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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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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3-30, 2016 02:08에 작성됨.

 

 

'방송실'이라 적힌 두꺼운 방음문을 열자, 익숙한 스태프들이 반가운 얼굴로 인사했다.

"수고하십니다."

가볍게 목례한 뒤 사전에 들었던 대로 방음창 너머의 녹음실로 들어가 마이크와 헤드셋, 그리고 대본이 놓여 있는 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나와는 인연이 없는 자리. 하지만, 지금만큼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

대본 위에 놓여진 헤드셋을 쓰고 고개를 들어 방음창 너머를 바라보자, 싱글벙글 웃고 있던 스태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OK사인을 보내왔다.

세 개 펼쳐진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모두 접히고, 스태프 중 한 명이 슬레이트를 닫자 기다렸다는 듯 헤드셋에서 노래의 간주 부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CG프로덕션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 '부탁해! 신데렐라'

인트로는 대략 20초 정도. 그 사이에 나는 살짝 목을 가다듬으며 대본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오프닝 토크> <자기소개> 이후는 자유.]

"......집에 가고 싶다."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저의 귀중한 점심시간을 싱글벙글 웃으며 과소비하는 건전한 사내 방송.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의 진행을 맡은 아이돌 부서 프로듀서 P입니다.

우선은 오프닝 토크입니다.

최근 사내 모처에 건의사항을 수집하는 소원함이 설치되었죠.

3회에 걸쳐 건의사항을 수집한 결과, 놀랍게도 가장 많이 나온 건의사항이 바로 점심시간을 이용한 간단한 라디오 방송을 해달라는 건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진행자가 저인지 모르겠......네? 제 이름이 제일 많이 나왔다구요? 왜죠?


이상, 오프닝 토크였습니다.

첫 회를 기념하는 오프닝은 역시 이거죠. CG프로덕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부탁해! 신데렐라"입니다. 그럼 부디, 즐겨주시길.

 


*******

 

약간 긴장한 덕분에 땀이 꽤나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안 그래도 땀이 많은 체질인 탓에 이미 셔츠의 등 쪽은 축축해져 있었다.

오프닝이 흘러나오는 동안 잠시 헤드셋을 벗고 땀을 닦으며 옆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후는 자유'라고 적힌 새하얀 대본을 보며 이 다음은 뭘 해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니 똑똑, 하고 방음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새하얀 보드에 10초 후 오프닝이 끝난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서둘러 헤드셋을 쓰고, 옆으로 밀어 놓은 마이크를 다시 끌고 왔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힘차게 슬레이트가 닫혔다.

 

*******

 

빛나는 별이 되기를 바라는 소녀들의 노래. '부탁해! 신데렐라'.

우리 부서의 왈가닥 아가씨들도 언젠가는 반짝이는 유리 구두를 신을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다음은 [P의 혼잣말]. 첫 방송이니만큼, 이번 시간에는 퍼스널리티인 제 소개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여러분의 귀중한 점심시간을 쓸데없이 잡아먹을 방송,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의 퍼스널리티를 맡게 된 프로듀서 P입니다.

나이는 29살. 도쿄에서 태어났고, 남직원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취미는 책읽기랑 게임입니다만, 요새는 그냥 시간이 비면 계속 잠만 자네요. 수면부족인가봅니다.

부서는 아이돌 부서에 소속되어 있구요. 좌투우타....가 아니라, 양손잡이입니다만 글씨는 오른손으로 밖에 못 씁니다.

그래서 방이 몇 호냐구요? 그런 건 좀 비밀로 해주세요. 저도 프라이버시라는게 있어요.

흠흠, 현재는 아이돌 부서에서 프로듀스 일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전담 마크하는 사람도 몇몇 있긴 하지만.

담당이 누군지 알려 달라구요? 싫어요. 어차피 다 알잖아요.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에서는 청자 여러분의 의견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사내번호 xxxx번이나, 메일주소 oneoneone@1111로 질문이나 사연을 보내주세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범위 안이라면 최대한 성실하게 답해드립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라는 방송의 이름부터 좀 줄여볼까요.

