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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 동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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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14, 2016 22:36에 작성됨.

저물어가는 해가 비추는 창가의 색이 어느덧 어둡게 변해 있었다. 벌써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지만 밀린 업무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나의 능력으로 14명이나 되는 인원을 커버하는 것은 꽤나 버거운 일이었고, 때문에 제대로된 저녁을 챙겨 먹는것은 어려웠다.
슬슬 공복감의 유혹이 업무에 대한 의지를 지배해갈 무렵 활기찬 목소리의 주인공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수고 프로듀서! 미오 쨩이 왔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혼다 양."

내가 관리하는 14명의 인원들 중에서도 그녀의 미소는 항상 주위의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긴 업무로 답답해졌던 이 공간이 밝게 트인 느낌이 든 것은 그녀의 덕분이 아닐까.

"저녁 먹을 시간 됐는데 아직 일하고 있어?"

어느새 스윽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모니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되었군요."

"쯧쯧, 제 때에 식사를 챙겨먹지 않으면 오히려 업무효율을 낮추는 법이에요 프로듀서 군!"

흔치 않은 엄격한 어투로 정론을 펼치는 그녀에게 뭐라 답해줄 말이 없어 뒷목만 어루만지고 있자 불쑥 네모난 상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도시락 용도로 쓰면 좋을것 같은 상자인데.

"그런 의미에서 미오 짱이 도시락을 만들어 온 것입니다! 감사히 먹을 수 있도록!"

상자 뚜껑을 열자 정성스레 담겨져 있는 반찬과 세 개의 별이 김으로 장식된 흰 밥이 눈에 들어왔다. 시각과 후각으로 전해지는 자극에 정신이 아찔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시락 내용물은 온데간데 보이질 않았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다소 사라진 공복감에 의문을 품는 도중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옆을 바라보았다.

"한 일주일은 굶은 거야? 너무 급하게 먹잖아."

어머니가 날 바라보던 시선이 혼다 양에게서 느껴졌다. 불쑥 다가온 민망함에 목덜미를 더듬으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도시락에 정신이 팔려서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했군요."

"후후. 혼다 양은 잘 먹었다는 말 한마디면 만족해 프로듀서."

"...네. 정말, 잘 먹었습니다 혼다 양. 꼭 사례하겠습니다."

혼다 양은 배려를 곧잘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은 경우는 꽤 있었지만 이번만큼의 시기적절한 배려는 없지 않았을까. 감동과 고마움을 담아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별 거 아니라니깐. 참, 다 먹었으면 재밌는 걸 가져왔는데 한번 봐 줄래?"

"네. 무엇입니까?"

그녀는 들고 있던 가방에서 서적을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많이 익숙한 두 명이 미묘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진 표지에 불길함을 느끼며 제목을 읽었다. '시마부린의 화원'.

"호... 호... 호..."

"응. 말해 프로듀..."

"혼다 양! 이... 이런 책은 안됩니다!"

구석에 표시된 19세 금지 표시가 세간에선 '에로 동인지'라고 통용되는 바로 그것임을 나타냈다. 활달하긴 해도 이와 같은 퇴폐적인 서적에 관심을 가질 혼다 양이 아니었을 텐데. 나는 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그녀에게 다시 말했다.

"혹시, 이 책의 내용을 보셨습니까?"

"응!"

너무나 밝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어이없음과 황당함이 절반씩 섞여 헛웃음으로 배출되었다. 이건 또 내가 모르던 혼다 양의 일부분인가?

"적정 연령에 맞지 않는 책을 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게다가 이러한 종류의 서적은 자칫 성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에..."

"아하핫, 장난이야 프로듀서! 성실한 아이돌인 미오 쨩은 야한 책 따위 읽지 않는다구."

그럼 어째서 이 책을 내게 넘긴 것일까. 의문과 당황이 혼재되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 저절로 목 뒤쪽에 손이 갔다. 직접 읽지 않는다면 대신 읽어주는 것을 감상하겠다는 건가? 내가 혼다 양의 왜곡된 취향에 대한 가능성까지 고려해 볼 때쯤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게 말이지, 엄청 유명한 동인지란 말이지. 시마무와 시부린의 심리묘사가 뛰어나서 호평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 둘의 마음에 대해 공부가 필요한 프로듀서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온 거야."

"필요하지 않습니다."

담당 아이돌을 이해하기 위해 야한 책을 읽는 최악의 프로듀서가 될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혼다 양은 괜히 그런다는 듯 권유해왔다.

"독도 잘 쓰면 약이 되는 법인데 야한 책이라고 그렇지 않겠어? 정 야한 게 신경이 쓰인다면 야한 부분은 넘기고 보면 되는 거야."

