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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사기사와 후미카 <걷지 않은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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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25, 2016 03:50에 작성됨.

 

********** 

 

사기사와 후미카와 함께하는 ‘Magic Hour’. 어느덧 마법이 풀릴 시간이 되었네요.

마지막으로 오늘은, 작별 인사 대신 조금 특별한 것을 준비했습니다. 부디, 들어주시길.

 

 

[단풍 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 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 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길을 택했습니다. 먼저 길과 똑같이 아름답고,

아마 더 나은 듯도 했지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을 부르는 듯했으니까요.

사람이 밟은 흔적은

먼저 길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서리 내린 낙엽 위에는 아무 발자국도 없고

두 길은 그날 아침 똑같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 먼저 길은 한번 가면 어떤지 알고 있으니

다시 보기 어려우리라 여기면서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나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고,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이 시는,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선택이 가지는 중요성과,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는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 보니, 저도 갈림길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던 기억이 있네요. 그 때, 저의 등을 밀어주었던 주위 사람들의 격려가 없었다면 지금쯤 저는 어느 길을 택하고 있었을지……

청취자 여러분들은 선택을 해야 했던 시기가 있으신가요?

그 때의 여러분들은, 어떻게 행동하셨나요?

 

한 주를 마무리하는, 심야의 마법이 풀리는 시간.

2월의 첫 주를 마무리하는 오늘은, 조금은 철학적인 이야기로 끝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상으로 금요일의 퍼스널리티, ‘Magic Hour’의 사기사와 후미카였습니다.

그럼 여러분, 좋은 꿈 꾸시고……다가올 주말도, 그리고 다시 다가올 다음 주에도 웃는 모습으로, 힘찬 하루, 힘찬 한 주가 되길 기원하며, 닫는 노래를 보내드립니다.

 

들어주세요. 하기와라 유키호의 ‘First Step’.

 

 

 

********

 

 

 

엔딩곡이 흘러나오고, 저는 마이크를 옆으로 밀어낸 뒤 조금 남은 생수를 마셔 목에 수분을 공급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방송 중’을 알리는 램프가 꺼지고, 방음유리 건너편의 스태프 분들이 제게 수고했다는 듯 박수를 보내옵니다.

 

“하아…….”

 

귀를 압박하던 헤드셋을 내려놓고, 머리를 약간 흔들어 흐트러진 앞머리를 다시 되돌렸습니다. 그리고 크게 숨을 내쉬면서, 과도할 정도로 곧게 폈던 등과 배의 긴장을 풀었습니다. 그러자 억눌렀던 호흡이 풀리면서, 자연스럽게 한숨이 푹 나왔습니다.

혹시나 대본에서 빼먹고 지나간 것은 없는지, 사후강평을 위해 체크포인트를 마지막으로 확인하던 저는 도중에 살짝 시선을 돌려 방음유리 건너편을 바라보았습니다. 방음유리 건너편에 있는, 언제나 단정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남자는 스태프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눈 뒤 서로 인사를 건네고는 녹음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팔에는 제가 사용할 스포츠 타월을 걸친 그 사람의 손에 들린 것은 그의 팔뚝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보온병이었습니다.

 

“수고했다.”

 

녹음실을 나와서, 복도에 마련된 휴게실에서 저희는 잠시 휴식을 취했습니다. 다른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한 미즈키 씨를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벤치에 앉아서 그 사람이 준비해준 따뜻한 꿀물을 홀짝이고, 그 사람은 제 옆을 지키듯이 서서 자판기에서 뽑아낸 차가운 캔커피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는 저를 내려다보며 말을 꺼냈습니다.

 

“그나저나, 로버트 프로스트라니. 의외였어.”

“그런가요……?”

“시라는 것도 의외였지만, 사기사와라면 다른 시인을 고를 줄 알았거든.”

“여러모로, 인상 깊었던 시인이었으니까요…….”

 

‘사실 그 시인의 시 중에서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은 이것 뿐이지만요’라는 말은 가슴속으로 삼켰습니다.

 

“별 다른 이유는……없어요.”

“그래?”

“네. 그저, 떠올랐을 뿐이니까요…….”

“그렇구나. 떠올랐을 뿐.”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입을 다물었습니다.

저는 컵 대신 사용하는 보온병의 뚜껑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쥐었습니다. 매끄러운 질감 너머로 따뜻한 음료의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는 차를 홀짝이면서, 늘어뜨린 앞머리 사이로 제 앞에 서 있는 남자를 슬쩍 훔쳐보았습니다. 평소라면 귀신처럼 제 시선을 눈치채고는 미소를 보내 오는 사람이지만, 그의 키와 제 앉은키 만큼의 고저차가 작용하면, 늘어뜨린 앞머리가 충분히 제 역할을 해 줍니다.

