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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 미래 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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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0, 2016 19:14에 작성됨.

미래 계획서

 

“후미카 언니는 아이돌에서 은퇴한 다음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레몬티가 담긴 찻잔을 들어올리다가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그를 다시 내려놓는다. 프로스페로 대공이 수의를 두른 자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에서 시선을 돌려 사기사와 후미카는 곁에서 말을 걸어온 이를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집중하는 기색으로 눈을 마주해오는 타치바나 아리스의 태도에 반사적으로 살풋 눈길을 내려깔고 말았지만. 꼬마 아가씨의 앞에 놓여있는 노트와 필기구에 한 차례 시선을 주었다가 후미카는 말을 꺼냈다.

“갑작스런 물음이네. 은퇴한 다음이라......”
“학교에서 차후 어떤 직업을 가지게 될 건지 생각하고, 그에 대해 서술해오라는 과제가 나왔거든요. 그게, 전 이미 아이돌이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더니 그런 경우에는 이후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답을 들었어요. 은퇴를 하고 새로운 길을 찾는 경우도 많기는 하니까요.”
“그랬구나. 아리스는 노래를 하기 위해서, 그를 위한 준비 단계로 아이돌 활동을 시작했었지?”
“그건 그렇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법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과제를 작성하고 싶어서......”
“아리스는 착실한 아이니까.”

대견하다는 듯 말하고는 후미카는 작게 웃어보였다. 무언가 답을 하려다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아리스는 뺨을 붉혔다. 겸연쩍어하며 따라서 살짝 웃는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아이라는 표현을 썼다면 소녀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그에 대해 항의를 했을 터였다. 누구보고 아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하지만 그렇게 말한 게 후미카였기에 아리스는 조금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는 칭찬받았다는 사실이 그저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은퇴라. 새롭게 주어진 화두에 대해 곱씹으며 후미카는 찻잔을 다시 들어올렸다. 홀짝, 혀가 달콤함으로 물들어가는 감각을 즐기다가 아가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늦은 오후의 사내 카페테리아는 하루를 보내고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속 아이돌들을 포함하여 프로덕션의 직원들이 테이블마다 서넛씩 앉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라운지를 따라 흐르는 활기는 생동감 넘쳐서, 구석진 자리에 마주 앉아 각자 양장본과 과제 노트를 펼치고 있는 후미카와 아리스 두 사람은 마치 그림의 테두리에 그려진 인물들처럼 존재감이 옅었다.

아이돌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은퇴에 대해 생각해봤으리라. 시작이 있으면 또한 끝이 있으리라는 말은 이쪽 업계에서도 통용되는 진리이니. 언젠가는 마무리를 해야할 거란 사실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으면서 아이돌들은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동화의 세계 같은 무대에 미소지으며 오른다.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근심이란 없는 것마냥 즐겁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고된 삶에 지친 그들에게 화려한 비일상의 영역을 보여주는 거다.

상당수의 아이돌들이 그리 길지 않은 활동 기간을 보낸 뒤 은퇴를 하게 된다. 소비층의 수가 일정 수준으로 유지되는 시장에서, 누군가가 새롭게 데뷔를 한다는 건 이미 자리를 잡았던 다른 누군가가 그만큼의 영역을 내줘야만 한다는 의미이니까 말이다. 인기를 끌지 못하여, 혹은 원치 않는 추문에 휩싸여, 혹은 스스로 새로운 길을 향해 도전을 하고 싶어서. 여러 이유로 한 때 밤하늘에서 빛났던 별들은 그렇게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곤 한다. 반짝임을 품에 꼬옥 끌어안은 채로.

인기 절호조의 유명한 아이돌이라도 때때로 언젠가 마주할 자신의 은퇴에 대해 떠올리곤 하겠지. 카페테리아에 모여있는 인물들의 면면을 훑어보다가 후미카는 레몬티를 한 차례 더 홀짝였다. 처음 받아들었을 때에 비해 상당히 미적지근해진 음료를 남김 없이 마시고는 기분 좋게 한숨을 내쉰다. 후미카가 짧은 사색에 잠겨있는 동안,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리스는 자신의 몫으로 주문했던 딸기 스무디를 마시고 있었다. 딸기처럼 붉은색을 한 빨대를 입에 물고는 황홀함에 빠져있다가, 자신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짓는 언니를 보고는 황급히 자세를 바로한다.

“미래에 대한 일이라면, 생각한 적이 있었어. 종종 떠올리곤 했단다.”
“역시, 라고 해야할까요. 후미카 언니는 미래 계획을 철저하게 세워두셨을 거 같았어요.”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라......철저하게, 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말야. 가벼운 몽상에 가까우려나.”
“괜찮으시다면 듣고 싶어요. 무, 물론 어디까지나 과제를 위한 참고로 말이에요.”

