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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판타지] 숲의 무덤 -3-(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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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08, 2016 19:01에 작성됨.

"오니기리 교, 여러분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사람의 발길도, 난세의 소문도 닿지 않는 깊숙한 숲 속. 바람이 실어다 준 풍문만이 세상의 풍파를 실어다 날라주는 이 땅의 최심부에서, 지금 세상을 뜨겁게 적시고 있는 화두가 등장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자는, 이 숲에 은둔한 엘프였다.

 

"최근 날뛰고 있는 그것들 말이군요. 그럼 습격해 온 자객들의 정체는......"

 

"오니기리 교의 신도들, 별의 찌꺼기들이죠."

 

오니기리 교, 최근 각지에서 크고 작은 살인사건을 일으키는 광신도 집단이다. 닛타 미나미는 아인헤리야의 수장으로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종종 접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점조직인 데다, 기껏 잡은 사람들도 자살 등의 이유로 금새 죽어버려 큰 정보는 없었지만 그녀는 이 세계에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갖고 있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신을 믿는 자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건 항상 있던 일입니다."

 

그런 그녀조차, 오니기리 교에 대해선 그 정도의 인식밖에 없었다. 최근 각지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사교로, 신을 믿는다는 다른 사교들이 일으키던 문제를 조금 더 큰 스케일로 일으키고 있다는 정도의 인식이었다. '전부 다 산채로 찢어서 잘 마르게 널어두면 금방 가라앉겠지' 라는 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몇 번인가 그렇게 한 적도 있다.

 

"평범한 신도들 상대로, 나나 아냐가 몰래 움직일 거라고 생각해?"

 

"어지간히도 맛있어 보이는 놈들인가 보지? 왕국은 법으로 식인을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뮤즈 쯤 되면 자기가 임명한 퍼스트 오더도 막 부르나 보는군."

 

아냐. 아냐스타샤의 애칭. 닛타 미나미가 자주 불렀던 호칭이다. 미나미가 붙인 쓸데없는 사족을 듣고 에리가 웃으며 말했다.

 

"부족을 통째로 실험쥐 취급해놓고 애완동물처럼 부르던 어느 나라보다야 낫지. 특히 닛타 가문보다는 말이야."

 

"그만하세요. 여기서 싸우실 생각이라면 우선 절 상대해야 할 겁니다."

 

둘 사이에서 튀기던 불꽃이 숲을 태울 거라고 생각한 건지, 오토하 우메키가 단호한 목소리로 중재에 들어갔다. 에리가 우선 시선을 거두었다. 미나미도 뒤이어 시선을 거두었다. 뮤즈의 일원과 아인헤리야의 단장, 제국의 퍼스트 오더와 포지티브 패션의 부대장이 비밀리에 움직일 정도의 일이다. 싸워서 좋을 건 없다.

 

".....즈베즈다, 설명 부탁드립니다."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둘을 번갈아가며 쳐다보며 발만 구르던 그녀는, 그저 이 상황이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먼 옛날, 한 악신이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답하듯, 오토하 우메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시 무지개 색 안개가 그녀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악신은 세상에 혼돈을 불러와, 세계를 파멸로 이끄려는 자. 밤하늘에 홀로 고고히 빛나기 위해, 다른 빛나는 모든 것을 지워 없애려는 자. 당연히도, 그 신은 봉인당하고 유폐당해 이 세계의 외축으로 쫒겨나게 되었습니다."

 

"살아남았던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말이지."

 

아야세 에리가 사족을 붙였다.

 

"하지만 그 악신은, 봉인당하고 나서도 이 세상을 파멸시키겠다는 뜻을 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악신은 오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도들로 몇 번 소란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 모든 시도들은 별빛의 이름조차 알리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사라졋습니다."

 

그녀들은 어느 새인가 안개 속을 걷고 있었다. 나무 뿌리와 돌 때문에 걷기 어려워야 할 굴곡진 길이, 우메키 오토하의 뒤를 따라오는 것 만으로 알아서 자신을 치운 듯 한 편안한 발걸음이었다. 이 속을 계속 걷게 된다면, 세상의 끝에 편안히 도달할 정도로 가벼운 산책로.

