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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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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9, 2012 11:46에 작성됨.

유키호와 하루카를 데리고 구장으로 이동했다. 아직 마코토는 나와 있지 않았기에, 녀석이 올 때까지 대충 장비들을 세팅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내가 그녀들을 구장 안으로 데려오자 살짝 들뜬 표정이 되었다.

“대단하네요… 저. 저번에 응원하러 오긴 했었지만 실제로 야구장 안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에요.”

“잔디도 제대로 안 깔린 아마추어 구장인데 놀랄 것까지야.”

“그래도 여긴 분명 야구선수 씨를 포함한 모든 팀원 분들의 열정과 땀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 열정과 땀을 가장 보이지 않았던 나는 하루카의 말에 살짝 민망해져서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카는 마치 벌써 연습하는 선수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 입을 살짝 벌린 멍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았다.

“좋아! 우리도 열심히 할 테니까요! 그치? 유키호.”

“응? 으, 응!”

“그래. 잘해봐. 기대하고 있을 테니.”

때마침 마코토가 구장에 도착해 내게 손을 흔들더니, 내 뒤에 있던 두 사람을 보고 놀란 눈이 되었다.

“하루카, 유키호. 너희들은 어떻게?”

그러고 보니 마코토는 어제 그 자리에 없었군.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마코토는 유키호를 향해 씩 웃었다.

“유키호라면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난 믿어.”

“고, 고마워. 마코토쨩.”

그러고 보면 유키호는 항상 마코토와 가까이 지내면서도 왜 남자는 어려워할까.
…라는 질문은 본인 옆에서 대놓고 내지르면 실례니까 나중에 없을 때 물어보기로 하고, 일단은 마코토의 연습을 봐줘야겠다.

“어깨는 괜찮은 거냐.”

“네! 보시는 대로!”

마코토는 오른팔을 힘차게 빙빙 돌렸다. 확실히 단련된 몸이라 그런지 회복이 빠르네. 그래도 오늘은 어제같이 많이 던지게 하면 안 되겠다.

“일단 쉐도우피칭으로 가보자. 여기서 바로 준비해.”

“에? 마운드에 오르지 않는 건가요?”

“그건 나중에. 일단 수건 받아.”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자주 애용하는 방법이라는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의자를 놓고, 공을 던지는 손으로는 수건의 끝을 쥐고 의자를 때리는 방식이다. 물론 공을 던지는 폼 그대로. 어깨너머 듣기로는 이게 릴리스 포인트(투수가 공을 놓는 타이밍)를 조절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했는데…

“수건으로 의자를 때려 부술 게 아니라면 힘을 좀 빼.”

“윽. 네에…”

“마코토쨩. 힘내!”

“응. 고마워, 유키호.”

슬쩍 보니, 마코토의 폼이 어제보다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던질 때 좀 더 제대로 하체에 힘이 실리는 것이, 이따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마음먹고 던지면 엄청난 게 하나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런 걸로 괜찮을까요?”

“뭐가.”

“이 폼은 너무 임팩트가 없어 보인다고 할까… 어때요? 토네이도 투구법 같은 건!”

“니가 노모 히데오냐. 안 돼. 그런 투구법은 엄청난 노력이 뒤따르는 거라고. 꼴랑 일주일 조금 넘는 시간 안에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그 노모 씨가 그런 말도 했잖아요. ‘소시민은 항상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 라고.”

“네가 도전하겠다고 하면 난 그냥 비웃을래. 결과야 안 봐도 뻔하니까.”

“으에… 그 발언은 사기를 꺾는 거라구요. 야구선수 씨…”

“어쨌든, 지금 던지는 폼에나 신경 써. 릴리스 포인트가 내려간다. 수건이 땅에 닿잖아.”

“네에-”

얼마 더 시킨 후에, 휴식하라고 말을 꺼내자마자 유키호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마코토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아. 고마워. 유키호.”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은 너무 사이가 좋다. 물론 765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은 다들 서로 사이가 좋은 것 같지만, 이 둘은 더욱 더 가까운데다 마코토의 외견 때문이라고 할까, 뭔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순한 상상을 품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면 그냥 내 마음이 썩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자. 3구 승부라고.”

“네! 우와. 재작년까지 프로선수였던 분과 승부라니. 왠지 두근두근하네요. 그래도 각오하세요!”