새삼스럽게 이 사람은, 정말로 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수많은 노래들 중 하기와라 선배의 First Step을 고른 이유를, 수많은 시인 중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를 선택한 이유를, 당신은 정말로 모르는 건가요?

 

“프로듀서 씨?”

“응?”

“저기, 죄송하지만……지금, 해도 될까요……?”

 

지금 떠오른 생각을 곧바로 정리하지 않으면 금세 증발할 것만 같아서, 저는 옆에 놓아둔 가방에서 항상 가지고 다니는,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꺼냈습니다.

 

“그래, 10분 정도는 될 것 같다. 진행이 길어지네…….”

“감사합니다.”

 

그것을 본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곤 저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수첩을 꺼내 들었습니다.

자물쇠를 풀고 일기장을 펼치자, 마지막으로 작성된 내용에 적혀 있는 365라는 타이틀의 숫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곧장 다음 페이지를 넘겨 366이라는 숫자를 기입합니다.

 

제가 저것들을 선택한 이유. 그것은, 새삼스레 오늘이 어떤 날인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제가 당신과 만난 지 딱 1년째가 되는 날이에요.

저는 당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당신의 생일조차도 말이에요.

다른 기념일을 기념하고 싶지만, 소심한 저이기에 당신께 감히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이기에, 기념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 밖에 없다는 것이 한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신과 저만의 비밀스런 기념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두근거리기도 합니다.

 

일기장을 펼쳐두고, 저는 저의 생일 선물로 받은 만년필을 꺼내어 뚜껑을 열었습니다. 펜촉이 종이 위를 내달리며, 사각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를 냈습니다.

 

 

 

********

 

 

 

그러니까, 시작은 아마도 재작년 8월……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희가 처음으로 만난 것은, 1년보다는 조금 더 오래 되었네요. 하지만, 아이돌과 프로듀서라는 관계로써 만난 것은 이제 딱 1년이 되는 참이니, 이 부분은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프로듀서라고 부르고 있는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에서 맞이한 첫 여름방학의 막바지……아뇨, 이제 막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려는 그 때였습니다.

 

 

 

주말이 되면, 대학교의 보강이나 과제가 없는 한 저는 숙부님의 고서점으로 향합니다.

숙부님의 고서점은 커다란 빌딩으로 가득한 번화가에서 골목길 하나를 안으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습니다. 도시를 숲이라고 생각하면, 숙부님의 가게가 있는 빌딩은 숲 속에 있는 커다란 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빌딩의 1층에서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숙부님의 가게를 밖에서 바라보면, 이따금씩 커다란 나무 밑동에 난 작은 옹이구멍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네, 작은 동물이나 새들이 가끔씩 숨어들어 날개를 쉬거나, 숨을 돌리는 그 옹이구멍 말이에요.

 

저는 옹이구멍의, 옻칠이 벗겨지려고 하는 오래 된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가게 밖은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요동치고 있지만, 낡은 에어컨과 오래 된 선풍기 하나뿐인 이 가게의 문을 열면,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를 한 가득 품고 있는 시원한 바람이 확 뿜어져 나옵니다. 책의 온도라는 것일까요.

오래 된 경첩이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문에 달아놓은 작은 도어벨이 함께 화음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언제나 간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야 하는 커다란 책장의 협곡을 넘어, 수북하게 쌓인 책들의 골짜기 사이를 지나 가게의 가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제는 얼굴과 머리숱에 조금씩 세월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중년의 남성이 카운터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직은 도수가 그다지 높지 않은 무테 안경을 쓰고 있는 그 남성은, 카운터의 탁자 한 켠에 짙은 고동색의 플랫 캡과 교향곡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놔두고 흘러나오는 교향곡을 벗 삼아 이따금씩 안경을 고쳐 쓰며 활자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네, 저 분이 바로 이 고서점의 주인인 저의 숙부님이십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오래 된 마룻바닥이 끼익, 하고 인기척을 알립니다. 고개를 들어 인기척이 난 방향을 바라본 숙부님은 읽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끼운 뒤, 안경을 벗으며 기다렸다는 듯 저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아, 후미카구나. 어서 오렴.”

“안녕하세요.”

 

제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숙부님은 옷걸이에 걸어 둔 외투를 걸치고, 라디오의 옆에 세워둔 고동색 모자를 푹 눌러 썼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나갈 채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후미카, 오자마자 미안하지만 가게 좀 봐 주겠니?”

