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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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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26, 2016 18:28에 작성됨.

카와즈님이 제공해주신 플롯을 바탕으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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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

 

긴 시행착오 끝에, 결정적인 장면 하나를 잡아내고 얻어낸 꽤 긴 휴식시간. 촬영용 의상 그대로 간이 의자에 앉은 치하야는 겨우 그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숙였다. 촬영장에 있는 내내 필요한 걸 제외하면 벙긋하지 않았었다.

 

"미, 미안하다니 그렇지 않아."

 

바로 옆 자리에 앉아있는 하루카는 손사래를 쳤다. 평소보다 좀 늦어지고 비용이 많이 들고 불편하긴 했어도, 치하야가 그걸로 근심을 좀 덜어낼 수 있다면 괜찮은 일이었다.

 

"....."

 

상대의 얼굴에는 여전히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치하야쨩은 내가 걱정되어서 그런 말을 해준 거니까. 오히려 감사해야할 일이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아침이 되어 사무소에 도착한 치하야.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사무소 소파 한구석에 털썩 주저앉았었다. 푹 숙인 고개, 이따금 비틀거리는 신체. 매고있는 크로스백을 다른 데 둘 생각도 못하고, 힘없이 허리를 구부렸다. 육체적인 피로도 피로지만,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몰려있다는 증거.

 

곧바로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달라붙어 사정을 물었고, 치하야는 느릿느릿하게 악몽을 풀어냈다. 보다 직접적이고 소름끼치는 내용에 모두가 긴장하는 가운데, 다른 날보다 조금 늦은 하루카가 조심스럽게 문 틈 사이로 모습을 보였다.

 

사무소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하는 하루카. 그러다 뒤로 넘어질 것만 같다. 사람들은 더욱 깜짝 놀라 그녀를 에워싼다. 갑자기 여러 명이 들이닥쳐 정신없어하는 사이, 사방에서 조심하라는 말이 우르르 쏟아진다. 으, 응. 알았어. 대답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하루카는 멍하니 서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치하야가 두려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시선을 보냈다.

 

치하야쨩, 이게 대체 무슨 일.....하루카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프로듀서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오더니, 두 사람을 잡아끌었다. 날씨 때문에 일정이 조금 앞당겨져 서둘러야한다. 모두와 차분히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 세 사람은 야외 촬영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스탭분들과 상의, 촬영과 재개를 반복하며 시간이 흐른 끝에 지금에 이른 것이다.

 

"아니야, 충분히 고마운 일이야. "

 

치하야는 뭔가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꿈을 꾼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마 한 밤중에 전화를 걸어 특별히 요구한 이유. 그리고 아침에 누구를 막론하고 걱정의 눈빛을 보냈던 까닭이겠지.

 

"괜찮다면 알려줄 수 없을까? 무슨 꿈을 꿨는지."

 

지금까지 정확한 꿈의 내용을 듣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는 듯 보였다. 하루카는 고개 숙인 치하야의 옆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던, 조금씩 떨리는 눈동자가 느릿하게 그 쪽을 돌아봐주었다.

 

".....전철이 다리 위를 달리다 그만 추락하는 꿈이었어."

 

"엣!?"

 

치하야는 이어서 자기의 생각까지 입에 담았다. 지금까지 봤던 꿈들은 사실 다 연관이 되어있을 지도 모른다. 가장 처음부터 최근의 것을 조합해보면 765 사무소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누군가 전철 사고를 당해 죽는다는 내용이 된다고. 앞뒤가 들어맞는, 꽤 그럴 듯한 것이라서 하루카는 바짝 긴장했다.

 

"하루카."

 

"응."

 

"나는 네가.....그 누군가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모두도 같은 생각이고."

 

겨우 시선을 맞춰줬던 치하야는, 고개를 반대방향으로 돌리며 하고 싶지 않았던 말을 더듬더듬 내뱉었다.

 

"그, 그런....."

 

치하야의 가정대로라면 자기자신은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말도 안돼.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이 아이는 그런 질 나쁜 농담을 하지 않는다.

 

"꾸, 꿈은 꿈일 뿐이라고.....생각해."

 

하루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치하야는 그 쪽을 슬쩍 곁눈질 했다.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악몽. 그것이 현실이 되지 않으리라는 법 또한 없었다.

 

".....싫어."

 

"치하야쨩?"

 

하루카의 두 손에 다른 이의 것이 겹쳐졌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꽉 움켜쥐는 하얀 손.

 

"하루카."

 

바보 같은 소리일지는 몰라도 그 때 했던 요구, 쭉 들어줬으면 해. 위험하니까. 네가 떠나는 걸 원하지 않아. 죽지마. 내게 떨어지지 마. 두고 가지 말아줘. 혼자 저 멀리 가면 안 돼.

 

속에 담아두고 있던 말은 참 많았다. 목에 걸려서 잘 나오지 않는다.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걱정 마. 어디에도 가지 않아. 나는 언제나 치하야쨩의 곁에 있어줄테니까. 치하야를 악몽에서 끌어내던 그 날, 깨어나고도 한참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꺼냈던 말들.

