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넘어져 본 사람은 일어서는 법을 안다(下)

댓글: 7 / 조회: 929 / 추천: 2


관련링크


본문 - 05-25, 2016 03:25에 작성됨.

*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 시리즈의 P가 등장합니다. 인물이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주시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넘어져 본 사람은 일어나는 법을 안다(上) 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역시나 글쓴이 주관의 개똥철학이 있습니다. 비웃어주셔도 됩니다.

 

 

 

 

 

지금의 그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시의 나는 아이돌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고, 프로듀서라는 직업은 왠지 익살꾼과도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저 활발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길거리 한복판에서 마주쳐, 대뜸 명함을 받은 그 때. 잠깐이지만 마주본 그의 두 눈은 너무나도 근사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그의 스카우트를 받고, 아이돌이 되어 있었다. 운동부 활동 따위로 운동은 하고 있었기에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연습은 내 상상을 아득하게 뛰어넘을 정도로 고된 것이었다. 툭 치면 넘어질 듯 하루하루가 위태로움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넘어지지 않았다. 내 옆에서 그 사람이 함께 뛰어주고, 함께 웃어주고, 함께 힘들어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겠거니 생각했다. 회사 내부에서의 평판이나 동료들의 평가가 항상 최고인 이유를 그 때는 몰랐다.

그러나 알고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 뒷면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배려 따위가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나가듯 던지는 한 마디가, 그리고 별 생각 없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숨어 있는, 그 사람 특유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런 점은 음지에서 활동하는 그의 직업 때문에 가지게 된 일종의 직업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지금까지 내가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어른’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언제부터였는지 내 눈은 그 사람의 등을 좇고 있었다. 내가 동경하던 이상적인 어른의 모습이 그 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른’이라고 하면, 이제는 존경해 마지않는 아빠와 함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좀 더 웃어주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이 내게 주었던 기대에 보답하고 싶다. 그리고, 그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그 사람을 배신하고야 말았다. 무모하게 나섰던 내 욕심으로 인해서.

 

내가 저지른 잘못이니, 어떻게든 내가 그것을 만회해야만 했다. 그것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 몸은 무거워졌고, 표정은 딱딱해졌다. 연습 할 때는 괜찮았던 것이, 정작 실전에 가면 완전히 못 쓰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울고 싶었다. 도와달라고 하고 싶었다.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염치없이 그에게 또다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잘하기만 하면, 그 사람도 내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

 

 

월요일 오전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한 아이돌 부서의 모든 인원이 출근하는 날이다. 주중에 특별한 일정이 있는 인원은 사전에 미리 미팅을 가지기도 하고, 아이돌끼리는 시간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던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회의실에서, 프로듀서는 맞은편 책상에 앉아 있는 후미카에게 책상 위에 놓여있던 종이를 내밀었다. 후미카가 종이를 읽는 동안, 프로듀서는 수첩을 펼쳐 적어 두었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번 주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에 게스트 출연하는 건 들었지?”

“네.”

“화, 목, 토요일 저녁이니까. 열심히 준비해서 팬 여러분한테 좋은 모습 보여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준비는 어떻게…….”

“독서 증진 캠페인의 일환이니까, 읽을만한 책 같은 걸 추천해주는 방식이 좋을 것 같아. 그 부분은 오늘 내가 한번 더 확인하고 말해줄게.”

“책의 추천……인가요. 알겠습니다. 참고로 해 둘게요.”

“그래, 이번 한 주도 힘내서 열심히 가자.”

“네. 그럼…….”

후미카가 회의실을 나가고, 마지막 순번인 미나미가 조심스레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프로듀서의 눈치를 살피듯, 흠칫거리면서 조심스레 탁자에 앉았다.

“닛타.”

“……ㄴ, 네!”

“주말 동안 좀 쉬었어?”

“네. 프로듀서 씨 덕분에요…….”

프로듀서는 계속해서 자신의 눈을 피하는 미나미를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책상 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서류를 미나미에게 건네었다.

“자, 이거 읽어봐.”

“저, 이건…….”

“3주 뒤에 있을 라이브 배틀의 오디션이야.”

‘오디션’이라는 말에, 미나미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아니, 생기가 돌아온 수준이 아니라 아예 불똥이 튀었다. 분명히 좋은 현상이지만,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바라보던 프로듀서의 표정은 다행이라는 표정이 아닌,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프로듀서는 그 생각을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축 처져 있을 수는 없잖아? 절치부심해서 한번 제대로 해 보자고.”

