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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바깥으로 가고 싶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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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30, 2016 14:16에 작성됨.

시죠 타카네에게는 사명이 있다.

 

다른 누구보다도 빛나야 한다. 다른 누구에게도 져서도 안된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두를 위해 노래를 불러야한다.

 

자신은, 그들의 희망이 되어야한다.

 

이것이 그녀의 사명.

 

그래서 방해되는 것들을 잘라나갔다. 걱정, 의심, 외로움, 슬픔, 연심, 웃음, 망설임, 두려움.....연약하고 어리석은 마음들이 발 밑에 조각조각 떨어져나갔다. 타카네는 잠시 그것들에게 아쉬운 눈길을 두다가 과감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나아갔다. 한 치의 흔들림도 용서되지 않는다는 듯, 올곧게 발을 옮겼다.

 

사명은 이루어져야한다.

 

사명을 가진 이는 그것을 이뤄내야만 한다.

 

언젠가 사명이 이루어지는 그 날까지, 계속.

 

하지만 은빛 소녀는 그보다 조금 더 먼 곳을 향해 붉은 눈을 두었다.

 

.....

 

함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기나긴 여정. 하지만 그녀는 묵묵히 길을 걷는다. 곁에 누구도 두지 않은 체 외로운 여행을 이어나간다. 적어도 여기에 있어서는 남들을 끌어들이면 안된다. 혹여나 도움이 필요하다 한다면 최저한의 것만 받고, 그만큼 되돌려준다.

 

그녀에게 있어서 인간 관계는 '주고 받는다' 로 끝내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결코 섞이는 일 없이, 붙잡거나 붙잡히는 일도 없이. 어떤 고행이 있다 해도 끝에는 버텨내고, 쭈욱 앞을 향해 전진해왔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왼발을 바닥에 딛는 행동을 마지막으로 해서, 타카네는 우뚝 자리에서 멈춰섰다. 그녀가 품고 있는 사명은 한줄기 빛이 되어 변함없이 계속 나아갈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앞으로. 헤메지 말고 앞으로. 그녀에게 내려진 계시다. 가라앉은 두 눈이 가만히 지시를 따랐다.

 

하지만, 정작 타카네의 의식은 다른 쪽에 향해있다.

 

분명 빛이 자리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개일 일 없는 마음 속의 그늘. 한바탕 휘몰아치다 잦아들기를 반복하는, 이것이다 딱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의 파편들이 마구 뒤얽힌 소용돌이. 그것이 지나갈 때마다 깔끔하게 정제된 심상에는 거친 상처가 생긴다. 한바탕 긁어놓는 탓이다. 타카네는 고개를 푹 숙인 체 가슴을 부여잡았다.

 

두근, 두근, 두근

 

유별나게 맥박치는 소리가 오른손을 타고 찌르르 전해진다.

 

"......"

 

그녀의 도톰한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소리없는 움직임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스스로도 알지도 못하면서 계속 입모양을 만들어내다가, 불쾌해졌다는 듯 입을 꼭 앙다물었다. 진정되지 않는 고동. 오른손에 힘이 더욱 강하게 실렸다.

 

- 지쳤어.

 

- 조금은 휴식이 필요해.

 

- 혼자서는 무리야.

 

- 도와줘.

 

- 언제까지 이 길을 계속 걸어야하는 거지? 끝이란 존재하고 있는 걸까?

 

흐트러진 마음 속 풍경에는 원하지 않는 것들이 자라나고 있다. 예전에 잘라냈다 생각했던 약한 마음들이다. 타카네는 흘러나오는 모든 어리석은 소리를 짓눌러버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후우."

 

다시 정적을 되찾고나서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꽤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아직도 저릿한 품 속에서 서서히 떨리는 손을 떼어낸 타카네는 주변을 빙 둘러다본다. 빛이 제시하지 않는 구역이다.

 

"타카네쨩?"

 

그곳에는 상냥한 어둠이 존재한다.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무표정의 막이 깨져버렸음을 뒤늦게 감지한 타카네는 엉터리 속임수를 펼쳐놓는다.

 

"무슨 일이신지요."

 

"안색이 좀 나빠보이는데.....괜찮니?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어?"

 

"아프거나 하진 않습니다."

 

혹여나 붙잡히는 일이 없도록. 타카네는 모양만 그럴 듯한 웃음을 지었다. 어둠, 미우라 아즈사는 한참 거짓된 미소를 바라보더니 타카네에게 슬쩍 다가섰다.

 

"혹시 무슨 일이 있다거나 그러면 꼭 말해주렴."

 

".....모처럼 신경써주신 점은 감사를 표합니다만 특별히 이상 있는 부분은 없답니다. 부디 안심해주시길."

 

괴로워하는 마음과는 다르게, 그녀는 완벽한 시죠 타카네를 연기했다. 이걸로 넘어가줘야 할텐데. 저도 모르게 조금씩 끌려가는 마음을 붙들어놓으려고 애쓰면서, 타카네는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하게 뒤집어쓴 가면이 깨져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럼 다행이긴 한데....."

 

다행히 그러기 전에 아즈사가 떨어져나간다. 타카네는 속으로 안도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이 쪽에 시선을 보내는 또 다른 어둠들이 존재했지만, 아즈사가 그쪽으로 가고나서는 하나둘씩 사그라들었다. 시선이 사라지고나서야 타카네는 그 쪽을 응시했다.

 

저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다. 타카네는 그들에게 호의를 가졌다면 가졌지 싫어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그녀의 개인적인 불호와는 별개로 필요 이상 다가가서는 안되는 것일 뿐이다.

 

타카네는 조용히,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끔 기척을 죽여가며 장소를 옮겼다. 계단을 조심스럽게 올라, 굳게 닫힌 문을 살며시 연 끝에 도달한 작은 사무소의 옥상. 그녀는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파란 하늘에는 아주 희미하게나마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나도 빛나지 않는다. 금방이라도 파란색에 묻혀 사라질 것만 같다. 그 와중에 구멍이 흉하게 곳곳에 난 표면은 다른 때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마치, 자기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아 타카네는 쓴웃음을 지었다.

 

- 무엇을 위해 이러고 있는 거야?

 

억눌렀음이 틀림없었던 군소리가 와글거리기 시작한다. 타카네는 달 보는 것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엄격한 빛의 한 가운데 서 있다.

 

- 꼭 이렇게까지 해서 사명을 이뤄야하는 걸까?

 

주변에는 그와 대치되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마음 속의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 빛의 바깥으로 가고 싶었을 뿐. '

 

시죠 타카네의 궁극적인 목적은 거기에 있었다. 사명을 이루고 난 뒤에 과연 무엇이 존재할까. 알 수 없다. 사명을 이루기나 할 수 있는 걸까.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믿는다. 원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사명 그 이후의 세계를.

 

설령 그 곳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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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글쓴이의 중2력 폭발. 풍화를 바탕으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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