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퍼스널리티P 시리즈]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上)

댓글: 4 / 조회: 1255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08-01, 2016 03:00에 작성됨.

 <밤 바다의 이정표>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 데미안 -

 

***********

 

 

 

여름이 시작되려는가, 5월밖에 되지 않았건만 창가부터 시작해서 서서히 사무실을 잠식해오는 햇빛이 점차 뜨거워지고 있었다. 차양막을 내려야 할까 고민하면서 프로듀서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멍하게 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1년에 몇 번 나오지 않는 참으로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에 치히로는 타이핑하던 손을 멈추고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조용히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따금씩 눈꺼풀을 깜박거리기만 할 뿐, 프로듀서는 미동도 하지 않고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수 분간, 조용한 사무실 내부를 컴퓨터가 내는 작은 소음과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그 정적을 만끽하고 있을 때, 프로듀서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에서 작은 알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후 3시. 매 주 금요일 오후에 있는, 부서장 결산회의를 알리는 알람이었다.

아이돌 부서의 부서장이자 프로듀서를 겸하고 있는 P는 평소 이 시간대에는 영업이나 출장을 나가 있기 때문에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치히로가 부서장 대리로 회의에 참가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은 프로듀서가 자리에 있으므로 그녀가 갈 필요는 전혀 없다.

짧은 휴식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 아니면 드디어 할 일이 생겼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인지 의미 모를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업무회의에 사용하는 노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산회의 다녀오겠습니다. 아이들 오면 적당히 잡아두세요. 아마 오늘 회의에서 전달사항이 몇 가지 나올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사무실의 문 앞에 서서 크게 기지개를 편 다음 프로듀서는 문을 열고 성큼성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희미해져 갈 무렵, 치히로는 조금 전 사무실을 나간 사람과 마찬가지로 한숨을 크게 내쉬며 깍지 낀 양 손을 위로 크게 뻗었다.

 

“그럼 나도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지.”

 

크게 기지개를 펴고, 치히로는 잠시 뒤로 밀어두었던 키보드를 앞으로 당겨와 타이핑을 시작했다.

 

 

 

 

이제 1년 5개월째가 되어 가는 CG프로덕션의 아이돌 부서에는 지금까지 총 일곱 명의 아이돌이 소속되어 있다. 모델 부서에서 이적한 타카가키 카에데, 타 지방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 출신인 카와시마 미즈키, 그리고 3인 유닛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로 활동 중인 시부야 린, 카미야 나오, 호죠 카렌. 이상 5인이 정식으로 데뷔를 하였고, 연습생 신분으로는 사쿠마 마유와 사기사와 후미카, 이상 2명이 매일마다 구슬땀을 흘리며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돌아온 것은 두 시간 정도가 흐른 다섯 시 경이였다. 그 사이 사무실에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가 다음 주에 있을 미니 라이브의 리허설을 마치고 올라와 휴게실에서 프로듀서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레슨을 마치고 돌아온 마유와 후미카는 사무실의 소파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프로듀서는 곧바로 마유와 후미카, 그리고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세 명을 모두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차를 준비하려던 치히로에게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차보다는 잠시 전화를 봐 달라는 것을 부탁하며, 그는 가지고 온 자료를 몇 부 복사하여 곧장 회의실로 향했다.

 

 

“자, 우선 이거부터 받고, 긴 이야기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회의실에 모인 다섯 사람에게 프로듀서는 가지고 온 자료를 각각 나눠 주었다. 그들이 자료를 읽는 사이, 프로듀서는 회의실 구석에 세워놓은 화이트 보드를 단상 위로 가지고 올라왔다.

그새 서류를 다 읽은 린이 프로듀서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도내 예능계 단합 대회 실시 계획’? 이게 뭐야?”

“말 그대로 도내에 있는 모든 예능계 회사가 참가하는 단합 대회야.”

“흐응, 운동회 같은 건가?”

“그렇지. 중요한 건 그 쪽이 아니라 다른 쪽이지만. 다들 두 번째 페이지 펼쳐 봐.”

 

프로듀서는 화이트 보드의 가장 위쪽에 <와일드 카드 제도>라는 글자를 적었다.

 

“단합대회에서 승리한 팀은, 소속된 회사의 신인들에게 ‘와일드 카드’라는 특혜를 줄 수 있다. 이건 데뷔 무대에 한정에서, 오디션 없이 해당 무대에 곧바로 신인을 투입할 수 있는 특권이야. 다만, 무조건 되는 건 아니고, 몇 가지 조건이랑 패널티가 있어.”

“패널티?”

 

프로듀서는 자신의 마지막 말을 따라하는 나오를 바라보았다.

 

“그래, 패널티. 와일드카드 제도를 통해 데뷔무대를 가졌을 때,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 회사는 다음 해에 와일드 카드를 얻는다 하더라도, 차후 2년간은 그걸 사용할 수 없게 돼. 아이돌 파트의 경우에는 그 조건이 데뷔 후 나온 싱글CD의 판매량에 걸려 있고.”

“판매량이면, 몇 장 정도인데?”

 

불안한 듯 되묻는 나오를 바라보며 프로듀서는 한 손을 활짝 펼쳐 보였다.

 

“에……오천 장?”

“아니, 오만 장.”

“뭐?!”

 

후미카와 마유를 제외한 세 명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초동 판매량 5만 장. 말이 좋아서 5만 장이지, 아이돌이 범람하는 요즘 시대에는 3만 장만 팔려도 성공한 신인이라는 평이 나오는 세상이었다. 초동 판매량의 의미를 모르는 후미카와 마유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러니까 그만큼 공들인 신인을 쓰란 소리야. 오디션 없이 스트레이트로 무대에 올라간다고 해서 아무나 내밀지 말라는 뜻이지. 아니, 오히려 와일드카드를 통해 올라가는 신인은 그 회사의 간판 신인이라고 봐도 좋다.”

