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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이런 하루카는 싫은가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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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5, 2012 00:44에 작성됨.

   백화점의 최상층인 15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프로듀서와 하루카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백화점의 엘리베이터가 홀수 층, 짝수 층에만 멈추는 걸로 나누어져 있었고, 또 운이 좋았는지 엘리베이터 안에 다른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덕분에 둘은 쾌적하게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의 한쪽은 유리로 되어있어서, 밖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한층 한층 올라갈수록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넓어졌다. 어느새 해가 져 조명만이 도시를 밝혔다. 반짝이는 야경을 프로듀서와 하루카는 말없이 감상했다.
   “그런데 하루카, 우리가 지금 가는 데는 레스토랑이야? 안내판에 무슨무슨 레스토랑이라고 쓰여 있던데.”
   야경을 즐기며 프로듀서는 옆에 선 하루카에게 질문했다. 엘리베이터 타기 안쪽 벽에 붙은 각 층 안내판엔 15층이 레스토랑이라고 적혀있다. 영어인지 모를 글자로 멋들어지게 적혀있어 프로듀서가 알아보는 건 그곳이 레스토랑이란 것뿐이었다.
   “네, 레스토랑이에요.”
   “꽤나 좋아 보이는 데. 너무 비싼 데 아냐?”
   안내판의 설명만으로도 느껴지는 오오라가 있다. 거기다 이런 큰 백화점의 최상층을 다 쓸 정도면 분명 후줄근한 레스토랑은 절대 아니다. 프로듀서는 괜히 자신의 정장을 힐끔 바라봤다. 바빠서 제대로 데리지도 못해서 이곳저곳 주름이 접혀있다.
   “음, 비싸다면 비싸죠. 주로 유명 인사나 연예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식당이니까요. 장식들도 으리으리하다고 들었어요.”
   하루카는 그 유명한 화가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고 덧붙였다. 프로듀서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그 정도라고? 우리 못 들어가는 거 아냐? 아니아니, 그럼 가격이…….”
   하루카의 말만 들어보면 레스토랑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한 끼만 먹는데도 몇 만엔이 깨진다는 바로 그런 곳.
   “우리 두 사람이 먹으면 음, 이만엔 정도면 될 거에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하루카는 프로듀서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눈앞에서 기분 좋게 흔들리는 브이 자를 프로듀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만엔?”
   깜짝 놀라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만엔이라니. 물론 그 정도 낼 돈은 있지만 한 끼 식사에 지출하긴 너무 큰 금액이다. 당연히 저녁은 자기가 사겠다고 생각했기에, 프로듀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가자고 말할 수도 없고. 아, 이걸로 이번 달은 가는 구나. 하루카 생일 선물도 사야하는데…….’
   프로듀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월급은 이번 달 말에 들어오니, 그때까진 굶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버텨야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야 하나, 아니면 코토리 씨에게…등등. 프로듀서는 필사적으로 생존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때 땡,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도착했어요. 프로듀서 씨.”
   하루카는 식은땀을 흘리는 프로듀서를 보며 쿡, 웃더니 종종걸음으로 먼저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이젠 돌이킬 수가 없다. 프로듀서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밖은 프로듀서의 예상대로 별세계였다. 고풍스러운 목조 장식으로 꾸민 입구는 프로듀서를 주눅 들게 했다. 거기다 닫힌 문 옆에서 대기하던 집사 차림의 종업원이 둘을 알아보고 다가오자 프로듀서는 더 긴장해버렸다. 드라마 속에서나 볼법한 완벽한 집사 차림이라 프로듀서는 괜히 마른 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미나세 레스토랑에 어서 오십시오. 두 분이십니까?”
   “아, 네.”
   “저희 레스토랑은 100% 예약제로 운영합니다만, 혹시 예약하셨는지요?”
   예약이란 말에 프로듀서는 깜짝 놀라 종업원을 바라봤다. 예약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애당초 여기에 오자고 한 건 하루카였으니. 어쩌지 하고 프로듀서가 하루카를 바라보자,
   “네. ‘아마미’로 예약했어요.”
   하루카는 당당히 대답했다. 종업원은 단말기로 확인하더니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공손히 숙였다.
   “아마미 씨시군요. 예약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종업원은 변함없이 공손한 태도로 일관하며 레스토랑의 문을 열었다. 하루카는 자연스럽게 종업원의 뒤를 따라갔고, 프로듀서는 쭈뼛쭈뼛 레스토랑의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제일 먼저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건 중앙에 위치한 분수였다. 그 분수를 중심으로 테이블이 놓여있다. 한 편에는 넓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 위에선 피아니스트가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했다. 부드러운 피아노 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가 섞여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스토랑의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둑했다. 테이블 간 간격도 널찍이 떨어져 있어서 손님들은 다른 사람의 말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각자의 만찬을 즐겼다.
   아무리 봐도 하루카나 프로듀서에겐 어울리지 않는 곳이다. 손님들 모두 부티가 흘러 도저히 일반인으론 보이지 않는다. 하루카는 몰라도 프로듀서는 마치 꿔다놓은 보릿자루였다.
   점점 더 주눅들어가면서, 정말 따라가도 되나하는 반신반의한 심정이 커져 프로듀서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하루카에게 물었다.
   “하루카, 여기 어떻게 예약한 거야?”
   “프로듀서 씨, 아직도 눈치 못 챘어요?”
   “뭘?”
   “레스토랑 이름이요. 이름. 아까 종업원 분이 말했잖아요.”
