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퍼스널리티P 시리즈]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下)>

댓글: 7 / 조회: 877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07-15, 2016 04:02에 작성됨.

[퍼스널리티P 시리즈] 카에데 < 밤 바다의 이정표(上) >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그녀에게 명함을 건넨 다음 날.

 

“끄으으윽…….”

 

사무용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시계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프로듀서 씨.”

“네.”

“정신 사나워요.”

“네…….”

 

치히로의 싸늘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목덜미에 꽂혔다. 나는 의자를 멈추고, 이번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씨.”

“네.”

“정신 사나워요.”

“네…….”

 

가늘게 뜬 눈초리와 함께 또다시 싸늘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나는 책상 서랍에서 큐브를 꺼내 사무실 구석의 소파에 앉아서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내가 큐브를 전혀 맞출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판사판으로 색상을 막 뒤섞은 다음 천천히 돌려 가면서 어거지로 색깔을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요령도 모르는 주제에 마음이 저기 저편으로 가 있는데 집중이 될 리가 있나. 큐브를 돌리면 돌릴수록 한 면조차 제대로 맞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읽고 있던 잡지를 내려놓은 치히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프로듀서 씨.”

“네.”

“대체 누구 연락을 기다리길래 이렇게 목을 빼놓고 계세요?”

“있어요, 그런 사람이.”

 

그 때, 내 책상에 있는 전화기가 벨소리를 울렸다. 치히로가 전화를 받기 전에 나는 잽싸게 자리로 달려가 먼저 수화기를 들어 올린다.

 

“네! CG프로덕션 아이돌 부서 프로듀서 P입니다!”

 

목소리가 좀 컸던 것일까, 아니면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일까. 옆에서 내 목소리를 들은 치히로가 풋, 하고 웃는 것이 느껴졌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대답하기에 앞서 호흡을 고르듯,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몇 번 반복하고 있었다.

 

[저기……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자 히죽히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저, 혹시 기억하시나요?]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바로 어제 만난 사이인데.”

[기억, 해주시는군요.]

 

당신의 목소리는 제가 한평생 못 잊을 겁니다. 라는 말은 목구멍 속에 담아두었다. 생각만 해도 느글느글거린다.

 

“네, 타카가키 씨. 연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기…… 혹시 가능하시다면 오늘 저녁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저 지금 썩어나는 게 시간이거든요.”

[다행이다……. 그럼, 7시에 회사 입구에서 뵈어요.]

“알겠습니다. 네, 그럼 그때 뵙죠. 연락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크게 한숨을 토해내며 내 의자에 몸을 던졌다. 바로 그 때,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치히로와 눈을 마주쳤다.

 

“프로듀서 씨, 방금 전화 여자였죠?”

“네.”

“너무 티 나게 좋아하는데요.”

“그야 당연하죠. 제가 지금까지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인데.”

“어머, 그게 누군데요? 애인?”

“비밀입니다. 비이밀~.”

“네에~. 그래요. 저 같은 노처녀한테 말해줄 건 없다 이거죠?”

 

이봐요, 지금 전화 온 사람 댁이랑 동갑이야.

못내 아쉬운 듯 입을 삐죽이면서 읽고 있던 잡지로 눈을 돌리는 그녀를 향해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나는 곧바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아아~ 나도 다른 어시스턴트처럼 일 하고 싶다……”

“곧 실컷 하게 될 겁니다. 기대하세요.”

 

나는 옷걸이에 걸쳐놓은 코트와 외근용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엇차, 그럼 저는 이만.”

“또 나가세요?”

“네, 양성소 트레이너들이랑 미팅이 있어요. 오늘은 양성소 갔다가 바로 퇴근할테니까. 치히로 씨도 시간 되면 들어가세요.”

“네. 아참, 프로듀서 씨, 내일은 결산회의 있어요.”

“벌써요? 아아, 그러고 보니 목요일이구나……감사합니다.”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며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양성소에 들러 1기 연습생들의 프로필을 확인하고, 트레이너들과 가졌던 회의를 마쳤을 때는 이미 약속 시간이 임박해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 본관의 입구로 헐레벌떡 뛰어가자,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하던 타카가키 씨가 나를 바라보며 살짝 목례를 했다.

 

“죄송합니다. 양성소에 잠깐 갔다 온다는 게 시간이 이렇게.”

