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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미 씨 이야기 -1-

댓글: 4 / 조회: 897 / 추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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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08, 2016 00:03에 작성됨.

 당신이 속한 집단이 당신을 옭아매려 한다면 당신은 그것에 순응할 것인가? 내 대답은 NO다.

 얼마 전까지 난 꽤 큰 기획사의 아이돌 프로듀서였다. 다른 사람들 뒤를 봐 주는 것이 좋았으니까. 내가 담당했던 아이돌들은 실력있는 아이들이였다. 다만 실력에 비해 인지도는 떨어졌다. 아마 천성이 게으른 내 탓이리라. 평소 모든 일에 적당히 하자는 마인드라 다른 팀들이 바쁘게 뛰어가며 인지도를 쌓을 동안 우리는 느긋하게 때를 기다려 왔다. 문제는 기획사의 높으신 분들이 내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야미 레이 군.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떻겠나?"

 결국 실적 부진이란 명목으로 해고당했다. 물론 그 전부터 미리 손을 써 둬 내가 담당했던 아이들은 나랑 친했던 프로듀서가 맡아주기로 했다. 일자리를 잃은 것 빼고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주관을 뚜렷하게 가지면서 살면 하늘이 돕는다 했던가. 재기할 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어쩌다 길거리에서 한 남자와 부딪힌 일이 있었다. 아직 버리지 못했던 명함을 떨어트렸는데 그걸 본 남자가 눈에 불을 켜고 나에게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남자 역시 말단 프로듀서였는데 성실하게 일했음에도 악재가 겹쳐 결국 일을 그만둔 것이였다.

 "그러면 저희 둘이서 작은 사무소를 만드는 건 어떨까요?"

 나는 물었다. 열심히 안 할 건데 괜찮겠냐고.

 남자는 대답했다. 그만큼 자신이 열심히 할 거니 괜찮다고.

 그렇게 나는 시라기쿠 히카루라는 솔직하고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래서 어딘가 바보같이 느껴지는 남자를 동업자이자 후배로 받아들였다.

 

...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선배의 도움 요청 때문에 잠시 교토에 왔다. 사무소는 어떻게 됐냐고? 대충 구색은 맞췄지만 이름도 없는 사무소에 오디션을 보러 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있나. 아직까진 속 빈 강정일 뿐이다.

 대충 일이 끝나고 이왕 교토에 왔으니 여행 선물을 사러 선배에게 추천받은 화과자집으로 갔다. 한 소녀가 가게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흰 피부와 머리카락의 미인이였지만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하아..."

 소리없이 소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였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멍하니 서 있을 수도 없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으앗! 아...어서오세요."

 소녀는 놀란 듯 허겁지겁 일어섰다. 그렇게 위협적으로 한 것 같지는 않은데...하긴 종업원 입장에서 손님을 기다리게 하는 건 난감한 상황이긴 하지.

 "모나카 한 접시. 여기서 먹을 수 있지?"

 "마실 건 어떤 걸로 가져올까요?"

 "우유로."

 주문을 받은 소녀는 힘 없이 가게로 들어가 화과자와 우유를 가져왔다. 한 접시에 다섯 개라...인심 하나 후하구만.

 "...잠시 앉아서 이야기나 같이 하지?"

 "네?"

 "어차피 지금 시간대엔 손님도 별로 없고 계산대에 줄창 서 있는 것도 심심하잖아? 아니면 대화 상대가 수상한 아저씨라서 싫은 건가?"

 사실 아직 창창한 28이지만.

 "푸훗! 뭐야, 그게...좋아. 재밌는 사람인 것 같고 손님 접대도 내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단 듯이 소녀가 접시 옆자리에 앉았다. 웃으면 참 예쁜 아이구나.

 "아저씨 교토엔 혼자 왔어? 관광객?"

 잠깐만. 웃으라고 한 농담을 믿는 건가.

 "지인이 도움이 필요하다 해서 잠시 왔어."

 "흐응~엄청 친한가 보네."

 "그렇지. 그리고 아깐 아저씨라고 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이야. 28살! 아직 젊은 오빠라고."

 "거짓말~서른은 넘은 것 같은데?"

 제발...남정네들끼리 농으로 주고받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고통이라고.

 "물론 농담~그래도 그 나이에 양복 입고 여기까지 돌아다니는 건 이상한데?"

 "으흠...그나저나 너도 아직 가게에서 일할 나이는 아닌 것 같다만?"

 "그거야...여기가 우리 집이니까."

 과연. 확실히 가업을 잇는다는 등의 이유로 자식들이 가게 일을 돕는 많으니까. 이럴 경우에는 인건비도 안 나올 뿐더러 특히나 일손 관리가 용이하다. 물론 자식들의 입장에서는 노동착취라 느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가업인가. 부모의 일을 돕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리 즐겁지는 않을 것 같은데..."

 "하하...그렇지 뭐."

