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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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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8, 2016 03:25에 작성됨.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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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그것’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마유 씨의 첫 라이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레슨 이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던 저였기에, 프로듀서 씨는 동료들의 라이브나 방송 행사가 있을 때마다 가끔씩 저를 동행시켜 주셨습니다. 현장의 분위기를 미리 익히는 목적도 있었고, 이제 곧 데뷔하게 되는 제 이름을 조금이라도 더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프로듀서 씨는 제가 무대를 보러 가는 것만은 말리셨습니다. 공연 전후의 불이 꺼진 무대는 얼마든지 허락해주셨지만, 공연이 한창 진행중인 무대는 완강하게 거절하셨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언젠가는 직접 대면하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라면서요.

 

“괜찮으세요……?”

“네, 네. 마유는, 괜찮아요.”

 

대기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마유 씨는 그녀치곤 보기 드물게 떨고 있었습니다. 모델 출신인 마유 씨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것에 큰 거부감이 없었던 것처럼 보였기에, 저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녀의 그런 모습을 오래 볼 수는 없었습니다.

 

“사쿠마, 순서 결정됐다. 상태는 어때?”

“좋아요. 지금의 마유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에요.”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한번 더 점검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스태프 분들과 미팅을 마치고, 최종 결정된 순서를 가지고 프로듀서 씨께서 돌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프로듀서 씨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마유 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이 풀어지고,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사쿠마 씨? 다음 차례 준비해주세요.”

 

프로듀서 씨와 함께 가사와 안무를 점검하던 그녀는 잠시 후 대기실에 찾아온 스태프에게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프로듀서 씨와 함께 스테이지를 향했습니다.

 

“다녀오세요.”

 

이미 몇 번이나 보아 익숙한 광경이었기에, 저는 대기실의 의자에 앉아서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마유 씨는 그런 저를 한 번 돌아본 뒤, 프로듀서 씨의 뒤를 따라 대기실을 나갑니다.

제대로 닫지 않은 것일까요. 살짝 열린 대기실의 문 틈새로, 수많은 관객들의 환호성 소리와, 커다란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눈을 감고 그 소리를 음미하면, 괜히 가만히 있는 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때, 대기실의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마유, 준비 잘 하고 있어?”

“P씨~! 마유! 우리 왔어!”

“아……저기, 죄송, 합니다……?”

 

기운차게 대기실로 들어온 린 씨와 나오 씨는, 의자에 앉아서 막 펼친 책을 들고 있는 저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대기실을 흐르는 것도 잠시, 곧바로 마지막 한 사람이 대기실에 들어왔습니다.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일원 중 하나인 카렌 씨였습니다.

 

“뭐야, 너희들 왜 이렇게 조용……후미카 씨? P씨랑 마유는?”

“두 사람이라면, 조금 전 차례가 와서요…….”

“아차, 엇갈렸구나……그런데, 후미카 씨는 왜 여기 있어?”

 

뜻밖의 질문에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런 저를 향해 다가온 세 사람은 마치 저를 유혹하듯,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테이지의 뒤에서 바라본 라이브 무대, 한번 보고 싶지 않아?”

 

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프로듀서 씨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하지만, 프로듀서 씨가…….”

“괜찮아, 괜찮아! 살짝 보기만 하는 거니까. 멀리서 살짝 보고, 금방 돌아오면 돼. 어때, 괜찮지? 응?”

 

“분명 가 보면 후회는 안 할걸?“이라며, 마치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메피스토의 속삭임처럼 들려오는 매력적인 카렌 씨의 제안에, 저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뒤를 따라 대기실을 나섰습니다.

 

“발 조심해.”

“네…….”

 

복도를 나가서, 각종 기재가 쌓여 있는 미로를 지나 스테이지의 뒤에 도착했습니다. 저 멀리 펜 라이트에 의지해 스태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프로듀서 씨의 모습이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프로듀서 씨…….’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사과를 하고, 저는 세 사람의 뒤를 따라 살금살금, 무대가 보이는 위치까지 조심스레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무대의 뒤편에서 저는 보고야 말았습니다. 수많은 야광봉과 화려한 조명에 휩싸인 아름다운 마유 씨의 모습을요.

 

그 광경을 본 다음부터 눈을 감으면, 이따금씩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불이 꺼진 어두운 스테이지 위에는 제가 서 있습니다. 눈을 감은 채로 서 있는 저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눈을 뜨고 앞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제 시야를 뒤덮는 수많은 야광봉이 만들어내는 빛의 파도가 저를 덮쳐옵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제 가슴 속에 한 가지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그 감정을, 저는 두려움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

 

 

 

“사기사와! 스텝이 늦다!”

“네……!”

 

딱, 딱, 딱. 메트로놈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소리에 맞추어 스텝을 밟습니다.

 

‘하나, 둘, 반 쉬고, 다시 하나, 둘, 셋……?’

 

숨이 가빠지고, 산소를 요구하던 의식이 서서히 어딘가로 끌려갑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봐오던 불이 꺼진 어두운 스테이지 위로. 스테이지의 가운데에 서서, 화려한 조명이 켜지려는 바로 그 때, 강한 충격이 저를 두들겨 깨웁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저는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한 박자 늦게 찾아오는 엉덩이의 통증을 느끼며 저는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채로 두어 번 눈을 깜박였습니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고, 깜박거리는 시야에 마스터 트레이너 씨와 함께 레슨을 받는 린 씨 일행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기사와, 괜찮나?”