   “이름?”
   프로듀서는 기억을 더듬었다. 종업원이 말한 레스토랑 이름.
   “미나세 레스토랑? 미나세…이오리?”
   미나세 이오리. 프로듀서가 몸을 담은 765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이자, 미나세 그룹의 따님. 부잣집 따님답게 항상 자신만만하면서 왠지 고압적인 분위기를 몸에 걸친 여자아이다.
   “정답. 여기 이오리네 가게에요.”
   하루카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까 이오리한테 전화로 혹시 레스토랑 자리 하나 예약할 수 있냐고 부탁했거든요. 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오늘밖에 시간 없다고 말하면서.”
   “아, 그럼 이오리가 예약해준 거야?”
   “그것만이 아니에요. 예약하는 김에 아예 공짜로 먹어도 된다고 했어요. ‘흥, 그 정도쯤이야 나한텐 식은 죽 먹기지. 가서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도 돼. 하루카, 1위 축하 선물이야!’, 라고 이오리가 말해줬다니까요.”
   하루카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미소를 지었다. 하루카의 설명을 듣고 그 미소를 보자 프로듀서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머릿속에서 눈물을 삼키며 작성 중이던 생존계획도 싹 내다버렸다. 레스토랑의 입구부터 프로듀서의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아, 그래서 이 백화점에 오자고 한 거구나.”
   “헤헤. 프로듀서 씨 놀라게 해주려고 일부러 안 말한 거예요. 아까 전에 프로듀서 씨가 그냥 연습하러 가자고 했을 때 얼마나 깜짝 놀랐었는데요. 오늘의 메인 디시가 날아갈 뻔했다고요.”
   “진작 말해주지. 난 그런 것도 모르고 평생 후회할 뻔했잖아.”
   프로듀서는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좋은 레스토랑에 무료로 갈 기회를 발로 걷어차려 했다니.
   “어라, 프로듀서 씨. 연습이 중요한 거 아니었나요? 저 공연 얼마 안 남았는데.”
   하루카의 얼굴엔 장난기 넘치는 웃음이 가득했다.
   “좋은 음식을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맛있는 걸 먹으면 힘도 절로 나서 사기도 좋아지잖아. 사기가 떨어지면 연습도 안 된다고.”
   “갑자기 융통성이 엄청 느셨네요, 프로듀서 씨.”
   “아깐 내 생각이 짧았어. 이젠 하루카 말이라면 다 따를게.”
   “후후, 나중에 두 말하시면 안 돼요?”
   무료란 사실은 프로듀서를 평소대로 돌려놨다. 오히려 너무 풀어진 모습이다. 그래도 프로듀서는 잔뜩 들뜬 모습을 하루카 앞에서 숨기지 않았다.
   마음껏 들뜬 두 사람의 대화는 종업원이 어떤 문 앞에서 멈추자 끝이 났다. 종업원은 문을 열어주면서 공손히 몸을 숙였다.
   “도착하셨습니다. 이 룸을 쓰시면 됩니다.”
   안내에 따라 들어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허나 내용물은 결코 작지가 않았다. 방의 중심에 놓인 테이블이나, 의자 모두 장인이 만든 수제품인데다, 바깥쪽 벽은 전부 유리로 되어있어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명도 크리스탈로 만들어져 하나의 예술품처럼 보인다.
   하루카나 프로듀서 모두 방 안의 절경에 감탄을 터트렸다.
   “와, 정말 여기 쓰면 되나요?”
   “네. 이오리 님께서 제일 좋은 곳을 대접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음식도 오늘의 추천 코스로 나올 테니 편히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종업원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을 향해 슥 인사하곤,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조용히 문을 열어 나갔다.
   하루카와 프로듀서는 방 안의 모든 것에 신기해하면서 의자에 마주 앉았다. 둘은 입을 벌리며 두리번거렸다.
   “우와, 이렇게 편한 의자는 처음이에요! 식탁도 엄청 고급스러워 보이고!”
   하루카는 꺅꺅하며 계속 감탄을 터트렸다. 목재인데도 은은한 빛을 띠는 테이블이 신기해 하루카는 괜히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봤다.
   “나도 이런 곳은 처음이야. 방송국 사람들이랑 저녁 식사할 때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진짜 이오리는 대단하구나.”
   “나중에 이오리한테 꼭 감사하다고 말해야겠어요.”
   새삼스럽게 이오리가 엄청난 부잣집 아이란 걸 두 사람은 실감했다. 평소 이오리의 이미지는 미키에게 마빡이라고 놀림 받아 화를 낸다던가, 귀여운 토끼를 항상 안고 다닌다던가, 부끄러움을 숨기려 괜히 화를 내는 여자아이지만, 역시 남들하곤 태생이 달랐다.
   “아무튼 오늘은 맘껏 즐기다 가요, 프로듀서 씨. 언제 이런 데 또 와보겠어요.”
   “응, 그러자.”
   두 사람은 마주보며 빙그레 웃었다.
   하루카는 쓰던 모자와 안경을 벗어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았다. 윤기 있는 갈색 머리카락은 모자를 써선지 살짝 눌려 있었다.
   “음식은 과연 뭐가 나올까요? 드라마처럼 먹으면 깜짝 놀라서 기절할 정도로 맛있을까요? 한입 먹으면 막 소리친다거나.”
   “그건 TV 속에서나 그렇지. 그래도 이정도 레스토랑인데 엄청 맛있을 거야.”
