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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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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9, 2012 11:47에 작성됨.

뭔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 그렇지 않은 검은색 정장 차림으로 내게 다가와 상금이 든 봉투를 내미는 이오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슈퍼아이돌 이오리님이 내게 직접 상금을 건네주신다니. 아아. 나는 일본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야.”

물론 표정은 최대한 황송하다는 표정을 유지하는 걸 잊지 않고.
그러자 이오리는 뭔가 괴상한 물건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하고는,

“뭐 잘못 먹었어?”

“어이… 사람의 진심을 이렇게나 몰라주다니. 너무한 거 아냐?”

“진심일 리가. 이건 뭔가 날 놀리려는 거지?”

그동안의 나는 이 녀석에게 어떤 시선으로 보여지고 있었던 걸까. 물론 이 녀석만 보면 번쩍이는 이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적이 별로 없다만, 막상 이렇게 나오니 지금까지의 이 녀석과의 교우관계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바다에서의 고기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일도 없었겠지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저 말이 진심이라는 걸 믿어주겠니.”

“흐응… 똑같은 말을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한다면 믿어줄 수도 있지.”

무릎이라… 안 그래도 수여가 늦어지는 것에 이쪽을 힐끔힐끔 보는 사람도 많아졌는데, 내가 여기서 정말 무릎을 꿇으면 곤란해지는 건 나보다 이오리 쪽이다. 그럼 정말 해볼까.

내가 이오리를 향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말 한쪽 무릎을 꿇자, 역시나 놀란 것은 이오리였다. 설마 진짜 꿇을 줄은 몰랐겠지.

“지, 진짜 하다니. 대체 어디까지 바보인거야!! 당장 일어나지 못해!”

“그 말인즉슨, 내 진심을 알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그, 그래! 알았으니까 당장 일어낫-!”

자리에서 일어나 이오리를 향해 빙글빙글 웃으니,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시선을 돌렸다. 아니. 돌렸다기보다는 피했다가 맞는 표현인가.

“정말… 역시 나를 놀리는 거지?”

“그럴 리가. 진짜 너에게 상금을 받아서 기분이 좋다니까. 또 뭔 직함을 달고 있는지도 모르는 할아버지에게 받는 것보다 열 배 정도는 낫다고 생각해.”

“…하, 하긴! 이 이오리쨩이 직접 주는 건데. 영광으로 알아야지. 안 그래?”

“물론. 내 마음속 한 구석에 죽을 때까지 남겨둘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네요.”

이오리는 고개를 돌린 그대로 시선만 내 쪽으로 향한 후 콧방귀를 뀌었다. 이게 또 상당히 귀여워 보이는 모습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짓게 되었다.

“왜 웃는 거야?”

“아니. 그 정장. 의외로 잘 어울린다 싶어서.”

내 말에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오리는 표정을 살짝 느슨하게 하며,

“그…래? 어째 어린애 같아 보이지 않아?”

“전혀. 꽤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 유능한 OL처럼 보인다고 할까. 그 토끼인형만 아니라면 더더욱.”

“샤, 샤를은 언제나 나와 함께야.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샤를? 그 토끼 이름이 샤를이었냐.”

“그래. 풀 네임은 샤를 도나텔로 18세야.”

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손을 슬쩍 뒤로 돌려 공에 맞았던 부위를 있는 힘껏 꼬집었다. 표정은 물론 평정을 유지하며. 아마 내 일생 최고의 표정연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형에 이름을 붙인다니, 왠지 귀엽잖아! 어린애 같아! 물론 이런 말을 했다간 또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참고 있는 거지만. 그래도 저렇게 강한 척을 하지만 역시 열다섯 살은 열다섯 살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어 귀여웠다. 뭐 열다섯 살의 다른 한 쪽도 외형은 어른이지만 입만 열면 어린애가 되니까. 이오리는 반대로 몸은 어린애지만 생각하는 건 미키보다는 훨씬 위라고 해야 하나. 지금까진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인형에 저런 엘레강트한 이름을 짓는 걸 보면 역시…

“어쨌든, 괜찮아. 그 차림. 마음에 들어. 다들 그렇게 생각할거야.”