“아뇨, 괜찮아요. 저도 방금 온 참이거든요.”

“으으……사과하는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제가 낼게요.”

“그럼 감사히 어울리도록 할게요.”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씨도 적당히 춥고, 해도 거의 떨어진 시간대.

지금이라면 역시 ‘그곳’이 좋겠지.

 

“식사 아직 안 하셨죠? 좋은 식당 있는데 가실래요?”

“네. 기꺼이…….”

 

그 때, 내 머리속에 어떤 가게가 떠올랐다.

 

“혹시 술, 좋아하십니까? 괜찮은 이자카야를 하나 알고 있는데…….”

“물론이죠!”

 

‘술’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그녀의 표정이 단박에 밝아졌다. 옳은 선택지를 골랐구나, 라고 생각한 나는 미리 머릿속에 담아 둔 그 장소를 향해 그녀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빌딩의 숲을 헤치고 10여분쯤 골목길을 헤매다 보면 간판은 없지만 멋드러진 니와노렌이 걸린 이자카야가 있다. 예전에 우연히 퇴근길에 길을 잃었다가 발견한 곳으로, 간판도 없고 가게도 작은 주제에 음식 맛은 기가 막힌 곳이었다.

 

“이런 가게가 있었군요.”

“네, 저도 우연히 발견한 곳이에요. 뭐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것 같지만요.”

 

노렌을 걷어올리자 줄에 매달린 방울이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반응해 주방에서 점원이 머리를 쑥 내밀었다. 씨익 웃으면서 목례를 하고,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점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주방으로 쑥 들어갔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타카가키 씨에게 자리를 권하자 그녀는 신기한 듯 가게의 여기저기를 살펴보면서 조심스레 의자에 앉았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경험자 분께 맡길게요.”

 

자리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자, 곧바로 점원이 따뜻한 물에 적신 물수건과 물컵 두 개를 가지고 우리 자리로 다가왔다. 나는 정식 2인분을 주문하고, 지갑을 꺼내 숫자와 서명이 적혀 있는 쪽지 하나를 그에게 내밀었다.

 

“저기, 혹시 술은…….”

“음식이랑 같이 나옵니다. 사케뿐이지만……아, 사케 혹시 싫어하세요?”

 

‘사케’라는 말에 반응해 그녀의 눈에 맺힌 반짝거림이 더욱 밝아졌다.

이 사람, 정말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저, 사실 사케 엄청 좋아해요.”

“잘 됐네요.”

 

저는 별로 안 좋아해요. 라는 말은 목구멍 속으로 조용히 삼켰다.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내뱉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

 

 

 

P씨가 안내한 곳은 제 예상보다 훨씬 멋진 곳이었습니다.

저도 이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근사한 이자카야는 금시초문입니다. 본인이 있는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기엔 미안하지만 저는 고급스러운 바나 레스토랑을 예상했거든요. 혹시나 비싼 곳이라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속으로 조금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주문하고, P씨는 고개를 돌려 다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안경 너머로 착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저를 응시합니다. 약간 들떠 있는 자신이 들킬까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궁금한 건 물어봐야겠어요.

 

“저기, 혹시 술은.”

“음식이랑 같이 나옵니다. 사케뿐이지만……아, 사케 혹시 싫어하시나요?”

 

‘사케’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마음이 들뜹니다. 이런 숨겨진 장소에서 파는 술은 보통 명가의 것이거나, 혹은 비장의 물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챈 것인지 P씨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습니다. 동시에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것을 느낍니다.

아무리 들떴다고 하지만 연장자 앞에서, 그것도 초면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무슨 소릴 한 걸까요……. 그래도 전등이 노란색이니 들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됩니다. 저는 고개를 푹 숙이고 탁자 아래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가게 내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자그마한 가게이지만 주방은 충실하게 갖춰져 있고, 벽장에는 비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술통이 몇 개 들어있습니다.

 

“타카가키 씨.”

 

그의 목소리에 저는 다시 시선을 되돌렸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뵙자고 한 용건을 여쭤 봐도 될까요?”

 

그의 질문에, 저는 잠시 호흡을 골랐습니다. 자신의 치부를 자기 입으로 말하는 데는, 생각보다 조금 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저, 실은 낯을 꽤 가리는 편이에요.”

