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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 이런 하루카는 싫은가요?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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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5, 2012 00:42에 작성됨.

   음악방송의 스테이지 위, 수많은 아이돌이 저마다 한껏 멋을 부린 무대 의상으로 서있었다. 모두 오늘 방송에 출연한 아이돌들이다. 객석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 TV 너머 생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팬들에게 있는 힘껏 최선의 무대를 보여준 아이돌들은 각자 아쉬움과 개운함을 담았다.
   모든 무대가 끝났지만 아직 방송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방송의 핵심이다. 아이돌들은 팬들에게 손을 흔들거나 다른 아이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모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다.
   그때 사회자가 손에 한 장의 카드를 들고 등장했다. 사회자는 황금색 카드를 높이 치켜들며 흔들었다.
   “TV 앞의 팬 여러분, 여기까지 찾아와주신 관중 여러분, 그리고 무대 수고하신 아이돌 여러분! 모두 오래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이 방송의 꽃! 이번 주 1위 발표 타임입니다!”
   관중들의 열띤 함성이 솟아올랐다. 관중들은 풍선이나 들고 온 응원도구를 흔들며 각자 응원하는 아이돌의 이름을 외쳐댔다. 방송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1위는 판매량, 팬들의 투표 등등 여러 가지를 종합해 결정합니다. 모두 잘 아시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번 주 1위는 누구?”
   사회자가 손을 크게 돌리면서 귀에 가져대자 관중의 함성이 더욱 커졌다. 하루카, 마왕엔젤, 쥬피터 등등. 팬들의 열띤 응원하는 아이돌 이름 콜이 이어졌다.
   시끄러운 이름 콜 중에서도 유독 많이 들리는 건 하루카와 마왕엔젤이었다. 지난 주 1위이자 한 달 내내 1위를 사수한 마왕엔젤과 파격적인 신곡으로 엄청난 붐을 일으킨 아마미 하루카. 이 둘은 모두가 예상하는 1위 후보였다.
   신곡을 발표한 지난주에 아깝게 1위 등극에 실패한 하루카였기에, 모두 이번 주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흥미진진 기대했다. 두 아이돌의 팬이 아니라도 1위의 행방은 좋은 이야깃거리다.
   TV 앞에서 손을 모아 기도하는 마왕엔젤 팬이나 무릎 꿇고 간절히 비는 하루카 팬 등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자의 발표만을 기다렸다.
   “이번 주 1위는!”
   긴장을 높이는 배경음이 흘러나오고 무대 위 조명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새로운 왕자의 탄생일까, 아니면 왕자의 방어일까.
   지금 이 자리에서 톱 아이돌이 정해진다. 비록 한 주 뿐인 톱 아이돌이라도, 수많은 아이돌의 정점에 서는 영광이다. 탐내지 않을 사람은 없다.
   사람들의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는 순간, 사회자는 1위를 향해 손으로 가리켰다.
   “아마미 하루카 양입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조명은 새로운 왕자, 하루카에게 고정되었다. 이를 반기는 폭죽이 무대 위에서 뿜어졌다. 공중에선 하루카를 축복하는 반짝이는 종잇조각들이 흩날렸다.
   무대 뒤에 설치된 커다란 화면엔 하루카가 떠올랐다. 화면 속에서 신곡「I want」용 의상을 입은 하루카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다.
   “아…….”
   정작 실제 하루카는 어안이 벙벙한지 입을 작게 벌린 채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아마미 양, 축하해요.”
   1위를 두고 경쟁한 마왕엔젤의 토고지 레이카가 하루카에게 말을 건넸다.
   “가, 감사합니다.”
   하루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말을 건 레이카는 빙긋 웃더니 톡 하고 하루카의 어깨를 두드리곤 마왕엔젤 동료들과 함께 아이돌들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쉬움이 섞인 퇴장이었지만, 하루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마왕엔젤이 떠나간 자리에 다른 동료 아이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특히 같은 765 프로덕션의 동료인 야요이와 치하야가 제일 먼저 달려왔다.
