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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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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0, 2012 18:07에 작성됨.

어제 신나게 뺑뺑이 돌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둘이서 식사는 고사하고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서 결국 나만 또 신나게 휘둘려 다녔다.
이래저래 고생이었던 하루가 끝난 후, 잠자리에서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 하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 후 잠이 들었더니, 그 여파로 꿈까지 다 꿨다. 잠에서 깬 지금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어쨌든 거지같은 꿈이라는 건 확실했다. 젠장.

내일이 8강전. 오늘은 대충 연습 한 번 가볍게 나가고 컨디션 조절하는 날. 오늘은 좀 제대로 쉬어야지. 어제의 미스가 너무나도 뼈아프다고. 3타수를 날려먹다니. 다시 생각해도 열 받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러닝 후 씻고 밥 먹고 침대에 좀 누워 있다가 일어나 PC를 켰다. 산지 얼마 되지 않는 PC로, 저번 치어걸 사건 이후 트라우마를 극복해보자는 의미로 구입했지만, 역시나 스포츠 관련 소식은 자제하는 편이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큰소리를 뻥뻥 쳐놨지만, 아직 그들의 반응을 다시 대면하는 건 두렵다. 그 대신 시간을 투자하는 건 머리를 식히기 위한 게임이나 서브컬처 약간. 물론 시간을 투자한다고 해봐야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도 아니지만.

요즘 시작한 야구 매니징 게임을 간만에 손대 보았더니 의외로 좋은 카드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녀석. 재작년까지만 해도 나한테 불쌍할 정도로 두들겨 맞았던 녀석인데. 이런 빵빵한 능력치라니 이거 순 사기 아닌가. 게다가 이놈이 언제 스플리터를 던졌다는 거야. 나 있을 때만 해도 코시엔 고딩들도 칠 수 있을 것 같은 밋밋한 체인지업뿐이었는데. 2년 사이에 많이 노력한 모양이다. 아. 물론 이 녀석이 나보다 2년 선배다. 안 보이는데서 반말하는데 뭐 어때. 총리한테도 찍찍 반말하는 시대에.
하여튼. 2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니(정확히는 1년 반이지만.). 발전할 녀석들은 발전하겠지. 나도 은퇴 직후에 비하면 꽤나 발전했다고 할 수 있…나?
새로 얻은 멍청이의 카드를 로스터 1선발에 박아 넣고 게임을 종료했다.

요즘 게임 말고도 관심을 가지는 곳이 서브컬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방긋방긋 동화’라는 곳인데, 나도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된다. 이번에 새로 PC를 구입한 다음에서야 알게 됐으니까. 어째 아이돌들과 인연을 갖게 되다보니 이곳을 처음 알게 된 연유도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는 ‘~해보았다.’시리즈 덕분이다. ‘불러보았다.’라든지 ‘춤춰보았다.’라든지. 가끔 추천이 높거나 코멘트가 많은 걸 보면서, 내가 아는 녀석들과 비교를 해보기도 하는 중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걸 보면서 녀석들을 프로듀스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했던 것 같다. 실제로도 가끔 765프로 녀석들이 배워도 좋을 정도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녀석들이 있기도 하니까. 왜 방송에 안 나오고 집에서 저러는지 모를 정도의.

그중에서도 탁월한 편집기술과 출중한 댄스 실력으로 속칭 넷아이돌이라고 불릴 정도의 인기를 구가하는 녀석이 한 명 있는데… ELLIE라고 불린다. 나도 몇 번 보긴 했지만 대단한 실력이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하긴 했다. 애초에 내가 아이돌이라는 녀석들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지만. 그녀가 영상을 올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방긋방긋 동화가 뒤집어지는 걸 봐선 내 평가가 대충 맞는 것 같다.
사실 내가 아는 노래. 특히 아이돌의 노래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원곡과 대조는 못해보지만, 그냥 척 보기에 잘한다 싶으면 잘하는 게 아닐까.

