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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 신데렐라 걸스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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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02, 2016 02:53에 작성됨.

<밤 바다의 이정표>

<First Step>

<인내의 삶>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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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프로덕션의 본관 최상층에는 사장실이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굴지의 대기업으로 자리한 765프로덕션이나 961 프로덕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CG프로덕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대기업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CG프로덕션의 사장 또한, 처음부터 회사의 경영자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765프로의 타카기 준이치로, 타카기 준지로 형제. 961프로의 쿠로이 타카오.

말단 프로듀서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아이돌 전국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CG프로덕션의 사장 또한 말단 프로듀서에서 시작하여 일개 회사의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오른 수완가 중의 수완가였다.

 

그런 CG프로덕션의 사장실 문 앞에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큰 남자였다. 사장실의 문은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지만, 그 앞에 선 남자는 그에 못지 않게 키가 컸다. 

아직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소매가 긴 린넨 셔츠를 입고, 짙은 감색 정장 재킷을 한쪽 팔에 걸고 있었다. 아무리 린넨이 시원한 재질이라고는 하지만, 아스팔트에서 날달걀이 익을 정도로 정신나간 폭염을 자랑하는 이 날씨에서 잘도 그런 차림새로 돌아다니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멀뚱히 문 앞에 서서, 문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왼팔의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8시 30분. 이제 곧 업무를 시작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약간 초조해진 그가 습관처럼 오른쪽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을 때, 조용히 사장실 옆에 있는 부속실의 문이 열리고 유니폼 차림의 여성 비서가 나왔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그는 사장실의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아, 들어오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대답을 하면서 그는 문고리를 쥐고 그것을 크게 돌렸다. 철커덕, 하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새로 새어 나오는 아침의 햇빛이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갔다. 방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자신을 향해 폭포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왼쪽 눈을 감으며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잠시 후, 눈이 빛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때, 그는 조심스레 감고 있던 왼쪽 눈을 떴다. 빛에 익숙해진 그의 눈에 통짜 유리로 되어 있는 벽 너머로 비치는 장엄한 마천루의 풍경을 등지고, 커다란 사무용 책상에 앉아 있는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역광을 받고 있는 탓에 제대로 보이는 것은 그의 실루엣뿐이라지만, 사장실이라는 방의 분위기에 전혀 눌리지 않는, 대기업의 총수(總帥)에 걸맞은 관록을 두르고 있는 그 모습을 앞에 두고, 뜻밖에도 남자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휴가는 재미있게 즐겼나?’

“사장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병가로 처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야지 사람 귀한 줄 알 거 아닌가? 네 부서 사람들도 말이지.”

“하하, 그런 거 알아서 뭐한답니까. 때가 되면 다 헤어지고 떠날 관계인데.”

 

그렇게 딱 잘라 말하는 그를 바라보던 사장의 이야기에 한숨이 섞였다.

 

“여전하군, 너도.”

“쉽게 변하면 그게 사람인가요.”

 

남자는 한숨 섞인 사장의 말을 가볍게 받아넘겼다.

 

”그나저나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설마하니 신문에 그렇게 대문짝만하게 박아주실 줄은 상상도 못 했네요.”

“으하하, 어떠냐? 맘에 들었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출근하자마자 쥐구멍부터 찾았어요. 어쩐지 회사 올라오면서 계속 시선이 느껴지더라니.”

“뭐 이미지 광고도 하고 좋잖아? 이봐!”

 

사장은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큰 목소리로 부속실을 향해 비서를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아아, 내가 월요일에 따로 모아놓은 안건들, 전부 모아서 갖다 줘.”

“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비서가 부속실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사장은 사장실 한 켠에 설치된 소파로 향했다.

 

“이리 와서 앉게.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부속실의 문이 열리면서 터질 듯이 빵빵하게 채워진 파일을 든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맙네.”

 

꾸벅, 허리를 깊숙이 숙인 비서가 다시 부속실로 사라진다. “이게 본론인데 말이지.”라고 말하며 사장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보며 자신이 들고 있던 파일을 내밀었다.

 

“너 이건 기억하고 있지?”

“네. 제가 시작한 일이니까요.”

“일단 다 검토는 해 봤다. 네가 하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통에 임원회의에서도 몇 번이나 이야기가 나왔고 말이야.”

 

사장은 파일 안에서 서류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표지에 회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기획서들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얼핏 보았을 때는 제출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자세히 보면 단 한 군데,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다름아닌 ‘결재’부분에 사장의 직인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자, 지금부터 한번 이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자고.”

 

자신의 앞에 서류들을 늘어놓는 사장의 모습을 보며 남자는 꿀꺽,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서류를 늘어놓은 사장은 자신의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팔짱을 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경영자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면서 또다시 입 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준비됐나?”

“네.”

“그럼, 어디 한번 해 봐.”

 

마지막 고비. 이것을 넘지 못하면 이 계획은 전부 물거품이 된다.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거인의 시선을 받으며 남자, 프로듀서는 손을 뻗어 자신의 앞에 놓인 사업계획서를 집어 들었다.