“네……괘, 괜찮아요…….”

 

하지만, 트레이너 씨는 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군. 사기사와, 너는 이만 쉬어라. 너희도 마지막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만 맞춰보고 마치도록 하지.”

“네!”

“앗싸!”

 

각자 자리를 잡고, 이번에는 메트로놈이 아닌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거울로 둘러싸인 연습실의 뒤편에 앉아서, 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역시, 나 같은 것에게는 무리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덜컥, 하고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믿고, 개회식이라는 일거리를 맡겨 주신 프로듀서 씨를 배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상담……해볼까…….’

 

 

 

 

석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 무렵이 되어, 저는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곧 라이브가 있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는 곧바로 다음 레슨이 있었지만, 저는 이것으로 오늘의 일정이 모두 끝나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흘러내린 땀을 씻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저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갔습니다. 어째선지 사무실 안에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평소에는 항상 먼저 반갑게 인사를 해 주시던 치히로 씨의 자리가 비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저는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별 다른 메모가 없는 것을 보아, 아마도 가벼운 볼일이라도 보러 가신 것 같습니다.

저는 사무실의 구석에 있는 프로듀서 씨의 자리로 향했습니다.

프로듀서 씨의 책상에 도착하자,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그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강렬한 파스 냄새가 제 코를 자극했습니다.

잘 보고 있으면 엎드려 있는 것도 상당히 힘든 것인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의 어깨가 움찔움찔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오늘은 꼭 말하자고 굳게 다짐했던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힘드실 텐데, 내가 괜히 짐을 지워드리는 건 아닐까…….’

 

아무리 자신이 힘들더라도, 제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이 사람은 저를 위해서 발벗고 나서 주겠죠. 그런 사람인 것을 알기에, 저는 이런 식으로 그에게 짐을 지우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하자, 라고 생각하며 몸을 돌리는 바로 그 때, 인기척에 깬 것인지, 저의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프로듀서 씨가 몸을 일으켰습니다. 제 예상대로, 그의 얼굴에는 피로라는 그림자가 옅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자신을 숨기기에 능한 프로듀서 씨였지만, 이렇게 잠에서 깬 직후이기에 자신도 모르게 밖으로 드러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깨를 이리저리 풀고, 뒷목을 주무르면서 프로듀서 씨는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어으……잘 잤다. 사기사와? 무슨 일이야?”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

 

그의 검은 눈동자가 저를 향합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의 눈빛은 앞머리 뒤로 숨어드는 저를 찾아내는 탐조등처럼 저를 주시합니다. 마침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뭐 할 말 있으면, 언제든지 말 해. 부담 갖지 말고.”

 

“알겠지?”라며 되묻는 그 사람에게, 저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 말고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꾸욱, 하고, 그 무게를 더해오는 가슴을 조용히 억누르면서.

 

 

 

***************

 

 

 

아이돌 부서의 아침은 빠르다.

물론 기본적으로 예능업계는 아침이라는 개념이 희박한 곳이기에 이러한 말이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침이 빠르다는 것은 사무실이 활성화되는 시간이 빠르다는 뜻이다.

 

작년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더위에 올해만큼은 시원하려나, 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려치듯, 6월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시원했던 것에 대한 이자까지 얹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햇빛 또한 이게 햇빛인가, 아니면 적외선 찜질기인가 의심이 갈 정도로 한순간에 그 열기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곧바로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하는 아침 더위에 시달리며, 평소보다 한 시간 가까이 일찍 일어난 치히로는 간단하게 화장을 마치고 곧바로 출근길에 올랐다. 초여름이 오기가 무섭게 마치 기다렸다는 듯 기온이 치솟았고, 아스팔트와 시멘트의 숲은 그에 편승해 마치 사우나에 넣은 뜨거운 돌멩이처럼 너도나도 공기의 온도를 올리고 있었다.

 

“어……?”

 

사무실의 앞에 도착해, 보안을 해제하려던 치히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보안이 풀려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어제 안 풀고 그냥 퇴근했나?’라고 생각하며 치히로는 문 앞에 서서 어젯밤 자신의 행동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가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을 때, 사무실의 문이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

 

“누, 누구……?!”

 

문 너머로 비치는 역광을 등지고 나타난 커다란 그림자에 화들짝 놀란 그녀였지만, 이내 눈이 빛에 익숙해지자 그 그림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센카와 씨? 왜 벌써 출근했어요?”

“……프로듀서 씨?”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따뜻한 김이 오르는 머그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올라선다. 약간은 싸늘하다 싶을 정도로 냉방이 충실한 사무실 안에서 프로듀서와 치히로는 제각각 컵의 손잡이를 쥐고, 안에 든 쓰고 검은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타임카드에는 퇴근만 찍혀 있는데. 언제 들어오셨어요?”

“그게, 어제 그대로 퇴근하려다가 생각해 보니까 여름 라이브의 기획서를 안 냈더라구요.”

“그래서, 퇴근도 안하고 계속 사무실에 계셨던 거에요?”

“네에, 뭐……그렇게 됐네요.”

“그거, 기한 이번 달 말일까지 아니었나요.”

“어, 그랬어요?”

 

능청스럽게 되묻는 프로듀서를 쏘아보며 그녀는 스케줄 보드를 가리켰다.

 

“네. 저기 보세요. 2분기 마지막 사업기획은 이번 월말이잖아요. 아직 1주일이나 남았는데.”