어쨌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늘은 누구한테도 나를 부르는 호출이 오지 않았다. 어제의 그 일로 리츠코가 단단히 주의를 준 것인지. 아니면 오늘이야말로 도우미 일을 제외하면 다른 일이 없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내게는 희소식이다. 오늘은 드디어 느긋하게 혼자 보낼 수 있겠군.

이라고 생각했어도 내심 또 콜이 오진 않을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기다리며 오전 오후를 무의미하게 앉거나, 눕거나, 배트를 휘두르거나 하면서 보냈다. 요즘 하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바람에, 오히려 그녀들을 만나기 전에는 평범한 일상이었던 오늘 같은 날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뭔가 나가고 싶고, 좀이 쑤시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입을 나불대다가 혼자 있게 되니 입이 너무 심심했다. 거 참. 이건 또 무슨 부작용이래.

나도 모르게 누구에게 전화나 걸어볼까 하다가 ‘무슨 여자애도 아니고.’라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 보니 요즘 누나에게도 연락이 오지 않네. 가장 최근에 했을 때는 무슨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 준비인지 뭔지가 바쁜 것 같았다. 이곳으로 온다는 그 한 달도 얼마 남지 않았군. 여기서 반백수 생활하는 걸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진다.

뭐. 조금 있으면 연습시간이니 슬슬 움직일까.



구장에 도착해 있는 힘껏 풀스윙을 해줬더니 머리가 한층 더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내 뒤에는 팀원들이 줄줄이 모여 내 스윙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이거 어째 프로시절 팬 앞에서 연습할 때로 돌아간 기분인데.
대회 첫 경기 이후로 팀 내에서 높아져가던 내 위상은 16강전 쐐기 쓰리런 홈런으로 거의 정점을 찍을 정도가 되었다. 감독님도 이제 대회 시작부터 나를 거의 플레잉코치 수준으로 부려먹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내가 프로 2년차를 마치고 야구를 그만두었다지만, 그래도 정식 코스를 밟아온 ‘진짜 야구선수’와 취미로 야구를 하는 사람들의 수준차이는 언급할 필요도 없이 엄청나게 높아서, 내 야구지식으로도 충분히 팀원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감독님은 코치가 하나 늘어서 다행이라는 듯이 말하셨지만, 내게는 정말이지 곤욕이다. 귀찮다고.

모든 팀이 16강까지 마친 지금, 타율은 1푼 뒤진 2위. 홈런은 2개로 1위. 타점 역시 6개로 1위. 남은 세 경기 페이스만 유지한다면 3관왕은 무난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3관왕이면 대회 MVP는 자동적으로 따라오겠지. 약속을 조금 더 높게 잡을 걸 그랬나. 뭐. 아직 3경기 남았으니 뚜껑 따봐야 알겠지. 바로 8강에서 탈락할 확률도 있고. 내가 잘해봤자 팀이 망하면 끝이다.

연습시간이 끝나고, 굳이 남아있던 두 사람의 타격자세를 교정해준 다음, 남들보다 늦은, 어둑어둑해질 시간에 구장을 나왔다. 바로 집에 돌아갈까, 하다가 냉장고에 맥주가 떨어진 것을 기억해내고 마트로 향했다.
대형 마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캔 맥주를 쓸어 담은 후, 오랜만에 귀찮긴 해도 요리나 해볼까 하고 정육 코너를 기웃거리던 중에,

“오오?”

“아. 야구선수 씨!”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야요이와 이오리. 오늘은 만날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녀석들과 의외의 장소에서 맞닥뜨렸다. 야요이가 카트를 끌고 있는 것을 보니, 둘이서 장을 보고 있는 모양인데… 아니. 대형마트에 카트를 가지고서는 장을 보는 것 외에 무슨 일을 하겠냐마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둘이 여기서 뭐해?”

“뭐하는 것 같아? 카트 안에 들어있는 걸 보고도 모르겠어? 정말 바보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내가 여기 있는 이유도 너희랑 마찬가지니까.”

“카트 안엔 맥주밖에 없는데?”

“지금부터 사려고 했거든. 어쨌든, 야요이는 몰라도 네가 여기있는 건 의외인데?”

“그거야… 오늘 야요이가 자기 집에 초대해줬으니까.”