 

대답 대신, 그는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제 이후로 이것저것 여쭙고 싶은 게 많았는데요, 저, 그게……직접 연락을 드리기엔 부끄러워서…….저,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술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횡설수설, 대체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제는 저도 잘 모를 지경입니다. 슬쩍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자,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마치 관찰하듯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죄송해요. 이런 여자, 역시 좀 이상하지요?”

 

그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그리고는 “역시 어른이네요”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칭찬을 들으니 괜히 쑥스러워져서 저는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습니다.

 

“저기, 이번에는 제가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말씀하십시오.”

“왜 저인가요?”

“음, 그거 어제 물어보신 것 같은데요.”

“저를 선택하신 이유를 듣고 싶어서 그래요.”

“구체적으로요?”

“네.”

“으음, 이거 곤란한데…….”

 

프로듀서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면서 음, 하는 신음을 흘렸습니다. 괜한 질문을 한 걸까요.

 

“저, 대답하기 곤란하시면 안 하셔도.”

“아뇨, 그렇게 곤란한 건 아닌데요. 그러니까, 그게…….”

 

늘 시원시원하게 이야기를 하던 그가 대답을 머뭇거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역시 괜한 질문을 한 걸까요. 라고 생각한 순간, 그가 입을 열었습니다.

 

“느낌 입니다.”

“네?”

“뭐라고 할까……그렇지, 팅, 하고 왔어요.”

“팅, 하고 왔다는 게…….”

 

호흡을 고르듯 말을 잠시 멈추고, 그는 두 팔로 탁자를 짚으면서 저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습니다.

 

“지금의, 목적지를 잃고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당신을 본 순간에, 느낌이 왔습니다.”

“어떤 느낌……인가요?”

“나라면 당신께서 찾아 헤매고 있는 당신의 길을 찾아드릴 수 있다는 느낌이요.”

 

그렇게 말하고 그는 다시 등을 꼿꼿이 폈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그의 곧은 눈동자가 다시 멀어져갑니다. 저는 무언가 더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지만, 마침 음식이 나온 탓에 그것은 약간 뒤로 미루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식사와 함께 병째 나온 것이. 두 병이나 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와모리네요? 그리고 이거는…….”

“매실주입니다.”

 

주문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어서 저는 주방을 한번 돌아보았습니다. 처음 들어오면서 인사를 했던 그 점원 분이 미소를 띤 얼굴로 맛있게 먹으라는 제스쳐를 취했습니다. 아무래도 정말로 우리 테이블에 나온 물건인 모양입니다. 이 정도면 꽤나 비싼 물건인데…….

 

“두 병 다 제 거에요. 걱정 말고 드세요.”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때마침 들려오는 프로듀서 씨의 말에 또다시 가슴이 뜁니다. 병에 붙은 라벨에 따르면 이건 25년은 된 오래된 것이고, 포장도 뜯지 않아 아직까지 숙성이 진행중인 고급 아와모리였기 때문입니다.

프로듀서 씨가 아와모리의 포장을 뜯고, 뚜껑을 개봉하자 제 자리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깊은 향이 솔솔 퍼져 나왔습니다. 그가 병의 입구를 제 방향으로 내밀자 저는 잽싸게 술잔을 꺼내어 그 아래에 갖다 댔습니다.

 

“매실주는 요전에 와카야마에 가서 사 온 겁니다. 식후에 한 잔씩 먹으니까 좋더라고요.”

 

프로듀서 씨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운 뒤, 커다란 병을 아래로 내려 놓고는 와카야마의 지도가 그려진 매실주를 조용히 탁자 옆으로 밀어놓았습니다. 저 병에 그려진 지도를 보니 최근 몇 달간 가지 못한 고향이 떠올랐습니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술과 함께 나온다는 것 때문인지, 요리는 정식 치고는 전체적으로 간이 강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싸구려 정식에 아와모리라는 호화롭지만 평범한 식사가 대충 마무리되자, 기다렸다는 듯 주방에서 나온 사장님께서 안주를 갖다 주셨습니다. 요리를 하느라 늘 불을 가까이 하기 때문인지 구릿빛 피부를 가진 사장님은 가만히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카운터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처럼 보이는 거구의 남자였습니다. 저런 덩치의 남자가 섬세한 손길로 요리를 한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웃음이 나올 뻔 했습니다. 프로듀서 씨와는 구면인 듯, 사장님은 요리를 마치고 주방에서 나오자마자 프로듀서 씨를 향해 농담을 던져 왔습니다.

