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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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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4-21, 2016 20:42에 작성됨.

카와즈님이 제공해주신 플롯을 바탕으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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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를 끝마친 치하야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꾼 꿈에서만 이야기해야할 것을 어느 순간부터는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고 말았다. 지금까지 꾹 참아왔던 것을 발산하고 나니 조금, 편해졌다. 꽉 차올랐던 불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었다.

 

"끙끙 앓고 있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지는 않아. 힘들면 말을 하라고!"

 

"맞아, 얼마든지 의지해도 괜찮다니까. 설마 못 미더워서 그런 거야?"

 

".....아니야, 그런 건."

 

치하야는 자기를 타박하는 두 사람에게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믿을 수 있는 동료다. 하지만, 그래도.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부담만 지울 수는 없다.

 

"그럼? 왜 그동안 가만히 있었는데-엥?"

 

"다들 바쁜데 이런 것까지 신경쓰게 해야하나, 싶어서."

 

주위를 둘러싼 기세에 눌려, 치하야는 모기만한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그러자 일동, 잠시간 침묵. 분위기 파악이 느린 치하야도 명확하게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감지했다.

 

"으아- 치하야.....너 내 말 듣기는 한거야?"

 

마코토가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는 끙끙 앓았다. 역시 못 미더워하는 게 틀림없어. 이럴 때는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줘야겠지.

 

"고민거리 하나 못 받아주고서야 어떻게 동료라고 할 수 있겠어."

 

"과연 마코토 왕자님! 초 - 멋졍!"

 

기대했던 사람의 대답 대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야! 아니, 받아주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니라.....왕자가 아니라고!"

 

"....."

 

두 사람의 교환을 멀뚱멀뚱 지켜보고만 있는 치하야에게, 이오리가 성큼성큼 지척까지 걸어들어왔다. 앉아있는 치하야에게 거의 노려보다시피 시선을 보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고는 입을 열었다.

 

"쯧, 넌 너무 생각을 많이 하는 게 탈이야. 일단 말하고 봐. 받아주고 말고는 우리가 정할 테니까."

 

"으, 응."

 

"대답이 작아."

 

".....그래, 알았어."

 

여전히, 작아. 이오리는 아직도 불만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다음으로 마미가 여전히 어두운 치하야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저기 있지, 슬픔은 나눌 수록 줄어든대. 그러니까 아낌없이 팍팍 마미에게 나눠줘."

 

"그럼 그 쪽이 힘들지 않을까."

 

"괜차나- 마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되니까."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게 되겠지. 계속 갖고 있으면 무겁잖아. 그렇게 계속해서 나누다보면 언젠가는 별로 무겁지 않아질테고."

 

"그렇네. 마음의 짐은 다 같이 나누면 되는게 아닐까."

 

그렇게 말하며 하루카는 치하야의 한 쪽 손을 꼭 붙잡았다.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 따뜻함에, 그만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루카는 웃으면서 선언했다.

 

"자, 이걸로 하루카씨는 치하야쨩의 슬픔을 가져갔습니다."

 

"그럼 마미눈- 걱정을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돠-"

 

다른 한 손을 방금 전 기막한 논리의 제창자 마미가 덥썩 붙잡으며 킬킬 웃었다. 이오리도 지지 않겠다는 듯 치하야를 지목했다.

 

"아, 잠깐. 너희들만 그러기야! 그렇다면.....나, 미나세 이오리는 불안함을 가져가줄게. 고마운 줄 알라고."

 

"음- 나는 뭘 가져가는 게 좋을까."

 

앗, 하는 사이에 세 사람이 선수를 치고 말았다. 고민하는 마코토. 치하야는 꽤나 곤혹스러워졌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사양말고 줘."

 

".....말이 반대로 된 거 아니야?"

 

"하하, 그런가? 하여튼 네 안 좋은 것들은 싹 받아갈게."

 

당사자가 동의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을 가져갔다고 주장해대는 기묘한 상황. 그것도 보통 사람이라면 가지고 싶지 않아하는 것들을 탐내고 있다.

 

"얘들도 참, 너무한 거 아니니? 나도 있는데."

 

"아- 맞아. 그러고보니 코토리도 있었네. 니히힛, 뭐하면 좀 나눠줄게."

 

그게 무척이나 이상해서, 치하야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푸, 푸훗.....후하핫."

 

"아, 치하야 언니가 웃었다."

 

"그, 그게.....이상하잖아."

 

이상했다. 방금 전만해도 남아있던 어두운 감정들이 사라져 있었다. 정말로 모두가 가져가버린 걸까? 그런데 그 모두도 같이 웃었다. 무척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아니, 전혀."