“어? 아아, 진짜 그랬네요.”

 

치히로는 시선을 피하며 멋쩍은 듯 커피를 마시는 눈 앞의 거한을 기가 찬 듯 바라보았다.

분명히 기획서는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이 사람의 성격상 분명히 최근 며칠간 밀린 일이라도 처리한 것이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치히로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무리, 안 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이게 뭐가 무린가요. 무리 축에도 못 드는데.”

 

그녀는 고개를 돌려 프로듀서의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2열 종대로 늘어선 드링크 병이 이미 10줄을 넘어서고 있었다.

 

“저걸 보고서도 그런 소리가 나오세요? 1주일 만에 벌써 저만큼 드신거에요?”

“뭐, 뭐……죽는 것도 아니고…….”

“저건 좀 피곤할 때 피로를 회복하라고 있는 거지, 지금의 프로듀서처럼 억지로 버티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막 마시다간 정말로 죽는다구요.”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다음부터는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넵.”

 

건성으로 대답이 돌아온다. 순간적으로 치히로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지만 억지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면서 딴청을 피우는 프로듀서가 그것을 알 리가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치히로는 머그잔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치히로의 자리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면 스케줄 보드가 보인다. 스케줄 보드의 상단에 적힌 숫자는 이미 6월의 끝자락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 안에 채워진 내용은 저번 달과 큰 차이가 없었다. 아니, 한 명이 데뷔 무대를 가진 만큼 더 늘어나 있었다.

6월이 되고, 프로듀서는 대회에 나가기 위해 일정을 조절하면서 체력을 기르기 시작했다. 와일드 카드 자격을 얻기 위해, 단합대회의 야구 부문에 투수로써 출장하려는 것이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신생 부서에 속하는 아이돌 부서에 업무지원을 해 줄 만큼 이 회사의 인심이 좋은 것은 아니었기에, 프로듀서의 일정이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치히로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어느 정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서류는 그녀가 대신 처리하기도 했고, 업무가 꼬여 아이들을 맞이하러 가지 못했을 때는 그녀가 대신 아이들을 픽업하기도 했다.

 

‘뭐, 나도 일하는 보람이 있으니까 오히려 그게 좋지만…….’

 

그런데도 갑자기 이렇게 여유가 없어지게 된 것은, 다름아닌 6월 중순으로 계획했던 마유의 데뷔 무대가 6월 초로 앞당겨진 것 때문이었다. 프로듀서의 수완이라던가, 마유의 실력이 생각보다 좋다던가,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해당 방송의 디렉터가 마유의 컨셉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보기 드문 ‘사랑스러움’을 강조하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던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프로듀서가 그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알고 있는 프로듀서는 자신의 계획에 맞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는 일종의 책략가형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로듀서는 그 제안을 곧바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질문에, 그는 ‘기회는 빠를수록, 많을수록 좋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마치 고무줄을 되감은 것처럼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일정이 단숨에 조여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7월부터 시작될 마유의 일정이 크게 당겨진 것에 더해, 어째서인지 프로듀서는 데뷔조차 하지 않은 후미카의 일거리도 몇 가지 정도 가져 오고 있었다. 그래봐야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데모 보컬 녹음 정도였지만.

이러한 변화로 인해 가장 크게 바뀐 것은 프로듀서의 생활 패턴이었다. 그 전까지는 그나마 정시 퇴근을 하던 사람이 이렇게 일정이 한번 비틀리고 난 다음에는 야근을 밥 먹듯이 반복했던 것이다. 이 정도라면 운동을 조금 적당히 해도 될 텐데, 프로듀서는 일이나 운동, 그 어떤 것에도 대충 하는 경우가 없었다.

대회 날이 다가올수록 피로도를 더해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가 어째서 이렇게 단합대회라는 것에, 와일드카드라는 것에 전념하는지 치히로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아…….”

 

자신의 자리에 앉은 프로듀서가 고개를 들어 뜬금없이 한숨을 내쉬는 치히로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녀는 열쇠로 잠가두었던 자신의 서랍에서 차트 하나를 꺼내었다. 사기사와 후미카의 이름이 적혀 있는 차트의 아래쪽에는 마스터 트레이너의 이름 또한 함께 적혀 있었다.

 

‘이걸 지금 줘야 할까…….’

 

그것은 후미카의 최근 컨디션에 대한 마스터 트레이너의 보고서였다. 결코 좋은 내용이 적혀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 안에 적힌 내용이 어떤 식으로든 그와 후미카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그에게 더 이상 짐을 지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 치히로는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래, 완전히 숨기는 것이 아니야. 조금만, 조금만 더 여유가 생기면, 그 때 이야기하자.’

“뭘 그렇게 보고 있어요?”

“햐앗?!”

 

그 생각에 정신이 팔려 프로듀서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치히로는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파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대체 이 사람은 언제 온 것일까.

 

“이거는……사기사와의 모니터링 자료네요?”

“프, 프, 프로듀서 씨?! 잠시만요!”

“아하, 올 때가 됐는데 안 온다 싶더라니 센카와 씨한테 전달했구나. 어디……”

 

자신에게 손을 뻗는 치히로의 손길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프로듀서는 파일에 적힌 내용을 서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페이지가 뒤로 넘어갈수록 엷은 미소를 띠고 있던 그의 표정이 서서히 경직되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딱딱한 무표정이 되었다.

 

“저기, 이건 말이죠. 그러니까…….”

“잘 봤습니다.”