“흐응… 아무리 바보라지만, 남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괜찮은 거려나.”

“어이. 앞에 쓸데없는 호칭이 붙었잖아.”

“전혀.”

이제 와서 다시 새침한 표정으로 돌아가려고 해봤자, 이미 늦었다. 컨디션 좋을 땐 투수의 표정만 보고도 그의 그날 기분을 짐작할 정도로 표정 읽는 데는 도가 텄던 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투수는 마운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무표정을 유지하도록 마인드컨트롤을 하는 게 대부분이니까. 겨우 열다섯 살의 무명 아이돌이 표정을 숨기려고 해봤자 다 안다. 이 녀석은 지금 기분이 꽤 좋아져있다.

“후후…”

“…너. 아까부터 이상하다고.”

“내가아아아? 서얼마아아아아아.”

“윽. 뭐야. 그 이상한 말투는.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바보가 옮으니까.”

“바보가 전염병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쨌든 빨리 끝내자고. 나 오늘 기분이 좋으니까, 이 돈으로 뭐라도 사주지.”



오전경기였기 때문에, 수여가 끝나고 짧은 팀 미팅까지 마친 후에 이오리와 함께 경기장 밖으로 나왔을 때는 점심시간을 아슬아슬하게 지킬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타카네와 미우라 씨는 다음 경기의 도우미 역을 위해 경기장에 남아있어야 했고, 마코토는 다른 경기장으로 가버렸으므로, 자연히 남아있는 사람은 야요이 한 명이 되었다. 안 그래도 야요이는 점심을 이오리와 함께 먹으려 했었던 것 같아서, 오늘 기분도 좋은데 내가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

이오리를 조수석에, 야요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차를 출발시켰다. 오늘은 상금도 있겠다, 인원도 적겠다. 조금 비싼 곳에 가볼까 생각이 들어 이오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는 저번에 농담조로 언급했던 그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별 다섯 개라. 난 그런 건 호텔밖에 본 적 없어. 그것도 방에 잠깐 들어가 있다 나온 게 전부지만.”

“저는 품질표에서밖에 본 적 없어요. 그나마도 제가 직접 샀던 적은 없지만.”

야요이의 말에 나와 이오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나 생계형 아이돌다운 발언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이 기회에 나도 한 번 별 다섯 개짜리 스테이크 좀 썰어보자. 그런 건 입에 넣는 순간 그냥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거 아니냐?”

“…너는 고기를 아이스크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야. 내 환상을 초장부터 깨뜨리지 말라고.”

“하지만… 역시 고기가 그렇게 빨리 없어지면 아깝겠죠? 조금씩, 조금씩 맛을 음미하면서 먹을거에요!”

뒤에서 자꾸 불쌍한 소리를 하고 있는 녀석에게 뭐라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눈에 스파크를 튀기고 있는 저 천진난만한 여자아이에게 싫은 소리를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거의 히틀러 급 대악당이라고 해도 지금의 야요이를 보면 눈물을 흘리며 연합군에게 맨발로 달려가 백기를 휘두르리라.

““야요이…””

나와 이오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려 야요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뭐하냐, 너.”

“넌 운전이나 똑바로 하셔.”

“지금 신호 기다리는 중이거든. 지금 운전대를 쥐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나 기억해라. 안 그래도 오늘 힘썼더니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은데…”

“지금 그거. 설마 협박?”

“그럴 리가 있겠냐. 정말이지 농담을 모르는 녀석이네. 내가 지금까지 니네들을 숱하게 태우고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너희를 위험에 빠뜨린 적이 없어.”

솔직히 말하면 딱 한 번 있지만, 저번에 미키와 가슴 이야기를 할 때 말이다. 그때 미우라 씨의 사이즈에 경악한 나머지 급브레이크를 밟은 적이 있었지.

“말이 나온 김에 말하는데, 너. 계속 우리들 운전사 노릇하는 거, 괜찮은 거야?”

이오리의 질문에 나는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난 상관없는데. 왜?”

“아니… 그냥 이 정도면 그 치어걸에 대한 보답은 다 한 것 같은데 뭐하러 계속 힘든 일을 자처하는지 궁금해서.”