 

프로듀서는 잠시 말을 멈추고 화이트보드를 뒤집어 뒷면이 드러나도록 했다. 그가 다시 몸을 돌리자, 앉아 있는 다섯 명 중 린이 손을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부야, 질문이야?”

“응. 혹시 그거, 유닛은 안 된다거나, 그래?”

“그래. 대상이 되는 건 솔로뿐이야. 2인 이상은 못 써.”

“아하, 그래서 우리는 작년에 오디션 보고 데뷔했구나.”

“그렇지. 뭐,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데뷔곡, ‘Trancing Pulse’의 초동 판매량은 4만 3천장. 마케팅에 조금 힘을 뺐다는 점을 감안하면 5만 장 정도는 충분히 가시권 안에 있었다.

프로듀서는 뒤집은 화이트보드를 끌고 와서 다시 제자리로 가져다 놓았다. 화이트 보드의 뒷면에는 커다란 자석 위에 그려진 달력이 붙어 있었다. 5, 6, 7월의 달력을 제외한 나머지 달력을 모두 떼어내고, 프로듀서는 5월의 마지막 주부터 7월의 마지막 주까지를 강조 표시했다.

 

“아무튼, 그래서 대회의 존재감이 꽤 커지게 됐어. 작년에 참가하지 않았던 회사들도 올해부터 참가한다고 난리니까……5월 말부터 나는 대회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마 2달간 너희들의 일정이 지금에 비하면 조금 느슨해질 수도 있다. 사실은 이 부분을 미리 말해두려고 부른 거야.”

 

그는 정말로 미안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원래대로라면 타 부서에서 업무지원이 와야 하는데, 뭐, 아직은 우리 부서가 그렇게 발언권이 큰 게 아니니까…...평소보다 일이 좀 줄어들더라도 이해해주기 바라.”

 

그의 이야기를 듣는 다섯 사람은 하나같이 ‘느슨해도 좋으니까 좀 쉬어!’라고 생각하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야기는 여기까지. 질문 있는 사람?”

“저요!”

“그래, 카미야. 말해 봐.”

“판매량 얘기 나와서 말인데, 카에데 씨는 작년 와일드 카드였잖아?”

“그렇지.”

“그런데 올해도 와일드 카드를 노린다는 건, 많이 팔렸다는 뜻이잖아?”

“맞아.”

“그럼……’코이카제’는 몇 장이나 팔렸어?”

 

프로듀서는 보드마카의 뚜껑을 닫고 빙그레 웃으면서 나오를 바라보았다.

 

“12만 7천.”

 

 

 

 

회의실에서 곧바로 아이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 프로듀서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자, 자신의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던 치히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맞이했다.

 

“이야기는 끝났어요?”

“네.”

”빨리 끝났네요.”

“그냥 단합대회 관련해서 짧은 공지였으니까요.”

 

프로듀서는 곧장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도 퇴근합시다. 오늘은 모처럼 정시퇴근이네요.”

“카에데 씨랑 미즈키 씨에게는 이야기 안 해도 되요?”

“어차피 저녁에 볼 사람들이잖아요.”

“……네?”

 

치히로의 반응이 이상했던 것인가, 퇴근 준비를 하던 프로듀서는 고개를 들어 치히로를 바라보았다.

 

“왜요?”

“아니, 방금 퇴근한다면서요.”

“네. 퇴근하고 얼굴 보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요.”

 

태연하게 말하는 프로듀서를 보며 치히로는 마음 속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설마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그녀는 곧바로 사무실의 벽에 걸린 스케줄 보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기억대로, 스케줄 보드에는 타카가키 카에데는 밤 9시의 심야 방송, 카와시마 미즈키는 그보다 한 시간 늦은 밤 10시 방송이라는 일정이 적혀 있었다.

 

“프로듀서 씨, 보통 그런 걸 퇴근이라고 하지는 않죠……?”

“……어?”

“아니, 그게 그렇게 진지하게 놀랄 일인가요.”

 

치히로의 표정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센카와 씨는 연락 못 받았어요?”

“무슨 연락이요?”

“카와시마 씨랑 촬영 끝나고 나면 한잔 하러 가자고 한 거요.”

“네? 아……아아!!”

 

그러고 보면, 분명히 월요일쯤엔가 약속을 했었다. 금요일 저녁에 일정 끝나면 한 잔 하러 가자고. 그 사실을 떠올린 치히로는 낭패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대조적으로 그녀의 표정을 읽은 프로듀서의 얼굴에는 히죽거리는 미소가 떠오른다.

 

“하하, 감사히 잘 먹을게요.”

“우우……좀 봐 주세요오…….”

 

 

 

***********

 

 

 

늦은 밤, 회사 근처의 주점에는 CG프로덕션 아이돌 부서 소속의 연장자 4명이 모여 있었다.

 

“건배!”

“”건배!””

 

자칭 이팔청춘. 올해로 28세이자 그룹의 차연장자인 카와시마 미즈키가 기세 좋게 맥주잔을 쳐들자, 그 기세에 맞추어 나머지 세 사람도 각자의 잔을 들어 그녀의 잔에 갖다 대었다.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저마다의 입으로 돌아간 잔은 꿀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에 든 내용물을 비워내기 시작했다.

 

“크아~! 역시 일 끝나고 먹는 맥주는 최고야!”

“그러세요.”

“므으……일본주가 아니라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요.”

“저는 일본주가 아니라는 게 정말로 다행이에요.”

 

벌금폭탄을 면한 덕분에 희희낙락하는 치히로와는 대조적으로, 입가에 묻은 맥주거품을 혀로 닦아내는 카에데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머금은 채 카에데에게 냅킨을 내밀었다.

 

“좀 봐 주세요. 사장님도 사람인데.”

“훌쩍, 데뷔하고 나서는 몇 번 가지도 못했단 말이에요.”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 놓고 뭘.”