 

담담하게 치히로에게 파일을 다시 건네고는 프로듀서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머리를 콩콩 쥐어박았다. 비록 스쳐 지나간 것이지만, 괴로운 듯 잔뜩 미간을 찌푸린 프로듀서의 얼굴이 그녀에게는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

 

 

 

제가 가슴속에 품고 있던 응어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무게를 더해갔습니다.

처음에는 잠깐씩 멍하게 앉아 있을 때만 느껴졌던 것이, 7월이 되고, 하루씩 대회날이 다가올수록 점점 더 빈번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네가 이 무대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하고 저를 추궁하듯이 말이에요.

그 때가 되어서야 저는 프로듀서 씨가 어째서 제게 공연중인 무대를 보지 못하게 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아마도 제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 없습니다.

 

 

 

 

눈을 떴습니다.

처음 보는 새하얀 하얀 천장이 보입니다.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라보면, 어느 새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움찔, 하고 움직여 본 손가락에서 위화감이 느껴졌습니다. 푹신하지만 결코 덥거나 답답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홑이불 밖으로 드러난 오른손으로 시선을 내려 위화감이 느껴지던 검지손가락을 바라보자, 그 원인으로 추정되는, 손 끝을 물고 있는 클립처럼 생긴 낯선 장치가 보였습니다. 그 장치에 더해 귓가에서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전자음과 코를 자극하는 약품 냄새가, 이 곳이 적어도 사무실이나 기숙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저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눈을 감기 전에, 저는 분명히 연습실에 있었을 텐데요.

 

“일어나셨어요?”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창가를 등지고, 제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어깨 언저리에서 찰랑이는 올리브 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칼과, 마치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반짝이는, 담청색과 녹색이라는 상이(相異)함을 품고 있는 두 눈동자. 하지만 그 눈가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방점 하나가, 그녀에게 신비로운 매력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카에데……씨?”

“네에, 타카가키 카에데랍니다. 저, 기억하시겠어요?”

 

저를 향해 비스듬히 몸을 기울이며 그녀는 검지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습니다.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 또한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분명히 웃는 얼굴일 텐데, 그 표정에서 느껴지는 마치 저를 꾸짖는 듯한 무언의 압력에 제 자신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집니다.

 

“죄송합……아얏!”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오른 팔에서 따끔한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고개를 돌려 오른팔의 팔꿈치 안쪽을 살펴보면, 수액이 연결된 작은 바늘이 꽂혀 있었습니다.

“그냥 누워 있어요.”라고 말하며 카에데 씨는 웃음기를 거두고는 다시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적막이 흐르는 틈을 타, 저는 방 안을 조금 둘러보았습니다.

1인용 병실인 듯, 제가 누워 있는 침대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가구도 보이지 않습니다. 머리맡에 있는 물병이 놓인 자그마한 테이블, 제 발이 향하는 방향의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벽걸이 TV와 그 아래에 설치된 냉장고, 그리고 그 옆에 설치된, 위아래로 길쭉한 벽장처럼 생긴 옷장. 그것이 이 방 안의 전부였습니다.

그런 저를 카에데 씨는 조용히 양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그녀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그 때, 병실의 문을 누군가가 세 번 두드렸습니다. 카에데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습니다.

 

“누구세요?”

 

저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카에데 씨는 아는 사람인 모양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저를 힐끔 바라보더니 조용히 병실의 문을 열었습니다. 문 너머로 나타난 사람은, 한 손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카에데 씨보다 머리 두 개가 더 큰, 뿔테 안경을 쓴 양복 차림의 남자는 머리를 부딪히는 것을 의식한 것인지 약간 구부정한 자세로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저의 프로듀서 씨였습니다.

 

“일어났구나. 몸은 좀 어때?”

“괜찮……습니다.”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냥 피로누적이래요. 1~2일쯤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하시던데요.”

 

카에데 씨가 다시 의자에 앉고,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 위에 올려둔 프로듀서 씨는 그 옆에 서서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 괜찮다니 다행이네. 우선은 푹 쉬어. 레슨은 그 뒤에 생각하고.”

”죄송해요…….”

 

깨닫고 보니 저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던 그는 훗, 하고 웃으면서 오른손을 뻗어 투박하고 커다란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신경 못 쓴 내 잘못이지.”

“부럽네요. 나도 한 번 쓰러지면 저렇게 쓰다듬어주려나.”

 

옆에서 제 모습을 바라보던 카에데 씨가 입술을 비죽였습니다. 그러자 프로듀서 씨는 제 머리에서 손을 들어 곧장 그녀의 머리로 향했습니다.

 

“착하다~착하다. 됐죠?”

“……뭔가, 기대했던 거랑은 다르네요.”

“뭘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이런.”

“일인가요?”

“네, 트라이어드랑 사쿠마 쪽으로 조금……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미간을 약간 찌푸린 그는 나중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서둘러 병실을 나갔습니다.

 

“또 우리 둘만 남았네요.”

“저기……카에데 씨, 저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요……?”

“댄스 레슨을 받던 도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들었어요. 옆에서 트레이닝을 하던 프로듀서 씨가 급히 업어서 병원으로 데려왔고요.”

“그랬군요…….”

 

카에데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모르게 어깨가 축 내려앉았습니다. 폐를 끼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해놓고, 결과적으로는 폐를 끼쳐버린 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적이 흐릅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우왕좌왕하는 머릿속에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잠시, 스르륵, 하고 다시 병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이번 손님은 풍성한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정리한 단정한 인상의 여성, 카와시마 미즈키 씨였습니다.

