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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CHEMY]사가사와 후미카 "금시조의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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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8, 2016 23:28에 작성됨.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본 야경은 이곳이 세계 최대의 도시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왔던 세계의 수도가 바로 아래서 반짝이고 있다는 느낌에 흥분을 지울 수 없었다. 이 번성한 도시에서부터 내 여정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니 두근거림을 감출 수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밤하늘, 아니 밤땅 속에서 빛나는 별들 사이로 빠져들고 싶었다. 비행기가 잠시 후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을 할 때엔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

 

스스로의 글을 훑어보았다. 뛰어내리고 싶을 지경이다. 작업이 진전되지를 않는다. 도저히 글을 쓸 만한 상태가 아니다.

 

글을 써 본 적은 몇 번인가 있다. 대학 전공 수업 관련으로 써 본 적도 있고, 스스로 써 보고 싶어져서 써 본 적도 있고, 문학소녀 아이돌이라는 특수성을 살려 몇 번인가 짧은 소설을 쓴 적도 있다. 다독, 다상, 그리고 다작. 좋은 글을 쓰기 위한 3요소는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작품을 향한 스스로의 의욕이다.

 

"하아......"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벌써 새벽 1시 반. 글을 읽다가 밤을 새는 일도 종종 있기에 조금 잠이 늦어진다고 해서 피곤함을 느낀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버틸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다. 대형 콘서트에 출연한 날 보다 더 지친다. 시차 탓으로 이 무기력함을 돌리려 해도, 미국 뉴욕에 온 지 1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그런 변명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 리 없다.

결국 스스로에게 변명도 하지 않고, 피곤한 심신을 호텔 침대 위에서 치유하기로 했다. 푹신하지만 불편한 매트리스 속으로 정신이 빨려들어가는 듯 했다.

 

"일본은 지금쯤 한낮이겠지......"

 

아마, 오후 1시 반 경이다. 내가 미시로 전무에게 낚인 것도 딱 그때쯤이었다. 애초에 사가사와 후미카는 자타공인 내향적인 사람이다. 지금도,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거절하는 게 어떻냐는 아리스의 마음씀씀이가 아플 정도로 고맙게 다가왔다.

하지만, 미시로 전무가 던진 미끼를 멍청한 물고기처럼 물어버린 건 그 누구도 다름아닌 바로 나다. 전무가 날 속인 것도 아니다. 그녀는 이 미끼 속에 큼지막한 바늘이 있다고 미리 알려 주었다. 그럼에도 난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다.

사가사와 후미카의 이름을 내걸고 책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매력적이었으니까. 함정임을 알면서도 빠져버린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침대 속에서 곱씹어 보려 해도,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할 수는 없었다.

 

 

-----

 

 

"여행..... 입니까?"

 

퀴퀴한 곰팡내, 묵은 종이 냄새. 칠이 벗겨진 오래된 가구의 냄새. 후각적인 묘사를 이용해 내 세상을 표현하자면, 이 세 가지 만큼 알맞은 표현은 없을 것이다. 장서의 용량에 비해 많이 비좁은 헌책방에서 홀로 고리타분한 역사를 되새기는 은둔자. 나는 이 작은 세상 속에서 만족하고 있었고, 이 세상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돌이 되어, 그곳에서 발을 내딛게 된 지금도, 내 세상은 책에 파묻힌 헌책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음.... 정확히는 말이지....."

 

미시로 전무가 여행 프로그램의 이야기를 가져왔을 땐, 솔직히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여기서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여행의 이야기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을 왜 굳이 머리 속으로 되뇌이냐면, 그것이 나의 나쁜 버릇이기 때문이다.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 뭔가 싫거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자기 내면의 세계에 몰두하는 것으로 도망쳐온 사가사와 후미카의, 손댈 방도가 없는 악습이다.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존의 세계에서 나가는 것 또한 겪어본 일이다. 알에서 태어나기 위해서는, 알이라는 세계를 벗어나야만 한다. 책이 전해주는 정보라는 것은 결국 어느 한 시점에서 고정되어버린 과거의 지식이며, 그 지식조차 저자의 수준에 따라 불완전하며 편파적이고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러한 함정에 빠질 정도로 어리숙한 지성을 지닌 건 아니지만, 결국 어딘가에서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게다가, 책으로 간접적인 경험만을 하는 것과 직접 만나보는 것은 다르다. 난 이미 그 차이를 알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카레 전문점에 들어가는 기분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동시에 감성적인 문장을 사용해 완벽히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여행이 내게 무언가 새롭고 소중한 것을 가져다 줄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결국 끝에 가서 반지성주의에 의지하고야 마는 스스로의 얄팍한 지성에 당혹감과 실망감을 감출 순 없지만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다. 사가사와 후미카는 자타공인 내향적인 성격이며, 외향적인 활동을 선호하지 않는다. 아이돌 일 때문에 바깥으로 나갈 때도 종종 조금 힘들다고 느낄 정도다. 그런데 여행이라니, 책 속의 세계로 여행하는 거라면 대환영이지만 내 공간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가는 건.....

 

".....카... 미카, 후미카. 듣고 있나?"

 

"....아."

 

"아, 가 아니다. 정말이지..... 이런 점은 변하질 않는군. 그나저나, 이번 일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또 한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버린 모양이다. 전무는 가볍게 불평하면서도 내 반응을 보고 속마음을 읽은 듯 했다. 취임 때 인선에 잡음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유능한 경영자이며 사람을 쓰는 게 능숙하다. 단점으로 지적되었던 독선적인 면도 취임 얼마 후엔 많이 줄어서, 지금은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썩어가는 책 속에서 날 꺼내 치장해줄 정도의 능력자라면, 내 의중을 파악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예... 죄송하지만.. 이번 일은...."

 

"뭐, 네가 거절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대학 문제도 있고 말이지."

 

일단 꺼내 본 이야기인 듯 싶었다. 못 먹는 감 찔러는 본다는 생각이었던 걸까. 그녀가 이 일을 밀어붙인다면 거절하기 힘들었겠지만, 내게 이번 일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이걸로 평소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에 안도감이 자리잡았다. 오늘 일은 사진 촬영 정도니, 일을 빨리 마치고 내 세상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있다.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소설이다. 여유롭게 읽어도 오늘 내로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존재하는, 저 멀리 있는 크레타 섬으로 여행을 떠나자. 안도감이 차오르기 전의 불안을, 여행을 통해 날려버리자.

 

"그렇습니까.... 그 외의 말씀이 없으시면....."

 

"하지만 아쉽군. 아이돌 겸 문학가인 '사가사와 후미카'의 ‘공식적인 첫 작품’을 보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이 내가 될 줄 알았는데. 정말 아쉬워. 네가 쓴 글을 보고 싶었는데."