“일주일에 한 번은 갔어야죠!”

“네, 네. 아무튼 거품이나 제대로 닦으세요.”

 

그들이 평소에 자주 가던 골목길의 이자카야 대신 처음 오는 주점을 선택한 것은 사장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가게가 평소보다 빨리 영업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프로듀서의 맞은 편 자리에서, 카에데와 마찬가지로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던 미즈키는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맥주잔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나머지 세 사람과 같은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거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투명한 액체였다.

 

“P군은 술 안 마셔?”

“네, 저는 물입니다.”

“에엥? 왜? 저번엔 잘 마셨잖아.”

 

미즈키의 질문에 프로듀서는 대답 대신 가지고 온 자동차의 열쇠를 흔들어 보였다.

 

“아차, 그랬었지…….”

“프로듀서 씨, 이런 부분에선 엄격하시네요.”

“저라도 맨 정신으로 있어야죠. 그리고 옆구리 그만 찌르세요.”

 

그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카에데의 손을 이리저리 쳐내면서 프로듀서는 땅콩 안주를 한 줌 집어 입으로 반쯤 밀어 넣다시피 집어 넣었다.

 

 

오늘 촬영에 대한 간단한 사후강평을 겸한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평소라면 정신 없이 시종일관 깔깔대며 부어라 마셔라를 외칠 사람들이었지만, 일이 끝나고 난 직후라서 그런지 휴일에 비하면 분위기가 상당히 내려간 모습이었다.

‘슬슬 마무리하자’라고 생각하며 프로듀서는 몇 잔째인지 모를 생수를 들이켰다.

 

“그러고 보면, 이제 곧 단합대회 시즌이네? P군은 또 나가?”

“물론이죠. 다음 주에 트레이너들이랑 일정도 조금 조율하려고요. 작년에 해보니까 혼자 하는게 영 힘들어서 말입니다.”

“에에, 벌써 그럴 땐가요?”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카에데가 냉큼 대화에 끼어들었다. 슬슬 발음이 흔들린다 싶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의 얼굴은 주점의 백열 전구의 불빛으로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누구에요? 후미카? 마유?”

 

그녀의 질문은 목적어를 생략한 것이었지만 프로듀서는 이미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묻고 있는 것은 개회식을 담당할 사람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일단은 사기사와로 생각 중입니다.”

“후미카가? 괜찮겠어? 그 아이, 우리랑 이야기하는 것도 어색해하는데.”

“그렇기에 지금이 최적기에요. 이걸 놓치면 더 힘들어집니다.”

 

프로듀서는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잔을 들어 그 안에 든 차가운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적어도 개회식 행사 때는 제가 옆에 서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 정도인가요? 프로듀서 씨랑은 꽤나 이야기를 잘 하는 것 같던데.”

 

카에데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니 라이브……아니, 길거리 라이브라고 해도 지금의 그 아이라면 현장에서 졸도할 가능성도 있어요.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많은 사람을 마주하는 건 아직 이릅니다. 조금은 천천히, 단계를 밟아 갈 필요가 있어요.”

“후후, 그래서 그렇게 라디오랑 녹화 위주의 버라이어티 쪽으로 뛰어다니신 건가요?”

“어떻게 알았어요?”

“프로듀서 씨는 이제 꽤나 유명인이니까요. 이리저리 물어보면 대충 어디서 발품을 팔고 있는지는 다 나오는 법이에요?”

“하하, 내가 유명인이라니. 뭐, 영광이네요.”

 

“다만……”이라고 덧붙이며 시선을 들고 있는 잔에 고정시킨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보다는 그 아이가 이번 일로 주목을 좀 받았으면 하는데……말입니다.”

“그럴 만 하니까 고른 거잖아요? 후미카.”

“물론이죠. 그 아이도 때가 됐어요. ‘알’을 깨고 나올 때가……”

 

프로듀서가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미즈키와 카에데는 '무슨 소리지?'라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 때, 피로에 절어 반쯤 엎드려 있던 치히로가 고개를 슬쩍 들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마유는 다음 달 데뷔였죠?”

“네, 노래랑 안무도 대충 완성됐고, 다듬어지는 대로 방송 무대 잡아야죠. 우선은 6월 초 정도로 예상 중입니다만.”

“뭐, 그럼 후미카밖에 없긴 하네. 하아, 카에데랑 후미카는 좋겠다~. 이런 프로듀서한테 푸시도 받고.”

“누가 보면 카와시마 씨 한테는 안 해준 줄 알겠습니다. 방송 쪽으로 계속 잡아 드리잖아요? 데뷔무대도 조만간이고.”

“뭐어, 그래도 나도 아이돌인걸. 예능도 좋지만 노래도 해 보고 싶단 말이야.”

“열심히 준비하고 계시잖아요. 조만간 좋은 소식이 나올겁니다.”

“그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미즈키가 마지막 잔을 비웠을 때, 프로듀서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 이제 일어나죠.”

“히잉, 벌써?”

“프로듀서 씨, 2차에요, 2차!”

“아니거든요. 당신은 내일 라디오도 있잖아.”

“아니, 2차는 제발 봐주세요…….”

 

계산을 위해 계산대로 간 치히로의 표정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 이 가게는, 주점 치곤 꽤나 가격이 센 곳이었다.

 

 

 

************

 

 

 

주말을 지나 그 다음 주 월요일 아침.

아이돌 부서의 휴게실에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와 사복 차림의 후미카가 조용히 앉아서 자신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평소대로라면 후미카를 제외한 세 명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후에 있을 라이브를 대비하여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찍 출근한 것이다.