재빠르게 서류를 눈으로 훑어 내려간 미나미는 감격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프로듀서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저, 열심히 할게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일단은 오디션에 집중해야 하니까, 촬영이나 다른 일은 이번주 내로 모두 끝내자. 다음주부터는 레슨에 집중하도록. 알겠지?”

“네!!”

 

"으어아어으~!"

모처럼 자기 자리에 앉아 햇빛을 받으면서 프로듀서는 늘어져라 기지개를 폈다. 약간 떨어진 치히로의 자리에서 치히로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자리에 계신 건 오랜만에 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프로듀서는 의자에 반쯤 파묻힌 자세로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지난 주에 열심히 영업을 뛰어 다닌 덕분에 이번 주는 사무실에서 서류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동하는 인원의 픽업은 여전히 프로듀서의 몫이었기에 계속해서 사무실을 들락날락하고는 있었지만, 지난 주의 그 살인적인 스케줄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놀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였다.

“아, 프로듀서 씨, 결산회의 시간이에요.”

“이런, 벌써 시간이…….”

난감한 표정으로 시계를 올려다보는 프로듀서에게, 어느새 다가온 치히로가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여기요. 오늘 하루 계속 바쁘신 것 같아서, 제가 자료 만들어뒀어요.”

“아하하, 센카와 씨 덕분에 살았네요. 감사합니다.”

봉투를 받아들고, 프로듀서는 재킷을 챙겨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저는 결산회의 갔다가, 6시에 촬영 끝나는 인원들 픽업해서 올게요. 센카와 씨는 별 일 없으면 바로 퇴근하셔도 됩니다.”

“네, 수고하세요~.”

사무실의 문이 닫히고 프로듀서의 발소리가 멀어져 가자 치히로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지난 1주일 내내 시달렸던 상부의 질타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뭐, 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살살 넘어가겠죠. 그런 사람이니까.’

 

 

 

4일 뒤, 금요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일과를 끝내고 퇴근하면 미나미의 연습 영상을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비전문가인 그의 눈으로는 영상만으로는 차이점을 알아내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직접 참관을 한다면 분위기나 다른 몇 가지 요인을 통해 좀 더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흐아아암~.”

자기 자리에 앉아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프로듀서를 치히로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별일이네요, 프로듀서 씨가 하품을 하실 줄이야.”

“아하하, 그러게요. 최근 며칠 밤새서 비디오를 좀 보느라…….”

“비디오요?”

“네. 아아, 야근은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안 보셔도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전 결산회의에서 호되게 박살이 나서, 이번 달은 야근 금지 먹었어요.”

“월요일엔 까딱하면 당직자한테 끌려갈 뻔 했다니까요.”라고 과장된 리액션을 취하며 말하는 프로듀서를, 치히로는 다소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 때, 프로듀서의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네, CG프로덕션의 아이돌 부서 프로듀서 P입니다.”

치히로가 전화를 받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보고,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별안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프로듀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입니까?! 정말이죠! 무르기 없깁니다! 감사합니다!!”

환희에 찬 표정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프로듀서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이토록 기뻐하는 모습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기에, 치히로는 조심스레 이유를 물어 보았다.

“카와시마 씨,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메인 퍼스널리티 됐어요.”

“네?!”

“이야, 역시 전직 아나운서 출신은 대단하네요. 조금만 밀어붙였는데, 그걸 확 낚아챌 줄이야.”

“아니, 그거 서류 보낼 때는 승산 없다고 그냥 넣어 본 거라면서요…….”

“뭐, 어떻게든 하는 게 프로듀서 아니겠습니까. 결과 좋으면 땡이죠.”

“아하하…….”

 

 

그날 저녁, 회사 근처의 이자카야에 프로듀서와 미즈키, 카에데가 모였다.

“카와시마 씨의 라디오 메인 퍼스널리티를 기념하며 건배!”

“건배~!”

세 명의 잔이 가볍게 부딪혔다. 허공에서 모였던 잔은 곧바로 내려가, 세 사람의 목을 적시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캬~ 시원~하다!”

“이 맛에 사네요, 정말!”

“카와시마 씨,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단독 방송이라니.”

“에이, 축하는 무슨! 다 P군이 열심히 일해 준 덕분이지! 난 그냥 따라간 것 뿐이고!”

미즈키의 그 말에, 카에데와 프로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는데?!”

“아뇨, 매우 의외라고나 할까…….”

“미즈키 씨 치고는 기대하지 않았던 반응이라고나 할까…….”

