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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이런 하루카는 싫은가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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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5, 2012 00:43에 작성됨.

   차를 지하주차장에 놓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저녁 시간이라선지 백화점의 입구부터 사람들이 가득했다. 가족끼리 온 사람, 연인끼리 온 사람 등등. 아이들의 꺄르륵 소리까지 저편에서 들렸다.
   프로듀서는 벌써부터 인파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와, 확실히 인기 좋구나. 사람들이 백화점에 이렇게 많은 건 오랜만에 봐.”
   “그럼요. 여기가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선 핫 플레이스에요. 다른 아이돌들도 항상 오고 싶다고 노래 부르는 걸요. 여기만 오면 영화, 밥, 쇼핑 다 한곳에서 해결되니까요.”
   “그건 좋네.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눈에 띠진 않겠다.”
   유명 아이돌 하루카다. 거기다 오늘 1위를 거머쥔 인기절정 아이돌. 그런 만큼 변장을 했어도 아이돌 특유의 분위기나 미모는 역시 감추지 못했다. 유심히 살펴보면 누구나 금방 하루카란 걸 눈치 챌 수 있다.
   “나무를 숨기면 숲에, 라는 거군요. 프로듀서 씨.”
   “그렇지. 하루카는 잘나가는 아이돌이니까 이런 모습을 괜히 사람들 눈에 띠면 곤란해지니 조심하자.”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사복 차림으로 남자와 단 둘이 있는 여자 아이돌. 자칫하면 스캔들이 터질지도 모른다고 프로듀서는 생각했다. 물론 기자들이 일거수일투족을 쫓아다닐 만큼 아직 하루카가 유명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캔들은 여자 아이돌에게 타격이 크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프로듀서는 신중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런두런 돌아보며 발을 내딛었다. 혹시 알아보지는 않을는지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정작 그 모습이 부자연스러워 유독 인파 속에서 눈에 튀었다.
   “프로듀서 씨, 표정이 굳어 있어요. 너무 그러면 오히려 더 사람들이 신경 쓸 거예요.”
   “그, 그런가? 그래도 알아보면 귀찮잖아. 만사불여튼튼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냐.”
   “에휴.”
   아직까지 딱딱한 프로듀서를 보며 하루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쓸데없이 진지한 사람이구나. 그래도 하루카는 그런 프로듀서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 다 큰 남자가 저리 행동하니.
   “에잇.”
   하루카는 큰 맘 먹고 프로듀서의 왼팔에 팔짱을 꼈다. 갑작스런 부드러운 감촉에 프로듀서가 깜짝 놀라 움찔하자 하루카는 오른팔에 더 힘을 넣어 꾹 달라붙었다.
   “하, 하루카?”
   “차라리 이게 나아요, 프로듀서 씨. 누가 천하의 아마미 하루카가 남자랑 다정하게 팔짱끼고 이런 데를 당당히 걸어 다닌다고 생각하겠어요? 역발상이에요, 역발상.”
   히죽 웃으며 하루카는 무척 가까워진 프로듀서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 그렇긴 한데…….”
   하루카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스캔들을 누구보다도 신경 쓰는 아이돌이 당당히 남자와 팔짱끼고 핑크빛 분위기를 뿌리며 다닌다고는 생각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프로듀서는 쉽게 수긍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너무 가까워! 이것저것 닿는 느낌이라 힘들다고!’
   하루카가 워낙 밀착해 와서 프로듀서의 왼팔은 부드러운 베개에 감싸진 듯한 기분이었다. 베개라기 보단 몽글몽글한 마시멜로가 닿는 느낌이다. 아무리 프로듀서와 아이돌 관계라 해도 프로듀서도 남자인지라, 무심히 넘어가지 못했다.
   프로듀서는 차마 하루카 쪽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하루카는 딱딱해진 프로듀서의 반응에 의아해하다가 프로듀서의 볼이 슬쩍 붉어진 걸 보곤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귀여워라. 프로듀서 씨도 이런 모습을 하는구나.’
   왜 아이들이 좋아하는 상대에게 무심코 더 장난치려 하는지 하루카는 지금 이해했다. 분명 이렇게 당황해하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겠지.
   하루카가 이미 다 눈치 챘다는 걸 모르는 프로듀서는 괜히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말을 꺼냈다.
   “하, 하루카. 일단 어디 갈 거야? 쇼핑하러 가?”
   “음, 글쎄요. 뭐할까나.”