 메마른 쓴웃음. 확실히 이 소녀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전혀 즐거워하지 않고 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야. 멍하니 계산대 앞에 서서 인사하고 계산하고 다시 인사하고...아무런 변화도, 자극도 없어. 마치 기계가 된 기분이야."

 "하지만 일하는 걸 거부하면 가족들의 눈치도 보이고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

 "그래. 아마 내 인생은 이 지루함의 연속일 거야. 계산을 하고, 나이가 들면 화과자를 만들다가 부모님이 적당히 고른 남자랑 선을 보고, 결혼해서 또 화과자를 만들고, 팔고, 다시 만들고..."

 소녀는 자신의 인생을 비웃으며 한탄하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난 소녀의 가정사에 끼어들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 머리 속에서 한 가지 묘책이 떠올랐다. 우리 두 사람의 이해가 맞물릴 만한 기발한 방법이.

 난 조용히 소녀에게 명함을 건내 줬다.

 "...이게 뭐야?"

 "보시다시피 명함이다."

 "아이돌...프로듀서?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왜냐고? 그야 너에게서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이건 너한테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 아닌가? 재미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향할 길이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알았어. 시간이 된다면 한 번 들러 볼게."

 "기다리고 있겠다."

 그렇게 나는 주차해놓았던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음...그런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아!

 "어서오세...간 거 아니였어?"

 "하아...하아...모나카...다섯 상자만..."

 시라기쿠한테 줄 선물 사는 걸 까먹고 있었다...

 

...

 

 교토에서 돌아오고 난 뒤에도 우리 사무소는 달라진 점이 없었다. 아, 하나 있다. 간식으로 먹을 모나카가 늘었다는 거. 잘 됐구만. 잘 됐어.

 "역시 교토에서 온 화과자라 그런지 맛있네요. 그런데 왜 모나카만 한 가득 사 오셨어요?"

 "좋아하거든."

 단 건 진리다. 우울할 땐 단 간식을 마구 먹고 난 뒤 조깅 한 번 뛰면 기분이 개운해진다. 안 뛰면 나른해지고 편안해서 행복해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건 그렇고 느긋해서 좋구만. 스카우트는 어떻게 됐냐?"

 "항상 똑같죠. 권유하고, 명함을 받고, 무명 기획사라며 퇴짜맞고..."

 "이런...그것 참 안타깝군."

 "말에 영혼이 없다구요, 선배."

 그렇게 둘이서 만담을 주고받던 도중 누군가가 사무소 문을 두드렸다. 드문 일이였기에 시라기쿠가 놀라서 곧바로 튀어나갔다.

 "네~나가요! 무슨 일이신가요?"

 "여기서 아이돌 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던데..."

 사무소 앞에는 지난 번 교토에서 만났던 그 소녀가 서 있었다. 전통복장이였던 지난번과 달리 캐주얼한 복장이였지만 그 나름대로의 멋이 있었다. 시라기쿠는 소녀의 말에 크게 기뻐했다. 스카우트에 실패할 때마다 아쉽다고 멋쩍게 웃기만 했다만 그도 계속된 실패에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기획사 사무소라는 게 이렇게 작은 곳이였어?"

 "기대에 응하지 못해서 미안하군. 사실 아직 시동도 걸지 않은 상태야."

 "그래?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을 지도 모르겠네."

 이 얼마나 낙관적인 마음가짐이란 말인가. 소녀와 나의 대화에 시라기쿠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드문 모습이구만. 사진으로 찍어둘 걸 그랬나?

 "둘이 아는 사이에요?"

 "지난번에 교토 갈 때 만난 화과자집 아가씨."

 "그렇군요. 아, 화과자 잘 먹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왜 거기서 그런 감사가 나오는 건데?

 "천만에. 오히려 입에 맞다니 내가 더 고맙지."

 넌 또 왜 그걸 받아치는 건데?

 "흠! 그럼 일단 형식적이지만 오디션을 볼까?"

 

 책상도 없이 사무소 안에서 낡아빠진 임시 의자로 만든 오디션장. 구두 계약도 이것보단 격식 있을 것이다.

 "그럼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냥 형식상 하는 오디션이라고. 그렇게 진지하게 임할 필요 없잖아, 시라기쿠.

 "네~1번, 시오미 슈코입니다."

 "시오미 씨. 아이돌 지원 동기는 무엇입니까?"

 "음~예전에는 집에서 화과자 가게 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게 너무 재미 없었어. 그래서 아버지랑 싸우고 난 뒤 홧김에 가출해 버렸거든. 그렇게 되는 대로 떠돌고 있다가 며칠 전 어떤 손님이 주고 간 명함을 보고 될 되로 되란 식으로 지원했어."

 "지원 동기는 스카웃 권유로군요."

 다르지 않아? 아니, 본질적으로는 같은 건가? 머리 속이 복잡해진다.

 "아이돌이나 연예계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아이돌이라...가게 보다가 심심하면 가끔씩 가요 틀고 듣기는 하는데?"

