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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없는 세상에서 <안즈편>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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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7-01, 2016 17:32에 작성됨.

네가 없는 세상에서 <안즈편> 上 보러가기

 

앙상블스타즈 유닛송 - Checkmate Knights Piano cover

※ 어디까지나 작가가 글을 쓰면서 들은 작업용BGM입니다. On / Off 는 자유롭게 선택해주세요.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갑자기 몸이 편안해지며, 눈부신 빛에 휩쓸렸다

 어라?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안락함이었지?

 온갖 야생화가 만개한 초원.

 이곳에선 순백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아이. 춤을 추는 아이. 그림을 그리는 아이. 동물과 뛰어 노는 아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 장소에 있는 것 만으로도 편안했다.

 그렇게 난 한참을 그저 풀밭에 누워서 그 아이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나도 뭔가를 해야 하나

 그런 조급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조급함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두려움을 낳기 시작한다.

 이윽고 아이들의 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나는 손을 뻗어 외쳤다.

 안돼!

 뭐든지 할 테니까!

 열심히 할 테니까!

 가지마!

 제발!

 리카!

 미리아!

 카나코!

 치에리!

 프로듀서!

 

 ……키라리……

 

 

***

 

 

 새하얀 빛은 어느새 새하얀 천장이 되어 있었다. 하얀 철제 침대, 하얀 이불, 밑이 동그란 원통형 유리용기에 담긴 샛노란 링거액. 정면의 시계바늘은 6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창 밖의 하늘에선 일출하는 주황빛의 태양이 보였다.

 “가지마! 제발…..안즈쨩까지 떠나버리지 말라고……”

 옆에서 흐느껴 울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제멋대로에, 어리광쟁이에, 그래도 가끔은 어른스러운 그 금발의 아이.

 “후에……?”

 눈물 범벅이 된 리카와 눈이 마주쳤다. 리카는 손등에 링거가 꽂혀있는 안즈의 왼손을 꼭 잡고 있었다.

 꽤 따뜻하다.

 옆에는 미리아와 프로듀서가 서있었다. 거기다 미쿠에 나나씨까지?

 “후타바씨의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미, 미쿠가 의사선생님을 모셔오겠다냐! 가! 아니라! 모셔올게!”

 “미쿠쨩!? 그쪽 아니에요!”

 이런 상황에도 자동으로 냥체가 나오는 거냐……아니 그게 미쿠답긴 하지만. 그리고 방향을 잘못 튼 미쿠를 따라 나나씨까지 병실을 나가버렸다.

 “아, 안즈쨩……다행이야……”

 안즈에게 머리를 대고 울음을 터뜨리는 리카. 꾹 참고 있던 안즈는 도저히 안되겠어 리카에게 조용히 말했다.

 “리카쨩.”

 “…..응?”

 “……손 아파.”

 “헉! 미안해!”

 리카의 손이 안즈의 손등에 꽂혀있던 주삿바늘을 압박하고 있었기에 꽤 아팠다. 하지만 리카가 어쩔 줄 몰라 하기에, 안즈는 쑥쓰러움을 무릅쓰고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그……고마워.”

 “응!”

 그러자, 리카가 얼굴을 닦으며 밝게 웃었다. 안즈는 예전 병실에서 키라리의 손을 잡고 울고 있었던 리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미리아가 안즈의 이마를 잡으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안즈는 건강하다구?”

 분명 2년전의 키라리도 그렇게 대답했었지. 사실은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방금 꾼 이상한 꿈을 제외하자면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새벽에 프로듀서와 함께 촬영지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 아무래도 그때 잠들었던 건가, 하지만 안즈는 왜 병원에 누워 있었던 거지?

 “프로듀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기절하셨습니다.”

 그답게 짧고 단호한 대답.

 “응, 뭐 그럴 거라곤 생각했어. 지금은 아침이야?”

 “…...저녁입니다.”

