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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초여름 날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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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31, 2016 11:40에 작성됨.

딸랑 딸랑-

 

손님이라고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카페의 문이 살짝 열렸다.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커다란 모자를 쓰고, 빨간 안경까지 낀 평범한 체격의 소녀가 문고리를 잡은 체 빼꼼 그 안 쪽을 살피자, 머물고 있던 차가운 공기가 땀에 젖은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때는 어느덧 봄의 끝자락. 더위는 점점 기승을 부리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러서는 쩌죽는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 방금까지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소녀는 방긋 미소 지었다.

 

"살았다.....이 쪽이야!"

 

그녀는 힘차게 발을 딛었다. 그 옆에 있었던 푸른 머리카락의 소녀도 조용히 뒤따라 들어갔다. 이 두 사람이 오늘 들어온 첫 손님들이건만, 어벙벙한 인상의 주인장은 인삿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저 영혼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었을 뿐.

 

"어, 어라?"

 

앞장서서 들어온 소녀는 한참을 더듬거렸다. 바깥 쪽이 워낙 햇빛이 강렬했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긴 너무 어두웠다. 겨우 그녀가 자리를 잡고 앉는 순간, 묘하게 삐걱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뿐인 일행도 맞은 편 자리에 의자를 끌고 앉았다. 그 쪽 의자도 끼릭하고 비명을 질렀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불편함에 두 사람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더 이상 따가운 햇빛과 후덥지근한 바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잘못 고른 게 아닐까.

 

"아하하....."

 

모자를 쓴 소녀가 멋쩍게 웃으며, 뒷통수에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모자가 들썩거리며 가둬놓았던 더운 공기를 내보냈다. 목덜미에 끈덕지게 달라붙어있던 밤색 머리칼 몇 가닥이 이 때다 하고 존재감을 내보였다.

 

그녀는 비뚤어진 모자를 벗어 비어있는 의자에 내려놓았다. 머리 양 옆에 매달려 있던 노란색 리본 한 쌍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수 없는 안경도 테이블 한 구석에 두었다. 

 

이 어둡고 불편한 카페에 흘러들어오게 된 두 손님의 정체는 유명 아이돌 아마미 하루카와 키사라기 치하야. 오래간만에 휴일을 맞이해 같이 쇼핑을 나섰지만, 별 소득 없이 답답한 거리를 헤메다 이리로 피신한 것이었다.

 

"으음, 좀 더 찾아보는 게 좋았을까?"

 

치하야는 자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유리창 너머에 시선을 두었다. 저 찜통 같은 곳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그렇다면 다행인데."

 

두 사람은 적당히 가방을 풀어놓고, 종업원을 기다렸다. 그런데 몇 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10분을 꼬박 채웠을 때가 되자, 하루카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쓸데없이 넓기만 한 건물 안과 카운터에서 의욕 없이 앉아있는 주인장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주문하러 가야하는 모양이네. 하루카는 뭐 마시고 싶어?"

 

치하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내가 갈게."

 

"괜찮아. 메뉴나 말해줘."

 

"어......그럼 아이스티로 부탁해."

 

"알았어."

 

치하야는 곧장 카운터로 향했다. 손님이 왔는데도 책이나 뒤적이고 있던 주인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아이스티하고, 아이스 카페오레. 각각 한 잔씩 부탁드립니다."

 

주문과 함께 값을 지불하자, 주인은 일어나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커피 머신 쪽으로 등을 돌렸다. 치하야는 영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가 자리로 돌아갔다.

 

"어, 어땠어?"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교환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던 하루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땠어, 라니?"

 

"왠지 무서운 사람 같아서. 괜찮았어?"

 

"글쎄.....의욕이 없다고 하는 쪽이 맞지 않을까."

 

이런 주인은 처음이라며 치하야가 떨떠름한 웃음을 지었다. 하루카는 썰렁한 주위를 다시 돌아보며 소곤거렸다.

 

"저기 있지, 지금까지 한 명도 오지 않았어."

 

"어쩌면 우리가 가장 처음으로 들어왔을 지도 모르겠네."

 

"헤에, 그럴까나."

 

하루카가 슬쩍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것만으로 또다시 삐걱거리는 소리가 음악 소리 없이 조용한 카페 안을 들썩거리게 했다.

 

"잠깐, 어쩌면 우리......개점한 이래로 첫 손님이거나 할지도?"

 

"설마. 그러지는 않을 걸."

 

두 사람이 짧은 잡담을 나누는 사이 카운터 쪽에서 띵-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문했던 음료수가 완성되었다는 신호. 예상했던 것보다 빨라 치하야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하루카가 후다닥 음료를 가지고 돌아왔다.

 

"자, 여기. 치하야쨩 꺼, 맞지?"

 

"응, 고맙....."