 

".....에?"

 

안도감이 홀로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시로 전무가 평소답지 않게 긴 이야기를 한 걸 보고, 자신의 자리가 사라질 것을 예감한 것이다. 그 대신, 방금 전의 불안과는 다른 감정이 슬금슬금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아니,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수준 높기로 유명한 사가사와 후미카의 수필 겸 견문록 겸 기행기가 얼마나 좋은 글일지 나 뿐만 아니라 부하들과 팬들까지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음, 나오기만 한다면 내가 전폭적으로 지지해줄 수도 있었지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싫다고 하는 것을 억지로 밀었다간 처음 왔을 때 처럼 반발을 살 테고 말이야. 음음. 어쩔 수 없지."

 

그녀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며 반응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걸, 이 땐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스스로의 내면에 갑작스레 몰아친 폭풍우에, 바깥을 볼 여유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하아.... 대문호 사가사와 후미카의 처녀작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역시 별에는 손이 닿지 않는건" "할께요!" "기대하고 있겠네. 대략적인 정보는 이걸 참조하도록."

 

타인이 만들어낸 세계를 탐닉하는 자는, 언젠가 자신의 세계를 바깥으로 꺼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창조에 대한 욕구를, 성욕이나 식욕보다도 강렬하게 갈망해버리게 된다.

나는 드디어, 세계를 만들고 보여줄 기회를 잡은 것이다. 벌써부터 손가락이 간지러워진다. 이전에 없던 미소가 뇌를 뒤흔들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미시로 전무가 넘겨준 이 계획서에 그 기회가 들어있는 것이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겨우 집어서 넘긴다.

 

[사가사와 후미카, 해외여행을 떠나다(가제)]

 

"......에?"

 

"아, 학점에 문제가 없도록 대학교랑 이야기는 해 두겠다. 상당히 오랫동안 일본을 떠나있게 되는 거니까 말이지. 걱정하지 말도록, 준비는 완벽하게 해 두겠다. 내가 보증하지. 어차피 자세한 계획은 현지에 도착한 다음에 다시 짜게 되겠고 그 동안은.... 자유관광이라도 하는 게 어떤가?"

 

눈과 귀를 통해 들어오는 언어가 일본어 같지 않다. 예전에 겨우겨우 읽었던 율리시스의 일역본을 보고 듣는 것만 같다. 떨리는 눈동자로 앞을 쳐다보자, 거기엔 의기양양하게 미소짓고 있는 미시로 상무가 있었다. 이 사람한테 이런 면이 있었을 줄이야......

.....가 아니다. 완전히 당해버렸다!

 

악마는 언제나 멋져보이는 계약서에 서명하도록 유혹한다. 인감을 찍은 뒤에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

 

 

".......이곳에서부터 시작해 뉴멕시코를 거쳐 볼리비아까지 갈 계획입니다. 여행 간의 소모비용은 전액 회사가 지불합니다. 다만 사가사와 씨는 소지하고 계신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동영상과 사진을 촬영하셔아 합니다. 촬영된 데이터는 가능한 한 빠르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안전대책에 대해서입니다만...... 저기, 사가사와씨?"

 

시간이란 의외로 빨리 흐른다. 뉴욕에 온 지 1주일이 그새 지나버렸다. 대충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며 기계적으로 사진을 찍고 단순작업을 하듯 동영상을 남기며, 진전되지 않는 글을 억지로 쓰던 도중, 미시로 프로덕션의 에이전트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자세한 여행계획이 잡힌 듯 싶었다. 외국의 행정 절차나 치안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일본보다 위험한 곳인 만큼 그 만한 준비는 필요했던 거겠지. 그렇다면 1주일이라는 시간도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혼란 속에서 여행계획에 집중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아, 예. 듣고 있습니다."

 

단정히 뒤로 묶은 와인빛 머리와, 지적으로 보이는 안경을 쓴 여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와 너무 닮아있다. 그녀처럼 머리를 풀고 연구용 가운을 걸치고 안경을 벗으면 판박이일 게 분명하다. 성씨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내 앞에 있는 서류에 적혀있으니 나중에 그걸 다시 한 번 참고하면 될 것 같다. 계약과 관련된 설명을 듣는 도중에 한눈을 파는 건 일하는 사회인으로써 올바른 태도는 아니지만, 지금 이 곳에서 이야기에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람으로 가득 찬 도시에서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나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스스로의 미성숙함을 자각하게 된다.

 

"....이상입니다. 무언가 질문 있으십니까?"

 

여러 생각들 속으로 도피하는 동안, 이야기가 끝나버렸다. 월스트리트의 맛 없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커피가 차갑게 식어버릴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있었다. 딱 한 번 입에 대 보고, 미시로 카페의 커피가 얼마나 뛰어난 물건이었는지를 깨달았을 정도다.

일에 관한 내용은 아까 건내준 계획서를 보면 된다. 그럼 슬슬 질문을 던지자.

 

"그럼 우선..... 시키의 가족인가요? 처음뵙겠습니다. 사가사와 후미카라고 합니다."

 

"몇번뵙겠습니다. 이치노세 시키라고 합니다. HEEEEYYYY 너어어무해애애애애애~"

 

설마 했는데, 설마가 사가사와 후미카를 잡아버렸다. 방금 전 까지 진지한 샐러리맨 같던 그녀는 역시 이치노세 시키였다. 커피숍을 지배하던 딱딱하고 지루한 공기가 한 번에 사라졌다.

 

"후미카쨩이 걱정할 까 봐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재미없는 서류랑 씨름했는데~ 아리스가 따라오겠다는 걸 립스 멤버들한테 적당히 던지고 왔는데~"

 

안경을 벗어던지고 단정히 묶은 머리를 풀어헤치자 내가 아는 그녀가 나타났다. 이치노세 시키였다. 그 어떠한 복선도 장치도 없이 윌스트리트의 중심가 한복판의 커피숍에 미시로 프로덕션의 현지 직원으로 나타난 것이다. 아리스에게 범한 악행을 내 앞에서 자랑스레 떠벌리던 그녀의 수다를 다 식어버린 맛없는 커피와 함께 넘기고 있자니, 시키가 뺨을 부풀리며 내 가슴을 찰싹찰싹 소리나게 때리며 불평했다.

 

"시키쨩 의욕 사라지려고 해에..... 이대로라면 일본에 돌아가서 아리스쨩을 더 괴롭히게 될 거야."

 

".....그럴 줄 알고, 전무님께 미리 부탁해 놨습니다."

