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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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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0, 2012 18:05에 작성됨.

멀리서도 보였던 백화점이었기에 가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백화점 앞에 차를 세웠으나 미우라 씨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일이 덜 끝난 건가? 백화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아후… 벌써 도착한 거야?”

미키가 잠에서 깨어났는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아니. 아직이야. 미우라 씨랑 같이 가려고 중간에 들른 거니까.”

“그래…? 그럼 미키는 조금 더 자는 거야. 아후…”

정말 다시 잠들었다. 대단하구나. 이 녀석은 정말. 순수하게 부럽다는 마음마저 들 정도다.
그나저나 미우라 씨가 늦는 것 같은데, 마미에게 전화라도 한 번 해보라고 해야겠군.

“마미. 미우라 씨한테 전화 좀 해봐. 언제 나오는 거냐고 물어봐줘.”

“라져!”

마미는 재빠르게 미우라 씨의 번호를 누르더니 신호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미의 입이 열렸다.

“아즈사 언니. 마미야. 언니 지금 어디? 에. 응. 응… 으에에??”

마미의 놀란 음성이 들려와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마미를 보게 되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치하야조차 살짝 놀란 표정으로 마미를 보았다.

“왜 그래.”

“무으… 오빠가 받아봐.”

마미가 자신의 휴대폰을 내게 내밀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의아한 기분으로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미우라 씨. 접니다.”

[아. 야구선수 씨.]

“어떻게 된 겁니까?”

[죄송해요. 사실 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길을 잃어버리신 것 같아서 찾아드리려다가…]

전화를 통해서도 미우라 씨의 난처한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이 아가씨는 자기 집 근처에서도 길을 잃을 정도의 슈퍼 길치라는 사실을.

[아무래도… 저.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아아…”

일단은 침착하자. 여기서 나까지 당황해버리면 정말로 꼬여버린다.

“음… 그럼. 그래. 주변에 뭐 눈에 띌만한 건물 있습니까?”

[눈에 띌만한 건물이라면… 아. 저기 수족관이 있네요.]

수족관? 이 근방에 수족관? 잘 모르겠는데. 혹시나 해서 마미와 치하야에게 물어봤지만 두 사람 다 모르는 것 같았다. 미키를 깨울까도 생각해봤지만 관뒀다.

“수족관이라… 그 주변. 도로가인가요, 아니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번화가?”

[번화가에요. 아. 입구 쪽에 게임센터도 보이네요.]

“입구 쪽 게임센터. 그거라면 찾기 쉽겠네요. 알겠습니다. 거기서 기다리세요.”

전화를 끊고 마미에게 돌려준 다음, 뒷좌석의 두 사람에게 골목길로 꺾어지는 곳에 있는 게임센터를 찾으라고 일러둔 뒤 차를 출발시켰다. 그렇게 멀리는 가지 못했을 테니 백화점 근방부터 돌아보자. 번화가라면 역시 백화점 근처일 것 같은 느낌이니까.

“정말. 길치인 것도 고생이겠구나. 미우라 씨는.”

“제대로 출퇴근하는 것도 기적일 정도라니까. 그것도 가끔 길을 잃고 지각하는 경우가 빈번하지만.”

“그것 참. 누군가 같이 있어준다면 괜찮을 텐데. 미우라 씨. 혼자 산다고 했었지.”

“응~후~후. 그 말은 설마 야구선수 씨가 아즈사 언니랑 같이 있고 싶다는 뜻인가용?”

마미가 자신의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가위모양으로 만들어 턱에 괸 다음 눈을 빛냈다. 나는 그 포즈를 꽤나 귀엽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녀가 내뱉은 말의 여파는 마치 후폭풍처럼 늦게 찾아왔다.

“무, 뭐뭐뭐뭔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너에겐 그렇게 들리는 거야? 너 잠깐 사이에 무슨 환청이라도 들었냐?”

“호오. 쓸데없이 리액션이 크네. 선수옵빵.”