몇 개 정도 던지게 해본 후에, 내가 직접 타석에 서서 마코토의 공을 쳐보기로 했다. 던지는 걸 보고 있자니 내가 다 끓어오를 정도로 공이 좋았기 때문에.

“갑니다-!”

“언제든지.”

마코토가 와인드업을 하는 것을 보며, 나 역시 내 타격자세를 취하고 공을 기다렸다.
당연히 복판으로 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놀랍게도 마코토는 내 몸 쪽을 찔러 들어왔다. 코스도 기가 막히게 들어온 데다 속도까지 붙어 나는 꼼짝도 못하고 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와앗-! 그거 스트라이크죠?”

“그래. 원 스트라이크. 허를 찔렸는데. 몸 쪽 승부라니.”

“앗싸-!”

마코토는 오른팔을 쳐올리며 좋아했다. 멀찍이서 구경하던 하루카와 유키호도 ‘마코토(쨩) 대단해-!’를 연발하고 있었다.

“헤헹. 앞으로 스트라이크 두 개면 삼진이라구요? 조금 분발하세요.”

“허허. 내가 너에게 그런 소릴 듣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조금 방심한 모양이구만.”

자. 이제 어떻게 될까. 공은 무조건 패스트볼이니 구질 걱정은 필요 없고. 생각해야 할 건 코스뿐인데. 초구부터 자신 있게 몸 쪽을 던진다는 건 마음먹으면 아무 코스나 다 던질 수 있다는 거다. 몸 쪽은 타자들은 당연히 기피하지만, 투수들 역시 웬만큼 제구가 되지 않으면 피하는 코스다. 작정하고 맞추려고 던진다면 몰라도, 타자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이 투수에겐 항상 있기 때문에.

뭐. 그래도 역시 몸 쪽이겠지. 벌써부터 마코토가 수 싸움까지 생각할 리는 없으니까. 내가 방금 몸 쪽을 넋 놓고 보고만 있었으니 하나 더 같은 곳에 던져도 틀림없이 통하리라고 생각할 거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고교시절부터 현역시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는 바깥쪽 낮은 공과 몸 쪽 어중간한 높이로 들어오는 공이다.

“으에엑-!”

역시나 아까와 비슷한 코스로 들어오는 공을 그대로 잡아당겼더니, 경쾌한 소리를 내며 타구가 멀리 뻗어가기 시작했다. 마코토의 어이없다는 비명소리와 함께, 날아간 공은 왼쪽 폴대에 맞고 구장 안으로 떨어졌다. 그걸 본 마코토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 기둥에 맞으면…”

“홈런이지.”

“이럴 수가…”

마코토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 녀석. 설마 날 정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가.

“초구에 야구선수 씨가 반응하지 못했을 때, 어쩌면 이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스트라이크 세 개를 잡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라고. 유능한 타자들은 투수들을 속이기 위해 초구 정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코스에 공이 들어와도 일부러 헛스윙을 하곤 해. 더 중요한 상황에서 투수가 그 코스로 공을 던지게 유도하기 위해서.”

“그럼 야구선수 씨도 초구를 그냥 보낸 건 그걸 유도하기 위해…?”

“아니. 솔직히 정말 허를 찔렸어. 네가 몸 쪽으로 붙일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 그래도 네가 두 번째 공도 같은 곳을 노릴 거라는 건 예상했지.”

“우와… 완패.”

“어차피 히비키와는 1구 승부잖아. 그러니까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길 수 있을 거야. 나조차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니.”

“그, 그렇겠죠? 역시!”

약간 시무룩해보였던 마코토는 내 말에 다시 기운을 차린 것 같았다. 기분전환이 빨라서 좋군. 부럽구만.

마코토를 먼저 돌려보낸 후, 뒷정리를 하던 중에 문득 유키호를 보게 되었다. 하루카도 지금 마코토와 어딜 잠깐 들린다며 가버렸으니, 지금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찬스가 되겠군.

“유키호. 이제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앉아서 하루카나 기다리자고.”

“아, 예…”

내가 덕아웃 벤치에 앉아 유키호에게 손짓하자, 유키호는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와 나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갑작스럽지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저…한테요?”

“그래. 안되면 말고.”