“네. 그렇게 할게요.”

“고맙다. 나는 잠시 거래처에 좀 다녀오마. 새 책 몇 가지가 안 들어와서 말이야.”

 

“다녀오세요”라고 숙부님을 배웅한 뒤, 저는 숙부님이 앉아 있던 카운터에 앉았습니다. 숙부님의 의자는 몇 번이나 옻칠을 새로 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오래 된 나무 의자지만, 질 좋은 나무를 쓴 것인지 여전히 튼튼합니다. 삐걱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으니까요.

숙부님의 자리에 앉아서, 저는 기숙사에서 가지고 온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아니지요. 정확하게 말하면, 여기에서 빌려 간 책을 다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앗.”

 

책을 펼치면서 실수로 그만 책갈피를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책갈피를 줍기 위해 탁자 아래로 허리를 굽힌 그 때, 저의 눈에 보인 것은, 노끈으로 묶여 있는 한 질의 문고판이었습니다.

저는 읽기 위해 펼쳐놓았던 책에 다시 책갈피를 끼워두고, 탁자 아래에 있는 책 더미를 들어 탁자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뭘까요……”

 

저는 조심스레 노끈을 풀어 책을 살펴보았습니다. 서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그것들은 하나같이 처음 보는, 거기다 낯선 표지를 가진 것들뿐입니다. 어째서 낯선 표지인가 라고 한다면, 그 책의 표지가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 아아, 영어로 된 것 말이구나? 그건 내가 아는 사람이 부탁해서 들여온 거야.”

 

거래처에서 돌아오신 숙부님께 제가 책에 대해서 여쭤보자, 숙부님은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런 곳에서 자영업을 하시는 만큼, 숙부님의 발은 상당히 넓은 편에 속합니다. 저와는 달리 젊을 때부터 남들과 쉽사리 어울리는 밝은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숙부님의 지인이라면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젊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숙부님과 비슷한 연배의 사람일까요?

듣기로는 외국어를 공부하는 데 있어 그 나라의 소설을 읽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고 들었기에, 저는 혹시나 그 사람이 외국인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저 외국어에 흥미가 있는 사람일까요?

 

 

 

돌이켜 보면, 이 날을 기점으로 숙부님의 가게에 영어로 된 책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정도 쌓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보면 누군가가 주기적으로 책을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적어도 제가 가게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

저도 일단은 대학생이고, 문학을 배우는 관계로 영어 정도는 읽을 수 있기에 한 번은, 살짝, 그 책의 속살을 열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익숙하지 않은 언어의 활자가 빽빽하게 들어찬 종이를 들여다 보면 어느새 현기증이 느껴져 책을 덮게 됩니다.

 

 

 

그렇게 불타는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가을이 다가오고, 또 가을이 깊어질수록 겨울에 대비하라는 듯 날씨가 점점 싸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은 평일이었지만, 교수님의 사정으로 인해 수업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저는 과제에 사용할 교재를 챙겨 숙부님의 가게로 향했습니다.

최근 들어 숙부님께서 제게 가게를 부탁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수업이 있는 날이라곤 하더라도 일찍 마치는 날엔 혼자서 기숙사의 책상 앞에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으므로, 저는 숙부님이 부를 때마다 기꺼이 숙부님의 가게로 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곳에는 저를 안정시켜주는 책이 많으니까요.

 

“안녕하세요……?”

“후미카? 아아, 어서 오렴. 마침 딱 좋을 때 왔구나.”

 

가게에 들어가자, 한창 외출 준비를 하고 계시던 숙부님께서 저를 맞이해 주셨습니다. 얇은 외투를 걸치고. 항상 가지고 다니는 짙은 고동색의 플랫 캡을 쓰고 계신 것을 보아하니 금방 외출을 하실 모양입니다.

 

“밖에 나가시나요?”

“그래. 잠시 조합에 좀 다녀오마.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잠시 후, 준비를 마친 숙부님은 “나중에 조금 특이한 손님이 오면 열어보렴”이라고 하면서 제게 쪽지 하나를 남겼습니다.

 

“그럼 후미카, 잘 부탁한다.”

“네, 가게는 맡겨주세요.”

“오냐.”