“호오.”

내가 의미 없는 감탄성을 내지르자, 야요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부모님이랑 동생들이 시골에 갔으니까요. 저는 이번 도우미 일 때문에 혼자 집에 남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혼자 집 보게 된 건 처음이야. 라고 했더니 이오리쨩이 집에 놀러와 주겠다고 해서.”

역시 이오리는 야요이에게 약하군. 다시금 확인했다. 언젠가 이 녀석이랑 트러블이 생기면 야요이를 인질로 잡아서… 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나는.

“재미있겠네.”

“네! 이오리쨩이랑 같이 저희 집에서 저녁도 먹고. 재미있을거에요.”

“그래, 그래.”

야요이는 벌써부터 즐겁다는 듯 웃음을 잃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손뼉을 딱 치며 외쳤다.

“아! 야구선수 씨도 괜찮으시다면 저희 집에 오실래요? 초대해드릴게요!”

“그래도 괜찮겠냐?”

“네! 사람은 많을수록 재미있기도 하고!”

야요이를 처음 만난 날에 야요이의 집 앞까지 태워준 적이 있긴 했지만, 집을 직접 방문해본 적은 없다. 괜찮으려나. 야요이. 분명 요리 하난 수준급이라고 했지. 6남매의 맏이라니까.
…결과적으로 요리하기 귀찮아지기도 했고.

“그럼 오늘 저녁은 야요이에게 신세 좀 질까.”

“네!”

“넌 괜찮겠냐. 이오리?”

“응?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잖아. 야요이가 좋다면야.”

그걸로 오늘의 저녁식사는 정해졌다. 야요이의 요리실력. 맛보기로 하자.
결국 내가 끼어든 것이 되어 늘어난 재료값은 내가 내기로 했다. 그리고 내 차로 야요이의 집으로 향하자, 야요이는 무거운 것을 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며 좋아했다.

“자. 저희 집에 어서 오세요!”

그녀를 태워다 준 날에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역시나. 야요이에겐 미안하지만 가난한 집이라는 분위기가 확 풍기는 집이었다. 이오리는 자기 개집보다 작은 것 같다는 말을 했는데, 다행히도 야요이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그건 야요이의 집을 격하시키는 표현이 아니라 자기 집안의 부를 더 부각시키는 표현 같아보였는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대체 개를 어디에서 키우길래 이 집보다 크다는 거야. 한 번 구경해보고 싶다.

야요이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 것을 선포하며 주방으로 가버렸기에, 거실에는 나와 이오리만이 남게 되었다. TV를 켜기 위해 리모컨을 찾았으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직접 전원을 켰다.
그런데 채널이 너무 적었다. 게다가 시간대가 딱 거지같은 방송만 할 시간이라 다시 끌 수밖에 없었다. 이오리는 아예 TV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그 위에 걸린 작은 액자를 보고 있었다.

“야요이의 동생들. 저렇게 생겼었네.”

“다들 야요이 닮아 귀여운데.”

“흐응…”

“뭐야. 그 반응은.”

“너는, 야요이를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물론. 야요이 보고 안 귀엽다고 하는 사람이 있냐. 그게 더 궁금하다.”

이오리는 약간의 침묵을 지킨 후,

“그럼… 아미나, 마미는?”

“걔네들도 귀엽지. 장난치는 것만 자제한다면.”

“타카네는?”

“타카네는 예쁘지.”

“미키는?”

“미키도 예쁘지.”

“히비키는?”

“히비키도 예쁘긴 한데, 그 녀석은 가장 먼저 드는 이미지가 건강하다는 이미지니까.”

“마코토는?”

“어이. 그걸 묻는 저의가 뭐야.”

“…나, 나는?”