 

 

 

***********

 

 

 

평소보다 약간 이른 시간에 출근한 카에데는 에어컨의 바람이 나오는 곳에 설치된 소파에 앉아서 아침의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거의 사라져 갈 무렵, 얼음이 둥둥 떠있는 머그잔이 든 쟁반을 들고 치히로가 소파로 다가왔다.

 

“여기요, 시원한 차라도 드세요.”

“고맙습니다. 8월이라 그런지 무척 덥네요.”

“그렇죠? 저도 그래서 조금 일찍 출근했어요. 회사는 에어컨이 공짜니까…….”

 

카에데의 옆에 앉아서, 얼음이 연주하는 쨍그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치히로는 프로듀서의 자리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그의 자리에 걸려 있는 팻말은 ‘휴가중’이라는 단어 대신 ‘자리 비움’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있었다.

 

“그나저나 별일이네요. 사장님께서 프로듀서씨를 직접 찾으실 줄이야.”

“그러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으응, 시원해라…….”

 

후루룩, 하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카에데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우리 왔어.”

“안녕하세요~.”

 

프로듀서가 사장실에 올라간 지 30분 정도가 지나고, 얌전히 앉아 있던 카에데가 소파 위를 뒹굴거리기 시작할 무렵, 사무실의 문을 열고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세 사람이 모습을 나타냈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들어온 그들은 사무실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에어컨이 있는 소파 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어서와요, 밖에 많이 덥죠?”

“아으,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얼마나 뜨거운지…….”

“역시 사무실이 최고구나. 에어컨 최고…….”

 

에어컨의 바람을 맞으며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짓는 세 사람 중에서 카렌이 아직 비어 있는 프로듀서의 자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P씨는? 오늘부터 출근 아니야?”

“사장님께서 찾으셔서 사장실에 갔어요. 이제 슬슬 오실 때가 됐는데…….”

“우왓, 카에데씨?! 언제부터 계셨어요?”

“조금 전에 왔어요. 아침부터 너무 더워서요.”

 

소파에서 불쑥 튀어나온 카에데를 보며 흠칫 놀라는 세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던 치히로는 문득 그들에게서 무언가 특이한 점을 찾아냈다.

 

“저기 세 사람, 가방에 달고 있는 그거는 처음 보는 거네요? 새로 샀어요?”

“이거요? 그러니까……새로 샀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린, 말해도 될까?”

“그걸 나한테 물어봐도……뭐, 프로듀서가 딱히 비밀로 하라는 말은 없었지만.”

“뭐, 그럼 말해버려야지. 참고로 나오도 공범이니까.”

 

그러자 등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들어올려 등으로 에어컨을 쐬고 있던 나오가 발끈하며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하아? 어째서!?”

“그야 우린 ‘셋이 하나,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잖아?”

“어째서 여기서 캐치프레이즈가 나오는 건데.”

“자, 자, 아무튼 그건 됐고.”

“안 됐거든!?”

“이건 말이지, 그러니까 어제…….”

“얌마! 카렌!”

 

웃음기 띤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는 나오를 힐끔 바라보며 카렌은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프로듀서의 휴가 마지막 날인 수요일.

평소보다 약간 이른 시간에 레슨을 마치고, 이후에는 그대로 자유시간을 가져도 좋다는 마스터 트레이너의 허락을 받은 세 사람은 곧장 시부야로 향했다.

 

“요샌 날이 더워서 그런가 트레이닝도 별로 안 세네.”

“그러게, 예전엔 마스터 트레이너가 붙으면 그냥 기어서 돌아가는 게 일상이었는데.”

 

세 사람이 나름대로 인지도를 얻고 얼굴이 팔리게 된 이후부터는 이렇게 여유가 생길 때면 한번씩 시부야를 찾곤 했다. 딱히 시부야에만 번화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젊음이 모여드는 심장부인 시부야는 유행이 시작되고 저무는, 시대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철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쇼핑몰의 벽면에 걸린 커다란 화장품 광고가 그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넓은 초원에 서서, 바람에 나부끼는 짙은 녹색의 드레스를 걸친 타카가키 카에데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스틸컷이 들어가 있는 광고판이었다.

 

“와, 저거 아직까지 있네. 저번 달에도 있었지?”

“저런 거 볼 때마다 참 신기하지 않아? 사무실에서 계실 때는 전혀 저렇게 안 보이는데 말이야.”

“누가 상상이라도 하겠어? 저 ‘신록의 숙녀’가 사무실에서는 아재개그나 툭툭 던지는 사람일거라고…….”

 

큰 길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가면, 여기저기 산재해있는 음반가게와 팬시샵마다 걸려 있는 자신들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데뷔 후 반년이 지나 나온 앨범. 늦게 나온 만큼 공을 들였기 때문인지, 세 사람의 정규앨범인 ‘Trancing Pulse’가 발매된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노래와 세 사람의 인기는 쉽사리 식을 줄 몰랐다.