 ……안즈가 보고 있던 창 밖의 태양은 일출이 아니라 일몰이었나. 적어도 반나절은 누워있었다는 소리였다. 프로듀서에게 들은 상세를 말하자면, 안즈가 정신을 잃었을 때 프로듀서는 안즈가 피곤해서 자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전 6시의 촬영장에 도착해 안즈를 깨웠지만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프로듀서는 안즈를 데리고 긴급히 인근 병원인 이곳으로 차를 몰고 왔던 것.

 잠시 후 미쿠와 나나씨가 의사선생님을 모셔왔다. MRI사진등을 보여주며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했다. 아무래도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성 쇼크 같다고. 불행 중 다행이게도 정밀검사를 마친 후 이틀 정도면 퇴원해도 될 거라고 했다.

 “정말이지, 예전엔 그렇게도 일하는걸 싫어하더니 이젠 과로로 입원이라구? 안즈쨩은 적당이란걸 왜 그렇게 모르는 거냥?”

 일하던 중이었던 리카와 미리아를 먼저 돌려보내고 돌아온 미쿠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핀잔했다. 이해는 간다. 당장에 안즈 자신도 어이가 없으니까.

 “그러게. 안즈가 살다 살다 과로로 기절까지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 그건 미쿠가 하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평소에 건강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 지경이 되는 거야!”

 안즈의 조소에 미쿠가 정색하며 화를 냈다. 그런 비꼬는 의도로 말한 건 아닌데…...

 “아하하, 안즈쨩도 이제 쉬어야 하니 거기까지만 해요.”

 나나씨가 미쿠를 타이른다. 하지만 자기관리를 못해 일을 펑크 낸 건 안즈니까……

 “미안해. 모두에게 걱정 끼쳐버렸네.”

 “그래도 요즘 안즈쨩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건 미쿠도 잘 알고 있으니까……푹 쉬고 빨리 나아서 같이 일하는 거다냥?”

 일이라……그러고 보면 촬영은 어떻게 됐을까. 안즈라고 해서 지금까지 100% 모든 일을 예정대로 처리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미리미리 일정을 연기한다던가 대역을 준비한다던가 어떻게든 위기를 넘겨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갑작스럽게 쓰러져 일정 자체를 망친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프로듀서, 촬영 일은 어떻게 됐어? 재대로 연기 됐어? 퇴원하면 안즈가 바로 일하면 되는 거지?”

 어째서인지 주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특히 프로듀서의 표정이…….

 엄청 화내고 있잖아!!

 무서워!!

 “안즈쨩? 미쿠가 푹 쉬라고 했잖아? 촬영 건은 일단 나나쨩이랑 둘이서 탈 없이 끝내고 온 참이야. 안즈의 다른 일이라면 한동안 미쿠나 모두가 대역으로 뛰고 있을 테니까 걱정 하지마.”

 “그렇습니다. 일에 대한 건 걱정 마시고 한동안 전부 잊어주세요.”

 “하지만 미쿠도 요즘 상당히 바쁘잖아?”

 요즘 들어 미쿠는 아스테리스크 외에도 ‘냥냥냥’ 같은 아냐, 노아와의 신 유닛이라던가, 시키와의 듀엣이라던가 이곳 저곳에 불려가고 있었으니까. 프로젝트 룸에서 확인한 일정표대로면 분명 그런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그것도 제가 조정하는 거니 후타바씨가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쪽에서 다시 연락 할 때까지 한동안 쉬어 주십시오.”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그 말에 안즈는 약이 올랐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이렇게 바쁜 시기에 안즈까지 일을 빠지면 미쿠 뿐만 아니라 모두의 스케줄에 지장이 생길 텐데? 안즈도 뭔가 하지 않으면─”

 “그래서 제가 있는 거잖습니까!!”

 프로듀서가 폭발했다.

 

 “에……”

 

 처음이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

 어째서?

 레슨을 빼먹을 때도, 일을 대충대충 할 때도, 스케줄을 펑크 낼 때도

 안즈가, 아니, 우리들 모두가 그 어떤 실수나 잘못을 하더라도 그렇게 화낸 적 없었으면서……

 “미안해……”

 안즈는 무작정 사과했다.

