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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27, 2016 00:15에 작성됨.

내게 기대.
내가 언제나 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얼마나 오래됐을까? 가장 오래된 기억에서는 남동생을 끌어안은 일곱 살 무렵의 내가 있었다. 남동생은 울고 있었다. 남동생은 늘 그랬다. 누가 자기에게 잘못한 일도, 자기가 잘못한 일도 언제나 자기가 울며 끝나 버리곤 했다. 그러면 마치 당연한 것처럼 주위엔 내가 있었고, 동생은 나를 안고 한참을 울었다.
미나미는 좋은 누나, 언니가 될 거 같구나.
내가 언제나 듣던 말이었다. 나는 ‘언니’라는 장난스러운 별명으로 들렸다. 처음엔 남들보다 발육이 빠른 나를 놀리는 별명으로 불렀지만, 어느샌가 언니란 말은 나를 대표하는 말로 붙어 버렸다. 나는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의지하고 내 말에 무게가 실린다는 건, 나 하나만 정신 차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오늘만은 미나미가 조금 더 기쁜 꿈을 꿀 수 있기를.
생각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부딪혔을 때, 머리맡에서 따듯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사실은 조금 말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고 생각해.
저도, 누군가한테 기대 봐도 될까요.
학창 시절의 나는, 어느 부류인가 하면 엘리트로 분류되는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매년 반장과 학생회장직을 압도적인 투표율로 가져갈 때마다, 부모님이 선생님과 면담하고 오실 때마다, 졸업하기 전 나눠주는 생활기록부를 볼 때마다 내 이름엔 언제나 엘리트나 리더십이 따라붙었다.
다른 아이들이 진로상담을 받던 시기 나 혼자 명문 고등학교의 입학권을 따냈을 때, 나는 라크로스를 시작했다. 선배들의 입김이 셌고, 팀플레이의 성격도 강했다. 지식이나 체력만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고, 여러 입상 경력이 있는 클럽 안에서 나는 한 마리의 병아리일 뿐이었다.
라크로스를 하는 동안, 나는 두 가지를 노력했다. 하나는 다른 선수들이 빛나게 하기 위해 나 자신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것처럼 희생하는 것. 하나는 너무 잘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려하거나 기억에 남는 플레이를 다른 선수들의 몫으로 넘겼고, 다른 선수들이 스타 선수의 이름을 가져가면서 예상대로 학교에서의 주목과 달리 라크로스 경기장에서의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선수로 여겨졌다.
이어지는 차기 주장 투표에서 내가 뽑힐 때까지는 말이다.
미나미는 정말 우리 모두를 골고루 잘 챙겨 줘.
어떤 선배의 한 마디에 다른 선배들이 줄 지어 동의했다. 가끔은 우리보다 선배인 거 같다니까. 등의 말이 나오기도 했다. 선배들 사이에서 후배가 주장을 맡을 수는 없다고 반대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팀의 기둥이 됐다.
내가 전혀 할 수 없을 일들을 도전했다. 이유 없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미뤄 보기도 했다. 나보다 나이 차이가 큰 연상과 사귀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가 원하는 답은 얻을 수 없었다. 내 실패를 보고서도 사람들은 나를 의지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자그마한 일탈을 시도해 보려 해도 내 마음이 자꾸만 건드려서 할 수가 없었다. 사귀었던 사람은 내가 노력의 결실을 보는 걸 기다려 주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유명 국립대에 진학해 있었고, 내 주위에는 비슷한 수준의 대학을 가게 된 아이들만 남아 있었으며, 어느새 쌓인 자격증의 수가 세 자리 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가 좀 더 불완전하고 초라한 존재길 바라는 건 과분한 고민인 걸까? 너무나 큰 소라를 등에 멘 소라게가 자기 몸을 가리듯, 어느새 내 본체는 저 멀리에 사라져 온데간데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저기, 아직도 말하고 싶어요. 된다면… 한 번만….
외롭다고.
상자가 열리듯 눈꺼풀이 열리며 잠시 멀리 두고 있었던 세계가 가까이 다가온다. 내 낌새를 느꼈는지 내 머리맡의 소녀가 나를 본다. 맑고 푸른 눈이 보인다. 내가 지금 상자를 열었다면, 분명 작고 허름한, 그러나 안에는 매우 빛나는 보석이 담긴 보석상자겠지.
“안색, 안 좋아요. 나쁜 꿈, 꾸었나요?”
눈썹까지 강하게 찡그리며 나를 보고 걱정해주는 소녀가 내 머리맡에 있다. 어느새 잠이 들었던가. 아냐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자다가 깜박 잠이 든 것 같다.
“좋은 꿈은 아니었어. 하지만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아빠가 말해 주셨던 이야기인데, 나쁜 꿈을 꾸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하루를 기분 나쁘게 보내게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제게 털어놓는 게…”
나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여전히 걱정 많은 아이라니까.
“정말 괜찮아. 무슨 꿈을 꿨냐면, 어릴 적의 꿈을 꿨어. 어릴 적의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
“그럼 좋은 꿈 아닌가요?”
“으으응, 왜냐면… 난 아냐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을 더하고도 더 기쁘니까.”
아냐는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인다. 스스로는 눈치 못 채고 있겠지만, 입가에도 작게 웃음이 번진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면서도 여전히 눈을 마주치며 도망가지 않는 게 아냐의 귀여운 점이다.
“그래도 너무 자 버린 걸까… 무릎은 아프지 않았어? 시간은 얼마나 됐어?”
“괜찮아요. 미나미의 무릎베개는 전혀 무겁지 않으니까. 그리고 시간은… 아.”
폰을 꺼내 시간을 보던 아냐가 밝게 미소를 띈다.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든 나를 뒤로 하고, 아냐는 식탁 위에 덮여 있던 식탁보를 당긴다. 커다란 그릇에 담긴 보르시를 중심으로 멀리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따듯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중간에 내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

“미나미.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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