"설령 이 책이 그녀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해도 읽는 것만으로도 시마무라 양과 시부야 양을 볼 낯이 없어지게 됩니다."

"이이잉! 너무 가드가 단단해 프로듀서!"

혼다 양은 땅이 꺼지듯이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과장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당황으로 이지러져있던 내 표정이 조금은 풀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튼, 이 책은 압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적절히 처리하도록 하지요."

"아하, 역시 혼자 몰래 보고 싶다는 거지?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네!"

"혼다 양!"

그렇게 그녀는 혼돈만을 남기고 사무실을 떠났고 나는 다시 업무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업무 속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였다면 좋겠지만 그녀가 남기고 간 혼돈의 존재감은 거대했고, 난 그것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내 자신을 책망해야 했다. 혼다 양에겐 잘난 듯이 설교한 주제에 한심한 내가 있었다.

"...서랍에라도 넣어 두자."

그렇게 동인지를 집으려던 찰나, 갑자기 창문을 타고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페이지가 촤르륵 펼쳐졌고 이윽고 내 시야에 들어온 동인지 내용의 습격에 나는 속절없이 당해야했다. 시마무라 양과 시부야 양이...

"아아아아앗!"

거의 잡아먹을 듯이 동인지의 표지를 덮었다. 하지만 번개같이 뇌리에 꽂힌 그 장면이 내 눈 앞에서 주마등처럼 아른거리는 것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아니야... 두 분의 그런 모습은... 정신 차려라, 나 자신이여...!"

"뭘 그렇게 재밌게 보고 계세요, 프로듀서 씨?"

위기의 순간엔 시간을 나노초 단위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을 깨닳을 수 있었다. 밝고 상냥한 시마무라 양의 목소리가 곁에서 내 안부를 묻는 순간부터 나는 현재 내 앞에 놓여진 혼돈을 숨기기 위한 찰나의 계산에 돌입했고, 그 결과 내 이성은 최대의 효율성과 신뢰성을 갖춘 방안을 모색해냈다.

"시마무라 양! 저기에!"

"네엣?"

시마무라 양이 깜짝 놀라며 내가 가르킨 방향을 돌아보는 사이 나는 재빨리 동인지를 등 뒤로 숨겼다. 이윽고 이어지는 그녀의 의문과 당황이 뒤섞인 시선에 대해 나는 명료하게 해명했다.

"...창문이 있군요."

"프... 프로듀서 씨! 놀리신 건가요!"

순진한 그녀를 속인 것에 죄책감이 들었어야 할 터였지만 뇌리에 새겨진 더 거대한 죄악감이 이미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비록 의도치 않게 보게 되었다고 해도 담당 아이돌의 그런 장면을 금방 잊어내지 못하는 내가 과연 프로듀서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이유로 등 뒤로 동인지를 숨긴 채 땅만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이 물어보았다.

"몸이 안 좋으신가요?"

뒤이어 서늘한 기운이 내 이마에 살폿 닿는 느낌이 들었다. 시마무라 양의 손이었다.

"시, 시, 시마무라 양!"

"앗, 저어! 저기, 죄송해요! 친한 사람들한테 해주던 버릇이라서요..."

물론 내게는 과분하고 감사한 그녀의 배려였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위험했다. 일단 그녀를 내보내서 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프로듀서, 등 뒤에 있는 건 뭔가요?"

폭풍은 두 번 몰아친다고 누가 그랬던가. 하필 이런 때에 날카로운 그녀에게 개탄하며 나는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아요. 아까도 뭔가 재밌게 보시던 것 같았는걸요."

내 등 뒤에 있는 혼돈에게 신경이 쏠린 나머지 난 그녀가 정말 적극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면 시마무라 양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내 등 뒤로 손을 내밀고 있었으니까.

"보여주세요!"

"시마무라 양,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어떻게든 그녀와 떨어져보려 했지만 한 손으로는 동인지를 숨기면서 꾸역꾸역 달라붙는 그녀를 얌전히 떼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시마무라 양에게 안긴 꼴이 된 나는 둘 곳 없는 시선을 하늘로 고정하며 간절히 호소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같아요. 후후."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이를 타개할 계책조차 나오지 않았다. 더 큰 문제는, 그녀와 붙게 되면서 모른 체 하려해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굴곡과 좀 전의 장면이... 아아아아!

"흐응, 즐거워 보이네? 둘 다."

"히에엑, 린 쨩?"