 하지만 그 사과에, 프로듀서는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떨군 뒤 “죄송합니다” 그렇게 한마디 하며 터벅터벅 병실을 걸어 나갔다.

 “프, 프로듀서씨! 잠깐! 미쿠쨩은 안즈쨩을 부탁해요!”

 나나가 프로듀서를 따라 병실을 나섰다. 미쿠는 한숨을 쉬며 안즈의 어깨를 잡고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안즈쨩……미쿠, 안즈쨩이 키라리 때문에 무리하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어.”

 ……

 “옆에서 보고 있으면 미쿠까지 괴로울 정도야……그렇게까지 자기자신을 몰아세우고 괴롭히고. 정말 안즈쨩에게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약속했으니까. 키라리의 몫까지 힘내겠다고.”

 “그건 틀렸어.”

 “미쿠……?”

 “키라리쨩이 했던 말, 열심히 하고 있으란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안즈쨩의 이런 피폐해진 모습 키라리가 정말로 원해서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미안해.”

 “아 정말! 미안하다는 말 만 하지 말고……!!”

 미쿠가 돌연 말을 멈췄다. 안즈가 입고 있던 환자복의 상의 위로 무언가 투둑 하며 떨어지고 있었다. 안즈는 그제서야 자기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단 걸 깨달았다.

 “어라……안즈 왜 이러지……?”

 미쿠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안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답답하기는……울 정도면 차라리 펑펑 쏟아내던가…....”

 “미쿠, 미안, 잠시 혼자 있고 싶어.”

 “그래.”

 미쿠는 조용히 병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안즈는 반대쪽을 향해 웅크리고 누웠다. 딱히 슬픈 기분이랄 것도, 기쁜 기분이랄 것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질질 세어 나오는 걸까. 키라리야 물론 보고 싶지, 그렇다고 애처럼 울 정도는 아니다. 미쿠의 잔소리도 사실 틀린 말 하나 없었고, 그 말대로 키라리가 지금 같은 안즈의 피폐한 모습을 보고 좋아할 리도 없다.

 근데 이 눈물은 뭐냐고

 이 가슴을 쥐어 뜯는 불안감은 대체 뭐냐고……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자고 싶다.

 

 

***

 

 

 얼마만일까 그런 끔찍한 알람 소리 없이 잠에서 깨어 본다는 게. 그것과는 별개로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346프로의 감사패, 방송국의 예능 신인상,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와 시들다 못해 갈색으로 말라 비틀어진 꽃다발들, 사놓고 몇 개월간 뜯지도 않은 신작 게임이나 신상 옷 따위들. 안즈의 두통은 아마 그런 지저분한 잡동사니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던 수면제 때문이겠지.

 비몽사몽에서 왼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9시 47분. 안즈는 오른쪽 검지로 화면을 밀어 습관처럼 라인(LINE)을 열어, 맨 아래쪽의 대화방을 터치했다.

 

 

 있을 리 없는 ‘읽음’ 표시. 안즈는 흰색 채팅 창을 터치해 문자를 입력했다. 그러고는 송신하지 않고 뒤로 가기를 눌렀다.

 어차피 알고 있었다.

 핸드폰 자체를 버렸겠지. 단순히 잃어버렸다면 계정을 새 것에 이식하거나, 하다못해 새로 계정을 만들어서 안즈나 모두에게 충분히 연락 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키라리는 2년간 어떠한 문자도, 읽었다는 반응조차도 보내오지 않았다.

 잊어버리고 싶으니까

 더 이상 안즈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안즈를 버렸으니까

 

 알고 있을 터였다.

 안즈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끌어 앉고 라인의 대화목록을 살펴봤다. 퇴원을 축하하는 문자 이후로, 이틀 동안 아무런 갱신도 없었다.