   프로듀서도 와본 적은 없지만 굳게 확신했다. 유명한 레스토랑이 괜히 유명하겠는가.
   “으으,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곧 애피타이저 나올 테니 좀만 참아.”
   손과 발을 동동 구르는 하루카에게 프로듀서는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도 애달픈 건 마찬가지였다. 프로듀서는 괜히 테이블 위에 놓인 나이프나 포크를 들었다 놨다 반복했다.
   때마침 굳게 닫힌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음식을 든 종업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루카의 눈이 반짝였다.
   “와! 음식 왔어요, 프로듀서 씨!”
   꺅꺅 소리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하루카를 프로듀서는 피식 웃으며 바라봤다. 열렬한 환영에도 종업원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음식이 담긴 그릇을 테이블에 능숙히 옮겼다.
   “에피타이저인 빵, 샐러드, 스프 그리고 음료입니다. 향신료나 드레싱은 테이블 위의 것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공손히 인사하며 물러서는 종업원의 몸가짐에 일말의 허점도 없었다. 그야말로 접객의 표본을 보여줬지만 당장 음식을 눈앞에 둔 두 사람에겐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새하얀 접시에 담긴 빵은 갓 구웠는지 고소한 향을 솔솔 풍겼다. 샐러드도 여러 가지 채소들이 먹기 좋게 썰려 있다. 따끈한 스프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프로듀서 씨!”
   하루카는 감격한 표정으로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오른손엔 스푼을, 왼손엔 포크를 들었다. 하루카의 갈구하는 눈빛에 프로듀서도 스푼을 들었다.
   “그럼 먹어볼까?”
   “네!”
   명쾌한 대답을 신호로, 두 사람은 음식을 먹었다.

   * * * * * * * * *

   “으으, 맛있어요, 맛있어!”
   빵 한입, 샐러드 한입, 스프 한입 먹어가며 하루카는 환호했다. 딱딱하지 않을까 걱정했던 빵은 입에 들어가는 순간 녹았고, 샐러드의 채소는 싱싱해 밭에서 바로 뽑은 게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스프 역시 딱 좋다.
   그렇게 한입 먹을 때마다 꺅꺅하며 크게 반응하며 먹어가다 보니 하루카는 어느새 애피타이저를 다 먹어버렸다. 프로듀서는 진작 음식을 다 비우고 음료를 천천히 들이켰다.
   “이제 메인 디시죠? 메인 디시는 뭘까요? 스테이크?”
   적당히 배가 차니 더 힘이 나서 하루카의 기대로 가득 찬 눈빛은 눈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저 예전부터 TV에서처럼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우아하게 썰어보는 게 꿈이었거든요. 아, 스테이크였으면 좋겠다.”
   “어라, 전에 방송에서 스테이크 썰어봤지 않았어?”
   프로듀서의 기억엔 요리 방송에서 게스트로 나온 하루카가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면서 시식했던 장면이 분명 있었다.
   “그건 일이니까 노카운트에요. 그리고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해보고 싶었다고요. 운치 있게 야경도 보이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신나게 말하던 하루카의 말이 멈추자, 프로듀서가 고개를 갸웃하며 하루카를 바라봤다. 프로듀서와 눈이 마주치자 하루카는 살짝 볼을 붉혔다.
   ‘프로듀서 씨랑 함께니까요, 라고는 말 못하지. 역시.’
   “…뒤는 비밀이에요. 비밀. 에헤헤.”
   혀를 쏙 내밀며 하루카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프로듀서는 하루카의 뒷말이 궁금했지만, 부끄러움을 감추며 웃는 하루카의 모습에 물어보지 못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살며시 열렸다.
   “메인 디시입니다.”
   종업원은 전보다 더 큰 쟁반을 들고 왔다. 달큰하고 진한 향이 쟁반위에 놓인 음식에서 흘렀다. 음식 말고도 긴 병 하나가 쟁반 위에 있었다.
   “오늘의 추천 음식인 소 안심 스테이크와 해산물 까르보나라입니다.”
   종업원은 빈 그릇을 정리하며 그 자리에 스테이크와 까르보나라를 놓았다. 스테이크는 먹기 좋게 구워진데다 두툼했고, 까르보나라엔 조개, 새우 등 싱싱한 해물이 가득했다.
   프로듀서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군침을 삼켰다. 맞은편의 하루카는 아예 입을 딱 벌리고 감격한 표정이다.
   메인 디시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서비스인 와인입니다.”
   와인 잔 두 개와 프랑스어로 된 라벨이 붙은 와인 하나를 종업원은 소리 안 나게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네? 와인이요?”
   음식에 눈이 팔려있던 하루카와 달리, 프로듀서는 와인이란 말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네. 부르고뉴산 와인입니다. 혹시 싫으시다면 다른 걸로 바꿔드릴까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아직 미성년자인 하루카가 문제였다. 프로듀서는 와인은 괜찮다며 사양하려 했다.
   “아뇨, 괜찮아요. 이걸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와인 병을 잡은 하루카가 빙긋 웃으며 대답해버리자 종업원은 그대로 꾸벅 인사하곤 방을 나섰다. 하루카는 와인 병을 프로듀서 쪽에 놓더니 와인 잔 하나를 재빨리 낚아채 집었다.
   “잠깐, 하루카. 술은 안 돼. 너 아직 미성년자잖아.”
   “에이, 저도 곧 18살이라고요. 그리고 보호자인 프로듀서 씨가 있으시잖아요.”