 "평소 음악에 관심이 깊어 대중가요를 비교, 분석하여..."

 "하아...어떻게 해석하면 그렇게 되는 거냐."

 "그럼 마지막 질문입니다. 연예계는 분명 눈부신 곳이지만 그만큼 혹독하고 냉정한 곳입니다. 인기가 없으면 가차없이 버려지고 간신히 얻은 인기도 어느새 다른 라이벌들에게 밀리고 짓밟힐 수 있습니다. 레슨 역시 엄격합니다. 루머나 악담, 비방도 많이 들을 것입니다. 그래도 정말 이 길을 가겠습니까? 찰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자신을 처참히 망가뜨릴 수 있습니까?"

 시라기쿠의 마지막 질문은 너무나도 잔혹했다. 그렇기에 나는 후회했다. 분명 연예계는 심심하다고 데뷔할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였다. 그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즉흥적으로 한 소녀를 이 길로 끌어들였다. 그녀의 각오 따윈 생각하지도 않은 채.

 그러나 시오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나의 우려를 쓸모없게 만들었다.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어. 그래서 오늘 여기 온 거야. 별 생각 없었다면 집을 나오자마자 바로 여기로 왔겠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많이 생각했어. 정말 내가 발을 담가도 될 곳인지, 별 다른 재능도, 비젼도, 노력할만한 끈기도 없는 내게 맞는 길인지 말이야. 하지만 역시 한 번 도전해보고 싶어. 물론 힘들겠지. 갈등도 많이 할 거야.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내 인생을 내가 결정하지 못하고 그저 부모님의 뜻대로 평범하고 재미없게 살아갈 바에야 차라리 가시투성이 길이라도 한 번 나 자신의 뜻대로 살아보고 싶어."

 어쩐지 안심했다. 시오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였다. 시오미의 대답을 들은 시라기쿠 역시 만족한 듯 싱긋 웃었다.

 "질문 따윈 필요 없었네요. 환영합니다. 시오미 슈코 양.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도 잘 부탁해."

 오디션은 훈훈하게 끝나는 듯 하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아직 질문 못 한 심사위원이 한 명 남았는데 말이야."

 "아, 그렇네요. 선배가 담당하실 테니 질문해 주세요."

 "좋아. 중요한 질문 하나만 할 테니 잘 대답해라."

 내가 진지하게 나오자 시라기쿠와 시오미 역시 긴장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는 결심을 굳혔다.

 "모나카, 만들 줄 아나?"

 "무, 뭐?!"

 "...선배?"

 "가만히 있어. 나 지금 엄청 진지해. 솔직하게 대답해. 모나카 만들 줄 아나?"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람이 당분 없이 움직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특히나 시오미는 화과자집 딸이다. 분명 그 집 특유의 레시피를 알고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작업 환경도 좋아질 것이고 결국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다.

 "음...파는 것만큼은 못하지만 대충 만들 줄은 아는데?"

 "잘 부탁하지."

 "선배?!!"

 이렇게 시오미 슈코는 우리 프로덕션에 소속된 최초의 아이돌이 되었다.

 

...

 

 "당분간은 바쁘겠구만..."

 집으로 돌아와 앞으로의 일정을 짜맞추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다. 담당 아이돌이 생긴 이상 열심히 하진 않더라도 철저하게 일해야 한다. 더군다나 시오미는 친가를 나온 상태다.

 시오미는 일단 시라기쿠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나이 스물에 아직 자취하지 않고 가족이랑 같이 산다는 게 다행이였다. 여자 동생들이 있다는 건 더 다행이였다.

 노트북을 덮고 방을 정리하고 있을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보자마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여보세요?"

 "레이냐? 나다."

 숙부님...

 "잘 지내셨습니까? 숙부님."

 "음, 그래. 별 일 없다. 너는 어떠냐? 아직도 그 아이돌 프로듀서니 뭐니 하는 얼빠진 일이나 하고 있냐?"

 "하하...이것도 일종의 스펙입니다. 조만간 번듯한 직장 얻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야지. 한 가정의 가장이 되야 할 남자라면 대기업에 들어가 높은 자리에 앉아야 어디 가서 고개 들고 다닐 수 있는 거다. 계집애들 뒤나 졸졸 따라다녀서 언제 성공할 거냔 말이다."

 "...카나데는 요즘 어때요?"

 "최근 도통 말을 듣지를 않아! 학업에도 관심이 없고 툭 하면 밤 늦게까지 싸돌아다니고! 언제 정신차리려는지...쯧."

 "하하...제가 다음에 한 소리 할 테니까 너무 열 내지 마세요."

 "그래. 부탁한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네 말이라면 잘 따랐으니까..."

 "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침대 위로 휴대전화를 내던졌다. 더 이상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일찍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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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판으로는 오랫만입니다.

그리 길지는 않을 작품이 될 듯 합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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