수많은 아이돌들이 등장하고 쇠락하기를 반복하는 아이돌 전국시대라는 표현이 걸맞게, 시부야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신인들의 얼굴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한 격류 사이에서도 꿋꿋이,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그 격류를 이겨낼 정도로 강한 저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기’라는 저력을.

 

“여기서도 라이브구나. 어쩐지, 우리 빼곤 다들 열심히 하는 것 같네.”

 

골목길을 지나며 소극장의 입구에 걸려 있는 포스터를 바라보며 나오가 씁쓸한 듯 중얼거린다. 그런 그녀의 말을 린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서 걷고 있던 카렌이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건 그렇다 치고, 왠지 P씨라면 이런 데 있을 것 같지 않아? “시장조사다”라면서.”

“하하, 맞아. 지금쯤 저기 입구 같은 데서 딱 튀어나오면서 마주칠 것 같……?”

“”아.””

 

카렌이 극장의 입구를 가리키며 프로듀서의 말투를 흉내 내던 그 때, 그녀의 손 끝이 향한 곳에서 걸어나오던 한 남자가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쓰던 뿔테안경 대신 아래쪽에만 테가 들어간 반무테 안경을 쓴 그 남자는 평소의 정장 차림이 아닌 펑퍼짐한 반팔 셔츠 아래에 암슬리브(주: 쿨토시라고도 하는 것)를 차고, 얇은 재질로 된 긴 바지를 입고 있는 차림새였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극장을 나오던 남자는 입을 딱 벌리고 있던 세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그러자 그는 가방을 오른손으로 몰아 쥐고는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너희가 이 시간엔 웬일이야? 스케줄 벌써 끝났어?”

“으응, 오늘은 날이 더우니까 일찍 끝내줬어.”

“그렇군. 레슨 받느라 고생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줄까?”

“으응, 괜찮아. 조금 전에 먹어서. 다음에 부탁할게.”

 

린의 대답에 남자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그를 향해 나오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P씨, 일단 물어보겠는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시장조사지.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어.”

 

그러면서 프로듀서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슬쩍 들어 보였다. 반투명한 비닐 백이었지만, 잔뜩 눌러 담은 탓에 한껏 늘어난 손잡이 사이로는 쿠션이나 티셔츠, 태피스트리 따위의 모습이 보였다.

 

“우와, 진짜로 나왔어.”

“역시 카렌이야, 대단해.”

“뭐, 이 정도라는 거지. 어때, 대단하지?”

“무슨 이야기야?”

“으응, 이쪽 이야기야. 그나저나 몸은 좀 어때? 병가라며?”

“3일이나 쉬었는데 이제 쌩쌩하지. 아 참, 너희들 메시지 잘 받았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라고 덧붙이며 그는 가방을 들고 있던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프로듀서의 옷은 흘러내린 땀으로 조금씩 젖어 있었다.

 

“그럼, 프로듀서는 이제 집으로 갈 거야?”

“그래야지. 낮부터 돌아다녔더니 슬슬 지치네.”

“아쉽네, 같이 어울려 줄까 싶었는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그러다 엄한 데 걸리면 큰일난다?”

“네, 네. 알았어요.”

“너희들도 기왕 여유가 생겼으니까 재미있게 놀다 가. 너무 늦게까지 돌아다니지 말고, 사람 모인 데에서는 말조심하고. 뭐, 변장은……그 정도면 괜찮겠군.”

“알았어. 정말, 우리가 애들도 아니고. P씨야말로 조심해서 들어가?”

“그래, 고맙다.”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서로가 각자 갈 길을 향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 그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는 다시 그들을 불러 세웠다.

 

“얘들아!”

“응? 왜?”

“너희들 이거 가질래?”

“뭔데?”

“이거. 요즘 유행하는 거라던데.”

 

손에 들고 있던 가방 속에서 프로듀서가 꺼낸 것은 휴대폰이나 가방에 달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스트랩이었다. 가까이서 살펴본 그것은 최근 인기리에 방영중인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스트랩으로, 경찰 유니폼을 입고 있는 똘망똘망한 눈동자의 회색 토끼와 후줄근한 차림새의 가늘게 눈을 뜬 교활한 인상의 붉은 여우가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뭔가 싶었던 린과 카렌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한 눈에 그것을 알아본 나오는 눈을 반짝이며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가질래! 나 줘!”

“그럴 줄 알았다. 자, 여기.”

“우와, 이거 진짜잖아! 고마워! 정말로!”

 

프로듀서는 씩 웃으며 스트랩을 나오에게 건넸다. 나오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자, 양 옆에서 린과 카렌이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오, 그게 뭔지 알아?”

“이거 주○피아 한정판 스트랩이야. 요즘 없어서 못 구한다고.”

“주○피아? 아아, 요전에 막 개봉한 그 애니메이션이구나. 그런데 한정판?”

“응. 이거 사전예매 한 사람들한테만 준 특전 중의 특전이거든! 이야, 내가 이걸 얼마나 찾았는데!”