 

“우왓, 진짜 1인실……! 이게 대기업의 힘이구나…….”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병실 구석구석을 구경하던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저와 카에데 씨의 시선을 느끼고는 멋쩍은 듯 웃으면서 카에데 씨의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미안해, 이런 곳에 와 보는 건 처음이라서. 후미카, 몸은 좀 어때?”

“지금은, 많이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미즈키 씨…….”

“얘는,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P군이지. 너 쓰러졌다는 소리 듣고 회의까지 연기해가면서 여기로 데려온 건데.”

“그런……가요…….”

 

미즈키 씨의 말을 듣고 저는 또다시 풀이 죽었습니다. 또 폐를 끼쳐버렸네요.

 

“저기, 후미카?”

 

저를 부르는 카에데 씨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는 조금 전에 비하면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는 카에데 씨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네……?”

“프로듀서가 그러더라. ‘요즘 사기사와가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저한테는 통 이야기를 안 해주네요’라고.”

“…….”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었으면 해.”

 

카에데 씨와 시선이 부딪힙니다. 색이 다른 두 눈동자가 저를 뚫어지듯 바라보았습니다.

 

“프로듀서 씨는 기본적으로 눈치가 빠른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태여 간섭을 하지는 않아. 네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한 걸음 뒤에서 전전긍긍하며 속앓이를 하는 편이야.”

 

“내 이야기, 무슨 말인지 알겠니?”라고 되물으며 저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옆에서, 그녀의 말을 거들듯이 미즈키 씨가 첨언합니다.

 

“맞아, P군은 도와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도와주는 사람이니까, 필요하다 싶을 땐 얼마든지 손을 내밀어 줘. 그런 사람 흔치 않단다?”

“네…….”

 

미즈키 씨의 말에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바로 그 때, 제 머릿속에 며칠 전 카렌 씨가 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기 후미카 씨,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처럼 우리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사람이 있을 땐 그 든든함에 몸을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그 사람, 어느 정도는 자신한테 어리광 부리는 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후훗.]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 병실의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던 카에데 씨와 미즈키 씨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휴, 오자마자 일어나네…….”

“미안해요. 좀 더 있고 싶었는데, 우리도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병실을 나가기 직전, 카에데 씨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참, 일 마치는 대로 프로듀서 씨가 온다고 했으니까, 너무 외로워하진 말아요?”

“네? 네…….”

 

카에데 씨와 미즈키 씨가 나가고 나서, 해일처럼 덮쳐오는 잠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습니다.

 

 

 

얼마나 잠들었던 것일까요. 병실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제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이미 캄캄해진 바깥의 풍경이었습니다.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사각거리는 소리에, 저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습니다.

 

“일어났구나.”

“아, 프로듀서 씨……언제, 오셨나요……?”

“방금 전에 왔어. 슬슬 일어날 때가 됐다 싶어서. 뭐, 수액을 맞고 있으니까 식욕도 별로 없겠지만……”

 

이미 오늘의 일은 마친 모양입니다. 평소보다 넥타이를 느슨하게 맨 그는 침대의 머리맡에 앉아서 작은 과도(果刀)로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사과를 깎고 있었습니다. 귀를 자극하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달콤한 사과의 향기 덕분에 허기가 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저의 상태를 눈치챈 것인지, 프로듀서 씨는 “먹을래?”라며 제게 플라스틱 포크와 사과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남자가 깎은 것이라곤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사과는 매끄럽게 마감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따금씩 숙부님께서 깎아주시던 과일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습니다.

 

“왜? 아, 파스 냄새 나? 이런, 다 떼고 왔는데. 옷에 배어 있었나.”

“아, 아니요, 그저, 조금 신기해서요…….”

 

‘신기하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잠시 후, 제 말의 뜻을 이해한 듯 작게 웃었습니다.

 

“하하……나랑은 이미지가 좀 안 맞긴 하지? 이거 다음에 식사라도 한번 대접해야겠는데.”

“그, 그런 뜻이 아니라……!”

“괜찮아, 그런 소리 자주 들었으니까.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요리 정도는 꽤 하는 편이야.”

 

“예전엔 주방 아르바이트도 했으니까”라고 덧붙이며 그 사람은 저에게서 접시를 받아 들어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습니다. 그 때, 누군가가 병실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가 올 사람이 있던가? 센카와 씨는 못 오신댔고…….”

 

프로듀서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자, 흰 가운을 걸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들어왔습니다.

 

“사기사와 씨, 잠시 검사 좀 할게요.”

 

그렇게 말하며 간호사는 제 몸에 붙어 있는 기계의 수치를 확인하고, 저의 체온이나 혈압 등을 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의사 선생님이 프로듀서 씨에게 말을 건넵니다.

 

“사기사와 양의 관계자 되시나요?”

“네, 담당 프로듀서입니다.”

“이미 들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우선은 단순한 피로누적이라고 생각해요. 내일 오전에 검사를 한번 해 보고, 괜찮다면 오후에 퇴원하시면 됩니다. 계속 자느라 식사도 못 했을 텐데, 배 고프면 적당히 챙겨 드세요. 너무 위장을 자극하는 것만 아니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는 병실을 나갔습니다. 두 사람을 배웅한 뒤, 프로듀서 씨는 다시 돌아와 먹고 남은 과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별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네. 부모님이랑 숙부님께는 내가 연락드릴 테니까, 내일 퇴원하거든 다시 말씀 드려.”