 

하루카는 꼭 잡고 있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사무소에 있는 전원이 키득거리고 있었을 때.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누군가 이리로 돌아온 것이다.

 

"모두, 안녕. 어?"

 

"응? 뭐야? 다들 왜 저기 모여있는 거야?"

 

미키가 프로듀서와 함께 사무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방송국에서 협의를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마코토군, 마빡이, 마미, 코토리, 하루카. 이 다섯 사람이 치하야씨를 한데 에워싸고 있다.

 

왜 그런 걸까. 이유는, 알 수 없다. 프로듀서가 잠깐 문 근처에 서있는 사이, 그녀는 풍성한 금발을 휘날리며, 모두가 모여있던 곳으로 곧장 뛰어들었다.

 

"치하야씨!"

 

"아, 미키. 어서 와."

 

미키의 시선이 정면을 똑바로 향했다. 조금 부담을 느낀 치하야는 슬쩍 눈길을 돌리지만, 초록색 눈동자는 집요하게 따라붙는다. 음- 미키는 콧소리를 내며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듯이 관찰하다가, 도저히 모르겠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이상하네- 무슨 일 있었어?"

 

".....조금."

 

같은 이야기를 또 하기에는 좀 그렇고, 또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치하야는 애매한 대답을 하며 살짝 웃었다. 미키는 아리쏭하다는 듯 자꾸만 고개를 왔다갔다거렸다.

 

"실은, 치하야쨩.....꿈자리가 뒤숭숭했던 모양이야."

 

"맞아맞아. 아까만 해도 또 악몽을 꾼 것 가타. 치하야 언니, 엄청 괴로워해서-"

 

보다 못한 다른 동료들이 보충 설명에 들어갔다.

 

"에, 정말!? 치하야씨!"

 

두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며 깜짝 놀라는 미키. 걱정하는 말보다도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꺄앗!?"

 

"이젠 미키가 왔으니 괜찮을거야!"

 

"응, 괜찮아. 괜찮으니까, 그만 놔줘. 괴로우니까."

 

좀 전에는 치하야가 하루카를 껴안고 놔주질 않더니, 이제는 미키가 치하야에게 같은 짓을 하고 있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묘하게 연결되는 상황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기도 한다.

 

"저기, 미안한데.....설명 좀 해주지 않겠어?"

 

아무 것도 모르는 프로듀서는 뒷통수를 긁적거리며 뻘쭘하게 서 있을 뿐. 어느 순간부터 한 발 물러선 체 관망하고 있던 코토리가 그에게 다가가 슬쩍 귓띔을 해주었다.

 

"자세한 건 본인에게 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끙....그렇습니까."

 

그렇게, 느지막한 오후 벌어졌던 소동은 겨우 막을 내렸다.

 

.....

 

시간이 꽤 지나서 하늘이 완전히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치하야에게 주어진 마지막 일이 끝을 맺었다.

 

"하아, 그랬구나."

 

촬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둘이서 같이 스튜디오 계단을 내려오는 길. 오고 가고 하면서 자세한 사정을 듣게 된 프로듀서는 미지근한 미소를 띄웠다.

 

자기 없는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줄이야. 어찌어찌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처음 상태가 이상했을 때부터 미리 더 신경써줘야하지 않았을까 미안해지기도 하고. 치하야가 그 동안 숨겨왔다는 게 화가 좀 나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복잡미묘한 기분.

 

"네. 죄송합니다."

 

치하야는 면목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이래서야 나무라는 것 같잖아. 프로듀서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그러지 않아도 괜찮음을 표시했다.

 

"아, 아니! 사과할 것까지는 없어. 난 그냥,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고 진작에 말해줬으면- 해서."

 

"그게, 그러니까.....걱정을 끼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지 않아."

 

단언하는 프로듀서. 아주 조금의 여지도 없는 대답에 치하야는 머뭇거리면서도 두번째 이유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 만약에 프로듀서가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생각해서, 그만."

 

"음.....그건 그렇네."

 

방금 보여줬던 단호함이 무색하게, 프로듀서는 슬쩍 한 발자국 뒤로 뺀다. 하지만 아예 저 멀리 물러서지 않았다. 치하야는 그런 그를 향해 살짝 웃어보였다.

 

"네. 하지만 앞으로는 말해야겠어요. 저는 그렇게 참을성 있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모든 걸 밝히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말없이 끌어안은 체 쭉 괴로운 것보다는 훨씬 낫다. 뒤늦게나마 깨달았기에.