 미쿠의 문자도 치에리와 카나코의 문자도 리카와 미리아의 문자도

 그리고……프로듀서의 문자도

 황금 같은 토요일. 일도 없다. 안즈가 그토록 바래왔던 세상이 아니었던가? 사실 2년간 앞만 보며 달려오면서 지겹게 벌어온 돈과 앞으로 받을 인세라면, 지금부터 당장 인세생활을 시작해도 호화롭지는 않아도 어떻게든 먹고 살아갈 수는 있다.

 꿈이라면 이미 이뤘잖아.

 그런데 어째서 기쁘지 않은 거지?

 쌓아둔 신작 게임에도, 만화책에도, 블루레이에도 아무것에도 손이 잡히지 않아. 맛있는 음식도 단것도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 프로덕션의 감사패도, 방송국에서의 신인상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아.

 TV에서의 ‘나’처럼 영업용이 아닌, 진심으로 행복한 웃음. 어째서 안즈는, 그 별볼일 없는 급조 유닛의 라이브를 마치고 나서의 키라리처럼, 세상 모든걸 다 가진 듯이 웃을 수가 없는 걸까.

 몰라

 움직이기도 귀찮아 생각하기도 귀찮아 이젠 다 귀찮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

 침대에 그대로 누워 눈가에 팔을 올렸다. 손에서 진동이 울린다. 보나마나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쓸 때 없는 포스팅이나 스팸메일 따위겠지. 안즈는 핸드폰을 쓰래기 더미 속으로 집어 던졌다.

 그래, 안즈는 2년동안 기나긴 꿈을 꾼 거야. 밖이라는 세상 따위 허상에 지나지 않아. 어차피 안즈에겐 이 좁은 방 하나가 세상의 전부인걸.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원점으로 돌아온 것뿐이니까. 다시 예전처럼 혼자로 돌아가면 괴롭게 생각할 필요도,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이걸로 된 거야.

 이걸로 ‘후타바 안즈’라는 스토리는 막을 내리는 거야.

 

 안즈는 그렇게 만족하고 눈을 감았다.

 

 

 

 팔이 축축해졌다.

 

 

 

 웃기고 있어.

 이 딴 스토리에 누가 만족 한다는 거야? 키라리! 아니! 누구든 좋아! 그러니까 제발 안즈를……날 혼자 있게 하지마!

 더 이상 혼자는 싫어!

 내게서 떠나지 말아줘!

 도와줘……

 

 제발─

 

 

 

 

 

 

 

 

 ─딩동

 

 안즈는 일어나 내달렸다.

 하지만 바닥에 쌓여있던 그 잡동사니에 걸려 미끄러져 넘어졌다. 무릎이 정말 아팠지만 안즈는 필사적으로 현관으로 기어갔다. 20평 남짓한, 혼자 살기에 쓸 때 없이 넓어빠진 멘션의 복도가 어찌나 그리 멀게 느껴지는 건지.

 키라리? 프로듀서? 리카? 미리아? 택배? 방송국의 수신료 징수원?

 안즈는 문고리를 잡고 일어서, 현관문의 렌즈를 확인한 후, 망설임 없이 그 문을 열었다.

 

 쏟아지는 눈부신 빛과 함께, ‘그’의 모습이 보였다.

 

 “후타바……씨!?”

 “그, 그런 거 아냐! 쓰래기에 걸려 넘어져서 그런 거뿐이라고!”

 안즈는 훌쩍임을 멈추려 애쓰면서 팔로 얼굴을 비비며 얼굴을 최대한 찡그렸다. 프로듀서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갑자기 안즈의 다리를 보며 화들짝 놀란다.

 “잠깐, 다리에서 피가 나지 않습니까!”

 “후에에……?”

 이제 보니 욱씬거리던 오른쪽 무릎의 상처에서 피가 슬금슬금 흘러내리고 있었다. 방금 전 넘어지면서 바닥에서 뒹굴던 금속제 트로피의 날카로운 모서리에 무릎을 긁혔던 걸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차에서 응급상자를 가져오겠습니다!”

 그가 몸을 돌리자 안즈의 팔이 반사적으로 그의 코트를 잡았다. 그가 뒤돌아보자 안즈의 얼굴이 화악 달아오른다.