 

"아, 그래서 프레데리카랑 슈코가 카나데한테 키스당하고 있던 거구나. 이르다니 비겁하다~ 크로네의 내부고발자 같으니라고~"

 

그녀는 내 가슴을 특이한 형태의 타악기라고 착각하기 시작한 건지, 젬베를 두드리는 것 처럼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살갖과 섬유의 마찰음이 신경을 또 다시 흐트러놓고 있었다.

 

"저기......"

 

"이 리듬 들어봤어?"

 

자기 젖가슴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어봤느냐는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성적인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난 그런 쪽에 전혀 관심이 없다. 나중에 하게 될 때도 성행위 그 자체보다, 그게 과연 책에서 접한 여러 묘사들과 맞는지, 어느 내용과 맞는지를 비교분석하고 앉아있겠지.

 

"처음 들어보네요.... 그런데...."

 

"음,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이 도시는 어때? 여행은 즐거워?"

 

이치노세 시키는 걸핏 보기엔 혼돈의 전도사나 종잡을 수 없는 검정 백조 같지만, 때로는 아리스가 감탄할 정도로 진지해진다. 지금이 그 때였다. 감옥에 끌려가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의 성희롱과 마구잡이로 던지는 질문 속에, 깊은 은유가 흐른다. 그녀는 항상 이런 식이다. 니노미야 아스카가 종종 던지는 얄팍한 비유와는 그 무게의 단위가 다르다.

누가 말했던가, 진심에는 진심을.

 

"솔직히..... 즐겁지 않네요. 우선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고향인 나가노에 비하자면 어디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도쿄 역시 시끄러운 것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익숙한 환경에서의 소음과 익숙하지 않은 타지에서의 소음의 차이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막연한 인식이 덮힌 곳이 꺼지며, 생각과 실제의 사이에 크고 깊은 크레바스가 나타난 것이다.

 

"단순히 많은 것 뿐이라면.... 조금은 나을 거에요.... 하지만, 모두 바쁜 듯.... 일말의 여유도.... 없습니다. 부딛혀도... 사과하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어요.... 인상을 찌푸린 채로.... 적어도 책 이야기를 할 여유는.... 없어 보입니다....."

 

"특히 월스트리트 주변이 그렇지~ 이 동네 인간들이랑은 시키쨩도 상종하기 싫단 말이야. 특허니 분배니 뭐니 남을 공짜로 털어먹으려는 변태들만 있는 곳이라고~"

 

방송에서 보여주는 환상과 실제의 차이를 몸으로 겪고 있기에 뉴욕에 대한 환상을 최대한 지우고 오려 했다. 마음 속 어딘가에서, 파리 신드롬 같은 것은 얄팍한 지식과 환상에 속아넘어간 바보들이나 걸리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 지도 모른다. 자칭 지식인의 잘난 체 하고 싶어지는 우월감은 무의식 수준에서 내 사고를 통제하고 있었다.

 

"밋시 아니었으면 난 지금도 이 동네 망할 돼지들이랑 싸우고 있었을 거야~ 아~ 밋시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어라~ 아, 그 외에는?"

 

"으음..... 지하철이.... 신주쿠역은 굉장히 깔끔하고, 알기 쉽고, 정돈된 곳이었습니다..... 도쿄의 지하철도 저한테는 복잡했지만.... 이곳의 대중교통은..... 소설을 통한 간접경험은 역시.....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못한 걸까요......"

 

"시키는 인문학은 잘 모르지만, 책을 통한 간접경험도 좋다고 생각해~ 그렇다고 해서 지옥철이 지하철로 바뀌는 건 아니지만. 아, 어디어디 갔다왔어?"

 

낮선 뉴욕에서 카에데 씨의 기척이 느껴진 건 기분 탓일 것이다.

 

"으음...... 커피숍이랑..... 지하철이랑..... 뉴어크 시랑..... 그리고…. 그리고….."

 

…….시키는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처럼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녀 나름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심하게도, 그녀의 배려 덕분에 자신이 지난 1주일간 제대로 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한층 더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여행기를 쓰기 위해선 경험과 감상이 필수적인데, 나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쓴 여행기에 나온 문장들만이 머리 속에 잔뜩 떠오르며 그런대로 쓸만한 글을 만들어주긴 했지만, 나 스스로가 그런 글을 쓸 생각이 없었다. 그딴 건 자신의 작품이 아니다. 무언가가 떠오를 것이다.

 

"일단 론리플래닛에 나온 곳들은 돌긴 했어?"

 

"사진이라면..... 찍었습니다만….."

 

"말도 안돼 우리 후미후미가 중국인 단체관광객보다 못할 리가 없습니다. 그건 이 엿같은 도시에 대한 우롱이라고. 아, 여기 우롱차 주세요~"

 

우롱차는 영어로도 우롱차였다. 혼돈의 범위를 다쟈레까지 확대시킨 시키가 우롱차를 주문해서 커피숍을 우롱한 결과물을 맛보며 말했다. 그녀는 애초부터 커피엔 입도 대지 않았다.

 

"글 안 써지지? 나도알아~ 논문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글은 안 써지고, 환경은 참 비협조적이고. 커피는 레드불이랑 몬스터보다 맛없고. 베껴 쓸 논문들은 하나같이 퀄리티가 개판이고. 이래봐도 시키쨩은 이론물리학자란 말이야~"

 

"저도.... 이 1주일 동안..... 얻은 게 없어서..... 곤란해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의 행적을 되짚어보자.

 

첫째날.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탄 지 6시간 후, 이코노미석에서는 억지로 자려고 해도 잠도 제대로 안 오고 읽기 위해 가져온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책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6시간이 더 지난 후에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했다고 승무원이 알려줬을 땐, 내가 자고 있는 건지 일어나 있는 건지 알 수 조차 없었다. 난 글의 첫머리에서부터 독자를 기만해버린 것이다. 그리곤 마중 나온 사람들이 호텔에 집어넣어 주었을 땐 옷을 갈아입지도 씻지도 않고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둘째날. 시차적응 때문인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버렸다.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셋째날. 이하동문.