“아, 아니에요. 하세요.”

약간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유키호에게 정말 그걸 물어봐도 될까 하고 약간 고민했지만, 뭐 괜찮을 거라 생각한다.

“마코토랑은 무슨 관계?”

라고 물은 다음 아차 싶었다. 뭐냐 이 직격탄은! 고민은 해놓고 나온 말이 저거라니! 걱정했던 대로 유키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며,

“무슨… 관계라니…”

“아니아니아니아니.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해. 다들 친하지만 특별히 너랑 마코토는 더욱 친해보여서 그런 거니까.”

“그게… 마코토쨩은…”

“마코토는?”

“동경…하고 있어요. 마코토쨩의 강함을.”

“동경.”

“네. 저, 저는 잘 하는 것도 하나 없고, 뭘 해도 금방 포기해버리는데다 무서워하는 것도 많은데, 마코토쨩은 뭐든지 잘하고 끈기도 있고 담력도 좋으니까요. 그런 점을… 닮고 싶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몰라도 마지막 항목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저번에 바다에 갔을 때 마코토의 그 괴담 리액션을 생각한다면 말이지.
어쨌든, 유키호는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는 건가. 그 롤 모델이 마코토라면 지금의 유키호로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제가 아이돌을 지망하게 된 것도, 지금의 성격을 바꿔보고 싶어서. 니까요.”

아이러니하구만. 유키호는 강한 여성을 꿈꾼다. 그리고 그녀가 동경하는 대상인 ‘강한 여성’ 마코토는 자신이 여성스러워지길 바란다. 그렇다면, 혹시 마코토가 동경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유키호가 아닐는지. 유키호는 첫인상부터 딱 ‘보호해주고 싶은 여성상’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동경한다면, 확실히 가까워질 수밖에 없겠구만. 내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것 같다. 아직 마코토의 말을 듣지 않았으니 내가 넘겨짚은 것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게 아마 맞겠지.

“그렇다면 역시 첫걸음은 이번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건가.”

“네. 저. 해볼 테니까요!”

“좋아. 그럼 지옥의 특훈이다. 방금 뭔가 하나 생각났으니까. 해보자고.”

“뭐…뭐죠?”

“기다리면 알게 될 거다.”

“우우…”

유키호는 불안감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 시선을 무시했다. 왠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하루카가 도착하자, 나는 특훈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리하여 나와 (엄청 불안해하는)유키호 둘이 남게 되었다. 집에 잠깐 들렀다 연습시간에 짠! 하면 되겠구만.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귀신같이 히비키에게 또 전화가 걸려와 나와 유키호는 꼼짝없이 구장에 남겨지게 되었다. 젠장.

히비키 역시 마코토와 마찬가지로 하루 사이에 실력이 엄청 늘어 나를 놀라게 했다. 댄스가 특기라더니, 역시 어느 코스의 공에도 유연하게 움직여 장타를 쳐내는 그녀에게 난 느낀 그대로 찬사를 보냈다.

“굉장한데. 몸 쪽을 밀어 쳐서 타구를 저 정도 보내기가 힘든데 말야. 너도 야구에 소질이 있구나.”

“야구뿐만이 아니라구! 어떤 스포츠든 자신 있어!”

“확실히 그럴 것 같네. 어쨌든, 아주 좋아. 가르치는 보람이 있네. 나도 놀랄 정도로 빨리 배우는 걸.”

“흐흥! 그렇게 생각하지? 더 칭찬해줘. 자. 칭찬해, 칭찬해!”

참 알기 쉽네. 선수들 중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칭찬받으면 시너지 효과를 얻는 선수와, 싫은 소리를 해서 자존심을 건드리면 오기로 폭발하는 선수. 코치들이 말하길 이 두 가지 유형을 잘 분류해야 선수들의 포텐셜을 터뜨릴 수 있다는데, 히비키는 역시나 전자였군.
참고로 나 역시 전자였다.

히비키까지 보내고 나니 어느새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3시에 연습시작이니까 슬슬 점심을 먹어야겠다. 오늘은 어제처럼 둘을 가르치는 데 힘을 별로 쓰지 않았으니 문제없다. 밥을 늦게 먹어서인지 아직 그다지 배가 고프지도 않고, 어차피 다시 올 거니까 차는 그냥 여기 놔두고 천천히 유키호랑 걸어갈까.