 “그, 그게……”

 하지만 안즈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가지 말아줘……”

 부끄러웠다. 19살이나 돼서 이런 응석이라니. 하지만 그것보다도 힘겨웠던 건 이대로 그 마저 영영 떠나버릴 것 같은, 그 견딜 수 없는 불안감이었다.

 안즈는 프로듀서를 올려다봤다.

 피식.

 “우, 우와아앗!”

 그렇게 웃고 있던 프로듀서가 갑자기 안즈를 들어 안고 냅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이거 생각해보니까 공주님 안기잖아!?

 “프, 프로듀서 이게 무슨 짓이야!”

 “Arms Carry라고하는 긴급 인명 구조법의 일종입니다. 후타바씨는 지금 다리에 외상을 입은 긴급환자니까요.”

 “……좀 더 그럴듯한 변명은 없는 거야?”

 “무슨 소리십니까?”

 희미하지만 분명한 형태의 미소로, 자기 딴에는 장난스럽게 대답하고 있는 프로듀서였다. 남들은 로망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안즈처럼 키가 작은데, 180이 넘는 프로듀서의 키만큼 높이 들려져 빠르게 수송 당해보면 생각보다 무섭다. 그리고 이 키 차이 라면 누가 봐도 남녀가 아닌 아버지와 딸, 로망 따위 있을 리─

 ─안즈는 프로듀서에게 매달린 채 그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의식하기 시작하니 또 얼굴이 달아오른다.

 안돼. 이거 위험해……초 위험해……

 프로듀서가 복도의 코너를 돌자, 평소엔 콘크리트 난간에 가려 보이지 않던 도심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고 보면 키라리가 안즈를 인형처럼 들고 다닐 때도 대충 이런 느낌이었지. 키라리나 프로듀서는 언제나 이런 풍경을 보고 있었던 걸까.

 치사해

 어느새 프로듀서는 검은색 밴에 도착해 좌석에 안즈를 앉히고는 구급 상자를 꺼내 무릎의 상처를 봐주었다. 그가 알코올 솜으로 소독을 하자,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

 “앗 따거!”

 “죄송합니다. 소독만 끝나면 이제 괜찮을 겁니다.”

 프로듀서가 안즈의 무릎에 사각형의 넓은 반창고를 붙였다. 알록달록한 기린 무늬의 노란색 반창고…….설마 이것도 키라리가 예전에 가져다 둔건가.

 “프로듀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온 거야?”

 안즈가 물었다. 그가 아무런 예고 없이 찾아 오는 경우는 없으니까, 역시 방금 전의 진동은 프로듀서의 메일이었나 보다.

 “그냥 놀러 나왔습니다.”

 “에……?”

 뜬금없다.

 “흠, 아니군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다같이 놀러 가지 않겠습니까?”

 그가 턱을 괴고 고민하는 척, 하더니 말을 고쳤다. 뭐 ‘다같이’ 라는 단어로 보아하니 데이트 하자는 말은 아닌 거 같고……아니아니아니아니안즈가 실망해서 뭐 어쩌자는 건데!

 “안즈야 상관없는데 프로듀서야말로 괜찮아? 바쁠 텐데……”

 “아뇨, 오히려 후타바씨가 없으면 저도 오늘 못 쉽니다. 센카와씨에게 뒷일을 맡기고 잔업을 땡땡이 쳤거든요.”

 ……살다 살다 일 밖에 모르는 범생이 프로듀서에게서 ‘땡땡이’란 단어를 들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어색한 웃음에, 안즈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안즈는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바닥에 떨어져있던 핸드폰을 챙겨 열어보았다.

 

 

 피식

 그렇게 웃은 안즈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쓰래기 더미를 뒤적거렸다. 잠깐을 낑낑대다가 겨우 건져낸 그 물건은 안즈가 늘 들고 다니던 분홍색의 토끼인형. 예전에 란코가 멋대로 지어 붙인 ‘벨페고르’라는 기묘한 가명을 제외하자면 딱히 이름을 붙인 적은 없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인형은 그저 정신차려보니 안즈의 옆에 있었고, 안즈는 아이돌이 된 이후에도 언제나 수족처럼 들고 다녔었지.