“호오. 그 말은 곧 넌 내가 이 일을 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소리?”

“그, 그건 아니지만… 네가 힘들까봐 하는 말이야. 운동하는 것도 힘들 텐데 운전까지 매일 하는 셈이니까.”

뭉클.
뭔가 뭉클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오리가 날 이렇게 걱정하고 있었다니.

“이오리쨩… 날 걱정해주는 거구나.”

그러자 이오리는 일순 얼굴을 빨갛게 하고는,

“누, 누가 널 걱정했다는 거야! 착각하지 마! 난 단지 네가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면 우리가 위험해지는 걸 걱정했을 뿐이야!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그런 호칭 붙이는 거야!”

“하지만 야요이는 너한테 이오리쨩이라고 하잖아.”

“지금 야요이랑 네가 같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흥. 여기서 좌회전이야. 어서 차나 돌려.”

“네이. 그럽죠. 뭐. 어째 빗나간 것 같긴 하지만 화제를 되돌리면, 이제 니들 태워다주고 하는 건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거니까. 나. 지금도 그렇지만 그 일 있기 전에는 지금보다 더 떠벌이였다고. 프로 있을 때 고참들이 심각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물론 그렇다고 나아진 건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

“그러니까. 너희들 태워주고 하면 나도 말동무가 생겨서 좋다는 거야. 너희들 만나기 전에는 지금 팀원들과도 그다지 말 섞지 않았었거든.”

“어째서요…?”

뒤에서 들려오는 야요이의 질문에 나는 쓰게 웃었다.

“이오리는 저번에 이야기했으니까 알겠지만, 너희들을 만나기 전의 나. 그냥 하루하루 먹고 싸고 운동하고 자는 것밖에 안했으니까. 그냥 조용히 되는대로 살고 싶었거든. 사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어.”

“그럼 지금은 뭔가 이유를 찾았다는 거네요.”

“그래. 니들이랑 떠드는 것도 재미있고, 지금 팀에서 에이스노릇 하는 것도 재미가 붙었어. 아직 내가 진짜로 원하던 야구는 아니지만.”

말을 마치고 어깨를 으쓱했더니, 이번엔 이오리가 입을 열였다.

“그럼 너… 프로에 복귀할 생각? 다시 야구가 재미있어졌다면서.”

“모르겠는데. 난 자유로운 분위기가 좋으니까. 프로복귀는 그다지 끌리지 않는걸. 무엇보다 그 난리를 피우고 나갔는데 나를 다시 받아줄 리가 없지. 지금으로서는 끌리지도 않을뿐더러 힘들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내 폼이 떨어지지 않고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면 또 모르지만. …뭐. 아니면 다른 나라에 가볼까. 메이저라던가.”

“미국-?”

“농담이야. 고작 일본 사회인 야구팀에서 뛰는 선수를 메이저리그 팀에서 받아줄 리가. 독립리그 팀 정도면 몰라도.”

뒤에서 야요이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안도를 하는 건지 아쉬워하는 건지. 나로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이오리가 안내한 그 별 다섯 개짜리 레스토랑에 드디어 도착했다. 이 근방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나야 뭐 내 관심사 외에는 별로 신경 쓰면서 다니지 않으니까 몰랐던 것이겠지만.
겉은 그럭저럭이었던 것 같았는데, 안에 들어갔더니 뭔가 으리으리했다. 이오리는 자주 와봤던 곳인지 자연스럽게 웨이트리스에게 다가가 뭔가 이야기하기 시작했지만, 프로 시절에도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었던 나와, 당연히 와본 적이 없을 야요이는 시골에서 막 상경한 남매 1,2가 되어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야요이. 나 어째 땀 냄새 너무 나는 것 같지 않냐.”

“저, 저도 어째 옷이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요…”

“…둘 다 뭐하는 거야? 빨리 따라와.”

안내된 자리로 향하는 동안, 나와 야요이는 열심히 이곳저곳 기웃거리기 바빴고, 쿠션의자가 너무 고급이라서 앉기를 망설이기도 하여, 이오리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정말. 두 사람 다 뭐하는 거야? 야요이는 그렇다 치고, 너까지 왜 그래?”