라고 생각했는데,

유키호의 배에서 아주 귀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제야 생각이 났다. 유키호는 나보다 아침을 훨씬 빨리 먹었다는 걸.

“아.”

내가 놀란 것과는 다른 의미로 놀라버린 유키호는, 자신의 배를 양손으로 꼭 누른 다음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죄, 죄송해요!”

“응? 왜?”

“야구선수 씨는 열심히 마코토쨩이랑 히비키쨩을 가르쳐주시는데, 저는… 저는 가만히 앉아있는 주제에…”

“아니, 아니. 이때 배고픈 건 당연하잖아. 점심시간 이미 지나버렸다고?”

“하지만, 저… 그래요. 전 역시 구제불능이네요. 이런 배고픔 하나 컨트롤하지 못하고… 아이돌 실격이죠…”

“그걸 컨트롤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저 따윈…”

뭔가 이상한 공기가 흘렀다.

“땅 파고 묻혀있을게요오-----!!”

갑자기. 그야말로 갑자기 유키호의 손에서 삽이 튀어나왔다. 내가 멍하니 유키호의 사차원 주머니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유키호는 무서운 속도로 땅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맙소사. 저런 가녀린 팔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아니.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일단 말리자.

“안 돼-!”

간신히 유키호를 뜯어말렸다. 세상에. 정말 그라운드에 구멍을 낼 줄이야. 히비키를 신나게 칭찬했었는데, 유키호야말로 야구를 하면 엄청날지도 모르겠다.

“유키호.”

“네에…”

“이미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해.”

“…?”

유키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나를 올려보았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차를 몰고 근처 식당으로 가 배를 채웠다. 시간도 애매하고 하루카도 없고 해서 집에 가는 건 무리고, 결국 남은 시간은 차를 타고 근처를 돌아다니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했다.

그리고 슬슬 연습시간. 드디어 내 스파르타식 교육을 실시할 때가 왔다.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면 어떻게?”

“간단해. 다들 모이면 그때 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거야. 실전대비훈련이라고 할까.”

“에에…? 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제 어느 정도 나를 멀리하는 것도 없어진 것 같은데.”

“야구선수 씨는… 대화하고 있으면 왠지 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루카쨩이나 마코토쨩, 히비키쨩도 야구선수 씨와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걸 보면요.”

“그래? 저번에 바다에서 네가 말한 대로 눈높이가 맞는 건가.”

“그건 모르겠지만요.”

“어쨌든 한 번 불러봐. 내가 감독님한테는 얘기해 둘게.”

“…한 번 해볼게요.”

유키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짐짓 각오를 다지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잘 됐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감독님한테 유키호를 소개하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할 때부터 이미 얼음이 되어버린 것 같은 모습을 하더니, 감독님이 모두를 집합시킨 다음 그 앞에 세워놓으니까 한 그루의 사시나무가 된 것 같이 떨기 시작했다.

“유, 유키호?”

“저… 저기… 전…”

“아가씨-! 뭐라도 불러봐!”

“엔카나 한 곡 불러줘-!”

아이돌한테 엔카가 뭡니까… 라기보다는, 지금은 유키호를 걱정해야 할 것 같은데.

“저… 역시… 이젠 한계…”

아까의 데자뷔인가. 이 상황에서 유키호가 할 일은…

“저, 저… 땅 파고…!”

“그만둬-!!”

유키호의 손에 삽이 들린 것과 동시에 달려들어 삽을 낚아챈 다음, 그녀의 팔을 붙들고 덕아웃 뒤편으로 달려갔다. 아까 유키호가 판 걸 메우는 데도 여간 고생한 게 아닌데 또 그러긴 싫었다. 라는 것도 있지만, 역시 유키호에게 한 마디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삽을 멀리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둔 다음, 훌쩍이고 있는 유키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 번 해볼게요. 는 어디 간 거야.”

“흑. 저, 전 역시 무리에요오… 저렇게 남자 분들이 많은 곳에서는…”

“해보지도 않고 무리라고 단정 짓는 근거는?”

“여태까지… 그래왔으니까요.”

“바보 같은 말 하지 마. 바로 그걸 고치려고 지금 여기 있는 거 아냐.”