안주로 나온 구운 은행과 오징어를 하나씩 집어먹으면서 저는 프로듀서 씨와 매실주를 한 잔씩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의 매실이 들어간 술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더 달콤하게 느껴집니다.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뭡니까?”

“어제 저녁, 스튜디오에 계셨죠? 제 촬영 순서일 때.”

“네. 그랬죠.”

“그 때, 안경이 반짝였던 것 같은데요.”

 

“아아, 그것 말인가요”라고 말하며 그는 안경을 벗었습니다.

 

“이거 때문이에요.”

 

가게 내부에 장식된 백열등의 노란 색을 받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안경을 내려놓고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켰습니다. 검지손가락이 가리키는 그의 왼쪽 검은자위는 마치 피가 고인 것처럼, 탁한 검붉은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고를 당해서 왼쪽 눈이 강한 반사광에 굉장히 약하거든요. 그래서 안경 렌즈를 조금 특수한 걸 씁니다. 물체에 반사된 빛을 어느 정도는 걸러주는 물건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안경을 집어들고는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그러자 정말로 한 순간이지만 반짝, 하고 렌즈가 빛나는 것이 보입니다. 저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습니다. 운명적인 무언가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우연이었군요.

 

“예전에도 몇 번인가 같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타카가키 씨도 그러는 걸 보면 정말로 반짝거리는 모양이네요.”

“저기, 그러면 차라리 안대 같은 걸 쓰는 게 낫지 않나요?”

“저 프로듀서잖아요. 안대 쓴 프로듀서가 스카우트하는데 누가 따라오겠습니까?”

“아……그렇겠네요.”

“뭐, 그래도, 저는 이런 거 좋아해요.”

 

P씨는 벗었던 안경을 다시 썼습니다. 그러자 왼쪽 눈이 다시 검은빛으로 돌아간 것이 보입니다.

 

“어두운 곳에서 반짝이는 빛. 꼭 별님 같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지었던 미소는, 마치 소년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가슴이 크게 뛰었습니다. 그 표정은 솔직히 반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실주의 병을 들어 술을 따르려던 P씨가 멈칫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병을 가볍게 흔드는 모습을 보아하니 술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전과는 달리 잔을 반 정도만 채우고, 그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음미하듯이 한 모금 정도 마셨습니다.

 

“저도 얘기 많이 했으니까, 이젠 타카가키 씨가 말씀 해주시죠. 상담할 거 있다면서요.”

 

이제는 저도 각오를 해야 할 때가 온 모양입니다. 저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 제 앞에 남아있는 술을 한 번에 쭉 비웠습니다.

 

 

********

 

 

지금까지 한 모금씩 짧게 마셔오던 타카가키 씨가 술잔을 크게 비웠다.

자그마한 입에서 뜨거운 숨을 토해낸 뒤, 조금 발그레한 표정의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만약의 이야기인데요. 만약, 제가 스카우트를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구체적인 대답을 원하십니까, 아니면 제 이상을 원하십니까?”

“……가능하면 둘 다, 듣고 싶어요.”

“그렇군요.”

 

나는 옆에 놓인 매실주 병을 바라보았다. 이제 딱 한 잔을 채우면 끝날 만큼 남은 매실주를 집어 비어있는 그녀의 잔에 술을 마저 채운 뒤, 나는 안경을 벗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특수가공된 렌즈가 사라지자 전반적으로 시야가 약간 밝아진 느낌이 든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이상은 당신을 최고의 아이돌로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25살인데요.”

“하하, 못 할게 뭐가 있나요. 25살 밖에 안 됐는데. 재능과 노력과 그에 걸맞은 보조만 있으면, 탑의 자리에 올라서는 건 생각보다 금방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는요?”

“글쎄요, 그거는…….”

 

나는 몇 개 남지 않은 구운 은행을 한 알 집어 삼켰다. 그녀는 대답 대신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업 비밀입니다.”

“에에…….”

