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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P < 인내의 삶 >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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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5, 2016 02:26에 작성됨.

<밤 바다의 이정표>

<First Step>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평소와 같은 시간에, 평소와 같은 장소에서, 평소처럼 눈을 떴다.

하반신만 덮은 홑이불을 다리로 걷어내고 상체를 일으키자 어제 잠들기 전 오른팔과 어깨에 붙여 놓은 아이스 팩이 마치 밤송이가 떨어지듯 후두둑 떨어졌다. 마치 비명소리처럼 온 몸을 징징 울리는 근육통을 애써 무시하면서 그것들을 주워 모아 다시 냉동실 안에 집어넣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엉망진창이구만.”

 

욕실의 거울에 비친 것은 한창 때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온 몸이 피멍으로 울긋불긋 꽃이 피어 있는 몸뚱아리였다. 팔꿈치, 어깨, 다리. 몸 가운데를 제외하면 멀쩡한 곳이 없었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서서 바짝 마른 입술로 억지로 휘파람을 불어 가며 샤워기에서 온수 밸브를 열었다. 이럴 때만큼은 중앙난방의 유일한 장점인, 물을 데우는 시간이 없다는 점이 정말로 고맙게 느껴진다.

피부를 때리는 물의 충격에도 이따금씩 손끝이 움찔거렸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하루 이틀 가지고는 도저히 나을 것 같지가 않았다. 결국은 억지로 만든 몸에, 끝없이 채찍질을 해가며 끌어올린 페이스다. 나름대로 트레이닝 후 회복에 신경을 썼지만, 수면시간이 부족하니 회복이 제때 될 리가 없었다.

정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한때 이 분야의 프로였던 자신이 보기에는 영 어설프고 엉망진창인 과정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원하는 결과는 얻을 수 있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 불만은 없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 아닌가.

 

신음을 흘리기도 하고, 표정을 찡그리기도 하면서 나는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나왔다. 물기를 닦아내면서 집 안을 돌아보면, 한 여름이기에 방 안의 공기는 빈말로도 차갑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무척이나 싸늘하게 느껴졌다.

이미 15년 이상을 혼자서 살고 있기에 익숙한 풍경이지만,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특히 지금처럼 어딘가가 아플 때는 가슴이 시릴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혼자’라는 현실을.

 

 

 

머리를 말리고 시계를 보자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은 부서장 회의로 시작하고, 부서장인 자신이 부재중이니 치히로가 대신 출석할 것이다.

 

“어디……이 정도면 되겠지.”

 

사무실의 공용 메일함에 오늘 아침에 사용할 회의 자료와 함께 부재중인 동안 치히로가 사용할 수 있도록 내 개인 메일에 들어 있는 업무 자료를 업로드 한 뒤 노트북을 다시 덮었다.

우유와 곡물가루를 섞어 만든 드링크로 적당히 아침을 때우고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곧바로 현관문을 나섰다. 방 열쇠를 숙직실에 맡기고 기숙사를 나가려는 그 때, 마당을 쓸고 있던 관리인이 나를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어제 꽤 무리했을 텐데, 벌써 일어나도 되나?”

“하하, 젊어서 그런가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네요. 조금만 달리고 들어올게요.”

“그래, 잘 다녀오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나는 기숙사의 정문 앞에서 천천히 몸을 풀었다. 어깨를 돌리는 것도, 다리를 푸는 것도, 하나하나가 모두 힘들고 아프다. 하지만 기분 좋은 통증이다.

가슴 속을 헤집는 싸늘함을 잊게 하는, 내가 살아있음을 가르쳐주는 통증이다.

 

“……후우.”

 

어느 정도 몸이 풀렸을 때,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숨을 뱉어내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느린 걸음은 보통 걸음이 되고, 곧 잰걸음이 되고, 느린 달리기가 되었다.

 

 

약 한 시간 정도를 달린 뒤, 집에 돌아와서 노트북을 열어 업무용 메일과 충전기에 연결해 둔 업무용 전화기를 한 번 살펴보았다. 메일에는 별 다른 내용이 없었지만, 업무용 휴대전화에는 부재중 통화와 함께 연락을 달라는 메일이 3건 도착해 있었다.

목록을 열어보면, 모두 3분기부터 새로 개편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렉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답장으로 휴가 중이라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휴대전화를 덮어 서류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태양의 고도가 높아지면서 온도가 점점 치솟기 시작한다. 이제 곧 8월인데도 장마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뉴스에서는 연신 폭염경보를 외쳐대고 있었다. 달리기를 마치자마자 샤워를 했는데, 얼마나 지났다고 금세 전신의 땀샘에서 땀방울이 찔끔찔끔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결국 백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닫고 에어컨의 스위치를 넣었다.

자, 이제 뭘 한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반쯤 떠밀려 휴가를 내기는 했는데 정작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 있으니 괜히 산소만 소비하는 것 같아서 죄책감이 몹시 들었다.

잠시 천장의 얼룩을 세다가, 바닥의 먼지도 한번 헤아려보고, 곧바로 업무용 휴대전화를 다시 꺼내어 저장된 치히로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P : 센카와 씨, 혹시 뭐 궁금한 거 없으세요?]

[치 : 없으니까 얌전히 푹 쉬고 계세요.]