“잘 됐네, 나오. 그나저나 P씨,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어? 이거?”

 

싱글벙글하며 스트랩을 살펴보는 나오를 뒤로 한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린과 카렌에게 프로듀서는 엄지손가락으로 골목길 방향을 가리켰다.

 

“요 앞에 배팅센터가 생겼더라고. 거기서 받았어. 기념품으로.”

“배팅센터? 아하하, 역시 야구 좋아하는구나. 그런 곳도 다 가고. 그나저나 기념품으로 이런 걸 줘? 대단한 곳이네.”

“그러게. 나도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귀한 거였구나.”

“흐응, 그래? 아무튼 고마워. 잘 쓸게.”

 

프로듀서는 손목시계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후에도 뭔가 일정이 있는 듯, 시계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약간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시간 다 되가네. 아무튼 아까 말한 대로 사람들 모인 데서는 조심해라?”

“응, 충고 고마워. 내일 봐, 프로듀서.”

“그래, 내일 보자.”

 

인파 사이에서도, 남들보다 족히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프로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 사람은 발걸음을 돌렸다. 공연장을 지나 다시 골목길로 접어든 그들의 눈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어떤 가게가 보였다. 오픈 기념 이벤트라도 하는 것일까,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게의 입구에는 풍선으로 장식된 간판과 “배팅센터”라고 적힌 번쩍이는 네온사인으로 장식된 간판이 걸려 있었다.

 

“여기가 P씨가 말한 곳인 것 같네.”

“그런데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새로 생긴 곳이라서 그렇겠지? 어때, 한번 가 볼래?”

“괜찮지 않을까? 변장도 했고. 네 생각은 어때? 카미야?”

“으엑, 진짜냐……뭐, 나도 흥미는 있는데.”

“그럼 가 보자. 시부야, 카미야.”

“카미야인가……적응 안 되네.”

“별 수 없지, 이런 장소에서 이름으로 불렀다간 위험하니까.”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생각보다 넓은 내부가 그들을 반겼다. 반절로 나뉘어진 가게의 한쪽 벽면에서는 일곱 개의 배팅기계가 설치되어 있었고, 반대쪽 벽면에는 미리 준비된 공을 스크린을 향해 던져 점수를 매기는 피칭캠프가 3개 설치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던지는 것보다는 때리는 쪽이 더 좋은 모양인지, 배팅기계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반면에 피칭캠프 쪽은 상대적으로 한산했다.

 

“와, 꽤나 본격적인데? 상품도 있고. 얘들아, 여기……응?”

 

가게 내부를 돌아보며 감탄사를 말하는 나오와 달리, 나머지 두 사람의 시선은 가게 가운데에 걸려 있는 스탠드에 못박혀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는 사람들도 그 스탠드를 한번씩 보고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나오는 그들의 옆으로 다가갔다.

 

“뭐 보고 있어?”

“랭킹이야. 이 스트랩, 한정판이라고 했지? 이런 건 보통 랭킹 상품으로 주거든.”

“헤에, 시부야, 뭔가 익숙하네.”

“코인 가라오케 같은 곳에서 가끔씩 하는 거니까. 자주 가기도 했고. 그것보다도 말이야.”

 

스탠드의 위쪽, 세 사람의 시선이 모인 하이스코어 보드에는 배팅기계나 피칭캠프 둘 다 압도적인 점수로 1위에 랭크되어 있는 P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현재진행형으로 기록이 갱신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저걸 갱신하는 것은 오늘 하루 안에는 불가능하리라.

 

 

 

회상을 마치면서 카렌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렇게 된 거야. 알아보니까 이 스트랩은 1주일간 1위 유지하면 주는 거라고 하더라.”

”2등이랑 점수차이가 거의 네 배였으니까, 가게 주인도 일찌감찌 포기한 거겠지.”

 

카렌과 린의 이야기를 들으며 치히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휴일에도 대체 뭘 하는건지…….”

“휴일이라도 휴~일하는건 고역이죠.”

“…….”

“으응……이건 영 별로네…….”

 

옆에 앉아, 혼자서 쿡쿡 웃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카에데를 보던 치히로가 ‘이 사람도 문제야’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한숨을 장전했을 때,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프로듀서와 마유가 함께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사쿠마랑 만나서 같이 왔……?”

 

힘차게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던 프로듀서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네 명의 눈초리를 보며 한 순간 발걸음을 주춤했다.

 

”센카와씨 표정이 왜 그래요? 타카가키씨가 괴롭히던가요?”

“괴롭힌다뇨, 너무하시네요.”

“에?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나저나, 사장실엔 잘 다녀오셨나요?”

“네, 잘 다녀왔습니다. 이야기도 잘 끝났고. 이야,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네요. 개운해라.”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네, 있었죠. 엄청난 녀석이. 내일 저녁에 가르쳐 드릴게요. 어차피 대회 때문에 못 했던 하반기 미팅도 한번 해야 하니까.”