“니가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내뱉으니까 그렇지!”

“훗훗훗… 저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 마미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군요~”

“시끄러워. 빨리 게임센터나 찾아봐.”

“그래도 같이 있기 싫다는 말은 하지 않네?”

“……묵비권을 행사하겠다.”

“잘 생각해 봐. 선수오빠. 아즈사 언니랑 함께 지내면, 그 위험할 정도로 빵빵한 몸매를 하루 종일 볼 수 있다고? 집이라는 공간에서 얇은 셔츠만 입고 완벽하게 무방비해진 그 괘씸한 몸을…”

“거기까지 해.”

입으로는 마미를 말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그거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큿…”

이쪽의 화제를 완벽하게 종식시키는 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나와 마미는 더 이상 미우라 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20분 정도를 돌아다녔는데도 게임센터는 보이지 않았다. 이 근처가 아닌가. 조금 더 멀리 나가볼까 생각하던 차에, 미키가 다시금 깨어났다.

“있잖아. 아직 사무소 안 간 거야?”

“못가고 있다. 미우라 씨가 사라졌어.”

“에? 아즈사가 또?”

“그래. 깬 김에 물어보는데, 너 이 근처에 수족관이나 게임센터 있는 거 알아?”

“이 근처가 어디…?”

“어이. 제대로 잠 좀 깨 보라고.”

“노력하는 거야… 아후.”

미키는 눈을 비비며 연신 하품을 해댔다. 보다 못한 내가 조수석 수납 칸을 열어 풍선껌을 입에 넣어줬더니, 그제야 약간 잠이 깬 얼굴로 껌을 열심히 우물우물 거리기 시작했다.

“이 근처의 수족관…? 아아… 응! 미키. 알고 있는 거야. 이 근방의 수족관. 미키 자주 가봤으니까.”

“대쓰요!”

“나이스야, 미키미키!”

캄캄한 동굴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치하야도 상당히 밝은 표정을 짓는 게 나와 마미와 비슷한 기분이었던 것 같다.
곧바로 미키의 안내를 받으며 차를 몰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하나. 그 문제의 게임센터는 우리가 헤매고 돌아다녔던 것에 비해 상당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뭐야. 미우라 씨. 없는데.”

“혹시 수족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겠지? 미키. 미안한데 수고 좀 해주라.”

“응. 갔다 오는 거야.”

미키가 풍선을 크게 불더니, 차 문을 열고 흔들흔들 번화가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미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깨우는 건데 말야. 괜히 시간낭비만 했네.”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됐네 잘됐어잖아.”

“음. 그건 그렇지만.”

그런데 이번엔 미키가 늦었다. 세 사람이 함께 설마 미키도 같이 길을 잃은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차에, 다행히도 미키가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미우라 씨는 없었다.

“설마.”

나도 모르게 내뱉었던 설마는

“이상해. 아즈사. 수족관 앞에도, 안에도 없는 걸? 정말 수족관에 있다고 한 거 맞아?

현실이 되었다.

“마미. 다시 걸어봐.”

“으, 응…”

마미가 들고 있는 휴대폰의 신호음이 들릴 정도로 내 차 안은 고요함이 흐르고 있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마미는 물론, 치하야도, 미키도, 나도. 누구 한 명 말없이 마미의, 정확히는 마미의 휴대폰에 귀를 기울였다.

“아즈사 언니? 수족관 앞에 있겠다고 했잖아. 응. 응. 에에에???”

데자뷔. 데자뷔다.
마미는 이내 ‘역시나 아즈사 언니…’라고 중얼거리며 내게 휴대폰을 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미우라 씨.”

[그게… 수족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꼬마아이가 길을 잃어서… 어떻게든 찾아주긴 했는데…]

“했는데?”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네요.]

신이시여…

“수족관이 있는 곳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신 건가요?”

[네. 그건 기억해요.]

“알겠습니다. 일단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있으세요.”

[네. 가만히 있을게요.]