 

고개를 끄덕이는 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숙부님은 외투의 옷깃을 여미면서 가게의 문을 나섰습니다.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멎을 때 즈음, 저는 숙부님이 애용하시던 라디오를 켜고, 흘러나오는 교향곡을 벗삼아 과제를 하기 위해 책을 펼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교향곡을 재생하던 방송이 끝나고 뉴스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뉴스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저는 라디오의 음량을 0으로 낮추었습니다. 그러자,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 딸랑, 하고 도어벨이 울리는 소리가 짧게 들렸습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의 소리에 섞여 뚜벅, 뚜벅, 하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는 고개를 들어, 책장의 숲을 지나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사기사와 씨, 계십니까?”

“어서오세요……?”

 

앞머리에 가리어진 시야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그 사람의 배였습니다. 약간 고개를 들면 단정하게 차려 입은 정장의 가슴 부분이 보입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저는 조금 더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엇, 안녕하세요?”

 

카운터에 앉아 있는 저를 보며 놀란 듯 가볍게 움찔한 것도 잠시. 그 사람은 곧바로 저에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보내왔습니다. 제가 작은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야 하는 책장의 가장 위쪽 칸과 거의 같은 높이에 그의 머리가 있었으니, 적어도 눈 앞의 이 사람은 제가 태어나서 본 그 어떤 사람보다도 키가 크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늘어뜨린 앞머리에 가려져서 그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습니다. 확실하게 본 것이라곤 날카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단정하게 차려 입은 정장에 뿔테로 된 안경을 쓰고 있었다는 것뿐이었어요.

 

“저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주문했던 책이 도착했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사기사와 씨는 안 계신가요?”

 

‘사기사와 씨’라고 한다면, 아마도 숙부님을 말씀하시는 것이겠죠. 주문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기에, 저는 다소 당황하면서 책을 덮어두고 테이블 위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탁자 위에 올려둔, 숙부님의 쪽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조금 특이한 손님이 오면 열어보렴.]

‘조금 특이한…….’

 

저는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앞머리에 가리어서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저만의 착각인 모양입니다. 그 사람과 저의 시선이 부딪히고, 제 시선을 받아넘기며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습니다. 화들짝 놀란 저는 황급히 고개를 떨구고 쪽지를 펼쳤습니다.

 

[아마 네 앞에, 안경을 쓰고, 키가 엄청나게 큰 젊은이가 있다면 그 손님이 맞을 거다. 테이블 밑에 모아둔 책들이 있으니까, 그걸 주면 돼. 요금은 미리 받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거라.]

“아…….”

 

이 사람이었군요. 저는 그제서야, 이따금씩 쌓였다가 사라지곤 하던 영어로 된 책들의 주인을 알았습니다.

 

“저기, 잠시만……기다려주세요.”

“네. 천천히 하세요.”

 

익숙한 상황인 듯, 그는 몸을 빙글, 돌려 책장에 꽂힌 책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탁자 아래로 몸을 숙였습니다. 탁자 아래에는 저번과 마찬가지로 노끈으로 묶여 있는 6권 정도의 책이 있었습니다. 그다지 무겁지는 않았기에 손쉽게 그것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책의 표지를 본 그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혹시, 이건가요……?”

“이야, 진짜로 들어왔네!”

“아, 저기……”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탁자 위에 놓인 책들을 한 손으로 덥석 들어올리고, 그는 손목에 찬 시계를 한번 확인하고는 제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성큼성큼, 가게를 나갔습니다. 마룻바닥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어올 때보다는 확연하게 빠른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래도 바빠 보이는 눈치였습니다.

 

‘무슨 책인지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여쭤봐야겠네요.

잠시 후, 가게로 돌아온 숙부님께 그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말씀 드리자, 숙부님은 크게 웃으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떠냐. 특이한 사람 맞지?”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 뒤로, 시험이 끝나고 곧장 방학이 다가오면서, 저는 그 사람을 만나게 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만나게 되는 시간이 늘었다고나 할지, 실은 가게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그를 자주 마주치게 된 것에 불과하지만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 사람은 저에게 자신의 두 가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는 평일의, 양복을 입고 나타나는 ‘사회인’의 모습.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주말의, 사복을 입고 나타나는 ‘개인’의 모습이었습니다.

 

 

 

************

 

 

 

펜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저에게서 세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아,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정적이 찾아오자, 프로듀서 씨는 수첩에서 손을 떼고 저를 바라봅니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는 또 다시 저에게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웃음의 가격은 저렴할수록 좋다.]

 

문득, 아이돌이 된 이후, 그에게 가장 처음 들었던 어드바이스가 떠오릅니다.

