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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루미 씨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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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8, 2016 21:17에 작성됨.

안녕, P군. 아니, 안녕하십니까라고 써야하나? 솔직히 나, 업무메일 말고는 이런 거 써본 적 없어서 말이야. 무슨 말부터 써야할지 모르겠어. 본론으로만 넘어가기에는 뭔가 너무 짧을 것 같고, 그래도 지금은 다시오지 않을 중요한 순간이니까. 나도 한 번 써보려고해. 혹시 알아? 내가 이런 일이 맞을 지도 모르잖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지만 말이야.

 

일단 고맙다고 먼저 해야 할 것 같네. 사실 아이돌이라면 누구나 자기 프로듀서에게 하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꼭 해주고 싶은 말이야.

왜냐면 아이돌이 되서 난 나를 찾은 기분이거든. 그리고 P군이 날 스카웃한 거 잖아?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방황하고 있던 나를. 아이돌이란 건 내가 곧 관심대상이니까. 본의아니더라도 날 많이 돌아보고 관리하게 되더라고.

 

이전에 난 워커홀릭이었어. 단순히 4글자로 표현되고는 하지만, 워커홀릭이란 거 정말 이상하거든. 정말 바쁘게 살다가도 잠깐 생각해보면 뭐 하나 똑바로 된 게 없는 기분이야.

일은 산더미고 지금껏 바쁘게 살아온 지난 시간은 도대체 어디다가 투자된 건지 알 수 없는 기분. 마치 시간을 흐르는 물에 들이붓는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그냥 사라져버린 기분이야. ‘모모’에 나오는 회색신사들이 날 속여버린 기분이랄까.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서는 사람들을 꼬셔서 효율적으로, 즉 바쁘게 살게하면서 그렇게 남는 사람들의 여유 시간을 훔치는 회색신사가 등장한다.)

게다가 사는 것도 단조로워. ‘일’밖에 없거든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 심지어는 귀가길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의 순서를 짜놓는다든가 하게 되지. 사실 그냥 회사에서 사는 경우도 무척 많지만 말이야. 어, 써놓고 보니 엄청 끔찍한데 내가 이러고 살았다는 게 더 끔찍하네. 세상에

 

그래도 가장 힘든 건....그런 걸 알면서도 벗어나질 못 한다는 거지. 늘 일이 비어있으면 불안해. 비서직이란 건 경쟁이 심하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늘 우수하고 용모도 훌륭한 사람들이 자리를 노리고 나와 경쟁하게 되거든. 내가 능력이 부족하면 금방 밀려나는, 실시간의 내 능력이 평가되는 일이니까. 그래서일까, 해고된 직후에 난 엄청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었어. 내가 드디어 남들보다 능력이 떨어지는구나라고 생각했어.

 

지난 내 20대를 모두 여기에 쏟아부었는데 결국에는 남에게 밀려버렸다는 생각이 날 많이 괴롭혔어. 비서가 아니면 뭘해야할까? 내가 뭘 할 줄 알지? 난 어떤 사람이지? 이런 많은 질문이 날 감싸고 괴롭혔던 것 같아. 때문에 P군이 날 스카웃하고도 왜 나였을까. 많이 고민했어. ‘이제 아무것도 없는 내가 왜...’라는 생각이 언제나 어디선가 들려왔거든. 마음 속부터 아예 텅 비어버렸던 거지.

솔직히 P군이 날 스카웃할 때도 엄청 어이없었잖아. 그냥 일단 밥 먹으러 가자니 누구나 어이없을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P군은 날 꿰뚫어보고 그런 소리를 한 거였지?

아무튼 그래서 내가 나중에 물어보았을 때도 그 대답에 난 조금 당황했어.

 

‘아....그거.....그냥 매력적이라서요? 다른 거 말고 그냥 루미 씨가.’

 

충격이었어.

‘나’라는 걸 염두에 두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말이야. ‘스펙’이란 걸 평가받았던 기억은 많고 그걸 당연하게 여겼지만, 단순히 내가 어떻다라고 들은 건 아마 처음이었을거야. 당연히 내가 매력적이라고 느껴본 적도 없었어. 그리고는 한 번 생각해봤지. 나에 대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나 진짜 아무것도 없구나.’ 난 내가 일 이외의 이유로, 자의로 뭘 해본 적이 없더라고. 나도 그 전까지는 몰랐는데,

 

그런데도 P군은 나에게 말했지.

 

‘그럼, 같이 찾아보죠. 루미 씨를.’

 

그 날 이후로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P군은 같이 찾으러 다녔지. 그래서 그날 이후에 아이돌을 하는 동안에서는 언제나 꿈꾸는 기분이었어. 하루하루가 매일 다르고, 늘 나를 보게되는 일상이었잖아. 새로운 옷을 입고 거울을 보고,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고, P군과 그런 일들로 늘 다른 잡담을 해보고, 전부 새로운 것들.