“하지만. 훌쩍… 그렇게 되지 않는걸요. 역시 저 같은 아이가 아이돌 따윈… 꿈에 불과한 거죠… 이대로 사무소에 가서 그만두겠다고 말하겠어요… 흑.”

여기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네거티브해질 수 있는 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서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상관할 바 아냐.’ 하고 가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울고 있는 여자애를 이대로 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마코토를 동경한다고 했었지.”

“…네.”

“난 말이지. 여덟 살 때 우연히 야구 경기를 보게 됐어. 원래는 만화를 보려고 채널을 돌리던 중이었는데 말이지. 때마침 타자가 시원한 홈런을 날리는 장면을 보게 된 거야. 그때 배트에 맞은 공이 멀리 날아가 담장을 넘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나도 공을 저렇게 멀리 날렸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거야.”

“……”

유키호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훌쩍거림은 어느새 멎은 것 같지만, 아직 눈시울은 빨갛게 되어있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을 졸라서 야구공이랑 배트를 사서 말이지. 아무 것도 몰랐으니까 당연히 성인용 배트를 샀어. 겨우 여덟 살 땅꼬마가 성인용 배트를 제대로 휘두를 수나 있겠어? 뒤뚱뒤뚱하면서 아주 가관이었지.”

유키호는 내 말을 들으며 그걸 상상이라도 했는지, 아까보다 표정이 많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래도 마냥 좋았어. TV에 나온 사람과 똑같이 됐다고 말이지. 하지만 이번엔 공을 치는 게 문제였지. 치는 것 자체도 문제였지만, 쳐봤자 얼마나 나가겠어. 공 던져준 아버지가 서있는 곳까지도 날아가지 않았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본격적으로 야구를 하게 된 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정말 열심히 노력했어. 홈런 하나 쳐보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로. 물론 나에게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걸 안 다음에는 노력보다 재능에 더 의지했지만. 어쨌든 난 프로무대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쳤어. 내가 동경했던 그 장면 속의 주인공이 됐던 거지.”

잠시 하늘을 보면서 회상에 잠겼던 나는, 곧 유키호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자 유키호는 몸을 살짝 움찔했지만, 곧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남을 동경하긴 쉬워. 하지만 그걸 닮으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법이지. 나야 물론 노력과는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 노력이라도 했었으니까 내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거야. 유키호. 너는 동경하는 마코토와 닮아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니?”

“하지만… 하지만… 저는 노력해도 안 될 거에요. 저는 마코토쨩과도 다르고, 야구선수 씨와도 달라요. 그러니까…”

“흐음. 그럼 하나 물어보자. 넌 아이돌을 지망하면서, 한 번도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네 모습을 상상해본 적 없어?”

“그런 건… 항상 잠들기 전마다 상상해요. 저도 다른 아이돌처럼 무대에 올라서, 팬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항상 생각해요.”

“그렇군. 그럼 됐어.”

“네…?”

“내가 가장 존경했던 타자 중에 한 명이자 한때 언론에서 나를 그렇게 비교해대던 스즈키 이치로가 한 말이 있지. ‘상상력의 한계가 곧 그 사람의 한계다.’ 난 이 말을 믿고 있으니까. 이 말을 약간 다르게 해석하면 너의 한계도 고작 여기서 주저앉을 정도는 아닌 거야. 분명히 스테이지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유키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나를 보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인내심 있게 그녀를 기다렸고, 몇 분이 지났을지.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 할 수 있을까요…”

드디어 그녀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왔다. 나도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은 건데, 다행히 잘 알아들어준 것 같다.

“응. 물론. 너는 자기 비하하는 데는 엄청 자신있어하는 것 같으니까. 그 기운을 긍정적인 곳에 쏟으면 분명 뭐든 할 거라고 생각해.”

“그, 그런…”

“풋. 농담이다. …유키호. 가서 한 번 시도라도 해봐. 뭐든지 한 번 해보면 다음부터는 차차 나아지니까.”

“혹시 실패라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 예엣~날. 아주 케케묵은 야구를 하던 시절에. 지금으로 치면 벌렌더 정도는 되는 투수가 있었어. 이름은 크리스티 매튜슨이라고. …라고 해봤자 너는 모르겠구나. 어쨌든 그 선수가 한 말이 있어. ‘승리하면 배울 수 있다. 그러나 패배하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꼭 기억하고 있지. 시합에서 졌을 때 핑계용으로 써먹기 편하니까.”