말을 하고는 아리스는 펜을 집어들어 속기라도 할 태세를 보였다. 후미카가 말을 꺼내기를 진지하게 기다리는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언제나처럼 보이는 행동마다 사랑스러움이 묻어나는 동생을 상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후미카는 펼쳐두었던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따로 책갈피를 꽂아두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옛날부터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었어. 어렸을 때에는 작가......를 지망했던 적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그보다는 글을 읽고 책을 다루는 일에 매력을 느꼈던 거 같아.”
“도서관 사서처럼요?”
“으응, 맞아. 사서나 혹은 편집자......주제 넘게 보이려나 싶지만 평론가로도.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 고서점에서 일하며 이런 쪽도 좋겠구나, 하며 만족하기도 했고. 필요한 일들을 끝내고 나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얼마든지 좋아하는 책들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멋지다고 생각해요. 우아하고 지적인 느낌이라, 후미카 언니에게 잘 어울리구요.”
“그렇게 말해주니, 부끄럽네......으음, 그러니까, 아이돌로 활동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었던 거랄까. 적성에 맞는 일들이, 그런 쪽이라고 믿었던 부분도 분명 있었고......”

후미카가 꺼내는 말에 한껏 집중하여, 아리스는 정작 펜을 든 손을 움직이지도 못하였다. 그리 재밌는 이야기도 아닐 터인데 눈을 빛내며 경청하는 아리스의 반응에 후미카는 쑥스러움을 느꼈다. 손가락으로 뺨을 살짝 긁는다. 어린 시절 자신이 품었던 생각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하는 경험은 생각 외로 민망하였다.

“그 때의 나는, 스스로가 타인을 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홀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맞을 거라고 굳게 믿는 편이었어. 사서나 고서점 주인에게, 책을 찾아달라는 요청 이상의 대화를 요구하는 경우는 없을 거니까. 적성에 맞다는 말로 스스로를 안심할 수 있는 구석에, 묶어두려고 했었던 걸지도.”
“하지만, 무리해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을 하는 건 한층 괴로울 거라고 생각해요.”
“응, 아리스가 말한 대로야. 당시의 나에게는 그와 같은 결론이 최선이고, 또한 가장 현명한 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 변화가 없었다면, 분명 그랬겠지. 하지만 우연한 기회로 아이돌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었고......그 때 생각했었으니까. 낯설고, 그렇기에 두렵지만, 이를 통해 늘 꿈만 꾸던 새로운 자신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한숨 돌리며 찻잔을 들어올린다. 잔이 이미 비어버린 상태란 걸 뒤늦게 깨닫고 슬그머니 내려놓기는 했지만. 아리스가 눈치 빠르게 자기 몫의 딸기 스무디가 담긴 유리잔을 슬쩍 후미카에게로 밀어주었다.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저어보이고는 후미카는 다정함이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항상 서로를 향한 호의로 가득한 두 사람이었으니.

“처음에는 정말로 괜찮은 걸까, 주제넘게 행동한 게 아닐까 걱정도 많이 들었고, 서툴러서 실수도 많이 해버렸고......아리스에게도 민폐를 많이 끼쳤었으니까 말야. 그럼에도 항상 도와줘서 지금도 감사하고 있단다.”
“전혀 그렇지 않아요! 저, 저도 후미카 언니 덕분에 잘해낼 수 있었으니까요. 언니와 같은 유닛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매번 생각하고 있구요.”
“나도 함께하게 되었던 이가 아리스라서 참으로 좋았다고, 언제나 생각해. 포기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해줘서, 그리하여 새로운 자신으로 변할 수 있었으니까.”

후미카의 말에 아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미카가 아이돌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계기에 대해선 일찍이 들은 바가 있었으나, 그 결과에 대해 본인이 언급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터였다. 원하시는 대로 목표에 도달하실 수 있으셨던 거군요. 속으로 중얼거리며 소녀는 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 후미카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오른손을 들어 앙가슴에 올리고 그를 꾸욱 눌렀다가 떼어낸다.