휴게실에서 린과 나오는 머리를 맞대고 앨범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그들 옆에는 카렌도 있었지만, 카렌은 앨범에는 관심이 없는 듯 패션잡지를 읽으면서 손톱을 손질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앨범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은 모두 카렌도 함께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지금은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라는 3인 유닛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연습생 시절을 포함한 기간은 카렌이 반 년 정도 더 길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녀의 체력을 기르는 데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카렌에 비하면 린과 나오가 사무실에 소속된 시간은 상당히 짧은 축에 속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자신이 들어오기 전의 시간이 들어 있는 지난 1년간의 사진이 담긴 앨범은 굉장히 신기한 것이었다.

앨범을 넘겨보던 나오의 눈에, 낯익은 사람이 나타났다.

 

“아, 카에데 씨다.”

“정말이네.”

 

앨범 사진 속의 타카가키 카에데는 단정한 정장을 입고 스탠드형 마이크 앞에서 무언가를 낭독하고 있었다. 사진의 배경은 얼핏 보기에는 커다란 야구장처럼 보이는 장소였다.

 

“카렌, 혹시 이 사진 뭔지 알아?”

“응?”

 

린의 옆자리에서 잡지를 읽고 있던 카렌은 고개를 돌려 린의 어깨 너머로 앨범을 살짝 보았다.

 

“작년 단합대회 때 사진이야. 카에데 씨 데뷔 직전……어?”

 

두 사람이 카렌을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때, 거의 맞닿은 린과 나오의 귀에 몰래 다가온 누군가가 훅, 하고 입김을 불었다.

 

“흐야아약!?”

“히악?!”

“어머나, 귀여운 반응이네.”

 

어느 새 들어온 것인지, 그녀들의 등 뒤에는 카에데가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면서 서 있었다.

 

“카, 카에데 씨!”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왔어요. 사무실에 아무도 없다 싶더라니 다들 여기 있었구나. 그런데 이렇게 사이 좋게 모여서 뭘 보고 있을까?”

“아, 앨범을 보고 있었어요. 저희들이 들어오기 전에 찍었던…….”

 

린과 나오가 자신들이 보고 있던 앨범을 보여주자, 카에데는 그리운 듯한 표정으로 앨범을 들여다보았다.

 

“단합대회 때 사진이네. 그리워라…….”

“이 때, 기억하세요?”

“기억하고말고. 이 때 프로듀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카렌, 너도 알지?”

 

카에데에게 뜬금없이 이름이 불리자, 카렌은 당황하며 잡지를 내려놓았다.

 

“응? 어, 네? 무, 물론 알죠! 아하하, 하하하…….”

“……?”

“쟤 갑자기 왜 저래?”

 

그 때, 살짝 열린 휴게실의 문 틈으로 프로듀서의 머리가 쑥 나타났다.

 

“사기사와? 여기 있어?”

 

프로듀서의 목소리를 듣자, 지금까지의 소란 속에서도 꿈쩍도 하지 않고 책을 읽고 있던 후미카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찾으셨나요?”

“응. 잠깐 시간 좀 괜찮을까?”

“지금은 괜찮습니다만…….”

“그러면 잠시 사무실로 와 줘.”

“네. 바로 갈게요.”

“프로듀서 씨, 저는요?”

 

카에데의 말에, 막 빠져나가려던 프로듀서의 머리가 다시 쓱 들어왔다.

 

“댁은 빨리 갈아입고 내려가세요. 안 그래도 트레이너한테서 전화 왔어요. 시간 지났는데 연락도 안 된다고.”

“으읏……!”

“이따가 저도 내려갈 테니까 빨리 내려가서 레슨이나 하세요.”

“흥, 알았어요.”

 

프로듀서가 사라진 휴게실의 문을 쏘아보며, 마치 자기들과 동년배처럼 볼을 부풀리는 카에데를 바라보던 린 일행은 새삼스럽지만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옆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던가 말던가, 관심조차 주지 않던 후미카는 읽고 있는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왔구나. 여기 앉아.”

“네…….”

 

잠시 후, 후미카가 사무실로 들어오자 프로듀서는 자신이 앉아 있는 업무용 소파의 맞은편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급탕실에서 바라보던 치히로는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보니 프로듀서 씨는 후미카랑 얘기할 때는 항상 앉아서 이야기를 하네……’

 

“사기사와, 요즘 레슨은 좀 어때?”

“처음에 비하면……많이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4개월 사이에 이 정도면 굉장히 성장한 것 같은데.”

“그런가요……?”

 

처음 레슨을 받으면서, 간단한 레슨에도 금세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던 자신을 떠올리며 후미카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하, 체력이란 게 쉽게 붙는 건 아니니까. 호죠의 경우만 봐도, 간단한 라이브 하는데 거의 반 년 가까이 걸렸고.”

“그……감사, 합니다.”

 

잠시 대화의 흐름이 멈춘 사이, 치히로가 따뜻한 차를 가져와 한 잔씩 나누어 주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머금고, 프로듀서는 단어를 고르듯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네.”

“사기사와도 이제 슬슬 때가 됐다고 생각해.”

“……?”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인지 후미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볍게 미소를 지으면서 프로듀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풀어서 그녀에게 전달했다.

 

“데뷔, 준비하자.”

“데뷔…….”

 

데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후미카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곧게 펴면서 프로듀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저는 아직은…….”

“알아. 시기상조라고 하고 싶은 거지?”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던 것을 정확히 지적당하자, 후미카는 김이 빠져나가듯 곧게 폈던 몸을 다시 움츠리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이것부터 시작할까 해."

 

그는 후미카에게 한 장의 서류를 건넸다. 서류에 적혀 있는 것은 단합대회의 식전 행사 진행에 관한 안내문이었다.

 

“저기, 이것은……?”

“말 그대로 식전 행사의 진행이야. 난 이번에는 사기사와에게 기회를 주고 싶거든.”

“……제가, 말인가요?”

“그래. 우선은 라이브 스테이지보다 넓은 곳이니까, 사람들 앞에 나서는 데는 부담감이 조금 덜 할거라 생각해. 하지만……..”