   “와아! 하루카 씨, 1위 축하해요!”
   “축하해, 하루카.”
   “야요이, 치하야. 모두 고마워!”
   하루카는 야요이의 손을 잡고 크게 흔들었다. 야요이도 즐거운지 하루카와 함께 맞잡은 손을 붕붕 파닥였다. 치하야는 가만히 서있었지만 얼굴엔 밝은 미소를 띠었다.
   “자, 그럼 이번 주 1위 하루카 양의 소감을 들어보지요!”
   어느 샌가 하루카에게 다가온 사회자가 여분의 마이크를 하루카에게 건넸다. 하루카는 공손히 마이크를 받자 주위의 아이돌들이 자리를 비켜줬다. 무대에 만들어진 공간에서 하루카는 마이크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앞을 봤다.
   객석을 채운 관중들 모두 하루카의 이름을 연호했다. 다른 아이돌들의 팬이라도 새로운 1위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물론 불만을 표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하루카에겐 모두가 자신을 응원하는 팬으로 보였다.
   TV로 지켜보는 사람들 역시 자신을 응원해주리라. 축복하리라. 하루카는 눈시울이 시큰했다. 마이크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무대에서도 떨지 않았는데. 가슴 깊숙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담아 하루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찾아와주신 팬 여러분, TV로 지켜봐주시는 팬 여러분, 모두, 모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이렇게 1위를 할 수 있었어요. 그것도 첫 1위고,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루카는 자신을 응원해준 모두에게 감사를 담아 꾸벅 인사했다. 몸을 일으킨 하루카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있다. 그럼에도 하루카의 녹색 눈동자는 조명을 받아 예쁘게 반짝였다. 다시 우렁찬 박수가 객석에서 터져 나왔다.
   그 박수에 하루카는 다시 실감했다. 1위. 자신은 아이돌들이 누구나 염원하는 자리에 지금 서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하지 못한다. 온전한 실력으로 선 자리다.
   하루카는 옆에서 박수를 쳐주는 야요이와 치하야를 바라봤다. 세상에 둘도 없는 동료. 서로 격려해주며 등을 밀어주었기에 이 자리에 서는 게 가능했다. 동료들이 없었으면 안됐을 거야, 라는 생각에 하루카는 다시 마이크를 잡고 앞을 봤다.
   “765 프로덕션 동료 아이돌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모두가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어요.”
   하루카는 치하야, 야요이에게 최대한의 감사를 담은 웃음을 보냈다. 야요이는 와아와아 하며 더욱 들떴고, 치하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줬다.
   이제 남은 건 한 명뿐이었다. 하루카는 무대 뒤에서 화면을 통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소중한 사람을 보듯이 카메라에 시선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프로듀서 씨. 정말 감사드려요. 앞으로도 둘이서 열심히 해나가요! 프로듀서 씨가 곁에 있으면, 저 어떤 거라도 이겨낼 수 있으니까요!”
   하루카는 자신의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루카에게 프로듀서는 곁에 있으면 힘이 나는 동반자이며, 불안도 절로 사라지게 해주는 파트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깊은 감정은 본인만 알기에 다른 사람들은 하루카의 발언을 아이돌이 프로듀서에게 보내는 고마움이라고만 생각했다.
   하루카의 소감 발표는 그걸로 끝이어서 카메라는 다시 사회자를 잡았다. 사회자는 우스꽝스러우면서 과장된 동작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며 진행했다.
   “그럼 이번 주 1위, 아미마 하루카 양의 앵콜 무대를 보시면서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에 봐요!”
   무대 위의 아이돌들은 카메라를 향해 작별인사를 보내며 무대를 떠나갔다. 떠나면서도 몇몇 아이돌들은 다시 한 번 하루카에게 축하를 보냈다. 하루카는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들뜬 심장을 진정시키며 흐트러진 의상을 착착 정리했다.