“이건… 뭔가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야. 이 쓸데없이 비싸 보이는 테이블보는 뭐지. 여기에 소스라도 쏟았다간 세탁비에 내 상금 다 날아갈 것 같다고.”

“…프로선수였다면서 이런 곳에서 한 번 와본적 없어?”

“이런 데를 누구랑 와보냐? 애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혼자 오긴 쪽팔리고.”

“하아… 정말 어쩔 수 없는 남자네.”

“거기서 남자 운운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만.”

웨이트리스가 와서 메뉴판을 주었다. 메뉴판 첫 장을 딱 펼치는 순간, 세상에… 과장 조금 보태서 내가 레스토랑에 와있는지, 부동산에 와있는지 헷갈릴 정도의 액수였다. 이거 같은 소나 돼지로 만든 그거 맞아? 고래 고기가 아니라?
가격에 경악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야요이는 아예 눈이 돌아가 버린 모양이다.

“이, 이 스테이크 하나 값이면… 우리 가족 한 끼 정도는 나올 것 같아요…”

나는 오늘 받은 상금과 기존에 지갑에 넣어놓고 있던 돈의 합을 내보았다. …아슬아슬하구만. 여차하면 긁어야 될지도 모르겠네.

“나, 난 저 빵으로.”

“…농담이지?”

이오리가 한심한 것을 볼 때의 표정 직전이 되어 나를 보았기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나마 제일 싸 보이는 것을 고르려다… 그렇게 되면 야요이가 눈치를 볼 것 같았기에 비싼 걸 골랐다. 물론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지만.

“그럼 애피타이저는?”

이오리의 말에 나는 또 멍청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애피…뭐?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는 알아도 애피타이저는 모르겠다.
내 표정을 본 이오리는 한숨을 쉬며,

“그냥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고를게. 불만 없지?”

“네.”

“하아. 정말 변변치 못하네. 남자가 이런 곳에서 여자 손이나 빌리고, 만약에 애인과 함께 온 거였다면 어쩌려고 했던 거야?”

이오리의 말이 머리에 콕콕 박혔지만 내가 반박할 거리는 한 개도 없었다. 물이나 벌컥벌컥 들이켜는 수밖에. 내가 물 한 컵을 다 비워냈을 때, 이오리는 뭔가 다 정했는지 호출버튼을 눌러 웨이트리스를 부른 후 뭔가 유창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난 그게 일본어인지 외국어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새삼 대단해보이네.”

웨이트리스가 주문을 받고 물러나자, 나는 이오리에게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말했다.

“흥. 이 이오리쨩이 대단한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건 대단한 것도 뭣도 아니야. 네가 수준이 낮은 것뿐이지.”

“맞아. 난 어차피 무식한 운동선수다.”

“거, 거기서 납득해버리면 어쩌라는 거야?”

“아니, 뭐. 사실이니까.”

“그래도… 넌 다른 운동선수와는 다른 이미지였단 말이야.”

“다른 이미지?”

“그래. 지금까지 운동선수라면 히라가나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근육덩어리인 걸로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넌 아는 것도 많고, 화술도 그럭저럭 갖췄고, 조, 조언도 잘 해주고 하니까… 분명 이런 것도 알 거라고…”

뭉클.
또다시 어딘가 뭉클해져왔다.

“이오리쨩. 날 그렇게 평가해주고 있었구나!”

“따, 딱히 칭찬하는 건 아니거든! 그냥 ‘그렇게 느꼈다.’ 그뿐이니까! 그리고 그런 호칭 붙이지 말랬지!”

“오오. 발끈하는 게 귀여운데. 이오리 양.”

“누가 발끈했다는 거야!”

“이오리 양에는 반응하지 않는 건가.”

“그것도 하지 마! 일일이 대꾸해줄 틈이 없었던 것뿐이야.”

“뭐. 좋아. 하지만 말이지. 운동선수가 다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야. 정말 머리가 나쁘면 운동도 못해. 다만 공부와 상식을 익히는데 쓸 머리를 운동에 쏟아서 그러는 것뿐이지.”

“그럼 야구선수 씨는 어째서 야구도 잘하시고 아는 것도 많으신가요?”

