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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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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7, 2012 16:06에 작성됨.

[도, 도와주세요!]

이것과 같은 내용의 문자를 받은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그땐 미키와 히비키의 장난이었다고 해도, 이번엔 하루카가 직접 전화를 했으니 분명히 뭔가 급박한 사건이 벌어진 것 같았다.

“뭐야? 왜 그러는데?”

[야구선수 씨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에요. 지금 바쁘시지 않다면…]

순간, 가면 또 엄청나게 귀찮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그래도 진짜 급한 일일지도 모르는데다, 현역 아이돌에게 ‘내 도움이 꼭 필요하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가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라는 느낌도 들고.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와주시는 건가요? 감사합니다!]

“사무소지?”

[네! 그럼 기다릴게요!]

아아… 나도 정말 많이 물러졌구나. 그래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지만. 아이싱을 푼 다음 옷을 갈아입고 갈 채비를 했다. 또 뚜껑만 따놓은 맥주 캔이 너무 아까워서 마시고 가려다가 음주운전은 안 될 말이기에 대충 비닐로 봉해놓고 나왔다.

사무소에 도착하니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았는지 한 반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중에 남아있던 하루카와 야요이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하는 것이 보였다.

“야구선수 씨. 정말 와주셨군요. 고마워요.”

“아니. 온다고 했잖아. 근데 무슨 일 때문에 그래?”

“그게…”

하루카의 얘기인즉슨, 함께 행사의 오프닝을 장식하게 될 유키호가 남자들이 득시글댈 것이 자명한 친선 야구대회의 스테이지에 서는 걸 벌써부터 두려워하고 있다는 거다. 듣는 순간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뒤이어 이어진 하루카의 설명-그나마 나와는 익숙한 것 같으니까-에 조금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럼 나보고 유키호의 그 남자를 어려워하는 성격을 고치게 도와달라는 말?”

“그래요.”

“어떻게 고칠 건데?”

하루카도 아직 그것에 대해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야요이와 함께 서로를 마주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했다.

“일단… 지금 유키호랑 리츠코 씨가 얘기를 나누고는 있는데…”

이야기 도중에 누군가 이쪽으로 오는 것 같은 느낌에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의아한 표정의 치하야가 서있었다.

“하루카. 타카츠키 씨. 무슨 일이야. 야구선수 씨는 언제…”

“유키호가 남자를 어려워하지 않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 중이다.”

“아. 그런 거라면…”

그런 거라면? 의외로 치하야가 좋은 의견을 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와 듀엣을 시켜본다던가.”

“앗. 그거 좋을지도!”

“그, 그렇게 생각해? 타카츠키 씨.”

“네!”

“안 돼. 듀엣이라고 해봤자 결국 나랑 유키호가 불러야 된다는 거 아냐. 나 노래 못 불러서 안 돼.”

내 말에 치하야는 조용히 나를 보더니, 

“그럼 보컬 트레이닝부터…”

“노래 배울 시간에 이미 행사 시작하겠다. 다음 주 주말은 의외로 빨리 다가온다고. 주객전도란 말이 듣고 싶냐?”

내 말에 치하야의 표정 없는 얼굴이 더욱 어둡게 변한 것 같았지만, 굳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음… 그럼. 충격요법은 어떨까요?”

이번엔 하루카의 의견이었다. 충격요법이라… 대충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요…”

하루카는 뭔가 작당모의를 하는 것처럼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을 가까이 오게 한 후에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좀 민망하긴 한데 어차피 도와주기로 했다면 최선을 다해봐야지.

이야기가 끝난 후, 네 사람은 조용히 유키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곧 방의 문이 열리고 리츠코와 함께 유키호가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나왔다. 

“야구선수 씨! 가는 거에요!”

“좋아. 해볼게.”

나는 곧바로 나를 발견한 리츠코의 인사도 무시하고 유키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 내 행동에 깜짝 놀란 유키호의 바로 한 발자국 앞까지 다가간 후에, 그녀의 양 어깨를 턱하고 붙잡은 다음 최대한 강렬한 눈빛을 하고 유키호와 눈을 마주쳤다.

“히끅!”