 

“너무하네!”

 

매몰차게 돌아오는 답장에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휴대전화를 다시 가방 속으로 집어넣었다. 지금 시간대는 TV를 틀어도 아침 드라마밖에 하지 않고, 오락 채널은 딱히 즐겨 보는 게 없으니 논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맞아, 그게 있었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은 창고 대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최근 며칠 동안 전혀 정리를 하지 못했으니, 간만에 시간이 생긴 김에 가능한 많이 정리를 해 둘 생각이었다.

 

“일단은……스카우팅 리포트부터 좀 챙겨야 되나.”

 

방 한 쪽 구석에, 넘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쌓아 놓은 종이의 산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내가 자초한 일이라지만 이건 좀 아니지.

 

 

 

*************

 

 

 

월요일 아침, 이른 시간에 후미카는 사무실로 향했다.

어제 저녁 대회가 끝나고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오늘 하루는 쉬어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프로듀서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보였던 것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후미카가 조심스레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지만, 문만 열려 있었을 뿐,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혹시 시간을 잘못 알았나 싶었던 그녀는 다시 시계를 바라보았지만, 사무실의 벽에 걸린 시계는 아무런 이상 없이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서성이던 그녀는 치히로의 자리에 걸려 있는 ‘회의실’이라고 적혀 있는 작은 팻말을 발견했다.

 

“아…….”

 

그제서야 그녀는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주 월요일 아침에는 본관의 회의실에서 부서별 회의가 있다. 원래는 프로듀서가 참가하고 치히로는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프로듀서가 출장이나 기타 사유로 부재중일 때는 치히로가 부서장 대리로 참가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그녀는 치히로가 돌아오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가방에서 문고판을 꺼내어 소파로 다가갔다. 후미카가 프로듀서의 자리에 걸려 있던, ‘휴가’라고 적힌 작은 팻말을 눈치챈 것은 조금 뒤의 일이다.

 

 

분침이 반 바퀴 정도를 달렸을 때, 복도를 걷는 발소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이 힘없이 열렸다. 그 너머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치히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들어왔다.

 

“하아…….”

“안녕하세요…….”

“엑, 후미카? 오늘 쉬는 날 아니야?”

“어제……프로듀서 씨가 조금 불편하신 것 같아서요……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 싶어서.......”

“그렇구나.”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팻말을 떼어내고 의자에 앉는 치히로를 바라보던 후미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향했다.

 

“저기…….”

“응? 왜?”

“혹시……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어? 아……있다면 있는데…….”

“……?”

“잠깐 이것 좀 볼래?”

 

치히로가 후미카에게 내민 것은,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CG프로덕션의 보도부에서 발행하는 사내 신문이었다. 후미카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었기에 낯선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신문의 제 1면에 대서특필된 기사였다.

커다랗게 적혀 있는 ‘5연패 설욕!’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가운데에는 글러브를 끼고 마운드 위에 서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그리고 그 옆에는 간이 스테이지에서 개회사를 낭독하고 있는 후미카의 사진이 찍혀 있었다.

 

“저기, 이건……저와, 프로듀서……?”

“맞아. 이거 때문에 아침부터 얼마나 시달렸는데……여기저기서 너도나도 프로듀서, 프로듀서. 아이고…….”

 

부끄러운 듯 사진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후미카를 옆에 두고, “이젠 완전 스타야, 스타.”라고 말하며 질렸다는 듯 치히로는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그런데, 후미카는 무슨 일로 왔어? 혹시 프로듀서 씨 보러 온 거니?”

“아, 아니에요…….”

“헤에, 아니라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저, 정말이에요…….”

“그런데 프로듀서 씨는 오늘부터 수요일까지 휴가인데.”

“그렇습니까……?”

“일부러 잘 보이는 장소에 팻말도 걸어 놨어.”

“……정말이군요…….”

 

프로듀서의 자리에 걸려 있는 ‘휴가중’이라는 팻말을 확인한 후미카의 어깨가 누가 보더라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축 처졌다. 무척이나 실망한 듯한 그 모습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치히로는 슬쩍 시선을 돌려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린 애들이랑 마유는 오후에나 레슨이 있으니 힘들겠고. 미즈키 씨는 오늘 촬영 있으니까…….’

 

평일인 만큼 제각각의 일정으로 스케줄이 메워져 있었지만, 단 한 사람. 오늘과 내일의 일정에 여유가 있는 사람이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하던가.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사무실의 문을 열고, 얇은 원피스 차림의 타카가키 카에데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하아~, 살 것 같다…….”

“아, 카에데 씨!”

“안녕하세요…….”

 

후미카와 치히로에게 꾸벅, 목례를 한 그녀는 소파 위에 가방을 올려두곤 프로듀서의 자리를 힐끔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는……오늘부터 휴가네요?”

“네. 수요일까지 휴가랍니다.”

“잘 됐네요. 최근 통 쉬질 않아서, 2~3일쯤은 푹 쉬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안 쓰겠다고 박박 우기는 걸 사장님이 반쯤 억지로 밀어 넣었어요. 그 두 사람, 은근히 죽이 잘 맞으니까요.”

 

“그 사람답네요”라며 서로를 보면서 웃는 카에데와 치히로 사이에서, 후미카는 조용히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카에데 씨 오늘 오전 레슨밖에 없죠?”