 

거기서 프로듀서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하고 후미카는 침을 삼키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뭐, 그것도 다 자기가 하고 싶을 때 얘기지. 한번 생각해 보고 얘기해 줘. 시간은 아직 조금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래, 용건은 여기까지. 혹시 다른 할 이야기 있어?”

“아뇨……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그래. 이따가 10시에 레슨 있으니까 준비해서 시간 맞춰서 내려가고.”

“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 뒤, 후미카는 다시 사무실을 나가 휴게실로 향했다. 프로듀서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을 때를 기다린 다음 치히로는 테이블 위의 찻잔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 씨는 후미카랑 이야기할 땐 항상 비슷한 높이에 앉아 있네요.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어요?”

“어……센카와 씨도 관찰력이 좋으시네요?”

“조금만 지내보면 누구나 다 알 걸요?”

”하핫, 그것도 그렇네요……그게, 사기사와는 앞머리가 길잖아요? 이런 모양새로.”

 

프로듀서는 위로 뻗쳐 올라간 자신의 앞머리를 잡아 끌어내려 보였다. 다소 우스꽝스런 모습이 되었기에, 치히로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기사와는 저랑 신장 차이가 꽤 있어서, 서서 이야기하면 앞머리에 가려서 눈이 안 보여요. 그러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힘든 아이라서, 최적의 각도를 잡는 겁니다.”

 

“너무 빤히 바라보면 금세 도망가버립니다만.”이라고 덧붙이며 프로듀서는 슬며시 웃었다.

그 때, 프로듀서의 자리에 놓인 전화기가 벨소리를 울리기 시작했다.

 

“네, 아이돌 부서의 프로듀서 P입니다……아, 준비 다 됐어요? 네, 그럼 내려 보내겠습니다.”

 

프로듀서가 수화기를 내려놓자 그를 바라보던 치히로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 전화였어요?”

“마스터 트레이너에요. 라이브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점검해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죠.”

 

말을 멈추고, 수화기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프로듀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를 다시 들었다.

 

 

 

*********

 

 

 

문이 열리는 소리에 휴게실에 있던 린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을 향했다. 후미카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죄, 죄송합니다.”

“아냐, 죄송할 것 까지야. 그런데 프로듀서랑 무슨 얘기 했어?”

“저기, 이 종이를…….”

 

후미카는 휴게실 가운데의 테이블로 다가가 프로듀서에게 받은 종이를 올려놓았다.

 

“어디어디, 식전 행사?”

“이거, 아까 카렌이 얘기하던 거 아냐?”

“응, 맞아.”

“저기, 실례합니다만.“

 

머리를 맞대고 종이를 보고 있는 세 사람의 한 걸음 뒤에서, 후미카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나요?”

 

그녀의 질문에, 일행 중 유일하게 작년 대회를 경험해 본 카렌이 “아마 이 부분일거야”라며 종이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에는 ‘개회사, 사가 제창, 선언문 낭독’이라는 항목이 적혀 있었다.

 

“사가……라는 것은, 우리 회사의 노래인가요?”

“응. 아마도…….”

“얘들아, 여기 있……아, 여기 다 있구나.”

 

그 때, 휴게실의 문이 열리면서 프로듀서가 불쑥 나타났다.

 

“프로듀서? 무슨 일이야?”

“스테이지에 가기 전에 트레이너 씨가 한 번만 더 보자고 해서. 이 다음은 바로 스테이지 리허설이니까 적당히 준비해서 지하로 내려가줘.”

“응, 알았어.”

 

대표로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프로듀서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후미카를 바라보았다.

 

“사기사와?”

“네……?”

“베테랑 트레이너가 사정이 생겨서 오후 레슨은 취소됐거든. 그러니까 이번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의 라이브 견학을 가 볼까 하는데,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그래. 그럼 각자 일정 마치고 14시까지 사무실에 모일 것. 알겠지?”

““네!””

 

프로듀서가 휴게실을 나간 뒤, 카렌은 다시 후미카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궁금한 게 있으면 저기 P씨나 카에데 씨한테 물어보는 게 좋을 거야. 우리들은 이런 거에 대해선 딱히 아는 바가 없으니까.”

“그렇군요……감사합니다.”

“그럼 우린 먼저 내려가 볼게. 이따가 봐.”

“네. 힘내세요.”

 

 

 

 

오후가 되어, 회사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은 뒤 프로듀서는 트라이어드 프리무스와 후미카를 데리고 미니 라이브가 열리는 스테이지로 향했다. 미니 라이브인 만큼 스테이지의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작은 무대도 아니었다.

그 덕분에 무대에 가는 손길 또한 자연스럽게 많아져서, 라이브의 시작은 저녁이었음에도 무대 설치와 리허설, 그리고 최종 조정까지 감안하면 오히려 시간이 모자라지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였다.

 

“와, 역시 대기업은 다르네 달라. 고작 미니 라이브에도 이런 설비가 나오나.”

 

햇빛이 약해지고 불어오는 바람이 약간씩 냉기를 품기 시작할 무렵. 최종 리허설을 마친 린 일행이 대기실 용도로 사용되는 캠핑카로 들어오자, 소파에 앉아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후미카가 한 박자 늦게 그들을 반겼다.

 

“수고하셨습니다…….”

“후미카 혼자 뿐이야? 프로듀서는?”

“조금 전에, 스테이지의 최종 조정을 한다고…….”

“그렇구나.”

 

데뷔를 하지 않은 후보생이라 하더라도 같은 사무소 소속 선배들의 공연에 따라가는 것은 업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후보생에게는 현장의 모습을 미리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선배들에게는 곧 자신의 뒤를 따라올 후배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후보생의 견학은 선후배간의 모티베이션을 부여하는 방법 중 하나로 자주 사용되고 있었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한쪽 벽면에 설치된 에어컨의 바람을 쐬면서, 의상을 갈아입기 전에 흘러내린 땀을 말리던 린이 대뜸 이야기를 꺼냈다.