   “어라, 뭐할지 생각 안하고 온 거야?”
   “우선은 이 백화점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여기 오면 이것저것 다 할 수 있으니까, 와서 뭐할지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잖아요.”
   워낙 바쁘게 스케줄이 치여 살다보니 이렇게 느긋이 보내는 시간도 적었다. 사람이 많아 주위가 소란스러워도 나름대로 풍미가 있다.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보냈기에 사람 속에 녹아드는 기분이 하루카는 싫지 않았다.
   “그럼 쇼핑센터 쪽이라도 가볼래? 윈도우 쇼핑도 좋아하지, 하루카?”
   “네. 예쁜 옷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니까요. 이제 봄옷도 한창 많이 나올 때니까, 기대되네요. 어울리는 옷이 있으려나.”
   아이돌이란 직업 특성상 딱히 사복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코디가 붙어 있으니 방송시 옷도 직접 고를 필요 없고, 학교도 교복이면 된다. 요즘엔 협찬도 들어오고 있어 하루카는 직접 옷을 산 적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했다. 예전에 아직 일이 많지 않을 때 동료 아이돌들이랑 즐겁게 쇼핑하러 갔을 때를 떠올리며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어서 가요, 프로듀서 씨!”
   팔짱낀 하루카는 프로듀서를 끌어가다시피 앞으로 걸어갔다. 한껏 들뜬 미소엔 당해낼 수가 없어서 프로듀서도 웃는 얼굴로 하루카에게 몸을 맡겼다.
   둘은 먼저 백화점의 1층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백화점의 1층은 명품 화장품이나 향수, 지갑, 귀금속 등 값비싼 물건을 파는 가게가 많았다. 그다지 이런 쪽엔 관심이 없는 프로듀서도 알만큼 유명한 명품 브랜드 가게가 곳곳에 들어서있다. 돈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선지 가게들은 저마다 번쩍이는 장식물로 치장해 시선을 끌었다. 점원들도 깔끔한 정장을 빼입고 외모도 수준급이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욱 자아냈다.
   아직 어린 하루카나, 그냥 정장만 입은 프로듀서의 조합은 이런 장소에는 그렇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선지 점원들도 둘에 대해 적극적으로 호객 행위는 하지 않았다. 지나가다 가끔 한두 명이 둘러보고 가라고 부르는 정도다. 덕분에 둘은 편하게 구경했다.
   하루카는 멋진 명품을 보며 계속 우와, 우와하며 감탄했다. 프로듀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먼 세상 물건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구경했다. 솔직히 프로듀서는 세련된 디자인이나 물건의 질 같은 건 잘 몰랐지만, 가격표를 보곤 명품이 왜 명품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사람들이 명품, 명품 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
   그렇게 1층을 한 바퀴 돌 무렵에, 하루카는 한 가게에서 우뚝 멈춰 섰다.
   “프로듀서 씨, 여기 들어가 볼래요?”
   “향수 가게?”
   프로듀서는 하루카가 가리킨 가게를 보았다. 다른 가게들은 프로듀서의 월급엔 꿈도 못 꿀 물건들이 놓여 있어선지 차마 들어가기 부담스러웠다. 점원의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도 그랬고. 하지만 향수 가게라면 다른 것보단 나아 보였다.
   프로듀서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보자. 마침 나도 향수 다 써서 봐봐야 돼.”
   미키가 선물한 향수를 생각보다 빨리 써버려서, 프로듀서는 향수를 새로 사야 된다고 예전부터 생각했었다. 향수 냄새를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한동안 쓰다가 안 쓰려니 왠지 어색했다.
   “사실 그것 때매 가자는 거예요. 예전에 같이 향수 보러 가자고 말했었잖아요. 프로듀서 씨.”
   “맞다, 그랬었지.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잊고 있었어.”
   그 날―하루카가 스토커에 쫓겨 프로듀서의 방에서 자고 간 날에 하루카가 다음번에 향수 보러 같이 가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직접 프로듀서에게 어울리는 좋은 향수로 골라주겠다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하루카가 말하던 걸 프로듀서는 떠올렸다.
   “아무튼 어서 들어가 봐요.”
   하루카는 프로듀서를 이끌고 가게로 쑥 들어갔다. 자동문이 슥 열리며 가게에 들어가자 기분 좋은 향기가 곳곳에서 풍겨왔다. 마침 가게 안에 사람도 별로 없어서, 점원은 두 사람을 바로 발견했다.