   “그래도 술은 안 돼.”
   “치, 프로듀서 씨 쫀쫀해요.”
   하루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빈 와인 잔을 손 안에서 빙글빙글 굴렸다. 프로듀서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아무튼 와인은 압수야. 메인 디시나 맛있게 먹자.”
   “네에.”
   힘 빠진 대답과 함께 하루카는 든 잔을 내려놓았다. 축 쳐진 표정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루카는 기운 빠진 눈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봤다. 와인을 못 마시게 된 건 아쉬웠지만 먹음직스러운 스테이크에 하루카는 다시 기운이 났다.
   전부터 꿈꿔왔던 소원 하나 이루는 순간 아닌가. 하루카는 씩씩하게 왼손에는 포크, 오른손에는 나이프를 들었다. 하루카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꾹 누르곤, 오른손의 나이프로 기세 좋게 스테이크를 자르려했다.
   “어라?”
   나이프에 힘을 넣어도 스테이크 잘 잘라지지 않았다. 스테이크가 질겼는지 나이프를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기 좋게 자르기 힘들었다.
   “끙. 에잇, 에잇.”
   하루카는 기합까지 넣어가며 스테이크를 썰었지만 오른손 아귀만 아파왔다.
   “잘 안 잘려? 이리 줘 봐봐.”
   하루카는 나이프를 스테이크 접시 위에 놓고 접시 째 프로듀서에게 건넸다. 프로듀서는 먹던 스파게티를 옆으로 치우고, 나이프와 포크를 집었다.
   프로듀서가 나이프에 힘을 넣자, 스테이크는 손쉽게 잘렸다. 낑낑대던 자신과는 다른 모습에 하루카는 감탄을 터트렸다.
   “와, 잘 자르시네요!”
   “이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하루카의 응원에 기분이 좋아진 프로듀서는 슥슥 나이프를 더 빨리 놀렸다. 얼마 안 있어 스테이크는 가지런히 먹기 좋은 크기로 잘렸다. 프로듀서는 접시를 다시 하루카에게 건넸다.
   “이제 됐지?”
   “네, 감사해요, 프로듀서 씨.”
   하루카의 표정엔 고마움 반, 다른 감정 반이 떠있었다. 어딘가 쑥스러워 보이는 하루카의 모습에 프로듀서는 볼을 긁적였다.
   “아. 혹시 내가 괜히 잘랐나? 하루카 스테이크 잘라보고 싶었댔잖아.”
   “괜찮아요. 덕분에 다른 소원 이뤘는걸요.”
   “다른 소원?”
   “헤헤.”
   하루카는 그저 웃기만 했다. 꽃처럼 환한 미소에 프로듀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기분 좋아 보였으니.
   프로듀서가 잘라준 덕에 이제 스테이크를 먹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하루카는 마음껏 스테이크를 음미했고, 프로듀서도 진한 크림소스를 얹은 까르보나라를 먹어갔다.
   어느 정도 메인 디시를 먹자 둘 다 이제 배가 슬슬 불러왔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하루카의 눈에 프로듀서의 옆에 얌전히 놓인 와인이 다시 들어왔다.
   ‘으음, 한번 마셔보고 싶은데.’
   어떤 맛일까. 하루카에게 와인에 관한 품평은 만화책에서나 봤기에, 와인 맛 하면 생각나는 건 상쾌한 민트 향기, 녹는 듯한 달콤한 보디 밸런스와 벨벳처럼 보드라운 혀의 감촉 등뿐이다.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하기 힘든 평이기에 하루카는 와인의 맛이 더욱 궁금했다.
   “프로듀서 씨, 저 와인 딱 한잔만 먹어보면 안돼요?”
   “와인?”
   “네, 저 어떤 맛인지 궁금해져서.”
   “그래도 술은 역시 좀. 하루카한테 아직 이르잖아.”
   프로듀서는 포크를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래도 전처럼 딱 잘라 말하는 건 아니어서 하루카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 톤, 표정 모두 최대한 바꿔가면서.
   “프로듀서 씨, 저 오늘 1위까지 했는데. 그거 기념으로 건배하는 것도 안돼요?”
   “음…….”
   “프로듀서 씨, 부탁이에요.”
   하루카는 눈물까지 글썽이자, 결국 프로듀서는 하루카의 손을 들어줬다.
   “에휴, 알겠어, 알겠어. 대신 딱 한잔 만이다?”
   “네! 헤헤, 이래서 제가 프로듀서 씨를 좋아한다니까요.”
   방긋 웃는 하루카의 모습에 그만 프로듀서도 웃어버렸다. 프로듀서는 와인 병을 잡아 코르크를 열었다. 미리 코르크가 따져있어 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여기요, 프로듀서 씨.”
   하루카는 재빨리 자신의 와인 잔을 내밀었다.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는 프로듀서를 재촉했다. 하루카에게 와인을 줘도 될지, 마지막으로 고민하다가 프로듀서는 눈 딱 감고 와인을 하루카의 잔에 따랐다.
   ‘그래, 와인 한 잔인데 괜찮겠지. 별 일 있겠어.’
   적어도 프로듀서가 똑바로 정신 차리고만 있으면 괜찮다. 하루카가 어떤 상태가 되든 프로듀서는 챙겨줄 자신이 있었다.
   짙은 선홍색 와인은 부드럽게 흘러 빈 잔을 채웠다. 하루카는 그 모습이 신기해 계속 바라봤다. 프로듀서는 잔이 적당히 채우고 따르는 걸 멈췄다.