“……너희들이 상상 속에서 나는 뭐라고 말했는데?”

다시 한번 눈빛을 마주친 뒤, 프로듀서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으음, ’이 미즈키님 손에 걸리면, 이런 건 일도 아니지!’ 라던가……?”

“카에데, 너도 같은 생각이야?”

대답 대신 카에데는 노골적으로 미즈키의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나도 공사는 구분할 줄 알거든?!”

“하하하, 미안해요. 제가 조금 오해를.”

“열 받으니까 한 잔 마셔. 안주는 먹지 말고.”

“좀 봐주세요. 전 또 들어가서 일해야 한다니까요.”

프로듀서의 말에 딴청을 피우던 카에데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아, 맞아. 프로듀서 요새 굉장히 바빠 보이던데. 무슨 일 있어요?”

“그래. P군 요즘 들어서 야근만 안 하지 낮에는 엄청 피곤해 보이던데?”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잠시 머뭇거리던 프로듀서는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말이죠. 사실은…….”

프로듀서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두 사람은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 미나미가? 별일이네……난 알아서 잘 하겠거니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보기 드물게 똑 부러진 아이라서 전혀 생각조차 못 했어요.”

“P군은, 뭔가 짐작 가는 부분이라도 있어?”

“그러니까, 저도 대충 짐작은 하고 있지만…….”

“있지만?”

“왠지, 그, 자의식 과잉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좀 그래서요.”

“에이, 또 그런다. 한번 말해봐. 우리가 들어보고 자의식 과잉인지 아닌지 말 해줄 테니까.”

프로듀서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술잔에 담긴 술을 한잔 들이키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마 저번 연말 라이브 때였을 겁니다. 그날 비 엄청 왔었죠?”

“맞아요. 겨울 날씨에 비까지 내리니까 얼마나 춥던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연말 정기 라이브 당일. 처음 나가보는 라이브가 그렇게 큰 무대였다는 사실이 긴장되었던 탓인지, 그 전까지 연일 오버페이스를 유지하던 미나미가 결국 탈을 일으켰다. 공연 시작 몇 시간을 앞두고, 최종 리허설을 진행하던 도중 갑자기 열을 내면서 쓰러져 버린 것이다. 때마침 무대 점검 차 프로듀서가 바로 옆에 있어서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할 수 있었기에, 큰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다.

그 때의 소동을 떠올린 듯, 미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거. 알 것 같아. 그래도 그 뒤치다꺼리는 다 P군이 하지 않았어?”

“네, 그랬죠. 일은 잘 마무리 됐는데, 그 다음에 호되게 혼났고.”

“맞아요. 갑자기 일하다가 코피 쏟으면서 픽 쓰러지길래 깜짝 놀랐는데.”

“그런데 그게 왜?”

“제 나름대로 입단속은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스태프한테 들은 건지, 아니면 회사 사람들한테 들은 건지……닛타가 그걸 들은 모양이에요.”

프로듀서의 대답에 카에데와 미즈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문제가 돼?”

그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닛타는 굉장히 올곧은 아이입니다. 요즘에는 보기 드문, 곧게 자란 아이죠. 향상심도 있고,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도 있어요. 그러지 않고서는 제 스카우트에 대뜸 따라오지는 않았겠죠.”

프로듀서의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두 사람은 마지막 부분에서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요.”

“뭐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프로듀서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튼, 그런 심성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재능도 있어요. 지금까지 자격증도 많이 따고, 대회 같은 것도 몇 번 나가봤다던데, 떨어진 적이 없었거든요.”

“어머나.”

“대단하네요.”

“그렇죠. 그런데 잘 나가다가 거기서 탈이 나버린 거에요.”

사실 연말 라이브 자체는 미나미가 없더라도 충분히 돌아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니, 조금 냉정하게 말하자면 당시에는 이제 갓 데뷔무대를 가진 애송이였던 미나미가 그 무대에 이름이라도 올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영광인 수준이었다. 모인 관객들도 대부분 카에데와 트라이어드 프리머스나 마유, 후미카의 공연을 보러 온 것이었으니.

“제 입장에서는 그저 상정해 두었던 돌발상황 A였습니다. 하지만 닛타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던 거에요. 자신이 쓰러짐으로써, 그 뒤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린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미즈키의 표정이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아항, 그래서 ‘자의식 과잉’이니 어쩌니 이야기를 한 거구나? 알 것 같아.”

“미즈키 씨, 저도 가르쳐 줘요. 무슨 말씀인가요?”