누구네 센스인지 이름 참 못 짓네요. 네? 타카가키 씨 아이디어요?

......방금 한 말 취소할게요. 센스가 넘치는군요. 정말입니다. 방금은 실언이에요. 그러니까 거기 전화기 내려놓으세요. 진심입니다.

아무튼,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 좋은 약칭 응모받습니다.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조금 더 제 이야기를 해달라고요?

음...... 그럼 제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야기를 해 볼까요.

지금 제 주위엔 대학교까지 졸업하신 분들이 많은데, 저는 고등학교까지만 나왔어요.

내 입으로 말하면 믿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4년 정도. 그러니까 23살까지는 프로 스포츠 선수를 했습니다.

무슨 스포츠냐구요? 야구요.

아버지 손 잡고 미국으로 따라간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시작했으니, 거의 12년정도 했군요. 제 인생의 3/7이네요.

재능은 있었고, 운도 좋았던 편이라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바로 선수 지명을 받았고, 마이너리그에서 1년 반 정도 있다 어쩌다 보니 메이저까지 올라가게 됬습니다.

그 때가 20살 생일 언저리였을거에요. 프로 선수에게는 꿈의 무대라는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서. 계약이 끝날 때까지 그 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왔어요. 아니 쫒겨났다고 해야 하나. 완전히 의욕을 잃어버렸거든요. 향상심도, 프로 정신도.

실력은 문제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마인드가 글러먹으니 도저히 할 맛이 안 나더군요.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으로 인해 하위 리그에 있는 열정이 넘치는 친구들이 빛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죄책감이 제일 컸어요. 팀 동료였던 몇몇은 아직도 연락을 하곤 하는데, 솔직히 연락 할때마다 제가 미안합니다.

아무튼, 그렇게 계약기간만 아슬아슬하게 다 채우고, 푼돈을 받고 선수단에서 쫒겨난 다음에는 무작정 헐리우드로 뛰어갔습니다.

그게 23살 되던 해 가을이었어요. 어릴 적부터 무대의 뒷면. 영화의 뒷면을 꼭 한번 보고 싶었거든요.

앞뒤 생각 안하고, 살던 집까지 정리해서 헐리우드로 간 다음엔 촬영장에서 소도구를 옮기고 무대를 세팅하는 노동을 하면서 무대의 뒷면에서 뛰어다녔습니다.

완전히 소원 성취했죠. 선수 생활 하면서 몸은 단련해 두었으니 골병이 든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지만, 강도가 보통은 아니더군요.

그렇게 닥치는대로 뛰어다니면서 일을 하다 보니까 어느샌가 저는 어떤 기획사의 매니저 보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가 25살 여름이었네요.

보조라고 해봐야 매니저의 똘마니A 수준이었지만. 아마 그때부터 제가 '프로듀서'라는 직업에 눈을 뜬 것 같아요.

원석을 갈고닦아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으로 탈바꿈시키는 미다스의 손. 신데렐라를 무도회장으로 이끄는 마법사.

음, 방금 표현 멋지죠? 메모 해 놔야지.

여차저차해서 회사를 나와서, 저는 일본으로 돌아와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저런 빠진 이야기가 많지만, 저도 부끄러운 과거라는 게 있으니까요.

[P의 혼잣말]은 여기까지. 다음은 청자와 함께하는 [안 보이니 괜찮지 않아?] 코너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방금 떠오른 사실이 있습니다.

제가 점심밥을 안 먹었고,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일주일에 적어도 한번은 점심을 굶어야 된다는 사실이죠.

밖에서 먹으면 되지 않냐고요? 그럴 시간이 있으면 이런 고민 안 했어요.

 

뭐 하루쯤이야 그냥 우유로 때워도 죽진 않겠죠.

[안 보이니 괜찮지 않아?]코너는 청취자 여러분의 사연과 메시지로 진행되는 코너입니다!