“또 엉뚱한 곳에 휘말려들지 마시고요.”

[네. 그럴게요.]

“설령 천황이 와서 길을 물어봐도 가르쳐만 주세요. 가르쳐만! 직접 데려다주려 하시지는 말고!”

[어머, 어머. 혹시 화나셨나요…?]

“아, 아니. 그럴 리가요. 아하하하하.”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봤다. 오후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이거 아슬아슬한데. 빨리 찾지 않으면.
세 사람이 모두 나를 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한숨을 쉬고는,

“미키.”

“응?”

“찰리 원.”

“에? 찰리…라니 뭐야?”

“마미는 찰리 투.”

“찰리 브라운?”

“아니거든. 치하야는 찰리 쓰리.”

“……?”

“그리고 나는 브라보다.”

““헤에…””

“타겟의 명명은 F로 한다. 작전명은… F 일병 구하기.”

“그게 뭐야…/뭔가요…”

그렇게 작전은 시작되었다.



[아저씨.]

“아저씨라니! 브라보다, 브라보. 지금은 작전 중이라고.”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시끄러. 어쨌든, 교신은 왜 한 거냐. 찰리 원.”

[미키적으로는…]

“찰리 원이라고.”

[…알겠어. 차, 찰리 원은 슬슬 간식이 먹고 싶어진다는 느낌?]

“작전을 성공할 때까진 금식이다.”

[에에? 눈앞에 크레페가 있는 걸? 미키. 저걸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거야.]

크레페라…
뭐. 단 걸 먹으면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말도 있으니까.

“네 개 사가지고 와. 돈은 내가 줄게. 다 같이 먹자.”

[응!]

찰리 원과의 교신을 끝마치고, 마미와… 아니. 찰리 투와 찰리 쓰리를 작전본부로 불러들였다.
차 안에 모두 모여서 찰리… 에이. 젠장. 미키가 사온 크레페를 먹고 있자니, 기분 탓인지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하잖아. 선수오…”

“브라보.”

“…브라보. 연약한 여자 셋에게 수색임무를 맡기고 자긴 차 안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나 쐬다니.”

“그거 조금 걸은 걸로 뭐가 힘들어. 그리고 너희들은 몸이 좀 힘들지 몰라도, 나는 정신적으로 엄청 피곤하다고. 아까도 리츠코한테 한 번, 감독님한테 두 번 전화 왔어. 이러다가 이번 시합 못나가기라도 하면 난 끝장이라고.”

“아. 그러고 보니 우리도.”

치하야가 툭 내뱉은 말에, 마미와 미키는 사색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생각하면 나보다는 이 녀석들이 더하네. 난 그저 엉덩이 몇 번 맞고 끝날 일이지만, 이 녀석들은 일이다. 비즈니스다.

시간은 2시 20분.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젠 정말 촉박해졌다.

“야단났네. 빨리 미우라 씨를 찾지 않으면 큰일인데.”

그 순간, 마미의 휴대폰이 발신음을 내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마미는 먹고 있던 크레페마저 미키에게 맡기며,

“브라보. F입니다.”

차 안에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줘봐. 내가 받을게.”

이번엔 내가 마미에게 크레페를 건네주고 휴대폰을 받았다.

“여보세요.”

[아. 야구선수 씨. 저 지금 백화점 지하철역에 있어요.]

뭐…라고?
아니 거기 그대로 서있으랬더니…

[죄송해요. 그런데,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들고 계셔서…]

정말. 대책 없이 착한 사람이다.
여기서 뭐라고 말을 했다간 내가 나쁜 놈이 되겠지. 저게 미우라 씨의 매력이기도 하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 단서도 없이 찾는 것보다 차라리 지하철역이라면 찾기 쉬울지도 모른다. 적어도 장소는 알고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거기 가만히 있어야 해요?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얼마 없어요.”

[어라. 그러고 보니… 네. 반드시 이 자리에 있을 테니까요.]