물음표를 띄우며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에 바쁜 카에데가 미즈키에게 매달리자, 그녀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카에데의 귓가에 뭐라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호호오~”

“……이래서 내가 말 안 하려고 한 건데!”

프로듀서는 어느새 다시 채워진 잔을 들고 그 안의 액체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러니까, P군의 말은 요약하자면 미나미가 라이브에서의 실패뿐만 아니라 P군이 쓰러진 것까지 자기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 아니야?”

“……맞습니다.”

그 때, 카에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미나미의 그 생각, 사실 아닌가요?”

“네에?”

“아뇨, 진정하고 한번 들어봐요. 미나미가 쓰러진 것 때문에 프로듀서가 그날, 비 맞아 가면서 뛰어다녔잖아요? 일정 조정한다고.”

프로듀서는 물을 마시면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가 피로에 감기까지 겹쳐서 몸살로 쓰러졌구요.”

“그렇죠.”

“그럼 그거, 미나미가 쓰러진 게 원인이잖아요?”

카에데의 뜻밖의 한 마디에, 미즈키와 프로듀서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렇죠? 그럼, 이제 원인도 알았으니, 마시죠.”

“야호~!”

“건배!……가 아니죠, 이 양반들아.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됐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프로듀서는 두 사람의 손에서 술잔을 빼앗았다.

“에에~.”

“뭐가 ‘에에~’입니까. 이 25살 꼬맹이가. 그러니까 문제는, 뭐가 문제인지는 아는데 그 접근 방법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요.”

미즈키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프로듀서를 바라보았다.

“글쎄, 난 P군이라면 이미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무슨 뜻인가요?”

“난 알고 있어. P군이 적잖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왔다는 거.”

미즈키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야기에, 프로듀서는 카에데를 바라보며 ‘말했어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카에데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기, P군이 나를 어디에서 스카우트했는지, 기억 안 나?”

“네.”

“…….”

“아니, 스카우트고 자시고, 아나운서 때려치고 대뜸 찾아왔잖아요. 아이돌 시켜달라고.”

“참, 맞다. 그랬지.”

에헤헷, 하고 웃으면서 두 손바닥을 마주치는 미즈키를 바라보던 카에데가 옆에서 슬쩍 끼어들었다.

“미즈키 씨가 아나운서 경력자라는 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왜요?”

“아나운서라는 자리는 좋든 싫든 뉴스를 끼고 살아야 하거든. 그래서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해외 신문 읽느라 PDA도 쓰고 그랬어.”

“PDA……?”

“전화 안 되는 스마트폰 같은 거에요. 당시엔 꽤나 비쌌죠.”

“그렇구나~.”

”당연히 P군의 일도 자~알 알고 있지요. 입국하면서 가명을 쓴 것 정도까지?”

의기양양한 미즈키와는 대도적으로 ‘다행히 그 정도만 아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술잔을 쪽쪽 빨아먹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다르게 비친 듯, 미즈키와 카에데는 그 모습을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P군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던 만큼이나 그 안에 담겨 있는 것도 많겠지? 현명한 것과 똑똑한 것은 달라. 비록 학력은 낮지만, P군이 가지고 있는 경험은 분명 우리 사무소의 누구보다도 깊어.”

미즈키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을 고르듯 술을 한잔 들이켰다.

”푸핫~! 그러니까, 나는 이럴 때야말로 보물상자를 열어 볼 때라고 생각해. P군의 인생을 담은 보물상자에는, 분명히 이럴 때를 위해서 당신이 마련해 둔 비장의 수첩이 있을 거야. 아암, 나도 있는데 P군 같은 사람한테 없을 리가 있나.”

그 말을 듣고 프로듀서는 몇 달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없어 고민하던, 독서를 좋아하는 소심한 소녀를 앞으로 이끌어 주었던 기억이었다.

‘그 때,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지?’

“흐흥,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지?”

“네? 아, 아아. 네. 뭐, 일단은…….”

프로듀서는 뭔가 결심한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머리가 좀 복잡해서, 전 이만 들어가볼게요.”

“에에~ 벌써요?”

“죄송해요. 이 벌충은 다음에 꼭 할 테니까.”

“후훗, 지금 그 말, 확실하게 접수했어.”

“……너무 센 건 참아주세요.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천천히 즐기시되, 내일 오후 일정에는 영향이 안 가도록 해 주세요.”

“네. 살펴 들어가세요.”