“아, 그거 말고도 오후에 잡지 인터뷰가 있어요.”

“엑, 정말이요? 그런데 스케줄 보드에는……아, 맞아!”

 

그제서야 치히로는 스케줄 보드의 갱신 날짜가 저번 주 금요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급히 모니터를 켜고 프로듀서와 함께 사용하는 메일함을 열자 아니나다를까, 회의 자료 이외에도 프로듀서의 개인 메일로 업로드 된 자료 몇 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것들을 열자 최신화된 이번 주의 스케줄이 주르륵 나타났다.

 

“어디……그거 말고는 없네요?”

“네.”

“잘됐다. 그러면 이따가 저녁 때 프로듀서 씨 병문안이나 가 볼까요?”

“병문안이요?”

“네, 병문안. 프로듀서 씨, 이번에 병가 내셨거든요. 어딘가 아픈 게 아닐까 싶어서 말이에요.”

“어디 아프다던가요?”

 

병문안이라는 말에 카에데가 솔깃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치가 빠른 그녀라면 아마도 그 안에 담긴 뜻을 눈치챈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 대조적으로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후미카는 병문안이라는 말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저 아이의 성격으로 보면 프로듀서가 정말로 아픈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치히로는 아주 조금 장난기가 동했다.

 

“글쎄요……사장님께서 병가로 처리하셨는데, 이게 진짜로 아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네요. 그래도 어제 뒤풀이 끝나고, 프로듀서 씨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잖아요?”

“그건 그렇죠.”

 

“거기다 말이죠.”라면서 치히로는 히죽거리는 얼굴로 좀처럼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후미카를 바라보았다.

 

“후미카도 프로듀서 씨의 상태에 매우 관심이 있어 보여서 말이에요.”

 

카에데가 후미카를 바라보자, 그녀는 늘어뜨린 앞머리 아래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붕붕 내젓는다.

 

“……그렇군요. 그래서, 진짜 속셈은요?”

“프로듀서 씨의 집을 구경해보고 싶어요. 구체적으로는 프라이버시를.”

“정직하시네요.”

“그야 그 사람, 물어보지 않으면 좀처럼 자기 이야기를 안 한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일일이 캐묻기도 그렇고요. 카에데씨는 안 궁금하세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카에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저도 갑자기 궁금해졌네요. 좋아요. 그럼 일정이 끝나는 대로 다시 사무실로 돌아올게요.”

“네. 그럼 후미카는?”

“저, 저……말인가요……?”

 

터질 듯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카에데와 치히로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도, 가고……싶어요…….”

“그래, 그럼 후미카는 우리가 기숙사로 데리러 갈 테니까, 다섯 시까지 기숙사에 있어. 알겠지?”

“네…….”

 

 

 

*************

 

 

 

오후 여섯 시가 되었지만, 약속과 달리 남자 기숙사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은 후미카와 카에데 두 사람뿐이었다.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와 마유를 마스터 트레이너에게 인계하고, 잽싸게 퇴근을 하려던 치히로는 그만 동기들에게 덜미를 잡혀 꼼짝달싹 못하고 술자리로 끌려가버린 것이다. 아이돌 부서는 어제의 대회 덕분에 적잖이 화젯거리가 되어 있었으니 쉽사리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그녀에게 명복을 빌어 주는 한편, 카에데는 곧장 후미카를 데리고 회사 소유의 남자 기숙사로 향했다.

후미카는 카에데와 자신이 각자 하나씩 들고 있는 종이가방을 바라보며 불안한 듯 카에데에게 물었다.

 

“저기, 정말 이걸로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에요. 저번에 디렉터랑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는데, 그 사람은 이런 거 굉장히 좋아하니까요. 자, 가죠.”

“그런가요…….”

 

기숙사의 입구를 향해 다가가자, 입구 옆에 뚫린 자그마한 쪽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엉? 아가씨들이 여기엔 무슨 일입니까? 여기엔 여자들 들어오면 안 되요. 어서 나가요.”

“저, 여기에 있는 P씨의 동료인데요. 병가를 냈다고 해서 병문안을 왔습니다.”

“흐음, 허가서 있어요?”

“네, 여기요.”

 

카에데가 내민 종이를 훑어본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이를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

 

“좋습니다. P씨네 방은 202호니까 계단으로 올라가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바로 보일 거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오르는 카에데와, 약간 서두르는 듯한 종종걸음으로 그 뒤를 따르는 후미카의 뒷모습을 슬쩍 바라본 뒤 남자는 쪽문을 닫았다.

 

 

 

202호라 적힌 현관문 앞에서, 카에데와 후미카는 5분 정도를 가만히 서 있었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정말로 아파서 주무시고 계신 걸까요?”

 

카에데의 말에 가뜩이나 앞머리로 인해 그늘이 져 있는 후미카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더욱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몇 번째나 누른 것일까. 카에데가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누르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각오를 다진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고, 그것을 오른쪽으로 크게 돌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언제 내가 잠겨있었냐는 듯 너무나도 쉽게 현관문이 열렸다.

 

“……열려있었네…….”

“…….”

“흠흠, 우선은 들어가죠.”

“네…….”