“푸후훗.”

유키호는 완전히 기분이 풀어진 듯 내 말에 드디어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이번엔 핑계용이 아니라, 제대로 너에게 주는 격언이야. 그러니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 거기서 배운 것으로 넌 더 큰 걸음을 걸을 수 있을 테니까.”

잠시 무언가 중얼거리던 유키호는, 곧 아까 차 안에서 했던 것처럼 두 주먹을 꼭 쥐고 뭔가 기합을 넣는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저. 한 번 해볼게요.”

“그래, 그래. 나도 봐줄게.”

유키호와 함께 다시 덕아웃 앞으로 왔더니, 아직도 다들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 폐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래도 뭐. 다들 아이돌이 바로 앞에서 노래부르는 건 처음일 테니까.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그럼… 노래. 불러볼게요.”

목소리가 어째 또 기어들어가는 것 같은데, 불안하긴 했어도 다들 환호성을 올리는 데도 그다지 무서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움찔 놀라는 건 여전했지만.

“아가씨-! 엔카나 한 곡 불러봐-!”

“엔카! 엔카!”

그러니까 저 아저씨들이 아이돌한테 엔카가 뭐야. 세대차이 이전에 쪽팔린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유키호는 침을 꿀꺽 삼킨 후에 양손을 모아 마치 마이크를 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래도 매너는 있는지, 유키호가 그런 포즈를 취하자 다들 조용히 귀를 기울여주었다.


♬ 츠가루 해협의 겨울풍경 - 하기와라 유키호


우에노 발 야행열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아오모리 역은 눈밭이 되어
북쪽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말없이
파도소리만을 듣고 있어요.


이, 이건… 진짜 엔카잖아! …라기보다. 어떻게 70년대 노래를 알 고 있는 거지? 나도 태어나기 전 노래를!


저도 혼자서 연락선을 타고
얼어버릴 것 같은 갈매기를 보며 울고 있었어요.
아아- 츠가루 해협의 겨울풍경


유키호는 목소리가 워낙 가냘프니까 엔카와는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의외로 잘 어울리는데. 이건 또 새롭군. 지를 때도 목소리가 빵빵 잘 나오고. 이런 걸 성량이 좋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예상외다.
듣는 사람들은 아주 좋다고 눈 감고 따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갯짓을 끄덕끄덕 한다던가, 맙소사. 감독님은 눈시울까지 붉어지고 있었다.


안녕 그대여. 나는 돌아갑니다.
바람 소리가 가슴을 흔들어 울 수밖에 없네요.
아아- 츠가루 해협의 겨울풍경


노래를 마치고, 유키호는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팀원들에게선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아가씨 끝내주는구만-!”

“이 아저씨는 감동했다-!”

“우리 팀 전속 매니저 같은 거 안 되나?”

우리가 무슨 고등학교 야구부도 아니고. 무슨 스포츠 만화 그릴 일 있답니까.
감독님은 아예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가슴이 뭉클하구만.”

어쨌든… 반응은 정말 좋은 것 같았다. 표정을 굳히고 있었던 유키호도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기쁨과 놀라움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연신 꾸벅거리기 바빴다. 이 정도면 잘 된 거라고 봐도 되겠지.



감독님은 연습시간동안 유키호가 덕아웃에서 구경하는 걸 흔쾌히 승낙해주셨고, 유키호는 그동안 간간히 휴식하러 오는 팀원들의 질문공세에 대답하기 바빴다. 나는 그때마다 유키호의 남성공포증이 재발하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결국 연습시간이 끝날 때쯤엔 팀원의 거의 90% 정도가 유키호의 팬이 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대단하네, 유키호. 벌써부터 팬들이 이렇게 많아지다니. 물론 나 포함 몇몇 사람만 빼면 평균연령대가 거의 35세 이상은 되는 연령층의 팬이긴 한데.
…괜찮겠지.

“어때. 유키호. 이제 본방도 문제없지?”

“네! 저. 자신감이 생긴 것 같아요!”

“잘됐구나.”