“응, 알았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성큼성큼 가게 밖으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미즈키는 드러나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P군, 그럭저럭 추리는 좋았지만 아직 여자아이의 마음까지는 잘 모르는 것 같네. 열심히 해 봐!’

 

 

술집을 나온 프로듀서는 그 길로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 뒤늦게 올라오는 술기운에 휘청거리면서도 어떻게든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불야성(不夜城)의 불빛에 의지해 자기 자리로 슬금슬금 향했다. 자신의 의자에 앉아서 그는 곰곰히 생각에 빠졌다.

‘나만이 알고 있는 것, 내가 겪은 것, 내 보물상자…….’

무엇인가 떠오를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왔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내가 겪은 경험…….’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술기운을 내쫓으려는 듯, 머리를 붕붕 내저으면서 프로듀서는 날숨을 크게 내뱉었다. 또다시 한숨을 내쉬기 위해 숨을 들이쉬려는 바로 그 순간,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콜록, 콜록, 콜록!!”

덕분에 멋들어지게 사레가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돌파구를 찾았다는 사실에 프로듀서는 연신 웃는 표정으로 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맞아! 그게 하나 있었지. 아하하, 고마워요 영감!!”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프로듀서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 이렇게 또 토요일이 가는구나~.”

토요일. 그것도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려 하는 토요일 저녁이었지만, 프로듀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별관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의 옆구리에는 어제 분량이 녹화된 DVD가 끼워져 있었다. 어제는 술기운에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서 쓰러져 잠들었기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던 금요일 분량의 녹화영상을 오늘에야 돌려본 것이다.

‘영상은 봐도 잘 모르겠단 말이야…….’

흐느적흐느적 걸으면서, 그는 정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를 바라보았다.

“……지하 1층? 트레이너들은 주말에 쉬는데……누가 연습실로 내려간거지?”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이라는 말은, 아직까지 내려간 사람은 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듀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을 통해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지하 1층의 복도에는 불을 하나만 켰는지 듬성듬성 불이 들어와 있었다. 비상계단의 출입문을 닫고, 프로듀서는 복도 한 가운데에 서서 눈을 감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연습장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댄스 트레이닝 룸에서, 마치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쿵쿵거리는 은은한 비트 소리가 들려왔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가면서 프로듀서는 조용히 트레이닝 룸의 방음문 앞으로 다가갔다. 가급적이면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프로듀서는 문틈 사이로 방 안의 모습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아주 약간 문을 열었다.

문틈 사이로 드러난, 방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확인한 프로듀서의 표정이 단박에 딱딱하게 굳었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프로듀서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닛타!”

트레이닝 룸의 방음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프로듀서의 기세에 땀 범벅이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미나미는 화들짝 놀라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으로 미나미를 바라보던 프로듀서는 성큼성큼 다가와 음악이 흘러 나오는 음향기기를 정지시고는 미나미를 홱 돌아보았다.

“프, 프로듀서 씨……?”

“내가 주말에는 쉬라고 했지 않았어? 컨디션 조절에 신경쓰라고 그렇게…….”

“저……그, 조금 안 풀리는 부분이 있어서……죄, 죄송해요.”

금세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안절부절 못하는 미나미를 내려다보던 프로듀서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자세를 낮추어 그녀의 눈을 마주보았다.

“잠깐 머리를 좀 식히자. 캐치볼, 할 줄 알아?”

“네? 네……할 줄은 아는데요.”

“그럼 여기 대충 정리하고, 별관 입구로 올라와. 내가 글러브랑 공 가져올 테니까. 알겠지?”

왠지 모르게 진지한 프로듀서의 행동에, 미나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붉은 석양도 그 빛을 잃어가는 시간이 될 때까지, 별관 바로 옆의 공원에서 가로등에 의지하여 프로듀서와 미나미는 공을 주고 받았다. 운동부 활동을 한 만큼 기본적인 요령은 알고 있었기에 캐치볼을 하는 데 있어서는 큰 문제는 없었다. 미나미가 던지는 공은 때때로는 감정을 실은 듯 뻣뻣했고, 때때로는 손에서 공이 빠진 듯 예상치 못한 궤적으로 날아가기도 했다. 물론 프로듀서가 요리조리 뛰어다니면서 다 잡아내기는 했지만.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공을 주고받은 다음에서야 땀 범벅이 된 채 두 사람은 공원 한 켠에 마련된 쉼터로 향했다.

“어때, 이제 생각이 좀 풀려?”

“잘 모르겠어요. 조금 후련해진 것 같기도 하고…….”