펜을 멈추고, 조용히 생각하던 저는 어떤 사실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그러고 보면, ‘개인’으로서의 그는, 아직은 저 밖에 모르는군요.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어, 저는 한결 가벼워진 손으로 펜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실은 이전에 한 번, 저는 카에데 씨와 함께 그의 집으로 병문안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도, 그는 가급적이면 ‘프로듀서’로써 우리를 대하고 있었습니다. ‘프로듀서 P’가 아닌, P씨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아직은 저밖에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각사각. 펜촉과 맞닿은 일기장이 또다시 기분 좋은 울림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

 

 

 

방학이 가까워졌습니다.

그에 따라 시간표도 조금씩 여유가 생겨서, 저는 평소보다 자주 숙부님의 가게에 들락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도 접촉할 기회가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쁜 사람인 모양인지 제가 직접 만난 적은 거의 없지만, 한 번씩 왔다 갈 때마다 흔적을 남기고 가는 탓에 저는 확실히 그가 왔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후미카 왔니? 와서 이거 좀 먹어보거라.”

 

평소처럼 가게로 들어가면, 숙부님께서 앉아계신 카운터 위에 놓여 있는, 한 눈에 보더라도 고급으로 보이는 전병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사람이 가끔씩 두고 가는 선물 중 하나로, 오늘은 전병이지만 어느 날은 케이크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차가 되기도 합니다.

 

“전병……인가요?”

“선생님이 가져오신 거야. 맛있더라.”

“음……맛있네요.”

“그렇지? 잠깐만 있어보렴. 녹차라도 꺼내주마.”

 

숙부님은 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왜인가 여쭤보니, 매주 일요일마다 강변 운동장에서 열리는 야구 동호회에 가끔씩 나타나 야구를 가르쳐주기 때문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조금 의외였습니다. 제가 본 그는 안경도 그렇고, 어딘가 인도어 파라는 이미지였는데 말이에요.

물론 지금은 그의 성격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처음 만났던 때를 제외하고는 저는 그 사람과 직접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제 안에서의 그의 이미지는, 첫 인상에 의존하는 편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늦가을이 지나가고 초겨울에 접어들 때.

방학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숙사에 있어도 책을 읽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저는 용돈벌이를 겸해 아예 숙부님의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드디어 제가 있을 때 그 사람이 가게를 찾았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그는 평소의 칼 같은 양복 차림이 아닌, 활동하기 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그의 몸 전체를 아우르는 어쩐지 나른한 분위기는, 온 몸으로 ‘오늘은 개점휴업입니다’하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 사기사와 씨는 안 계신가요?”

“아, 숙부님이라면 잠시 모임에…….”

“그렇구나. 저기 그럼.”

“혹시, 찾으시는 게 이 쪽인가요……?”

“아, 맞아요! 역시, 미리 챙겨 놓으셨구나.”

 

평소처럼 영어로 된 책을 받고, 책장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그 사람에게, 저는 마침내 용기를 짜내어 말을 걸었습니다.

 

“저, 저기…….”

“네?”

“혹시, 무슨 책인지……여쭤봐도 될까요?”

 

그는 “관심 있어요?”라고 말하며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늘어뜨린 앞머리 사이로 그와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훗, 하고 작게 웃으면서 카운터에 올려둔 책의 끈을 풀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지었던 웃음. 그것은 양복을 입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약간은 기운이 빠지는 듯한 미소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 사람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트게 되었습니다.

 

 

 

연말이 다가옵니다.

점점 일이 바빠지는 것인지, 그 사람이 평일에 오는 일은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많아야 한 달에 두 번 정도일까요. 하지만 대신, 일요일에는 항상 가게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마치 얼굴도장을 찍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학이었기에 주말에는 거의 하루 종일 제가 가게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요일에는 항상 특정한 시간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저의 관계도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이상하네요. 가까워졌다곤 하지만, 사실은 한 마디 이상 이야기를 길게 나눌 수 있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 주제는 대부분 책에 관한 내용이었지만요.

 

“……그러니까, 데미안은 작가의 양심 같은 거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럼 싱클레어는, 작가 본인이라는 뜻인가요?”

“그렇죠. 싱클레어가 엇나갈 때마다 나타나는 건, 자기 속의 양심이 ‘실은 이렇게 행동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후회의 일종이라는 주장이죠.”

“일종의 자아성찰……이군요.”

”맞습니다. 중반부에서 싱클레어가 크게 엇나갔을 때에 데미안이 답장을 하지 않았던 것은. 당시의 싱클레어가 자신이 엇나갔음을 자기 자신조차 모르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고요.”

“그렇군요……그럼 이 작품은, 하나의 자서전으로도 봐도 될까요.”