   “어서 오세요, 향수 보러 오셨나요?”
   환하게 접객용 미소를 띠우며 사람 좋게 생긴 여점원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 네. 남성용 향수 괜찮은 거 있나요?”
   “남성용 말씀이세요? 아, 혹시 이쪽 남자 분이 쓰실 건가요?”
   “네. 제가 직접 골라주기로 했거든요.”
   하루카가 선선히 말하자 여점원은 알겠다며 빙긋 웃었다. 여점원은 가게의 한쪽을 가리켰다.
   “이쪽에 남성용 향수가 모아져 있습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여점원의 뒤를 하루카와 프로듀서는 순순히 따라갔다. 진열장에 전시된 남성용 향수는 대부분 케이스가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여성용 향수는 꽃 모양이나 리본이 잔뜩 달려 귀엽거나 사랑스러운 인상을 주는 케이스가 있는 반면, 남성용 향수는 대게 깔끔한 인상을 줬다.
   꽤나 많은 향수가 있어서 하루카와 프로듀서는 선뜻 어떤 향수를 고르기 어려웠다. 모든 향수에 짤막하게 어떤 향이라고 설명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론 향을 추측하긴 어렵다.
   “저, 추천하시는 향수는 없나요?”
   결국 하루카는 옆에 대기한 여점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여점원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프로듀서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곤 입을 열었다.
   “음, 남자친구 분은 어떤 일을 하세요?”
   “엑, 나, 남자친구요?”
   ‘남자친구’. 확하고 하루카의 볼이 붉어졌다. 프로듀서도 갑작스런 점원의 언급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정작 여점원은 두 사람이 갑자기 왜 그런지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아. 두 분 혹시 연인사이가 아니세요? 다정하게 팔짱 끼고 계시기에 전 당연히 연인사인 줄 알고.”
   프로듀서와 하루카는 누가 봐도 연인사이였기에 여점원에겐 실수는 없었다. 프로듀서도 생각보다 동안이고, 하루카도 아이돌이다 보니 일반 여고생과는 다른 느낌이다. 혹시 남매 사이로 보일 가능성도 있으나, 애초에 남매가 이렇게 사이좋게 달라붙어 팔짱끼며 쇼핑할 리 없다.
   그래도 여점원은 혹시 손님에게 괜한 말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때 하루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여점원의 눈동자가 갑자기 커졌다. 문득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허둥지둥하던 프로듀서는 재빨리 그걸 알아차렸다.
   “예에, 연인사이 맞아요. 사귄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아직 많이 쑥스러운 가 봅니다. 그렇지?”
   프로듀서는 대답을 요구하며 하루카를 바라봤다. 갑작스런 프로듀서의 선언에 하루카는 ‘에? 에?’ 하며 당황했지만 이윽고 프로듀서의 긴박한 눈동자를 보곤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해했다.
   “아이 참, 부끄럽게 왜 그래. 오빠.”
   한껏 부끄러워하는 연하의 여자친구를 연기하며 하루카는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모양새로 폭하고 얼굴을 프로듀서의 옷에 묻어 가렸다. 호칭도 프로듀서에서 오빠로 바꿨다.
   갑자기 눈앞에서 커플 짓하는 바보 커플의 모습에 현재 솔로인 여점원은 화가 치밀어 문득 떠올리던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녀는 무너지려는 접객용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보기 좋은 커플이시네요. 저, 그래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아, 전 영업 쪽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프로듀서의 옷에 묻어 얼굴을 가린 하루카를 대신해 프로듀서가 대답했다.
   “영업이시라면 사람들도 많이 만나실테니 사람의 기분을 맑게 하는 상쾌한 향이나, 아니면 아예 달콤한 향으로 사람의 시선을 끄는 달달한 향도 괜찮으시겠네요.”
   여점원은 능숙하게 프로듀서에게 어울릴 만한 향수를 수많은 향수 속에서 슥슥 골라냈다. 상쾌한 향수 두 개, 달달한 향수 두 개 합쳐서 총 향수 네 개를 꺼내 프로듀서와 하루카에게 보여줬다.
   “한 번 시향해보시겠어요?”
   “네. 직접 맡아보는 게 좋겠네요.”
   프로듀서의 부탁에 여점원은 시향지를 꺼내 먼저 달달한 쪽 향수를 뿌리려했다.