 

싱글벙글하며 자신의 자리로 향하는 프로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카에데를 제외한 네 사람은 나란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온 마유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서 흘러내린 땀방울을 식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이 아닌 카렌의 가방에 걸려 있는 스트랩에 못박혀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프로듀서는 업무용 휴대전화를 통해 마스터 트레이너에게 곧 내려간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수신을 확인하고 다시 휴대전화를 책상 위로 되돌리며 그는 업무용 메일함을 열었다.

잠시 후, 후미카와 미즈키가 도착함으로써 간만에 사무실의 모든 인원이 모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두 사람이 어느 정도 땀을 식혔다고 판단한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자, 이제 슬슬 내려갈 준비 하세요. 오늘 레슨은 저도 참관할거니까요.”

“엑, 진짜로?”

“진짜로.”

 

 

 

************

 

 

 

별관의 지하에 마련된 연습장에는 여러 가지 레슨 시설이 있다. 보컬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방음실, 댄스 트레이닝을 할 수 있도록 체육관처럼 매끈한 마룻바닥이 마련되어 되어 있는 연습실, 그리고 간단한 스트레칭이나 가벼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 있는 훈련장 등, 어지간한 트레이닝은 모두 지하에서 끝낼 수 있도록 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는 창고로 사용하던 장소였지만, 아이돌 부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의 연습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었다.

 

댄스 연습실에 모인 일행은 베테랑 트레이너의 인솔 아래 기본 동작을 연습하고 있었다. 딱히 공연 계획도 잡히지 않았고, 새로 익혀야 할 안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흠, 그 계획이 결국 통과되었다는 말이군.”

“네. 아무래도 어필한 부분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입니다.”

 

커다란 거울이 사방을 비추고 있는 댄스 연습실의 한쪽 구석에서 프로듀서는 마스터 트레이너와 함께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글쎄……난 그것보다도 당신의 존재 자체가 이유라고 생각하는데.”

“……?”

“하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양성소들이랑은 이미 사전에 다 이야기가 끝났다고 했지?”

“네. 양성소에서 맡기로 한 건 11월이 기한입니다. 12월부터는 소속 전환시켜서 우리가 맡아야 해요. 호흡을 맞출 필요도 있고 말이죠.”

“그렇군…….”

“최종적으로 인원 집계는 11월 말까지 마무리할겁니다. 짧으면 4개월만에 준비시켜야 해요.”

“뭐, 그거야 우리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겠지. 너무 걱정하진 마. 카렌이나 후미카처럼 특출난 체력이 아니고서야 조이면 어떻게든 되게 되어 있으니까.”

“믿음직스럽네요. 역시 마스터 트레이너 답습니다.”

“하하, 과찬이야.”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들으며 계획서를 휙휙 넘겨보던 마스터 트레이너의 손이 마침내 계획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완벽해. 계획만 보면 전혀 흠잡을 게 없군. 이대로만 간다면 분명히 크게 터뜨릴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말이지…….”

 

다시 표지로 돌아온 계획서를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괜찮겠어?”

“네?”

“당신의 업무량은 이미 이 회사 내부에선 유명해. 명물이라고도 할 수 있지. 하지만, 지금도 이 정도인데 여기서 더 늘어나면 위험하지 않아?”

“괜찮아요. 일단 궤도에 오르고 나면 한결 나아질 겁니다. 저도, 여러분들도.”

 

마스터 트레이너의 눈에 비치는 프로듀서의 얼굴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훗, 그래.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좋아, 우리도 전력으로 보조하겠어. 앞으로 열심히 해 보자고.”

“감사합니다. 새삼스럽지만 앞으로 잘 부탁 드릴게요.”

“이건 내가 가져가도 되는 건가? 이따가 우리 애들 불러다가 미팅을 좀 해야겠는데.”

“네, 가져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사본이라서요.”

“고마워. 그럼, 나는 이만.”

 

연습실을 나가는 마스터 트레이너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뒤, 프로듀서는 연습실의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서 베테랑 트레이너의 지시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곱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대열에서 가장 뒤에 있는 두 사람. 사기사와 후미카와 카와시마 미즈키에게 못박혀 있었다.

미즈키와 마유, 후미카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사무소에 등록되었다. 가장 빠른 마유와 가장 늦은 후미카가 1달하고도 2주 정도 차이가 나니까, 사실상 같은 시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데뷔 무대를 가진 것은 사쿠마 마유 단 한 사람뿐이었다.

물론 미즈키의 경우는 방송 출연을 통해 굳이 음반 데뷔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기에 충분히 준비를 한 뒤 음반 데뷔를 노리는 것이었지만, 문제가 되는 쪽은 후미카였다. 운동신경은 타고나는 것이기에 고난이도의 댄스 동작에 대해서는 여전히 스텝이 꼬이기 일쑤였지만, 처음에 비하면 체력도 꽤나 붙었고 노래실력 또한 꾸준히 갈고 닦다 보니 이제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가 되는 쪽이라면 역시…….사람에 대한 낯섦이겠지.’