“네.”

 

그 뒤, 면회 시간이 끝날 때까지 저는 프로듀서 씨와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기회를 앞에 두고서도 모처럼 그 사람이 저를 위해 시간을 내 주었음에도, 저는 가슴 속을 아직도 짓누르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아직 말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

 

 

 

“그럼, 푹 쉬고 내일 다시 만나자.”

“네, 프로듀서 씨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그래. 잘 자.”

 

병실의 문을 닫고 나와서, 프로듀서는 남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미카가 쓰러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큰 일이라도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단순한 피로누적이었다니 정말로 천만다행이었다.

 

‘여전히 나한테는 말 할 생각이 없는 건가…….’

 

병원을 나와서, 프로듀서는 후미카의 병실이 있는 방향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트레이너의 보고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렸다. 반응이 느려졌다던가, 표정이 부자연스러워졌다는 것과 같은 이런저런 내용들이 적혀 있었지만,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들을 모두 종합하면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불안하겠지. 두렵기도 할 거고.”

 

어쩐지 무거워 보이던 후미카의 웃음을 떠올리면서, 프로듀서는 한숨이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지금의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치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 하나 말리는 사람 없이, 밑도 끝도 없이 폭주하던 그때 그 시절의 자신을.

 

‘이제 두 번 다시, 내 눈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게 놔두지는 않을 거야.’

 

이 일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 가졌던 마음가짐을 재차 다짐하며 프로듀서는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병원을 등지고 회사로 돌아가면서, 그는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되묻는다.

아직 나는 그들에게 있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일까……하고.

 

 

 

**********

 

 

 

다음 날, 프로듀서 씨를 대신하여 찾아온 치히로 씨와 함께 퇴원해도 좋다는 진단을 받은 저는 곧장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오후부터 곧장 레슨을 참가하려고 했지만, 트레이너 씨에게서 아직 컨디션이 완전하지 않으니 짐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짐이 된다. 그 말을 듣자 정신이 퍼뜩 들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짐으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더 이상 이대로 서 있을 수 만은 없었습니다.

 

 

 

사무실 앞의 복도에 서서 저는 호흡을 가다듬었습니다. 몇 번이고 결심을 했지만, 정작 그 때가 다가오니 그냥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무럭무럭 샘솟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는 생각보다도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치히로 씨에게 듣기로, 오늘 프로듀서 씨는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퇴근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이지만, 이 시간이라면 사무실에는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저는 지금 행동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좋아……!”

 

그렇게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을지. 마침내 마음을 다잡으며 저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습니다.

 

“……?”

 

찰칵, 찰칵. 하고, 손잡이가 헛도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몇 번을 다시 돌려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이 잠겨 있었던 것입니다.

 

“어? 사기사와? 네가 왜 여기 있어? 기숙사에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앞 일을 고민하던 저의 옆에서, 프로듀서 씨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운동을 하고 오시는 길인지 트레이닝 복 차림에 젖은 수건을 목에 두르고 있는 프로듀서 씨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저기, 조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저와 프로듀서 씨는 몇 주 전, 처음으로 ‘데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와의 차이라고 한다면, 앉아 있는 자리가 서로 반대였다는 부분일까요.

프로듀서 씨는 급탕실에서 얼음이 둥둥 떠 있는 시원한 녹차를 가지고 나와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차가운 찻잔의 감촉을 느끼면서, 저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며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는 저를 바라보던 프로듀서 씨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몸은 좀 괜찮아?”

“네, 덕분에……저기, 감사합니다.”

“뭘, 감사할 것 까지야. 숙부님이랑 부모님께 연락은 드렸고?”

“네, 퇴원하고 나서 곧바로…….”

“그래, 잘했다.”

 

정적이 흐릅니다. 저는 두 손으로 쥐고 있는, 찻잔 위에 떠 있는 얼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것을 알지만, 정작 때가 닥쳐오니 또다시 망설여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아”하고, 프로듀서 씨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들려왔습니다. 혹시나 저 때문에 화가 나기라도 한 것인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무서워?”

 

프로듀서 씨가 꺼낸 말은,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였습니다. 저는 고개를 들어 프로듀서 씨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같이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지만, 저를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는 걱정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저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다짐했던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겼습니다.

이제 저는 더 이상 이대로 서 있지만은 않을 거에요.

 

“네…….”

“흐음,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저도 모르게, 마음 속에 담아두고 있던 것을 꺼내놓았습니다.

 

“프로듀서 씨는…….”

“응?”

“무섭지, 않으신가요? 그렇게 남들 앞에 나서서……하는 것이 말이에요.”

“으음, 나는 프로 선수 출신이니까, 예전에 많이 해 본 경험이라는 게 있거든.”

 

그러고 보니, 숙부님께 들은 기억이 납니다. 프로듀서 씨가 실은 야구선수 출신이었다는 이야기를 말이에요.

잠시 말을 멈춘 그는 후훗, 하고 작게 웃음을 흘렸습니다.

 

“사실은 무서워, 나도.”

“네……?”

“프로시절의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공을 던졌어. 그 때는 어깨가 가벼웠다고나 할까? 못하면 나만 욕 먹으면 되니까. 단순히 나만 잘 하면 땡이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라고 덧붙이며 그는 곧게 펴고 있던 자세를 약간 구부정하게 웅크렸습니다. 저와 그 사람의 눈높이가 비슷해졌습니다.