“글쎄요, 그 부분이 또 애매하단 말이죠……그러니까 그 부분은…….”

 

이런 식으로, 그가 책을 가지러 오는 잠깐의 시간 동안, 제가 읽었던 책에 대해서, 그리고 그가 읽었던 책에 대해서 짤막하게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은 비록 전문적인 지식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폭이 좁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적당히 취미를 즐기는 선이었기에, 저는 그 사람을 통해서 서양의 문학에 대해서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번역본과 원본의 차이라던가, 번역을 하면서 부득이하게 사라져버린 원본만의 느낌, 같은 것을요.

돌이켜보면, 그 때까지 한 마디 이상 이야기를 나눠 본 것이라곤 부모님과 숙부님 뿐이었습니다. 타인과 한 마디 이상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그 사람의 존재는 저에게 있어서 꽤나 크게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연말을 지나 1월이 끝나갑니다.

새 학기가 점차 코앞에 다가왔을 무렵, 저는 혼자서 번화가를 걷고 있었습니다.

변덕이 아니라, 그저 요즘은 어떤 책이 유행하고 있을지, 그것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러던 중, 늘 다니던 서점 옆에 새로 생긴 음반 매장에서 작은 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매장의 안에서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기에, 저는 대체 누가 와 있길래 이런 것일까, 싶어서 매장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갔습니다. 그 줄의 끝에는 올리브색 머리카락을 반짝이는, 우아한 분위기의 여성이 예쁜 의상을 입고, 테이블에 앉아서 줄지어 선 사람들에게 악수를 하거나, 사인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이었는데, 누구인지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질 않네요.

고개를 돌려 대열의 옆에 서 있는 디스플레이 스탠드를 보면, “타카가키 카에데 팬 사인회”라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그제서야 떠올랐습니다. 타카가키 카에데. 요즘 떠오르는 대세 아이돌 중 한 명입니다. 연예계 소식에는 관심이 없는 저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이니, 그녀가 얼마나 유명한지는 말할 것도 없겠죠.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에게서 조금 더 시선을 돌려 보면, 디스플레이 스탠드의 옆에 ‘6주 연속 싱글 차트 1위’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 스탠드의 뒤쪽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디스플레이 스탠드의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조용히 회장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날이 선 듯 빳빳하게 다려진 짙은 감색의 양복, 왁스를 먹여 적당히 기세를 살린 짧은 머리카락, 멀리서 보더라도 확연히 남들보다 반절은 더 커 보이는 커다란 키.

그렇습니다. 그는 다름아닌 이따금씩 가게로 찾아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동안 행사장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봐 온 그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의 그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평일 저녁에 이따금씩 만나던 양복 차림의 그 사람이나, 주말에 자주 만나던 사복 차림의 그 사람과는 또 다른 모습의 그가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바라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가만히 서 있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제가 있던 방향을 바라봅니다. 저는 화들짝 놀라 반 걸음을 물러섰습니다.

아무래도 시선을 읽힌 모양이었습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저를 향해 빙그레 웃으면서 가볍게 목례를 하곤 다시 행사장으로 시선을 되돌렸습니다.

그러자 뒤늦게 반응이 찾아왔습니다.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끼면서, 저는 잰걸음으로 그 장소를 벗어나 기숙사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음침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습니다.

실제로는 성격이 어두운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지만, 저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제게 음침하다고, 어두워 보인다는 평가를 거리낌없이 했습니다. 당연히 저나 저희 가족이 있는 앞에서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사람의 귀는 생각보다 밝은 편입니다.

원인은 알고 있습니다. 마치 암막처럼 늘어뜨린 저의 앞머리 때문이겠죠.

그래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부모님과 숙부님을 제외한 타인이 저와 눈을 마주쳐주고, 저를 향해 먼저 웃어 준다는 이러한 일이, 저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처음과도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 주의 주말에, 마찬가지로 책을 가지러 가게에 온 그 사람에게, 저는 번화가에서의 일을 꺼내며,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소개가 늦었군요”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제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프로듀서라고 적혀 있는 명함을 말이죠.

그 사람은, 프로듀서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프로듀서’가 무엇인지, 무엇을 만드는 것인지 생각하는 저에게, 그 사람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사기사와 양, 아이돌, 해 볼래요?”

“……네?”

“아이돌, 해 보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요.

귀는 말을 알아들었지만, 제 머리는 그것을 처리하는데 시간을 요구했습니다.

‘아이돌’이라는 것은, 그것이겠죠? 타카가키 카에데 씨 같은, 그런, 사람들의 앞에 나서는…….