미나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들고 있던 글러브를 펄럭펄럭 흔들었다. 자신 없는 말투였지만, 그 표정은 확실히 트레이닝 룸에 있을 때보다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

“앉자. 이제 좀 쉬어야지.”

프로듀서는 벤치에 먼저 털썩 앉으면서 가지고 온 가방에서 드링크를 꺼내 미나미에게 건네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거 다 마시면 내 이야기를 좀 들어줬으면 좋겠다.”

드링크의 뚜껑을 열면서 미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드링크를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린 뒤, 절반쯤 남은 드링크 병을 받고 프로듀서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의 프로야구는, 메이저리그랑 마이너리그가 있어. 처음 메이저리그와 계약을 한 선수라도, 옵션에 따라서는 팀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곧바로 마이너리그로 강등시킬 수가 있지.”

“아, 그건 저도 들은 적 있어요.”

“맞아. 이건 유명한 이야기니까, 조금만 관심 있으면 알고 있을 거야.”

프로듀서는 드링크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마이너리그는 메이저리그 이상으로 생존경쟁이 치열한 곳이야.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 저 사람을 넘어가야만 내가 살 수 있는 곳이거든.”

“살벌한 곳이네요…….”

“맞아. 그래도 뭐, 따지고 보면 아이돌 업계랑 비슷하지 않을까?”

‘괜한 소리를 했구나.’라고 웃음기를 띤 얼굴로 말하면서, 목이 타는 듯 프로듀서는 또다시 드링크를 한 모금 마셨다.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그런 곳에서 한번 실패했다가 다시 일어선 사람의 이야기야. 그 선수는 처음에는 모두가 기대하던 유망주였어. 특급 신인이었지. 그런데, 처음으로 선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그는 처참하게 무너졌어.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치켜세우기 바쁘던 모두가 그를 질타했지. 경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마이너리그로 쫓겨난 그는 사람들의 기대를 받던 유망주에서, 하루아침에 역적이 됐어.”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나요……?”

“분한 마음에 죽어라 공을 던졌지. 죽어라 훈련하고. 그래서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모르겠어요.”

“투수의 생명인 어깨에 탈이 나서, 반년 동안 마이너리그조차 제대로 뛰지 못했어.”

담담하게 말하는 프로듀서의 옆에서 미나미는 작게 숨을 삼켰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프로듀서는 앞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선천적으로 회복력이 좋았던 덕분에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 하지만 치료가 끝나고 반년 뒤에 팀에 돌아왔을 때, 그 선수는 자기 자리가 없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 그렇게 그는 마이너 리그에서도 보결선수가 됐어. 경기는 나가지도 못하고, 훈련때 배팅볼이나 던져주는 수준이었지.”

“힘들었겠죠……?”

“힘들었겠지. 아니, 힘든 수준을 넘어서 괴로웠을 거야. 내가 대체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도 엄청나게 들었고, 마약의 유혹에도 빠질 뻔 했지. 그런데 그 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준 사람을 만났어.”

호흡을 고르듯, 프로듀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에서 나온 날숨은 새하얀, 옅은 구름이 되어 삽시간에 사라졌다.

“신임 코치로 온 사람이었는데, 코치는 그 선수를 보더니 대뜸 표정이 썩어 있다면서 시비를 걸었어. 그래서 하루 종일 그 사람이랑 싸웠어. 그는 공을 던지고, 코치는 받고.”

“싸움……인가요?“

“싸움이지. 그가 공을 던질 땐 코치의 급소만 노리고 던지고, 나중에는 힘이 빠져서 코앞에서 공을 주먹으로 쥐고 그냥 갖다 때려 박았거든. 아무튼 그렇게 하루 종일 던지고 나니까, 독기 같은 게 빠졌어. 왠지 모르게 후련해졌지.”

“아…….”

“그 때, 코치가 그 선수더러 이렇게 말하더군. 어린 놈이 어깨에 힘이 뭐 그렇게 많이 들어갔냐고. 하나하나 다 짊어져서 인생 어떻게 살 거냐고 막 욕을 하는 거야.”

“웃긴 사람이지?”라고 덧붙이고, 프로듀서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맞아……뻔뻔함. 뻔뻔함이 없었던 거지. 코치는 그에게 뻔뻔해지라고 말했어. 프로의 무대에서는 얼굴에 철판을 깔 필요가 있다고. 너는 하느님이 아니니까 다 짊어지려 해 봤자 너만 피곤해진다고. 그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왜 그렇게 간단한 걸 나는 몰랐을까'하는 후회가 몰려왔어. 그래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펑펑 울었어.”