말을 듣는 순간 이오리에게 시선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녀석은 ‘너에게 무슨 말을 듣던 나는 개의치 않지만 그저 궁금한 것뿐이야.’라는 표정을 전력을 다해 짓고 있었다. 설득력이 없는 표정이라는 것도 있구나. 라고 새삼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765프로의 12명 중에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눠본 아이돌 중의 한명이 이오리니까. 이 녀석의 패턴은 대략 알고 있다. 여기서 귀엽다. 라는 소릴 하면 또 ‘어린애 취급하지 마!’라고 할 게 분명하다. 얼굴은 부끄러워하면서 말이지.
역시 여기서는 ‘예쁘다.’가 무난한가. 귀엽다는 거나 예쁘다는 거나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하는데, 여자가 느끼기엔, 특히 이오리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느끼기엔 다른 건가.

“넌 예쁜 거라고 생각하는데.”

“흐응. 그래? 뭐. 내가 미소녀인건 당연한 일이니까. 니히힛.”

그저 내일 날씨가 이렇다는 것을 듣는 것 같은 평온한 표정을 짓기 위해 극도로 노력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오리는 대수롭지 않게(목소리가 살짝 떨린 것 같았다.)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자신을 미소녀라고 당당하게 지칭하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물론 이오리 자신이 아닌 내가 생각해도 이오리 정도면 미소녀 이상이라고 생각되긴 하지만.

이오리는 더 이상 말을 하면 지금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는 평정심이 폭발할 것 같은지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그런 이오리를 보는 것이 어쩐지 재미있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먼저 무너진 쪽은 이오리였다.

“잠깐. 뭘 그렇게 계속 쳐다보고 있는 거야?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

“응? 무슨 말을 해?”

“그… 그러니까…”

“왜 자기가 자기 입으로 미소녀라고 지칭하는데 딴죽 걸지 않는지?”

“그게 아니라-!”

“왜 뜬금없이 다른 애들보고 예쁘냐, 어떻냐 물어봤는지?”

“틀려!”

“그럼 어쩌라는 거야. 나 참. 까다로운 아가씨네.”

“으으으…”

심심했는데 잘됐군. 실컷 놀려줘 볼까.
이오리의 게이지가 상승하고, 그에 따라 나 역시 받아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그때,

“안 돼. 야구선수 씨도, 이오리쨩도, 싸우면 안 돼요-”

주방에서 야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을 쉬며 힘없이 미소를 흘렸다.

“누가 싸웠다고 그러는 거니. 야요이.”

“그래, 그래. 나 따위가 감히 슈퍼아이돌이자 엘레강트의 상징이신 이오리님에게…”

“작작해-!”

이오리의 일갈에 나는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짜잔-! 다됐습니다!”

““오오--””

감탄사를 흘리던 나와 이오리는, 곧 수북이 쌓여있는 콩나물을 보고 경악했다.

“뭐니, 이게.”

고기랑 콩나물이 같이 있는데, 고기가 메인이 아니라 콩나물이 메인인 메뉴는 또 처음 보는군.

“콩나물뿐이라도 맛있으니까요!”

“일단 먹어보고 판단하자. 아. 그래. 여기 리모컨 어디 있어? 아까 찾아봐도 없던데. TV 좀 보면서 먹자.”

“리모컨은 저 구석에 있지만, TV는… 지금 켜시면 안돼요. 두꺼비집 스위치가 내려가고 말아요.”

나와 이오리는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집이 거실에 불 켜고 불판에 불 올리고 TV를 켜는 것을 동시에 못한다는 거냐고. 이런 환경에서 살면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야요이가 존경스럽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불이 어느 정도 올라갔다 싶더니, 야요이는 자기의 말대로라면 ‘타카츠키 가 비전의 소스’인지 뭔지를 뿌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렇게 먹어도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마침 배도 고프고.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자. 이제 드셔도 좋아요.”

잘 먹겠습니다. 약속의 합장. 이오리는 조금 별로인 것 같은 표정이긴 한데, 나야 뭐 딱히 음식 가리는 건 없으니 콩나물 한 젓가락 가득 집어서 그대로 입에 밀어 넣었다.

“우웃… 우옷-!”

이 맛은…!
만화였더라면 등 뒤에 호랑이가 뛰어다니고 용이 날아다니는 효과가 날 정도의 맛이었다. 콩나물로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니. 뭔가 독특하면서도… 어쨌든 맛있는데.

“어떠세요?”

