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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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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9, 2012 11:47에 작성됨.

우리 팀의 첫 경기 2시간 전. 나와 팀원들은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 현 대회에 처음으로 스폰서가 붙었나 싶더니, 스폰이 없을 때부터 주었던 최종 성적에 대한 상금을 제외하고도 대회 첫 기록(첫 안타라던가 첫 탈삼진이라던가)을 달성한 사람에게도 소정의 상금을 금일봉으로 준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16경기를 동시에 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첫날인 어제는 구장을 하나만 썼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개막전 경기에서 기록이 다 쏟아져 나올 것 아닌가.  오늘부터는 두 개의 구장에서 경기가 벌어지지만.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 요주의 개막전 경기가 바로 대회를 스폰해주는 곳에서 후원하는 팀의 경기였기 때문에 우리들의 분노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 지네들끼리 북치고 장구치는 것도 아니고.
오늘 그 소식을 듣자마자 확인해보니, 역시나 첫 경기에서 거의 모든 기록이 나왔다. 남은 것은 사회인 야구에서는 거의 나오기 힘든 기록들뿐.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 
일단 가장 먼저 확인한 건 홈런이었다. 역시나 어제 열린 세 경기에서 홈런은 나오지 않았다. 첫 타석부터 한 번 노려봐야겠다.

“그라믄 난 완투나 해야 쓰것구먼.”

옆에서 같이 기록표를 보던 쌀집 아저씨가 말했다. 팀의 1선발이니 물론 오늘 경기의 선발투수로 예정되어 있으시니.

“아저씬 무리하지 마세요. 또 저번처럼 에구구, 에구구 하면서 나이 드신 티 다 내지 마시고.”

“뭐여, 이눔아. 이 정도면 아직 팔팔헌디 벌써부터 죽은 사람 취급이냐!”

하긴 아저씨. 저번에도 8이닝 던진 적이 있었지. 이오리를 처음 만났던 그 날 말이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전 제 기록에나 신경 쓸랍니다.”

“그래 이눔아. 너나 잘혀.”

“걱정 마시죠. 저 오늘 절호의 컨디션입니다?”

다행히 우리가 오늘의 첫 경기인데다 팀이 초 공격이기 때문에, 내가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친다면 이번 대회 첫 홈런이 될 가능성이 많다. 문제는 내 타순이 몇 번이냐는 것과, 동 시간에 옆 구장에서 진행될 다른 경기의 상황이지만.

“어이. 라팔이 이놈아.”

누군가 내 어깨를 매섭게 내리쳤다. 깜짝 놀라 버럭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생각해보니 감독님 목소리였다.

“안 때려도 다 알거든요.”

“이번 대회. 큰 변동이 없는 한 니놈이 톱타자다. 그리 알아라.”

“예-?”

“지난 몇 경기 동안 니 출루율이 제일 높았으니까 당연하지. 안 그러냐.”

이건 웃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물론 1번이라면 내가 오늘 첫 홈런을 기록할 확률은 높아지지만, 타격 삼관왕에 들어가는 기록 중 하나. 타점을 먹을 확률은 원래 내가 예상하고 있었던 3번보다 낮아지기 마련인데.
쩝. 모르겠다. 내가 아무리 1번 싫다고 해봤자 돌아오는 건 엉덩이로 날아오는 감독님의 발이겠지. 어떻게든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잘 치면 되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3번보다 차례가 더 많이 돌아오는 1번이 나을지도 모르고.

“해보죠, 뭐.”

“그래. 이번 대회는 어디 니 마음껏 날뛰어봐라. 밸런스 문제로 다른 팀에서 따지고 들 정도로.”

“…만약 진짜 그러면요.”

“이 내가 다 커버 쳐주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감독님은 이 바닥에서 꽤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하긴. 지금 이 현의 사회인 야구팀 감독 중에 가장 위대한 커리어를 지니신 분이니까. 아직도 가끔 감독님께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물론 그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은 거의 3,40대 이상의 아저씨 아줌마들뿐이지만.

슬슬 경기가 시작할 때가 되어 배트 하나 들고 덕아웃 밖으로 나와 몸을 풀고 있는데, 관중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슬쩍 소리가 나는 곳을 돌아봤더니, 마코토와 히비키와 유키호와 야요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 구경 온 거야?”

“네. 저흰 오늘 쉬니까요. 이 대회의 도우미들이 특정 팀만 응원하는 것도 안 좋을 것 같으니까 소리는 크게 못내도, 응원하고 있을게요.”