 

자기 몫을 확인한 치하야는 할말을 다 잇지 못했다. 싸구려 플라스틱 컵에는 우유 반 커피 반, 제대로 뒤섞지도 않은 내용물이 얼음과 함께 담겨있었다.

 

"방금 전에 나쁘지 않다고 했던 말, 취소해야겠네."

 

치하야는 컵 안에 담겨있던 빨대를 뱅글뱅글 돌렸다. 쓸데없이 커다란 얼음덩이 때문에 잘 섞이지도 않았다. 하루카는 무심코 아이스티를 한 모금 빨아들이다가, 톡톡히 느껴지는 가루맛에 기겁하고는 똑같이 빨대를 휘적휘적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치하야는 카페오레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국 입을 대고 말았다.

 

"읍!?"

 

"치하야쨩? 왜 그래?"

 

하루카는 화들짝 놀라며 콜록거리는 치하야와 들고 있는 컵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급하게 마시다 사레가 들린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필시, 저 커피가 문제인 게 틀림없었다.

 

"괜찮아?"

 

"으, 응. 놀라게 해서 미안해."

 

치하야가 티슈를 뽑아 입가에 가져다 대고는 슥슥 문질렀다.

 

"굉장히 쓴가 보네."

 

".....시큼해."

 

"에, 정말?"

 

"궁금하면 마셔볼래?"

 

치하야는 컵을 살짝 기울여 내용물을 보였다. 생긴 것 자체는 멀쩡하고, 커피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풍겨오고 있었다. 치하야쨩의 말, 정말일까? 하지만 시큼한 커피라니 들어보지도 못했는 걸.

 

앞서 농담 삼아 던진 말과는 다르게 치하야는 곧장 컵을 테이블 한 구석에 치워두었다. 이건 도저히 남에게 권할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루카의 손이 그걸 톡하고 건드렸다.

 

"하루카?"

 

"뭔가, 도전 정신이 생겼어."

 

"날씨도 더운데 그런 쓸데없는 도전 정신에 불타오르지 말아줄래."

 

"대신 치하야쨩에게는 내 아이스티를 줄게."

 

"극구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치하야는 하루카가 지었던 곤란한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하루카도 치하야가 콜록거렸던 걸 잊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윽."

 

호기심은 결국 고양이를 죽이고 말았다. 미리 감상을 들었던 덕분일까, 마시던 음료수를 뿜는 대참사까지는 나아가지 않았다. 하루카는 대신 복잡미묘한 감정을 얼굴 가득 채우고는 중얼거렸다.

 

".....여기 사람이 없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치하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습한 내부, 조금만 기대도 마구 삐걱거리는 의자. 음료수 맛은 최악에 가격은 조금 비싸기까지. 그야말로 모든 게 엉망진창.

 

냉방시설이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조용하다-"

 

"손님이라고는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쉿, 들을 지도 몰라."

 

"그럴까? 들어봤자 아무 감흥 없어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그건 그럴지도."

 

하루카는 의자에 해파리처럼 기대어 있는 주인장을 바라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바깥에 나간다면 자기도 저런 꼴이 될 게 분명했다. 그녀는 벽면에 걸린 시계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오후 2시. 누구라도 한 없이 늘어질 수밖에 없는 시간대.

 

하루카는 잔 두 개를 옆 테이블에 옮겨놓고는 푹 엎드렸다. 적어도, 저녁까지는 여기 있어야 했다.

 

"......."

 

방금 전의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내용물이 거의 그대로 있는 음료수 잔에서 얼음이 녹아들어 잘그럭거리는 소리만이 이따금 들려왔다.

 

건물 전체에 흐르는 냉기가 이제는 좀 서늘하게까지 느껴질 때가 되었을 쯤. 

 

"으음- 심심해. 뭔가 이야기라도.....그렇지, 치하야쨩이 해줘."

 

하루카의 입에서 보채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한테 말재주 없다는 거 잘 알면서."

 

"그래도, 듣고 싶어."

 

어디 좋은 화제 없을까. 곤란한 웃음을 짓던 치하야는 한참 머릿 속의 서고를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적당한 이야깃거리를 떠올려냈다.

 

"그러고보니 어제, 우리가 없는 사이 사무소에서 소동이 벌어진 것 같아. 들어볼래?"

 

서두만 들어도 대충 짐작이 갔다. 이미 히비키한테서 자세한 사정을 들었기에. 하지만 그 이야기는 한 번 더 들어도 재밌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갈지도 몰랐다.

 

"물론이야."

 

나른하게 엎드려있던 하루카가 작게 꿈틀, 하더니 느릿하게 일어났다. 먼 곳을 응시하던 말라붙은 두 눈에 약간의 생기가 돌아왔다. 무엇보다, 가장 친한 사람이 해주는 이야기다. 못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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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노곤노곤한 하루치하.

 

저는 곧 있으면 방바닥에 찐덕하게 늘러붙게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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