유키호는 당연히 기겁을 하며 내게서 빠져나가려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지만, 나는 그녀의 어깨를 꼭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느끼한 목소리로…

“유키호…”

라고 속삭였다. 그랬더니 유키호는 처음엔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휙휙 내젓더니, 그것도 여의치 않자 결국 몸을 부들부들 떨며…

“윽. 으흑…”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무엇보다 당황한 건 나였다. 깜짝 놀라 어깨에서 손을 떼고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하루카를 바라보았지만, 하루카는 역시나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거에요?”

고장이 난 태엽인형처럼 고개를 뻣뻣하게 돌려 리츠코를 보았다. 리츠코의 표정은 미키와 히비키가 미우라 씨 휴대폰으로 장난을 쳤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표정이었다. 

사무소 안은 고요했다. 유키호의 우는 소리를 빼고는.



“정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무턱대고 들이대면 곤란하죠.”

결국 리츠코의 잔소리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야요이가 끼어들어 사정을 설명해주는 바람에 나는 살 수 있었다. 대신 하루카가 내 위치에 들어가긴 했지만,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그 이후, 소파에는 나와 야요이와 치하야, 리츠코, 그리고 하얗게 탈색이 된 것 같아 보이는 하루카와 아직도 훌쩍이는 유키호가 앉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미안하다. 유키호.”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죄송해요오…”

“아니. 니가 내게 사과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심각하긴 심각하구나. 남자공포증 그런 게 아니라 일단 성격이 너무 소심해. 뭔가 방법이 없나. 아니. 일단 본인의 생각이 중요한 거 같은데.”

“예…?”

유키호는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아직도 내가 한 짓거리가 머릿속에 남아있는 모양이다.

“넌 지금의 이 상황을 타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야?”

유키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그녀치고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그러려고 아이돌이 된 거니까요.”

“그래… 그럼 한 번 고민해보자.”

그렇게 도합 여섯 명이 소파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야요이가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서는 방긋 웃으며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다.

“웃우-! 저. 좋은 생각이 하나 났어요!”

라며 갑자기 유키호에 귀에 대고 뭐라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왜 귓속말로 하는 거야? 야요이의 말을 듣던 유키호의 표정이 일순 사색이 되더니, 곧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야, 야요이쨩. 그건 조금 무리라고 생각해…”

“뭔데? 야요이.”

하루카의 물음에 야요이는 하루카에 귓가에도 수군거렸고, 그 말을 들은 하루카는 유키호와는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그거 괜찮을지도 모르겠네! 어때. 유키호. 한 번 해보자. 응?”

“하,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나도 같이 할 거고, 여차하면… 아 그래! 치하야쨩. 잠깐만 귀를…”

이번엔 하루카가 치하야의 귀에 뭔가 이야기했다. 그러자 치하야는 잠시 침묵하더니,

“난 괜찮아. 얼마든지.”

라고 대답하여 내 궁금증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궁금해 하는 동안 하루카는 유키호를 부단히 설득하더니, 마침내 성공했는지 빙긋 웃으며,

“야구선수 씨. 뭐든지 도와주신다고 하셨죠?”

“그래.”

“뭐든지.”

“그, 그, 그래.”

뭔가 엄청 불안했지만 그래도 대답하기로 했다.

“그럼 됐네요! 내일 하루. 잘 부탁드릴게요!”

내일 하루? 뭔 소릴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의 나는, 다음날에 어떤 사건이 벌어질지 추호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웬일인지 새벽같이 눈이 떠진 덕분에 아침 러닝을 한 번 하고 온 다음 샤워하고 다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났다. 감기려는 눈을 간신이 떠서 시계를 보니 아침 9시. 어떤 멍청인지 몰라도 이 시간에 웬 벨이야. 신문권유이거나 했다간 진짜 죽일 거야.

“누구… 흐아암… 누구세요!”

“아마미 하루카입니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잠기운이 대기권 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느끼며 인터폰을 확인했다. 
틀림없는 하루카였다. 게다가 유키호까지 있었다.

“여, 여여여여여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치하야쨩이 주소를 가르쳐줬어요. 바로 옆집이니까요. 방금 치하야쨩도 만나고 왔어요.”