 ‘정신차려보니’ 옆에 있었던 이 사람들처럼.

 안즈는 그렇게 생각하며, 인형을 안고서, 안즈의 그 작은 ‘세상’을 뒤로하고 문 밖을 나섰다.

 

 

***

 

 

 “어디로 가는 거야?”

 “가 보면 아실 겁니다. 후타바씨도 예전에 촬영 한 적 있는 곳이니까요.”

 차는 어느덧 한 시간쯤 달린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한산하고 시원한 숲길이 이어졌다. 장마가 끊이질 않는 6월 말의 날씨치곤 드물게도 맑고 깨끗한 하늘의 빛이 숲의 나뭇잎들 사이사이로 반짝거렸다.

 “다른 애들은?”

 “아쉽게도 신데렐라 프로젝트의 전원은 부르지 못했지만, 오늘 모이는 분들은 일을 마치고 별도로 합류할 예정입니다. 아니,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했겠군요.”

 그리고 도착한 어느 산길 속의 주차장. 안즈와 프로듀서는 차를 뒤로하고 산책로를 걸었다. 그 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안즈는 알 수 없는 데자뷰를 느낀다. 아니, 데자뷰라기 보단 기억의 단편일까, 프로듀서도 안즈가 이곳에 와 본적 있다고 했으니까……

 “저 언덕을 넘으면 도착입니다.”

 30분 정도는 걸은 것 같은데, 프로듀서가 가리키는 그 언덕도 10분은 걸릴 것 같은 거리였다. 안즈는 숨이 차서 산길 옆의 난간을 붙잡고 말했다.

 “하아……하아……생각보다 멀잖아? 지금 몇 시야? 30분은 지났지?”

 “이제 8분 지났습니다만.”

 ......

 “아~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프로듀서에게 업어달라고 할걸”

 “업어 드릴까요?”

 “......농담이야.”

 아까 전의 그것이 생각나 온몸에 닭살이 돋아 견딜 수가 없다. 차라리 그냥 걷도록 하자.

 그렇게 5분정도 지났을까, 안즈는 그 언덕의 마지막 계단을 딛고 서, 시원한 산들바람을 맞으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제서야 기억이 난다.

 온갖 야생화가 만개한 초원.

 이곳에서 안즈와 키라리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화보를 찍었었지.

 안즈는 프로듀서를 올려다봤다.

 “오늘……모두 안즈를 위해서 모여준 거야?”

 그가 고개를 흔들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런걸 보면 정말 거짓말 못하는 사람이란 게 실감이 간다. 얼굴에 다 써있다고.

 “아! 안즈쨩!”

 “어디어디 진짜네! 오랜만이야 안즈쨩!”

 리카와 미리아가 달려와 안즈의 손을 잡았다.

 “오랜만이라 해도 몇 일전에 병원에서 봤잖아?”

 “에엣 그랬던가! 그래도 몇 일이나 되면 미리아에겐 길다구?”

 “그래 그래 건강하게 지냈어?”

 “응!”

 “슬슬 가시죠. 마에카와씨나 다른 분들도 약속장소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프로듀서가 말한 장소는 그 초원의 거의 한가운데. 그곳에서 치에리와 카나코, 미쿠와 나나씨가 미리 자리를 펴놓고 있었다.

 “그래도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안즈쨩!”

 “나도 좀……걱정했었는데 이제 안심되네.”

 카나코와 치에리가, 갓 만들어진 쿠키를 입에 물고 뜻하지 않은 등산으로 축 늘어진 안즈에게 기쁜 듯이 말했다.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카나코의 느긋한 성격과 치에리의 소극적이지만 세심한 성격 때문이었을까, 같은 유닛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을 자주 나누는 편은 아니었지만, 안즈는 그 아이들과 그저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했다.

 “고마워. 카나코, 치에리. 그러고 보니 장소도 프로듀서가 선정한 거야?”