마코토가 씩 웃는 것을 보자, 어제 했을 시구가 불현 듯 생각났다. 우리 팀은 공연만 보고 바로 연습하러 간 탓에 개막전을 보지 못했으니, 자연히 두 사람의 시구 시타도 볼 수가 없었다.

“어제 그 불꽃의 1구 승부. 누가 이겼어?”

내 말에 마코토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고, 옆에 있던 히비키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누가 이겼는지 알만하군.

“솔직히 말하자면 판정승이지만요.”

“판정승?”

“네. 히비키가 제 공을 쳐서 담장을 넘기긴 했는데… 그게 폴대 밖으로 벗어난 파울홈런이었거든요.”

호오. 그것 참 임팩트 있는 시구시타였구만.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기절을 했겠어.

“안 그래도 끝나고 구장 밖을 나가던 도중에 어떤 분이 와서 자긴 모 여자야구팀 소속 스카우터인데 진지하게 야구해볼 생각 없냐고 물어봤었어요. 저도, 히비키한테도.”

“그, 그래서. 확실히 거절했겠지?”

“물론이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때까지 죄인처럼 고개를 수그리고 있던 히비키가 벌떡 일어나서는,

“우갸-! 분명히 몸쪽으로 올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깎여 맞지만 않았으면 제대로 넘어가는 거였다고!”

“그건 네 타격스킬이 부족한 걸 탓해야지. 난 제대로 가르쳐 줬다고.”

“으으… 이대로는 승복 못해! 애초에 야구란 건 3구 승부가 정석이라구! 다음에 다시 도전하겠어!”

“헤헹. 얼마든지. 다음엔 아무 소리 못하게 삼진으로 잡아버릴 테니까.”

“뭐든 좋으니까 그땐 나 붙들고 늘어지지 마라.”

““에엑-””

두 사람이 동시에 괴상한 소리를 내는 걸 무시하고, 난 유키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젠 미처 말 못했는데, 정말 잘했어.”

“솔직히… 시작하기 전엔 많이 떨려서, 역시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야구선수 씨와 팀원 분들이 응원해주신 덕분에 할 수 있었어요.” 

“그래, 그래. 잘 됐어.”

“에헤헤… 앞으로도, 야구선수 씨의 조언이랑 어제의 기분을 가지고 힘낼 테니까요.”

“나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아. 야요이도, 어제 정말 귀엽더라. 노래도 그렇고, 안무도 그렇고.”

“정말인가요?”

“그럼, 그럼. 이야… 정말이지 그 노래. 로리코오…오리콘! 오리콘 차트에 들 정도로 좋았다고 생각해.”

“우앗-! 저. 아이돌 하기로 한 이후에 이 정도로 칭찬받은 건 처음일지도!”

또 위험발언을 할 뻔했다고. 이 주둥이가. 말 꺼낸 나조차도 소름 돋을 정도의 임기응변이 아니었다면 네 사람에게 뭔가 엄청난 시선들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뭐. 어쨌든, 어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지. 슬슬 시작할 때니까. 나 오늘 1번이니까 기대하고 있어.”

“소리 높여 응원할 순 없지만, 그래도 작게나마 해드릴 테니까요.”

“한 방 먹여주라구-!”

“저기… 열심히 하시는 것도 좋지만, 다치지는 말아주세요?”

“웃우-! 제가 기를 불어넣어 드릴게요!”

네 사람의 성원을 등에 업고, 나는 상호간 인사를 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달려갔다. 내 앞에 있는 사람과 악수를 한 다음, 덕아웃으로 돌아갈 때, 바람이 펜스 쪽으로 부는 것을 느꼈다. 이건 호조다.

“플레이볼-!”

공교롭게도 오늘 붙을 32강 첫 상대는 지난 대회 32강에서 만났던 바로 그 팀이었다. 그땐 내가 의욕도 없었고, 팀원들도 지금 같지 않아서 11대4로 대패했었지. 
오늘은 그 반대가 될 것 같지만.

오늘 상대 선발도 1년 전 그때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때야 내가 은퇴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으니, 내가 정신적으로 상당히 몰려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레 겁을 먹고 날 포볼로 내보냈었다. 하지만 내 상태를 대충 알고 나선 적극적으로 승부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내 성적은 5타수 무안타 3삼진. 
흐음. 모르겠군. 이 배터리는 과연 내 상태를 저번과 같다고 생각할까. 그때는 8번이고 지금은 1번인데 말이다. 같은 현이라지만 이 팀과는 그때 이후 한 번도 붙어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타격감을 끌어올렸다는 걸 알는지, 모를는지. 무엇보다 1년 전의 나는 대충 서있다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타석에 섰지만, 지금 타석에 서는 내 머릿속에는 홈런밖에 없다는 걸 저들이 알 리가 없을 거다.