“으아야이이게뭐야잠깐만. 나 지금 상황파악이 전혀 안 되고 있거든?”

“야요이가 말한 것이 바로 이거에요. 형제자매들이 한 집에서 우애를 다지는 것처럼, 유키호도 야구선수 씨 집에서 하루 같이 붙어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남자에 대한 면역이 생기지 않겠냐고 했거든요.”

발상이 너무나도 야요이다워서 끔찍했다. 순수의 결정체 같은 야요이라면 분명 그에 따른 리스크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런 말을 했겠지. 아니. 리스크라는 말이 뭘 뜻하는 건지도 모를 거다. 
그렇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듣는 하루카도 참…

“이건 여러 가지 의미로 하이 리스크 로우 리턴이라고 생각하는데…”

“으으… 야구선수 씨. 죄송한데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들고 온 게 많아서…”

하나도 안 듣고 있는데다가 뭔가 엄청나게 싸들고 온 모양이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내쫒을 수도 없고, 문을 열어주려 현관 쪽으로 향하다 그제야 내가 달랑 트렁크 팬티 하나만 입고 있는 걸 깨닫고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 티와 반바지를 대충 걸쳐 입은 다음 다시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어, 엄청나게 누추하지만 일단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시, 실례하겠습니다아…”

세상에 내 집에 여자를, 그것도 현역 아이돌을 둘이나 들이게 될 줄이야. 이건 정말 문화적 충격이다. 컬처 쇼크!
그녀들이 들어온 후에도 한동안 멍하니 그녀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집안을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개판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돼! 잠깐! 어, 어어어어어그래! 저기! 저기 잠깐 들어가 있어!”

“에? 에에? 에에에에??”
두 사람의 당황한 표정을 무시하고 화장실 안에 쑤셔 넣듯이 밀어 넣었다. 아침에 큰일을 보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맹렬한 속도로 집을 정리했다. 빨래감은 모조리 세탁기에 처넣은 다음, 침대를 정리하고 주변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빈 맥주 캔을 모아서 비닐봉지에 처넣고, 설거지까지 마친 후에 드디어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조용히 화장실 문을 연 다음, 그 자리에서 바로 도게자를 했다.

“죄송합니다.”

“어, 어떻게 숙녀 둘을 화장실에엣-!”

하루카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버럭 소리쳤다. 이대로 하루카와 유키호가 내 머리를 밟아도 나는 할 말이 없었기에, 그저 넙죽 엎드린 자세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하루카와 유키호답게, 두 사람은 곧바로 나에게 일어날 것을 권했다. 역시 통하는 건가. 도게자만능설. 하지만 이 둘이니까 그렇지, 이오리의 저번 발언을 미루어보아, 만약 이오리였다면 곧바로 허리 벨트를 풀어 내 등짝을 후려갈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발… 온다면 온다고 말을 하라고. 솔직히 어제 하루카 네 말에서 살짝 뉘앙스를 느끼긴 했다만, 그래도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시작한다면 최대한 빠른 게 좋은 것 같아서요. 안 그래도 오기 전에 분명 전화를 드리려 했는데…”

“했는데?”

“그 순간 넘어지는 바람에 깜박 했다고나 할까… 에헤헤.”

“웃지 마.”

일단 애들을 앉혀야 하는데 내 집에는 의자가 없다. 침대에 앉힐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석을 찾아내(찾는데 5분은 걸렸다.) 바닥에 깔고 앉게 했다.

“자. 그래서. 이제부터 뭘 하면 돼?”

“에? 아. 야구선수 씨는 그냥 평소대로 있으면 돼요. 단. 뭐든 유키호와 함께!”

“그걸로 되겠냐?”

“어… 안하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해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던 유키호를 바라보니, 녀석은 벌써부터 갑자기 발병한 복통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유키호… 우리 집에 별다른 바이러스 같은 건 퍼져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아, 아니! 그, 그게 아니라… 여긴 어, 어쩐지 안정이 안 된다고 할까… 아니. 그건 야구선수 씨 집이 나쁜 게 아니라 그게, 제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자니 배가 고팠다.