“그 정도로 억울했었나 봐요.”

“맞아. 너무 간단한 사실이었거든. 그 사실만 알았더라면 자신이 이렇게까지 추락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렇게 그가 펑펑 울고 있을 때, 코치가 그 선수를 일으켜 세워서는, 글러브를 낀 손으로 뺨을 크게 갈겼어.”

“에……?”

“하하하, 이해가 안 가지? 그래도 그 선수는 그 한방 덕분에 정신이 확 들었어. 내가 지금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무언가 나 자신을 보여줘야 한다. 달라진 나 자신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냥 열심히 했어. 무모하게 돌진한 게 아니라 칼날을 갈면서 기다리다가, 자신에게 찬스가 왔을 때, 그것을 꺼내어 보여줬지. 그렇게 1년의 시간이 더 지나서, 그 선수는 다시 자신이 처음에 섰던 그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어.”

“참으로 크게 돌고 돌아서 마침내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지.”라고 덧붙이면서, 프로듀서는 자세를 약간 돌려 벤치에 앉은 자세로 미나미의 눈을 바라보았다.

“닛타.”

“네, 넷!”

차갑게 가라앉은, 안경 너머로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보는 미나미의 가슴이 크게 뛰었다.

”이번에 네가 겪은. 아니, 겪었다고 생각한 실패는 지금까지 와는 그 깊이가 다르게 느껴질 거야. 하지만, 지금의 너는 실패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걸 실패라고 생각하고, 네 책임이 아닌 것을 네 책임이라 자책하고 있는 걸로 보여.”

그 말에, 미나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레 대답했다.

“……하지만 크던 작던, 결국 제가 실패한 건 맞잖아요.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실패하지 않는 쪽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래. 실패하지 않는 건 좋아. 그게 베스트지. 하지만 인생이란 건 살면서 한번은 무조건 넘어지게 되어 있어. 그렇다면, 일부러 덜 아프게 넘어지면서 일어서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어서는 방법…….”

“모든 것을 네 혼자서 짊어지려 하지 마. 네 뒤에는 내가 있고, 네 옆에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힘든 게 있으면 얼마든지 기대도 돼.”

“하지만, 저 때문에 프로듀서 씨가 피해를 보시는게…….”

“그러면 안 되지. 내가 피해를 보더라도, 네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으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미쳤다고 매일마다 야근을 하겠어?”

“후훗,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프로듀서는 미나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핑계를 만들어야 한다. 변명거리가 있어야 해. 모든 게 내 잘못이라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나가다가는 요전처럼 반도 못 가서 금세 고꾸라질거야. 라이브가 실패해? 그럼 내가 무대를 잘못 만든 거지. 오디션에서 떨어졌어? 그건 내가 레슨 스케줄을 잘못 잡은 거야. 네가 한 거라곤 내가 만든 길을 그대로 따라온 것뿐이야. 알겠어?”

굳은 표정으로 미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도 컨디션 조절 못해서 쓰러진 건 네 잘못이야. 그건 반성해. 다음부터는 절대로 오버워크는 하지 말 것. 알겠지?”

“네……푸훗.”

“왜 웃어?”

“아뇨, 그렇게 폼 잡으면서 말하다가,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웃겨서 그만…...후훗.”

“……흠, 흠. 아무튼. 내가 무슨 말 하는지는 다 이해했지?”

“네. 고마워요.”

마침내 다 털어낸 듯한 가벼운 미소를 짓는 미나미를 바라보면서, 프로듀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엣, 저, 갑자기 왜…….”

“그냥, 왠지 한번 하고 싶어서.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되는데.”

“괜찮아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프로듀서 씨니까.”

“이거 참, 영광이구만.”

 

 

 

짐을 내려놓고 나서 한결 몸이 가벼워진 덕분인지, 2주 뒤에 펼쳐진 라이브 배틀의 참가자를 선별하는 오디션에서 미나미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자랑하며 너무도 간단하게 오디션을 통과했다. 심사위원이나 참가자들은 경악했지만, 프로듀서는 담담했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자질을 따져보면 오히려 이 쪽이 더 신빙성이 가는 결과였다.

 

그리고 또다시 시간이 흘러 라이브 배틀 당일.