“그거야 난 천재니까 그런… 거지.”

이오리의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보니 말문이 막혔다. 아니. 사실인데 어쩌라는 거야.

그리고 여기서 잠시 어색한 침묵. 다행히도 이 타이밍에 웨이트리스가 수프와 빵을 가져와주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쏟을 정신을 곧바로 머리 처박고 수프를 먹는데 집중했다.

“너. 뭐 할 말없어?”

“없어. 전혀. 뭐하냐. 빨리 안 먹고. 식으면 맛없어.”

나는 이오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스프는 정말 맛있었다. 정말 내 23년 생애에 이런 스프는 처음 먹어본다고 생각될 정도로, 다만 고개숙인 내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이 따가웠을 뿐.



그렇게 조용했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메인 메뉴가 등장했다. 뭔가 메뉴판에 있는 사진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게 생긴 스테이크에 나와 야요이는 감탄사를 멈출 줄 몰랐다. 물론 그 뒤에 얼굴이 빨개진 이오리에게 저지당했지만.
스테이크는 이오리가 알아서 웰던인지 뭔지로 시켰다는데, 내가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던이라면 아담 던(미국의 홈런타자)밖에 모른다.

이오리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최대한 우아하게 나이프질을 하려고 노력했다. 뭐. 이제 와서라는 느낌이지만. 지금이라도 어떻게 품위를 지켜볼까 생각했으니까.
먹기 좋게 한 조각 썰어서 입으로 가져갔더니, 와. 이래서 비싼가 싶었다. 입에 들어가자마자 슬슬슬 녹는 게, 그냥 녹는 것만이 아니라 충분히 ㅆㅣㅂ히는 맛도 있고, 내 표현력이 좋았더라면 A4용지 10장 분량정도는 맛에 대해 묘사할 수 있겠지만 분량이 적으므로 여기에는 기술하지 않겠다.

“끝내준다…”

“그래?”

“응. 내가 지금까지 헛살았구나. 싶을 정도로.”

“…난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는데.”

“너야 항상 오는 곳이니까 무뎌져서 모르는 거겠지.”

“처음 먹을 때도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할 기회는 없었다고 생각해.”

“…그래. 내가 오버한 거다.”

둘이 얘기하던 도중, 무엇을 느꼈다. 이오리도 그것을 느꼈는지 나와 이오리는 동시에 야요이를 보게 되었다.

“야요이…?”

“안 먹고 뭐하니.”

수프를 먹을 때만해도 맛있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야요이는, 약간 우울해진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도통 나이프를 들려하지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내 말에 야요이는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야요이. 동생들이 생각나서 그러는 거야?”

이오리가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제야 나도 야요이가 왜 이리 침울한지 알 수 있었다.
그랬지. 야요이는 6남매라고 했었지. 차마 동생들을 집에 놔두고 먹을 수가 없는 건가.

“야요이…”

이오리는 아무래도 야요이에게 뭐라도 말해주고 싶은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오리는 위로 오빠들이 있는 막내라고 했었는데, 막내가 장녀의 심정을 알기란 쉽지 않겠지.
마음 같아서는 다음에 너희 동생들도 초대해줄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에 따른 금전적 손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액수일 것 같아서 차마 그런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 날 욕해. 난 그깟 돈에 부들부들 떠는 속물이라고.

“야요이. 동생들에게도 이런 고급음식 먹여주고 싶다면, 여기서 끙끙거리는 것보다는 이거 먹고 힘내서 톱 아이돌이 된 다음에 데려오면 될 거라고 생각해. 비록 시간은 걸릴지라도.”

“그럴까요…”

“물론. 생각해봐. 네가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돈을 엄청나게 번 다음에 동생들 데리고 여기 다시 찾아오는 거야. 먹고 싶은 거 마음껏 고르게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돈을 번다면, 가장 먼저 할인품목부터 마음 놓고 살지도!”

어째 씀씀이의 스케일이… 야요이답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대충 기운은 차린 것 같았다. 서툴게 나이프질을 해서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에 가져간 후에, 몇 번 우물무울 거리더니 눈이 반짝반짝해져서는 왼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대었다.

