한 사회인 야구에서, 그것도 32강, 16강 2경기에서 장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내가 타석에 섰는데 설마 스퀴즈를 대리라고는 예상 못했겠지. 예상대로 내야진이 허둥대기 시작하고, 1루 쪽으로 굴러가는 공을 투수가 잡긴 했지만, 3루 주자는 벌써 홈에 육박했고, 1루수는 베이스 커버도 들어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투수는 급했던 나머지 그대로 송구를 한 것 같다.
1루로 달리고 있던 내가 그 상황을 어떻게 아냐고?
투수가 던진 공이 악송구가 되어 내 머리를 강타하고 높이 솟아 외야까지 굴러가버렸기 때문이다. 진짜 ‘악’소리가 나올 정도로 아팠지만, 눈물이 찔끔 나오는 걸 참고 2루까지 달렸다. 외야로 굴러간 공을 우익수가 잡았을 때는 이미 1루 주자가 홈을 밟기 직전인 상황이었다. 스코어는 12대8. 내가 생각했던 최고의 시나리오였다. 홈런을 맞아 점수를 먹는 것보다 자신들의 실책으로 인해 점수를 먹었을 때 상대의 사기는 훨씬 더 떨어지게 된다. 2루에서 심판이 타임을 선언하는 걸 보고 헬멧을 벗어 뒤통수를 만져보니 역시나 혹이 나있었다. 어쩐지 더럽게 아프더니… 그래도 3점 플러스알파를 혹과 맞바꾼 거면 그럭저럭 괜찮지.

나중에 확인해보니 내 스퀴즈는 원 히트 원 에러로 기록된 모양이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상대 팀은 그 이후 급속히 무너져 9회말이 끝났을 때의 스코어는 16대9로, 우리 팀의 대승이었다. 오늘 나는 홈런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16강전 때 까먹었던 타율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나는 하루카와 타카네를 데리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 미우라 씨와 아미, 마미를 만났다.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머리는 괜찮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미우라 씨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하필 송구가 머리를 때릴 게 뭐람.

“아… 괜찮습니다.”

“어지러운 곳은 없으시죠?”

“물론이죠. 멀쩡합니다. 전 어디든 튼튼하니까.”

“응~후~후.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아미가 짓궂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내 머리를 톡 건드렸다. 근데 그곳이 하필이면 정확하게 공에 맞았던 곳이었다.

“아얏! 임마. 아프잖아!”

“어디든 튼튼하다고 말했던 사람은 선수오빠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젠장.”

“야구선수 씨. 괜찮다고 하시지 말고 어떻게든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보시는 게…”

“아. 괜찮아. 타카네. 맞은 다음에 감독님이 대충 봐주셨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야. 현역시절에 빈볼은 종종 맞아봤으니까. 자. 사무소까지 데려다줄게.”

인원이 인원인지라 뒷좌석에 네 사람이 타게 되었는데, 역시나 아이돌인지 네 사람이 뒷좌석에 타도 별로 불편해하지 않을 정도로 자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사무소에 도착하니 다들 모여 있었다. 열두 명. 리츠코까지 열세 명이 모두 모여 있는 건 요 근래엔 자주 볼 수 없었는데. 그냥 얼굴만 비추고 그냥 갈까 했는데 유키호가 차를 권하기에 차를 마시고 가기로 했다.
흘끗 주변을 둘러보니 야요이가 치하야를 옆에 두고 방긋 웃으며 이오리와 하루카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치하야의 집에서 같이 자게 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보고 있자니 어제 야요이가 날 오빠라고 불렀던 일이 기억났다. 그거 정말 좋았는데. 언제 또 오빠라고 불러주지 않으려나.
아. 그래. 생각했던 것. 지금 한 번 말해보는 게 좋을지도.

“리츠코.”

“아. 야구선수 씨. …그래! 드디어 추궁할 때가 왔군요!”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안 돼. 여기 말려들어가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자.

“잠깐, 잠깐.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나. 미안하지만 얘네들한테 부탁이 하나 있어.”

“부탁? 어떤 부탁인가요?”

“그다지 해는 없을 거야.”

“…그렇다면, 하세요. 야구선수 씨에게는 항상 신세를 지는 셈이니. 그 부탁이 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최대한 들어드릴게요.”

리츠코는 바로 모두를 주목시켰다. 그리하여 리츠코를 포함 열세 명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또 말하기가 그런데…

“음… 그러니까… 너희들에게 부탁이 한 가지 있는데 말이야. 들어줄 수 있겠어?”

“그거야…”

“부탁에 따라 다르겠죠.”

“아저씨의 부탁이라면 한 가지 정도는 들어줄 수 있는 거야. 한 가지만.”

“일단 그 부탁이 무엇인지부터 말해보라구.”

“그러니까 말이지…”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다음, 마음을 다시 한 번 다잡고 말했다.

“너희들 모두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들어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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