넷째날. 드디어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 마다 스스로의 체력이 얼마나 부족한지 반강제적으로 실감해야 했다. 게다가, 뉴욕의 지하철이 얼마나 불편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불결해 보이는 기차역엔 오래 전에 폐기했어야 할 낡은 전동차들이 노인학대를 당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타임스퀘어 광장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어째서인지 뉴어크 시로 가버렸다. 볼 것도 없는 곳이었기에 돌아오다가 큼지막한 쥐를 밟을 뻔 했고, 지하철 안에서 손등을 빈대에게 물렸다. 게다가 퇴근 시간에 겹쳐서인지 몸을 움직일 공간조차 없었다. 나와는 몸무게의 단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여덜 방향을 전부 포위당해버렸다. 그 사람들도 서로의 땀냄새가 불쾌한 듯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호텔에 돌아와선 제대로 옷을 갈아입고 온 몸을 씻었다. 가능하다면 몸도 갈아입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다섯째날. 왜 내가 이곳에 있는 건지 침대 위에서 하루 종일 뒹굴거리며 생각했다. 나와 뉴욕은 상극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론물리학과 화학보다 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거기에 화룡점정이라도 하려는 듯, 이 도시에서 넘쳐나는 사람들은 뚱한 얼굴을 하고선 내 기력을 빼앗아 갔다. 책을 읽을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여섯째날. 어제. 오늘처럼 윌스트리트를 돌았다. 사진만 주구장창 찍었다. 동양인이라서 주목받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근처에 썩어나는 게 속앓이를 하는 동양인들이었다.

그리고, 어제 저녁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 오늘에 이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뉴욕에서의 일주일을 정말 한심하게 보냈다.

 

"음, 대충 후미카쨩이 어떤 식으로 이 1주일을 보냈을지 상상이 갈 것 같기도~ 안 갈 것 같기도~"

 

이치노세 시키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다시 한 번 나를 쳐다보았다.

 

"저기 말이야."

 

"예."

 

"미시로 전무가 준비한 즐겁고 경제적이고 안전하고 편안하고 실속있는 코스 말고, 다른 걸 즐겨보는 게 어때? 우선 거기 있는 서류랑 갖고 있는 론리플래닛 같은 건 찢어버리고,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고."

 

먼 이국 땅에서 테라야마 슈지의 정신을 잇는 사람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라면, 보수적인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기피했던 그에게 일종의 공감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

 

 

[퀸즈보로 브릿지에서 건너면서 바라보는 도시는 항상 처음 본 모습 그대로 세상의 모든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격렬하게 약속한 첫 작품이다. 그 명망높은 위대한 개츠비가 말했듯, 이 도시는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격렬하게 약속하고 있다. 어쩌면, 이 격렬함이야말로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파워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 이유를 찾기엔, 일개 관광객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도 짧고 주어진 즐거움은 너무나도 많다. 결국 관광객이 할 수 있는 일은 즐기고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필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후우....."

 

노트북을 덮었다. 배터리가 부족했다. 컴퓨터는 호텔 안에서만 쓰는 것을 가정하기라도 한 건지, 배터리의 유지시간이 상당히 짧았다. 아니면 택시 안에서 충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렇다면, 이건 미시로 상무답지 않은 실수다.

 

"아가씨, 무슨 고민 있어? 그냥 관광객은 아닌 것 같은데."

 

"......소설 때문에 잠깐 뉴욕에 왔어요. 그런데....... 생각하는 것 만큼.... 진전이 안 되서."

 

"지금처럼?"

 

내 어색한 영어를 알아듣고서 택시기사가 넉살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쪽은 웃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쩌면 진전이 안 된다는 건, 이 택시기사에게 있어선 일상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진짜 도로가 꽉 막혀서 택시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도시의 교통은... 굉장히...... 혼잡하군요."

 

"일본인 손님, 학교에서 배운 어려운 표현 쓸 필요 없어. 이럴 땐 그냥 FUCKING 한 마디면 통한다고."

 

난 그런 상스러운 단어를 선호하진 않지만, 그래도 욕설은 문학의 중요한 표현 기법이다. 비속어 한 마디로, 문장을 넘어 소설 전체의 분위기와 현장감이 달라진다.

 

"그나저나 미녀 관광객이 혼자서 할렘에서 택시를 잡을 줄이야. 아가씨, 자기 몸은 소중히 간수하라고."

 

"몇 번인가..... 그...... 작업을 걸어온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근처에 경찰들이 돌아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적극적으로 대쉬해오지는 않았지만, 무리를 지은 남자들은 내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키의 충고를 듣고서 가장 먼저 할렘가로 향할 생각을 했던 몇 시간 전의 나의 뒷통수에 양장본 하드커버를 꽂아넣고 싶었다. 문학적인 영감이 내려올 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멍청한 관광객이 여기 있었다.

 

"그렇겠지. 나 같은 아저씨도 이렇게 작업을 걸고 있으니. 으헤헤헤."

 

택시기사가 다시 한 번 웃었다. 도로는 여전히 꽉 막힌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정말 막히는구만....."

 

"조금 막혀도.... 지하철보다는 낫습니다...."

 

"일본인 관광객한테 뉴욕의 개거지같은 교통사정은 너무 빡세지? 일본 사람들은 그 이야기 항상 하더라. 사실 빈말로도 좋다곤 할 수 없지만. 캬하하하. "

 

역시, 이곳의 사람들도 이 도시의 교통 사정에 불많이 많은 듯 하다. 짧게 머무르는 관광객들이 심각하게 불평을 할 정도라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얼마나 심할진 안 봐도 알 것만 같다.

 

"그래도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라고."

 

".....? 무슨 말씀이죠......?"

 

잠시 생각해봐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교통이란 쾌적하고 빠를수록 좋다. 정비사... 가 아닌 미요와 타쿠미를 필두로 한 라이더즈의 말이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기에, 택시 기사의 말에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옆을 봐봐. 저게 무슨 차로 보여?"

 

"비싼.... 차입니다. 아마도 페라리...."

 

하라다 미요라면 브랜드와 차종을 그 자리에서 떠올리고 말할 테지만, 난 자동차에 관한 지식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페라리의 앰블렘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대답은 어찌어찌 할 수 있었다.

 

"맞아맞아. 이 낡은 도요타 코롤라 같은 건 발치도 못 쫓아올 스포츠카지. 그런데 봐봐. 저 빈부격차의 상징 같은 차도 맨하탄 한가운데에서 빌빌대고 있잖아. 크흐흐흐....."

 

할렘 가는 예전에 비해 많이 안전해지고, 정돈된 편이라고 작업을 걸던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혼돈과 위험 그 자체였다. 한 눈에 봐도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걸어다니고, 유명 밴드의 드러머가 어울리는, 눈물 문신과 187이라는 숫자를 팔에 새긴 흑인이 훌륭한 솜씨로 양동이들을 두들겨가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선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외설적인 그래피티를 지우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맨하탄 한가운데에선 절대 일어나지 못할 일이다.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빈부격차의 극단화를 상징하는 듯 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공평한 것이 있다면 지옥보다 조금 덜하거나 더 한 교통이다. 이것만큼은 노숙자에게도 부자에게도 회사원에게도 관광객에게도 똑같이 공평했다.