   “이제 제가 따라드릴게요. 프로듀서 씨, 이리 줘보세요.”
   “생각보다 무거우니까 조심해.”
   프로듀서는 조심히 와인 병을 하루카에게 넘겼다. 하루카는 읏차 하면서 두 손으로 와인 병을 들었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빈 잔을 하루카에게 내밀었다. 하루카는 혹시 흘릴까 걱정하며 조심조심 와인 병을 기울여 프로듀서의 와인 잔을 채웠다.
   하루카가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르는 광경을 프로듀서는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왠지 이상하네. 하루카가 술을 따라주다니.”
   “아이돌이 다 따라주는 술이라고요. 다른 사람들한테 맘껏 자랑하셔도 되요.”
   에헴, 하며 자신을 뽐내는 하루카에 프로듀서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프로듀서의 잔이 채워지자, 두 사람의 잔은 나란히 와인을 담았다. 포도 향이 나는 와인이 찰랑인다. 프로듀서는 오른손으로 잔을 들었다.
   “하루카.”
   “아, 네.”
   하루카도 똑같이 오른손으로 그녀의 잔을 들었다. 하루카의 새하얀 얼굴은 조명을 받아 은은한 빛을 냈다. 평소보다 성숙한 하루카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프로듀서는 입을 뗐다.
   “하루카, 1위 축하해.”
   프로듀서가 먼저 잔을 내밀자, 하루카도 머뭇머뭇 잔을 내밀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유리잔이 만나 나온 맑은 소리가 방을 울렸다.
   프로듀서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혀를 감싸는 알싸한 알콜의 느낌과 부드러운 포도의 향이 입 안 가득 펴졌다. 와인을 잘 모르는 프로듀서도 충분히 맛있다고 느낄 만큼 좋았다.
   하루카는 가만히 잔에 담긴 와인을 내려보다가, 조심스레 와인을 입에 가져다댔다. 꿀꺽, 꿀꺽 와인이 한 모금 한 모금씩 하루카의 입안으로 넘어갔다.
   “푸하.”
   잔에 담긴 와인을 반이나 비운 하루카는 잔을 내려놓았다. 하루카는 입에 남은 술의 쓴맛이 느껴져 눈살을 찡그렸다.
   “괜찮아?”
   “네, 생각보다 먹을 만해요. 약간 쓴 포도주스 같아요. 으, 왜 어른들은 이런 걸 좋다고 마시는 걸까요.”
   “하루카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너무 쓰면 더 이상 먹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프로듀서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들이켰다. 프로듀서에겐 딱 먹기 좋은 와인이었다. 와인을 삼켰는데도 입안에 풍부한 포도 향이 남는 기분이 들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프로듀서는 와인의 감촉을 즐기며 야경을 바라봤다. 해가 져서 어둠이 깔렸지만 도시는 사람들의 불빛으로 빛났다. 마치 도시를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프로듀서는 야경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하루카랑 이렇게 가만히 있으니 왠지 신기하다. 그동안 계속 함께 달려온 느낌인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신인 시절부터 1위를 차지하기까지. 프로듀서와 하루카는 쉬지 않고 달려왔다. 프로듀서는 어떻게든 하루카를 알리려 노력했고, 하루카는 실력을 키우며 아이돌로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처음엔 스케줄 꽉 채워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리저리 방송국 돌아다니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했던 게 엊그제 같아. 아, 이건 지금도 그렇구나.”
   술기운이 올라선지 프로듀서는 혼잣말을 계속했다. 하루카에게 대답은 없었지만, 아름다운 야경에 젖어 옛 기억이 떠올랐다.
   하루카의 첫 무대, 첫 방송, 그리고 처음 하루카를 본 기억. 처음엔 그냥 귀여운 여자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하루카도 어엿한 아이돌이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하루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프로듀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계속 함께였으니까. 힘들 때나, 기쁠 때나 계속.
   “정말 열심히 했구나. 하루카.”
   “……….”
   “하루카?”
   대답이 없자 프로듀서는 시선을 돌려 하루카를 바라봤다. 하루카는 발그레진 얼굴로 두 손으로 와인 잔을 꼭 쥐고 있었다. 어쩐지 눈빛도 풀려있다.
   프로듀서는 바로 의자에서 일어나 하루카 옆으로 다가갔다.
   “괜찮아, 하루카?”
   “에헤헤, 괜찮아요. 프로듀서 씨♪”
   방긋방긋 웃는 하루카의 미소는 어딘가 살짝 평소와는 달랐다. 헤실헤실, 방긋방긋. 하루카는 즐거워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 와인 다 먹은 거야?”
   하루카가 꼭 쥔 잔엔 와인이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프로듀서가 천천히 마시라고 많이 따라준 걸, 하루카는 짧은 시간에 다 들이켜 버렸다.
   딱 봐도 취한 하루카를 보며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마셨어야지. 에휴.”
   “괜찮다니까요~저, 하나도 안 취했어요오.”
   하루카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프로듀서는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이를 어쩐다. 물 좀 가져다 달라고 해서 먹여봐야겠네.’
   술을 깨는 덴 시원한 물만한 게 없었다. 프로듀서는 벨을 울려 종업원을 부르려 했다.
   지이이잉.
   “어?”
   그때 프로듀서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반쯤 감긴 하루카의 눈도 그쪽을 향했다. 프로듀서는 벨을 누르던 손을 주머니에 넣어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아, 아미구나.”