휴. 이제 끝이 보이는 건가. 마미에게 휴대폰을 돌려주고 남은 크레페를 받으려는데, 마미의 손에 아무 것도 없었다.

“크레페는.”

“먹었어. 나 먹으라고 준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냐!!”

“아. 몰랐어. 미안. 에헷!”
“에헷이고 나발이고 애초에 경기가 있는 날 니들 부탁 따위 들어주는 게 아니었는데. 덕분에 시작부터 끝까지 꼬였잖아. 어떻게 할 거야, 미키 너.”

“에에? 거기서 왜 미키를 걸고넘어지는 거야?”

“니가 아침부터 태워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될 일도 없었잖아.”

“에에- 그건 억지야!”

“으으… 말대꾸하지 마. 지금의 나는 휘발성 물질이다. 불씨만 튀겨봐. 다 태워버릴 거야.”

“차에 태워? 몇 명이나? 뒷좌석 좁은데.”

“크아아아-------”

분노한 야구선수가 울부짖었다. 마미 네놈 그걸 농담이라고 한 거냐!!
아니. 조금 진정하자. 일단 미우라 씨를 찾는 게 중요하니까. 그래. 난 아무리 화가 나도 중요한 일 앞에서는 자제할 수 있는 사람이야. 투수가 빈볼을 연속으로 날려도 정확한 타격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좋아. 가자.”

불타는 가슴을 억누르고 어떻게 지하철역은 찾았는데, 입구에 역시나 미우라 씨는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긴 출구가 12번까지 있었지.”

“여긴 몇 번?”

“3번 출구다. 일단 마미. 미우라 씨에게 전화를. 몇 번 출구냐고 물어봐.”

“라저-”

통화를 시도. 성공. 마미는 곧바로 미우라 씨에게 내가 말한 바를 질문했다.

“몇 번 출구인지 모르겠다는데? 자기가 한 번 보고 얘기해준다고…”

““안 돼!! 그냥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으라고 해!!!””

나와 미키와 치하야가 동시에 소리쳤다. 계속 냉정을 잃지 않았던 치하야마저 힘껏 소리치는 걸 보면, 지금이 확실히 급박하긴 한 것 같다고 새삼 생각했다. 일단 나부터가 감독님의 계속된 전화에 문자 한 통 보내놓고 전화 끈 상태니까.

“그럼 어떻게 해?”

“할 수 없지. 내가 출구에 한 명씩 내려줄게 다시 수색작전을 펼치는 수밖에.”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거야.”

“하아…”

일단 이쪽 3번에 마미를, 6번에 치하야를, 9번에 미키를 내려준 다음, 나는 언제든 이동할 수 있게 차 안에서 대기했다.
그리고 10분이 지났다. 세 사람 모두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15분.
20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단체로 뭐하는 거야?
마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하는데 연락도 없어?”

“하지만. 아즈사 언니 여기에 없는걸.”

“없으면.”

“응?”

“다른 출구는 안 찾아봐?”

“아…”

마미의 목소리가 멎었다. 설마 이것들이 멍청하게 그쪽출구에서만 멍하니 서있었던 건 아니겠지?
미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찮아서 자기 쪽 출구랑 가까운 두 곳만 찾아본 모양이다.
미키에게 전화번호를 얻어내어 치하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녀석은 또 확대해석해서 역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망할 녀석들이 누구하나 도움이 안 됐다.

“이것들이… 내가 직접 나서겠다!!”

내가 내뱉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악당 같은 대사였다. 뭐. 내 심정을 이해한다면 저 정도 대사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출구로 달려 들어가 10분 정도 헤매고 나서야 드디어 미우라 씨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반가워서 눈물까지 나올 뻔했지만, 꾹 참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 야구선수 씨.”

“정말… 엄청 찾아다녔단 말입니다.”

“죄송해요. 저. 길치인데다가 도움을 청하시는 분들을 못 본 척 할 수도 없어서…”

아즈사 씨는 정말로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우라 씨의 그런 모습에 나는 뭐라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아… 아닙니다. 미우라 씨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니. 설령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미우라 씨라면 용서가 됩니다. 정말이에요.”