“실례합니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간 두 사람을 반기는 것은 코를 찌르는 파스 냄새였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 계속 환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카에데의 기억으로 프로듀서는 대충 한 달 반쯤 전부터 파스를 붙이기 시작했으니 그 냄새가 쉽사리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거실의 창가에 설치된 침대의 옆에 기대어 앉아서 코가 어느 정도 냄새에 적응하기를 기다리며 카에데는 집 안을 대충 둘러보기 시작했다. 침대를 남쪽으로 보았을 때 동쪽에 해당하는 벽에는 커피포트와 머그잔이 걸려 있는 스테인리스 선반이 올려진 개수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침대를 마주보는 벽면에는 TV가 놓여 있었다. 개수대의 맞은편 벽에는 두 개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고, 문과 문 사이 작은 공간에는 벽걸이 시계와 벽걸이형 달력이 걸려 있었다.

기숙사라고 해서 좁은 방을 생각던 카에데는 자신의 생각을 약간은 고쳐야만 했다. 가스레인지나 전기레인지 같은 가열기구가 없다는 점만 빼면, 여기가 기숙사인지 아니면 맨션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환경이었다.

 

“기숙사치곤 수준이 남다르네요. 여자 기숙사도 이렇게 생겼나요?”

“네……저희는 대신 저 방이 각자 개인 방이에요. 2인 1실로 사용하고…….”

“그렇군요……그래도 뭔가 팍팍한 느낌이네요. 집이라기보단 거주지같다고 해야하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못해 사람의 손조차 별로 타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거실을 돌아보면서 카에데가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 후미카는 무심결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자세를 고쳐 앉던 후미카의 발끝에 뭔가가 툭, 하고 걸려 넘어졌다. 살펴보면 그것은 프로듀서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가죽 재질의 서류가방이었다.

 

“적어도 여기가 프로듀서 씨의 방은 맞는 것 같군요.”

“네…….”

 

어느 정도 코가 적응될 무렵이 되자, 다른 방에도 호기심이 생긴 카에데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과 연결된 두 개의 방을 향해 다가갔다. 미안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래도 그보다도 베일에 싸여 있는 미지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호기심이 조금 더 강했던 모양이다.

두 방 중에서 하나는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나머지 하나는 제대로 닫히지 않은 것인지 문틈 사이로 방 안이 약간 보일 정도로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얼핏 보기에 문이 열려 있는 쪽은 프로듀서의 개인 공간으로 보였기에 단념했지만, 문이 닫혀 있는 쪽은 카에데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조심스레 방으로 다가간 카에데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문을 열면서 벽을 더듬어 불을 켜기 위한 스위치를 찾았다.

 

“어디보자, 스위치가……여기 있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켜지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녀는 숨을 삼켰다.

 

“세상에……후미카? 잠시 이리 와 볼래요?”

 

멍하게 거실에 앉아 있던 후미카는 카에데의 부름에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로 다가갔다. 그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던 카에데는 곧바로 문을 조금 더 크게 열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벽 하나를 집어삼킨 붙박이장을 가득 채운 있는 DVD와 바인더였다. 벽장에 다가간 카에데가 DVD의 케이스를 하나 뽑아 겉면을 살펴보자, 거기에는 날짜와 장소, 그리고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뭘까…….”

 

카에데는 뽑았던 DVD를 제 자리로 돌려놓았다. 그 옆에서 후미카는 쪼그려 앉아 한쪽 벽면에 쌓아 놓은 서류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유독 두텁게 묶여 있는 한 뭉치의 종이가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아직 폴더에는 정리를 덜 한 것인지, 작은 집게로 묶여 있는 그 종이들은 격자무늬처럼 가로세로를 번갈아 가며 배열되어 있었다. 후미카는 그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집어 들었다.

‘스카우트 리포트’라고 적혀 있는 표지에 찍힌 로고는 CG프로덕션의 것이 아닌 처음 보는 회사의 물건이었다. 그 내용물을 살펴보려던 바로 그 때, 그녀의 등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얏!”

 

그와 함께 들려온 카에데의 비명소리에 후미카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뇨, 괜찮아요. 그냥 발가락을 부딪힌 것뿐인……데, 이건……?”

 

발가락을 어디에 부딪혔는지, 자신의 발치를 돌아보던 그녀는 서류더미 아래에 깔려 있던 투명한 아크릴 쇼케이스를 발견했다. 뚜껑에 자물쇠가 달려 있고, 높이가 20cm정도 되는 직육면체 모양의 쇼케이스의 내부에는 두 개의 레플리카 트로피와 번쩍이는 보석이 박힌 반지, 그리고 두 장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었다.

 

“트로피……치고는 조금 독특하게 생겼네요. 후미카, 이게 뭔지 알아요?”

“글쎄요……저도 처음 보는 것들이라…….”

 

쇼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두 개의 트로피는 모두 동그란 돔 형태의 베이스 위에 원기둥을 사선으로 자른 모양새로 깃발들이 배열되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차이점이라면, 왼쪽에 있는 것은 작은 깃발이 원기둥 모양으로 여러 개 배열되어 있었고, 오른쪽에 있는 것은 가장 높은 깃대에 달려 있는 커다란 깃발이 나부끼듯 원통 모양으로 늘어선 깃대들을 휘감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트로피라고는 탑처럼 쌓아 올린 것 밖에 보지 못한 그녀들이었기에 처음 보는 그 트로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반지도 그렇고, 뭔가 엄청 귀해 보이는데요.”