 

프로듀서는 뒷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어 펼쳤다. 수첩 안에는 앞으로의 일정이나 지금까지 들어온 출연 요청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인 듯 몇 번이나 강조 표시가 들어간 것이 있었다.

 

‘단합대회에서는 괜찮아 보였는데. 과연 본방은 어떨까…….’

 

가장 최근의 날짜가 기록된 그의 수첩에는 어떤 단어를 몇 번이나 지웠다가 기입하기를 반복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8월 중순부터 하루씩 하루씩 뒤로 밀리기 시작한 그것은 8월의 마지막 주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잡았다는 듯 동그라미가 그려진 날짜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기사와 후미카”라는 이름이었다.

입을 굳게 닫은 채 수첩을 바라보던 그는 어느새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추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자 바닥에 앉아 있는 일곱 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좋아, 오전 레슨은 여기서 마친다! 각자 식사를 마치고 13시까지 다시 이곳에 집합하도록. 이상, 해산!”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차게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행의 모습을 보며 프로듀서는 수첩을 덮어 다시 뒷주머니로 되돌렸다.

무언가를 각오한 듯,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프로듀서의 시선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후미카에게 못박혀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미 톱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일단 부딪혀보는 수 밖에.’

 

 

 

 

오전 레슨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아이돌들은 제각각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도시락을 가져온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와 마유, 후미카는 휴게실에서, 카에데와 미즈키는 요전에 미즈키가 발견했다는 골목길의 가게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프로듀서와 치히로 또한 카에데와 미즈키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현장직을 제외한 일반직은 회사 내부에서 볼일을 다 보는 것이 회사의 기본적인 원칙이기에 어쩔 수 없이 직원식당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친 프로듀서와 치히로는 나란히 본관과 별관을 연결하는 구름다리를 걷고 있었다. 오늘의 메뉴는 정말 오래간만에 맛보는 생선구이와 된장국이 들어간 정식이었다.

 

“와, 간만에 사내식당에서 밥다운 밥을 먹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번엔 일주일 내내 카레만 주더니.”

“아하하, 그때 프로듀서씨 표정이 엄청났어요. 알고 계세요?”

“에에, 뭐,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안 그래도 운동하느라 배고파 죽겠는데 밥이랍시고 나오는 게 카레랑 카레랑 카레……웩.”

 

“맛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인스턴트 주제에 말입니다.”라고 덧붙이며 프로듀서는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심으로 정색하는 듯한 그 표정에, 옆에서 그를 바라보던 치히로가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에요, 그 표정.”

“엥? 이 표정 아니었어요?”

“그 정도까진 아니었거든요.”

“그랬나…….”

 

식당에서 사무실로 돌아온 뒤, 급탕실에서 간단한 양치질을 마친 프로듀서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을 무렵,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잡지를 읽고 있던 치히로가 졸린 듯 두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이 그의 눈에 띄었다.

 

“피곤하세요?”

“배가 불러서 그런가 졸리네요. 아니, 오늘이 더워서 그런가…….”

“그럼 한숨 주무시죠? 이따가 업무시작 때 깨워드릴 테니.”

“으으, 하지만……쉬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프로듀서씨 같은데요…….”

“저는 지난 3일간 푹 쉬었는데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2달간 거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뛰어다니셨는데…….”

“괜찮아요, 괜찮아. 다 할만하니까 하는 거죠.”

 

스트레칭을 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기도 하면서 잠시간 의미 없는 반항을 하던 그녀는 덮쳐오는 졸음의 파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크게 하품을 하며 백기를 들었다.

 

“으으, 죄송합니다……딱 10분만 잘게요.”

“수면실 쓰실래요?”

“아, 아뇨, 다음에요……저는 책상이 더 편해서.”

 

치히로가 책상에 엎드리는 것을 뒤로 한 채 급탕실로 들어간 프로듀서는 냉장고에서 드링크 하나를 꺼내 쭉 들이켰다. 빈 병을 분리수거 통에 집어놓고 자리로 돌아오자, 그 새 잠든 모양인지 그녀의 자리에서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소파에 앉아 벽에 걸려 있는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빼곡하게 채워져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앞으로의 예정에는 조금씩 공백이 보이고 있었다.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실제로 저 스케줄을 감당해야 하는 그들은 지금쯤 조금씩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빠짐없이 돌아가던 일정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일 뿐이야. 초조해하지 말자. 너는 할 수 있어.”

 

습관처럼 왼손 주먹으로 오른 손바닥을 팡팡 두드리며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책상에 엎드린 채 단잠을 자던 치히로는 자신을 흔드는 느낌에 조심스레 눈을 떴다. 멍한 그녀의 시야에 한 가득, 프로듀서의 커다란 덩치가 들어왔다.

 

“일어나세요, 시간 됐습니다.”

“아……? 아, 아아, 고맙습니다.”

 

잠에 취한 정신을 흔들어 깨우듯, 치히로는 머리를 붕붕 흔들면서 몇 번인가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자 서서히 정신이 맑아지면서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책상 위에 놓여있는 탁자용 시계는 12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업무 시작 5분 전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네, 덕분에요. 고맙습니다…….”