 

"브로드웨이는 아직일까요....."

 

"글쎄, 가 본 적은 있어도 뮤지컬을 본 적은 없어서 말이야. 아, 미리 말해두지만 공연 시간에 늦어도 배상 같은 건 안 한다고."

 

파란 불이다. 하지만 차는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풍경 속, 유일하게 변하는 것은 항상 푸르른 하늘이었다. 돈으로 쌓은 탑들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구름의 움직임이, 이곳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었다.

 

"뭐, 소설 같은 걸 쓸 생각이라면 거기가 좋겠지. 오페라의 유령인지 캣츠인지 하는 것도 볼 수 있고, 잘나신 여피족들이 문화에 관해서 잡썰을 풀어놓는 것도 볼 수 있으니."

 

"역시... 그런 곳은.... 구경하기 힘든 건가요.....?"

 

"하하, 나 같은 택시기사는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빠. 그래도 뭐, 가끔 아가씨같은 사람들이랑 이야기 좀 나누는 게 싫지는 않아. 이 일 하다보면 여러 사람들이랑 이야기하게 되거든."

 

어느 새 빨간 불로 돌아왔던 신호등이, 다시 파란 불로 바뀌었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금 전 까지 빌딩 사이로 보이던 하늘이 사라지고, 새로운 틈새에서 새로운 하늘이 나타났다.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영양가도 없는 이야기인데 그래도 들어볼려고?"

 

다른 화자의 시점이라는 건 매우 중요하다. 비록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

 

 

[브로드웨이의 뮤지컬은 일본의 그것과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난 이전에 뮤지컬에 출연한 적이 있고, 그 때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았기에 자만하고 있었다는 걸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배우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대가, 연기가, 음악과, 노래의 그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귀욤 가스통의 걸작 오페라의 유령은 이미 몇 번이고 읽어봤지만, 이 뮤지컬이 내가 아는 그 이야기가 맞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어제 들은 딕실랜드 재즈와 길거리 음악가들의 공연이 가져다준 감동이 마음 속에서 가시지도 않았는데......]

 

론리 플래닛이 호텔 바닥에 떨어졌다. 결국 방을 바꾸진 못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방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런 방들은 하나같이 상태가 최악이었다. 헌책방에 박혀있었기 때문인지 좀벌레나 노래기, 바퀴벌레까지는 참을 수 있었지만 고양이만한 생쥐와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빈대들은 버틸 수가 없었다.

 

"....끄윽."

 

테이블 위에 빈 맥주캔이 또 하나 생겨났다. 취기의 도움을 받으면 글이 진전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밀러 정도로는 뭔 수를 써도 취기가 오르기 전에 포만감이 올라와 버린다. 스티븐 킹은 이 밀러를 너무 많이 마셔서 알코올 중독에 걸렸다는 건가. 술을 취할 정도로 마신 적이 없기에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 킹은 술이 약했던 게 분명하다.

 

[밀레니엄의 초입에서 너무나도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며 어두운 시대의 서막을 알렸던 제1 세계무역센터는 2014년이 되어서 다시 부활했다. 미국의 경제위기가 끝났음을 알리듯 뉴욕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찌르고 있는 이 건물의 옥상엔, 다른 랜드마크들이 으레 그렇듯 마천루가 존재한다. 입장료 30달러를 지불하고 들어가려 해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사람이 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 번영의 상징을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 해가 저무는 때에 딱 맞춰 그곳을 방문했다. 한국의 빌딩의 옥상에는 방공포대가 있다고 들었지만, 이 곳은 테러를 겪고 나서도.....]

 

한국에는 가 본 적도 없다. 방공포대 이야기도 야마토 아키에게 얼핏 들은 것으로, 아마 제대로 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세계무역센터의 마천루를 방문하지조차 않았다. 어제나 그제 즈음해서 방문할 '예정'인 시간 동안, 난 클럽에서 헤메고 있었다. 스트립 쇼를 목격한 다음에야 내가 들어와선 안 될 곳에 들어왔다는 걸 눈치챘었지. '안전한'곳이라고 들었지만 '괜찮은'곳은 아니었다. 평생 동안 책과 함께 살았지만 정작 이런 생활상식들은 금세 바닥을 보인다.

 

[뉴욕, 꿈들이 만들어지는 콘크리트 정글. 유명 래퍼 JAY Z의 노래가사다. 힙합은 잘 모르지만, 그 가사야말로 뉴욕을 확실히 표현한다고 볼 수 있겠지. 특히 이 곳은 예술가들의 꿈에 가장 어울리는 곳이다. 수 많은 예술들이 이 곳을 중심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렇기에 이 곳은 전 세계의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다. 20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재즈는 루이 암스트롱을 필두로 하는 뉴욕의 뮤지션들과 함께 꽃피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하드 록의 흐름에 반발하여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효시로 한 펑크 음악이 발전하게 되었고 이는 얼터너티브의 시초가 되었다. 그 유명한 린킨파크의......]

 

책 속에 길이 있다. 이 신조는 지금까지 수십 년을 살아왔고,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도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일개 초등학교 교사에게 디스당한 데라야마 슈지의 신조를 따를 필요는 없다. 맥주나 한 캔 더 마시고 속 차리자. 장서의 용량에 비해 많이 비좁은 헌책방에서 홀로 고리타분한 역사를 되새기는 은둔자. 내 세상을 표현하자면, 이 세 가지 만큼 알맞은 표현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세상 속에서 만족하고 있었고, 이 세상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도 내 세상은 책에 파묻힌 헌책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일본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의 국가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치안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할렘 가 같은 곳은 지금도 치안이 좋지는 않고, 뉴욕 주변의 위성도시들은 범죄율로서 빈부격차의 극단화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현지의 사람들도 그 근처에 관광객이 잘못 들어갔다간 무슨 꼴을 당할 지 모른다고 말했다. 구분하기 힘든 경계선을 기점으로 휘황찬란하고 안전한 대도시와 총알과 사람 목숨이 동등하게 취급되는 우범지역이.....]

 

난 명백히 전자의 세계에 속하고 있었다. 위험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퀴퀴한 헌책방은 세상과 날 단절시켜주는 보호막이었다. 이 곳에서 위험한 일을 겪은 것도 아니다. 단지, 이방인이 되어서 방문한 우범 지역에서, 다른 이방인들에게 약간의 위험함을 느꼈을 뿐이다.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그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말을 걸었던 것이리라. 걱정했을 수도 있다. 소심해 보이는 동양인 여성 관광객에게 이런 곳에 홀로 오지 말라고 말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존 그리샴이나 제프리 디버의 소설에 피해자로 등장할 걱정은 안 해도 됐던 것이다. 갱단? 마리오 푸조는 밀레니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뉴욕 시 경제권의 규모는 세계 1위이며, 2위인 도쿄와 비교했을 때 인구는 반 수준이지만 규모는 더 크다...... 문화산업의 발전이..... 무지개 깃발을 걸어놓은 곳에는 들어가지 않는 걸 추천한다. 오해가 없도록 말해두지만, 난 동성애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그곳의 언니들이 내 가슴을 보고 절대로 순수 일본인이 아니라고......]