“에? 야구선수 씨 아침 안 드셨나요?”

“응. 방금 전에도 자다 일어난 거니까.”

“그럼 아까 전의 설거지거리는…”

“그건 당연히 어제 꺼지.”

“으에…”

하루카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했다. 그건 혼자 살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야구선수 씨는 저녁에 그리 바쁘지 않잖아요.”

“…내 등에 비수를 꽂지 마. 그리고 어제는 너희 사무소에 갔다 왔잖아.”

“그걸로는 변명이 안돼요. 그다지 늦지도 않았고.”

하루카는 내 코앞에 집게손가락을 척 들이대며 말했다. 할 말이 궁해져버린 나는 시선을 유키호에게 돌리기로 했다.

“정말 괜찮겠냐, 유키호?”

“노, 노력해볼게요오. 익숙해지도록.” 

“힘내. 그럼 난 아침이나 먹어야지. 니들은 먹었냐?”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부지런한 애들이군. 이라고 생각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뭔가 텅 비어있었다. 그랬지. 생각해보면 어제 마지막 맥주 캔을 따면서, 냉장고가 비었으니 슬슬 채워 넣어야겠다. 라고 생각했었지.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아. 하늘은 저렇게 푸른데 왜 내 냉장고는 텅 비어있는 건지. 하늘이 야속하다.

“…뭐하세요?”

“잠깐 나갔다와야겠어. 냉장고가 비었어.”

“네? 후후… 저희가 힘들게 들고 왔던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나는 그제야 두 사람이 가지고 왔던 불룩한 비닐봉지로 눈을 돌렸다. 
저건 분명히 찬거리다.

“저, 저거!”

“네! 야요이의 말대로라면 최대한 남매같이 지내야 하니까요. 저도, 유키호도 오빠가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한 가족이라면 역시 여동생이 오빠에게 밥을 차려주는 게 아닌가 생각해서요.”

“뭣이?”

“에… 틀린가요?”

“정답!”

나도 여동생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게 맞는 것 같다. 절대로 내가 밥하기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고. 뭔가 여자가, 여고생이, 아이돌이 아침밥을 해준다는 건 모르긴 몰라도 남자에겐 거의 그랜드캐니언급 로망 아닌가!

“좋아! 그랜드캐니언!”

“에…?”

“아니. 흘려들어. 어쨌든 그렇다면 염치불구하고 부탁할게.”

“네! 그럼 부엌 좀 빌릴게요. 가자. 유키호.”

“응.”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세상에. 내 평생 아이돌이(무명이긴 하지만) 집에 찾아와서 아침밥을 해주는 일이 올 줄이야. 누군가에게 미친 듯이 자랑하고 싶었다. 친구들에게 보내볼까 생각해봤지만 이놈들이 믿어줄 리 없고, 그렇다고 누나한테 보낼 수는 없고. 어머니한테 보내는 것 역시 별로고… 그렇다면…

나는 곧바로 베란다로 달려가 문을 활짝 열고 힘차게 외쳤다.

“I`m king of the world-----!!!!!!!!!”

있는 힘껏 괴성을 지르고 안으로 들어오니, 하루카와 유키호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게 크게 소리쳤는데 못들었을 리가 없지.

“지금… 뭐하신 거에요?”

“타이타닉.”

“에에?”

“타이타닉이라니까.”

하루카는 더 이상 별다른 말없이 요리에 집중했다. 유키호의 나를 보는 시선에 경계심이 더해진 것 같아 슬퍼졌다.



“짜잔-! 다 됐습니다-!”

두 사람이 내온 아침반찬은 의외로 푸짐했다. 나는 상상을 초월한 스케일에 놀라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 이거 비싸지 않아? 너희들이 돈이 어딨다고…”

“아니에요. 그다지 부담되지는 않았으니까. 그 동안 저희들을 위해 힘써주신 보답이라고 할까. 에헷.”