초구는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자 공은 정확히 한복판에 와서 꽂혔다. 변화구도 아닌 그냥 패스트볼이었다. 아니. 이걸 패스트볼이라고 하기에도 뭐하지. 그냥 직구다. 
그러더니 2구도 약간 바깥쪽으로 밀렸을 뿐 역시나 비슷한 코스의 직구였다. 

이것 봐라. 
대놓고 못하는 척을 했을 땐 이런 걸 봐도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젠 확실히 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감히 날 핫바지 취급하다니. 
아니. 차라리 여기서 완전히 방심하게 만들어놓고 찬스 때 박살내버릴까 생각하다가, 곧 옆 구장에서 하고 있을 다른 경기가 생각이 났다. 그래. 첫 번째 목표는 어디까지나 대회 첫 홈런이다.
작년에 내가 저 자식에게 세 번 삼진 먹었을 때의 마지막 공은 모두 높은 커브. 아직도 기억은 하고 있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니까 당연히 내가 하나 더 기다릴 거라고 생각할 게 분명하다. 욕심이 슬슬 나겠지. 선두타자를 공 세 개로 처리하는 건 투수에게 있어서 엄청난 이득이니까. 자기 딴에는 내 허를 찌른답시고 말이다.

하지만 땡이네!

높은 커브를 기다렸다가 있는 힘을 다해 밀어 쳤다. 약간 먹히는 바람에 공이 너무 높이 뜬 감이 있었지만, 바람이 펜스 쪽으로 부는 덕분에 오히려 높이 뜬 것이 바람을 잘 타게 되어 우측 펜스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리드오프 홈런(1번 타자가 첫 타석에서 홈런)이다. 이것들아! 기록원 보고 있냐!
아마 거의 90%의 확률로 대회 첫 홈런이 아닌가 싶은데.

3루 베이스를 돌면서 3루 측 관중석을 향해, 정확히는 방방 뛰고 껴안고 난리가 난 네 사람에게 집게손가락을 흔들어보였다. 저 녀석들. 특정 팀 어쩌고 하더니 머릿속에서 날아간 것 같군. 하긴. 뭐 어때. 애초에 쟤들이 섭외된 이유도 우리 팀을 응원하던 치어 걸 사건 때 눈에 들어온 거라는데.

홈을 밟고 덕아웃으로 돌아오자마자 팀원들이 축하(라고 쓰고 린치라고 읽는다.)해준 덕분에 뇌세포가 네 자릿수 정도는 사라진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도 껄껄 웃으며 내 엉덩이를 걷어 차주셨다. 참 신기한 게, 언제 어떤 자세로 걷어차도 살에만 충격을 줄 뿐 뼈에는 이상을 주지 않는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능력이야.

그렇게 3회초까지 종료될 무렵 스코어는 1대0. 내 리드오프 홈런 이후 누구도 점수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역시나 내 홈런이 이번 대회 첫 홈런임이 확실시 되었다. 후후… 그렇단 말이지.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내가 겨우 1호 홈런 하나로 만족할 줄 알고? 

가랑비는 맞는다. 하지만 폭풍은 내 것이야!

그리고 3회말. 쌀집 아저씨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볼넷과 안타에 희생번트로 원 아웃 주자 2,3루. 안타 한 방이면 역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리고 타석에는 클린업 트리오의 시작인 3번 타자. 1회 첫 타석에서도 안타를 쳐냈던 선수다.

하지만 그는 초구를 받아쳤고, 공은 나를 향해 높이 떠서 날아왔다. 공을 받을 준비를 하려던 나는, 3루 주자가 태그 업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마 내가 공을 잡는 것과 동시에 홈으로 파고들려는 모양이다. 그다지 깊숙한 타구도 아닌데 말이지.
나는 공이 떨어지는 지점에서 몇 걸음 더 물러났다. 그리고 낙구지점을 향해 달려가면서 공을 잡자마자 바로 홈으로 송구했다. 공은 포수를 향해 정확히 날아가 포수가 공을 받자마자 자동으로 주자를 태그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심판이 다이나믹한 제스처로 아웃을 선언함과 동시에 포수와 쌀집 아저씨는 펄쩍 뛰며 좋아했다. 순식간에 아웃카운트 2개. 슬라이딩조차 제대로 못하고 아웃당한 3루 주자는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있었다. 이래 보여도 프로시절 괜히 5툴이라고 불린 게 아닌데 말이지.