   액정엔 뜬 건 문자 표시와 ‘후타미 아미’라는 이름이었다. 프로듀서는 문자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에 손을 가져갔다.
   “에잇.”
   그러나 프로듀서보다 먼저 하루카의 손이 핸드폰을 낚아챘다. 술 취한 하루카가 움직이리라곤 상상도 못했기에 프로듀서는 눈앞에서 핸드폰을 빼앗겼다.
   “제가 확인할 거예요. 괜찮죠?”
   프로듀서의 핸드폰을 꼭 쥐며 하루카는 웃는 얼굴로 프로듀서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갑자기 달라진 하루카의 기세에 눌려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보자. ‘오빠, 어디야? 아미랑 저녁 같이 먹을래?’ 라네요. 아미가.”
   “그, 그래? 그럼 답장 보내야겠네. 하루카, 핸드폰 줄래?”
   “싫어요. 제가 대신 보낼래요. 후후후.”
   하루카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경쾌하게 두드렸다. 프로듀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 프로듀서의 핸드폰이 하루카의 손 안에서 부르르 진동했다. 진동 한번. 또 문자였다.
   “와, 또 문자네요. 어디어디. 아, 이번엔 마미구나. 내용은 뭘까나.”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핸드폰을 거칠게 툭툭 조작했다. 문자를 열어 하루카의 손이 멈췄지만, 프로듀서에겐 핸드폰의 내용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빠♡ 어디야? 마미랑 아미 오빠 기다리고 있는데, 저녁 같이 먹자!♡♡’.”
   하루카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문자를 읽었다. 하트 이모티콘은 ‘하트’라고 제대로 발음했다. 프로듀서에겐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는 문자 내용이지만, 하루카가 직접 목소리로 읽어버리니 왠지 위압감이 엄습했다.
   “헤에. 역시 프로듀서 씨 아미, 마미랑 사이좋으시네요.”
   “그, 그거야 뭐. 내가 프로듀싱 하는 아이돌이잖아.”
   “흐응. 그래요?”
   하루카는 가늘게 뜬 눈으로 프로듀서의 위아래를 훑었다. 전신을 스캔당하는 느낌이라 프로듀서는 몸을 움찔했다.
   “아. 그렇구나!”
   갑자기 하루카는 크게 손뼉을 치더니, 반짝이는 눈으로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프로듀서 씨는 로리콘이었군요!”
   “쿨럭, 로, 로리콘이라니!”
   “에, 프로듀서 씨, 로리콘이에요, 로리콘. 야요이나 아미, 마미, 이오리 같이 어린 여자아이들에게만 음흉한 마음을 품는 사람. 아,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네요. 어쩐지 둔하시더라. 프로듀서 씨는 어디까지가 제한이에요? 13살? 14살?”
   “하, 하루카…….”
   프로듀서는 연이은 타격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평소의 하루카와 다르다. 항상 웃으면서, 남을 잘 배려해주는 여자아이였는데.
   “제가 어려질 순 없으니 어쩔 수 없네요. 에휴휴. 슬퍼라.”
   하루카는 눈물 한 방울도 없는 눈가를 손으로 닦았다. 프로듀서는 지금 이 상황을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말로는 도저히 이 하루카를 당해낼 수가 없다. 어떤 계기라도 있으면.
   지이이잉, 지이잉.
   하늘이 프로듀서의 소원을 들어주듯, 하루카가 꾹 쥐고 있는 프로듀서의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이번엔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하루카는 핸드폰 액정을 슥 확인했다.
   “전화네요. 미키한테서.”
   “전화? 그, 그럼 내가 받을게.”
   미키로부터의 전화는 프로듀서에게 내려온 구원의 손길이었다. 핸드폰을 달라며 프로듀서가 하루카에게 다가가자, 하루카는 탁 손을 들어 프로듀서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곤 하루카가 직접 미키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허니! 어라, 허니가 아닌 거야?」
   “응. 나 하루카야. 미키.”
   하루카는 슬쩍 프로듀서 쪽을 바라보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미키 스케줄 끝나서 허니랑 저녁 먹으려고 전화 건거야. 하루카, 허니 바꿔줄래?」
   “아. 프로듀서 씨는 지금 전화 못 받을 것 같은데. 나랑 ‘단둘’이서 저녁 먹고 있거든.”
   하루카는 말하면서 빙그레 미소 지었다. 물론 미키한테 그 미소가 전달 될 리는 없었다.
  「에엑, 미키도 같이 먹을래! 어디 인거야?」
   “후후, 그건 비밀. 이만 끊을게, 미키.”
  「하, 하루카?」
   하루카는 미키의 외침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프로듀서는 통화 내용을 다 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하루카의 말로부터 대강 통화의 흐름을 알았다.
   하루카는 핸드폰을 가만히 손에 쥔 채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어두운 조명 탓인지 프로듀서는 하루카의 표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차마 질문하기 힘든 하루카의 분위기에, 프로듀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저……하루카?”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대답 대신 하루카는 와인 병을 집어 자신의 잔에 다시 와인을 따랐다. 와인을 거세게 따른 탓에 하루카의 잔 안에서 크게 찰랑였다.
   하루카는 주저 없이 와인을 쭉 들이켰다. 깔끔하게 잔을 비워버린 하루카는 테이블에 잔을 딱 소리를 내며 내려놓았다.