“나중에 은퇴를 하게 되면, 새롭게 하고 싶은 일......아직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독서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어. 작은 도서관과 카페를 합쳐둔 느낌으로, 좀 더 개방적인 형태의 서고라고 하면 되려나. 찾아온 사람들에게 잠시 숨을 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공간과 음료를, 그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을 안겨줄 수 있게.”
“여기, 카페테리아와 비슷한 느낌으로요?”
“응. 하지만 조금 더 차분하고 안온한 구조로 꾸며서......편안하게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낮게 클래식 음악이나 비 내리는 소리를 틀어두고.”
“와아......”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스는 상상을 하였다. 밝지만 요란하지 않은 조명이 실내를 밝히고, 아늑한 나무 색채의 구조물들로 꾸며진 카페의 정경을 그려본다. 주문을 받고 음료를 내어주는 카운터가 한켠에 위치하고, 그 앞으로 여유로운 간격으로 놓여있는 테이블들이 자리를 잡겠지. 거기까지는 일반적인 카페의 구조이니, 이제 그 옆으로 다양한 책들이 가지런히 비치된 책장들을 놓는 거다. 책들을 소중하게 다뤄주세요. 자필로 썼을 안내문이 책장에 붙어있으려나. 책을 한 권 뽑아들고 주문한 음료를 받기 위해 카운터로 오면,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의상을 입은 아리따운 여주인을 볼 수 있으리라. 아름다운 몸매를 수줍게 가리는 우아한 옷차림에 가슴 아래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언젠가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한 고운 얼굴까지. 편안한 시간 되세요. 그렇게 말하며 살풋 미소를 지어준다면. 거기까지 상상을 하고는 아리스는 저도 모르게 새빨갛게 얼굴을 붉혔다.

“멋질 거라고 생각해요......”
“예전이었다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야. 처음 마주하는 사람들을 대할 자신이 없어서, 언제나 펼쳐든 책장의 뒤로 숨곤 했었으니까. 그대로였다면 설령 원하는 대로 사서나 고서점의 주인이 되었더라도, 찾아오는 이들과 의미 있는 교류는 조금도 하지 못했겠지. 어디까지나 요청 받은 일만 조용히 하여 넘겨주는, 그런 업무만 반복했을 거고.”
“그런......”
“하지만 지금은 달라. 여전히 사람 대하는 일에 서툴고, 말주변이 없는 사기사와 후미카이지만......더 이상 마냥 겁먹어서 숨고 싶지는 않아.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 손을 흔들어주는 수많은 인파를 보고, 생각했었어.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선다면, 이런 나에게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구나, 하고.”

말을 마치고는 벅차올랐던 숨을 후우, 쏟아낸다. 회화의 요령이 부족하여 이야기를 하는 도중 호흡을 적당히 조절하지 못하는 면모는 예전과 변함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화 도중 크게 심호흡을 하는 모습이 서툴게만은 보이지 않았다. 남의 말에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는 역할에 머무르지 않고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간다는, 다소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한 탓인지 아가씨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차분함이 감도는 얼굴에는 자신감이라고 해도 좋을 생기가 흘렀다.

“세련되지 못하고, 답답하고 둔하기까지 하더라도 자신의 방식을 믿고, 나아간다면, 그를 통해 품고만 있었던 감정, 생각, 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할 수 있어. 절대로 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던 일들을 아이돌로 지내며, 조금씩 해낼 수 있었던 거야. 고서점에서 일을 하며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더라도, 그와 같은 서적이 필요할 듯 보이는 손님에게 권유조차 하지 못했었지만......지금은 조심스럽게라도, 말을 꺼낼 수 있을 거라는......그런 기분이 들어.”
“하실 수 있을 거에요! 분명히요.”
“후훗, 고마워. 찾아와주는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책을 통해 각자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그렇다면 도서관이나 고서점보다, 보다 편하게 찾아올 수 있는,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을 만들면 어떨까, 하고. 앉은 자리에서 책의 향기가 나는 카페를, 상상으로 그려보곤 했어. 어디까지나 꿈을 꾸고 있을 뿐이지만, 그게, 언젠가 찾아올 훗날에 대한 사기사와 후미카의 희망 사항이야.”
“후미카 언니......”
“물론 지금은 아이돌 활동에, 아리스와 함께 하는 일에 전념할 거란다. 책장 바깥에서 얻을 수 있는 경험을, 매일마다 새롭게 안겨주는 소중한 일이니......말이야. 으음, 뭔가 혼자 들떠서, 길게 말해버리고 만 걸까.”

과제에 도움이 되도록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멋쩍은지 눈길을 내리깔며 어깨를 살짝 움츠린다. 부끄러워하며 상대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후미카의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리스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 어른스럽게 보였던 언니에게서, 예전과 변함없이 수줍음 많으면서도 솔직한 면모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소녀를 기쁘게 만들었다. 아이돌로서의 사기사와 후미카도, 평범한 여대생으로서의 사기사와 후미카도 어느 쪽이든 멋지시니까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아리스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딸기 스무디를 쪽 빨아마셨다.