 

그 트로피들의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은, 형광등의 빛을 받아 휘황찬란하게 반짝이는 반지였다. 손가락이 닿는 부분이 과도하게 두껍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한 장식이 되어 있었으므로 누가 보더라도 저건 전시용으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이아몬드와 백금으로 가공한 듯, 하얗게 번쩍이는 반지의 한쪽 옆면에는 청금석인지 사파이어인지 모를 푸른 보석으로 새겨진 31이라는 숫자가 주황색 광물로 세공된 테두리를 두르고 있었고, 반대쪽 옆면에는 검은 광물을 이용한 2006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옆에……사진도 있어요.”

 

카에데가 트로피를 살펴보는 사이, 후미카는 그 옆에 있는 사진을 살펴보았다. 트로피와 반지의 좌우에 하나씩 놓인, 금테로 장식이 되어 있는 두 개의 액자에 들어 있는 사진에는 각각 수많은 사람들이 찍혀 있었다. 두 사진의 찍힌 날짜와 배경은 각자 달랐지만, 두 사진에는 모두 두 개의 트로피와 함께, 가장 앞 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31번이라는 번호가 적혀 있는 유니폼을 양 손으로 펼쳐 들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특히나 병원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서 촬영한 사진의 맨 앞줄의 중앙에는, 휠체어에 앉은 채 어쩐지 낯익은 미소를 짓고 있는 환자복 차림을 한 청년이 찍혀 있었다.

아래쪽에 무언가가 적혀 있었지만, 마치 지렁이가 기어가는 듯한 글자를 휘갈겨 적은 탓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이라곤 11/1/2007이라는 숫자와 05/8/2008이라 적힌 숫자뿐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카에데와 후미카가 쇼케이스를 구경하고 있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신발을 벗는 소리가 부스럭부스럭 들렸다. 두 사람은 재빨리 쇼케이스의 주위를 원래대로 정리해둔 다음 거실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어디선가 진행하던 이벤트라도 다녀온 것인지, 유명한 스튜디오의 로고가 그려진 비닐가방을 들고 현관에서 막 들어오던 프로듀서가 놀란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 벌써 와 있었네요? 방 구경하고 있었어요?”

“네? 아, 네에……죄송해요. 허락도 없이.”

“아뇨, 뭐 숨길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안 심심했으면 됐죠.”

 

그렇게 말하면서 프로듀서는 약간은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거실로 들어왔다. 평소의 날 선 정장차림이 아닌 사복 차림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프로듀서의 얼굴은 거의 반쪽이 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핼쑥해져 있었다.

 

“세상에, 얼굴이 반 쪽이 됐네……괜찮아요?”

“괜찮아요. 선발로 나가면 원래 체중 5kg정도는 줄어드니까요.”

“그 정도나…….”

“그나저나, 놀러 오신다고 센카와 씨한테 이야기 들었습니다만, 정작 본인이 안 보이네요?”

“동료 분들한테 잡혀서 그만……지금쯤 열심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거에요.”

“그랬군요.”

 

‘사실 당신 때문이에요’라고 말하려던 카에데는 가까스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는 데 성공했다. 대신 그녀는 거실 구석에 세워두었던, 자신들이 가지고 온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참, 여기, 선물이에요. 집들이라고나 할까, 병문안이라고나 할까…….”

“병문안이요?”

“네. 치히로 씨가 병가 냈다고 그러던데요?”

“병가요? 난 연차 냈는데?”

 

그러자 프로듀서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뭐……결국 인사집행은 사장님이 하시는 거니까, 출근해서 물어보면 되겠죠. 그런데 이건 뭔가요? 열어봐도 되요?”

“물론이죠.”

“어디 보자……이야, 파스타네요? 종류도 많네.”

“마음에 드세요?”

“아주 좋아 죽죠 저 이거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후훗, 비밀이랍니다.”

 

프로듀서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받은 물건을 자신의 방에 갖다 놓은 뒤 고개를 내밀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혹시 둘 다 저녁밥 먹었어요?”

“저는 안 먹었어요!”

“저도, 그게…….”

 

머뭇거리는 후미카와 당당하게 손을 드는 카에데의 대비되는 반응을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 식재료 다시 보충해야 할 때가 됐으니까……온 김에 저녁밥이라도 먹고 가세요.”

“야호!”

“감사합니다…….”

 

방에서 지갑과 장바구니를 가지고 나오면서, 프로듀서는 거실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리모컨을 건넸다.

 

“일단 저는 시장 봐 올 테니까, 심심하면 TV라도 보고 계세요.”

“그럼, 우리도 도와드릴게요.”

“안 돼요.”

“왜요?”

“변장거리 안 들고 왔잖아요.”

“아…….”

 

그제서야 카에데는 프로듀서가 양복 차림도 아니고, 평소처럼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곳에 들어오는 것이야 회사 시설이니까 해명을 할 수 있다 해도, 밖에서 웬 남자와 함께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한창 순항중인 일정에 커다란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카에데는 고개를 돌려 문이 열려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럼 방 구경을 해도 될까요?”