 

“네……?”

“우리가 들어왔을 때 심각한 표정으로 멍하게 앉아 있었잖아?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렇군요……”라고 말꼬리를 흐리던 후미카는 무언가를 각오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선 그녀답지 않게 그녀들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들은……처음으로 남들 앞에 나설 때 어떤 느낌이었나요……?”

“뭐?”

 

그녀의 질문에 트라이어드 프리무스는 서로를 마주보며 눈을 깜박였다.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이야기를 꺼낸 쪽은 린이었다.

 

“뭐어……불안함, 이라고 해야 하나?”

“불안함……인가요?”

“으응, 처음으로 남들 앞에 나설 때, 대기실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불안했거든.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이게 정말 나에게 어울리는 일일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무대 뒤에서 머뭇거리다가 프로듀서한테 반쯤 등을 떠밀려서 올라갔어. 프로듀서는 ‘너라면 할 수 있어!’라면서 내 등을 밀어 줬지.”

 

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를 제외한 세 사람은 잠자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처음으로 무대에 올라갔을 때, 스포트라이트 너머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온통 새까만 색. 그래서, 처음에는 조금 실망했어.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하고.”

“뭐야, 린,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귀엽네에~.”

“뭐,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이니까 큰 기대를 갖지 말라고 P씨에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긴 했지만 말이야.”

“으음, 그때 린의 표정을 좀 찍어 놨어야 하는 건데.”

“거기 두 사람, 조용히 해 줘? 아무튼 그랬는데, 우리 노래가 나오면서 불빛이 약간 약해졌을 때, 내 눈에 띈 것이 있어.”

 

린은 또다시 말을 멈추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그녀의 얼굴에 걸려 있는 표정이, 옅은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몇 개 없긴 했지만, 분명히 우리 셋을 상징하는 세 가지 색이 섞인 야광봉이었어.”

“뭐, 나중에 알아보니까 회장 앞에서 팔고 있더라.”

“……나오, 자꾸 내 감동을 깎아먹지 말아줘.”

“죄송합니다…….”

 

나오를 흘겨보던 린은 표정을 풀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후미카를 마주보았다. 늘어뜨린 그녀의 검은 앞머리 너머로,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약간씩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숨기기를 반복했다.

 

‘눈, 정말로 예쁘구나. 프로듀서가 반할 만 하네…….’

 

“그러니까……‘불안함’이야.”

“……불안함……?”

 

자신의 말을 따라하는 후미카를 바라보면서, 가슴 속에서 왠지 모를 분함을 느낀 린은 자신의 머리 속을 떠도는 감상을 정리하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불안함……그게 내 첫 무대의 감상이야. 불안하고 무서웠어. 하지만, 나는 결국 무대 위에 서고, 지금의 내가 되었지. 내 한 걸음 앞에서 나를 이끌어주고, 결정적일 때 내 등을 밀어준 프로듀서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거기서 한 번은 포기하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해.”

“그렇군요……. 저만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린 씨도 그런 생각을 하셨네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이잖아? 아마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같은 입장이었을 거야.”

“‘가지 않은 길’이란 것이네요.”

“가지 않은 길? 책 제목 같은 거……?”

 

그 때, 캠핑카에 설치된 전화기가 요란하게 벨소리를 울렸다. 아무런 전조 없이 들려온 소리에 가까이에 있던 카렌이 움찔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아, P씨? 분장실로? 알았어, 금방 갈게.”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으면서 카렌은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P씨가 분장실로 모이래. 매니저 도착했다고.”

“좋아, 그럼 이번에도 한번 나가 보실까!”

 

린은 기합을 넣듯 크게 박수를 치는 나오를 가느다란 눈을 한 채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오, 너무 기합 넣다가 저번처럼 넘어진다.”

“아, 안 넘어졌거든? 그냥 올라가다 삐끗한 것 뿐이거든!”

“그거나 그거나.”

“그럼 후미카 씨, 우리 다녀올게.”

“네, 저는 이 곳에서, 여러분을 지켜보겠습니다…….”

 

세 사람 중 가장 마지막으로 문을 나서던 카렌이 잠시 멈칫하더니 그녀를 향해 한 마디를 남겼다.

 

“저기 후미카 씨, 고민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처럼 우리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사람이 있을 땐 그 든든함에 몸을 맡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네……?”

“그 사람, 어느 정도는 자신한테 어리광 부리는 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후훗.”

 

그녀의 대답을 듣지 않고, 카렌은 자신의 말만 꺼내놓은 뒤 냉큼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대기실에 혼자 남은 후미카는 방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곱씹기 시작했다.

 

 

 

************

 

 

 

다음 날.

프로듀서가 잠시 지하의 연습실로 내려간 사이, 치히로는 자신의 자리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바라본, 사무실의 한쪽 벽면에 걸린 스케줄 보드에는 어느새 5월도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단합 대회라…….’

 

그녀가 이 회사에 입사한 지 벌써 3년차.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 온 단합 대회는 그저 높으신 분들께서 날 잡아 하루 미팅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몇몇 회사는 팀을 꾸려 나름대로 ‘대회’의 구색을 맞춰 보려 애썼지만, 결국은 재롱잔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랬던 것이, 단 1년 사이에 일개 프로듀서가 제안한 한 가지 제도의 도입에 의해서 지금은 업계의 모든 회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참전하려는 행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면, 프로듀서 씨는 작년에 어떻게 했었지……?’