“아니. 그래도… 고기반찬이라니…”

“저희는 그래도 수입이라도 있지만, 야구선수 씨는 별다른 수입도 없으실 것 같으시고…”

나는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기껏 저번에 아미와 마미의 오해를 풀었다 싶더니 이젠 새롭게 오해하는 녀석이 둘. 다들 백수=가난으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대체 그 이유가 뭐지? 애초에 돈 없어서 쩔쩔맸으면 이 맨션에 살지도 않았을 텐데 왜 그걸 생각 못하는 건가.

“야구선수 씨…?”

“호의는 정말 고맙지만, 난 거지가 아니야. 기억해둬.”

“…? 네.”

생각해보면, 애들 앞에서 늘어놓은 건 돈 얘기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번 달 들어서 수십 번은 생각하는 것 같지만 이놈의 입이 문제다.

“좋아. 그러니까 그 망할 돈 얘기는 넘어가고. 일단 맛을 보도록 하겠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기감자조림을 한 젓가락. 그러자 하루카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그거 유키호가 만든 거에요!”

“그래? 어디 한 번.”

유키호는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약간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내가 자신의 작품을 먹는 것을 보고 있었다. 뭔가 동물원 원숭이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좋은 기분으로 조림을 입에 넣었다.

……………

이, 이건-!
마음속에… 비가 내린다…

“어… 어때요?”

유키호로서는 꽤나 용기를 낸 한마디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야구선수 씨…?”

“내, 내가… 내가 원래 눈물이 없는 사람인데… 눈물이 다 날라고 하네.”

하루카와 유키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런데 어째 두 사람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져 보이는 게, 아무래도 밥에서 나온 김 때문인 것 같았다. …라기보다는, 이미 앞에서 눈물이 나려고 한다고 언급해놓고 이제 와서 핑계 댈 수도 없는 일이지만.

“맛있어… 집 나온 이후 이런 맛은 처음이야…”

내 말에 하루카의 표정이 확 밝아졌고, 유키호의 표정 역시 내 집에 온 이후 처음으로 웃음기를 머금었다. 유키호를 단련시킨다고 한 건데 어째 내가 가장 이득인 기분인걸. 
어쨌든, 그 이후로 나는 눈물을 머금고 그 자리에서 밥 네 그릇을 비워냈다. 처음엔 좋아하던 녀석들도 나중 가자 거의 질린 듯한 표정이 되어, 내게 자제를 요청했기에 그제야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평소 하던 대로 설거지거리를 쌓아놓으면 또 자기네들이 한다고 할 게 분명했으므로,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거의 자동적으로 설거지 역시 하겠다며 두 사람이 나섰지만, 나는 억지로 떠밀다시피 하며 그녀들을 자리에 앉혔다. 
분명 그랬을 텐데…

“유키호?”

유키호가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서있었다. 

“오, 오늘은 뭐든 야구선수 씨와 함께 하기로 했으니까… 역시 설거지도 같이…”

“음… 뭐. 그렇다면야.”

그렇게 둘이서 설거지를 하는데… 뭔가 더럽게 어색했다. 이건 유키호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더 신경이 쓰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유키호.”

“예? 예에…”

우와. 엄청난 어색함. 하긴 나도 나를 어려워하는 유키호와는 그동안 그다지 얘기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다른 녀석들과는 꽤나 친분을 쌓았다고 생각하지만 치하야와 유키호와는 별로 교류가 없다고 할까. 그것마저도 치하야는 옆집이니까 어떻게 자주 보기라도 하는데 유키호는 그것도 아니다.

결국 나와 유키호는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설거지를 마친 후, 셋이 같이 앉아있자니 할 게 없었다. 뭔가 할 얘기라도 만들어야 하는데 내가 할 얘기라고는 야구에 대한 것 밖에 없다. 노히트노런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과 야구얘기를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또 하루카와 유키호의 분야인 뭔가 여학생적인 이야기를 하기엔 내가 못 따라간다.

10분정도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가 하다못해 밖에 나가던지, 최후의 수단으로 셋이 치하야의 집에 쳐들어갈까 생각까지 하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야구선수 씨. 저… 오늘도 죄송하지만…”

“당장 갈게--!!!!”

마코토의 목소리가 나를 구원하러 온 천사의 목소리처럼 들린 것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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