 

"하지만, 그 오랜 시도는 이 왕국에서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 산책로에, 갑자기 피보라와도 같은 것이 차올랐다. 끔찍한 살기와도 같았지만

 

"미시로 왕국, 그들이 세운 연구소, 그들이 저지른 학살."

 

"....살기가, 아니야."

 

그것은, 원념이었다. 엘프와 실험체들이 죽어가며 남긴 무언가가 이 숲의 바닥에 응어리져 있었다. 하나가 아니다. 수십, 수백, 수천, 셀 수 없는 원망의 통곡만이 남아 이 숲의 바닥을 잠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오토하 우메키의 호흡에 맞춰, 바닥에서 새어나왔을 뿐이다. 무지개 빛 안개는 어느 새 끔찍한 색으로 물들어, 살아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울 듯 울부짖기 시작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그녀들의 몸 곳곳을 파고들었다.

 

"스, 스승님!"

 

타카모리 아이코가 우메키 오토하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뒤돌아보고 미소지으며, 자신의 어깨에 닿은 타카모리 아이코의 손을 내려놓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 동족의 원념 속에서도 그녀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상황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평온함이, 타카모리 아이코의 뇌리에 공포를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스승님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희로애락을 가진 존재였다. 언제나 웃는 광인이 아니었다.

 

"......이거,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이는 것 같은데."

 

아야세 에리가 말했다.

 

"어차피 돌이키기엔 늦었습니다. 왕국이 이 땅에 쌓아올린 죽음과 원념은 '별빛'이 다시 이 세상을 밟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왕국의 죄악에 삼켜진 자들은, 무간지옥을 방황하다 별빛에게 도달한다. 세계의 외축으로 추방당해 고통의 바다를 허우적거리던 자들은 단 하나의 별빛과 마주했다. 공허해야 할 어둠을 꽉 채우고, 고통의 바다를 피의 바다로 바꾸고 시체의 대륙을 쌓아 찢어져 간 눈물이 무자비한 세계에서 추방될 때 눈물을 핥은 별빛은 비로소 그들을 본다. 그들을 듣는다. 그들에게 대답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개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짐은 가벼움이라."

 

요사스런 불빛이 반짝인다. 죽어간 모든 생명을 위로하듯 빛나는 그것은, 영혼을 꾀는 집어등처럼 수 많은 원념을 모으고 있었다. 끔찍한 색으로 휘몰아치는 악의 속에서, 한 마리의 구미호가 제 세상을 만난 마냥 춤추며 나타났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시오미 슈코. 멋대로 군문을 이탈하고서 염치도 없이 잘도 나타났군요."

 

"학살자 주제에 염치도 없이 이 땅을 걷는 사람들도 있는데 뭐. 나 정도는 양심적인 편이라고~"

 

닛타 미나미가 크로스보우를 들었다. 노리는 것은 시오미 슈코의 목.

 

"잠깐만요!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죠? 왜 우릴 쫓아온 거에요?! 마치, 지금이라도 우릴 죽일 것 처럼......"

 

"아이코, 우선 분쟁을 피하려고 보는 건 네 나쁜 버릇이야."

 

한 때 앱솔루트 나인에 소속되어 왕국을 구했던 영웅, 시오미 슈코가 적의를 품고 나타났다. 그 때와 같은 가벼운 말투, 그 때와 같은 구미호의 모습. 하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달랐다. 이 적의, 살기, 동료였던 시절은 전부 잊은 듯 한 악의, 그리고

 

"....아, 잠깐만 이거 나름대로 센 공격인데 한번에 막힌 거야?"

 

"죽어."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무자비함. 순수한 신앙을 간직한 광신도와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시오미 슈코는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음을 자기 입으로 고했다. 아이코가 말릴 새도 없이, 닛타 미나미가 발사한 볼트가 시오미 슈코의 이마에, 목에, 가슴에, 골반에 박혀들어가 폭발했다.

 

"닛타 미나미, 아냐를 데리고 무덤으로 들어가."

 

아야세 에리가 무덤을 가리키며 말했다. 원념의 폭풍 속에서, 참격황제묘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슨 생각이지?"