 

가 본 곳, 가 보지 못한 곳의 지식이 섞인다. 신기하게도, 내가 가본 적도 없는 곳의 풍경이 머리 속으로 그려진다. 오히려, 분명히 방문했던 관광 명소가 흩어지는 안개처럼 희미해진다. 안개는 흩어지지만, 머리 속에는 그 어떠한 심상도 남지 않았다. 의무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내가 뉴욕을 다녀왔음을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거였다. 메멘토 모리처럼 몸에 사인이라도 새겨두는 게 좋을까 싶다. 지금도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다른 누군가가 쓴 글을 봐가며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꾸미고 있지 않은가.

 

[뉴욕 여행을 통해, 스스로의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알게 되었다...... 평이한 감상문, 수정 요망. 이동시간을 고려하여 가보지 않은 곳과 가본 곳의 배치 및 시간을 다시 정렬.....]

 

책 속에는 길이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있다.

책 속에는 술이 있다. 끄윽.

 

"하아......"

 

취기는 전혀 오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쓴 물이 위에 가득 차선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는 것에 문제는 없고, 졸리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단지 글이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책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길은 없고, 짧은 시간 동안 돌아다닌 뉴욕은, 내 미천한 필력으로 묘사하기엔 너무나도 복잡하고 거대했다. 책 속에서도 그 바깥에서도 이정표나 지도가 되어줄 만한 것은 없었다. 

차라리 대마라도 할까. 여기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지만, 다른 주로 가면 합법적으로 떳떳하게 구할 수 있다. 아니, 다른 걸 하는 게 나을까. 하지만 그런 건 걸렸다간 진짜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머리아파......"

 

작업이 진전되지를 않는다. 도저히 글을 쓸 만한 상태가 아니다.

글을 써 본 적은 몇 번인가 있다. 대학 전공 수업 관련으로 써 본 적도 있고, 스스로 써 보고 싶어져서 써 본 적도 있고, 문학소녀 아이돌이라는 특수성을 살려 몇 번인가 짧은 소설을 쓴 적도 있다. 다독, 다상, 그리고 다작. 좋은 글을 쓰기 위한 3요소는 이미 내 안에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다. 나 자신의 문장이다. 남이 써 온 멋진 문장들은 떠오르지만 자신의 글이 나오지 않는다. 단순한 독서와 창작은 미국과 일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써 오던 글들은, 전부 어딘가에서 베껴온 문장들이었다. 문득 앞을 쳐다보자, 높디높은 고벽이 길을 막고 있었다.

 

"....."

 

손이 스마트폰의 화면을 빠르게 누른다. 의식은 그 어느 때 보다 또렷하고, 혼란스러웠다.

 

"여보세요, 미시로 전무? 조금 이르지만 다음 지역으로.... 예.... 아, 읽어보셨군요. 감사합니다. 아뇨, 저야말로 이런 졸작을 즐겁게 읽어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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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이 필요한 듯 한 얼굴이네. 하나 줄까? 스타쥬얼과 스태드리의 강장성분을 뽑아내서 농축시킨......."

 

사막의 한 가운데에 그녀가 서 있었다. 도로는 오래 전에 벗어나버렸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황량하고 메마른 벌판과 말라죽기 직전의 선인장, 그리고 서부극에 으레 나오는 회전초의 씨앗 정도다. 고원의 사막에서 유일한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 법 한 쉽락은 아무리 다가가도 멀게만 느껴진다.

 

"시키는.... 이런 사막이.... 익숙한.... 건가요.....?"

 

"시키는 화학자인 동시에 생물학자이기도 한 것이었다~ 생물이라는 게 사육이 불가능한 게 많으니까, 가끔 필요한 재료가 생기면 이렇게 나오는 거야. 아, 거기 뱀."

 

".....어, 그러니, 까..... 꺄악?"

 

"험난한 아이돌 업계는 과학자와 문학소녀마저 강인한 발키리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

 

시키가 뱀을 능숙하게 쫓아내었다. 첫 트레이닝 때는 빈혈로 쓰러졌다고 들었지만,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쓰러진 건 꾀병이었다는 의심이 든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입 안에선 불쾌한 단내가 풍긴다. 가끔씩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들이킨 코 안이 까슬거린다. 노폐물을 배출하기 위해 흐르는 콧물의 색이 시커멓다.

 

"사막에 나와본 적은 없지?"

 

"단체관광 코스라면....."

 

"그럴 줄 알았어. 중앙아메리카로 넘어가기 전에 만나서 다행이야."

 

이치노세 시키가 웃었다. 내 입장에선 전혀 다행이 아니었다. 혼자 중앙아메리카의 국경 근처에서 헤메이던 중, 갑자기 나타난 시키에게 반 억지로 끌려나와서 사막 한가운데에 도착한 후 지금까지 이 뜨거운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끌고 온 본인이 준 선크림이랑 특수한 옷이 아니었다면 살갖이 타다 못해 벗겨질 지도 모를 정도로 뜨겁다. 열 때문에 피가 부글부글 끓어올라 살 바깥으로 새어나온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나 농담이 아니었다.

 

"그럼 여기서 하나 물어보고 싶겠지? 이치노세 시키 이 XXX는 왜 날 여기까지 끌고 온 거냐고."

 

"............당신이,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런 일을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 미시로 이름 걸고 화장이랑 향수 몇 개 발표하기로 했거든. 미국에 온 건 그 때문이야. 그리고 겸사겸사 후미후미도 보러 온 거고. 어때, 글은 잘 쓰고 있어? 마음먹은 대로 써지질 않지?"

 

머리 끝까지 뻩친 열이, 조금 가라앉았다. 어느 새 황혼이 내려오고 있었다. 밝은 빛은 사라지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시간들이 검푸른 밤의 시간에 전염당해 어둠을 늘려가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빛은 지금까지 내려보던 쉽락에 가로막혀 그림자 속에 원통함을 남기며 사라져갔다.

 

"제 글을.... 읽으셨나요?"

 

이 밤 사막 어딘가에 묻어두고 싶은 졸작을.