“뭐어, 타카가키 씨가 저희 부서로 오면 그때 가르쳐 드릴게요. 하지만, 이 것만큼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자세를 기울여 좀 더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맑은 에메랄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당신은 더 밝게 빛날 수 있습니다.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길을 잃고 헤매이고 있었지만, 이제는 길을 찾을 때가 됐어요. 저와 함께, 진정으로 자신을 빛나게 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내 눈을 마주보던 그녀는 조심스레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저기, 얼굴이, 가까워요.”

“죄, 죄송합니다. 좀 흥분한 모양이네요.”

 

곧바로 자세를 다시 일으키는 내 눈에, 가게의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들어왔다.

 

“아, 이런.”

“무슨 일인가요?”

“저, 기숙사에 살거든요. 이제 곧 통금이 걸리는 시간이라서.”

“통금이라니……푸훗.”

“……압니다, 그 기분…….”

“미, 미안해요.”

“아뇨, 저도 웃긴 거 아니까요……이 나이 먹고 통금이라니…….”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의자가 바닥을 긁는 소리를 듣고 사장님이 주방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벌써 가려고?”

“네, 저 통금이잖아요.”

“다 큰 사내자식이 통금은 무슨 통금이야.”

“그러게 말이에요. 그 소리 우리 사장님한테도 좀 해 주세요.”

 

‘사장님’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구릿빛 거한은 입을 싹 다물고는 턱짓으로 수금함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얼른 가. 요금은 거기에 넣어놓고 가.”

“네, 잘 먹었습니다.”

“후훗, 잘 먹었습니다.”

 

가게를 나오자 취기로 달아오른 피부를 차가운 밤바람이 식혀주었다.

큰 길가에서 미리 불러둔 택시 앞에 서서 타카가키 씨는 한 손에 절반 정도 남은 아와모리 병을 든 채 나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오늘은 덕분에 즐겁게 즐겼습니다. 이렇게 좋은 선물도 주시고…….”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제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 못 먹었을걸요. 찾아 주신 덕분에 감사히 즐겼습니다.”

“좋은 이야기도 고마워요. 그래도,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네,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시길.”

 

다시 한번 꾸벅, 인사를 나누고, 그녀를 태운 택시가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기숙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그녀가 뜻을 정하는 데 1주일 정도는 걸릴 것이라 생각했다.

 

 

 

***********

 

 

다음 날.

 

 

“이봐, 거기 자네.”

 

결산회의를 마치고, 주문해둔 물건을 받으러 가기 위해 본관의 회의실을 나오는 순간, 내 바로 뒤를 따라 나온 남성이 나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보자, 나를 불러 세운 사람은 다름아닌 패션모델 부서의 부장이었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자네가 아이돌 부서의 프로듀서, 맞지?”

“네, 맞습니다.”

 

직책상으로는 나도 일개 부서의 부서장이지만 나는 이제 막 업계에 들어온 애송이. 나보다 끈이 긴 사람에게 밉보여서 좋을 일은 없다.

 

“자네가 카에데를 빼가기로 했다며? 회의에 올라오기 전에 그녀가 직접 찾아와서 아이돌 부서로 이적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더군.”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내심 굉장히 놀랐다. 설마하니 하루 만에 결단을 내릴 줄이야.

 

“네, 그렇습다만……분명히 본인의 동의가 있었고, 그 부분은 서류로 곧…….”

“아아, 그게 아닐세. 그 뜻이 아니야.”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내 말허리를 끊었다.

 

“내 말은, 정말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걸세.”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고맙다’ 라고?

 

“……무슨 뜻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가 우리 잡지의 간판 중 하나인건 사실이야. 하지만, 이제 우리 잡지의 독자들도 연령층이 점점 낮아지고 있네.”

“그렇지요. 그 부분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 같은 성인 모델보다는, 독자들과 연령대가 비슷한 틴 모델 위주로 라인업을 개편하려고 했지.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약간 처치하기 곤란한 사람이었어. 아직 계약기간이 조금 남아 있어서 이 쪽에서 일방적으로 자르기도 힘들었거든. 몸값이 싼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그 말에 나는 헛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눌렀다.

단순히 독자들의 연령대가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정도의 지명도를 가진 사람을 처치하기 곤란한 짐짝 취급을 하다니. 사장님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놈을 부장 자리까지 올려놓은 거지?