 

닛타 미나미가 물었다.

 

"토토키 아이리의 무덤을 봉인한 건 네 선조다. 자기 혈족이 아니면 무덤을 열지 못하게 해 놨지. 다음 절차는 아냐가 알고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지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우불 수십 덩어리가 둘에게 날아들었다. 타카모리 아이코가 방패를 들고 불덩이들을 막아섰다. 원념이 가득 실린 불덩이들이 그녀의 쇠방패를 조금 '태우다' 사라졌다.

 

"어라~ 그거 내 앞에서 해도 되는 말이야? 생큐! 잘됐네 미나미 대장님!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런데 너무해너무행~ 옛 동료를 주저없이 폭살시킬 줄이야~"

 

"......몸을 세로로 찢어 폭파시켰는데 잘도 살아남았네."

 

닛타 미나미는 시오미 슈코의 죽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찢긴 옷을 아깝다는 듯 바라보며 다음 공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불덩어리들이 다시 쏟아져 내린다.

 

"시간이 없어! 빨리!"

 

"그렇네, 시간이 없지! 이 원념들이 전부 내 거가 되면 그 칼은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

 

시오미 슈코가 팔을 내밀었다. 그녀의 불꽃에 이끌린 원념들이, 마치 불을 향해 돌진하는 날벌레들처럼 여우불 속으로 들어간다. 탁하고 끔찍한 색의 불꽃이 슈코의 팔에 감기며 모여든다. 아이코가 방패를 땅에 박은 순간, 지옥불의 폭류가 숲을 휩쓸며 태워버리기 시작한다. 

 

"아이코쨩한테 원한은 없지만..... 거기 있는 제국의 개새끼랑 같이 죽어줘야겠어."

 

"제국에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뭐 좋다, 짖어봐. 여우가 뭐라고 짖는지 궁금하네. 어차피 네 원한도 아무런 소득 없이 허망하게 질 거니까."

 

얼음의 꼬챙이가 불타는 바닥을 뚫고 시오미 슈코를 아래에서 위로 꿰뚫어버린다. 열기 때문에 얼음이 녹아내리자, 슈코가 그 구멍에서 자궁과 콩팥부터 간에 심장까지 온갖 내장을 다 쏟아낸다. 원념의 불꽃이 떨어진 내장을 구워버리고 새로운 내장을 만들어낸다. 시오미 슈코는 죽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 내장이 찢기고 타들어가는 고통을 달콤하게 음미한다. 그분께서 주신 힘이, 지금 제물을 바라고 있다.

 

"......죽인다, 죽여버리겠어. 아니, 그냥 죽일 순 없지 너희 뮤즈만큼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아. 원념의 불꽃 속에서 영원히 타올라라.

세상은, 그분께서 주신 별빛 아래 타오를 거다! 이, 이히히히히히히히히힛!!!! 그분이 불길을 내리셨도다!"

 

무의미한 죽음을 양식 삼아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들이, 지금까지 먹어치운 통곡을 불길과 함께 내뱉는다. 참혹함이 타오르는 숲이 검은 연기를 하늘로 토해낸다.

제발 그 어딘가에 닿아주소서. 허망한 탄소 조각들만 소망처럼 하늘에 흩어져간다.

 

 

 

-----

 

 

 

"........."

 

무덤 바깥에서 불똥이 튀어들어온다. 견고한 돌로 만들어진 무덤이, 어째서인지 불똥에 닿아 천천히 타들어간다. 그 불길을 볼 때마다 영문 모를 처참함이 느껴진다.

닛타 미나미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물론 발은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에서 도망치듯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앞질러 나가던 아냐스타샤가 중간중간 벽에 부딛힐 때 마다, 그녀는 손을 뻗을 뻔 했다.

 

"...하아, 하아... 믜나믜?"

 

잘라버릴까.