 

"아니. 시키는 라틴어 논문은 읽어도 책은 못 읽어. 그런 거 읽을 바엔 그냥 바깥으로 뛰쳐나가지 뭐. 그런데 후미카가 이런 곳에서 헤메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혹시 드디어 이과로 전향할 생각이야? 미시로 이과의 두 수괴 중 하나로서 문과 수괴의 망명을 환영합니다~ 냐하하~"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한테 바람을 집어넣은 건 당신입니다....."

 

"맞아맞아! 그 이야기 전무한테 했더니 엄청 화내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온 거였어!!"

 

…..프로젝트 크로네의 미야모토 프레데리카도 이치노세 시키보단 정상일 게 분명하다. 그녀는 활달하고, 때론 통제할 수 없긴 하지만, 아리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종잡을 수 없이 종횡무진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이치노세 시키와는 다르다.

 

"프레데리카가 미야모토 씨가 되서 변호해주지 않았다면 난 지금쯤 윌스트리트의 돼지들이랑 이야기하고 있어야 했다고..... 게다가 나중에 미야모토한테 한 소리 들어버렸고오~ 시키쨩은 그냥 후미후미가 고민하고 있길래 조금 충고를 해 줬을 뿐인데~ 선의의 정보제공자는 처벌하지 않는 게 원칙인데에~ 시키쨩 배드 사마리안~"

 

거짓말일지도 모르고, 반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말 한 마디에 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경험 부족과 나약함을 탓하기엔, 그녀가 흔들어놓은 게 너무 크다.

 

"그래서, 이 시키쨩이 지금부터 후미후미를 남아메리카까지 에스코트하겠습니다~ 종착 예정지가 어디더라? 볼리비아? 지금부터 갈까?"

 

"......."

 

별빛이 흔들린다. 땀에 절어서 축축해진 옷이 빠르게 식어간다. 갑작스레 살을 에는 듯 한 추위가 온 몸을 적셔와 근육을 경련시킨다. 체온이 급속도로 빼앗기고 있다.

 

"......우선 자죠."

 

가방 속에서 간이 텐트를 펼친 다음, 그 속에서 옷을 갈아 입었다. 저체온증이나 감기로 고생하기 전에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결국, 그녀가 날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는 듣지 못 했다.

밤잠을 설쳤다.

 

---

 

"........"

 

얼마나 지났을까. 잠이 깨다 들다를 반복했지만 아직 바깥은 어둡다. 시키가 널부러져 편히 자는 동안, 얕은 수면과 둔한 기상을 반복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텐트 바깥으로 나왔다. 검푸스름한 밤에 별빛이 바늘끝처럼 반짝인다. 도심에서는 결코 볼 일이 없던 은하수가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저게 알타이브, 데네브, 베가....."

 

별자리 같은 건 모른다. 이 자리에선 보이지 않는 별자리일지도 모른다. 다만, 모래자갈 바닥 한복판에 누워 어디에선가 들어본 어구를 입에 담았다. 별빛이 바늘끝처럼 내 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어차피 어디선가 들어본 표현이, 네가 쓸 수 있는 전부라고. 사가사와 후미카라고 하는 인물은 남이 휘갈겨놓은 종이쪼가리 위에서 성립되고, 앏은 셀룰로오스의 탑 위에 서 있기에 남들보다 더 커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사실은 아리스나 아스카보다도 못 한 자그마한 존재라는 걸 알려주었다. 난 은하수의 아름다움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알고 있다고....."

 

필사적으로 머리 속을 뒤적여가며 단어와 문장을 조합해도, 자신만의 금시조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 먼 곳에 와서 드디어 깨달아버린 것이다. 잘 쓰는 것과 자신의 것은 다르다는 걸.

 

"......아."

 

그리고 밤이 갠다.

금빛이 보인다. 바늘처럼 찔러오던 별빛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한다. 일그러진 구름들을 먼저 붉게 태우며 진정한 불꽃으로 바꾸어주는 태양이, 바위산을 가볍게 넘어 황량한 사막에 금빛 수확을 안겨다준다.

 

"아아......"

 

다리를 굽히고 손을 비틀어 허리를 뒤튼다. 여행의 피로가 쌓인 몸을 태양빛이 씻어준다. 영혼을 뒤덮은 곰팡이 냄새가 강렬한 빛을 받아 소리없이 사라진다. 머리 속을 오염시키던 타인의 역사가, 여정이, 문장들이, 존재들이 전부 다, 하나도 남김없이 불타오르고 있다.

이것을, 이 기분을 표현할 수 있다면. 이 새로운 빛을, 자신만의 언어로 할 수 있다면.

 

"......그렇구나."

 

노출 하나 없이 몸을 꽁꽁 둘러싼 옷은 수 많은 망상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때로는 성적이고, 때로는 지적이며, 때로는 비밀스럽다. 지금 내가 두르고 있는 옷은, 먼 길을 떠나기 위한 순례자가 고르고 고른 튼튼한 옷이었다. 스스로 정한 옷은 아니지만, 지금은 이 옷에 의지해야 하리라. 날 이곳까지 안내해준 자의 마지막 선물에.

 

"당신에겐.... 감사해야 할까요?"

 

시키는 여전히 세상 모른 듯 자고 있었다. 나는 그녀 모르게 몰래 짐을 챙겼다. 필요한 것은 이정표 정도다. 그 이정표들만 해도 론리플래닛, 나침반, 지도, 그 외 여러가지이지만.

 

일본에서 가져온 책은 이곳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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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소금 사막에서 내 여정은 멈추었다.

 

그 때와 같은, 낮과 밤의 경계에 있는 건 나 혼자였다. 닳아헤진 순례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거울 같은 바닥에 비친다. 연보라색, 혹은 하늘색의 세상 속에서, 시선이 향하는 바닥을 관조할 수 있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 끝없어 보이는 곳에서 홀로 있다면 언어는 필요없으리라. 자신을 문학의 여신 쯤으로 여기던 책벌레는, 이 절경 앞에서 본래의 순례자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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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어요?! 후미카 언니 곁에서 절대로 떨어지면 안 돼요! 아시겠죠?! 저도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아리스, 여긴 내게 맡기도록. 그녀의 신변은 내가 보증하지."

 

"그 말 이전에도 들었거든요?!" "크윽.....!! 그건 그녀가 내 지시에 따르지 않고 멋대로....."

 

그리스의 바닷가라고 하면, 막연히 올리브처럼 푸르고 싱그러운 느낌의 올리브향이 가득 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이곳에서 먹은 올리브는 기름지고 텁텁하고 이상한 맛이었으며, 최고급 올리브 오일의 향도 생각보다 좋지는 않았다. 칼파쵸나 알리오 올리오에 뿌려진 그건 순수한 올리브 오일이 아니었던 것일까.