팔짱을 낀 채로 싸늘하게 쳐다보는 시부야 양의 등장 덕분에 나는 구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뒤이어 찾아온 죄악감과 그녀의 오해로 인한 곤란함이 해방감과 더불어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킨 탓에 나는 그녀의 구원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일단 시부야 양의 오해부터 푸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시부야 양,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오해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그러니까 제가 그냥 프로듀서가 보던 게 궁금해서, 그래서 프로듀서한테 손을 갖다 대고, 어 그리고..."

"손을 갖다 대?"

"우와아아! 이마에 가져다 댄 거에요! 그러니깐, 프로듀서가 아프신 것 같아서,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서..."

"가까이 다가가?"

"히익."

두 분이 대화를 나누는 틈을 타 나는 몰래 동인지를 서랍 안으로 숨길 수 있었다. 이로서 한 숨 돌릴 수 있었던 나는 설녀같은 모습의 시부야 양에게 취조 당하고 있는 시마무라 양을 지원하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뭔가 찝찝한 듯 했지만 나름대로 납득한 듯이 시부야 양은 표정을 풀며 입을 열었다.

"정말, 오해 살만한 행동 하지 말라구, 둘 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오..."

더불어 내가 숨기던 동인지에 대해서도 묻어갈 수 있었다. 동인지... 혼다 양이 가져온 혼돈은 이리도 큰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어쩌면 찰나의 순간 스쳐간 담당 아이돌의 옳지 못한 장면을 잊지 못하는 나에 대한 신의 징벌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신은 구원의 여지를 남겨주었고, 나는 거기에 응해 정신을 다잡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한시름 놓던 순간이었다.

"참! 아까 그 에로 동인지 2권도 있어! 여기서 시마무랑 시부린이 서로... 응?"

덜컥, 하고 문이 열리며 혼다 양이 돌아왔다. 재앙과 함께.

"에로 동인지... 요?"

"잠깐, 미오. 그 책 봐봐."

"아하하, 시부린? 시마무?"

그대로 동인지를 강탈해가서 펼쳐보던 시마무라 양과 시부야 양은 이내 얼굴이 빨개진 채로 동인지를 덮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프로듀서, 이런 취향 있었어?"

"아... 아니..."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두 명의 시선이 날 지탱하던 무언가를 무너뜨리는 느낌에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마무라 양의 곤란한 듯 한 미소에 나는...

"아..."

...생각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했다.

"으아아! 프로듀서가 고장 났다! 정신 차려 프로듀서!"

 

 


"미오. 프로듀서는 아직 괜찮지 않은 거야?"

"으음,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려나."

그 일이 있은 후로 두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프로듀서는 시마무와 시부린을 제대로 대하지 못했다. 어쩌다 둘과 마주치기라도 할 땐 그대로 엎드린 채 죄송하다는 말만을 반복했고, 이 때문에 시마무와 시부린과는 미팅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둘에게 필요한 전달사항은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프로듀서 씨, 정말 괜찮은 데도 너무 자책하셔서 곤란해요."

"다음에 만나면 꼭 전해줘. 나는 어떤 프로듀서도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예전처럼 대해 달라고."

"에엑, 그 말을 들으면 더 충격 받지 않을까? 일단 말은 해볼게."

간곡히 부탁하는 두 명과 헤어지며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언제나처럼 사무적인 내용의 문자가 한 통 도착해있었다. 프로듀서였다. 정말... 가끔씩은 전화로 하라구. 조금 화가 났기에 직접 전화를 걸기로 결정했다.

"여보세요. 프로듀서?"

'혼다 양. 수고하셨습니다. 항상 도움을 받게 되어 죄송합니다.'

내가 화가 났었나? 낮게 울리는 프로듀서의 목소리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짐짓 지친 흉내를 내며 그에게 말했다.

"프로듀서, 미오 쨩은 굉장히 피로해졌답니다. 게다가 배도 고파요!"

'...그렇군요. 곧 저녁시간이니, 함께 식사라도 어떠십니까.'

핸드폰 너머로 쿡쿡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은 내 착각이 아니겠지? 아무튼 이걸로 프로듀서와의 식사권을 획득했다! 흐흥흥, 무슨 이야기를 할까나.

"응, 갈래! 사무실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알겠습니다.'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아까 그녀들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프로듀서에게 예전처럼 돌아와 달라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었지. 시마무와 시부린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곤란한걸.

아마도 프로듀서는 모를 것이다. 내가 프로듀서와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그를 돕는다는 것을.
아마도 시마무와 시부린은 모를 것이다. 그녀들이 프로듀서와 가까워지는 걸 내가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아마도 그들은 모를 것이다. 지난 번 에로 동인지 사건이 모두 나의 계획 하에 일어났다는 걸. 왜냐면...

...프로듀서는 나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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