 

“지금 내가 나가야 하는 자리는 내가 만들어 낸 자리야. 내가 시작한 일이지. 그러니, 어떻게든 최선의 결과를 보여 주어야 한다는 책임이 있어. ‘와일드 카드’에 이런 가치가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책임……인가요.”

 

문득, 공원을 지나가면서 우연히 본 프로듀서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한밤 중의 공원에서, 수 십 개의 야구공을 쌓아 두고, 그것을 던져 자그마한 고리의 안으로 통과시키는 것을 반복하던 모습이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기합소리를 삼켜 가며 공 하나를 던질 때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칠 정도로 땀방울이 흘러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기회의 소중함을 알고 있으니까.”

 

프로듀서 씨의 대답에,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기회……인가요?”

“그래, 기회의 소중함.”

 

무언가를 말하려던 프로듀서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사기사와, 너에게 이야기를 해 줄게. 어떤 사람의 이야기야.”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프로듀서 씨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사기사와는 지금 대학생이지?”

“네.”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프로팀에 지명 받아서 이듬해부터 바로 프로 팀에서 뛰게 된 야구선수야.”

“곧바로……말인가요?”

“그래. 곧바로. 본인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지. 지명을 받기 전에는 그냥 막연하기만 했다. 프로 무대에서 뛴다는 건 그냥 꿈이었으니까. 목표도 없이 매일마다 훈련만 하고, 연습게임에 나가고, 다시 훈련하고, 다시 연습게임에 나가고……이 생활을 의미 없이 계속 반복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저는 무언가, 굉장히 낯익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덜컥,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 날이 다가온 거야. 프로 데뷔전이지. 컨디션은 최고였어. 실력도 자신 있었지. 그런데 이유도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눈앞이 캄캄해지곤 했어.”

 

곰곰히 생각하던 저는, 그 느낌의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프로듀서 씨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 사람은, 지금의 저와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야기 속의 그 선수도 저와 같은 일을 겪었을 것일까요? 저는 대꾸하는 것도 잊고, 프로듀서 씨의 이야기를 듣는데 집중했습니다.

 

”하루하루 그 날이 다가올수록 증상은 더 심해졌지. 나중엔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왜 그런지 이유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니까 더 불안했어. 그렇게, 그 선수는 프로 데뷔전을 치뤘어. 엉망진창인 컨디션으로.”

 

잠시 말을 멈추고, 프로듀서 씨는 손에 든 녹차를 또다시 한 모금 마셨습니다. 저는 뒷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하하, 제 컨디션이 아닌 상태에서 프로 무대인데, 제대로 될 턱이 있겠어?”

 

“깨졌지. 호되게 박살이 났어.”라고 말하는 프로듀서 씨의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점차 비웃음에 가까운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단 한번뿐이던 기회를 잃어버렸다. 불안함과 두려움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그 선수가 다시 그 기회를 얻는 데는 1년 반이라는 세월이 더 필요했지.”

“불안함과 두려움…….”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

 

프로듀서 씨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시선을 내려 찻잔을 바라보았습니다.

 

“만약, 이 선수가 압박감에 짓눌려 있을 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야.”

“속마음을……말인가요.”

“그래.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선수에게는 자신을 지지해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어. 친구도, 가족도, 그리고 동료조차도.”

 

시선을 내리깔고 있는 그 사람의 미소가 점점 더 일그러집니다. 이야기를 멈춘 프로듀서 씨의 표정은 마치 쓰디 쓴 약을 삼키고 있는 것 처럼 보였습니다. 비록 눈치가 빠르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는 저이지만, 이런 광경을 눈 앞에 두고서도 ”그렇군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군요”라고 태연하게 납득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기, 프로듀서 씨……?”

“응?”

“정말로, 그건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가요?”

“…….”

 

늘 명쾌하게 대답을 해 주던 프로듀서 씨가, 처음으로 대답을 피했습니다.

무언의 부정일까요, 아니면 무언의 긍정일까요.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하기에는 힘들다고 판단한 것인지, 프로듀서 씨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습니다.

 

“……사기사와, 나는 너희들보다 프로의 무대를 먼저 밟아봤다. 그 뒷면도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어. 프로에게 있어서 ‘자신이 나설 수 있는 기회’는 그 무엇보다도 소중해. 너희들에게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줄 수 있으면,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전에 마스터 트레이너 씨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와일드 카드……이름은 번지르르하지만, 이건 따지고 보면 너희 아이돌 부서 아이들에게 기회를 더 주기 위해 억지로 끼워넣은 편법에 가까워. 오디션 어쩌구 하는 부분은 그냥 미사여구에 불과해. 프로듀서가 노리고 있는 부분은 와일드 카드라는 떡밥을 던져 단합대회의 주목도를 높이고, 그 자리에서 생기는 작은 행사에 너희들을 집어넣는 것이다. 다른 회사라면 모르지만, 우리 회사는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까.]

[그 작은 행사들이 너희들에게 떨어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야. 프로듀서가 이 회사의 대표로 나가면서 생긴 특혜지.]

[다들 착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일거리를 주는 건 팬이 아니다. 디렉터와 업계의 높으신 분들이지. 그 점에서 프로듀서의 발상은 허를 찌른 역발상이야. 솔직히 말해서, 자기 경력을 그렇게 써 먹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이제 와서 다시 떠올려보니 이해가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이 나설 수 있는 기회’. 그러니까, 우리들이 한 번이라도 더 나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프로듀서 씨 스스로가 문을 여는 열쇠가 된 것이었습니다.