   앵콜 무대라 해도 서툰 모습은 보여줄 수 없다. 울먹이며 노래도 제대로 못하던 아이돌도 있지만, 첫 1위인만큼 마지막까지 멋진 모습이고 싶었다. 아직 프로듀서도 보고 있을 테고. 하루카는 감정을 잡기 위해 눈을 감았다.
   ‘후후, 프로듀서 씨. 어떤 표정으로 있으려나?’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얼굴을 떠올렸다. 약간 멍한 구석도 있지만 믿음직하고 듬직한 얼굴이다. 그런 얼굴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생각하는 건 무척 즐거웠다.
   ‘아, 혹시 울고 있는 거 아냐? 아님 너무 기뻐 꼬옥 껴안아줄지도! 에헤헤.’
   하루카는 빙그레 웃었다. 화장한 새하얀 볼이 분홍색으로 물들었다.
   그때 거센 비트 소리가 스피커에서 터져 나왔다. 시작이다. 하루카는 생각을 멈추고 노래에 집중했다. 마지막 무대도, 멋지게 끝내자.
   하루카는 눈을 떠 팬들을 응시했다. 팬들도 모두 기대어린 표정이다.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하루카는 전신에 더욱 힘을 넣었다.
   “One, Two, Three, Yeah!”
   노래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하루카의 날카로운 기합으로 무대는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 * * * * * * * *

   앵콜 무대를 마치고 하루카는 프로듀서가 기다릴 무대 뒤로 향했다. 첫 1위를 차지한 만큼 앵콜 무대에도 힘을 쏟아 부었다. 관중들의 반응도 좋았고, 하루카 스스로도 만족스러웠다. 격한 안무에 노래까지 하며 오른 열기에 하루카의 표정은 아직 상기되어 있었다.
   “앵콜 무대, 수고하셨습니다. 1위 축하해요!”
   “나도 시디 샀어! 앞으로도 응원할게!”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프로듀서가 기다릴 대기실로 가는 복도에선 마주치는 사람마다 하루카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 왔다. 하루카는 빠짐없이 미소로 화답했다. 빈말이라도 기분이 좋았다. 뭐라 해도 1위는 1위다. 무척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윽고 「가수 대기실」이란 표지판이 걸려 있는 문 앞에서 하루카는 멈춰 섰다. 이 뒤에 프로듀서가 있다. 웃고 있을까? 어떤 말을 할까? 프로듀서의 반응이 신경 쓰여 하루카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한번 가볍게 심호흡하고, 하루카는 문의 손잡이를 힘차게 돌렸다.
   “프로듀서 씨!”
   “하루카!”
   프로듀서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루카를 반겼다. 박차고 일어난 의자가 크게 덜그럭거렸지만, 프로듀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프로듀서의 들뜬 얼굴을 보곤 하루카는 기쁜 소식을 직접 전하기 위해 짧은 거리지만 프로듀서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프로듀서도 그런 하루카를 두 손을 벌려 맞이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대로라면 기세를 타 안길 수 있지 않을까. 짧은 순간에 하루카의 머리는 팍하고 하나의 계책을 떠올렸지만, 안타깝게도 실천하진 못했다.
   하루카의 두 다리가 서로 엉켰다. 하루카의 가냘픈 몸은 그대로 앞으로 넘어갔다.
   “꺅!”
   감탄할 정도로 깔끔히 넘어가는 하루카의 모습에 프로듀서가 재빨리 움직여 두 손으로 하루카의 어깨를 잡았다. 앞으로 나가려는 반동에 하루카의 몸이 프로듀서의 가슴에 부딪혔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자랑스러운 모습 대신 민망한 모습을 보인 거 같아 하루카의 표정이 빨개졌다.
   “괜찮아, 하루카?”
   “에헤헤, 좀 들떴었나 봐요. 프로듀서 씨.”