우리 쪽 관중석은 물론, 상대 쪽 관중석에서도 감탄사와 박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회인 야구에서 이런 정확한 송구와 태그플레이가 나올 턱이 없으니 당연하겠지. 솔직히 나도 던지면서 포수가 못 받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을 정도니까.

“이놈이 진짜 각성했구나!!”

“드디어 우리 팀에 전 프로야구 선수가 왔구만!!!”

팀원들은 모두 내가 오길 기다렸다가 일제히 머리를 두들기며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관중들의 반응에, 팀원들의 환호까지 겹쳐 나도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해 관중석에 냅다 소리를 질렀다.

뭐. 스포츠는 다 똑같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야구는 흐름의 스포츠다. 위기 뒤에 찬스, 찬스 뒤에 위기라는 말이 있듯이 3회말의 위기를 이렇게 넘기자마자 4회초부터 우리 팀의 타선이 폭발하기 시작해서 4회에만 3점을 추가했고, 두 번째 타석에서 2루타를 쳤던 나 역시 3번째 타석인 5회 1,2루 찬스에서 주자를 모두 불러들이는 3루타를 때려냈다. 그렇게 해서 7회까지 끝난 시점에 스코어는 9대3. 이대로만 가면 1년 전의 설욕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셈이다.

“아저씨 괜찮아요?”

“오늘 컨디션 쥑인다니까. 마. 아직 2이닝 정도는 거뜬하다. 그러는 니는 괜찮으냐?”

네 번째 타석인 전 타석에서 몸에 맞는 볼로 나갔었지만, 뭐. 살이 많은 엉덩이에 맞기도 했고 괜찮다. 
지금까지 1호 홈런에 1호 홈 보살(야수가 홈 송구로 주자를 아웃시키는 것), 1호 3루타. 1호 몸에 맞는 볼…은 아무래도 안 쳐주겠지. 어쨌든 상금 받을 거만 세 개다. 후후… 돈이다. 이게 다 돈이라고. 날 속물이라고 불러도 좋아.
하지만 이걸로도 만족 못하지. 아직 내가 하나 더 할 수 있는 타이틀이 있으니까.

지금이 8회초니까 못 해도 내 타석이 한 번은 더 돌아온다. 지금까지 성적은 3타수 3안타 1홈런 2볼넷. 여기서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기록은…

생각하는 와중에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다시 내 타석이 돌아왔다. 앞선 두 타석은 주자가 있는 상황이라 고의성 짙은 포볼에 몸에 맞는 볼이었다지만, 지금은 투아웃에 주자도 없으니 상대를 하겠지. 
타석에 서서 힐끗 관중석을 보니 어째 사람이 바뀌어있었다. 유키호와 히비키가 사라지고 미우라 씨와 타카네가 와있었다. 5회 3루타 친 이후로 확인을 안했는데 그땐 아직 바뀌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이다.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겠지. 기록에 집중하자. 기록.
바깥쪽 슬로우볼을 그대로 걷어냈다. 쭉 뻗은 타구는 그대로 우익수 키를 넘겼지만, 나는 1루에서 더 이상 진루하지 않고 발을 멈췄다. 어차피 점수 차도 큰 데다, 내가 노리는 건 바로 사이클링 히트(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홈런, 단타, 2루타, 3루타를 모두 기록하는 것)니까. 이걸로 대회 첫 사이클링 히트 달성이다. 이것들아. 사회인 야구에 설마 사이클링 히트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겠지. 이걸로 또 돈이다. 우후후…

더 이상 후속타가 터지지 않아 하릴없이 1루에 서있다 덕아웃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내 의도를 이해한 듯, 팀원들이 낄낄거리며 다시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상금 다 내놔-!”

내 외침에 팀원들은 왁-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내가 이 팀에서 4년째 뛰는데 사이클링 히트는 또 처음 보네. 허허.”

“받으면 우리한테도 한 턱 내야지.”

“금액 봐서 생각해보죠.”

“우와. 어린놈이 벌써부터 돈 밝혀서는.”

“어리니까 지금부터 차곡차곡 벌어두는 겁니다.”

“허… 이 자식이 말이나 못하면.”