 

"내가 보기에는 너, 때론 좀 미련해보일 정도로 잘 참는 것 같지만......하여튼, 그게 좋지. 힘든 거 있으면 팍팍 말해. 내가 해줄 수 있는 만큼은 도와줄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응석부리지는 말고. 아, 치하야라면 받아줄 의향은 있다."

 

"농담이 심하시네요."

 

가로등이 빛을 발하고 있지만 그래도 쓸쓸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밤거리. 프로듀서와 치하야는 갈림길을 두고 헤어졌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응. 다음에 보자."

 

인사를 나눈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프로듀서가 갑자기 반대 방향을 돌아보고는 크게 외쳤다.

 

"아, 그렇지. 치하야!"

 

".....네?"

 

제 갈길을 가던 치하야가 우뚝, 멈춰선다. 무슨 일이길래 그런걸까. 약간 거슬릴 정도로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가 많이 벌어진지라 대략적인 형상만 보인다.

 

"오늘밤은, 아니 앞으로는 부디 좋은 꿈을 꾸렴!"

 

치하야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 흐릿한 모습조차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대답, 해줄 걸 그랬나. 하지만, 자기 의지로 할 수 없는 일을 요구당하고 만 것이다. 네! 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리, 라고 말하는 것도 좀 그렇다. 프로듀서, 굉장히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대답은 할 수 없다.

 

".....돌아가자."

 

봄이 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으슬으슬한 밤 날씨. 치하야는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 몸을 녹이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스쳐지나간 끝에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개찰구를 통과해 조금 한산해진 전철에 몸을 맡긴다.

 

이따금 덜컹거리는 객실 안. 멍하니 차창 너머의 풍경을 응시하던 치하야는 휴대전화를 뒤늦게서야 확인해봤다.

 

- 치하야! 너 악몽을 꿨다면서. 그거 큰일이네. 혹시 또 그런 꿈을 꾸거나 하면 우리집에 묵으러 와. 자신이 확~실하게 깨워줄테니까. 언제든지 환영이야!

 

- 코토리씨에게 이야기 들었어. 나 참, 진작에 말하지 그랬니. 악몽이라.....한 번 베개를 바꿔보거나 하는 건 어때? 그런 사소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 너무 걱정하지마. 꿈은 반대로 이루어진대. 그러니까, 음- 아마 언젠가는 하루룽이 치하야 언뉘에게 철썩 달라붙는 일이 생길 거라GU★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조을꺼야! - 이상 모두의 여동생 후타미 아미가 보내드렸습니다! -

 

- 악몽이라면 저도 몇 번 꿔본 적 있는데 정말 무서웠어요. 동생들이 옆에 없었으면 그만 울어버렸을 정도로....치하야씨도 무서웠겠죠? 그럴 때는 참지말고 저하고, 모두와 이야기해주세요! 그러면 무섭지 않을테니까요!

 

.....메일함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잠깐 무음으로 해놓은 사이 이렇게나 쌓였을 줄은. 각자 얼마 안되는 시간을 쪼개가며 보낸 게 틀림없었다. 조용히 넘어가고자 했던 건데 오히려 더 크게 일을 벌리고 만 게 아닐까.

 

길이도, 내용도, 말투도 가지각색.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똑같다. 그리고 그녀가 좋은 꿈을 꾸길 바라고 있다. 그만 풋, 하고 웃을 뻔 했다.

 

- 만약 또 그런 때가 온다면.....부탁해.

 

- 조언 고마워. 한 번 시도해볼게.

 

- 후훗, 들어준다면 고맙겠네.

 

- 마음의 준비라니.....그건 또 무슨 소리니. 마미에게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전해주렴.

 

치하야는 버튼을 힘주어 눌러가며 차례차례 답장을 보냈다. 유일하게 메일을 보내지 않았던 프로듀서에게는 뒤늦게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라고 애매한 대답을 전송했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으로 하루카가 보낸 걸 확인했다.

 

- 잘 자, 치하야쨩. 오늘 밤부터라도 좋은 꿈을 꿀 수 있기를. 내일은 서로 웃는 얼굴로 봤으면 좋겠다. 아, 그 혹시 또 안좋은 꿈을 꾸게 된다면.....그 때는 언제든지 연락해줘. 한밤 중이라도 괜찮으니까, 꼭이야!

 

고민을 거듭하다, 다음과 같은 답장을 전송.

 

- 응, 알았어. 고마워 하루카.....정말로.

 

이렇게 되면 오기로라도 그런 꿈을 보고 싶어진다. 치하야는 다시 한 번 메일을 확인하고는 슬쩍 입가를 느슨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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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이걸로 엔드 해도 될 것 같지만 더 남았습니다 와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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