   볼을 긁적이며 하루카는 멋쩍게 웃었다. 부끄러움을 감추는 모습에 프로듀서는 피식 웃으며 하루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넘어지는 건 역시 변하지 않는구나. 덜렁이 1위 씨.”
   “우우. 그래도 저 1위 했다고요. 프로듀서 씨, 1위에요, 1위!”
   하루카는 검지를 쭉 뻗어 프로듀서에게 내밀었다. 하루카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에헴하고 가슴을 내밀어 뽐냈다. 부끄러운 기색이나 멋쩍은 미소는 진작 사라졌다.
   이걸 하고 싶었다. 프로듀서에게 1위라고 말하는 것. 아이돌 데뷔 전부터 품어온 소원을 이루자 상쾌한 감정과 뿌듯함이 하루카의 마음을 차지했다. 들뜬 기색을 숨기려하지 않으며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다음 대답만 기다렸다.
   “정말 수고했어, 하루카.”
   프로듀서의 축하는 짧았다. 하지만 그 얼굴엔 하루카도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함박웃음이 있었다. 프로듀서는 히죽히죽 웃음이 끊이지 않아 말 그대로 입이 귀까지 걸려있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하루카는 좋았다. 말은 서툴지만 그래도 프로듀서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갖 미사여구보다 프로듀서의 진실한 웃음을 보는 게 더 좋았다. 지금 이 웃음은 오직 하루카만을 향한 것이었으니까.
   마음이 하루카가 바라던 만족감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래도 프로듀서에겐 숨기는 게 좋을 거 같아 하루카는 슬쩍 늘어지려는 표정을 다잡았다. 너무 헤실 거려도 재미없으니깐.
   “좀 더 칭찬해주세요. 프로듀서 씨. 칭찬이 너무 인색한 거 아니에요? 첫 1위인데.”
   하루카는 프로듀서를 흘겨보며 볼을 부풀렸다.
   “하하, 미안미안. 그래도 정말 멋진 무대였어. 모니터로 보기엔 아까울 정도였다니까.”
   프로듀서는 하루카의 무대를 떠올렸다. 방송 사정상 스테이지 옆 대신 대기실에서 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열창하는 하루카는 무척 빛이 났다. 그 빛은 모니터라는 매개를 거쳤음에도 프로듀서의 마음을 깊숙이 울렸다.
   같이 모니터를 통해 하루카의 무대를 보던 사람들 모두가 감탄을 터트리는 모습을 프로듀서는 잊지 못했다.
   “무대를 보곤 직감했어. 하루카가 당연히 1위하겠구나, 라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예쁘고 멋진 아이돌을 내가 프로듀싱 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몸이 얼마나 근질근질 거렸는데.”
   대기실엔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주저 없이 큰 목소리로 말하는 팔불출 프로듀서 때문에 오히려 하루카의 볼이 살짝 붉어졌다. ‘예쁘고’란 부분이 괜히 하루카의 머릿속에서 맴돌며 반복 재생됐다. 하루카의 표정이 느슨해졌다.
   “에헤헤, 다 프로듀서 씨 덕분이죠. 아, 1위 소감도 들으셨어요?”
   “물론이지.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프로듀서는 즉답했다.
   앞으로도 둘이서 열심히 하자는 아이돌의 말. 거기다 곁에 있으면 어떤 거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하루카의 말은 프로듀서에겐 세상에 둘도 없는 응원이었다.
   하루카는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프로듀서에게 오른손을 건넸다.
   “프로듀서 씨, 저 진심이니까 앞으로도 같이 열심히 해요.”
   “응. 이번 1위로 만족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가자. 나도 진심을 다해 하루카를 프로듀싱 할게.”
   프로듀서는 하루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맞닿은 부드러운 손의 감촉을 통해 힘이 전해졌다. 하루카도 남성 특유의 거친 손을 통해 프로듀서의 존재를 느꼈다.
   프로듀서의 ‘진심’과 자신의 ‘진심’이 다른 것쯤은 하루카도 알았다. 아마 분류가 다를 거다. 프로듀서 쪽 진심이 열혈물이라면, 자신의 진심은 순정물일 테니까.