그녀는 자신의 손과 아냐스타샤의 목을 번갈아보며, 둘 중 어떤 거라도 자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 그녀를 죽이고 시체를 엠버밍한다면 자신의 곁에 영원히 둘 수 있겠지. 다시는 배신도 못 하고, 어디로 가지도 못 하는 그런 존재로.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목만 자르고 가도 좋다. 목만 자르면 어디든지 데리고 다닐 수 있으니 어떤 면에서는 그쪽이 더 좋다. 아니, 그럴 거면 번거롭지만 목을 잘라 죽인 다음에 양쪽 다 챙기고 오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출장갈 때도 저택에서 쉴 때도 업무중에도 언제나 함께.

그렇게 해야만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전부를 같이 해 왔던 그 나날이, 무너진 유적에서 그녀를 처음 본 그 순간이 돌아온다.

 

숨이 차오른다. 달린다. 이 무덤이 정답이라는 건지, 통로가 안쪽 깊숙한 곳까지 이어진다.

 

"곧, 도착이에요. 힘내요."

 

".....꼭 필요한 말 할 거 아니면 닥치고 있어."

 

"....."

 

이윽고, 불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 되었다. 따로 준비해온 등잔에 의지해, 벽을 더듬어가며 전진한다. 지금이라도 뛰어가야 하는데, 바로 그녀가 눈 앞에 있는데, 발 아래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서 뛸 수가 없다. 왜 그녀에게 닥치라고 말한 걸까. 닛타 미나미는 어째서인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였다. 저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듣고 싶다.

하지만, 이루어 질 리 없는 소원이다. 이루어져선 안 된다.

 

[그렇다면, 내가 이루어 줄께.]

 

별빛이 속삭인다.

 

"......."

 

[거부하지 마라. 짐이 무거운 자여. 이루어져서는 안될 마음을 안고서 번뇌하는 그 모습이 안쓰럽구나......]

 

밤하늘을 허우적대는 자는, 이윽고 별빛을 만나게 된다. 수 많은 나락이 이 심연에서 별빛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놓았다.

 

[그렇다면, 내게로 오라. 내게 귀의하라. 내가 그대의 마음을 달래고 어루만져주겠다. 그 안타까움을 이뤄 주겠다. 자 보아라, 그녀는 바로 네 앞이다. 그 손을 뻗는다면 능히 붙잡을 수 있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얼굴도, 목도, 쇄골도, 가슴도, 어깨도, 팔꿈치도, 손목도, 손가락도, 손톱도, 배도, 내장도, 등도, 척추도, 골반도, 허리도, 음문도, 허벅지도, 둔부도, 항문도, 종아리도, 무릎도, 아킬레스건도, 발목도, 복사뼈도, 발등도, 발바닥도, 발가락도, 발끝도

그리고 목소리도, 그녀의 마음도.]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기 위해선,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을 밟고 가야 한다. 그녀가 쥔 작은 등불로는 택도 없었다.

 

[어둠이 무섭더냐?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지 알 수 없구나. 안다. 저 아이는 널 거부할 수도 있겠지. 그리하면 넌 저 사이의 어둠에 빠질 거고. 하지만 걱정 마라. 내가, 이 찬란한 별빛으로 네 길을 알려 주겠노라. 별빛에 의지해서 걷거라. 믿음이 있는 자는, 어둠의 나락과 사망의 골짜기도 기뻐하며 걸을지니.]

 

"도착했어요... 믜나미? 무슨 일이에요?"

 

아냐스타샤가 문 앞에 도착했다. 그 문 앞에는 액체를 담을 수 있는 얕은 그릇이 있었다. 의식용으로 쓰라고 둔 녹슨 칼도 있었다. 사용법은 따로 듣지 않아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나의 아이야, 별빛을 받아들이거라. 너는 별빛과 그녀로 네 마음을 채울 것이다. 날 받아들여라. 그리하면 그녀는 이미 네 손 안에 있을 것이니.]

 

닛타 미나미는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이 손으로, 그녀의 손을, 아냐스타샤의 모든 것을 쥘 수 있다. 그녀를 쥐지 못할 바엔, 존재할 가치조차 없는 손.

 

[지금이다, 망설이지 말거라!]

 

그녀는 손을 뻗었다.

 

 

 

 

 

 

녹슨 칼을 향해.

 

"필요 없어."

 

닛타 미나미의 손목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앝은 그릇 안에 피가 넘치도록 차올랐다. 그보다 더 많은 피가 전실 앞을 붉게 칠했다.