“이거… 대단해요-!”

“그래, 그래. 나도 그런 것 같더라. 역시 이오리가 입이 필요 이상으로 비싼 거였어.”

“잠깐. 거기서 왜 날 붙들고 늘어지는 거야?”

“별로 붙들고 늘어지려는 건 아냐. 그저 서민의 입맛과 귀족의 입맛은 다르다는 걸 새삼 느꼈을뿐.”

“…절대로 놀리는 거지?”

“그럴 리가.”

나는 일부러 딴청을 피우는 제스처를 취한 다음 다시 먹는 것에 집중했다. 이오리는 약간 으르렁거리다 곧 콧방귀를 뀌며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우아하게 입에 가져가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본 나는 머릿속이 백지가 되어버리는 걸 느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렇게 맛있었던 스테이크 맛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대충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이건 저번 타카네 쇼크에 이어 두 번째 쇼크였다. 거의 오일쇼크 급의. 그래도 그땐 양이나 많았으니 이해라도 가지. 이건 뭐야!

내가 계산서를 들고 석상처럼 굳어져있자, 야요이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산서를 보려고 했다. 야요이가 이걸 봤다간 정말 기절할 것 같은 예감에 재빨리 계산서를 쥔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야, 야요이. 먼저 가있어. 계산 마치고 금방 갈 테니까.”

“네.”

야요이는 끝까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행히 순순히 내 말을 듣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 내가 동그라미 하날 더 본건 아닌가 하고 다시 계산서를 보려는데, 밑에서 손이 올라와 계산서를 홱하니 가로챘다.

“너도 먼저 가있지그래. 내가 계산할 테니.”

“엥? 무슨 소리야. 내가 사기로 했잖아.”

“이 정도로 벌벌 떠는 한심한 남자에게 누가 돈을 내라고 하겠어?”

“아니. 그래도…”

“흥. 됐네요!”

이오리는 콧방귀를 뀌며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바로 카운터로 걸어갔다. 하긴. 저 녀석은 엄청 부자니까. 이 정도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할까…
라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오려는데, 문득 저번에 이오리를 사무소로 픽업할 때 나눴던 대화가 기억났다.


‘넌 집안도 빵빵한데 어째서 아이돌을 하려는 거야?’

‘그야 모두 다들 날 아이취급 하니까 그렇지. 아이돌로 성공해서 아버님과 오빠들에게 절대로 인정받고 말테니까.’


이 녀석. 그렇게 말할 정도의 프라이드라면 돈 때문에 집에 손을 벌리거나 하진 않을 것 같다. 물론 내 추측이긴 하지만, 만약 내 추측이 맞다고 하면 이 녀석이 저 돈을 지불하는 건 나보다 더 큰 타격이 아닐까. 제대로 일거리도 들어오지 않는 무명 아이돌이니까. 용돈 정도는… 집에서 받으려나.
역시 아니다. 저 녀석 성격상 아이돌이 되겠다고 말한 이후로는 자기가 벌어서 쓰겠다며 용돈도 받지 않을 녀석이 분명하다. 물론 그 전에 모아놓은 건 있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지금 이오리의 자금 사정이 나와 비슷하거나 그 아래일지도 모른다는 건데. …직접 묻지는 않도록 하자. 이 녀석의 높디높은 프라이드를 건드리는 건 이마에 대한 발언으로 충분하다.
나중에 어떻게든 따로 보답을 하는 걸로 하자.



두 사람을 사무소에 데려다준 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나 역시 차에서 내려 야요이에게 이오리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먼저 가달라고 부탁했다.
혼자 남게 된 이오리는 야요이가 완전히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다음 입을 열었다.

“그래.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돈 말이야. 어째서 네가 내겠다고 한 거야?”

“그거야 아까도 말했잖아. 그 정도 액수로 덜덜 떠는 게 한심해서 내가 내기로 한 것뿐이야.”

“…우리 솔직해집시다. 이오리 양.”

내 말에 이오리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냥 떠본 건데 설마? 내가 이오리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그녀는 볼을 약간 물들이며,

“그건… 으… 그, 그냥. 나는 그 상황에서 야요이를 제대로 위로해 줄 수 없으니까. 그것에 대한 보답이었을 뿐이야. 이제 됐어?”