“후미카 언니는, 분명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한층 멋있어지셨으니까요. 곁에서 쭉 지켜봐왔던 전 알고 있었는걸요. 그래서 언제나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그, 그건......아리스는, 벌써부터 똑똑하고, 씩씩해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한층 멋진 아가씨가 될테니......”
“언니와 비슷하게, 곁에 함께 있으면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요......그, 그러니까 음, 말씀해주신 내용, 과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흘끗 돌아볼 정도로 씩씩한 목소리로 답을 하고는, 아리스는 서둘러 노트를 펼쳤다. 펜을 꼬옥 움켜쥔 손을 움직여 내용을 또박또박 채워나간다. 공작 과제가 나왔던 날 색종이와 가위를 들고 있던 때처럼 무척이나 집중하고 있는 아리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후미카는 살풋 웃음을 지었다. 내려두었던 책을 들어 사르륵, 책장을 넘긴다. 그렇게 잠시,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와 책장이 가볍게 넘어가는 소리만이 둘 사이에 나직하게 흘렀다.

“카페......”

생각에 잠긴 아리스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듣고는 후미카는 시선을 들어올렸다. 펜의 뒤꽁무니로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톡톡 건드리며 아리스는 일견 진지한 모습으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펼쳐진 노트의 페이지에는 벌써 절반 정도의 문장들이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채워진 상태였다. 그러고보니 아리스는 다가올 미래에 대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으려나. 문득 그와 같은 궁금증이 생겨 후미카는 살그머니 쓰여져 있는 내용을 훔쳐보았다. 거꾸로 뒤집힌 형태이긴 하지만, 크게 쓰여져 있는 제목은 간단히 읽을 수 있었으니.

“......”
“......에? 아, 아앗! 보시면 안돼요!”

몽상하는 눈동자로 자신이 써둔 내용을 훑어보다가, 뒤늦게 시선을 눈치채고는 아리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후미카를 쳐다보았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고는 후미카는 계속해서 아리스의 과제를 훔쳐보았다. 당황한 소녀가 손바닥으로 내용을 가려버리기 전까지. 순수하게 의아해하는 푸른 눈동자와 이유 모를 부끄러움으로 가득찬 갈색 눈동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째서 아리스도 독서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과제를 작성하는 중인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후미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스스로가 생각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타인의 답을 베낄 아이는 절대 아니니. 오히려 스스로가 고심하여 내놓은 결과물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는 쪽이겠지.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내용을 써내려갔을 터.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리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언가를 깨닫고는 후미카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아, 그런 거였구나.

“카페 메뉴로, 딸기 세트를 추가해도 좋겠네. 딸기 쇼트 케이크나 딸기 스무디, 딸기 주스......아리스가 특히 좋아하는 신선한 생딸기도.”
“......흐아아.”

간파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손바닥 아래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내는 신음소리가 사랑스러운 음색으로 흘러나왔다. 평소의 상냥한 표정 그대로, 거기에 살짝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짓고 있는 언니를 훔쳐보며 소녀는 몇 번이나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머리 뒤에 달린 귀여운 리본이 흔들림에 따라 앙증맞게 좌우로 살랑였다.

“아리스는 어떠니?”
“......좋은 메뉴라고 생각해요.”

간신히 꺼낸 말에는 숨기기 힘든 떨림이 묻어났다.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고백이라도 받은 듯 풋풋한 수줍음에 잠겨 팔딱이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겨우 숨을 고른다. 그러니까, 품고 있던 생각을 받아주었다는 걸까. 아직은 어설프기만 한 미래 계획서이지만. 자신이 써뒀던 내용을 한 차례 눈으로 훑고는 아리스는 후미카를 쳐다보았다. 눈빛에서 다정함을 읽어내고는, 안도한다. 꼬마 아가씨의 달싹이던 입술에 곧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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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카를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스스로가 서툴고 부족함을 알면서도 그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에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능숙하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책을 통해 지식은 많이 쌓았음에도 실질적인 경험이 부족하여 움츠러드는 아이이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걸 알기에 보다 나은 모습으로 변하고 싶어서 아이돌 활동이란 생소한 영역에 발을 들이니까요. 그 과감함 하나만으로도 그저 소심하기만 한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워낙 고운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내면도 그만큼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사는 게 바쁘기도 하고 옆동네에서 주로 덕질을 하다보니 자주 찾아오지 못하게 되네요 ㅠㅠㅠㅠㅠ 그래도 생각날 때마다 방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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