   언젠간 그 진심을 자신의 진심으로 덮어버리리라. 두 말하지 못하게 완전히 같은 걸로 만들어버릴 거라고, 하루카는 다짐했다.
   한동안 손을 잡고 두 사람은 각자의 결의를 다졌다. 동상이몽이라면 동상이몽이지만, 그래도 둘이 목표하는 바는 그렇게 다르지 않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사람은 슬며시 손을 놨다.
   하루카는 아직 오른손에 남아 있는 프로듀서의 온기를 왼손으로 살짝 쓰다듬으며 되새겼다.
   ‘분명 오늘은 이걸로 스케줄 끝이지? 프로듀서 씨에게 1위한 기념으로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할까나. 후후.’
   1위까지 했으니 프로듀서도 큰 맘 먹고 이것저것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하루카는 생각했다. 마침 스케줄도 없으니 금상천화다. 하루카는 나름대로 이따가 뭐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래, 전에 코토리 씨가 말했던 레스토랑에 가보자. 분위기도 근사하다고 했으니까 꽤 좋을 거야. 프로듀서 씨도 기분 좋은 상태니 잘만 하면 그대로 분위기에 넘어가서…….’
   핑크빛 상상에 빠진 하루카는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상상만으로도 즐거워져 당장 떠나자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런 하루카의 기색을 전혀 모른 채, 프로듀서는 문득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아, 맞다. 오늘 이따가 연습실에서 공연용 노래 한 번 더 맞춰볼 생각인데, 시간 괜찮지?”
   “네?”
   “오늘은 이걸로 스케줄 끝이니까 돌아가서 연습 한 번 더 해보자. 이제 공연까진 1주일도 안 남았잖아.”
   이걸로 멈출 순 없다고 다짐했으니까, 하며 프로듀서는 눈을 활활 열정으로 불태웠다. 잠시 소녀 감정에 젖어있던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모습에 흥이 팍 깨져버렸다. 한결 같다면 한결 같은 프로듀서의 모습이다.
   “에, 연습이요?”
   “응, 연습해야지. 거기다 생일 기념 공연이니깐 더 열심히 해야지. 첫 단독 공연이기도 하고.”
   이제 일주일도 안 남은 이번 공연은 하루카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공연이다. 하루카의 생일인 4월 3일에 하는 것도 나름 뜻 깊었지만, 더 중요한 건 ‘아마미 하루카’란 이름만 걸고 개최하는 첫 단독 공연이란 점이다. 전에는 765 프로덕션 전체의 이름을 걸고 공연을 했지만, 이번엔 순수하게 아미미 하루카란 아이돌의 능력으로 공연을 여는 것이다.
   이번 공연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루카의 미래가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송에서 1위를 할 정도로 기세를 탄 상황이니, 단독 공연까지 멋지게 끝낸다면 하루카의 인기몰이에 더욱 탄력이 붙을 것이다.
   물론 하루카도 이번 공연의 중요성을 잘 알았지만, 지금 만큼은 굳이 공연의 화제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프로듀서 씨, 오늘은 연습 안하고 쉬면 안돼요?”
   “무슨 소리야. 1위 했으니깐 더 열심히 해야지. 팬들에게 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돌의 의무라고.”
   “그치만 생일날도 공연이 저녁 시간이라 제대로 생일을 즐기지도 못하잖아요. 또 공연 전까진 연습 때문에 시간 없고.”
   하루카는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생일날 팬들에게 공연하는 게 싫지는 않다. 오히려 축하해주는 팬들을 보면 감격해 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돌인 하루카로서의 입장이다. 아직 십대 소녀인 하루카로선, 평생에 단 한번 뿐인 올해의 생일을 그렇게 날려버리는 게 아쉬웠다. 동료 아이돌들과 공연 끝나고 생일파티를 하기로 되어있긴 하지만 그 걸로는 부족했다.