 

프로듀서에게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그를 바라본 그 때, 치히로는 프로듀서의 차림새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출장이나 영업 같은 외근을 나갈 때 사용하는 커다란 가죽가방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외근이세요?”

“네. 오늘은 H방송국이랑 그 외에 미팅이 몇 개 있어서요. 그래도 퇴근시간 전엔 돌아올 거에요.”

“고생하시네요. 휴가 다녀오신 직후인데.”

“하하, 3일이나 자리를 비웠으니까 여기저기 갈 데가 많네요. 참, 센카와씨, 이따가 이거 인사팀에 좀 전해주세요.”

 

프로듀서가 내민 것은 CG프로덕션의 로고가 박혀 있는 커다란 서류봉투였다. 아래쪽에 P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프로듀서 본인의 서류인 것 같았다.

 

“프로듀서씨 서류인가요? 한번 열어봐도 되요?”

“네, 괜찮습니다.”

 

치히로는 프로듀서가 건넨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새로 찍은 것으로 보이는 그의 증명사진이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는 서류에는 그의 간단한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치히로는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프로필이네요? 갱신하시려고요?”

“네. 요 며칠간 좀 생각을 했거든요 언제까지고 숨기고 살 수는 없겠다 싶어서 말이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프로듀서는 곧장 사무실을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던 치히로는 문득 며칠 전 카에데와 후미카가 기숙사를 방문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때 무슨 이야기라도 나눈 걸까?’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가 살고 있는 기숙사에 갔다 온 다음날 카에데가 무척이나 피곤해 했었다. 프로듀서의 성격이나 각종 보안이 철저한 기숙사인만큼 사고를 쳤다고는 생각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던 치히로의 귓가에 업무시작을 알리는 탁상시계의 알람소리가 사정없이 파고들어왔다.

 

“아아, 알았어! 일하면 되잖아, 일 하면!”

 

 

 

**************

 

 

 

서서히 한낮의 열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오후 여섯 시.

치히로와 후미카, 미즈키는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서 프로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에데와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는 스케줄을 마치고 먼저 귀가했고, 후미카와 함께 기숙사를 사용하는 마유는 휴게실에서 따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사무실에 있어도 좋다고 했지만, 마유 본인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며 혼자 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씨, 늦네요…….”

 

묵묵히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후미카를 한 번 쳐다보고, 이어서 벽걸이 시계를 바라본 치히로는 마지막으로 여전히 고요한 사무실의 문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래? 나랑 후미카만 남으라고 하는 거 보면 뭔가 일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글쎄요, 저도 잘……프로듀서씨가 갑자기 전화하셔서 두 분만 따로 남겨달라고 하셨거든요.”

“혹시, P군한테 아침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P군,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 보였잖아?”

”그러게요. 보통 저렇게까지 싱글벙글하진 않으시던데……무슨 일이라도 있나? 승진……이라던가?”

 

그 때,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두꺼운 문이 스르륵 열리고, 문 너머로 땀에 반쯤 절여진 프로듀서가 모습을 나타냈다. 두 사람의 수다소리에도 묵묵히 페이지를 넘기던 후미카는 그때서야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어 자신의 가방 안으로 집어 넣었다.

 

“죄송합니다.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네요. 오래 기다리셨죠?”

 

세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싱긋 웃으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한 프로듀서는 가지고 온 서류가방을 열어 서류 몇 장과 두 장의 DVD를 꺼냈다.

 

“오늘 이렇게 남아달라고 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경사가 있어서 그래요.”

“경사?”

“네. 카와시마씨, 사기사와. 잠시만 자리에서 일어나주세요.”

 

자신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은 프로듀서는 외근용 가방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을 향해 각각 하나씩을 내밀었다.

 

“이건……USB……인가요?”

“왠 거야? 좋은 거라도 들어 있어?”

 

 “그럼요, 엄청 좋은 거죠”라고 대답하며 그는 씨익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솔로 데뷔가 결정되었어요.”

“네……?”

“에? 진짜? 나도 데뷔하는거야?”

“정말인가요? 정말 축하해요, 두 사람!”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자신의 손에 들린 USB를 바라보는 미즈키와는 대조적으로 후미카는 그것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멀뚱히 서서 프로듀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래?”

“저기……그러니까, 이게, 저의 노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네 노래야. 아이돌 사기사와 후미카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게 될, 너만의 노래.”

“저만의……? 저, 죄송합니다. 아직은 실감이 잘…….”

“하하, 괜찮아. 그게 정상이니까. 봐라, 카와시마씨도 지금 저 상태잖아?”

 

후미카는 옆자리에 앉은 미즈키를 바라보았다. 과연 그녀 또한 잔뜩 들떠있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듀서는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 자신은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가 건네드린 USB에는 반주파일과 안무영상, 그리고 가사가 들어있습니다. 이미 사본은 트레이닝 파트에 전달해 두었으니 내일부터 곧바로 레슨을 시작할거에요.”