 

"필요 없다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칼로 손을 내리찍었다. 녹슨 칼이어서 잘 잘려나가지 않는다.

 

"믜나믜!!!"

 

참격황제의 묘가, 학살자가 안치된 전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스스로를 기만하느냐, 네 나약함을 직시하] "손에 넣을 수 없다면, 차라리."

 

피가 솟아나는 곳에서, 검은 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별의 침식이 시작되었다.

 

[언제까지 버티려 하느냐. 네 거짓된 위안은 이미 끝났다.]

 

"그럼, 둘 다 같은 거네."

 

닛타 미나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손목을 찍었다. 지금이라도 자기 허리에 있는 날카로운 칼을 쓰고 싶지만, 지금 여기서 칼을 놓아버렸다간 완전히 먹혀버릴 것만 같은 예감에 자기 손목을 계속 눌러찍었다. 아나스타샤는 어느 새 사라지고 없었다. 어차피 손에 넣지 못할 거라면, 여기서 잘라버려도 나쁘진 않으리라.

전실 깊숙한 곳에 보이는 저 검은 잘 들을 것 같다. 저것에 살해당한 원령들을 잔뜩 머금은 지금이라면 특히나. 그 날카로운 검이, 그녀의 눈이 뿌리에 덮히기 전 마지막으로 비춘 것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주문을 외우던 아냐스타샤와 함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주문 말고 무슨 말을 했던 것만 같았는데 들리지 않아.

 

 

---

 

 

 

".....아슬아슬하게 이쪽의 승리입니다."

 

원령의 소동이 멈췄다.

 

"아냐가 의식을 잘 해 준 모양이네."

 

타고 또 타서 숯이 재가 되어버릴 정도로 타버린 숲 한가운데, 끔찍하게 타오르는 무덤을 등지고 셋이 서 있었다.

 

".....불사성을 갖추고, 거기에 이 화력이라. 정말 규격외로군. 솔직히 감탄했어. 아이코가 여기까지 버틴 게 기적이네. 하지만, 할 일을 제대로 못해서야 네 신한테 귀여움도 못 받겠지? 여우 목도리가 네 최후일 것 같군."

 

"칫....."

 

시오미 슈코가 혀를 찼다.

 

"이 학살자는, 인과를 끊어내는 수준에 도달했던 겁니까..... 학살자 따위가 지니기엔 아까운 힘입니다."

 

어느 새 우메키 오토하의 손엔 검이 들려 있었다.

토토키 아이리, 참격황제라 불리는 영웅이자 학살자의 상징. 그 상징이 지금 학살당하던 자의 손에 쥐어졌다.

 

"....뭐, 됐어. 내놔!"

 

시오미 슈코가 달려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완성된 칼을 빼앗을 생각인 것이다.

 

"시험삼아 베 볼까."

 

우메키 오토하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한 투로 가볍게 말하곤, 달려드는 시오미 슈코를 향해 적당히 칼을 휘둘렀다.

직후, 우메키 오토하의 양 팔이 대각선으로 잘려 날아갔다.

 

"......아이코, 치료 부탁해요. 그리고 에리는 지하에서 둘을 회수해 주세요."

 

"네, 넵!"

 

양 팔이 날아가고도 차분한 스승의 모습에, 아이코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치료를 시작했다.

시오미 슈코는 보이지 않았다. 대충 공간을 썰어버린 검의 여파에 휩쓸려 뼈도 안 남은 것이다. 인과가 잘린 이상, 이 곳에서 부활하지는 못하리라.

 

 

 

 

 

 

 

 

 

[아야세 에리 비밀리에 왕국 남부 방문. 아인헤야르는 무단 침입 의혹 해명 요구......]

 

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르다, 라고 한탄하던 노인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닛타 미나미는 어렴풋이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어렸을 땐, 아냐스타샤와 함께했을 땐 이렇게 소식을 빨리 전달해주는 신문 같은 매체는 없었다.

 

".....사쿠라이 가의 로즈티는 맛있네."