“네. 뭐라도 보고 싶으면 꺼내서 읽어도 됩니다. 뭐, 볼 건 없겠지만……그럼 금방 다녀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프로듀서가 현관을 나가기가 무섭게, 카에데는 반짝이는 눈으로 후미카를 돌아보았다.

 

“허락 받았으니, 한번 뒤져볼까요?”

“네……? 저도, 인가요……?”

“물론이죠. 우린 이미 공범이잖아요?”

“아…….”

 

후미카는 자신의 손을 잡아 끄는 카에데의 손길에 이끌려 열려 있는 그의 방으로 향했다.

자료실보다 조금 더 큰 것처럼 보이는 프로듀서의 방은 어째서인지 사무실의 구석에 있는 그의 자리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방의 한쪽 모서리에는 노트북과 PC가 있는 커다란 사무용 책상이 있고, 건너편 벽에 서 있는 두 개의 붙박이장에는 화려한 장식이 들어간 소설책들이 꽂혀 있었다. 카에데에게 있어서는 처음 보는 물건이었지만, 그 책의 출처를 알고 있는 후미카에게 있어서는 하나같이 낯이 익은 책들이었다.

방 안의 책장을 살펴보던 카에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다 영어책뿐이네요. 사진 같은 것도 없고…….”

“저기, 사진이라면 여기에…….”

“그건 사무실 앨범에도 있는 거에요. 작년 야유회 때 찍은 거라…….”

“그렇군요…….”

 

기대와는 달리 프로듀서의 방에서 두 사람이 거둔 소득은 그다지 없었다. 책꽂이에 있는 것이라곤 죄다 영어로 적힌 책뿐이었고, 앨범 따위를 찾아보려 했지만 회사에서 만든 앨범이나 자신들의 화보를 제외하고는 그 흔한 졸업 앨범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제외하면 외지로 나온 사람이라면 보통은 한두장 정도는 방 안에 걸어놓는 것이 보통인 가족사진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저 왔습니다.”

 

탐색을 실패하고 두 사람이 거실에서 멍하게 앉아 있을 무렵, 시장을 보고 돌아온 프로듀서는 두 사람을 1층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여기 마음대로 써도 되요?”

“네. 업체도 빠졌고, 이제는 공용 조리실 수준이라서요.”

“업체가 빠져요? 왜요?”

“여기 내년에 철거할거거든요. 지금 사는 사람도 저랑 관리인 아저씨 빼면 매니지먼트 부서의 두 명 밖에 없고 말이죠.”

“그럼 프로듀서씨는요?”

“저야 뭐 그때 되면 맨션을 사든가 하겠죠? 자, 여기 앉아서 기다리세요.”

 

두 사람은 넓은 테이블에 앉혀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커다란 냉장고 안에 이런저런 식재를 집어넣던 중에 그는 장바구니 안에서 작은 갈색 드링크 두 개를 꺼내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밥 먹기 전에 이거부터 드세요.”

“뭔가요, 이건?”

“비타민입니다. 땀을 흘리다 보면 비타민이 부족해지기 쉬우니까요. 자, 사기사와도 하나 먹어.”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드링크를 마시는 것을 보고, 프로듀서는 차고 있던 암슬리브를 벗어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곧바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앉아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카에데는 도와줄까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반쯤 일어섰지만, 곧바로 능숙한 솜씨로 재료를 손질하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보면서 조용히 자리에 다시 앉았다.

잠시 후, 프로듀서가 가지고 온 커다란 접시가 두 사람의 앞에 각각 놓였다. 접시의 내용물을 본 카에데는 의외라는 듯 그를 올려다 보았다.

 

“오믈렛이네요.”

“네. 어릴 적에 대회가 끝나고 나면 아버지께서 곧잘 해주곤 하셨어요. 뭐 할까 하다가 생각이 나서 말이죠.”

 

“제가 제일 잘 하는 것이기도 하고요”라고 덧붙이며 프로듀서는 자신의 접시를 들고 와서 테이블의 빈 자리에 앉았다.

 

“추억이 깃든 음식이네요.”

“추억……뭐, 그렇다고 해 두죠.”

“……?”

 

그렇게 중얼거리는 프로듀서의 얼굴에 한 순간이지만 그늘이 졌다. 금세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늘어뜨린 앞머리 사이로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후미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뭐, 이야기는 이쯤 하고, 식기 전에 빨리 먹읍시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의 손을 빌려 뒷정리까지 완전히 끝낸 뒤 프로듀서는 두 사람을 데리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에어컨을 쐬면서 프로듀서가 후식으로 사온 아이스크림을 먹던 카에데가 신기한 듯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의외네요. 프로듀서, 생긴 것만 봐선 요리랑 안 친하게 생겼는데.”

“이렇게 생겨서 미안하네요.”

“농담이에요, 농담.”

“어찌됐든지 혼자 살기 시작한 지 이제 15년째니까요. 싫어도 요리에는 숙달되더군요.”

“네……?”

“……?”

 

그 순간 카에데와 후미카는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15년이요……?”

“네, 15년이요.”

“저기, 프로듀서는 지금 나이가…….”

“저요? 올해로 스물아홉이죠.”

“그러면 열네 살부터 혼자서 살았다는 말인데요?”