 

“저기, 저, 그러니까, 오늘은, 조금, 그, 시간을…….”

 

얼굴에 피가 몰립니다. 화끈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횡설수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튀어 나오는 단어들을, 저는 속수무책으로 입을 통해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시간 많으니까, 느긋하게 생각해 주세요”라는 말을 남긴 뒤, 책을 가지고 가게를 나섰습니다.

그 사람의 명함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저는 숙부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머릿속으로 무대 위에서 노래하며 춤추는 저를 상상하려 노력했습니다.

틀렸습니다. 전혀 상상이 안 되네요.

 

 

 

2월이 시작되는 어느 날의 일입니다.

며칠 전에 있었던 그의 질문에 대해서, 저는 잠시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큰 의미는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조사해본 결과, 예능계 프로듀서에게 있어서 스카우트란 숨 쉬는 것과 동의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다지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저는 그 사람의 말을, 그저 제멋대로 어른의 질 나쁜 농담이었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꺼냈을 때의, 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말이에요. 

……사실은, ‘나 같은 것에게 진지하게 그런 걸 제안할 리가 없지’라는, 자기비하적인 의도가 깔려 있다는 것을, 그 때의 저는 까맣게 몰랐습니다. 아니, 모른 체 하고 있었을 겁니다.

 

주말이었지만 평소와 달리 양복을 입은 채로, 그 사람이 가게로 들어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숙부님과 저는 자세를 곧게 하고서는 그를 ‘지인’이 아닌 ‘손님’으로 맞이했습니다.

 

“두 분께는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이런 주말이지만, 제 개인적인 업무에 관련한 일로 찾아왔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죄송하다’는 말을 연거푸 꺼내면서, 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숙부님께 양해를 구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요. 몸을 일으킨 그 사람은 잠시 호흡을 정리하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사기사와 양, 생각 좀 해보셨어요?

“저, 저기, 그게.......”

 

농담이 아니었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저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습니다.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눈빛을 본 그 때, 저는 제가 터무니없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머뭇거리는 저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지레짐작이었지만, 그 웃음의 의미를 대강은 알 수 있었기에 저는 더욱 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제 옆에 앉아 있는 숙부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기사와 씨, 잠시 조카분을 빌려도 괜찮겠습니까?”

“응? 아아, 난 괜찮아요. 후미카가 좋다면야.”

 

그러자 두 사람은 제 뜻을 구하듯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는, 저도 모르게, 그만.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이고야 말았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 때 저는 이미 제가 무슨 결정을 내릴 것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게를 나와, 대로변에 위치한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2월이지만, 어째서인지 햇빛이 매우 따뜻했던 날이었기에, 우리는 카페의 1층에 마련된 야외 자리로 향했습니다.

저는 우유가 들어간 카페오레를, 그 사람은 자그마한 컵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앞에 두고,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시 중에서,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시를 읊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내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라고.”

 

낭송이 끝나고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습니다. 우리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위를, 도시의 바람이 한 웅큼 불어와 가볍게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잠시 후, 그 바람이 잦아들 무렵, 그는 눈을 뜨고 저를 다시 바라보았습니다.

 

“갈림길……선택에 관한 내용이군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두 가지 길 중 하나만을 선택했을 때, 그 선택의 기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그리고, 한 가지 길을 선택했다면, 나머지 하나를 포기해야 했던 것에 대해서 평생 후회를 하게 될 겁니다.”

“…….”

“지금 당신께서도 그러한 상황에 서 있어요. 어느 쪽을 고르더라도, 결국 후회를 하게 될 겁니다. 그 후회는, 지금 당신이 곧장 가려는 길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그에게서 받은 새 명함을 만지작거렸습니다. 까실한 종이의 감촉. 문고본에나 쓰일법한 두터운 종이의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아무도 가 보지 못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길은, 꽃의 비가 내리는 오솔길일수도 있지만, 가시덩굴과 독사가 우글거리는 험로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저는 당신에게 이 길을 권하고자 합니다.”

“어째서죠……?”

 

지금까지 즉답을 하던 그는 이번에는 입을 다물고 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읽게 될 책. ‘아이돌’이라는 책의 페이지는, 아직 펼쳐지지도 않았으니까요. 지금까지의 당신이 써 온, 당신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적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또 다시 잠깐, 말을 멈추었습니다. 늘어뜨린 앞머리 사이로, 그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 책의 뒷페이지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까지와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시도라도 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시도……말인가요?”

 

그것은, 반짝이는 눈이었습니다.

타카가키 카에데 씨의 사인회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었습니다.