   “달달한 향수는 안하셔도 돼요. 오빠한텐 그쪽보단 상쾌한 향수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하루카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여점원에게 딱 잘라 주문했다. 일종의 의지가 담겼다고 생각될 정도로 단호한 태도에 여점원은 살짝 당황해 괜찮겠냐며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프로듀서는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듀서는 상쾌한 향수나 달달한 향수 중 뭘 더 선호하진 않았다. 전에 쓰던 달달한 향수도 미키한테 받아서 쓰기 시작한 거였고, 여긴 하루카를 위해 온 거니 하루카의 의견에 따라주는 게 보기 좋았다.
   여점원은 달달한 쪽 향수 두 개를 다시 진열장에 놓고 상쾌한 향수 두 개를 각각 시향지에 뿌려서 프로듀서와 하루카 앞에 내밀었다.
   “한번 맡아보세요.”
   프로듀서가 먼저 왼쪽 시향지의 냄새를 맡았다. 세탁 후 깨끗이 빨아진 이불의 냄새 같았다. 세탁 후의 상쾌하고 개운한 기분 같아서 좋았다. 다음은 오른쪽 시향지. 이 향수의 향은 풀냄새처럼 싱그러웠다. 식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거 같아 기분도 한결 편해졌다. 확실히 둘 다 상쾌한 계열의 향수라 코로 크게 들이쉬어도 전에 달달한 향수 같은 부담이 별로 없었다.
   “한번 맡아볼래?”
   하루카는 흐트러진 모자를 정돈하는 척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을 더 가린 다음 코를 시향지에 가져댔다. 작고 앙증맞은 하루카의 코가 킁킁하며 움찔했다. 왼쪽, 오른쪽. 하루카는 양쪽 시향지를 꼼꼼히 번갈아 맡았다.
   “흠, 흠. 이쪽도 괜찮고, 저쪽도 나름대로. 음―”
   하루카는 손을 턱에 가져대며 신중히 고민했다. 개운한 향과 싱그러운 향. 생각보다 결정이 쉽지 않아 하루카는 프로듀서를 돌아봤다.
   “오빠는 어느 게 좋아요?”
   “나야 어떤 거든 상관없어. 하―”
   오빠라는 낯선 호칭에도 당황하지 않고 프로듀서는 말을 이어가다가 무심코 ‘하루카’라고 부를 뻔한 걸 재빨리 멈췄다. 여점원의 의심이 어떤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루카라고 부르는 건 위험했다.
   “오빠?”
   자신을 부르려다가 갑자기 입을 닫은 프로듀서를 하루카는 의아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프로듀서는 하루카 말고 다른 호칭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찾았다.
   ‘너’라는 호칭은 연인사이치곤 너무 딱딱하다. 연인끼리 편하게 부를 만한, 그런 호칭은―
   “‘자기’가 결정해줘. 나는 자기가 골라주는 거면 뭐든 괜찮으니까.”
   이것밖에 없으리라 하며 프로듀서는 자신 있게 하루카를 바라봤다. 자신치곤 훌륭한 호칭을 골랐다며, 프로듀서가 속으로 자화자찬할 무렵 하루카의 눈동자가 놀라 동그래졌다.
   ‘자기? 프로듀서 씨가 자기라고 불렀어?’
   거기다 왠지 프로듀서가 그윽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거 같아 하루카는 더 폭발했다. 자기라니. 자기란 호칭은 정말 사이좋은 커플끼리 쓰는 게 아닌가. 자기야, 밥 먹었어? 나,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걸 등등. 여러 드라마나 소설에서 커플들이 자신들의 러브러브를 뽐낼 때 항상 등장하는 호칭이다. 그런 호칭을 프로듀서가 해주다니.
   ‘우와, 우와. 기뻐서 죽을 것 같아! 우으으!’
   하루카의 표정이 이리저리 변해갔다. 확하고 달아오른 얼굴은 갑자기 웃거나, 두 눈을 찡긋 감거나 하며 일변했고 어쩐지 하루카의 숨결도 거칠어졌다.
   이번엔 프로듀서가 하루카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 나름대로 자기란 호칭은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틀렸나, 하며 프로슈서는 하루카의 폭발할 듯한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앗! 이러면 안 되지 안 돼. 프로듀서 씨가 날 이상한 눈으로 보잖아.’
   하루카도 프로듀서의 그런 시선을 눈치 채 최대한 급격히 끓어오른 감정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거칠어진 호흡도 정돈하고, 흥분해 흔들리던 시선도 처리했다. 다만 두근거리는 심장만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전 이 오른쪽 향수가 좋아요. 싱그러운 풀 향이 오빠한텐 더 잘 어울려요.”