 

지금 다시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낸 두 사람은 구체적인 대화가 아니라도 서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치하야는 하루카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거기에는 절박함이 담겨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 위험한 상황에 처한 너를 그저, 지켜보고만 있는 건......절대로 싫어!

 

"있지, 치하야쨩."

 

"응?"

 

"혹시 내가 엄청 걱정되거나 한다면 전화를 걸어보는 건 어때? 나, 다른 건 몰라도 치하야쨩의 전화라면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힘내볼테니까."

 

하루카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그녀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거두지 못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하니까. 대신에, 혹시라도 치하야쨩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할 때는 이쪽에서도 슬~쩍 전화를 걸어보거나 해볼테니까, 그 때는 좀 받아줬으면 좋겠어."

 

하루카가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치하야는 잠깐 넋을 놓고 그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응."

 

순간 현실에 존재할 모든 장애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흠칫했지만 이미 나온 걸 도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갑자기 하루카가 손을 빼더니, 앞으로 내밀었다. 무슨 의미일까. 치하야가 물끄러미 비어있는 손바닥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휴대전화, 라는 요구품목이 돌아왔다.

 

갑자기 왜?

 

치하야는 멈칫하다 원하는대로 턱 올려줬다. 장년 세대도 사용하지 않을 법한, 마치 무전기를 연상하게끔 하는 흑백 전화기 대신 한 손에 들어오는 사이즈의 짙은 남색 폴더폰. 최근에 리츠코의 권유로 바꾼 것이다.

 

전에 있던 기종에 익숙해져 있는 하루카는 신기하다는 듯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잠깐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됐다!"

 

꾹꾹, 방향 버튼과 확인 버튼을 이리저리 누른 뒤 약 5분 정도 지났을까. 하루카는 치하야에게 휴대전화를 들어보였다. 음악이 흘렀다. 들고 있는 사람이 직접 부른 노래가. 그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에헤헷, 벨소리를 바꿔봤는데 어때? 앞으로 내가 전화를 걸면, 이 노래가 나오게 될거야."

 

휴대폰을 바꾸면서 새로 생긴 기능에는 어두웠던 치하야로서는 좋다 싫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그걸 불만이라고 받아들인 하루카는 멋쩍은 듯 웃었다.

 

"아하하, 그, 좀 별로.....였을까?"

 

"아니.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해서."

 

"엣, 이렇게도 할 수 있는 거 몰랐어?"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렇게 한거야?"

 

"음- 이러면 누가 전화를 했는지 알 수 있어서 좋잖아. 그, 무음으로 해두거나 한다면 아무 의미 없겠지만."

 

혹시 주제넘은 짓을 해버린 게 아닐까. 하루카는 슬슬 치하야의 눈치를 봤다. 이번에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다는 의미다. 그러고는 손을 내밀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것을 들려주려고 했다.

 

"아니."

 

그녀가 바라는 건 붉은 쪽이었다. 하루카는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묻는다.

 

"왜?"

 

"하루카가 해준 것처럼, 똑같이 해보려고."

 

치하야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방법을 모른다. 하루카는 웃음을 대신 들려주었다.

 

"괜찮아. 이미 해놨거든."

 

"그래?"

 

"한 번 전화 걸어볼래?"

 

다시 내밀어진 남색 전화기. 치하야는 순순히 그 지시를 따랐다. 전화를 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근 거리에서 진중한 전주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랑새다. 하루카는 일부러 그 전화를 받아 귓가에 대고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그러고는 곁에 있는 사람도 같은 행동을 취해주길 은근슬쩍 바라고 있다. 치하야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 기대에 맞춰주었다.

 

".....여보세요."

 

"치하야쨩?"

 

"응."

 

"이렇게 전화를 해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치?"

 

"후후, 그렇네."

 

근처에 있다는 것도 깜빡 잊었다는 듯, 하루카는 전화기를 꼭 붙들었다. 첨단기기를 가지고 실전화기 놀이를 하는 꼴이다. 치하야도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뭔가 이야기할 만한 거 없을까?"

 

"글쎄. 굳이 이런 걸 통해서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전화가 통하는 건 확인했다. 벨소리도 확인했다. 이제 폴더를 닫아버리려는 치하야를 하루카가 급히 제지했다.

 

"정말 치하야쨩은 로망이라는 게 없다니까."

 

".....없어서 미안하네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앗 하는 사이에 화살이 치하야 쪽으로 돌아왔다. 말없이 전화를 끊어버리거나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만 같다. 그녀는 한참 생각하다 한숨을 쉬고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전화, 받아줘서. 이런 게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다음에도 걸어도 될까?"

 

"물론."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이 통화를 종료하고는 마주 봤다. 나란히 해서 앉아있었는데도 그 동안은 서로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어떤 끈 같은 게 두 사람을 아주 단단히 묶고 있어, 존재를 실감할 수 있게 했다.

 

하루카는 환하게 웃어보였다. 치하야는 어중간한 웃음으로 답했다.

 

서로의 유대를 확인한 것은 기쁜 일, 이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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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사는 혼자 당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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