 

“그런 그녀를 위약금을 줄 필요도 없는 자네 부서에서 데려가 주었다는 말일세. 어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

“그랬군요. 이것 참, 감사합니다.”

 

요컨대, '땡처리'라는 것이다. 생긴 것 처럼 생각하는 모양새도 영 밥맛이 없다.

하지만 생각은 생각에서 멈춰야만 한다.

최대한 웃는 낯짝을 유지하면서 깊게 허리를 숙이는 한편, 눈 앞의 꼰대의 눈에는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있는 힘껏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끓어오르는 내 이성이, 그리고 내 얼굴이 웃음을 붙잡고 있을 수 있도록.

 

“하하하,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게 이런 것 아니겠나. 자네는 자네대로 좋고, 우리는 짐짝 하나를 덜었으니 좋고. 그럼 이만, 나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네.”

“네, 살펴 가십시오.”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헛기침을 하며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또다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면서 나는 남몰래 조용히 어금니를 악물었다.

비록 자신에게 맞는 길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카에데는 최대한 열심히,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모델이라는 길을 걸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그녀는 적어도 도쿄와 그 인근 도시에서는 상당한 지명도를 자랑하는 인기 모델이 될 수 있었다. 스스로의 모티베이션도 없이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기만 하는 것으로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적잖은 고통과 인내가 필요했을 터.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을 저 정신 나간 꼰대는 고작 ‘짐짝’이라는 단어로 일축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그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기는 커녕, '땡처리'같은 헛소리나 늘어놓고 있었다.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 나는 고개를 들어 멀어지는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딱히 잃을 것도 별로 없던 저번 달의 나였다면 곧장 달려들어 주둥이라도 한 대 갈겼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잃을 것이 많은 남자였다.

 

‘두고 보시지, 내가 반드시 그녀를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을 테니까. 네가 짐짝이라고 가벼이 대했던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 때가 되면 너도 다시 알게 될 거다.’

 

나는 허리를 펴고, 목을 빙빙 돌려 잔뜩 힘이 들어간 어깨의 힘을 풀었다. 때마침 업무용 휴대전화에서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켜자, ‘손님’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치히로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손님? 올 사람이 있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고 나는 본관 1층의 로비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왔습니다. 엇차!”

 

잠시 후, 로비에서 받은 물건을 들고 사무실에 도착하자, 자리에 앉아서 업무를 마무리하던 치히로가 재빨리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다녀오셨어요? 어머, 이게 웬 거에요?”

“스케줄 보드입니다. 이제 필요할 것 같아서 며칠 전에 주문했거든요.”

“제법 큰데……이거 정말로 혼자서 들고 오신거에요?”

“하하,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 스케줄 보드는 소파가 있는 벽에 걸어놓을 것이므로, 우선은 소파 뒤쪽에다가 보드가 든 박스를 세워놓은 뒤 나는 가방 속에서 종이다발을 꺼내 치히로에게 내밀었다.

 

“이번 결산회의 내용이에요. 별 다른 건 없지만, 저희 부서 내용도 있으니까 한 번 읽어보시고 제 자리에 놔두시면 됩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아, 그나저나 손님 있다면서요? 누구에요?”

“혹시 들어보셨어요? 패션모델 부서의 타카가키 카에데 씨라고……”

“아아,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좋은 그녀의 행동력에 내심 감탄했다.

 

“그럼 다행이네요. 타카가키 씨도 프로듀서 씨를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그 분은 지금 응접실에 계시니까요, 한번 가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아차, 마실 거 필요하세요?”

“아뇨, 회의실에서 하도 뭘 많이 먹어서요. 괜찮아요.”

 

사무실과 문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응접실에 들어가자, 접대용으로 설치된 둥근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하여 그녀가 이쪽을 돌아본다.

 

“안녕하세요.”

“하하, 안녕하세요.”

 

품 안에 서류봉투를 끌어안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그녀의 두 눈은 어제와는 다르게 청록색과 연녹색이라는 각자 다른 색상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으응?”

“아뇨, 저도 방금 온 참이에요……?

 

마치 데자뷰처럼, 어제 저녁에 했던 인사를 똑같이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녀와 나는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웃음이 잦아들자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이적 서류에요. 필요하다고 하니 우리 사무실에서 준비해 주더라구요.”