“오늘의 기억만으로도 남은 생애.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그 나이에 그런 말은 조금…”

“에헤헤… 이게 다 야구선수 씨의 조언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유키호의 이 한 마디에 약간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잘됐구나. 잘됐어. 이 녀석이 가진 그 말도 안 되는 네거티브 파워를 포지티브로 바꿀 수 있다면, 이 녀석 뭘 해도 크게 될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때 나도 꼭 보고 있을 테니까. 힘 내라고.”

“네. 야구선수 씨도 꼭 우승하셨으면 좋겠어요.”

“걱정마라. 삼관왕 먹고 상금 받으면 너희들한테 뭐라도 해주지.”



그 이후로 유키호는 제대로 하루카와 함께 공연을 위해 연습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루카와 리츠코가 쌍수를 들고 나를 반기며, 이 정도면 정말 프로듀서 해도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다들 준비에 바쁜 탓인지, 마코토와 히비키도 며칠 더 내게 찾아오더니 발길이 끊겼다. 덕분에 나도 느긋하게 연습에 매진할 수 있었다. 뭐. 연습이라고 해봤자 컨디션조절만 간단히 하면 되는 일이지만.

그리고 드디어 개막식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둘째 날인 내일 시합이니 오늘 신경 쓸 것은 거지같은 개막식이니 연설이니 선서니 하는 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다음, 765프로덕션의 공연을 보는 것이 전부다.

한 30분정도 서서 잡생각 좀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다 끝나버린 모양이다. 내가 선서할 때 팔을 제대로 들었던가. 옆에서 누가 면박주지 않는 걸 보니 하긴 한 모양이지만.

[이어서. 이번 행사를 여러모로 도와주실 765프로덕션 아이돌들의 축하공연이 있겠습니다.]

드디어 왔다. 첫 무대가 바로 하루카와 유키호겠지. 저번보다 보는 사람도 훨씬 많고, 유키호가 겁을 먹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 번 스테이지 뒤로 가보고 싶었지만, 지금 유니폼까지 입은 내가 그쪽으로 달려갔다간 그대로 쫒겨날 거다.
뭐. 알아서 잘 하겠지. 그때 그렇게 좋아했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예쁘게 차려 입은 두 사람이 스테이지 위로 올라왔다. 저렇게 입으니까 확실히 아이돌 같아 보이네. 두 사람이 올라온 다음 가장 먼저 유키호의 표정부터 살펴봤는데 다행히 스테이지에 구멍을 팔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약간 떨리는 표정이긴 했지만.

“아마미 하루카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여러분-!”

“하, 하기와라 유키호입니다아-!”

다들 알 리가 없는 이름이었지만, 우리 팀에겐 다르다. 특히 유키호는 더더욱. 나를 필두로 우리 팀 선수들이 앉아있던 곳에서 왁-하는 함성이 일어나자, 다들 분위기에 휩쓸려 두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엄청난 반응에 놀라던 두 사람은, 곧 괴성을 지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자, 그럼! 저희 765 프로덕션의 오프닝을 장식한 첫 번째 곡. Kosmos, Cosmos.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 Kosmos, Cosmos - 하기와라 유키호, 아마미 하루카


분위기 좋구만. 사회인 야구팀원들이 관객이니까 거의 필연적으로 20-50대 남자들뿐이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달아오르기 마련. 이 상황에서 점잔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습 때는 잘도 넘어지던 하루카는 의외로 균형을 잘 잡으며 선전했고, 유키호는 왠지 실전에 강할 것 같다는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노래도 하루카와 유키호의 목소리와 잘 맞는 것 같고, 어쨌든 아주 좋았다.

“오오오---!!!!”

노래가 끝나자, 시작할 때의 배는 되는 함성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두 사람은 숨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어줘야 했고, 그런 두 사람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하루카야 워낙 잘 웃는 아이라지만, 유키호의 미소는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눈부셨다.
잘됐군. 정말 잘됐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잘 하겠지.

내가 감상에 잠겨있는 동안, 어느새 스테이지 위에 있는 아이돌이 바뀌었다. 대체 두 사람이 언제 퇴장한 건지 생각하는 것보다는 일단…


♬ Do-Dai - 후타미 마미, 후타미 아미, 미나세 이오리


“우와아아아아아------!!!!”

소리부터 질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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