 

그곳의 로즈티는 맛 좋은 걸로 유명하다. 홀로 남은 닛타 가의 후예인 미나미는, 오랬만에 호사를 즐겨보기로 정했다. 닛타 가의 재산이 다 굴러들어왔기 때문에 돈은 부족하지 않았다. 설탕을 듬뿍 넣은 로즈티의 향이 미나미의 입과 코를 가득 메웠다.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와요."

 

잠깐 업무 중 호사를 누리던 도중, 연락병이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들어오라고 말하자, 연락병은 경례와 함께 들어오곤 보고를 시작했다.

 

"오니기리 교의 신도들을 명령대로 찢어 매달았습니다. 다만, 미관과 위생상의 이유로 몇 건인가의 민원이....."

 

"알았어요. 그 부분은 제가 처리하도록 하죠. 곧 대책을 내놓겠다고 전해주세요."

 

오니기리 교는 마치 독버섯처럼 곳곳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닛타 미나미는 오니기리 교 숙청에 한층 더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예?"

 

"내 앞에서 네놈들의 더러운 냄새를 숨길 생각 하지 마."

 

타앙, 마른 총소리가 집무실에 울려퍼졌다. 병사의 주머니 속에서 오니기리 교의 문양이 그려진 종이가 삐져나왔다.

그들은 사회 각지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영웅 사이에서도, 평범한 사람도, 그리고 사회의 바닥에서도, 기사단에서도, 왕실에서도. 닛타 미나미는 그것이 솟아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시체는 나중에 처리할까."

 

아무튼, 지금은 호사를 누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로즈힙 티가 달콤했다.

 

[아야세 에리의 무단 침입 사건에 대해, 미시로 왕국은 오토노키자카 제국의 퍼스트 오더를 왕국으로 송환할 것을 요청하여.......]

 

그런 더러운 것의 힘을 빌어 손에 넣게 된다면, 이 차도 더이상 달콤하진 않을 것이다. 닛타 미나미는 그렇게 생각하곤,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극악무도한 짓이 아니라면, 다른 것은 괜찮을지도 모른다. 절대적인 악의 존재란 로즈힙 티보다 달콤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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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키 아이리의 검]

그녀가 남긴 여러 유물 중, 그녀의 힘이 깃들어있는 것은 이 검 뿐이다.

왕국에선 이를 여러 방법으로 이용해보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으나 결과는 절망적일 뿐이었다. 따라서 당시 몇몇 실험에 관여하고 있던 닛타 가의 당주가 이를 엘프헬름 깊은 곳에 봉인했다. 나중에 자신이 써먹을 수 있도록 우회로를 남겨두고서. 정작 본인은 쓰지도 못하고 정쟁에 말려들어가 사망했다.

토토키 아이리에 의해 학살당한 자들의 원념을 모아 휘두르는 이 검은, 인과를 자르고 공간을 썰어낸다. 그녀가 남긴 힘의 잔재와 원념이 합쳐진 이 검은, 실력있는 자의 손에 들어간다면 신을 죽일 수 있는 명검이 된다. 호노카가 멀쩡했다면 그녀가 썼을 테지만, 골골대는 이 상황에서 검은 누구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인가.

물론 제대로 못 쓰면 자기 몸 어디가 날아가거나, 그냥 안 망가지는 묵직한 칼일 뿐. 참고로 요리 용도로 쓸 땐 어째서인지 엄청 잘 듣는 좋은 식칼이 된다. 그리고 애플파이 제작 기능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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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썼다아!!!

오니기리 교의 사도들과 별빛의 신을 죽이기 위한 무기 정련 및 전력 확보를 위한 여정이 끝났습니다. 사도들이 날뛰기 시작한 이상, 이쪽도 여러 가지로 전력을 보강해야죠.

 

아무튼, 오래 기다리시던 분들에게 사과드립니다. 개인 사정 때문이라지만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일단 후기를 길게 쓰진 못할 것 같네요. 곧 밥을 얻어먹으러 가야 해서 말이죠. 공짜밥!

 

다음엔 누구 이야기를 쓸까~ 아, 유키미쨩이랑 모모카쨩이나 한 번 더 굴릴까? 역시 둘의 이야기가 너무 밝았죠? 나햐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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