“그렇군요.”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이적에 필요한 서류는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역시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던 건가’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내 스카우트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이 서류와 함께 향한 곳은 그녀의 고향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의 성격상, 반쯤 억지로 쫒겨나간 업계에서 다른 회사를 찾아갈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내 사적인 감정을 그녀에게 들켜서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크게 날숨을 내쉰 뒤,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억지로라도 대화를 이어나갈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나저나 역시 어제는 컬러 렌즈를 끼고 계셨군요.”

 

 

************

 

 

 

제가 내민 서류를 훑어본 P씨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서류를 다시 봉투 속으로 되돌렸습니다. 아마도 저 정도면 충분하다는 뜻이겠지요. 잠시 가볍게 날숨을 내뱉고, 프로듀서 씨는 저의 두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의 저는 컬러렌즈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실은 모델 부서에서 서류를 받아 올 때 까지는 렌즈를 끼고 있었습니다. 모델로 데뷔를 할 때는 제가 홍채 이색증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눈 색이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어제까지는 함께 일했던 매니저 씨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거기에 두 사람이 더 늘었습니다.

 

-카에데는, 만약에 모델을 그만둔다면 뭘 할 거야?

-나는......글쎄, 자그마한 가게를 열고 싶어. 에스테나, 아니면 미용실 같은 거.

 

그 때, 머릿속으로 매니저 씨와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직전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때만 하더라도, 제가 이렇게 아이돌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 했지요. 그러고 보면 매니저 씨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부서 사무실을 돌아다녀도, 오늘은 휴일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휴대전화 번호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P 씨가 흥미로운 듯 저의 눈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나저나 역시 어제는 컬러 렌즈를 끼고 계셨군요.”

“눈치채고 계셨어요?”

“반짝이는 모양새가 조금 인공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절반은 그냥 직감이었지만요.”라고 덧붙이면서, P씨는 멋쩍은 듯한 웃음을 흘렸습니다.

 

“아무튼, 저희 아이돌 부서에 와 주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식적으로 다시 인사드릴게요. 오늘부터 당신의 프로듀스와 매니지먼트 일체를 담당하게 될, 프로듀서 P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저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손을 맞잡자, 마치 저의 아버지의 손처럼 겉보기보다 훨씬 투박하고 훨씬 거친 손바닥의 감촉이 느껴졌습니다.

 

“네, 이제부터 모쪼록 잘 부탁 드려요. P씨. 아니, 이젠 프로듀서 씨인가요? 후훗.”

“저야말로 잘 부탁 드립니다, 타카가키 씨. 함께 정상을 향해서 가 보죠.”

 

악수를 나눈 채 우리는 또 다시 서로를 향해 마주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중, 갑자기 P씨……아니, 프로듀서는 맞잡은 저의 손을 두 손으로 고쳐 쥐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듯, 나직하게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당신을 정상의 자리에 올려놓겠습니다. 그 누구라도 돌아볼 수 있도록…….”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마치 고백처럼 들려오는 그의 뜨거운 이야기를 듣고, 저는 비어있는 왼손을 맞잡은 그의 두 손 위에 얹었습니다.

 

“네, 기대하고 있을게요, 나의 프로듀서.”

 

 

 

 

 

그 날 저녁, 저는 정말로 모처럼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는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끼면서, 저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그리고 지금부터 하려고 하는 일을 말씀 드렸습니다.

 

“그래서……저, 모델은 관두고 아이돌을 해보려고 해요.”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이제는 저만의 이정표를 찾았으니까. 이제 더는 헤매지 않을 거에요.”

[……그래, 네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것 또한 너의 길이 된단다.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하거라.]

“네, 고마워요.”

 

전화를 끝내고, 저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나를 불러 들여 준 등대에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입니다.

 

 

<끝>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는 그저 만들어놓은 인물을 우려먹기 편하기 때문에 편의상 [~~시리즈]를 붙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쌓이고, 막연하게 만들어놓은 인물의 설정이 조금씩 구체화되면서 처음에 썼던 이야기의 부실함이 눈에 밟히더라구요.

그래서 리메이크를 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글을 쓰면서 시간대와는 맞지 않고 순서가 난잡하게 올라왔는데요, 지금부터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제가 생각했던 '메인 스트림'까지는 가능한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이야기를 진행해보려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