아. 야요이가 동생들 생각에 침울해져있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거 귀엽네.

“야요이를 많이 생각하는구만.”

“그야… 야요이는 항상 밝은 표정으로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니까.”

“그건 나도 동감. 어쨌든, 너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뭔가 보답을 해줘야한다고 생각하는데. 내게 뭔가 바라는 거 있어?”

이오리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더니,

“그다지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둔감하네. 그걸 여자 입으로 직접 말해야겠어?”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지금까지 계속 운동만 해왔으니.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무리.”

내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녀는 다시금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저번에… 그랬었지? 홈런은 의외로 치기 어렵다고.”

저번이라면 쌍둥이 자매랑 함께 내 시합을 구경 왔을 때인 것 같군. 그때 마미의 볼멘소리에 내가 일침을 가했던 적이 있었지.

“그렇지. 배팅 타이밍도 정확해야하고, 바람도 좋게 불어줘야 되고.”

“그렇다면, 다음 경기에서 홈런을 치는 걸로 보답해봐.”

호오?
이 말인즉슨 그 야구만화에 자주 나오는 ‘너를 위한 홈런’ 뭐 그런 건가? 이거 재미있구만.

“좋아. 못할 것도 없지. 슈퍼아이돌 미나세 이오리 양을 위한 홈런. 꼭 쳐줄게. 그러니까 다음 시합은 꼭 오라고.”

“물론. 그래도 착각은 하지 마. 딱히 널 응원하는 게 아니라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보러가는 것뿐이니까.”

“아니. 착각할 거야. 슈퍼아이돌 이오리님이 나를 응원하러 와주시다니. 아아… 나는 일본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야. 라고.”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바보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버럭 소리치는 이오리가 귀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자 약속된 패턴대로 콧방귀를 뀌며 날 외면했다. 나는 그런 이오리의 머리에 살짝 손을 얹고,

“오늘은 고마웠다고. 정말로.”

“어, 어디에 함부로 손을 올리는 거야… 바보. 어린애 취급하지 마.”

“어린애 취급이라니. 확실히 여자로 보고 있다고?”

“당연하지. 확실히 여자로… 응?”

이오리는 그제야 뉘앙스를 이해한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빨갛게 변했다. 마치 삶은 문어…라고 하기엔 미소녀에게 이런 표현은 실례인가.

“무, 무무무무무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자로 보고 있다는 건…”

이오리는 말까지 심하게 더듬으며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내 익살스러운 표정을 보고 무언가 깨달았다.

“키이잇--!! 장난치지 마 멍청잇-!”

정강이를 걷어차였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팠다. 한동안 정강이를 부여잡고 한 발로 껑충대는 걸 씩씩대며 바라보던 이오리는, ‘자업자득이야.’라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는지 시선을 자신의 토끼인형으로 돌렸다.

“젠장. 더럽게 아프다고.”

“아프라고 한 거네요.”

“쩝. 잘못한 게 있으니 할 말은 없군. 어쨌든, 난 그만 집에 간다. 시합 내일 모레니까. 꼭 오라고.”

돌아오는 건 ‘흥!’뿐이었지만, 녀석이 올 거라는 건 알고 있다. 왠지 아까부터 기분이 유쾌해져서, 이오리에게 과장스럽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차에 올라탔다. 차에 타서 시동을 거는데, 이오리는 마치 날 배웅해주려는 듯 아직까지 사무소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아아… 슈퍼아이돌 이오리님이 직접 날 배웅해주신다니. 나는 일본에서 제일…”

“그러니까 그거 그만 하라고!”

이오리는 버럭 소리치더니, 내게서 몸을 세차게 돌려 성큼성큼 사무소를 향해 걸어갔다. 정말이지 귀엽구만. 저번 바다에서부터 이오리를 다시 보게 되었지만, 이렇게 되니 점점 더 녀석이 좋아지는 것 같다.
자. 그럼 내일 모레의 홈런을 위해서 컨디션 조절이나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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ㅆㅣㅂ다 할때 ㅆㅣㅂ이 금지단어라 등록이 안된다니 이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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