 “아뇨 그건 마에카와씨가─”

 “─후냣! P쨩!! 그건 말하지 않기로 했잖냥!!”

 아, 얼마 전의 시키, 유미와 찍은 앨범 ‘츠보미’의 화보집도 여기서 촬영했다고 했던가.

 “따, 딱히 안즈쨩이 키라리쨩이랑 여기서 화보를 찍었다는 건 어제 P쨩에게 들어서 알았을 뿐이니까……”

 “뭐 어때요 미쿠쨩! 안즈쨩도 건강해 보이고 여기도 정말 예쁘네요. 귀여운 토끼들도 있는 거 같고.”

 나나씨가 들판에서 보이는 토끼들에 온 정신이 홀려있었다. 하지만 미쿠는 안즈의 이마를 만지며 말한다.

 “잠깐 실례냥. 흐음……”

 그리고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냥!! 아직 충분히 쉰 거 같지 않다냥!!”

 ……역시 얼굴에 생긴 다크써클이 아직 남아있었던 건가. 미쿠는 그러면서 안즈를 가리키며 외쳤다.

 “특훈이다냥! 오늘만큼은 안즈쨩에게 전력으로 아무 것도 안 하게 할거다냥!”

 “특훈과 전력이라는 시점에서 이미 무리가 있다고!?”

 “와아! 미리아도 할래!”

 “전력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걸 따라 하겠다고!?”

 그렇게 휴식을 끝낸 모두는 초원에서 뛰어 놀기 시작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전력으로 아무것도 안 하게 된 안즈와 미리아를 빼고. 안즈는 별수없이 안즈의 무릎을 베고 옆으로 누운 미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 아이들을 구경했다.

 네잎 클로버를 찾아 다니는 치에리. 화환을 만드는 카나코. 들판에 서식하는 야생토끼를 쫒아다니는 나나씨. 원반 같은걸 던지고 받으며 노는 프로듀서와 미쿠, 리카.

 안즈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그렇게 안즈는 한참을 그저 풀밭에 누워서 그 아이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어……라?”

 “안즈……쨩?”

 또다.

 물방울이 제멋대로 안즈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도저히 가만있기가 불편해진 안즈는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미리아가 안즈의 손을 붙잡았다.

 “안 돼. 미리아랑 약속했잖아? 오늘은 전력으로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그치만……그치만……”

 

 그러자 미리아가 안즈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옳지. 옳지. 안즈쨩이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도 안즈쨩을 안 버리니까. 키라리도 분명 돌아올 거니까.

 

 “아……아……”

 일주일, 몇 달, 아니, 2년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이 이 한 순간에 쏟아진다. 마치 댐처럼, 온갖 고집과 아집으로 덩어리진 그 댐이 한 순간에 붕괴하듯이, 안즈의 마음이 요동쳤다.

 

 안즈는 그렇게 미리아에게 안겨 한참을 울었다.

 

 아니, 참고 있었던 건 눈물만이 아니었나.

 

 안즈는 지금까지, 키라리가 잠적을 감춘 이유는 키 때문일 거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새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의혹

 아니야 키라리가 날 버렸을 리가 없어. 그래, 키라리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처럼 내가 키라리 만큼 노력하면 키라리도 돌아와 주지 않을까?

 언제부턴가 그런 유아적인 생각이 안즈를 지배했고 안즈는 철저하게 그 생각에 따라 행동해왔다. 그리고 그 조그맣고 하찮은 의혹에서 출발한 사고방식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스스로를

 옭아매왔다.

 결국 그것을 잊기 위해선 앞만을 향해 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엔 안락함을 끊고

 휴식을 끊고

 단것을 끊고

 수면을 끊고

 남에게 기대는 것을 끊고

 마지막엔 스스로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제한하고 벌해왔던 것이다.