내 말에 미우라 씨는 한손으로 입을 가리고 멋쩍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고맙지만… 그래도, 정말 죄송해요.”

“하하. 정 그러시다면야 언제 한 번 밥이나 한 끼 사주시는 걸로…”

“네. 그럴게요.”

이 말의 임팩트는 내게 꽤나 늦게 전해졌다.
생각해보니 이 나이대의 선남(그래. 나 정도라면.)선녀가 단 둘이 밥 한 끼 먹는 건 곧 이퀄 데이트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나는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꺼낸 건지, 그리고 그걸 승낙한 미우라 씨의 생각을 확대해석해도 되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에 빠질 수 있었다.

“저… 지금 꽤나 늦지 않았나요?”

아. 그래. 그랬지.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지금은 빨리 움직여야 한다.



미키와, 마미와, 마지막으로 개찰구까지 가있었던 치하야를 태운 다음 리츠코에게 연락을 넣고 곧바로 경기장으로 향했다. 물론 교통위반이 되기 일보 직전까지 밟아서. 결과적으로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3시 45분. 정말 아슬아슬 했다.
치하야와 미우라 씨를 옆 경기장으로 보낸 다음, 마미, 미키와 함께 미친 듯이 달렸다. 그리고 경기장 안에 골인.

감독님께 문자로 엔트리에 꼭 넣어달라고 했는데, 다행히도 1번에 내 이름이 있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이놈이. 뭘 했길래 이리 늦은 거냐!!”

왼발과 오른발의 2콤보가 내 엉덩이에 작렬.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 곧바로 타석에 들어섰으니, 컨디션 좋은 거고 뭐고 잘 칠 턱이 있나.

삼진-병살타-야수선택. 내 4회까지의 성적이었다. 타율이고 타점이고 다 까먹었다. 젠장.
6회에는 안타를 쳤지만 주자가 없는 상황의 안타였다.

“아저씨. 오늘 못해.”

우리 팀 배트걸이었던(자다 일어나고를 반복하는 신기를 보여주던 중이었다.) 미키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배트를 들고 우리 팀 덕아웃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그렇게 운전을 해댔으니 컨디션이 좋을 턱이 있냐.”

“하지만. 마빡쨩이랑 약속한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맞다. 그걸 잊고 있었다. 황급히 덕아웃 밖으로 나와 우리 팀 관중석을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저기압 확정인 표정의 이오리가 앉아있었다. 그것도 혼자.

“…정신 좀 차려야겠다.”

덕아웃 안으로 들어가 이온음료를 들고 나와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이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아. 미키도 목마른 거야.”

별 생각 없이 병을 내밀었더니, 미키 역시 별 생각 없이 음료를 마시기 시작했다.
내가 입을 댔던 것에 입을 대고. 어이. 괜찮은 거냐. 너?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괜히 나만 의식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관뒀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고 컨디션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중간 중간 미키와의 간접…뭐시기가 생각났지만 곧 잊혀졌다.

그리고 9회초. 우리 팀이 1점차로 아슬아슬한 리드를 유지하는 상황의 원아웃 주자 2,3루. 드디어 내 마지막이 될 타순이 돌아왔다.

“힘내는 거야-”

“아. 그래.”

미키의 응원을 받으며 타석에 섰다. 원아웃 2,3루인데 설마 고의사구로 1루를 채우려는 건 아니겠지. 그럴 확률이 꽤 있는데. 제발 부탁이니 승부해다오.

초구가 들어왔다. 다행히 포수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볼이었다. 아마 아예 거르는 게 아니라 ‘공을 고르면 내보내고 속으면 잡는다.’ 식의 승부를 할 모양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속아주는 게 좋겠군.