   프로듀서는 그저 말없이 하루카의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프로듀서 씨.”
   “네, 넵.”
   “프로듀서 씨는 바람둥이네요. 아니, 지골로이려나.”
   “지, 지골로?”
   생전 처음 듣는 호칭에 프로듀서는 크게 당황했다. 바람둥이에 지골로라니. 한 평생 여자친구 없는 인생이었는데.
   “미키를 넘어뜨리더니 이젠 마미까지……. 거기에 아미까지 세트라뇨. 벌써 세 명이에요, 세 명.”
   “저, 하루카?”
   “잠깐이라도 눈 떼면 금세 다른 여자아이랑 희희덕거리고 있고. 원래 코토리 씨나, 아즈사 씨, 치하야가 걱정 돼서 그쪽에만 신경 썼는데, 갑자기 마미랑 아미가 튀어나와 버리고. 마코토랑 유키호도 서서히 위험해보이고. 정말,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요.”
   하루카는 쌓아둔 울분을 토해냈다. 한명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런데 두더지 잡기처럼 이곳저곳에서 솟아오르니 아무리 하루카라 해도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정작 프로듀서는,
   ‘하루카가 뭘 말하는지 나야말로 모르겠다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하루카에겐 위험하게 보인다고 하나 프로듀서에게는 요즘 아미, 마미의 행동은 평소보다 더 장난치는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 하루카가 말한 다른 아이돌의 일은 전혀 모르겠고.
   하루카는 깊게 한탄하다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까지 더욱 붉어졌다.
   “거기에 마미랑, 키, 키 아니 뽀뽀까지 하다니요! 프로듀서 씨는 정말 저질이에요! 이 로리콘!”
   저질, 로리콘의 연타에 프로듀서는 휘청했지만 이번엔 발끈하며 일어섰다.
   “뽀, 뽀뽀? 난 마미랑 뽀뽀한 적 없어! 아, 혹시 마미랑 인공호흡한 거 말하는 거야?”
   “그래요. 그거에요, 그거.”
   “그건 인공호흡이잖아. 노카운트야, 노카운트. 마미가 해주지 않았다면 나 죽을 뻔했다고.”
   프로듀서 안에선 마미의 인공호흡은 키스 아니 뽀뽀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한 숭고한 행위. 단지 그것뿐이다.
   그러자 하루카의 표정이 눈에 띠게 밝아졌다. 하루카는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프로듀서 씨, 분명 노카운트라고 하셨죠?”
   “응. 노카운트. 난 첫 키스도 못해본 몸이라고.”
   프로듀서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이 나이까지 첫 키스도 못해본 건 부끄러웠지만, 자신의 순수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헤에. 그래요?”
   프로듀서의 말이 통했는지 하루카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저질이라며 쏘아붙이던 하루카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다. 붉었던 볼도 많이 하얗게 변했다.
   하루카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차분한 동작에 프로듀서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하루카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프로듀서 씨, 그럼 이 의자에 앉아주실래요?”
   “의자?”
   “네, 여기에요.”
   하루카가 손으로 안내까지 하자 프로듀서는 별 생각 없이 의자에 앉았다. 하루카가 계속 앉아있어선지 의자는 하루카의 온기로 따뜻했다.
   그 순간, 하루카가 움직였다.
   하루카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의자에 앉은 프로듀서의 무릎 위에 앉아버렸다. 술 냄새와 하루카의 체향이 섞여 확 풍겨와 프로듀서는 아찔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뜬 프로듀서의 눈앞엔 빙글빙글 웃는 하루카의 얼굴이 있었다. 거기다 무릎에 올라탄 하루카가 체중을 실어 몸을 눌러왔다. 온몸을 덮치는 듯한 부드러움에 프로듀서는 기겁했다.
   “자, 자, 잠깐! 뭐하는 거야?”
   “후훗, 가만히 있으세요. 이번에야말로 제가 좋은 거 해드릴 테니.”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하루카의 숨결까지 들려 프로듀서의 귀를 괴롭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 해도 프로듀서는 이미 몸에 힘이 빠져버려 저항할 수가 없었다.
   하루카는 당황해하는 프로듀서가 귀여워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더니 얼굴을 슥 프로듀서의 귓가에 가져가,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꺅!”
   프로듀서는 그만 여자 같은 비명을 질러버렸다. 하루카가 불어넣은 바람이 귀를 간질여, 여러 가지 의미로 점점 버티기 힘들었다.
   “프로듀서 씨도 귀엽게 우시네요. 아아, 귀여워라.”
   하루카는 쿡쿡 프로듀서의 볼을 찔렀다. 연하의 여자아이에게 이런 취급 받으면 화를 낼 법도 한데, 왠지 프로듀서는 어색한 기분이 들지가 않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이런 모습으론 있을 수 없다. 프로듀서는 큰 맘 먹고 큰소리를 냈다.
   “하루카, 아무리 나라고 해도 계속하면 화낼 거야!”
   “헤에. 진짜요? 프로듀서 씨, 이런 하루카는 싫은가요?”
   하루카는 고개를 갸웃하며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프로듀서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하루카는 씩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프로듀서의 코를 툭툭 두드렸다.
   하루카의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워서 프로듀서의 시선이 점점 하루카에게 빼앗겼다. 하루카는 몸을 조금 일으켜 프로듀서를 똑바로 내려다봤다.
   “자, 이제 선물 타임이에요. 프로듀서 씨, 생일 선물 받아갈게요.”