스테이지의 뒤편. 무대장치 사이로 쏟아지는 눈부신 빛을 바라보며, 팔짱을 낀 프로듀서는 미나미의 무대를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사기사와의 상담을 해 주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내 기억을 꺼냈다. 그것도 거들떠보기도 싫었던 그 때의 기억을. 그건 아마도 그 때의 그녀가 놀라울 정도로 과거의 나와 닮았기 때문이겠지.’

그는 미나미의 모습이 보이는 자리로 조금 위치를 바꾸었다. 눈부신 스테이지 아래에서, 마치 햇빛을 받아 빛나는 별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토해내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프로듀서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자기 자신에게 각인하듯 중얼거렸다.

“돌이켜보면 결국에는 실패만 한 인생이었다. 그렇지만 뒤집어 말하면 실패를 겪었기에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 또한 알고 있어. 그렇다면 나는 반면교사가 되자. 저 아이들에게 따라가서는 안 되는 길을 보여주자. 적어도 내가 걸었던 길을, 피투성이의 가시밭길을 다시 걷게 하지 않도록 하자.”

그 때,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미나미의 노래가 끝을 맞이했다.

“그래, 나는 먼저 넘어졌던 사람이니까, 일어서는 방법도 가르쳐 줄 수 있어.”

스포트라이트가 꺼지고, 암막 너머로 관객들의 뜨거운 환호성을 뒤로 한 채, 미나미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프로듀서 씨! 저, 어땠나요?”

수건을 들고 있던 프로듀서는 대답 대신 조용히 엄지를 치켜들었다.

“후훗, 감사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와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미소짓는 미나미에게 프로듀서는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네었다.

“자, 결과 나올 때까지 우린 대기실로 가자.”

“네!”

대기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프로듀서는 아이스 박스에서 드링크를 꺼내 미나미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마셔.”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잘 하는데 왜 저번 오디션은 말아 먹었을까.”

프로듀서의 말에, 드링크를 마시던 미나미는 잠시 망설이더니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작게 대답했다.

“……저, 사실은 무서웠어요.”

“무서워? 뭐가?”

“라이브 전에 쓰러져서 라이브를 망친 것도, 프로듀서 씨가 몸살에 걸린 것도 전부 제 탓이라고 생각하고, 저를 멀리하실 거라고 생각하니까…….”

“뭐?”

미나미의 말을 들은 프로듀서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잠시 벙찐 표정을 짓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서 그렇게 힘이 잔뜩 들어갔구나? 그만큼 벌충하려고?”

“우, 웃지 마세요!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프로듀서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미나미는 토라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내가 네 잘못이라고 한 적이 있었어?”

“아뇨, 그러지는 않았는데, 프로듀서 씨 성격이라면 분명히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실 거라고…….”

“이거 실망인데, 내가 그렇게 속이 좁아 보였나. 그럼 닛타한테는 이제 아주 엄격하게 대해야겠군.”

“죄,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미나미의 머리를 프로듀서는 웃는 얼굴로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농담이야. 미안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나도 내 나름대로 생각을 했다고는 했는데, 이거 반은 그냥 헛다리를 짚었구나. 그간 정말 고생 많았다.”

“으응, 아니에요.”

마치 고양이처럼 프로듀서의 손길에 몸을 맡기면서 미나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로듀서 씨는 제게 충분히. 아니, 차고 넘칠 정도로 손을 내밀어 주셨어요. 그저 제가 멋대로 프로듀서 씨의 손길을 거부한거죠. 제가 어리석었어요. 고마워요 프로듀서 씨. 이런 저를, 끝까지 믿고 바라봐 주셔서…….”

“당연하지. 누가 데려온 아이돌인데. 넌 내가 이 회사 있는 동안에는 내 손에서 못 벗어나. 절대로. 내가 안 놔줄 거야.”

“그런가요? 그럼 앞으로도 프로듀스 잘 부탁드립니다. 저, 프로듀서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테니까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오해 사기 딱 좋은 발언을 하는 미나미를 바라보면서,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에로해.”

“너무해!”

 

 

 

<끝>

 

'얘는 지 과거에 트라우마가 있는 주제에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기 얘기를 많이 써먹어?'

에 대한 해답, 혹은 변명거리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에로함에 묻혀서 그렇지, 미나미는 향상심도 있고, 재능도 있고, 생각도 올바른 아이입니다.

이런 캐릭터는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자신의 책임에 대한 경계가 모호한 캐릭터가 되기도 하죠.

이번에는 그러한 부분에 포커스를 두고 진행시켜 보았습니다.

 

발전하는 건지 퇴화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다음번에 다음 이야기로 다시 찾아뵐게요.

2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