이전에는 편의점 도시락을 사먹고.....지금 생각하니까 나 요리해먹은적도 거의 없네. 세끼 전부 도시락으로 먹었던 것 같아.

정장이 아니라 다른 옷들도 입으면서 거울도 보았지.

무엇이 내 입맛에 맞는가. 무엇이 나에게 맞는가. 그런 걸 지금까지도 나도 몰랐던 걸 P군은 같이 찾아주었잖아.

 

마치 보물찾기 하는 느낌? 흑백으로 된 사진에 물감을 조금씩 흘려넣어서 빛나게 하는 느낌이었어. 날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분명 내 일 인데도 내일의 할 일이 기대되기 시작했어. 내일은 또 어떤 색으로 사진이 변할까? 그런 마음과 함께 언제부턴가 미소짓고 기대하게 돼,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에.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얼어붙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도 들어. 그리고 따뜻한 분홍색으로 물드는 기분도 들고. 전에는 없던 마음.

 

아마도 그렇게 같이 마음에 품었을지도 몰라. 너와 함께 계속 찾으러 다니고 싶다고, 나와 너, 이 둘에 대해 찾으러 다니면서 손을 계속 잡고 싶다고 마지막까지 P군이 에스코트 해주고 나도 P군을 알아가는 이런 즐거움이 계속되었으면 한다는 그런 마음을 품었어. 그러면서 더 내일이 기대되었지....마음에 든 사람과 그렇게 계속 다니면....데이트 같으니까.

 

그리고 더 많이 달라졌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볼 수 있게 됐으니까. 비서 일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P군이 좋아서 더 알고 싶었어. P군에 따라서 나도 바뀌어 보려고도 했어. 요리를 배우고 도시락을 만들어보고 말이지. 나와 다른 사람을 알아가면서 산다는 걸 배워가기 시작한 거야.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문득 눈물이 나오려고도 했어. 간신히 참았지만. 내가 누군가 앞에서 이런 진심어린 미소를 지은 채 행복에 젖을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느껴봤거든. 매일 반복되는 의미도 없는 서류 속에서 살다가, 한 사람으로서 행복하다는 건 정말로 행복한 걸 느꼈어. 비록 유사체험이었지만, 그래도 그 날 나는 정말로 꿈을 꾸고 있었어.

하지만 P군. 역시 꿈은 꿈이었나봐. 이제는 이렇게 깨어날 시간이 되었잖아? 하긴, 사람이 언제나 기대에 부풀어있으면 안 되지.

 

이번에는 언젠가는 다가올 시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다가오니 조금은 기분이 묘하네.

해고될 때는 그저 충격에 멍해진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달라. 뭐라고 말하진 못하겠어. 뭐랄까.... 뒤에서 자전거를 잡아주던 부모님이 어느새 자전거를 놓아버린 기분이야. 그런데 P군 그거 알아? 그런 홀로서기를 하더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언젠가는 꼭 다시 뒤돌아가서 안기고 싶은 마음이 있어. 그냥 본능처럼, 그래서 계속 부모에게 말하게 되는 거야. 홀로 서서 나아가는 그런 스스로를 꼭 계속 봐달라고 그렇게 말하게 돼. 자신감과 희망으로 넘치는 시작일지라도 그런 마음은 꼭 내 안에 숨어있거든.

 

지금도 그런 마음이 들어, 이제 아이돌로서도 비서로서도 있지 않아도 날 알고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한 가지가 너무 걸려.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하나, 하나가 계속 사소하게 남아있어. 사소한데 정말 마음에 걸리는 게.

P군이 답해주지 않았던 질문말이야. 그날 P군은 웃기만 했잖아. 난 그 날 이후로 그게 마음에 정말 걸려있었어. 목에서 걸린 씨앗이 날 답답하게 하는 것처럼. 정말 우울한 날에 그게 떠오르면 운 적도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P군, 다시 한 번만 물어볼게. 이번에는 꼭 대답해줬으면 해.

 

 ...P군에 에스코트 받으려고... 괜찮지? P군. 꼭... 꼭 옆에 있어줘. 부탁해. P군... 이런 나라도, 같이 손 잡고 걸어가 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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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봐야 결국은 레슨 행.

 

레슨이면 저 분도 한 방 이 분도 한 방. 레슨 앞에 아이돌은 평등하다.

 

이 시리즈는 참 힘들어요. 감정이입이 중요한데 말이죠....하하핫. 뭔가 방해받지 않고 여기에 온전히 집중할 시간도 없고 말이죠. 다른 것보다도 이게 중요한데. 아 안 쓴다는 건 아니고요.

 

토키코 님 언제 쓰지?

 

아 스트레스 해소 겸 전투씬 하나 써야겠네요.

 

보고싶은 아이돌은 신청받습니다.

 

Next mail is from 센카와 치히로

 

치히로 씨는 레슨없다구요? 게임삭제하면 그게 레슨이랑 비슷하니까요. 하하하 내래 녹색 여신이 비참하게 희생당하는 걸 보여주갔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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