결국 그대로 8회말과 9회초가 흘러가버리고, 9회말에 상대팀이 한 점을 만회하는 것으로 경기는 종료. 9대4로 우리 팀의 낙승이었다. 쌀가게 아저씨는 정말 완투를 해내 대회 1호 완투승을 기록했다. 물론 상금 받아봤자 파스 값으로 다 날아가게 생겼다고 구시렁대시긴 했지만. 
경기 MVP는 물론 4타수 4안타 1홈런 2볼넷에 3타점 3득점. 전 타석 출루를 기록한 나였다. 5경기 6~7할 정도를 생각했었는데. 첫 경기를 10할로 끝냈군. 무려 10할 타자라고, 10할. 
…뭔가 어감이 이상한데.

어쨌든, 이번 경기로 팀원들은 완전히 나를 신뢰하게 된 것 같다. 내가 이 팀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마음먹고 달라붙은 경기니까. 특히 외야수들이 3회 송구에 완전히 빠져버린 모양인지, 송구 제대로 하는 법 좀 가르쳐달라고 벌써부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거 또 당분간 피곤해지겠네.

상호간 인사를 마치고 관중석으로 향하자, 네 사람이 내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대단했어요, 야구선수 씨! 2년 전 프로에서 뛰었던 야구선수 씨를 야구장에서 봤던 그 느낌이라고 할까. 사이클링 히트라니. 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지금은 돌아갔지만, 히비키 씨도 정말 놀랐나 봐요. 이제야 조금 야구선수 씨 같다고 했어요.” 

야요이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녀석이. 무슨 건방진 말을 내뱉고 도망간 거야.

“그럼 그 녀석에게 타격법을 가르쳐줬던 건 가짜 야구선수였냐. 거 참. 웃기는 소릴.”

내 말에 야요이와 마코토의 입에 웃음이 흘렀다. 

“그나저나, 타카네랑 미우라 씨는 언제 온 거야?”

“야구선수 씨가 공에 맞았을 때부터요.”

미우라 씨의 말에 나는 애석한 웃음을 흘렸다. 거 참. 멋진 장면 다 거르고 하필 그때 오다니. 타이밍이 안좋구만.

“맞은 곳… 괜찮으세요?”

“네. 느린공에 맞은 데다 살이 많은 곳에 맞아서 그다지 아프지는 않네요. 멍 정도는 들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런…”

미우라 씨는 괜찮다는데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아. 역시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정말로. 마음 같아서는 맞은 곳에 호~해주면 금방 나을 것 같아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맞은 곳이 엉덩이인 바람에 ‘맞은 곳을 보여주기 위해’ 바지를 내렸다간 상금은 고사하고 손목에 수갑이 채워질게 분명하다.

이제 슬슬 경기를 마무리하고 금일봉 수여만 남은 건가. 다음 경기도 거의 바로 시작할 테니까 빨리 구장을 비워주는 것이 좋겠지.

“다음 경기도 멋진 활약. 기대할게요!”

“다음에는 좀 더 일찍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야구선수 씨.”

마코토와 미우라 씨와 타카네가 차례대로 인사를 건네고, 야요이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구선수 씨. 오른손을 이렇-게 올려서 그물에 대주실래요?”

“응? 응. 그래.”

야요이가 말하는 대로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려 관중석 그물에 가져다 댔더니, 야요이는 관중석 밑으로 쭈그려 앉아,

“하이터-치!”

그물망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작은 손을 내 손에 맞부딪쳤다.

“다음 경기도 힘내세요!”

“그래. 확실히 힘이 나는데. 이 감을 계속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이제 돈 받자. 돈. 생각만 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구나.
예상은 했지만, 상금은 그렇게 큰 액수가 아니었다. 하긴 그 많은 기록을 다 몇 만엔씩 줘버리면 스폰이고 뭐고 개털이 되겠지. 고작 현 대회인데 말이다. 액수를 알게 된 쌀집 아저씨는 ‘파스 값도 안 나오게 생겼다.’며 완투를 강행한 것을 자책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나는 아까 예상했던 대로 대회 1호 홈런, 3루타, 홈 보살, 사이클링 히트 네 가지 항목에 경기 MVP까지 받게 되었지만, 5가지 상금을 다 합쳐봤자 팀원들 회식도 제대로 못시켜줄 액수라 헛웃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금을 수여한다는 녀석이…
어딘가 이마가 반짝거리는 녀석이었다. 그 후원한다던 스폰서가 미나세 재벌 소속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그냥 대회 도우미라서 그런 건가.

어쨌든, 뭔가 어울리는 것 같으면서 그렇지 않은 정장 차림으로 내게 다가와 상금이 든 봉투를 내미는 이오리를 보며 나도 모르게 한 마디 툭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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