초구 볼 이후 네 개 연속 볼이 들어왔지만, 헛스윙-헛스윙-커트-커트로 응해주었다. 이걸로 배터리는 확신했을 것이다. 32강전에는 컨디션이 좋았지만, 오늘은 영 아니구나. 라고. 실제로도 삼진-병살타-야수선택-안타라는 전적이 있으니까.
다음공은 떨어지는 공으로 헛스윙을 유도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6구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어퍼스윙으로 걷어 올렸다.
쭉쭉 뻗은 공은 센터 뒤로 날아가 담장을 넘겼다. 공이 담장을 넘는 순간, 약속을 지켰다는 안도감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9회말 수비도 해야 되는데. 뭐. 4점차니 괜찮을라나.
3루를 돌면서 관중석을 보았다. 놀랐는지 입을 살짝 벌리고 있는 이오리가 꽤나 귀여워서, 손으로 키스를 날려 보내는 제스처를 했더니 목이 꺾어지는 건 아닌지 의심될 정도로 격하게 외면했다. 껄껄껄. 살짝 보이는 옆얼굴은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붉었다.
어쨌든 이걸로 약속도 지키고, 팀에도 체면치레는 했군.

경기는 8회부터 던졌었던 우리 팀 마무리 투수가 9회말 역시 말끔히 틀어막아 그대로 끝났다. 스코어 6대2. 비록 MVP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만족한다.

“어때. 이오리 양. 약속. 지켰다고.”

“흥! 초반에 엄청 못하길래 뭐라고 놀려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하잖아?”

“물론. 슈퍼아이돌이자 고져스의 상징이신 미나세 이오리 양과의 약속인데.”

“…날 놀리는 거지? 그 쓸데없이 거창한 칭호는.”

“그럴 리가요.”

경기장 밖에서 마미, 미키, 이오리와 만나 이야기를 하는 중에 옆 경기장 역시 마무리 되었는지 미우라 씨와 치하야 역시 걸어 나왔다. 미우라 씨는 나를 보자마자 빙긋 웃으며,

“자. 야구선수 씨. 이제 어디로 갈까요?”

라고 대뜸 말했다.

“가다뇨? 어디를?”

“물론 저녁 같이 해야죠. 야구선수 씨가 말하신 대로.”

벌써? 빨라. 게다가 아침도, 점심도 아닌 저녁을 같이 먹자는 건… 그 뒤에 또 부가적으로 뭔가 붙는다는 것이렷다?
뭔가 심장박동이 빨리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아… 그럼… 일단 가면서 생각해보죠.”

“네. 그렇게 할까요.”

지금까지 만나본 여자들 중에서 단연 이상형 1위인 미우라 씨와 단 둘이 저녁식사를… 막 긴장이 되는구만. 일단 심호흡부터 하는 게 좋겠다.

“에에- 아즈사 언니. 야구선수 씨랑 어디 가는 거야?”

“응? 아. 오늘 있었던 일. 야구선수 씨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내가 밥 사주기로 했단다.”

“헤에--”

마미는 나를 쿡 찌르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건 무슨 흉내냐.

“물론 마미쨩, 미키쨩, 치하야쨩에게도 똑같이 잘못했으니 같이 가야지.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아. 이오리쨩도 혼자 보내긴 미안하니까 이오리쨩도 같이. 어때?”

엥?
뭐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와-! 아즈사 역시 최고인 거야!”

“아즈사 언니. 통 크네!”

“잠깐. 정말 괜찮겠어?”

“미우라 씨… 저는 그냥 집에…”

“에이. 치하야쨩. 고집 부리지 말고. 괜찮으니까. 응?”

“……예.”

제아무리 치하야라고 하더라도 역시 미우라 씨의 저 분위기에는 섣불리 거절의 말을 꺼내지 못하지… 라는 건 둘째 치고. 어째서 다 같이 가는 분위기가 되는 거야? 단 둘이 식사는? 그 이후는?

“자. 그럼 야구선수 씨. 어디로 갈지 정하지 않으면. 후훗.”

“에… 뭐… 일단 차에 타죠.”

이래저래 우울한 날이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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