   “그래? 그럼 이 향수로 할게요. 바로 계산해주시겠어요?”
   하루카의 선택이면 됐다. 프로듀서가 오른쪽 시향지를 가리키자 점원은 알겠다며 고개를 숙이곤, 진열장에서 오른쪽 시향지의 향수를 꺼내 먼저 계산대로 향했다.
   “네, 이쪽으로 와주세요.”
   둘은 점원을 따라 계산대로 향했다. 점원이 향수의 포장지에 붙은 바코드기로 찍자 바로 계산대에서 가격이 나왔다. 이천오백엔. 남성용 향수에다 용량도 그리 크지 않아선지 가격은 백화점에서 파는 것 치곤 비싸지 않았다.
   이정도면 프로듀서한테도 큰 부담은 없다. 프로듀서가 계산을 하기 위해 주머니서 지갑을 꺼내려하자, 그 손을 하루카가 붙잡았다.
   “제가 사게 해주세요. 전부터 오빠한테 향수 선물하고 싶었다고요.”
   “음, 그래도 내가 살게. 골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걸. 또 어차피 내가 쓰는 거니까.”
   “아니에요. 명색이 ‘여자친구’인데, 이정도 선물은 기본이잖아요? 대신 생일 때 좋은 선물 기대할게요.”
   빙그레 웃으며 하루카는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하루카가 이렇게까지 말하니 프로듀서도 별수 없이 물러섰다. 대신 하루카의 생일 선물을 잘 골라야겠다고 머리 깊숙이 큰 글자로 기입했다.
   하루카는 지갑에서 이천오백엔을 꺼내 점원에게 건넸다. 돈을 쓰면서도 하루카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명색이 ‘여자친구’인데, 라. 이 대사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
   진짜 여자 친구가 된 기분이라 무척 즐겁다. 하루카는 들뜨다 못해 무심코 콧노래를 할 뻔한 걸 꾹 참았다. 대신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네, 이천오백엔 받았습니다. 여기 영수증하고 향수니 가져가시면 돼요.”
   “넵, 알겠습니다. 이제 가요, 오빠.”
   하루카는 영수증과 향수를 착 챙기곤 다시 프로듀서의 손을 잡은 채 계산대를 떠났다. 프로듀서는 하루카에 이끌려 순순히 따라 나갔다.
   “안녕히 가세요.”
   여점원은 가게를 나서는 두 사람의 등을 향해 공손히 몸을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이 나가고 자동문이 닫힌 다음에야 여점원은 몸을 바로 했다. 그러곤 다른 손님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아. 바보 커플이구만. 나도 애인 있었으면 좋겠네.”
   처음 하루카를 봤을 때 혹시 ‘아마미 하루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이미 여점원의 마음에 없었다. 남은 건 솔로인 자신 앞에서 무심하게도 커플 짓하며 떠나간 바보 커플에 대한 원망뿐이다.
   그렇게 자신들을 향해 누군가 원한을 품었다는 건 알아차리지도 못한 두 사람은, 가게를 나와서야 서로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아. 다행이네요. 점원 씨 끝까지 눈치 채지 못했겠죠?”
   “응. 그런 거 같아. 눈치 챘으면 바로 물어봤을 거야.”
   “점원 씨가 갑자기 깜짝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볼 때 심장이 다 철렁했다니까요. 들켰으면 엄청 곤란했을 거예요, 분명.”
   “뭐, 안 들켰으니 다행이지. 그래도 확실히 하루카는 연기 잘하는 구나. 이번에 다시 한 번 깨달았어.”
   연하의 여자친구를 연기하는 하루카의 모습은 정말로 실제 같아서, 상대역인 프로듀서도 속으로 몇 번이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래요? 연기라. 그보다 프로듀서 씨도 잘하시던데요. 갑자기 ‘자기’라니. 저 깜짝 놀랐다고요.”
   “하하, 역시 좀 그랬나? 그땐 딱히 다른 호칭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때를 떠올리면 역시 부끄러워 프로듀서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하루카를 자기라고 부르는 상황이 올 줄이야.
   “어쨌든 하루카가 잘 맞춰줘서 살았어. 다음에 연기 오디션 좋은 걸로 꼭 알아올게. 이정도 연기 실력이면 분명 합격할 거야. 임기응변 능력도 좋으니.”