   “생일 선―”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하루카의 입술이 프로듀서의 입술을 덮었다. 프로듀서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으나 하루카는 멈추지 않았다. 꾸욱. 더 밀어붙이며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입술을 탐닉했다.
   ‘위험해! 위험하다고!’
   입술에 닿는 아찔한 감촉에 프로듀서는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이 부드러운 촉감을 거부할 순 없다. 촉촉하면서도 따스한 하루카의 입술을.
   점점 희미해지려는 이성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프로듀서는 다시 몸을 크게 움직였다.
   그러자 스륵 하고 하루카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품에 쏙 안겼다. 프로듀서는 그제야 참던 숨을 내쉬었다.
   “푸하아. 하루카?”
   “…….”
   갑자기 키스를 해온 장본인, 하루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프로듀서는 고개를 움직여 하루카의 얼굴을 확인했다.
   “…쿠울.”
   “자버린 거냐…….”
   방금 전의 박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하루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끝까지 오른 술기운을 견디지 못한 거다. 술을 한 번도 먹지 않은 여자아이가 와인 두 잔, 그것도 한 잔은 원 샷까지 해버렸으니 멀쩡할 리가 없다.
   “하아. 그래도 다행이다.”
   프로듀서는 깊이, 정말로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변한 하루카는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다. 복종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누가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느낌이라, 하루카가 깨어있다면 프로듀서는 그대로 하루카의 페이스에 말려버렸을 것이다.
   ‘하루카는 절대 술 먹이면 안 되겠다.’
   이번 일로 프로듀서는 마음 깊이 맹세했다. 술 먹으면 인격이 변한다고 하던데, 하루카가 딱 그런 사람이다. 그것도 엄청난 인격으로 변해버리니.
   프로듀서의 품 안에서 하루카는 정말 얌전하게 잠들어있었다. 그 모습에 프로듀서는 평소의 하루카가 떠올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루카는 평범한 여자아이지만, 그 안엔 엄청난 모습을 품은 아이돌이다. 솔직하면서 귀엽고, 덜렁거리고, 어떨 땐 무섭기도 하는, 그런 아이돌.
   프로듀서는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하루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앞으로도 열심히 하자. 하루카.”
   “뭘 열심히 하자는 거야? 허니?”
   “엑?”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프로듀서는 당황해 고개를 돌렸다.
   “미, 미키? 이오리, 아미, 마미까지?”
   “오빠, 안녕안녕~!”
   “하아, 정말 저질이네.”
   아미, 마미는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면서 프로듀서를 반겼고, 이오리는 눈을 찌푸리며 프로듀서를 경멸 담긴 눈빛을 내려다봤다. 그 옆의 미키는 잔뜩 화가 난 표정이었다.
   “허니! 이상해서 와봤더니 지금 하루카랑 뭐하는 거야!”
   “하, 하루카랑?”
   그 말에 프로듀서는 자신의 상태를 실감했다. 의자에 앉아 하루카를 온몸으로 안고 있다. 거기에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무릎에 앉아있다.
   “잠깐, 이건 하루카가 술에 취해서 쓰러진 거야! 난 아무 짓도 안했다고!”
   “…으음, 프로듀서 씨…”
   프로듀서의 변명을 부정하듯 하루카가 프로듀서에게 더 매달려왔다. 프로듀서는 절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미키에겐 먹히지 않았다.
   “허니, 실망이야!”
   “그, 그런 거 아니라니까!”
   “에헤헤, 거긴 안 된다니까요, 프로듀서 씨….”
   “아니긴 뭐가 아냐. 허니는 바람둥이!”
   프로듀서가 변명하면, 타이밍 좋게 더 안겨오는 하루카, 그리고 더 화를 내는 미키.
   마미, 아미는 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아미, 마미도 힘내야겠어.”
   “응응. 아미는 마미 편이니까! 파이팅!”
   어쩐지 의욕을 불태우는 마미와 아미는 그 옆에서 열띤 응원을 보냈다.
   “하아. 꼴사나운 수라장이네.”
   이 광경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 선 이오리의 평을 끝으로, 그 날의 수라장은 막을 내렸다.

   * * * * * * * * *

  「4월 3일, 프로듀서의 일기
   …그때 일을 계기로 미키가 계속 달라붙어 온다. 리츠코한테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아도, 미키는 왠지 질수 없다면서 더더욱 나와 같이 있으려 했다. 마치 누군가로부터 날 지키려는 경호인처럼. 신경 쓰여 일이 안 된다. 힘들다.
   …술에 취해 그런 모습을 보여준 하루카는 다음 날 정신 차리자마자 바로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하루카한테 술 먹인 내 탓도 있기에 괜찮다며 하루카를 다독였다. 그 뒤로는 서로 힘을 모아 착실히 공연을 준비해 무사히 생일 기념 하루카 단독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공연 끝나고 뒤풀이 겸 하루카 생일 파티에서, 모두가 하루카에게 선물을 주는 걸 보곤 그만 하루카의 생일 선물을 깜빡한 걸 깨달았다. 좋은 거 선물해주겠다고 했는데, 면목이 없어서 미안하다고 눈을 질끈 감고 사과하니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선물은 ‘안 받아도’ 된다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해줬다. 역시 하루카는 착한 아이구나. 다음 생일 땐 꼭 근사한 걸로 미리 준비해놔야지…」



   이걸로 '이런 하루카는 싫은가요?' 끝이에요. 다음에 올릴 글은 짤막한 단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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