사내번호 xxxx번이나, 메일주소 oneoneone@1111로 메시지나 사연을 보내주세요.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해 드립니다.

오늘이 첫 방송이죠? 그래서 방송에 앞서서 메시지를 미리 받았습니다. 여기 어디에 집계해둔 게 있었는데.

아, 여기 있네요. 어디보자. 집계를 해 보니까. 총 36건의 메시지가 왔었는데요.

"P씨의 키 몸무게 쓰리사이즈가 알고 싶어요" 12건
"P군은 팬티 브리프야? 트렁크야?"가 6건
"P씨 방 비밀번호가 궁금해요" 18건

뭐야 이거 무서워.......


그래서 답변 할거냐구요? 제정신인가요.

세절기에 확실하게 처리했습니다. 오늘은 메시지 안 들어오면 빨리 끝내도 된다고 허락도 받......말씀드리는 순간 첫 메시지군요.

"푸른 역사를 새기는 자"님의 메시지. "쓰리사이즈 가르쳐줘"

죄송하지만 번호 잘못 입력하신것 같네요. 이건 패스하죠.

......패스가 없다니 퍼스널리티의 인권은 어디있습니까?

쓰리사이즈는 됐고 대신 키랑 몸무게는 가르쳐 드리죠.

흐읍. 192cm97kg!!! 이상입니다. 말이 빨라요? 아뇨저원래이렇게말하는데요이게평소속도에요.

진짭니다.

 

다음은 "애니 보는게 뭐가 나빠"님의 메시지입니다. "DIO 성대모사 해 주세요."

호오, 이건 좀 해볼만 하겠네요.

큼, 큼. 잠시, 목 좀 가다듬고.

"죠셉 죠스타! 네 이놈...... 보고 있구나?!"

어때요. 좀 비슷합니까? 비슷해요? 하하, 다행이네요.

제가 DIO를 어떻게 아냐고요? 당연히 알죠. 나이가 몇 갠데......

이거 제가 중학교 시절에 나왔어요. 그땐 참 없어서 못 볼 지경이었죠.

그런데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우사밍 성인인가......

 

마지막으로 "맨날 우는 물고기는 우럭......후훗"님의 메시지입니다. "좋아하는 술은 뭔가요?"

음....... 저는 술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하지만 궂이 고르자면 맥주가 좋습니다.

브랜드까지 특정해야 한다면 역시 독일 바이에른산이죠. 밀맥주가 달작지근한게 굉장히 맛있었습니다.


오늘의 청취자 코너는 여기까지입니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됬네요.

어느덧 점심시간도 다 지나갔습니다. 더불어 제 분량도 끝이 났군요. 20분간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방송.

오늘은 첫 방송이라 다소 짧지만, 다음부터는 여러분들의 애정어린 사연과 관심으로 더욱 볼륨 업! 해서 찾아올 것을 약속드리며

'저녁노을 프레젠트'로 작별을 알려드립니다. 지금까지 [프로듀서의 P는 퍼스널리티의 P!]의 퍼스널리티 P였습니다.

 

 

********

 

"휴우."

답답한 헤드셋을 벗으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송기재를 정리하고 있는 스태프들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P씨 진행 잘하는데? 진짜 처음 맞아?"

"진짜 처음입니다. 땀 흘린 것 좀 보세요."

"하하! 아무튼 고생했어요. 다음 주에 또 보자구!"

"네, 고생하셨습니다."

손수건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나는 두꺼운 방음문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복도의 바람이 땀으로 흠뻑 젖은 셔츠를 자비없이 휘젓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맹렬하게 진동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하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액정을 켰다.

[읽지 않은 메시지 30통]

"맙소사."

 

 

 

 

앞으로 자주 써먹을 P씨입니다.

캐릭터 소개를 하는 김에 라디오 진행자처럼 해보자! 싶어서 휘갈겨 봤는데 생각처럼은 잘 안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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