 

유감스럽게도 치히로는 작년의 프로듀서에 대해서는 그다지 아는 바가 없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그다지 털어 놓지 않는 편이었다. 뭔가 사정이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저 예상 뿐. 술자리나 행사 등에서 그것에 관해 물어보려고 하면 그는 귀신같이 눈치채고는 다른 쪽으로 대화의 흐름을 틀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늘아나기 전, 설립 초기에는 두 명뿐인 사무실 멤버였으니 업무 내적으로는 손발이 착착 맞을 정도였지만, 회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면 그들은 그대로 남남이 되었다. 그마저도 카에데를 영입한 이후부터 프로듀서는 그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기에, 치히로는 과장을 조금 보태면 쓸쓸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 때, 누군가가 사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멍하게 생각에 빠져 있던 치히로의 의식을 현실로 되돌렸다.

 

“네, 지금 나갑니다.”

 

치히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 직후, 문 너머로 나타난 두 사람을 본 그녀의 두 눈이 터질 듯이 휘둥그래졌다.

 

“안녕하세요?”

“저, 저기……안녕, 하세요!”

 

공손한 태도로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는 안경을 쓴 정장 차림의 남자와, 그의 뒤에 반쯤 숨어서 수줍게 인사하는 다갈색 단발머리의 소녀. 두 사람은 다름아닌 765프로덕션의 아카바네 켄지 프로듀서와 하기와라 유키호였다.

 

 

 

치히로는 안절부절못하며 마치 고장난 장난감처럼 사무실의 문 앞을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열린 문 틈새로 살짝 보이는 사무실 안에는 귀한 손님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이 참, 프로듀서 씨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람…….”

 

업무용 핫라인으로 연락을 하고, 5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듀서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참다 못한 치히로가 ‘내려가 볼까……’라고 생각하던 바로 그 때,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느긋한 템포로 걸어오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급격히 밝아진 표정으로 치히로는 잰걸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의 모퉁이를 향해 걸어갔다.

 

“프로듀서 씨!”

“어라, 센카와 씨? 왜 밖에 계세요? 더운데.”

 

모퉁이를 돌자, 트레이닝복 차림의 후미카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였다.

 

“그게 문제가 아니라요, 손님이에요! 손님!”

“네? 손님? 잠시만, 잠시만요. 사기사와,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끝나면 다시 부를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무튼, 빨리 들어오세요!”

“……?”

 

고개를 갸웃거리는 후미카를 남겨두고, 프로듀서의 손을 반쯤 억지로 잡아 끌면서 치히로는 그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형님!”

“어?”

 

소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프로듀서를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향해 다가왔다. 프로듀서 또한 면식이 있는 듯,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정장 차림의 남자를 향해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아카바네 선배? 하기와라 양? 이런 곳까진 어쩐 일입니까?”

“하하, 오늘은 이쪽 잡지에서 유키호의 취재가 있어서요. 들른 김에 겸사겸사 형님 얼굴도 좀 보고 가자 싶어서 왔어요.”

 

이런 인사에 익숙한 듯, 아카바네는 자신을 향해 내민 프로듀서의 주먹에 자연스럽게 주먹을 맞부딪히며 “개인적으로 좀 부탁할 것도 있고요”라고 덧붙이고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아아, 그랬구나.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 걸.”

“에이, 매번 형님한테 얻어먹었는데 다음엔 제가 사야죠.”

 

한 쪽은 1년 남짓한 시기에 13명의 무명 아이돌을 정상의 위치에 올려놓으며, 매 해 연말이 되면 헤드헌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닌다는 민완의 아이콘. 나머지 한 쪽은 행보 하나하나가 동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떠오르는 신성.

 

“그보다 부탁할 건 어떤 겁니까?”

“실은……이번에 우리 극장 아이들이 독립 프로젝트를 하거든요? 체육대회가 컨셉인데, 아무래도 야구 쪽 인스트럭터가……형님만한 사람이 없어서요.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저기……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급탕실을 잠시 사용해도 될까요……?”

“네, 사용하세요. 저 문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꺾으시면 됩니다……트레이너요? 간단한 코칭 정도라면 저도 할 수는 있는데…….”

“다들 소프트볼 정도는 해 봤을 테니까, 어느 정도 구색만 내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런 두 사람이 마치 오래 된 친구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의 상황을 앞에 두고, 치히로는 팽글팽글 도는 눈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이리저리 번갈아 보고 있었다.

 

“저, 저기, 차……끓여왔어요.”

“아, 감사합니다. 하기와라 양.”

“고마워, 유키호.”

 

어느 샌가 자신의 할 일도 빼앗긴 어시스턴트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두 사람의 대화를 멀리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참, 하기와라 양.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지금 휴게실에…….”

 

 

 

***********

 

 

 

프로듀서와 헤어진 뒤, 탈의실에서 평소의 사복으로 갈아입은 후미카는 곧장 휴게실로 돌아와 책을 펼쳐 들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이 눈에 들어오기는커녕, 마치 가슴 속에 커다란 돌덩이가 눌러 앉은 것처럼, 가슴이 쿵쾅거리고 답답했다.

오전의 레슨에서도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는 이유로 호되게 혼이 났다. 집중하려 노력은 해 봤지만,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프로듀서의 제안이 머리 속에 가득 차서, 그것을 떠올리면 가슴의 고동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안 읽혀…….’

 

바로 옆에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지금 내 머릿속을 뒤흔드는 것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묻고 싶었다.

그 때, 휴게실의 문을 열고 한 소녀가 조용히 들어왔다. 곁눈질로 그 사람의 모습을 본 후미카는 크게 놀랐다. 새하얀 원피스 차림의 다갈색 단발머리의 소녀. 그녀는 다름아닌 765프로덕션의 하기와라 유키호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765프로덕션 소속의 인기 절정의 아이돌이라는 것은 같은 업종에 몸담은 사람으로써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처럼 극도로 사람 앞에 나서기를 무서워하던 성격이라는 것을 프로듀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사람이, 적재적소에 나타난 셈이었다.

 

“저기……사기사와 후미카 씨……되시죠?”

“네, 헵……?”