“굉장해! 정말로. 진짜 놀랐다고. 라디에이터가 터질 정도의 맛이야!”

“에헤헤…”

“…그 정도야?”

“그럼! 안 먹으면 후회할 거다. 너.”

이오리는 내 말에 의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콩나물을 조금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몇 번 우물우물 하더니, 곧 눈에서 별이 번쩍이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의외로 맛있는데?”

“그치?”

“응!”

이제야 나도 주메뉴가 되어야할 고기보다 콩나물이 센터에 와있는 이유를 알겠다.
먹으면 먹을수록 빠져드네. 자꾸자꾸 손이 가네.

그렇게 나와 이오리 두 사람 모두 대만족이었던 식사시간이 지나고, 셋이 탁자에 앉아 어제 있던 얘기를 하는데 이오리에게서 전화가 온 모양인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응. 신도. 무슨 일이야? 응. 응? 자, 잠깐. 그거 분명히 다음 주로 밀렸다고… 에에?”

뭐야. 뭐.
나와 야요이가 서로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동안, 이오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야요이. 집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

“에에?”

“뭐야. 급한 일이냐? 내가 태워줄까?”

“아니. 도로변까지 가면 차가 오기로 되어있으니까.”

여기서 이오리가 빠지게 되면 남는 건 나와 야요이 둘이다. 아무도 없는 집에 둘이만 있기도 좀 그러니까, 나도 같이 가지 않으면.

“그럼 거기까지 태워줄게. 어차피 나도 슬슬 가봐야 할 시간이니까.”

“아우…”

갑작스럽게 두 사람 모두 가게 되어서 그런지 야요이는 축 늘어진 표정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미안. 야요이. 다음에 꼭 시간을 낼 테니까.”

이오리가 대단히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자, 역시나 야요이답다고 할지. 금세 표정을 풀고 웃는 얼굴로 이오리를 대했다.

“아니. 신경 쓰지 마. 이오리쨩. 집에 일이 있다면 당연히 빨리 가봐야 하니까.”

“응…”

이오리는 못내 미안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집 밖으로 나왔다. 나 역시 오늘 대접받은 것은 꼭 보답하겠다는 말로 작별인사를 대신하고 그녀와 함께 나왔다.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나온 거야?”

말한 대로 도로변까지 이오리를 태워다주기로 해서 이오리를 조수석에 태우고 야요이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몰았다. 야요이가 시야에 사라질 때쯤 이오리는 나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현역 아이돌과 집에서 단 둘이… 라는 것도 조금 그렇잖아?”

“…그건 그렇지만. 야요이. 분명히 외로움 탈거라고 생각하는데. 조금 더 있어줘도 괜찮지 않아?”

“뭐. 벌써 이렇게 나와 버렸으니 어쩔 수 없지. 저 나이면 집 보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럴까…”

그대로 이오리를 내려준 후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 내내 풀이 죽은 야요이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지금 와서 다시 돌아가는 것도 그러니 그냥 발길을 돌리지 않고 집으로 갔다.



그날 밤.
우연히 괴담 전문 사이트를 발견해 오랜만에 괴담에 심취해 있는 와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확인하지 않고 냉큼 받았다.

“여보세요?”

[………]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세요?”

[……흑.]

순간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이거 우는 소리지? 맞지?

“누, 누구야. 누군데 장난질을…”

[으흑… 흑…]

분명히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였다. 방금 전까지 보던 괴담과 맞물려서 나에게 엄청난 시너지효과를 주는 바람에, 그대로 확 끊어버릴까 하다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야, 야요이…?”

[흑… 야구선수 씨이…]

야요이가 맞나보군. 나는 안도의 한숨을 깊게 쉬었다. 정말이지. 심장이고 간이고 다 떨어질 뻔했네. 아니. 잠깐. 야요이가 이 밤중에 울면서 전화라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뭔가 큰일이 난 게 아닐까. 이 녀석 지금 집에 혼자 있는데 말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왜 우는 거니? 응?”