 

“……두려운 것은 이해한다. 불안한 것도 이해해. 하지만, 너에겐 지금까지 쌓아올린 것들이 있어. 그러니 조금만 더 힘을 내 줘.”

 

프로듀서 씨는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번이 지나가면, 다음은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기회다. 혹여 혼자서 나아가는 것이 두렵다면, 나를 발판으로 삼고 나아가도 좋아. 만약 잘못되어서 세상 모두가 네게 등을 돌린다 하더라도, 적어도 나는 너의 처음이자 마지막 팬으로써 끝까지 남을 테니.”

 

그 말을 듣고 저는 가슴에 무언가가 뭉클, 하고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제 혼자만의 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지금까지 제가 했던 걱정들이 하나같이 괜한 걱정이었다는 사실 때문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 없이 그저 앞으로 내밀기만 했던 나의 손을 붙잡아주는 사람 때문일까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너희들보다 프로의 삶을 먼저 살아 봤어. 프로에게 있어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나는 사무칠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러니 부탁한다. 조금만 더, 나와 함께 나아가자. 너를 위해 준비한 이 기회를 헛되이 버리지 않도록 도와 줘.”

“네……!”

 

간곡하게도 들리는 프로듀서 씨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평소대로의 저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강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제서야 프로듀서 씨는 미소다운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맙다. 힘든 결정을 내려 주어서.”

 

라고 말이에요.

 

 

 

***********

 

 

 

그렇게 저는 가슴을 짓누르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불안함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지, 이 자리가 정말로 나에게 어울리는 자리인지. 그것이 불안했기에 저는 무의식 중에 그것을 멀리하고, 두려워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그 누구도 저에게 "힘내라, 해낼 수 있어"따위의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어두운 스테이지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스테이지는 지금까지 제가 봐 오던 스테이지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고개를 돌려, 스테이지의 뒷편을 돌아보면, 저를 응원하는 동료들과 저를 이끌어주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그 날의 상담 이후, 프로듀서 씨와 저는 둘 만의 작은 비밀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서로의 왼손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손가락의 손도장을 찍는 듯한 작은 제스쳐입니다.

 

[혼자가 안 되면 둘이, 둘이 안 되면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만약 세상 모두가 네게 등을 돌리더라도, 나는 언제나 너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팬이 되어 줄게.

오늘부터 이게 우리 둘 만의 사인이다. 알겠지?]

 

 

 

***********

 

 

 

커다란 경기장. 다이아몬드 모양의 필드 가운데 작은 간이 스테이지가 세워졌습니다. 저 장소에서, 이제부터 저는 간단한 식전행사를 진행할 것입니다. 리허설은 몇 번인가 했지만 정작 때가 다가오자 가슴이 정신없이 뛰고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유니폼 차림으로 저의 곁에 서 있는 프로듀서 씨가 아니었다면, 몇 번은 주저앉았을 것입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로듀서 씨는 저를 보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음, 좋아. 아름다워.”

 

저는 내심 물음표를 띄웠습니다. 평소의 차림대로 셔츠와 스커트 차림에 약간 화려한 색상의 숄을 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쁜 옷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늘어뜨린 앞머리를 정돈하고 가벼운 메이크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라는 여자는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달라지는 것일까요.

 

[경기 시작에 앞서, 간단한 개회식이 있겠습니다. 올해의 개회식은 CG프로덕션의 사기사와 후미카 양이 진행하겠습니다.]

“사기사와, 준비 됐어?”

 

경기장 한 가운데의 대형 전광판에 스테이지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돔 구장의 천장에 설치된 스포트라이트가 작은 스테이지를 비춥니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러자, 발이 딱 붙어버렸습니다. 움직이고 싶지만, 도무지 움직이질 않습니다. 저는 거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프로듀서 씨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저기, 프로듀서 씨…….”

“약속, 기억하고 있지?”

 

프로듀서 씨는 빙그레 웃으면서, 새끼손가락을 뻗은 왼 주먹을 내밀었습니다. 저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어 부들부들 떨리는 왼손을 들어 그의 손에 톡, 하고 부딪혔습니다.

 

“아…….”

 

그러자, 정말로 신기하게도, 떨림이 멎었습니다. 발이 가벼워졌습니다. 이제는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너를 믿어. 네가 쌓아 온 네 자신을 믿어! 자, 가자!”

“네……!”

 

저의 등을 가볍게 밀어주는 든든한 손길을 느끼면서, 저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스테이지로 힘차게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 날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작은 약속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시 고독한 어둠에 갇혀 꼼짝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제가 처음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이 있어주었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저의 First Step.

당신과 함께 나아간, 사기사와 후미카의 두 번째 챕터입니다.

 

 

 

------------<끝>

 

 

죄송합니다. 클로저스인지 뭔지 거기에 빠져서 이렇게 오래 걸렸습니다......

 

후미카의 이야기인 "익숙한, 하지만 평소보다 푸른 하늘" 의 리메이크입니다.

리메이크 전의 이야기도 분명히 제가 적었던 글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제가 그 글을 읽다 보면 내용을 전개하면서 불만족스러웠던 부분들이 계속해서 보이더라구요.

그 부분을 보완하면서, 전체적인 큰 틀은 유지하고자 노력을 좀 했습니다.

그 결과 분량이 2배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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