 

그래서, 유키호가 먼저 말을 꺼냈을 때, 그녀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혀끝을 살짝 깨물고 말았다.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것보다도 그녀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혹시, 고민 같은 거……있으세요?”

 

마치 자신의 마음 속을 바라본 듯 한 그녀의 질문에 후미카는 내심 크게 놀랐다.

 

“……그렇게 생각하신……이유를 여쭤 봐도 될까요……?”

“에엣, 저기, 그, 프로……가 아니라, 직감! 그래요……직감, 이라고나 할까요오……죄, 죄송해요! 제가 잘못 짚었나요오……?”

“아뇨……저도 실은, 하기와라 씨에게 여쭙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후미카는 잠시 옆으로 고개를 돌려 약간 산발이 된 앞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는 다시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하기와라 씨는, 처음으로 무대에 설 때의 기분……기억하고 계시나요?”

 

뜻밖의 질문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직감이 맞았기 때문일까. 유키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의 질문을 곱씹듯이 가만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유키호는 마치 추억을 떠올리듯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사람 앞에 나서는 게 두려웠어요. 그런 저를 바꾸고 싶어서 아이돌이 되기로 했지만, 지금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아요. 아마도, 프로듀서 씨가 없으면, 지금의 저는 없지 않았을까……생각해요.”

 

유키호는 호흡을 정리하듯 잠시 말을 멈추었다. 후미카는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무서웠어요. 온 몸이 덜덜 떨리고, 기껏 외운 노래와 안무도 모조리 다 잊어버린 것 같았죠. 머리가 새하얘졌어요. 그냥 다 던져 버리고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런데, 무대에 올라가기 직전, 프로듀서 씨의 한 마디를 듣고, 저는 저를 다잡을 수 있었어요.”

“그 한 마디라는 게……?”

“’힘 내, 나는 너를 믿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후미카의 가슴이 크게 고동쳤다.

 

“고작 그 한 마디를 들었을 뿐인데, 프로듀서 씨의 미소를 봤을 뿐인데……신기하죠? 저는 그 날 이후로, 프로듀서 씨의 미소를 보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서 미소가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 앞에 서기로 마음먹었어요.”

‘아…….’

 

두근, 두근. 후미카는 자신의 심장소리가 점차 빠르게 들려 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머리 속에, 언제나 자신과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를 해 주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받은 레슨에서 쓰러져 좌절했을 때.

처음으로 참가한 트레이닝에서 쓰러져 트레이너에게 호되게 혼이 났을 때.

그 때마다, 그는 넘어진 그녀를 일으켜 세워 주었다.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괜찮아, 천천히 가자. 넌 할 수 있어.

 

이야기가 멈추었다는 것을 깨닫고 후미카는 퍼뜩 정신이 들어 눈 앞의 유키호를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유키호는 처음 던졌던 질문을 다시 꺼내 놓았다.

 

“사기사와 씨, 혹시 고민이 있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조금 전 후미카 자신에게 고민이 있는지를 물어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비록 연하이지만, 그녀는 자신보다 먼저 이 세상에 발을 담근,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알을 깨고 나온 어엿한 하나의 새였다.

 

“아, 아니요……이제는, 괜찮습니다……고맙습니다, 하기와라 씨…….”

“아뇨. 저야말로, 사기사와 씨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쁘네요.”

 

자리에서 일어나 유키호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후미카는 마음 속으로 다짐을 굳혔다.

 

 

 

***********

 

 

 

유키호와 아카바네를 회사 정문까지 배웅한 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치히로가 말을 꺼냈다.

 

“저기, 765의 프로듀서 씨랑은 무슨 관계에요? 서로 형님이니, 선배니 하는 것 같던데…….”

“구면이죠. 헐리우드에서 만났으니까요.”

“아, 그렇구나……헐리우드?!”

 

순간적으로 언성이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치히로는 황급히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프로듀서, 거기 가 봤어요?”

“가 보고 자시고, 저 여기 오기 전엔 거기서 있었는데요? 연출 매니저로.”

“에에……그럼 헐리우드에서 만났다는 건……?”

“아카바네 선배는 그 때 연수생 신분이었죠. 말 안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드디어 말 통하는 상대 만났다고 어찌나 좋아하던지.”

“아하하……그럼 선배니 형님이니 하던 호칭은 뭐에요?”

“별 거 아니에요. 제가 나이가 많으니까 형님, 그리고 아카바네 선배가 이 나라에서는 업계 경력이 기니까 선배죠.”

“정말로 별 거 아니었군요…….”

 

 

 

 

유키호와 아카바네가 떠나고 난 다음에도, 후미카는 휴게실의 구석에 앉아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읽었다’가 아닌 ‘바라보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정말로 책을 ‘바라보고’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휴게실의 문 너머로 배웅을 나갔던 치히로와 프로듀서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좋아…….”

 

이미 마음 속으로는 몇 번이나 했지만,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녀는 또다시 가볍게 자신의 뺨을 두어 번 두드렸다. 바라보던 책을 덮지도 않고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을 나간 그녀는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 곧장 사무실의 구석에 위치한 프로듀서의 자리로 향했다. 화장실이라도 간 것인지, 그의 자리로 향하면서 곁눈질로 슬쩍 본 치히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서류를 펼치던 그가 손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기, 프로듀서 씨…….”

“어? 아아, 미안하다. 내가 데리러 간다고 해놓고…….”

“어제 말씀하셨던 것……저, 한번 해 볼게요.”

 

그녀를 바라보던 프로듀서의 눈이 놀란 듯이 약간 커졌다. 그녀가 그의 예상보다 빠르게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처음에는 누구나 불안해 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니, 저도 한번 해 보려고 합니다. 이런 저이지만…….”

“그 정도면 됐어. 사기사와의 각오는 잘 알았으니까.”

“네…….”

 

대답 대신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힘든 결정을 했구나.”

 

 

---------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