[저기… 그게… 흑. 혼자 자려고 누웠는데… 역시 무서워서…]

아…
그래. 다행이다. 아무 일도 없는 거구나. 다행이야.
근데 14살 소녀가 밤에 혼자 자는 걸 무서워해서 내게 전화라니. 그건 또 어떤 의미로 큰일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야요이는 항상 동생들과 같이 잤던 것 같으니까. 갑자기 집에 혼자 남겨져 자게 되면 충분히 쓸쓸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러겠지.

내가 뭐라고 해줘야 하나…

야요이에게 할 말을 생각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마우스를 조작해 재빨리 괴담 사이트를 꺼버리고 ‘방긋방긋 동화’로 들어갔다. 오오. ELLIE의 새 영상이 올라온 것 같다. 춤과 노래를 같이…

아.

“야요이?”

[네…?]

“지금 데리러 갈게. 우리 집에 놀러올래?”



내가 야요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지난 후였다.

“와아. 여기가 야구선수 씨의 집이군요!”

이걸로 하루카, 유키호에 이어 세 번째로 우리 집을 방문하는 녀석이 되었군. 야요이는 신기한 듯 우리 집 여기저기를 깡충깡충 뛰어다니며 구경하기에 바빴다.

“야구선수 씨. 집이 굉장히 깨끗하네요!”

다행이다. 야요이의 집에 가기 전에 미리 다 치워놔서.

“앗-! PC도 있네요!”

“응. 안 그래도 너에게 보여줄 게 있는데 말이야.”

야요이에게 대충 ELLIE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돌의 눈으로 평가를 해보라.’는 말과 함께, ELLIE의 새로운 영상을 재생했다. 야요이는 아까의 눈물은 온데간데없이 기대감이 가득 담긴 눈을 반짝이며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Cast a spell on me!

Cast a special spell on me!


♬ 마법을 걸어줘! - ELLIE


간주가 나오자마자 야요이는 탄성을 지르며,

“아. 이거. 맞아, 기억났어요! 리츠코 씨가 아이돌 시절에 부르던 노래에요!”

뭐? 진짜로?
나는 이번에야말로 깜짝 놀랐다. 이게… 리츠코의 노래라고?


사랑을 꿈꾸는 공주님은
언젠가 멋진 왕자님을 만나게 될 거에요.

어서 빨리 그 날이 오도록
살포시 눈을 감을 테니
마법을 걸어줘!


야요이가 정신없이 영상에 빠져드는 동안, 나는 뒤에서 있는 힘껏 웃음을 참았다. 리츠코가 저런 가사의 노래를 불렀다 이 말이지… 뭔가 지금의 리츠코를 생각하면 대단히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이건 실례인가.


하늘을 나는 마법의 마차는
준비되어있는 나만의 특등석

빨리 마중 나올 수 있도록
침대속에서 기도할 테니까
마법을 풀어줘!


“어때?”

“잘하시네요. 목소리도 좋고, 춤도 잘 추고. 어쩐지. 저도 더 힘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은 마음가짐이네. 근데 그것보단. 후후후…”

“???”

야요이의 의아해하는 표정을 앞에 두고, 나는 내 휴대폰을 들어 리츠코에게 메일을 보냈다. 물론 메일의 내용은 ‘마법을 걸어줘!’의 소녀의 꿈이 가득한 가사였다.
메일을 보낸 후, 리츠코의 반응을 생각하며 혼자 낄낄거리고 있는데, 역시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보나마나 리츠코였다.

“여보세요.”

[그, 그그그그그노래를어떻게알고있는거에욧--!!]

예상대로의 반응에 나는 폭소를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영상을 올린 ELLIE의 코멘트에도 ‘그다지 알려지지는 않은 노래지만 저는 충분히 좋은 노래라고 생각해요?’였으니까.

“이야. 꽤나 귀여운 반응이잖아. 리츠코. 역시 전 아이돌의 오오라는 숨길 수 없다는 건가? 나중에 나한테 꼭 불러줄 거지?”

[놀리지 말아욧-! 내일 반드시 추궁해낼 테니까!]

얼마나 힘껏 소리쳤는지 야요이마저 리츠코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결국 나와 야요이는 마주보며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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