“응! 열심히 할게!”

“의욕이 있어 보이니까 좋네요. 내일부터는 꽤나 힘든 날이 될 지도 몰라요. 충분히 각오해주세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오후에 결산회의 전달사항을 공지하면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은 우선 오늘 이대로 집으로 들어가셔서 예습이라도 하세요. 노래에서 이상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곧장 제게 연락주시고요. 아시겠죠?”

“응, 알았어.”

“좋습니다. 그럼 여러분,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 

 

 

치히로와 미즈키를 배웅하고, 퇴근 준비를 마친 프로듀서는 마유가 기다리고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조심스레 휴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프로듀서의 눈에, 휴게실의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마유의 모습이 보였다.

 

“사쿠마? 왜 그러고 있어?”

“프로듀서씨……?”

 

그의 목소리에 반응한 것인지,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침울하게 처져 있던 그녀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걸리기 시작한다.

 

“미안하다, 차가 조금 막혀서 오래 걸렸어. 많이 기다렸지?”

“아뇨, 마유는 기다리는 건 익숙하니까요.”

“자, 가자. 데려다 줄게.”

 

마유는 자신을 향해 내민 프로듀서의 손을 꼭 쥐었다. 그 자그마한 스킨십에도 그의 손길에 이끌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작은 두 뺨에는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올랐다.

 

“저기, 프로듀서씨? 마유가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은데요.”

“응, 말해봐.”

“린 씨 여러분들께 주셨던 스트랩. 혹시 프로듀서씨가 주신 건가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휴게실을 나서려던 프로듀서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마유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표정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맞아. 그거 내가 준 건데.”

“그런가요오……역시, 프로듀서씨는 마유보다…….”

“그런 거 아니야.”

 

마유의 손을 놓고, 그는 쪼그려 앉아 그녀의 두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한 손으로도 마유의 얼굴을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쥐었다. 자신의 발치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어 쪼그려앉은 프로듀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핫,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어?”

“아, 아니요, 마유는 그저, 궁금해서…….”

“괜찮아, 괜찮아. 특별대접하려는 건 아니니까. 어디보자, 사쿠마한테는……이걸 주면 되겠군.”

 

몸을 일으켜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프로듀서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걸려 있는, 야구공을 데포르메한 장식이 달린 작은 스트랩을 풀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자, 이거 줄게.”

“하지만 이건 프로듀서씨가 사용하시던……!”

“요 며칠간 혼자서 열심히 해 주었으니 내가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 둬.”

 

앞으로 모은 두 손을 꼼지락거리던 마유는 얼굴을 더욱 붉히면서 두 손을 내밀어 스트랩을 받았다.

 

“마유, 이 물건은 평생 소중히 간직할게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게 해 주면 그 녀석도 고마워할거야.”

 

다시 몸을 일으킨 그는 마치 보물처럼 양 손으로 스트랩을 꼭 쥐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우후후"하고 웃으며 간지러운 듯 작게 몸을 웅크리는 마유를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어느 샌가 씁쓸한 빛을 띠었다. 그녀의 응석을 계속 받아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반복하는 마유의 모습을 계속 방관하는 것 또한 그다지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자, 그럼 갈까?”

“네……후훗.”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야겠지……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 지는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그 날이 오기는 올 것이다. 씁쓸함을 삼키고, 다시 평소와 같은 표정을 띄운 프로듀서는 다시 마유의 손을 잡고 휴게실을 벗어났다.

 

 

 

“아까 이야기 했다시피 노래에서 이상한 부분이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다면 적어뒀다가 내일 나한테 꼭 말해줘. 알겠지?”

“알겠습니다……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여자 기숙사의 정문에서 프로듀서와 헤어진 마유와 후미카는 곧장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후미카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 기숙사에서 지급받은 공용 노트북을 펼쳤을 때. 마찬가지로 잠옷으로 갈아입은 마유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마유씨……? 무슨 일이신가요……?”

“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마유도 같이 들어도 될까요?”

“네,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후미카는 책상 위에 있던 노트북을 침대 위로 갖다 놓은 뒤 마유와 함께 침대로 올라와 노트북에 USB를 꽂았다. 그 안에 들어있던 음악 파일을 클릭하자 바이올린의 선율로 시작되는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노래의 선율이 낯익다 싶었던 후미카가 고개를 갸웃거릴 무렵, 인트로가 끝나고 절 부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노래를 듣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신데렐라 걸스(下)로 계속됩니다.

 

 

 

다음 이야기에서 휴가 동안 프로듀서가 무슨 만행을 저질렀는지가 드디어 드러나게 되겠군요.

여담이지만, 저는 캐릭터들의 말투를 참조할 때 신데렐라 극장이나 아이돌 토크를 주로 참조합니다.

그런데 치히로씨가 연하의 아이들에게 말하는 대사가 어느 순간부터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뀌었더라구요?

그래서 이 이야기부터 치히로씨는 무조건 존댓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혼란을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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