“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앞에 두고, 후미카와 카에데는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프로듀서는 손목시계를 한번 바라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보았다. 두 사람이 여기에 온 것은 오후 여섯 시라고 들었다. 이미 세 시간 정도 지나서 하늘은 어두컴컴한 상황이었지만, 도심의 정체된 바람이 품고 있는 열기는 아직 채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자동차를 꺼내야 하려나, 라고 생각하며 프로듀서는 창문을 닫고 거실로 돌아왔다. 때마침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비우고 뚜껑을 싹싹 긁고 있던 카에데와 시선이 마주쳤다.

 

“……더 드실래요?”

“아뇨…….”

 

쑥쓰러운 듯 얼굴을 가볍게 붉히면서 그녀는 들고 있던 뚜껑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것을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그녀는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바꾸었다.

 

”올해는 작년에 비하면 꽤나 압도적이었네요. 한 대도 안 맞았죠?”

“네, 힘 좀 넣었죠. 그럴 이유가 좀 있었어요.”

“어떤 이유요?”

“……현역이 있더라구요. 상대 팀에.“

“현역이요?”

“네. 현역 프로 선수 말이에요.”

 

‘뭐 이쪽 입장도 따져보면 피차일반인가’라고 생각한 프로듀서는 자리에 앉으면서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그걸 구분할 수 있어요?”

“네. 딱 보면 알아요. 배트를 잡고 있는 모습이나 타격 직전의 자세 같은 걸 보면, 저 사람이 전문적인 훈련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알 수 있어요. 시즌이 한창인 지금 이런 데 불려 나왔다는 건 2군에도 못 끼는 어중이떠중이란 소리지만, 그래도 아마추어보단 잘 하죠. 프로는 프로니까.”

“그래서 그만 힘 조절을 안 하고 전력으로 갔다고요?”

“네. 어찌됐든 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게 마음먹는 대로 되는거였나, 하고 생각하던 그녀에게 한번 보라는 듯 ”그래서 지금 이 꼴이 났죠.”라고 말하며 그는 입고 있던 셔츠의 오른쪽 소매를 약간 걷어 올렸다. 두 사람의 눈에 세네 장씩 붙어 있는 습포 아래로 살짝 드러난 그의 어깨가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는 것이 보였다. 카에데의 옆에 앉아 있던 후미카가 걱정스러운 듯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저기, 병원은……다녀 오셨나요……?”

“낮에 갔다 왔어. 작년부터 신세지고 있는 좋은 재활원이 있어서.”

“그러고 보면, 오후에는 어디 갔었어요? 아까 보니까 왠 상품가방을 들고 오시던데.”

“오후에요? 잠깐 765프로덕션에 들렀다가 K홀에 갔었죠.”

“K홀이라면……오늘 섬머 페스티벌 하는 곳이었던가요?”

“네. 무대 연출이라던가 상품 기획 같은 걸 조금 참고해볼 생각이었어요. 정장 차림이었으면 꼼짝없이 문전박대 당할 곳이었는데. 휴가라서 다행이었죠.”

 

조용히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후미카는 그가 오기 전, 지금은 문이 닫혀 있는 자료실 안에서 봤던 어마어마한 자료의 산을 떠올렸다. 훈련을 하던 와중에도 가끔 퇴근하고 나서 어딘가로 사라지는 일이 많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저기에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얻은 자료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저 안에서 사진을 발견했는데 말이죠.”

“사진이요? 그런 게 있었던가?”

“그……이 정도 크기의 쇼케이스 안에 들어있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프로듀서는 후미카의 ‘쇼케이스’라는 말에 무릎을 탁 쳤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게 거기에 있었구나. 그래서, 그게 왜요?”

“아뇨, 그냥 무슨 사진인가 싶어서요.”

“두 장이었죠? 트로피랑 반지랑 같이 있던 거.”

“네.”

“별 거 아니에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 게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후미카도 궁금해하고 있었고 말이에요.”

 

그러자 프로듀서는 시선을 돌려 후미카를 바라보았다. '정말로?'라고 물어보는 듯한 그의 시선을 받자 후미카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별 수 없지……”라고 하며 프로듀서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 선수시절 때 사진이에요.”

“선수 시절 때요?”

“네. 제가 안 찍힌 쪽이 네 번째 우승 사진이고, 나머지 하나는 제 은퇴 사진이에요. 사진 속에 사람들이 31번 유니폼을 들고 있었죠?”

“네? 아아, 네…….”

 

거실에 설치된 침대 밑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프로듀서는 그 안에서 유리 세정제를 꺼내 안경알에 튄 기름기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는 지나가듯 가벼운 어조로 이야기를 툭툭 던지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두 사람은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등번호 31번은 제 번호였고, 반지에 적힌 2006년은 월드시리즈에서 세 번째로 우승한 해입니다. 거기에 있던 트로피는 커미셔너 트로피라고 하는 우승 트로피고, 그 옆에 있던 조금 작은 건 MVP트로피에요.”

“아니, 잠시, 잠깐만요.”

 

카에데는 교통정리를 위해 그의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니까, 프로듀서씨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야구선수였고, 그 팀이 우승을 해서 받은 상이 저 방에 있는 그거라는 말인가요? 그리고 MVP가 당신이었구요?”

“정확합니다.”