   프로듀서는 하루카의 연기 실력을 다시 한 번 칭찬했다. 아이돌에게 연기의 재능이 있다면 그걸 잘 살리는 것도 프로듀서의 일이다. 전에 뮤지컬에 출연한 경력에다 이정도 실력이면 연기자로서 활약하기에 충분한 재능이다.
   하루카의 재능이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봐선지 프로듀서의 눈이 다시 열정으로 차올랐다.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며 프로듀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기, 연기하는 프로듀서를 보며 하루카는 입술을 삐죽이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프로듀서에게 안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후우, 연기 아닌데…….”
   “응? 뭐라고 했어?”
   “아무 것도 아니에요. 흥.”
   잡은 손을 툭하고 풀어버리며 하루카는 프로듀서보다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하루카의 뒷모습을 보며 프로듀서는 고개를 갸웃했다.
   “맞다. 프로듀서 씨, 향수 받으세요.”
   앞에 가던 하루카는 갑자기 몸을 돌려 프로듀서에게 방금 산 향수를 휙하고 건넸다. 프로듀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향수를 받아들었다.
   “아, 고마워 하루카. 향수 잘 쓸게.”
   “대신 생일 선물 기대할거에요. 흥.”
   하루카는 콧방귀를 뀌며 다시 몸을 돌려버렸다. 프로듀서는 갑자기 하루카의 토라진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발걸음을 놀려 하루카의 옆에 섰다.
   “알겠어. 생일 선물 엄청난 걸로 해줄게. 마음 놓고 기대해도 좋아.”
   프로듀서는 토라진 하루카를 보며 자신만만히 말했다. 솔직히 하루카의 생일 선물을 뭐로 해야 될지 도통 모르겠지만 토라진 하루카를 풀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약속한 거에요?”
   “응. 내가 빈말하는 거 봤어?”
   “몇 번이나 봤다고요. 그래도, 전 너그러우니까 이번엔 넘어가드릴게요.”
   뭘 넘어가 준다는 건지 프로듀서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하루카의 표정이 많이 풀어진 걸 보곤 안심했다.
   프로듀서는 하루카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다시 말을 건넸다.
   “그럼, 이제 돌아가서 연습할까?”
   “네? 연습이요?”
   “응. 시간도 이정도면 꽤 됐으니. 이제 돌아가서 연습해야지.”
   “으으, 연습하기 싫은데. 오늘은 그냥 쉬면 안돼요?”
   “안 돼. 라이브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열심히 해야지.”
   프로듀서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아서 하루카는 뭐라 정면으로 대꾸하기 힘들었다. 하루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우우, 그럼 저녁만 먹고 돌아가면 안돼요? 저 배고픈데.”
   하루카는 자신의 쏙 들어간 배를 쓰다듬으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
   프로듀서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확실히 저녁 먹을 시간이다. 거기다 방송이 끝나고 하루카는 제대로 된 걸 먹은 적이 없으니 저녁을 빨리 해결하긴 해야 했다. 프로듀서 자신도 배고프기도 했고.
   “연습을 위해서라도 배 든든히 채워야 되잖아요. 또 사무소로 돌아가면 근처에 마땅히 저녁 먹을 데도 없고.”
   “음, 확실히 그렇긴 한데…….”
   “또 여기에 정말 맛있는 음식점 있어요. 코토리 씨한테 강력추천 받은 곳이라고요.”
   프로듀서가 넘어올 듯하자 하루카는 쐐기를 박듯 치고 들어왔다. 결국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저녁 먹고 들어가자. 하루카가 가고 싶은 데는 이 백화점 안에 있어?”
   “네! 여기 최상층이에요!”
   “최상층? 꽤 높은 데에 있네.”
   음식점이라면 푸드 코트 같은 데에 있을 거라 프로듀서는 생각했다. 하루카는 프로듀서가 괜히 말을 바꿀까 싶어 재빨리 프로듀서의 팔을 잡았다.
   “그럼 어서 가요, 프로듀서 씨! 빨리 가서 저녁 먹어야죠.”
   ‘목적지’에만 가면 어떻게든 된다. 하루카는 머릿속으로 착착 계획을 짜며 프로듀서를 이끌었다.
   “응, 알았어. 가자.”
   프로듀서는 별생각 없이 발을 옮겼다. 하루카는 프로듀서가 순순히 따라오는 걸 보며 들키지 않게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중편이에요. 이 글 4월 3일에 딱 맞춰서 올렸었는데 벌써 몇개월이 지났는지...시간 참 빠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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