'평일'의 그와도 다르고, '휴일'의 그와도 다른, 그의 세 번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와 함께할 수 있는 타카가키 카에데 씨가 너무나도 부럽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근사한 그 눈이,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네, 맞아요.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책이라는 정지된 세상에서, 숙부님의 서점이라는 숨겨진 장소에서, 저는 그저 안으로, 안으로, 숨어 들어가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서운걸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것에, 홀로 도전하기란, 너무도 무섭습니다. 마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용수철처럼, 저는 변화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라도……변할 수 있을까요?”

 

바람이 불어와, 장막처럼 늘어뜨렸던 저의 앞머리를 조금 걷어냅니다. 그렇게 훤히 드러난 저의 두 눈을, 그의 검은 눈동자가 똑바로, 곧은 눈빛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변할 수 있습니다. 제가, 반드시 당신을 변하게 해 드리겠어요. 그러니, 함께 펼쳐보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펼쳐보지 않은 페이지. ‘아이돌 사기사와 후미카’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는 저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대체 무엇에 이끌린 것인지, 저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맞잡으면서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프로듀서. 만드는 사람입니다. 제가 만들기로 결심한 이상, 당신은 무조건 될 수 있습니다. 안 되면, 들쳐 업고 가서라도 되게 해 드릴게요.”

 

저는 시선을 떨어뜨렸습니다. 도망칠 곳은 없다고 말하려는 듯, 그의 명함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

 

 

 

그렇게, 지난 1년간, 저는 당신과 함께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함께 땀을 흘리기도 하고, 함께 아파하기도 했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1년 전, 당신의 손을 잡은 것을 후회하지 않고 있어요. 오히려, 그 손을 잡기를 잘 했다는 생각마저 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보여준 세상은, 적어도 앞머리 사이로 바라보던 세상보다는 훨씬 더 멋진 곳이었어요.

 

“아, P군이랑 후미카잖아?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복도 쪽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수첩과 일기장에 각자 시선이 못박혀 있던 프로듀서 씨와 저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방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한 손에는 음료수 병을 들고, 나머지 한 손에는 작은 손가방을 들고 있는 미즈키 씨가 있었습니다.

프로듀서 씨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메시지 보냈잖아요. 기다릴테니까 휴게실로 나오라고.”

“엣, 진짜?”

 

프로듀서 씨의 말에 미즈키 씨는 휴대폰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낭패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엑, 진짜네……미안해. 그것도 모르고 스태프들이랑 이야기를 좀.”

“하아, 그랬을 거라 생각했어요. 아무튼, 사기사와도 기숙사로 데려다 줘야 하니까 어서 갑시다.”

 

프로듀서 씨는 수첩을 품 속으로 집어 넣으면서 벌떡,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늦지 않도록 저도 서둘러 만년필을 집어넣고, 일기장을 덮으며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그래, 집으로 갑시다!”

“카와시마 씨, 내일은 오전부터 촬영이니까 술 먹지 말고 바로 주무세요. 안티에이징 한 거 다 헛방되니까.”

“아, 알고 있어!”

 

미즈키 씨가 앞장서서 걸어가고, 그 반 걸음 뒤를 제가, 그리고 우리들의 가장 뒤에서 프로듀서 씨가 걷고 있습니다. 인원에 따라서 약간씩 바뀌기는 하지만, 단 한 가지. 바뀌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프로듀서 씨의 위치.

어떤 인원과, 어떤 그룹을 짜더라도, 그 사람은 항상 가장 뒤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따라오는 커다란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저는 한숨 지으며 이야기하겠지요.

두 갈래 길이 숲 속으로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요.]

 

두려웠냐구요? 당연히 두려웠죠.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후회는 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길을 걷는 것은 무서웠지만, 새로운 페이지를 펼치는 것은 두려웠지만, 그 길을 선택한 저의 등 뒤에는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저의 아군이 있으니까요.

 

 

<걷지 않은 길> 끝.

 

 

<밤 바다의 이정표>와 <사쿠마 마유의 회상>에 이어서 세 번째.

후미카와 프로듀서의 첫 만남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리메이크! 라고 선언해놓고, 대뜸 던지는 신규 스토리라는건 둘째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걷지 않은 길'에서 이거다!! 하고 떠올라서, 곧바로 시작해버렸습니다.

생각해보니 후미카는 이 시리즈에서 나름 비중이 있는 인물인데도 첫 만남의 이야기가 없더라구요.

그래서 한 편, 나름대로 거창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부디, 이번 이야기도 재미있게 즐겨주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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