 

 하지만……이젠 한계야

 

 편해지고 싶어

 쉬고 싶어

 단걸 먹고 싶어

 자고 싶어

 응석 부리고 싶어

 위로 받고 싶어

 

 보고 싶어……

 

 키라리……

 

 “옳지……옳지……”

 “미리아……고마워……”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안즈에게 몰려들었다. 미쿠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에휴, 그러게 처음부터 그렇게 좀 펑펑 울었으면 차라리 속이라도 시원했잖냥.”

 “시끄러.”

 “여기……쓰십시오.”

 프로듀서가 작은 티슈팩을 내밀었다……아니 이럴 땐 보통 손수건 아니야? 철저함이 지나치다고.

 하지만 안즈는 그 티슈를 받아 들고 코를 팽 하고 풀었다. 그냥 안즈가 멍청이 바보였지. 그땐 몰랐지만 그때도 지금도 안즈가 혼자였을 리가 없잖아.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 편안한 사람

 저지른 잘못에 화를 내주는 사람

 같은 아픔을 공유해주는 사람

 응석을 받아주는 사람

 위로를 해주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이제서야 알 것 같다.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그 키라리의 행복했던 표정, 세상 모든걸 다 가졌다는 듯한 악의 없는 바보 같은 미소, 키라리가 지었던 그 미소의 의미를.

 

 언제나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아마 안즈도 지금, 그것과 같은 행복에 겨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프로듀서가 대답했다.

 

 “좋은 미소입니다.”

 

 

 

 

 

네가 없는 세상에서 <안즈편> ─ Epilogue ─

 

 

 

 

 

 시끄러운 벨소리 ‘미쯔보시☆☆★’

 미오의 활기찬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 5분.

 시끄러운 벨소리 ‘S(mile)ING!’

 우즈키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 10분.

 시끄러운 벨소리 ‘Never say never’

 “아, 알았어, 알았다고!”

 이불에서 겨우 빠져 나온 안즈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는 바닥에 앉아 잼을 바른 토스트를 입에 물고 머리를 말리며 TV를 켰다.

 “─이에 사측에선 후타바 안즈씨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며 문제를 일축했지만 346프로덕션의 미성년자에 대한 과도한 스케줄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프로듀서에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 지금까지의 시간에 쫓기는 스케줄과 건강관리는 안즈가 자초한 일이었으니까. 뭐 346프로가 블랙기업 랭킹의 순위권인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안즈는 외출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 갈색 빵모자와 도수 없는 뿔태 안경을 쓴 안즈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악보들을 가방에 쓸어 담고 현관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오른쪽 검지로 화면을 밀어 습관처럼 라인(LINE)을 열어, 맨 아래쪽의 대화방을 터치했다.

 안즈의 가방이 스르륵 떨어졌다.

 

 

 2년동안 어떠한 변화도 없었던 그 오래되고 낡은 대화방.

 그곳에 아주 사소했지만, 커다란 변화가 불어왔기 때문이었다.

 

 

 

 

 

END

 

 

 

 

 

 

 

 

<작가 후기>

머리 풀고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하니 왠 쿨 로리 아이돌이 되었다.

전 분명 안키라를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안타케가 되어있네요. ㅇ<-< 역시 마성의P 대학생활동안 매마른 감수성 탓인지, 예전에 올린 비슷한 분량의 개그성 단편은 1주일만에 썼었는데 이번에는 기획, 구상, 집필까지 3주나 걸렸습니다. 밤도 세가면서 적다보니 피폐해진 안즈에 감정이입은 됐지만 [?]

머리 푼 안즈의 모습은 이걸 보고 떠올랐고, 키라리와의 스토리 모티브는 이곳에서 떠올랐습니다. 감동적이긴 했지만 저런 무거운 곡을 BGM으로 쓴거 치고는 만화가 너무 해피(?)하게 끝나서 스토리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키라리의 병 자체는 그렇게 새로운 소재도 아니지만.

아무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본문에 나온 '화보'는 이 카드를 말합니다.

 

 

ps.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후속편인 '네가 없는 세상에서 <키라리편>' 도 준비중입니다.

 

※ 후속편인 네가 없는 세상에서 <키라리편>  10/23일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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