 

"헤에, 후미카는 인기인이네. 역시 밀리언셀러 아이돌 작가. 네 곁에 내가 키스할 만한 공간이 있을까?"

 

"떨어져요 이 키스마! 언니를 어딘가로 납치할 생각이지?!"

 

"아! 프레데리카 이거 알고 있어!! 이거 수라장이라는 거지?!"

 

"음..... 한쿡 드라마, 입니까? корейская морковь, 맛있습니다. 아냐도 좋아합니다."

 

"유이도! 빅뱅 멋있지~ 그런데 산토리니까지 와서 싸우는 거야? 아리스 괴롭히는 것도 적당히 하라니까…..”

 

그리고, 크로네의 멤버들은 이 곳에서도 나를 제외하면 시끌벅적거렸다.

 

"모두 조용히 해! 카렌은 오랜 여행에 지쳤단 말이야! 쓰러지면 어쩌려고!"

 

"지금은, 이 푸르른 낙원을 즐기자고. 꽃피지 못한 카렌의 몫까지.....!!"

 

"나 살아있거든요?!"

 

"X키를 눌러 조의…. 잠깐만, 설마 이거 흐름상 내가 정리하는 역할인 거야?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한 패러사이트-슈코님이?"

 

아아, 역시 책에 집중할 수 없다.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책을 덮고 싶다. 독서를 중단하고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 곳의 푸른 하늘과, 하늘과 구분할 수 없는 바다의 경계선. 그리고 하얀 세상.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와오~ 후미후미 인기 많은데~ 인기인의 냄새가 나고 있다고?"

 

"나왔구나 원흉! 언니를 꾀어낸 이과의 수괴! 오늘이야말로 당신을 쓰러트리겠어!"

 

"흥, 아리스 주제에 카리스마 갸루를 침몰시킨 이치노세 시키쨩에게 이기겠다고?"

 

"에? 미카언니는 잡졸 아닌가요?" "우와너무해사실이지만." "아무튼, 난 타치바나..... 언니?"

 

이 책은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 다 읽지 못했다. 시키가 회수해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사막 어딘가에서 묻혀버렸겠지. 그녀가 날 흔들지 않았다면, 사막에 그 책을 두고 올 일도 없었겠지. 그러니까

 

"고마워요."

 

불평해야 할 거리는 여러가지지만, 우선 이것부터 전해두자. 고맙다고. 당신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당신은 자신만의 문장을 향해 떠나는 여정의 시작점을 알려주었다고.

 

"고마워요."

 

뒤에서부터, 살포시 껴안았다.

 

"......에에에에?!?!?!?"

 

"어, 어어어어어어어언니이이이이이?!??!?!?!??!?!?"

 

왜인지 굳어버린 시키와, 온 몸을 사시나무처럼 흔들고 있는 아리스를 지나쳤다. 

 

"후미카?! 네 어필 포인트는 동성애가 아니라 문학....."

 

난 알렉시스 조르바스처럼 살 수도 없고, 그처럼 모험을 즐길 수도 없다. 그와 닮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난 스스로가 소중하게 쌓은 종이들을 태워버릴 수 있다.

 

"전무님, 계획서는 이게 전부인가요?"

 

"아아, 거기까지 짜느라 힘들었다. 이제 와서 변경할 수는 없으니 이번엔 말썽부리지 말도록. 제발 부탁....."

 

가방 속에서 전무가 만들어 준 계획서를 꺼냈다. 상당히 공을 들인 듯, 약간 두툼하긴 해도 알기 쉽고 간결하게 써져 있다. 계획 또한 흠잡을 곳이 없다.

 

"전무님, 산다는 건 허리띠를 풀고 말썽을 일으키는 게 바로 삶이에요. 산다는 게 곧 말썽이죠. 그러니 이 계획서를 쌓아두고....."

 

팔을 높이 뻗었다. 그리고, 어설픈 자세로 계획서를 바다로 던져버렸다.

 

"....불로 태워버리면, 혹 진정한 자신이 될지도 모르죠. 라이터는 없지만."

 

호치키스로 결박된 종이들은 바닷새처럼 날개를 펼쳐, 드디어 스스로의 구속을 풀고 날아간다.

 

전무의 경악성이 들린 것 같았다. 후미카도 물들었다는 투의 절규와, 아리스의 비명이 동시에 들린 것 같았다.

노트북을 꺼냈다. 지금이라면 정말 좋은, 나만의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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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에 앞서, 이 긴 글을 읽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후기 빼도 55kb 가까이 되려나?

 

글을 쓰다 보면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남의 걸 가져다 쓰면 그것이 자기 글인가.... 하는 고민이죠.

2차창작이라는 건 이미 원본이 주어져있고, 그걸 가지고 사람들이 이래저래 조립하고 덧붙여가며 만드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과연 순수한 의미의 창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표절 같은 건 논외로 치더라도,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시상이 자기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2차창작 하고 있는 주제에 그런 걸 신경쓸 만큼 잘난 작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자신의 글이라고 할 수 있는 무언가에 대한 욕구가 가끔식 고개를 듭니다. 넷서핑 하다가 우연찮게 야짤을 보았을 때의 그것처럼.

 

각설하고, 사가사와 후미카는 좀 더 입체적인 캐릭터가 되었으면 했습니다. 마침 애도 내향적이겠다, 일단 바깥으로 내던진 다음에 적당히 쓰면 그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몇 번을 지워가며 쓰다 보니, 결국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더군요. 이것도 글이냐, 애초에 니 글이냐라는 질문에요. 일단 글은 완결을 지어야 하기에 스스로도 보지 못 한 경지를 신비적인 분위기와 함께 적당히 우겨넣었습니다. 시키가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등장한 건 그 때문입니다. 안내자의 포지션을 떠맡을 캐릭이 필요했으니까요.

 

아무튼, 글의 완성도 자체는 뭐 아주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번엔 좀 평이하면서도 쓰잘데기없이 추상적인 이야기가 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쓸데없이 길고요. 애초에 상사가 만든 서류를 던지는 거에서 자유의지를 찾는 건 추상적인 것도 뭣도 아닌 그냥 간뎅이 부은 종이낭비죠. 나무야미안해!

 

쓰면서 필력이 상승한 느낌이지만, 동시에 새 한계와 맞닦뜨린 듯 합니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의 필력의 낮음과, 패러디와 오마쥬를 사랑하는 본인의 취향이니까요.

 

그럼 이만 줄입니다. 이번에도 시간이 꽤나 아슬아슬했군요. 다음엔 좀 더 마술적인 분위기가 나는 글을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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