“…….”

 

프로듀서는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보며 별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는 바닥에 굴러더니던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작해 검색 결과를 띄워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뉴욕 메트로 등번호 31번”이라는 키워드의 검색 결과로 나온 것은 카에데와 후미카가 방 안에서 본 것과 똑같은 사진이 걸려 있는 신문기사와 유니폼 차림으로 찍은 프로필 사진이었다.

두 사람이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사이, 프로듀서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자기 여권을 들고 나왔다.

 

“보세요. 이름 똑같죠? 사진은 옷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의 여권에 적힌 이름과 사진은 놀랍게도 기사 하단에 적혀 있는 MVP 수상자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다만 사진 속에서 입고 있는 복장이 유니폼과 정장이라는 차이점이 있었을 뿐이었다.

 

“진짜네…….”

“제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겠어요.”

 

두 사람이 영어에 익숙하지 않아 사진만 대충 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후미카와 카에데 둘 다, 사진에만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의 여권에 적혀 있는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두 사람에게서 돌려받은 휴대전화의 화면을 잠시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훗, 하고 작게 웃으면서 그것을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슬슬 갑시다. 두 사람 다 바래다 드릴게요.”

“에에, 벌써요?”

“벌써라뇨, 벌써 밤 열 시거든요.”

 

프로듀서의 시선이 후미카를 향하자, 그제서야 카에데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눈치챘다.

 

“아, 맞아. 통금 있었죠?”

“네……저, 죄송합니다…….”

“그렇게 됐으니 어서 움직입시다. 미리 연락하면 10분 정도는 늦출 수 있겠네요.”

“네. 별 수 없네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잠시 후, 픽업용도로 사용하는 회사 소유의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던 카에데는 운전대석에 앉은 프로듀서를 보며 조금 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미리 이야기를 하지 그랬어요.”

“어떤 이야기요? 제 선수 생활요?”

“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을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하하, 그거 이야기해서 뭐합니까. 지금의 저는 투수가 아니라 프로듀서인걸요. 거기다가, 제가 그렇게 떠들고 다닌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줄까요?”

“그건 그렇지요.”

“뭐, 그것도 써먹을 수 있으면 얼마든지 써먹겠습니다만..”

“…….”

 

뒷좌석에 앉아 있던 후미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가만히 앉아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통금시간까지 시간이 촉박했기에 프로듀서는 일단 여자 기숙사에 후미카를 우선 내려주기로 했다. 기숙사의 정문 앞에서 내린 후미카는 마유에게 챙겨주라며 프로듀서가 사 준 유명한 제과점의 로고가 찍힌 가방을 손에 들고, 차 안에 있는 두 사람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네었다. 그런 그녀에게 손을 흔들면서 프로듀서는 카에데의 맨션으로 차를 몰았다.

 

“그립지 않으세요?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그 시절.”

“당연히 그립죠.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아요.”

 

앞을 바라보는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프로듀서가 대답한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젠 더 이상 제가 설 자리가 없어요. 저의 시간은 이미 끝나버렸으니까요.”

 

스쳐 지나간 가로등의 불빛이 그의 하관을 비추었다. 주황색의 불빛에 드러난 그의 입은 기분 좋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씁쓸하거나 비웃음 같은 것이 아닌, 문자 그대로의 미소였다.

 

“프로는 인내의 삶입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때가 있는가 하면, 그 네온사인이 꺼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빛나던 때의 화려함보다도, 빛이 사라졌을 때의 쓸쓸함을 곱씹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 프로에요. 저는 빛을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는 쓸쓸함에 익숙해질 때입니다.”

“그래도, 가까이에 있으면 더 그리워진다고들 하잖아요?”

“그렇지요. 그래도 괜찮아요.”

 

또다시 신호가 빨간 불이 되었다. 자동차를 정지시키고 프로듀서는 몸을 숙여 핸들에 몸을 기대어 앞 유리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오직 무대의 뒤편,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만 할 수 있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렇지만 카에데의 눈에 비치는 프로듀서의 옆모습은, 자신의 말과는 달리 어쩐지 미련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 다 왔습니다.”

 

맨션 입구에 도착해서, 프로듀서는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회사의 로고가 그려져 있는 차량을 골랐으니 얼굴이 노출된다 하더라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병문안 왔다가 실컷 폐만 끼치고 가는 것 같네요.”

“폐라뇨. 오늘 와 줘서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후훗,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그럼 푹 쉬고, 목요일에 건강한 모습으로 뵈어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운전석의 문에 기대어 서서, 프로듀서는 그녀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에데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자, 그는 운전석으로 돌아가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그 사이, 목적지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카에데는 맨션의 복도에 서서 프로듀서가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한 쌍의 테일램프를 바라보며 그녀는 어제 있었던 야구 경기를 떠올렸다.

 

“’시간은 벌써 끝나버렸다’라니. 잔인한 표현을 쓰시는군요.”

 

그러나 그녀는 프로듀서가 어째서 구태여 그런 표현을 사용했느냐 하는 부분까지는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와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그 날, 안경과는 인연이 없던 프로듀서가 어째서 항상 안경을 쓰게 되었는지, 그에 대한 이유를 본인에게서 직접 들었음에도.

 

 

-------- P < 인내의 삶 > (下)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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