   하루카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프로듀서를 바라봤다. 프로듀서는 당황과 화가 반반 섞인 표정이다. 그래도 이 모든 표정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증거란 걸 알기에 하루카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생일만큼은 좋아하는 사람과 단 둘이서 보내고 싶다구요. 둔한 프로듀서 씨.’
   생일이 무리라면 시간이 있는 지금이라도 좋다. 잠시만이라도 좋으니 아이돌과 프로듀서의 관계에서 벗어나 함께하고 싶다.
   ‘조금, 억지 부려 볼까나.’
   “프로듀서 씨, 오늘은 조금이라도 좋으니 쉬면 안 되나요? 1위까지 했는데…….”
   하루카는 몸을 살짝 굽혀 프로듀서를 올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다. 거기다 보는 남성으로 하여금 보호욕구가 팍팍 느껴지도록 최대한 지치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말꼬리도 힘 빠진 목소리로 길게 늘어뜨리고.
   “윽, 하, 하지만.”
   효과는 발군이었다. 프로듀서는 하루카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심이 일었는지 눈에서 불타오르던 열정이 사그라지고 주춤했다. 하루카는 이 좋은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 숨 돌릴 정도면 좋으니까요. 안 그러면 저 우울해서 아이돌 못할지도.”
   “…알았어. 대신 잠깐만이야. 끝나고 꼭 연습하러 가야된다?”
   “네! 헤헤, 프로듀서 씨는 역시 말이 통해서 좋아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활짝 웃는 하루카의 모습에 프로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1위까지 했으니 쉬게 해주는 것도 좋으리라.
   “그럼 뭐하고 쉬고 싶어? 집에 데려다 줄까?”
   “아뇨, 저 OO백화점 가고 싶어요!”
   “OO백화점? 아, 요즘 TV 광고에도 나오는 데 말하는 거야?”
   하루카가 말한 OO백화점은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선지 TV에도 광고가 자주 나왔다. 규모도 꽤 커서 영화관, 쇼핑센터, 레스토랑 등 여러 가게들이 입점해 있고 디자인도 세련되어서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각광받는 곳이다.
   “네, 저 거기 가고 싶어요!”
   하루카는 두 손을 모으면서 눈을 반짝였다. 하루카의 강한 의지에 눌려 프로듀서는 자신도 모르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라면 차타고 가면 금방이니까 괜찮겠네. 사무소하고도 그리 멀지 않고. 알았어. 같이 가자.”
   “그럼 바로 준비하고 나올게요! 프로듀서 씨도 준비하고 있어요~!”
   최종 결정이 떨어지자 하루카는 후다닥 나갈 준비를 하러 달려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해서 아이돌 그만둘 거라고 발언한 사람의 행동이라곤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런 하루카의 모습이 귀여워 프로듀서는 하루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무대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아이돌이라곤 해도, 이럴 땐 아직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게 많은 여고생일 뿐이란 걸 실감했다. 아이돌의 어떤 모습에도 잘 맞춰주는 게 좋은 프로듀서의 덕목이라며 프로듀서는 생각했다.
   프로듀서가 뒷정리를 끝내자 어느새 사복으로 갈아입은 하루카가 나왔다. 하루카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선지 흰색 빵모자를 눌러쓰고 안경까지 썼다. 변장용 안경이기에 물론 도수는 없다. 무대 의상을 입고 있던 하루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무대 의상 입은 하루카가 가만히 있어도 아이돌의 분위기를 뿜어낸다면, 사복 하루카는 나이 또래의 여고생다운 분위기였다.
   하루카는 프로듀서의 팔을 슬쩍 잡더니 앞으로 기세 좋게 걸어 나갔다.
   “프로듀서 씨, 출발이에요, 출발!”
   들뜬 기색이 가득한 하루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하루카와 프로듀서는 백화점을 향했다.



   하루카 생일 기념으로 쓴 팬픽이에요. 이 글은 상중하로 구성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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